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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6성(六姓) - 9

녹전 이이록 2024. 3. 29. 08:24

신라의 6(六姓) - 9

 

조선조에서의 경주이씨(慶州李氏) 출신 명신(名臣)

 

조선조에서 경주이씨(慶州李氏)들의 관계(官界) 진출은 중엽 이후 특히 두드러지는데, 익재(益齋) 이제현의 *7대손 6대손 되는 이공린(李公麟)‘8()의 집에서부터 비롯된다('8별의 집'에 대한 얘기는 기회가 있으면 별도로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은 필자의 직계 조상이 아니기 때문에 생략하고, 경주이씨 전체의 벌열(閥閱)을 소개한다.

 

경주이씨 가문 중 벌열(閥閱)에 오른 가문으로 상신(相臣)과 공신(功臣)은 다음 표와 같다.

 

경주이씨 출신 조선조 상신(相臣)

 

성 명                 재임왕조    직 함

 

이항복(李恒福선조조  영의정(領議政)

이태좌(李台佐영조조  좌의정(左議政)

이경억(李慶億현종조  좌의정(左議政)

이종성(李宗城영조조  영의정(領議政)

이완(李浣)        현종조  우의정(右議政)

이경일(李敬一) 순조조  좌의정(左議政)

이광좌(李光佐) 경종조  영의정(領議政)

이유원(李裕元) 고종조  영의정(領議政)

 

경주이씨 출신 조선조 공신(功臣)

 

성명             재임왕조                 공적 사항

 

이래(李來)   태종조 2차왕자난   2등공신(二次王子亂 二等功臣)

이승상(李升商) 태종조 2차왕자난 4등공신(二次王子亂 四等功臣)

이흥상(李興商) 단종조 계유정난 3등공신(癸酉靖難 三等功臣)

이양생(李陽生) 세조조 이시애난 토벌 3등공신(李施愛亂討伐 三等功臣)

이철견(李鐵堅) 성종조 성종즉위 4등공신(成宗卽位 四等功臣)

이극정(李克正) 중종조 중종반정 3등공신(中宗反正 三等功臣)

이손(李蓀) 중종조 중종반정 3등공신(中宗反正 三等功臣)

이항복(李恒福) 선조조 정여립옥사 3등공신(鄭汝立獄事三等功臣호성1등공신(扈聖一等功臣)

이사공(李士恭) 선조조 호성 1등공신(扈聖 三等功臣)

이정암(李庭馣) 선조조 임진왜란 2등공신(壬辰倭亂 二等功臣)

이수일(李守一) 인조조 이괄난 토벌 2등공신(李适亂討伐 二等功臣)

이탁남(李擢男) 인조조 이인거 모반적발 2등공신(李仁居謀叛摘發二等功臣)

 

역대 왕조(王朝)에서 필자의 분파를 비롯하여 기라성 같은 명현(名賢)과 충신들이 부지기수였지만 2천년의 문중 역사를 갖고 있는 경주이씨는 그 긴 역사와 80여개의 분파로 분산되어 응집력이 약화된 때문인지는 몰라도 대다수 종중(宗中)들이 문중에 대한 애착이 거의 소멸되어 종씨(宗氏)관계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는 추세다.

 

필자뿐만 아니라 모든 문중원(門中員)들이 마찬가지다.

 

그래서 객지에서 항렬이 같은 경주이씨를 만나도 타성받이보듯 할 뿐이다.

 

'월성이씨(月城李氏)''경주이씨' 사이가 특히 그렇다.

 

2,182(2008년 현재)의 긴 씨족역사를 지니고 있는 경주이씨는 세습왕조의 군왕을 배출한 일부 성씨를 제외하고는 신라 조(新羅朝) 이후 역대 왕조에서 공신(功臣)과 명현(名賢)의 반열을 그 어느 성씨보다 혁혁하게 이어 오기도 했었다.

 

그러나 일부 선조(先祖)의 경우 권력 지향적 변절(變節)과 반민족적 매국행위(賣國行爲)에 가담한 인사들도 있어 마음이 무거워 지고,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경주이씨 선대(先代)

 

조선 초기에 현직(顯職)에 오른 한 선조(후손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실명을 밝히지 않는다.

 

이하 다른 이의 경우도 같다.)의 경우 고려조에서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지냈으나, 조선 개국 후 이방원(李芳遠)을 도와 2차 왕자(王子)의 난()’을 평정, 태종(太宗) 즉위 후 좌명공신2(佐命功臣二等)으로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지고, 1407년 경연관(經筵官)을 거쳐 좌빈객(左賓客)을 지낸 후 1408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겸 판경승부사(判敬承府事)에 이르러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는 등 승승장구의 족적(足跡)을 남겼으나, 권력에 눈이 어두워 수많은 고려유신(高麗遺臣)들과 척족(戚族)까지 살해한 폭군의 정변(政變)에 스스로 가담하여 벼슬을 했다는 점에서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경절공 이래)

 

조선조 고종 당시 증광문과(增光文科)에 장원, 부교리(副校理), 부수찬(副修撰), 응교(應敎)등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검상(檢詳), 필선(弼善), 교수(敎授), 병조정랑(兵曹正郞), 우승지(右承旨) 등을 역임한 바 있는 한 어른도 1910(융희 4) 한일합방이 되자 일제(日帝)에 의해 남작(男爵)으로 임명되어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응원하였다. (이주영)

 

역시 고종조에서 외부대신(外部大臣), 법부대신(法部大臣) 등을 지낸 한 어른은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일제(日帝)에 의해 자작(子爵)으로 임명되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어용자문기관인 중추원고문(中樞院顧問)을 지냈다.

