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시조 익재 이제현

이제현(李齊賢). 할아버님(녹전)

녹전 이이록 2008. 12. 30. 22:04

● 이제현(李齊賢) - 중조 17세. 익재공파 파조

 

 

1287(충렬왕 13)∼1367(공민왕 16).

 

초명은 이지공(李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木+樂翁). 
 

고려 건국 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 이금서(李金書)의 후예이며, 검교 시중(檢校侍中) 이진(李진)의 아들로서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시인으로 백이정(白蓬正)의 문인이다.

 

1301년 성균시에 합격하고,

 

1303년 권무(權務- 임시로 맡아보는 사무) 봉선고 판관(奉先庫判官- 9품)· 연경궁 녹사(延慶宮錄事- 9품)를 거쳐

 

1308년 예문춘추관에 선발되고, 
 

1309년에 *사헌 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1311년 전교시 승(典校寺丞)과 삼사 판관(三司判官)에 나아가고,

 

1312년 서해도 안렴사(西海道按廉使)에 선발되었다. 
 

1314년부터 1323년까지는 원나라를 세 번에 걸쳐 드나들었다. 
 

원(元)나라 수도 연경(燕京)의 만권당(萬卷堂)에 머물며 활동하면서도 때때로 고려에 와서 관리로 복무하여, 성균 좨주(成均祭酒)·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선부 전서(選部典書) 등을 역임하였고,


1320년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밀직사 지사)가 되면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고,

지공거(知貢擧- 과거시험 감독관의 우두머리)가 되어 과거를 주재하였다.

 

1324년 밀직사를 거쳐

 

1325년 첨의 평리(僉議評理)·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전임됨으로써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1339년 조적(曺使)의 난이 일어난 끝에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혀 가자 연경에 가 사실을 해명하고, 다음 해 귀국하여 시골에 은거했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한 직후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면서 정치표면에 등장,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정승(政丞)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네 번에 걸쳐 수상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1353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서 두 번째로 지공거가 되었다.

 

그는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발전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며, 문학 부문에서는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시는 전아하고 웅혼하다는 평을 받았고, 많은 *영사시(詠史詩)가 특징을 이룬다.

 

한편, 빼어난 유학지식과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사학(史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중수(重修)하는 일을 맡았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저서로는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饑翁稗說)》 2권이 있다. 
 

흔히 이것을 합하여 《익재집(益齋集)》이라 한다.

 

경주의 구강서원(龜岡書院)과 김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공민왕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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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헌 규정(司憲糾正)- 1308년(충렬왕 34) 감찰사(監察司)를 사헌부로 개편하면서 속관의 명칭도 바꾸어 감찰사의 감찰어사를 규정이라 고치고 정원 14명을 두었다. 
 

*영사시(詠史詩)-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을 제재로 한 시. 객관적으로 서술하기도 하고 주관적인 회고(懷古)로 그리기도 한다.

 

 

익재 초상 - 국보 110호. 국립박물관 소장

 

 

 ● 익재 할아버지

 

- 녹전 이이록(우)
 

*퇴원 후 나의 블로그를 살펴 보다 익재공 할아버님에 대한 자료가 너무 방대하여 잘못된 곳을 수정도 할 겸 쭉 읽어 내려가는데 글마다 할아버님의 삶이 위대해 보여 익재공 할아버님에 대하여 조금은 알아 깨우치고 배운 여러 가지 내용을 몇 자 글로 남기고자 한다.  

 

 

익재 할아버님에 대한 여러 가지 내용을 알면 알수록 더욱 존경심을 더하는 것은 비록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할아버님에 대한 삶과 행적을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냥 넘겨 버리기가 십상이나 또한 알면 알수록 훌륭하고 위대한 할아버님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동안 할아버님에 대하여 '나의 조상님 중에 한 분이시다.' 라고 만 알았을 뿐 별 관심없이 지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것이 할아버님에 대한 행적을 자세히 알게 됨으로써 할아버님을  더한 존경심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다른 성씨의 교수와 학자들도 자비를 들여 익재 할아버님께서 그 옛날 중국대륙을 밟았던 흔적을 찾아 유적지를 찾아가 보는 분도 계시고 익재 할아버님에 대한 연구를 하여 논문을 내고 책자를 내신 분도 계시는데 그의 자손이 되는 우리가 학문적이고 전문적인 것은 몰라도 할아버님에 대한 행적 정도는 몰라서야 되겠느냐는 마음에 인터넷 검색. 문헌 등을 통하여 부분적이나마 알게되었고 그 내용으로 할아버님께 향하는 존경의 마음을 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익재공 할아버님만큼 후손들이 크게 존경심을 갖게 하는 할아버님도 드물 것 같다.

