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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6성(六姓) - 4

녹전 이이록 2024. 3. 23. 08:02

신라의 6(六姓) - 4

 

오늘날 경주이씨 자손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집성촌은 전라남도 영암군(靈岩郡) 영암읍(靈岩邑) 망호리(望湖里)이다.

 

이곳에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처음 자리 잡은 것은 4백여 년 전, 필자의 21대조이자 파시조(派始祖)이신 이제현(李齊賢)9대손인 이기(李琪)가 을묘사화(乙卯士禍)를 피해 이 마을로 오게 되면서부터이다. 현재 이 마을 1백여 가구가 경주이씨(慶州李氏) 자손들이다.

 

여기에서 경주이씨의 고려조 이후의 씨족사(氏族史)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영남지방의 경주에서 태어나 천년동안 경주에서 세거(世居)하던 경주이씨의 후손들은 신라(新羅)가 패망하면서부터 고려조의 왕도인 개경(開京)으로 강제 이주당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세거지(世居地)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그 고려조가 패망하고 조선(朝鮮)이 창건되자 조선의 수도인 한성(漢城)으로 옮겨와 조상전래의 지능과 노력으로 수많은 상신(相臣 ; 재상급 신하)과 공신(功臣)을 배출하며 명문거족의 지위를 누리다가 앞서 기술한 대로 포악한 군왕(君王)과 붕당정치(朋黨政治)의 희생물이 되어 유배(流配)를 당하고 피난을 하는 등 그 세거지(世居地)가 조선 8도로 분산되었

.

 

때문에 시조(始祖) 이후의 계대(系代)마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해 전전긍긍하다가 백사파(白沙派)무진보(戊辰譜)’에서 중시조 이후의 28대에 이르는 실전세계(失傳世系)를 찾아 수록했고, 그 이후 1890년대 광무연간(光武年間)갑진보(甲辰譜)’에서 시조 아후 35대에 걸친 실전세계(失傳世系)를 다시 찾아내어 수록함으로써 잃어버린 뿌리를 그런대로 규명하였다.

 

일설에서는 조선 말기 무렵에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이씨(陜川李氏) 족보에서 시조 이알평(李謁平)으로부터 이거명(李居明)까지 36대의 명단을 찾아내어 족보에 수록함으로써 지금의 족보가 완성되었다고도 전한다.

 

실전된 계대(系代)의 근거가 정확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때문에 이 자료의 발견경위와 내용과 관련해서는 정묘대종보(丁卯大宗譜) 실전세계(失傳世系)의 고찰(考察)’에서 이를 신빙할 수 없다는 지적이 대두되고도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말미에 게재한다.

 

경주이씨(慶州李氏)의 분열(分列)

 

우리나라의 이씨(李氏)는 중국에서 귀화해 온 몇몇 본()의 이씨(李氏)를 제외하면 거의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에서 분관(分貫)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분관과 분파의 내력을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우선 시조 후손에서 이개(李開)를 시조로 하는 합천이씨(陜川李氏), 이위(李渭)를 시조로 하는 차성이씨(車城李氏). *이구(李球)를 시조로 하는 우계이씨(羽溪李氏)가 갈라졌다.

 

중시조인 이거명(李居明)의 후손에서도 몇 개의 관향이 나누어졌다.

 

*이거명(李居明)의 증손 이윤장(李潤張)의 후손이 평창이씨(平昌李氏)⇒   ✖    *아우인 이윤원(李潤遠)의 후손이 가평이씨(加平李氏), *5세손  5 이주좌(李周佐)의 후손이 아산이씨(牙山李氏), 6세손 이우칭의 후손이 재령이씨(載寧李氏), ⇒    ✖ . * 이양식(李陽植)의 후손이 우계이씨(羽溪李氏), 이임간(李林幹)의 후손이 장수이씨(長水李氏), *15세손  ⇒   15 이전(李筌)의 후손이 덕은이씨(德恩李氏),   ⇒   ✖ . *16세손   . 이자영(李自英)의 후손이 진위이씨(振威李氏)⇒   ✖. *17세손 이영행(李永倖⇒ 18 이영재(李永滓)의 후손이 진주이씨(晉州李氏), * 22세손   ⇒   23 이반계(李攀桂)의 후손이 원주이씨(原州李氏)로 각각 분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