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시조 익재 이제현

문학의 최고봉. 충신. 대가. 사략. 이보림

녹전 이이록 2009. 1. 9. 12:11

● 고려의 문학의 최고봉. 충신

 

 

고려 말의 학자인 이색은 이제현의 묘비에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최고봉’ 이라고 새겼고, 조선의 재상 유성룡도 “고려 5백년을 통틀어 이제현만한 인물이 없다”고 말했다.

이제현은 어려서부터 학문적 소질이 두드러졌고, 스무 살에 예문춘추관에 뽑히고 지방 수령을 지냈을 만큼 벼슬 운도 좋았다.

그리고 이제현은 학문과 문장이 나라 안에서 으뜸이라는 말을 들었다.

또 이제현은 고려의 신하요, 충신이었다.

1923년 원나라의 황제가 고려를 원나라의 성으로 만들려고 했다. (입성책동, 立城策動).

이에 충선왕이 반대하자 원나라 황제는 충선왕을 귀양 보냈다.

그러자 이제현은 원나라로 달려가 원나라 조정에 상소문을 올렸다.

 

[고려 임금들은 원나라 황제에게 예의를 다했고, 고려는 과거 원나라를 위해 세운 공로가 많다.

요나라(거란족)가 침략했을 때, 무기와 식량을 공급받는 데 문제가 생기자 충선왕이 식량과 무기를 건네주고 요나라 군도 무찔렀다.

또 원나라가 일본을 공격했을 때도 고려군은 앞장섰다.

때문에 원나라는 공주들을 고려로 시집보내 친척 나라로 삼고, 전통과 국가를 보존하게 했다.

게다가 원나라 세조는

“특이한 제도를 가진 자에 대해서는 그에 맞는 방도로 대처해 세상을 안정시키겠노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고려를 없애고 한 개의 성으로 만든다는 것은 스스로 황제의 말을 어기는 것이다.

‘중용’에도 ‘끊어진 왕통을 이어 주고, 망하게 된 나라를 세워 주며, 위험한 것은 붙잡아 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400년 전통의 왕조 문을 닫고 제사마저 끊어지게 한다면 이치에 어긋난다.]

 

원나라 조정은 이제현의 당당하고 힘찬 문장의 빼어남에 놀라고, 역사적인 증거와 이치에 맞는 내용에 감탄했다.

 그리고 결국 입성책동은 없던 일이 됐다.

 고려 조정이 어찌하지 못한 일을 이제현이 혼자 붓을 들어 해결한 것이다.

 그 후에도 이제현은 뛰어난 문장력과 외교 능력을 발휘하여 원나라 황제에 의해 귀양 간 충선왕을 구했고, 북경에 갇힌 충혜왕도 구했다.

또 이제현은 원나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쓴 공민왕을 도와 고려가 원나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이룰 수 있게 했다.

이처럼 이제현은 나라를 위해 노력했고, 이런 그의 노력은 위태롭던 고려에 큰 힘이 됐다.

요컨대 이제현은 학문적으로는 성리학의 발전에 기여했고, 정치적으로는 원나라의 속국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고려의 자주성 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현실적이고 지조 있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여 보필한 훌륭한 분이었다.

 

 

● 문학의 대가

 

 

문학부문에서 익재공은 대가를 이루었다.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시는 전아하고 웅혼하다는 평을 받았고, 많은 영사시(詠史詩)가 특징을 이룬다.

또한, 사(詞)의 장르에서 독보적 존재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의 한문학을 세련시키면서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를 통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편, 빼어난 유학지식과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사학(史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 本朝編年綱目≫을 중수(重修)하는 일을 맡았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만년에 ≪국사 國史≫를 편찬했는데, 기년전지(紀年傳志)의 기전체를 계획해 백문보(白文寶)· 이달충(李達衷)과 함께 일을 진행시켰으나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저술]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 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다.

흔히 이것을 합해 ≪익재집≫이라 한다.

그는 이색이 그 묘지명에서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다(道德之首 文章之宗).”라고 말한 바와 같이 후세에 커다란 추앙을 받았고, 경주의 구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1376년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작자로서 문인 교유

 

어려서부터 남달리 숙성해, 글을 짓는 데 이미 작자기(作者氣)를 지니고 있었다.

1301년(충렬왕 27) 15세에 성균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어서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 해에 당시 대학자이자 권세가 였던 권보(權溥)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1314년(충숙왕 1) 상왕인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에 머물게 됨으로써 그의 원나라에서의 생애가 시작되었다.