 

관직. 처세. 문학. 정치. 충성 어느 한가지도 모자람이 없는 할아버님이시다.

 

언제 다시 경주 이씨 성씨 중에 이러한 할아버님을 닮은 인물이 나올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아직 더 많은 할아버님에 대한 행적이 조사 발굴되기를 기대해 보기도 한다. 

 

역사적인 여러 내용은 연보 등 기존의 기록을 참고함을 밝힌다.

 

첫째 익재공 할아버님은 일생을 관직에 매였고 관직에 있었던 만큼 그 책무를 다하셨다.

 

15세에 성균관 시험에 장원을 하고 17세에 봉선고 판관 연경궁 녹사의 9품직에 벼슬을 시작으로 하여 1313년 2년 계축 익재공 나이 27세에 내부 부령(內府副令)ㆍ풍저감 두곡(풍儲監斗斛) 관직에 제배 되었는데, 내부(內府- 중서문하성)에서 치수(치銖)와 척촌(尺寸)을 세밀히 계산할 적에도 전혀 어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공(李公)은 기국(器局- 도량과 재간)을 한정할 수 없는 군자(君子- 덕행이나 학식이 높은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내용으로 보아 국민의 생활과 직결되고 왕궁의 창고 출납에 어려운 도량형 계산을 철저히 하여 조금도 어려운 기색이 없었다고 하니 이는 주어진 그 임무를 충실히 하였다는 말일 것이다. 

 

사람들이 익재공을 말하기를 '도량과 재간이 한정할 수 없는 군자'라고 하였으니 27세의 젊은 나이에 이와 같은 찬사를 듣는 것도 보통 사람은 엄두도 못낼 일이다. 

 

 원나라 조정에서 부원배(원나라에 아첨하는 무리)들의 참소로 우리 왕이 잡혀갔을 때 과감히 원 나라에 가서 이를 변호하여 풀려나게 하고 돌아온 것도 원나라 조정에 대한 두려움을 털고 목숨을 바칠 각오로 책임과 충성심을 다한 것이다.

  

부원배 무리들의 미움으로 얼마간 숨어 지낼 때 '역옹패설'을 지은 것도 근면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충숙왕을 왕으로 추대하였다하여 미움을 사 충혜왕 3년 동안 관직을 멀리한 외는 71세에 문하시중으로 치사(나이 많아 벼슬을 영영 떠남)할 때까지 약 50년이상 관직에 있은 셈이다.

 

기간은 짧으나 정승을 네 차례나 제수 받았다는 사실은 그 능력을 인정받은 때문일 것이다.


당시 원나라의 내정 간섭에 정치는 혼란스럽고 권력으로부터는 자신을 지키는 일이 중요 할텐데 평생을 어떤 귀양살이도, 또 어떤 죄에 얽혀본 적도 없이 평생을 지내왔다는 사실은  곧고 바르고 청백하게 살아왔음을 증명하는 것이니 이는 실로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벼슬을 그만 둔 뒤에도 10년 간 유유자적하게 지내시다가 81세를 일기로 돌아가셨으니 이만한 복록을 누리셨다면 참으로 참다운 인생을 살다 가신 할아버님이시라고 생각된다.    

  

둘째 겸양으로 처세를 하고 존경을 받았으며 시기와 질투를 미리 짐작하여 화를 면하셨다.

 

익재 할아버님은 젊어서부터 동료들이 감히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노소할 것 없이 모두 '익재'라고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음은 그 행동거지가 어떠하였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재상이 되고 나서도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익재'라 불렀다고 한다.