자랑이 아니라 너무나 치욕스럽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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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른은 조선말기 친일의 거두(巨頭)1886(고종 23) 외아문주사, 사헌부감찰, 전환국위원을 거쳐 9월 박정양(朴定陽)공사를 따라 겸임주차 미국공사관 서기관이 되고, 다시 주차 미국 서리전권대신으로 미국에 주재하였다.

 

1889년 귀국할 때는 우리나라 철도건설에 관심을 보이는 미국정부로부터 철도의 모형을 얻어오기도 했다.

 

이어 기기국사사(機器局司事), 웅천과 흥덕의 현감, 외아문참의 등을 거쳐 1895년 궁내부 회계원장이 되고, 주차일본국 특명전권공사로 일본에 주재 중에 일본정부로부터 훈일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받았다.

 

이 뒤에 중추원부의장, 귀족원경, 중추원의장 등을 역임하고 1899년 의정부찬정, 주차 일본국특명전권공사 겸 의정부찬정이 되었다.

 

1900년 일본으로부터 훈2등 태극장을 받았다.

 

1904년 외부대신이 되었는데, 재임기간에 충청도와 황해도 및 평안도의 어로권, 황무지개척권을 일제에 허용하고, 1차 한일협약 체결에 이어 메가다(目賀田種太郞)의 우리나라 재정고문 취임 알선, 일본헌병대에 경성치안권 부여, 그리고 일본에 통신원 이양과 연해하천의 항해무역권 부여 등 모든 이권(利權)을 일본에 넘기는데 앞장섬으로써 사실상 나라를 팔아넘기는 주역을 맡았다.

 

이들 공적으로 1905년 일본으로부터 훈1등 팔괘장을 받았고, 법부대신과 형법교정총재가 되면서 더욱 친일에 앞장섰다.

 

1907년에는 중추원고문이 되고, 한일합방 후에는 일본정부로부터 자작(子爵)의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을 지내는 등 침략자의 주구(走狗)가 되어 부귀를 누렸다.

 

그런데 이 어른은 필자와 같은 판윤공파(判尹公派 ; 입향조 한성판윤 이지대의 혈손)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더욱 마음을 무겁게 한다.

 

비록 직계선조는 아니라도 말이다.(이하영)

 

그의 아들도 '시종원경'을 지내며 부친의 작위를 습작(襲爵)했고, 일제를 축출하고 탄생한 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陸軍參謀總長)과 국방장관을 지낸 그의 손자도 친일인명사전(親日人名辭典)에 수록되어 있다. (이종찬)

 

침략의 원흉 일본 천황(天皇)에게 충성을 맹세한 일본 육군사관학교(陸軍士官學校 49) 출신 일본군 장교였기 때문이다.

그는 1937년 일본 육사 49기로 임관, 만주와 남양군도 등에서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며 소좌(少佐)까지 진급했었고, 해방 후에는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육군참모총장과 육군대학 총장을 지냈으며, 허정(許政) 과도정부에서는 국방부장관을 역임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비록 친일파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에 있어 다른 친일인사(親日人士)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그가 비록 일본군 소좌를 지내기는 했지만, 해방 후 조부와 부친, 자신의 친일행각(親日行脚)을 크게 참회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의 '부산파동(釜山波動)' 당시에는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명령을 거부했으며, 5·16 군사쿠데타 때는 혁명군(革命軍)에의 협력을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었다.

 

경주이씨의 친일인사는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지난 자유당 시절 종중의 중앙화수회(中央花樹會) 총재를 역임한 한 어른까지 친일혐의를 뒤집어쓰고 있으니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이시영. 이인. 이갑성. 이상철. 이병철. 이민우. 이종찬 친일 인명사전에 오른 분이 없다. 이갑성이 친일 의혹이 있었으나 면밀히 조사해 본바 전연 사실무근임이 밝혀짐.)

 

엄연한 친일행위(親日行爲)를 자행했다면, 관직(官職)도 종직(宗職)도 사절해야 경주이씨다운 일인데, 그것까지 빼앗듯 차지했다는 것이 더 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수양대군의 폭정에 비분강개하여 한성판윤(서울시장)의 관직(官職)조차 버리고 천 여리의 경주부로 낙향해 버린 입향조 판윤공(判尹公)의 우국충정을 털끝만큼이라도 닮았으면, 이런 짓들은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