2024/03 26

고조부는 나의 4대조

■ 고조부는 나의 4대조 기제사를 합제사로? 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더니 나서기를 좋아하는 이 선생께서 뒷말에 생뚱맞게 “근거도 없는 고조=4대조를 이젠 접으시길.”이라며 아직도 삼론(자칭 성현설)으로 주장하는 모양입니다. 공자세가 대종세계 사이트에 공자가계의 계대 표기를 보고 글마다 근거자료라고 내 놓은 것을 보고 ‘고조부는 나의 4대조’라고 했더니 또 ‘기제사를 합제사로?’ 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더니 나서기를 좋아하는 이 선생께서 무슨 말인지 제사에 대하여 몇 말씀 해 놓고는 뒷말에 생뚱맞게 “근거도 없는 고조=4대조를 이젠 접으시길.”이라고 하였습니다. “고조=5세=5대=5세조=5대조‘라고 읽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조부는 나의 4대조’임을 한 번 더 설명 드리겠습니다. 문의..

카테고리 없음 2024.03.30

신라의 6성(六姓) - 9

■ 신라의 6성(六姓) - 9 ◈ 조선조에서의 경주이씨(慶州李氏) 출신 명신(名臣) 조선조에서 경주이씨(慶州李氏)들의 관계(官界) 진출은 중엽 이후 특히 두드러지는데, 익재(益齋) 이제현의 *7대손 ⇒ 6대손 되는 이공린(李公麟)의 ‘8별(鼈)의 집’에서부터 비롯된다. ('8별의 집'에 대한 얘기는 기회가 있으면 별도로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은 필자의 직계 조상이 아니기 때문에 생략하고, 경주이씨 전체의 벌열(閥閱)을 소개한다. 경주이씨 가문 중 벌열(閥閱)에 오른 가문으로 상신(相臣)과 공신(功臣)은 다음 표와 같다. ▲ 경주이씨 출신 조선조 상신(相臣) 성 명 재임왕조 직 함 이항복(李恒福) 선조조 영의정(領議政) 이태좌(李台佐) 영조조 좌의정(左議政) 이경억(李慶億) 현종조 좌의정(左議政) 이종성..

카테고리 없음 2024.03.29

신라의 6성(六姓) - 8

■ 신라의 6성(六姓) - 8 ◈ 필자의 직계선조(直系先祖) 필자의 직계 조상에서는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역임하신 판윤공(判尹公) 이지대(李之帶)와 그 후손 몇몇 분이 중앙직과 지방직에 등용되었을 뿐 이렇다 할 현직(顯職)에 나아간 사람이 없다. 왕권(王權)을 탈취하기 위하여 척족과 충신을 살해한 세조(世祖)의 정치행각에 항거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기 때문에 관계진출 자체를 금기시하거나 천여리의 산간오지(山間奧地)로 은둔했기 때문에 그만큼 기회가 없어서였을 것이다. 때문에 판윤공 이후에는 아드님이신 16대조 이점(李點)이 향직인 부사[(府使 ; 정3품의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종3품의 도호부사(都護府使)], 15대조인 이원림(李元林)이 군수(郡守 ; 종4품관), 14대조인 이광증(李光曾)이 찰방[察訪..

카테고리 없음 2024.03.28

신라의 6성(六姓) - 7

■ 신라의 6성(六姓) - 7 우리나라 주자학(朱子學)의 개척자인 백이정(白伊正)에게서 수학한 후 충렬왕 27년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15세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충선왕이 왕위를 물려주고 원(元)나라 연경(燕京)에 만권당(萬卷堂)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燕京)에 가서 원(元)나라의 학자인 요수(姚燧)ㆍ기맹부 등과 함께 고전(古典)을 연구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이듬해에는 선부의랑(選部議郞)을 거쳐 성균제주(成均祭酒)가 되었고, 1316년에는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에 승진하였다. 1319년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중국의 강남(江南)을 유람하고 이듬해에는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었다. 이후 원나라에 체재 중이었던 충선왕이 ‘빠이엔..

카테고리 없음 2024.03.27

신라의 6성(六姓) - 6

■ 신라의 6성(六姓) - 6 ◈ 경주이씨(慶州李氏) 출신 명신(名臣)과 벌열(閥閱) 위에서 소개한 분파 중에서 가장 융성한 분파는 조선조 당시 상서공파(尙書公派)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집, 필자의 파조(派祖)인 익재공파(益齋公派)의 익재 본인과 그 일문에 이어 조선조에서 일컬어지던 이른바 ‘8별(鼈)의 집’, 그리고 조선조의 명장 이완(李浣)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菊堂公派)를 들 수 있다. 경주이씨 상서공파(尙書公派) 백사(白沙) 이항복의 집에서는 조선조에서 영의정(領議政) 4명, 좌의정(左議政) 2명, 대제학(大提學) 2명이 나왔고, 익재공파는 고려조에서 익재공 이재현 자신을 비롯하여 문하시중(영의정) 4명, 조선조의 ‘8별의 집’에서 죄의정과 대제학 각 1명을 배출했으며, 국당공파(菊堂公派..