 

어른스러움과 어젓한 언행과 덕과 겸양으로 노소를 불문하고 익재공을 '익재' 라고 칭했다는 것이다.


"야. 자네. 어이. 제현" 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고 모두 '익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언행에 무게를 두니 모두 익재공을 무겁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사절요'에 보면 네 차례의 정승을 제수 받을 때마다 사직 상소를 올린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남들이 바라는 최고 관직이지만 사직 상소에서 익재공의 겸양심을 엿볼 수 있다.

 

 우정승 관직을 제수 받았을 때는 한번도 아니고 무려 세 차례나 사직 상소를 올렸다.

 

 물론 여기에는 조일신의 시기가 게재되어 있긴 하다.

 

그냥 무시해도 좋을 것이지만 조정 권력의 다툼에 일부러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된다.   

 

서로 다투면 피를 보거나 귀양과 감옥이 기다리니 미연에 이를 방지하고자 먼저 겸양을 보여 실지로 화를 면한 일도 있다.

 

문하시중의 최고 관직을 받았을 때도 곧 사직 상소를 올렸다.


정승이니 문하시중의 관직은 당시 실질적인 최고 관직이다.
 

관직에 몸을 담으면 누구나 희망하고 올라가고 싶은 최고봉이다.

 

벼슬로 권력을 탐하는 세상에 이렇게 최고직을 여러 차례에 걸쳐 제수 받았지만 그 때마다 사직 상소를 올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공민왕 때 원나라의 간섭. 조정 대신들과의 알력. 신돈과의 묘한 관계도 한 이유일 것이지만 겸양심을 발휘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몸을 지키고 집안을 지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익재공이 임금에게 신돈의 상이 '흉인의 상'이라고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신돈이 연세 많은 익재공에게 바로 해를 입히지는 못하고 임금에게 익재공의 문생(門生- 지공거일 때 급제시킨 제자)들이 서로 요직을 청탁하고 배분하니 나라에 가득찬 도적이 되었다는 등으로 익재공에게 모함을 일삼았다.   

 

뒤에 신돈이 죽고 난 뒤 임금이 신돈을 '흉인' 이라고 말한 익재공을 가리켜 '익재의 선견지명은 따를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부원배의 시기로 원나라에 가서 우리 왕을 구해낸 뒤 국내로 돌아 왔을 때 모함꾼들의 시기를 알고 미리 관직을 그만두고 피했더니 해를 당하지 않았다.

 

이 때에 숨어 지내면서 그 유명한 역옹패설(락옹비설. 락옹패설. 역옹비설)을 지은 것이다.

 

조일신이 원나라에서 임금의 시종을 든 것을 기화로 총애를 입고 권력을 펴며 자기보다 윗자리에 앉은 익재공을 은연중 견제하니 익재공이 그 도당들의 무도한 점을 알고 미리 세 번의 사직을 청한바 세 번만에 허락을 받고 물러났는데 몇 달 후 조일신이 반란을 일으켜 관직에 있던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죽였지만 익재공은 마침 관직을 물러난 뒤라 화를 면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익재공은 확실히 앞일을 내다보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가졌나보다.

 

얼마 후 조일신이 잡혀 도륙을 당했는데 도륙 후 다시 익재공이 우정승을 제수 받았음은 겸양으로 우정승의 사직을 청하여 목숨을 구하고 가정을 지켰으며 다시 정승이 되었으니 앞일을 내다보는 안목이 분명히 있었던 것일 게다.

 

셋째 문학(시. 편. 상소)에는 할아버님을 따를 자가 없었다.


고려 말의 학자인 이색은 익재공의 묘비에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다(道德之首 文章之宗)’ 이라고 새겼고,

 

조선의 재상 유성룡도

“고려 5백년을 통틀어 이제현 만한 인물이 없다”고 말했다.

 

한말(韓末)의 한문학 대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은 익재(益齋)의 시를 "공묘청준(工妙淸俊)하고 만상(萬象)이 구비하여 조선 3천년의 제일 대가"라고 평가했다.

 

익재공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숙성해 글을 짓는 데 이미 작자의 기질(氣質)를 지니고 있었다. 
 