충선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 원나라에 있으면서 만권당을 짓고 서사(書史)를 즐기며,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문인들을 드나들게 했는데, 그들과 상대할 고려측의 인물로서 이제현을 지명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만권당에 출입한 요수(姚燧)· 염복(閻復)· 원명선(元明善)· 조맹부(趙孟頫) 등 한족(漢族) 출신 문인들과 접촉을 자주 갖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사략(史略)  - 이제현 편찬

 

 

고려 말기 학자· 문신 이제현(李齊賢)이 편찬한 역사책이다.

1357년(공민왕 6)에 간행되었다.

편년체로 된 고려의 통사로 짐작된다.

제15대 숙종 때까지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태조부터 숙종까지의 이제현이 쓴 논찬(論讚)이 남아 있는데 이 책을 자료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의 역사서는 초기에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기반으로 자주적 사서가 편찬되었으나 현존하지 않고, 중기에는 보수적인 유교 사관을 기반으로 신라 계승 의식을 표방한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편찬되어 오늘까지 현존하는 최고의 정통 사서로 인정되고 있다.

 최근에는 삼국사기가 중국의 역사와는 다른 우리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했다는 측면에서 자주적인 성격이 있다는 새로운 학설이 제시되어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무신 정권기에는 각훈이 '해동고승전'을 지어 우리 승려들의 전기를 정리하였고, 이규보는 '동명왕편'에서 고구려의 건국 과정을 서사시 형태로 노래한 자주적 성격의 사서가 편찬되었다.

또한 원의 간섭기에는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편찬되었는데, 이 두 권은 우리 역사의 기원을 고조선으로 보는 고조선 계승 의식을 표방하여 단군신화를 수록한 자주적인 사관의 역사서를 편찬하였다.

말기에는 사대부에 의하여 정통과 대의 명분을 존중하는 성리학적 유교 사관이 나타났는데, 이제현의 '사략'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고려 시대 역사서의 계승 의식의 흐름은 고려 → 신라 - 고구려 → 고조선으로 이어졌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제현은 당시의 신진 사류를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 그의 역사서술은 현실적인 국내문제의 해결에 목적을 두고 그를 위해 정치적 경제적 개혁을 단행함으로서 왕권을 중심으로 하여 국가의 질서를 회복시키려는 의식이 강하게 내포되어있다.

하지만 정치적 경제적 모순을 초래한 원나라에 대해서는 별다른 저항의식이 없었고, 대외관계에 대한 사론은 소극성 고식성으로 일관되는 특징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사학이 사대성을 면치 못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원에 가서 생활한 한 유학자로서의 한계성이 하겠지만 그는 장구한 역사를 이어온 자국의 사직을 지키고 누적된 난제들을 해결코자 노력을 기울였으며 역사서술 역시 문제의식과 관련이 깊다고 하겠다.

무신란 이후 고려후기에 이루어진 자국역사를 중국역사와 대등하게 그리고 별도로 진행된 역사로 파악한 역사의식은 조선 전반기인 15세기에 전반적인 민족문화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정신적 바탕이 된 것이며,

뿐만 아니라 무신란 이후에 문화적 위기의식은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보완 기록함으로써 값진 고대문화의 유산을 후세에 전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문화유산 은 국사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오늘날까지 전해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고려는 이미 전기부터 유학이 발달함에 따라 유교적인 역사서술체가 정립되었다.

그것은 편년체인 실록편찬에서 기전체인 정사체로 완결되었다.

현종때 거란의 침입으로 많은 역사기록들이 불타버려 1145년(인종23)에 김부식에 의해 편찬된 『삼국사기』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서이다.

이밖에 고종때 승려 각훈이 왕명에 따라 편찬한 『해동고승전』과 같은 왕때 이규보가 지은 『동명왕편』, 일연의 『삼국유사』그리고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가 있다.

한편 후기에 이르면 유교적인 신흥사대부의 대두로 『삼국사기』의 전통을 이은 유교사관이 보다 발달하였다.

충렬왕때 원부를 대표로 관찬한 『고금록』과 정가신이 지은 『천추금경록』, 충숙왕때 민지가 지은 『본조편년강목』, 공민왕때 이제현이 엮은 『사략』등에 유교의 합리주의사관이 반영되고, 거기에 정통과 대의명분을 존중하는 성리학적 사관이 나타난다

 

 

 ● 중조 19세 이보림(李寶林)

 

생몰년(태어나고 죽은 해) 미상으로 공민왕 우왕 때의 문신이다.

