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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6성(六姓) - 7

녹전 이이록 2024. 3. 27. 09:18

신라의 6(六姓) - 7

 

우리나라 주자학(朱子學)의 개척자인 백이정(白伊正)에게서 수학한 후 충렬왕 27년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15세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충선왕이 왕위를 물려주고 원()나라 연경(燕京)에 만권당(萬卷堂)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燕京)에 가서 원()나라의 학자인 요수(姚燧)ㆍ기맹부 등과 함께 고전(古典)을 연구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이듬해에는 선부의랑(選部議郞)을 거쳐 성균제주(成均祭酒)가 되었고, 1316년에는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에 승진하였다.

 

1319년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중국의 강남(江南)을 유람하고 이듬해에는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었다.

 

이후 원나라에 체재 중이었던 충선왕이 빠이엔투그스(伯顔禿古思)’의 모략에 의해 토번에 유배되자 원()나라의 조정에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고, 뒤에 심왕(瀋王) ‘()’의 고려 왕위계승을 위한 오역사건으로 충숙왕이 원나라에 잡혀가자 다시 연경에 가서 이를 해명하고 이듬해 귀국해서 향리(고려의 수도 개경 인근의 '금천'을 말한다)에 은거했다.

 

충혜왕(忠惠王)이 원()에 잡혀갔을 때도 원나라 조정에 글을 올려 사면을 청했다.

 

충선왕(忠宣王)이 아들에게 고려왕위를 물려주고 조카 ()’에게 심왕위(瀋王位)를 물려준 후 공민왕이 즉위할 때까지 원()나라 정권에 의한 고려 왕위의 폐위와 복위가 반복될 때마다 일선에서 고려국의 왕위보전을 위해 눈부시게 노력한 충성의 인물이다.

 

공민왕이 즉위한 후 우정승(右政丞)ㆍ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로 발탁,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다.

 

이듬해 동덕협의찬화공신(同德協議贊化功臣)에 오르고, 1353년 사직했다가 다음 해 우정승(右政丞)으로 재임, 1356년 문하시중(門下侍中 ; 조선시대의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이어 관직을 사직하고 저술(著述)과 학문(學問)에 전심하다 1362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 왕()을 청주(淸州)로 호종(扈從),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지고 만년에 은퇴한 후 왕명으로 실록(實錄)을 편찬했다.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제현은 당대의 명문장(名文章)으로 외교문서(外交文書)에 뛰어났고, 저술에도 두각을 나타내어 민간가요(民間歌謠) 17()를 한시(漢詩) 7언절구(七言絶句)로 번역한 익재난고(益齋亂藁)’ 소악부(小樂府)를 저술하여 고려가요(高麗歌謠)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이 외에도 익재집(益齋集)’역옹패설등의 저서가 있으며, 그의 재능은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이로부터 1천여 년 뒤 한말(韓末)의 한문학 대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은 익재(益齋)의 시를 공묘청준(工妙淸俊)하고 만상(萬象)을 구비한 조선 3천년의 제일 대가(大家)’라고까지 평가했다.

 

익재(益齋)가 일찍이 연경(燕京)에 있을 때 원()나라 화가 진감여(陳鑑如)가 그의 초상화를 그리고 학자 탕병룡(湯炳龍)이 찬()을 썼는데 그 그림이 지금까지 전해져 국보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현의 아들 이달존(李達尊)은 아버지의 스승인 백이정(白伊正)의 사위가 되어 충숙왕 때 과거에 올라 전리총랑(典理摠郞)에 이르렀으나 28세로 요절하고 말았고, 딸은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뒤를 이어 공민왕의 왕비(王妃 ; 惠妃)로 간택되었으나, 공민왕이 시역(弑逆)을 당하자 스스로 여승이 되어버린 비운(悲運)의 왕후이기도 했었다.

 

조선조 태종8(1408)까지 생존했었다.

 

*익제(益齋) 익재(益齋) 이후 필자의 직계 선대에서는 *31대조 이칭, 30대조 이치연(李侈連),  29대조 이총섬(李寵暹)등이 연거푸 문하시중(門下侍中 ; 조선조의 영의정)에 등용되었다.   29대조 이총섬(李寵暹)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나 

*31대조 이칭, 30대조 이치연(李侈連)은, 그 아들과 손자인 총섬의 귀함(문하시중)으로 증직을 받은 것은 분명한데 기록이 없다.

*한 씨족의 한 분파에서 4명의 문하시중(領議政)을 배출한 것으로 ⇒ 삭제  이는 후일 조선조에서 영의정 4명을 배출한 상서공파(尙書公派)와 맞먹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후 24대조 이득견(李得堅)이 종2품인 직장, 23대조 이핵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등용되었고, 방계인 이강(李康)*판전객사사(判典客寺事) 판전객시사 ()’자는 관직을 말할 때는 로 읽는다., 이인정(李仁挺)이 문하평리(門下評理), 이보림(李寶林)이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존오(李存吾)가 우정언(右正言), 이달충(李達衷)이 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역임함으로써 각각 분관 또는 분파조로 모셔지고 있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8명의 상신(相臣), 3명의 대제학(大提學), 178명의 문과(文科) 급제자를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