학문적 소질이 두드러졌고 문장이 나라 안에서 으뜸이라는 말을 들었다.
 

문학부문에서 익재공은 대가를 이루었다.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시는 전아하고 웅혼하다는 평을 받았고, 많은 영사시(詠史詩- 역사상의 사실을 주제로 읊은 시가)가 특징을 이룬다.

 

또한 사(詞- 가요문학. 악곡에 맞추어 비교적 자유롭게 짓는 한시의 한 가지)의 부문에서도 독보적 존재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의 한문학을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를 통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도 한다.

 

충선왕이 수도 연경에 만권당을 짓고 서사(書史)를 즐기며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문인들을 드나들게 했는데, 그들과 상대할 고려 측의 인물로서 익재공을 지명했다.

 

그 때에 요수(姚燧)· 염복(閻復)· 원명선(元明善)· 조맹부(趙孟琅) 등 한족(漢族) 출신 문인들과 접촉을 자주 갖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한편 빼어난 유학 지식과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사학(史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 本朝編年綱目≫을 중수(重修)하는 일을 맡았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만년에 ≪국사(國史)≫를 편찬했는데, 기년전지(紀年傳志)의 기전체를 계획해 백문보(白文寶)· 이달충(李達衷)과 함께 일을 진행시켰으나 완성시키지 못하였는데 그나마 미완성으로 남아있던 책도 대부분 병화에 소실되고 일부만 전해 온다고 한다.

 

익재공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 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다. 
 

흔히 이것을 합해 ≪익재집≫이라 하며 또 《금경록(金鏡錄)》도 찬(選)하였다.

 

*익재공에 대한 행적과 문학은 고려사절요. 동문선. 익재집에서 찾아볼 수 있다.

 

넷째 익재 선생 연보를 보며 익재공의 정치력을 살펴보자
 

익재공의 정치력 발휘는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한 직후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면서부터이다.


이때 문란해진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새로운 시책을 펴는 데 참여해 여러 항목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한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해 새로운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이때부터 네 번에 걸쳐 수상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원나라에 있던 중 고려왕으로 즉위할 것을 명령받은 공민왕은 미처 귀국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선 익재공을 섭정승(攝政丞) 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로 삼아서 왕위 교체로 발생한 정치적 변화에 대처하게 하였다.

 

섭정승은 당시 고려의 국무를 관장하였던 도첨의사사의 최고위직인 정승을 대리하는 직책이었고, 권단정동성사는 고려와 원나라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던 정동행성의 업무를 임시로 총괄하는 직책이었다.

 

당시 정동행성의 최고위직인 승상(丞相)은 명목상 고려왕이 겸임하고 있었는데, 익재공에게 이를 대신하게 한 셈이었다.

 

당시까지 득세하였던 덕녕공주의 측근과 충정왕의 외척 세력을 숙청하였다. 
 

많은 인물을 정치 일선에서 퇴장시켰는데, 그 예로 덕녕공주의 측근이었던 배전(裴佺)이 투옥되고, 노영서(盧英瑞)는 귀양가고, 정천기(鄭天起)는 좌천되었으며, 충정왕의 외척으로 권세를 휘둘렀던 윤시우(尹時遇)도 귀양가게 하였으니 익재공의 이 조치는 마땅한 조치로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공민왕이 귀국하여 정식으로 즉위하자 익재공은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으로 국정을 총괄하는 자리에 올랐다.

 

큰 포부와 야심을 가졌던 22세의 젊은 국왕이 학자로서 명망이 높은 65세의 재상을 등용하여 앞으로 벌일 개혁정치에 대한 구상을 구체화하려 한 것이다.

 

1356년 공민왕 5년에 기철(奇轍) 등을 죽이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이 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가 다음해에 치사하고 관직에서 아주 물러났다. 

 

그 뒤에도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서는 자문에 응했으며,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에는 남쪽으로 달려가 상주에서 왕을 배알하고 경주로 호종(扈從)하였다.