문하시중을 지낸 제현(齊賢)의 손자이며 시랑공(侍郞公- 문하시랑門下侍郞-정2품)

서종(瑞種)의 첫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풍산 홍씨(豊山洪氏)로 밀직사(密直使) 유(侑)의 따님이시다.

1357년(공민왕 6) 우사간(右司諫-종5품)으로 있을 때 우간의(右諫議) 이 색(李 穡)· 전녹생(田祿生)· 정 추(鄭 樞) 등과 함께 염철별감(鹽鐵別監)을 여러 도에 보내려고 하자 그 폐단을 들어 혁파하라는 상소(上疏)를 올렸으나, 재상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1359년 남원부사(南原府使)때에는 재정계획을 정하고 재정을 집행하게 하여 백성들에게 함부로 걷는 것이 없게 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경산 부사(京山府使)에 재임시에는 어려운 송사(訟事)를 잘 처리하여 명성을 날렸다.

1375년(우왕 1) 판안동부사(判安東府事-정3품)로 부임하여 치적(治積)이 뛰어나서 대사헌(大司憲-정2품)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임박(林박)이 북원(北元)에 보내는 글에 서명하지 않자 그를 탄핵하여 유배시켜 당시 사람들로부터 이인임(李仁任)의 뜻에 아부하는 지조없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후 밀직부사(密直副使-정3품)가 되었을 때에 제주도에서 바친 고력(빈묵양牝黑羊- 검은 염소)를 여러 주에 나누어 기르게 했는데 죽는 것이 많아지자 한 고위 관리가 사사롭게 분양을 요구하며 백성들에게 그 값을 물리므로 권중화(權仲和)와 함께 부당성을 지적하여 정지시켰다.

뒤에 정당문학(政堂文學-종2품)에 이르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배는 문화류씨(文化柳氏)로 문화군(文化君) 진(鎭)의 따님이며 아들 봉승(鳳升-司諫)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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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안동부사(判安東府事) - 안동부사 앞에 판(判)을 붙이는 까닭

안동부사의 정식 명칭은 판안동대도호부사(判安東大都護府事)로 조선초기에만 있었던 관직명으로 정3품이 맡았다.


이 벼슬에 판사(判事-종1품)급의 높은 관리가 임명되었기 때문에 앞에 판(判)을 붙인다.

 

 

○ 이보림의 지혜

 

이보림이 경산부의 수령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한 나그네의 말이 느닷없이 밭으로 뛰어들어 한창 자라고 있는 보리를 마구 뜯어먹었다.

보리밭 주인이 깜짝 놀라 달려왔을 때는 이미 뜯어 먹힌 면적이 어지간한 상태였다.

보리밭 주인은 변상을 요구했고 말 주인도 자신의 말이 한 짓이므로 여름이 되면 물어주겠노라고 했다.

그런데 보리가 목이 오르고 수확기인 여름이 되자 말 주인은 물어주기가 아까웠다.

그래서 보리밭 주인에게

‘우리말이 뜯어먹은 보리에서 이삭이 나서 수확을 했는데 뭐가 문제냐’며 변상을 거부했다.

 

그래서 화가 난 보리밭 주인은 그를 관에 고소해 버렸다.

이보림은 두 사람을 모두 가까이 불렀다.

그리고 말 주인은 낮은 자리에 앉게 하고 보리밭 주인은 높은 곳에 서게 했다.

그리고 나서 보리밭 주인과 말 주인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그 상태대로 시합을 하도록 하겠다.

 

달음질을 하는데 따라가지 못하는 자는 벌을 주겠다.”


두 사람은 괴상한 달리기 시합에 어안이 벙벙했으나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말 주인이 아무리 힘을 다해 달려도 서서 달리는 보리밭 주인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말 주인이 볼멘 소리로 불공평함을 호소했다.

 

“사또, 이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저 사람은 서서 뛰고 저는 앉아서 뛰어야 하니 어떻게 따라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이보림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너는 어찌 너의 경우만 생각하느냐!

 

뜯어 먹히고 난 뒤의 보리이삭이 보통 보리처럼 수확이 제대로 될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그리고 말 주인에게 곤장을 치고는 보리 값을 물어주도록 했다.

 

말 임자는 공연히 꾀를 부리다가 도리어 곤장까지 얻어맞고 보리는 보리대로 물어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