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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6성(六姓) - 8

녹전 이이록 2024. 3. 28. 08:34

신라의 6(六姓) - 8

 

필자의 직계선조(直系先祖)

 

필자의 직계 조상에서는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역임하신 판윤공(判尹公) 이지대(李之帶)와 그 후손 몇몇 분이 중앙직과 지방직에 등용되었을 뿐 이렇다 할 현직(顯職)에 나아간 사람이 없다.

 

왕권(王權)을 탈취하기 위하여 척족과 충신을 살해한 세조(世祖)의 정치행각에 항거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기 때문에 관계진출 자체를 금기시하거나 천여리의 산간오지(山間奧地)로 은둔했기 때문에 그만큼 기회가 없어서였을 것이다.

 

때문에 판윤공 이후에는 아드님이신 16대조 이점(李點)이 향직인 부사[(府使 ; 3품의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3품의 도호부사(都護府使)], 15대조인 이원림(李元林)이 군수(郡守 ; 4품관), 14대조인 이광증(李光曾)이 찰방[察訪 ; 각 도의 역참(驛站)을 관장하던 종6품의 외관직(外官職)], 13대조 이승형(李升亨)이 진주병마절도사(晉州兵馬節度使 ; 병마절도사는 종2품 무관직), 12대조 이몽성(李夢星)이 공조참의(工曹參議 ; 참의는 정3품 문관직), 11대조 이후근(李厚根)이 음성훈도(陰城訓導 ; 훈도는 한양의 4학과 지방의 향교에서 교육을 담당한 교관)와 통정(通政 ; 3), 10대조 이이훈(李利薰)이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 9대조 이민화(李敏華)가 전연사봉사[典涓司奉事 ; 봉사는 돈녕부(敦寧府)와 각 시(((((((()에 설치된 종 8품의 관직]를 역임한 이후부터 필자의 직계에서는 9대가 흐른 지금까지 벼슬길에 들어서보지 못하고 있다.

 

필자의 직계선조들은 이렇듯 쇠락해 왔으나, 대신 방계(傍系)에서는 고종조(高宗朝)에서 외부대신과 법부대신(法部大臣)을 역임한 후손도 있었고, 그 후손의 자손 중에서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陸軍參謀總長)과 국방장관(國防長官)을 지낸 인사도 있었지만, 이들이 지낸 벼슬은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일제(日帝)의 벼슬이었고, 친일(親日)에 따른 보상적 관직이었다.

 

친일분자(親日分子)들을 척결하기 위한 반민특위(反民特委 :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협력하면서 악질적으로 반민족행위를 저지른 사람을 조사, 처벌하기 위해 1948년 제헌국회 내에 두었던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도 일제 출신 군인과 경찰, 행정관리들을 신생 대한민국의 군과 경찰, 정부관리로 기용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우유부단 덕분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필자의 경주지역 입향조(入鄕祖) 이신 판윤공(判尹公) 이지대(李之帶)의 프로필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판윤공은 고려 후기의 유명한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익재 이제현의 4대손이다.

 

1394(조선 태조 3) 경상도 수군만호(水軍萬戶)로 재임하면서 왜구(倭寇)가 탄 배를 나포한 공적으로 왕으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며, [*그 후 벼슬이 높아져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이르렀다.] 판윤공의 한성판윤직은 실직이 아니고 임시직이다.

 

판윤공(判尹公)1452(단종 즉위년)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인보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키는 등 폭정을 단행하고, 단종 3(1455) 조카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후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던 집현전 학사들(사육신 ; 死六臣)을 참살하자, 비분강개하여 관직(官職)을 버리고 경주부 외남면 남중리(慶州府 外南面 南中里 ;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斗西面) 구량리(仇良里) 860번지)로 낙향하였다.

 

이때 판윤공(判尹公)은 한성(漢城)에서 가져온 은행(銀杏)나무를 연못가에 심었는데, 이 은행나무가 1962123일 천연기념물 제64호로 지정된 두서면 은행나무이다.

 

전설대로라면 이 나무의 나이는 550년 정도인 셈이다.

높이 22m, 가슴 높이의 둘레가 12m에 이른다.

이 나무를 훼손하면 해를 입는다고 하고, 아들을 낳지 못한 부인들이 이 나무에다 정성껏 빌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도 전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신선하게 여겨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이 은행나무가 태풍에 가지가 찢어져 철제 지지대로 받쳐놓고 있다.

 

판윤공(判尹公)은 이때 은행나무를 심고 구량천이 마을 앞으로 흐르면 눌러 살고, 뒤편으로 흐르면 타지(他地)로 이거(移居) 한다는 방침을 정했는데, 이후 홍수로 마을 앞으로 흐르던 구량천의 수로가 마을 뒤로 바뀌자 지금의 경주시내로 이주하였고, 자신을 따라 낙향한 대소가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판윤공(判尹公)께서는 시조의 탄강지이자 명활산(明活山)이 소재하는 지금의 경주시(慶州市) 동천동으로 이주하신 듯하다.

 

판윤공의 묘소가 이들 지역에 걸쳐 있는 명활산(明活山)에 모셔져 있고, 시조의 탄강지가 바로 옆 동천동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필자의 선대들은 구량리와 30여리 떨어진 지금의 경주시 외동읍 방어리(防禦里)와 괘능리(掛陵里) 일원으로 이주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거의가 그곳을 떠나고 말았다.

 

조상 전래의 '월성이씨'들이 일제와 자유당 독재정권 시절에 걸쳐 신흥세력으로 발흥한 포악한 또 다른 '월성이씨' , 상민(常民)과 중인(中人) 출신의 이른바 똑똑하고 돈 많은 '경주이씨(慶州李氏)'들을 피해 정든 고향을 등진 경우가 많았다.

'월성이씨''경주이씨'의 관계는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