 

정치가로서의 그는 당시 고려가 원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시인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존립과 사회모순의 잘못된 정치 개혁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안정된 정세속에 국민의 불안을 제거하고 조용하게 정치력을 발휘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복잡한 정치상황 아래에서 원과 고려를 넘나들면서 활약해 최고의 지위에 오르지만 한번도 관직생활에서 정치적이던 혹은 개인적인 부패 등으로 화를 당하거나 유배된 적이 없었음은 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다섯째 외교력이 고려 왕조를 살린점을 들고 싶다.


고려의 국가적 독립성을 말살시키고 원나라의 내지(內地- 속국이나 식민지에 속한 땅)와 같은 성(省)을 세울 것을 주장하는 입성책동(立省策動)이 부원배들과 고려왕부에 의해 정권을 쥐려고 강력하게 일어났다.

 

충숙왕을 내몰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심왕 고(瀋王暠)와 그 일파의 준동이 격화되었다. 
 

익재공은 아버지의 상을 치른 다음 1323년 원에 들어가 입성 반대상서를 올렸는데 이 상서로써 입성책동의 계략이 저지되었다.

 

그 내용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데 명문이다. 
 

원 조정의 참소로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어 있는 충선왕의 방환(放還-석방되어 되돌아 옴) 운동도 벌여 충선왕이 타사마로 이배(移配)된 데에는 익재공이 벌인 방환 운동의 영향이 적지 않았으리라 여겨지고 있다.

 

1339년 조적(曹적)의 난이 일어난 끝에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혀가자 그를 좇아 원나라에 가서 사태를 수습하고 왕이 복위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위와 같이 원나라와의 교섭에서 익재공의 활약이 눈부신바 그 공적이 다대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익재공이 일찍이 충선왕이 연경에 만권당을 짓고 6년간 충선왕을 모시면서 원나라 요직에 있는 유명한 학자들과 교류를 튼 것이 원 나라 조정을 움직인 원동력이 되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우리의 할아버님이신 익재공의 노력이 아니었으면 고려 조정과 왕조가 어떻게 되었을는지 누구도 모를 일이었고 순리대로 정상으로 되돌려 놓은 일은 익재공이 아니면 감히 이루지 못할 일 들이다.

 

몸으로 원나라를 드나들어 고여 왕조를 바로 세우고 매끄러운 필체의 상소로 그만한 외교적 공적을 이룬 것은 당시의 정치상황과 원의 정세에 밝은 익재공만이 할 수 있었던 일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여섯째 학자로서의 익재공은 뛰어남을 강조하고 싶다.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 발전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우선 익재공은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白臣+頁正)의 제자였다는 점으로 그의 가르침을 받았고 ≪사서집주 四書集註≫를 간행해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보(익재공 장인)의 문생이라는 점이다.

 

두 분의 가르침을 받은 익재의 성리학에 대한 이론과 학식은 명석한 익재공으로는 그 수준이 미흡하다고는 못할 것이다.

 

또한 익재공의 제자인 이곡(李穀)과 이색의 부자로 이어지는 학통(學統)으로 보아 익재공의 성리학에 대한 위치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익재공이 만권당에서 교유한 중국의 문인· 학자가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중국의 성리학에 직접 접하면서 그것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었음은 자타가 공인할 것이다.

 

충목왕 때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한 것은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에 몰두하여 학문적 연구에 경도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뒷날 성리학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며 기록에 의하면 불교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졌음으로 인하여 성리학 학자로의 예우는 다른 성리학 학자들에 비하여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오늘날 성리학에 지대한 공훈이 많으면서도 조선시대에 들어와 학자들이 논한 동국 18현에 속하지 않는 이유는 익재공의 불교에 대한 관심과 무관치 않으며 성리학에 대한 심도 있는 성찰이 미비하다는 점을 들어 제외된 듯하다.

 

일곱째 중국 대륙 여행으로 견문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충선왕을 따라 연경의 만권당에서 원나라의 학자들과 교류를 트며 원(元)나라 생활을 6년 동안 하였고 세 번에 걸쳐 중국 내륙까지 먼 여행을 했다는 사실에서 견문을 넓혔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해 서촉(西蜀)의 명산 아미산(峨眉山)에 치제(致祭- 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제사 지내던 일)하기 위해 3개월 동안에 걸쳐서 그곳을 다녀왔다.