카테고리 없음 2024.03.26

신라의 6성(六姓) - 5

■ 신라의 6성(六姓) - 5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사분오열(四分五裂) 앞서 말한 대로 경주이씨(慶州李氏)는 고려 말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을 배출하면서 삼한(三韓)의 명족(名族)으로 위치를 굳히게 되었으나, *17~21세손 ⇒ 15 ~ 21세의 조상에서부터는 이들을 파시조(派始祖)로 하는 14개의 대파로 나뉘어 짐으로써 전체적인 결속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 14개의 대파로 분파되어 파별로 결속하게 된 것이다. *17세손인 ⇒ 16세인 이인정(李仁挺)의 후손이 평리공파(評理公派), *17세 이관(李琯)의 후손이 이암공파(怡庵公派),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 익재공파(益齋公派), 이지정(李之正)의 후손이 호군공파(護軍公派), 이천의 후손이 국당공파(菊堂公派), 이매(李邁)의 후손이 부정공파(副正公..

카테고리 없음 2024.03.25

신라의 6성(六姓) - 4

■ 신라의 6성(六姓) - 4 오늘날 경주이씨 자손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집성촌은 전라남도 영암군(靈岩郡) 영암읍(靈岩邑) 망호리(望湖里)이다. 이곳에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처음 자리 잡은 것은 4백여 년 전, 필자의 21대조이자 파시조(派始祖)이신 이제현(李齊賢)의 9대손인 이기(李琪)가 을묘사화(乙卯士禍)를 피해 이 마을로 오게 되면서부터이다. 현재 이 마을 1백여 가구가 경주이씨(慶州李氏) 자손들이다. 여기에서 경주이씨의 고려조 이후의 씨족사(氏族史)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영남지방의 경주에서 태어나 천년동안 경주에서 세거(世居)하던 경주이씨의 후손들은 신라(新羅)가 패망하면서부터 고려조의 왕도인 개경(開京)으로 강제 이주당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세거지(世居地)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

카테고리 없음 2024.03.23

신라의 6성(六姓) - 3

■ 신라의 6성(六姓) - 3 이렇게 관직의 길이 트인 경주이씨 후예들은 초인적 정진을 거듭하여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수대에 걸쳐 문하시중(門下侍中 ; 조선조의 영의정)에까지 진출하는 등 삼한(三韓)의 명문거족(名門巨族)이 되어 개경일원에서 세거하였다. 그러나 고려조 말부터 경주이씨의 세력이 약화되자 상대 당파의 모략으로 귀양을 가고 유배를 당하는 등 전국으로 분산되기 시작했다. 경주이씨 세거지의 분산과정을 개략적으로 살펴본다. 이하에서의 계대(系代)표시는 필자의 직계 조상일 경우 필자로부터의 상향대수를 나타내고, 방계 조상인 경우는 중시조로부터의 하향대수를 나타낸다. 경주이씨 독자들께서는 필자의 항렬이 ‘우(雨)'자라는 것과 시조(始祖)이신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의 *73대 손 ⇒ 원대손(遠代..

카테고리 없음 2024.03.22

신라의 6성(六姓) - 2

■ 신라의 6성(六姓) - 2 경주이씨 선현들의 행적과 부침(浮沈)의 역사를 시대별로 정리해 본다. 중시조의 관작이었던 소판(蘇判)은 신라의 성골(聖骨)이나 진골(眞骨) 귀족들만이 오를 수 있는 지방수령직으로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공도 소판(蘇判) 출신이었다. 신라는 9개의 주(州)로 나누어 지방을 다스렸는데 그 수장들의 관직이 소판이다. 당시의 9주는 명주(溟州), 양주(良州), 삭주(朔州), 한주(漢州), 상주(尙州), 강주(康州), 웅주(熊州), 무주(武州), 전주(全州) 등이었다.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시조가 신라를 창건한 개국공신이었고, 중시조의 관직이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만이 오를 수 있는 '소판(蘇判)'의 벼슬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시조이후 중시조 때까지도 대대로 왕족 ..

카테고리 없음 2024.03.21

신라의 6성(六姓) - 1

■ 신라의 6성(六姓) - 1 경주이씨(慶州李氏-月城李氏)의 유래와 역사 신라 6촌의 한 도읍이었던 진지촌의 내력을 기록하는 ‘외동에 관한 책’에 신라 6성에 대한 기사가 혹시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경주이씨’ 씨족을 대표하여 유래와 역사를 정리해서 게재합니다. 종친들께서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경주이씨 시조의 * 73대손 ⇒ 시조세수는 실전되어 알 수 없다. 원대손. 중시조의 37세손이 ㅇ 우 - 전설속의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始祖) 우리나라 대다수 이씨(李氏)의 조종(祖宗)으로 알려지고 있는 경주이씨는 신라 창건 당시의 6부(部) 촌장이자 화백회의의 의장이었던 알천양산촌장 이알평(李謁平 ; 경주이씨가 아닌 향우님들의 편의를 위해 경칭을 생략한다. 이하 다른 이도 같다)을 시조로 하는데, 시조의..

카테고리 없음 2024.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