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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6성(六姓) - 6

녹전 이이록 2024. 3. 26. 08:11

신라의 6(六姓) - 6

 

경주이씨(慶州李氏) 출신 명신(名臣)과 벌열(閥閱)

 

위에서 소개한 분파 중에서 가장 융성한 분파는 조선조 당시 상서공파(尙書公派)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집, 필자의 파조(派祖)인 익재공파(益齋公派)의 익재 본인과 그 일문에 이어 조선조에서 일컬어지던 이른바 ‘8()의 집’, 그리고 조선조의 명장 이완(李浣)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菊堂公派)를 들 수 있다.

 

경주이씨 상서공파(尙書公派) 백사(白沙) 이항복의 집에서는 조선조에서 영의정(領議政) 4, 좌의정(左議政) 2, 대제학(大提學) 2명이 나왔고, 익재공파는 고려조에서 익재공 이재현 자신을 비롯하여 문하시중(영의정) 4, 조선조의 ‘8별의 집에서 죄의정과 대제학 각 1명을 배출했으며, 국당공파(菊堂公派)의 정순공(靖順公 : 誠中) 후손에서는 좌의정 1명을 배출하였다.

 

이하에서는 신라 조에서부터 지금까지 당대의 왕조에 공헌한 경주이씨 출신 관리들의 면면을 살펴본다.

지면관계상 필자의 직계 조상중 몇몇 분들만 소개한다.

 

다른 분파에서는 *시조로부터 50세까지는 중시조로부터 어느 분파든 거의가 공통사항이라는 점을 감안하시면 도움이 될 것이다.

 

경주이씨 정묘보(丁卯譜)’ 상계(上系)편을 살펴보면 경주이씨의 중시조이자 필자의 37대조인 이거명(李居明)이 신라의 소판(蘇判)에 재직했었고, 아들 이금현(李金現)은 병부령(兵部令). * 각간(角干) ⇒ ✖을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판(蘇判)이나 병부령(兵部令)은 신라시대에 성골(聖骨)과 진골(眞骨)만이 등용될 수 있는 관등(官等)과 관직(官職)이었다.

 

지금의 관직으로는 시도지사와 국방부장관이라 볼 수 있다.

 

고려조에 와서는 신라 경순왕의 사위이자 필자의 35대조인 이금서(李金書)가 중원태수와 낭중(郎中)으로 관직에 진출했고, 34대조와 33대조는 각각 병정(兵正)과 정조시랑(正朝侍郞)을 지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조의 *병정(兵正)은 향리직명이고 중앙정부 관직이고, 정조시랑(正朝侍郞)*고려 향직(鄕職)에서 고려 중앙관직에서 7(正七品)의 관계(官階)이다.

 

* 패망한 신라(新羅)의 유신(遺臣)들을 상위 품계에 등용하지 않으려는 고려 조정의 방침 때문에 이 당시에는 경주이씨 전체에서도 별다른 현직(顯職)이 없었다. ⇒ ✖ 잘못된 주장

 

* 두 분이 어느 군현(郡縣)에서 향직(鄕職)에 종사했는지도 알 수 없다.

 

필자의 32대조 이주복(李周復)도 고려조의 정6품 좌사간(左司諫)에 그쳤으나, 이후부터는 중앙관직에 재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6대조 이선용(李宣用)25대조 이승고(李升高)의 경우도 고려의 향직(鄕職)인 군윤(軍尹)과 보윤(甫尹)으로 그쳤다.

 

필자의 직계 선조로 고려왕조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이는 22대조이신 이진(李瑱)과 그의 동생 이세기(李世基) 때부터다.

 

이진(李瑱)은 충렬왕(忠烈王) 6년에 친시문과(親試文科)에서 2등으로, 동생 이세기는 3등으로 합격했었다.

 

이 후 이진(李瑱)은 밀직승지(密直承旨), 전법판서(典法判書), 정당문학(政堂文學 : 고려·조선시대 관직으로 고려 문종(文宗) 때 정원은 1, 품계는 종2)을 거쳐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한 이후에는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으며, 충숙왕(忠肅王) 2년 지공거(知貢擧)를 거쳐 검교정승(檢校政丞)에 등용되었다가 임해군(臨海君)에 봉해졌다.

 

경주이씨(慶州李氏)와 필자의 직계 조상 중 고려조의 인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瑱)의 아들로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 외교가ㆍ문장가였던 21대조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이다.

 

고려 명신으로 일곱 임금을 섬기고 네 번이나 정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