 

1319년에는 충선왕이 절강(浙江)의 보타사(寶陀寺)에 강향(降香- 향을 피워 올리는 것)하기 위해 행차하는 데 시종(侍從- 임금을 곁에서 모심)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1323년(충숙왕 10)에는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 위로하기 위해 감숙성(甘肅省)의 타사마(朶思麻)에 다녀왔다.

 

이 세 번에 걸친 여행은 그의 견문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역사와 연관지어 감회와 심회를 시로 읊었다.

 

스님이 아니고 시인이 아닌 관직에 얽매인 사람으로 당시에 누가 중국대륙을 서쪽과 남쪽을 누비며 여행을 하였을까.

 

익재 할아버님처럼 몇 달을 걸려 도보나 말을 이용하여 서촉의 아미산. 절강의 보타사. 감숙성의 타사마를 다녀온다면 그 느낌이 지금과는 다르리라.  

 

* 지 모 교수께서 학생들과 익재공이 밟은 길을 따라 자동차로 여행한 여행기가 있다.

  

여덟째 익재공의 고려 조정과 임금에 대한 충성을 되새겨 본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 등 모두 일곱 왕을 모셨다.

 

이 중 충혜왕 때는 익재공이 다른 임금을 밀었기 때문에 미움을 사 충혜왕이 두 번이나 왕위에 오른 기간 동안에는 사직을 하고 벼슬을 하지 않았다.  

 

4번의 정승을 역임했으니 우정승을 3번이나 하고 병신년 1356년 12월 70세에 문하시중이 되었으나 다음해 1357년 5월에 71세로 나이가 많아 문하시중으로 치사하였다.

 

치사(致仕)는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던 일을 말한다.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여 보필한 훌륭한 분이었다.

  

6년 동안 원나라 수도 연경(북경)에서 충선왕을 모시고 한족의 유명한 학자들과 글로써 화답하는 멋을 내어 왕의 체면을 세워 주었다.

 

1339년. 기묘 선생 53세 2월에 충숙왕(忠肅王)이 훙(薨- 죽음)하였다.

 

 을에 정승(政丞) 조적(曹적)이 백관(百官)을 위협하여 군대를 영안궁(永安宮)에 주둔시키고, 임금 곁의 나쁜 소인들을 쫓아내기 위해서라고 선언(宣言)하면서 몰래 심왕(瀋王)의 지반(地盤)을 만들었다.

 

이 사실을 안 충혜왕(忠惠王)이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잡아 죽였으나 그 당여(黨與)로서 경도(京都- 원나라 수도 연경. 지금의 북경)에 있는 자가 많아 왕을 기필코 죄에 얽어 넣으려 하였다.

 

원(元) 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왕을 부르니 인심(人心)이 흉흉하고 불안하게 여겼으며 장차의 화를 예측할 수 없게 되자 익재공이 이를 보고 격분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내가 우리 임금의 신하인 것만 알뿐이다."

 

하고 왕을 모시고 경도에 가서 말 대신 글을 올려 일이 순리대로 일을 잘 처리하였다.

 

1343년. 계미 익재공 57세. 11월에 원 나라 사신 타적(朶赤) 등이 와서 교천사조(郊天赦詔)를 반포한다 하므로 왕이 성 밖에 나아가 영접하니 타적 등이 칼을 들이대고 왕을 잡아 말에 태우고 원 나라 연경으로 돌아갔다.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군신(群臣)이 정신이 없어 어떻게 조처해야 할 줄을 몰랐는데 익재공이 원나라 조정에 글을 올려 사면(赦免)하여 줄 것을 청하여 임금이 풀려난 일도 있다.

 

12월에 충목왕(忠穆王)이 훙(薨)하였으므로 익재공이 표(表)를 받들고 원(元) 나라에 가서 충정왕(忠定王) 세우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아왔다.

 

1351년. 신묘 익재공 65세 겨울에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여 아직 우리나라에 도착하기 전에 익재공을 우정승(右政丞) 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에 임명하였는데 선생이 글을 올려 굳게 사양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고 한다.

