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신라의 6성(六姓) - 3

녹전 이이록 2024. 3. 22. 07:49

신라의 6(六姓) - 3

 

이렇게 관직의 길이 트인 경주이씨 후예들은 초인적 정진을 거듭하여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수대에 걸쳐 문하시중(門下侍中 ; 조선조의 영의정)에까지 진출하는 등 삼한(三韓)의 명문거족(名門巨族)이 되어 개경일원에서 세거하였다.

 

그러나 고려조 말부터 경주이씨의 세력이 약화되자 상대 당파의 모략으로 귀양을 가고 유배를 당하는 등 전국으로 분산되기 시작했다.

 

경주이씨 세거지의 분산과정을 개략적으로 살펴본다.

 

이하에서의 계대(系代)표시는 필자의 직계 조상일 경우 필자로부터의 상향대수를 나타내고, 방계 조상인 경우는 중시조로부터의 하향대수를 나타낸다.

 

경주이씨 독자들께서는 필자의 항렬이 ()'자라는 것과 시조(始祖)이신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73대 손 원대손(遠代孫)이며, *중시조(中始祖)이신 이거명(李居明)*38대손 37세손, 익제공파 파시조(派始祖)이신 익제공(益齋公 : 李齊賢이제현)*22대손 4세손, 입향조(入鄕祖)이신 판윤공(判尹公 : 李之帶)*18대손 17세손 이라는 점을 감안하시면 계대(計代)에 참고가 되시리라 믿는다.

 

경주이씨가 고려의 수도 개경에서 최초로 분산된 경우 *17세손 16세손인 이규의 증손(曾孫) 이석(李碩)이 여말(麗末)에 벼슬을 버리고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羅州)로 퇴거(退居)한 때부터로 보인다.

 

이후 조선조에 들어서는 *23세손 23. 이절(李節)의 대 이래로 당시의 수도인 한성(漢城)에서 경기도 안성(安城), 경상북도 예천(醴泉)ㆍ안동(安東)ㆍ상주(尙州), 전라남도 함평(咸平) 등지로 분산되었다.

 

일부는 관향인 경주로 되돌아가기도 했었다.

 

또한 *21세손 21 이인로(李仁老)는 단종손위(端宗遜位) 때 전북 임실(任實)의 두곡리(杜谷里)로 이주하여 정착했고, 이관(李琯)의 동생 이제현(李齊賢)의 자손들 중 필자의 20대조인 이서종(李瑞鍾)의 후계(後系) 중 이지회(李之會)는 경산(慶山)의 자인(慈仁)으로, 필자의 17대조인 이지대(李之帶)는 관향인 경주(慶州), 이성지(李成枝)의 후손들은 충청북도 제천(堤川)으로 각각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필자 가문의 경주지역 입향조이신 이지대가 낙향할 당시의 경주부(慶州府) 남면(南面) 남중리(南中里)는 현재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전 울산군 두서면 구량리) 지역이다.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의 전신인 신라조 당시의 취산진지촌(嘴山珍支村) 지역으로 낙향한 것이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4대손이자 필자의 17대조로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을 지낸 판윤공(判尹公) 이지대(李之帶)는 단종 즉위년인 1452년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강화도로 유배시키는 등 폭정을 일삼자 이에 항거하여 벼슬을 버리고 관향(貫鄕)인 경주부(慶州府) 남면 남중리로 낙향하였다.

 

입향조께서는 이 마을에 당도하자말자 은행(銀杏)나무를 심었는데, 500년이 넘은 이 은행나무가 지금은 울주군 두서면 보호수로 지정되어 천연기념물 제64호로 보호받고 있다.

 

그리고 이 나무가 지금의 울산광역시에 소재한다하여 울산에서는 필자의 입향조이신 이지대 공도 울산을 빛낸 울산사람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다시 세거지 얘기로 돌아간다.

중시조 *20세손 20인 이미(李美)는 조선조 태종조 때 제주도(濟州道)로 유배된 이후 일부가 그곳에 터를 굳혔던 것을 비롯하여 경기도 안성(安城)의 죽산(竹山), 전라북도 완주(完州)의 고산(高山), 충청북도 청원(淸原), 경상북도 영일(迎日 ; 지금의 포항시)의 흥해(興海)와 상주(尙州)의 함창(咸昌) 등지로 산거하기 시작했다.

 

고려조에서 문하시중에까지 오른 이제현(李齊賢)의 경우는 셋째아들 이창로(李彰路)의 후계(後系) *21세손 21 이문(李聞)이 경상북도 영일(迎日)의 흥해(興海)로 낙향(落鄕)하였고, *2020 이종지(李鍾地)가 단종조 갑술년(甲戌年)에 지금의 함경남도 이원(利原)으로 유배되어 이 무렵부터 이들 지역에 나뉘어 살게 되었다.

 

한편 *17세손 17 이천의 자손들은 *22세손 22이만선(李萬善)ㆍ이완원(李完元)의 대에서 경상북도 의성(義城)ㆍ대구(大邱)ㆍ산청(山淸)ㆍ철산(鐵山), *23세손 23 이간(李簡)ㆍ이시영(李時迎)의 대에서 경상북도 안동(安東)ㆍ선산(善山)ㆍ청도(淸道), 전라남도 순천(順天) 등지에 정착했던 사실이 정묘보(丁卯譜)’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천의 동생 이매(李邁)의 자손들은 *18세손 18이경원(李敬元) 아래로 4대에 걸쳐 경기도 용인(龍仁)ㆍ봉산(鳳山)과 경상북도 상주(尙州) 등지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17세손 17 이과(李薖)의 자손들은 경상북도 안동(安東)과 강원도 양양(襄陽) 등지에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과의 동생 *이조(李蓨)의 자손들은 이수가 여말(麗末)에 평안북도 곽산(郭山) 땅에 유배되었다가 그 곳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15세손 15세 이조(李蓨)의 자손들은 *20세손 20. 이귀산(李龜山) 이래로 관향인 경상북도 경주(慶州)로 돌아갔으며, *17세손 17 이손보(李孫寶)의 자손들은 *21세손 21 이득산(李得山) 이래로 경상북도 의성(義城)에 정착하였다.

 

1930년 현재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충청북도 청원군(淸原郡)일원, 충청남도 보령군(保寧郡) 미산면(嵋山面), 전라북도 완주군(完州郡) 봉동면(鳳東面), 임실군(任實郡) 덕치면(德峙面), 전라남도 해남군(海南郡) 화산면(花山面), 무안군(務安郡)ㆍ영암군(靈岩郡)ㆍ진도군(珍島郡) 일원, 경상북도 달성군(達城郡) 성서면(城西面), 의성군(義城郡) 다인면(多仁面), 월성군(月城郡 ; 지금의 경주시) 천북면(川北面)ㆍ강동면(江東面), 청도군(淸道郡) 청도읍(淸道邑), 상주군(尙州郡) 낙동면(洛東面), 영일군(迎日郡)ㆍ경산군(慶山郡) 일원, 경상남도 밀양군(密陽郡) 단양면(丹陽面), 남해군(南海郡) 삼동면(三東面), 울주군(蔚州郡) 일원, 평안북도 박천군(博川郡) 동남면(東南面), 정주군(定州郡) 임포면(臨浦面),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 남면(南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