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신라의 6성(六姓) - 2

녹전 이이록 2024. 3. 21. 08:15

신라의 6(六姓) - 2

 

경주이씨 선현들의 행적과 부침(浮沈)의 역사를 시대별로 정리해 본다.

 

중시조의 관작이었던 소판(蘇判)은 신라의 성골(聖骨)이나 진골(眞骨) 귀족들만이 오를 수 있는 지방수령직으로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공도 소판(蘇判) 출신이었다.

 

신라는 9개의 주()로 나누어 지방을 다스렸는데 그 수장들의 관직이 소판이다.

 

당시의 9주는 명주(溟州), 양주(良州), 삭주(朔州), 한주(漢州), 상주(尙州), 강주(康州), 웅주(熊州), 무주(武州), 전주(全州) 등이었다.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시조가 신라를 창건한 개국공신이었고, 중시조의 관직이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만이 오를 수 있는 '소판(蘇判)'의 벼슬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시조이후 중시조 때까지도 대대로 왕족 다음가는 지위를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시조(始祖)이후 8대파 분파(分派) 때까지의 공동선조 및 관직(官職)은 다음 표와 같다.

 

그런데 아래에 열거한 시조 이후 중시조까지의 관직(官職)은 표에서와 같이 신라조의 관직이라기보다는 거의가 고려조의 관직이다.

 

따라서 일부 후손들이 찾았다는 시조 이후 28대 또는 35대의 실전세계(失傳世系)는 그 신빙성을 인정할 수 없는 처지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는 끝에서 소개한다.

 

경주이씨 시조(始祖)이후 *8대파 14대파 분파(分派) 때까지의 공동선조 및 관직(官職)

대수 휘() 역임 관직 ....................관직 해설

 

시조 알평(謁平) 알천양산촌장(급량부장)......화백회의의장

 

중시조 이후 계대

 

1 거명(居明). 중시조(中始祖). 신라 진골(新羅眞骨). 소판(蘇判) - 현재의 시도지사

 

2 금현(金現) 병부령(兵部令) - 병부령(兵部令)은 현재의 국방장관

 

3 금서(金書) 중원태수(中原太守). 호부낭중(戶部郎中)

- 태수(太守)는 신라시대 지방관으로 군수에 해당,

호부낭중(戶部郎中)은 향리(鄕吏)의 벼슬로 재정사무를 담당하던 호부(戶部)의 제1등관

 

4 윤홍(潤弘) 병정(兵正)

 

5 승훈(承訓) 정조시랑(正朝侍郞)

시랑(侍郞)은 집사부·병부·창부 등의 차관(次官)에 해당하는 관직

 

6 주복(周復) 좌사간(左司諫)

사간(司諫)은 사간원에 소속된 관직으로 종3

 

7 () 보조공신문하시중(補祚功臣門下侍中)

문하시중(門下侍中)은 문하성 최고의 관리로 종1(조선시대의 영의정과 동일)

 

8 치련(侈連)

 

9 총섬(寵暹) 문하시중(門下侍中)

문하시중(門下侍中)은 문하성 최고의 관리로 종1(조선시대의 영의정과 동일)

 

10 춘정(春貞) 순흥부사(順興府使)

부사(府使)는 지방장관직의 하나로 정3

 

11 현복(玄福) 생원(生員), 생원(生員)은 소과(小科)인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

 

12 선용(宣用) 군윤(軍尹) - 군윤(軍尹)9품의 지방관직

 

13 승고(升高) 보윤(甫尹)

 

14 득견(得堅) 문림랑상의원직장 동정(文林郞尙衣院直長 同正)

 

15 () 문하평리(門下評理). 증상서좌복야(贈尙書左僕射)

문하평리(門下評理)는 문하부(門下府)의 종2품 관직

 

소판공(蘇判公) 이후 경주이씨는 천자만손(天子萬孫)으로 번성하여 고려조(高麗朝)에서만 문하시중(門下侍中 ; 조선조의 영의정) 4명을 배출했고, 조선조(朝鮮朝)에서도 과거급제자 178, 재상(宰相 ;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8, 대제학 3, 공신 12, 청백리 10명 등을 배출하는 등 삼한(三韓 ; 한반도 전체를 말한다)의 대표적인 명문거족으로 성장해 왔다.

 

중시조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의 사당은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靑良面) 동천리(東川里) 양천(良川)마을에 소재하고 있다. 중시조 생존당시의 이 지역은 경주지역이었다.

 

경주이씨(慶州李氏)의 분산(分散)

 

신라의 왕성(王城) 경주에서 신라왕이 사성하여 태어난 경주이씨의 세거지(世居地)는 당연히 경주여야 하나, 주요 씨족들이 역대왕조의 부침(浮沈)과 붕당정치(朋黨政治)의 틈바구니에서 강제이주를 당했는가하면, 귀양(歸養)을 가고 피난을 가는 등 곡절을 겪은 결과 이제는 전국 일원에 그 세거지(世居地)가 분포되어 있다.

 

경주이씨의 주요 세거지와 그 형성경위를 간략하게 알아본다. 신라의 창건 주역이었던 경주이씨의 후예들은 천여년을 신라의 진골(眞骨) 귀족으로 왕조와 운명을 같이 해 왔었다. 부패해질 대로 부패해진 신라가 고려에 의해 패망하자 경주이씨들의 후예들은 진골귀족으로서의 사명감과 고려왕조의 볼모정책에 따라 그 주력인사들이 고려의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해진 경순왕(敬順王)을 따라 천여리나 떨어진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나라는 패망하였으나 문무백관(文武百官)으로 재임하던 귀족들이 그들이 섬겨오던 왕을 호종하여 1천여리가 넘는 고려의 왕성으로 볼모가 되어 옮겨간 것이다.

 

경주이씨(慶州李氏)정묘보(丁卯譜)’에 의하면, 경주이씨가 지금의 황해도 금천(金川)에 대대로 분묘(墳墓)를 썼던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가 패망한 이후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명신의 지위를 누리던 경주이씨의 선조들이 [*고려의 건국당시 개경(開京)으로 강제이주 당하여 인접한 금천(金川)에 터를 잡았다는 근거가 된다.]     고려 건국 당시 개경(開京)으로 강제이주 당하였다든가 인접한 금천(金川)에 터를 잡았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말이다.

 

금천에 터를 잡은 경주이씨는 초기 고려에서는 다른 성씨의 신라 유신(新羅諛臣)들과 함께 중신(重臣)의 자리에 올라 고려조의 중신들과 대립하기도 했으나, KBS에서 상영된바 있는 드라마 '천추태후(千秋太后)'에서와 같이 신라계열 중신들이 개혁을 위한 왕권(王權)장악을 꾀하다가 실패하기도 했었다.

 

개혁운동의 실패는 당연히 신라유신 세력의 배척정책의 단초가 되었고, 이에 따라 경주 이씨도 예외 없이 관직(官職)에의 진출이 막혀 버렸다.

 

[*오랜 세월동안 관직에의 등용이 막혔던 신라조의 후예 중 경주이씨의 경우 필자의 35대조에서부터 겨우 향직(鄕職)에의 진출이 시작되었다.] 관직에의 등용이 막혔다든가 35대조부터 겨우 향직(鄕職)에의 진출이 시작되었다든가 라는 주장은 잘못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