 

익재공이 전권을 갖고 법사(法司- 司憲臺·金吾臺·御史臺·監察司·사헌부)로 하여금 각 도의 존무사(存撫使)ㆍ안렴사(按廉使)의 공과(功過)를 고핵(考핵- 숙고하여 가림)하게 하고, 홍원철(洪元哲)을 평양도 순문사(平壤道巡問使)로 보내고, 김용(金鏞)으로 왜적을 방비하게 하고, 허유(許猷)를 서북면 찰방(西北面察訪)으로 삼고, 배전(裵佺)ㆍ박수문(朴守文)을 행성(行省)의 옥에 가두고, 노영서(盧英瑞)ㆍ윤시우(尹時遇)를 유배(流配)보내고, 한대순(韓大淳)ㆍ정천기(鄭天起)를 폄하(貶下- 치적이 좋지 못하여 벼슬을 깎아 내림)하였다.

 

 이때 왕이 원 나라에 있어서 두어 달 동안 나라가 비어 있었으나, 익재공이 잘 조처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이로 인하여 안정되었다.

 

뒤에 공민왕이 돌아와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으로 임명되었다. 


1356년. 병신 익재공 70세. 역신(逆臣) 기철(奇轍) 등이 복주(伏誅)되자, 왕(王)이 기철 등의 재산(財産)을

양부(兩府- 백관의 서무를 관장하는 중서문하성의 5명의재신( 宰臣)과 군기(軍機)를 관장하는 추밀원의 7명의 樞臣) 에 하사하였으나 익재공은 스스로 공이 없다는 핑계로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362년. 임인 익재공 76세. 홍건적(紅巾賊)이 개성을 함락시켜 어가(御駕)가 남쪽 지방으로 파천(播遷)하자

선생이 달려가 상주(尙州)에서 배알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하기를,


"오늘의 이 파천이, 당 현종(唐玄宗)이 안록산(安祿山)의 난(亂) 때문에 서촉(西蜀)으로 파천하였던 것과 무엇이 다르랴!" 하였다.

 

오로지 일의 처리에서 원망을 듣지 않았고 내 공이 아닌 것은 받지 않는 청렴으로 분기를 느낄 때는 과감한 충성심으로 고려 조정에 없어서는 안될 기둥으로 일관하셨다.

 

아홉째 익재공의 말년은 어떠한가.


공민왕 17년(1357) 5월에 문하시중 본직에서 벼슬을 떠났다.
 

벼슬을 떠나서는 시를 썼고 성리학자로써 후진들에게 이기(理氣)에 대한 강론을 펴서 학문을 튼튼히 하였다.

 

1362년 홍건적(紅巾敵)이 침입했을 때 상주에서 왕을 만나 왕과 함께 경주로 피난하기도 하였다.

왕명으로 실록을 편찬하였다.
 

늘그막에 한가롭게 살며 손님이 이르면 문득 술을 장만하고 고금(古今) 인물의 고하(高下)와 이의 옳고 그름을 의논하여 들을 만 하였다고 한다.

 

최해(崔瀣)가 일찍이 감탄하되 ‘익재(益齋)는 천하(天下)의 선비이다’ 하였다.

 

공민왕 27년(1367)년에 졸(卒)하니 나이가 81(八十一)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시호 문충(文忠)이 가진 뜻대로 글을 잘하고 나라에 충성한 어진 어른이셨다.

 

[익재공이 세상을 뜨자 임금과 온 백성이 너무나 슬퍼 길가에서 처연히 목놓아 울었다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고 칼럼니스트 박재목이 쓴 글에 나온다.

 

81세의 수를 누린 가운데 한군데도 흠이 없는 삶을 누리셨으니 이러한 복록이 어디에 있겠는가.
 

50여년의 관직생활과 빈틈없는 일 처리. 최고직인 네 번의 정승. 성리학 학자와 으뜸 문장가와 시인. 과감하고 노련한 정치력과 외교력. 고려 조정을 지킨 충성심. 중국 한인 문인들과의 교유. 원나라 조정의 관료들과의 사귐. 중국 대륙의 여행. 귀천 없는 익재 호칭. 양보와 겸양의 미덕으로 일생을 마치신 익재공 할아버지.

 

손자놈들에게나 닮아 보라고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