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시조 익재 이제현

익재문충공묘지명(益齋文忠公墓誌銘) 역문(譯文)

녹전 이이록 2008. 12. 27. 21:36

● 익재 이제현 묘지명(益齋齊賢墓誌銘) 역문(譯文)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 삼중대광 한산군 영예문춘추관사겸성균관대사성
(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三重大匡韓山君領藝文春秋館事兼成均館大司成)
- 이색 찬(李穡撰)

 

지정(至正-元順帝의 年號) 二十七年 정미(丁未-공민왕36년 1367) 추(秋) 七月에 추성량절 동덕협의 찬화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계림부원군 영예문관 춘추관사 익재 선생 이공(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鷄林府院君領藝文館春秋館事益齊先生李公)병환으로 자택에서 하세(下世) 하였으니 향년이 八十一이다.


태상(太常- 예조禮曹)에서 시호를 문충공(文忠公)이라 하고 十月에 유사(有司- 단체의 사무를 맡아보는 직무)가 의식을 갖추어 우봉현 도리촌(牛峰縣 桃李村)에 장례를 지냈다.


九年 후 동(冬-겨울) 十月에 현릉(玄陵- 공민왕릉)의 묘정(廟庭)에 배향 되었다.


공(公)의 휘는 제현(齊賢)이요, 자는 중사(仲思)이며 성은 이씨(李氏)이니 신라시조 혁거세(新羅始祖 赫居世)의 좌명공신(佐命大臣)인 이알평(李謁平)이 시조(始祖)이다.


그 후에 소판 휘 거명(蘇判 居明)이 병부령 휘 금현(兵部令 金現)을 낳았고 병부령이 삼한공신 태수 휘 금서(三韓功臣 太守 金書)를 낳았다.


신라왕 김부(新羅王 金溥)가 토지를 바치고 고려조(高麗朝)에 들어와서 태조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으니

휘 금서(金書)의 아내가 되어 휘 윤홍(潤弘)을 낳았고

윤홍이(潤弘)이 휘 승훈(乘訓)을 낳았으며

휘 승훈(承訓)이 휘 주복(周復)을 낳고,

휘 주복(周復)이 휘 칭(稱)을 낳고,

휘 칭(稱)이 휘 치련(侈連)을 낳고,

휘 치련(侈連)이 휘 총섬(寵暹)을 낳고,

휘 총섬(寵暹)이 휘 춘정(春貞)을 낳고,

휘 춘정(春貞)이 휘 현복(玄福)을 낳고,

휘 현복(玄福)이 휘 선용(宜用)을 낳고,

휘 선용(宜用)이 휘 승고(升高)을 낳고,

휘 승고(升高)가 문림랑 상의직장 동정(文林朗尙衣直長同正) 휘 득견(得堅)을 낳고

휘 득견(得堅)이 증좌복시(贈左僕射) 휘 핵(부수10획솥력+羽)을 낳고,

좌복야(左僕射- 휘 핵)공이 검교정승(檢校政丞) 시호 문정공(諡文定公) 휘 진(王+眞)을 낳았는데

대능 참봉(戴陵慘奉) 박인육(朴仁育)의 따님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에게 장가들어 지원(至元- 元世祖의 年號) 정해년(丁亥年- 충렬왕13년 1287) 12월 경진(庚辰)에 公(휘 제현齊賢)을 낳았다.


공(公)이 어릴 때부터 숙성하여 成人과 같았다.


이미 글을 지을 줄을 알아서 작가(作家)의 기상이 있었다.


대덕(大德- 元成宗의 年號) 신축(辛丑- 충렬왕27년 1301)에 공(公)의 나이가 十五인데 정상시 선(鄭常侍膳- 상시 정선)이 성균관(成均館) 학생을 시험 보았다.


응시한 자들이 자기의 재능을 믿고 서로 자부하다가 공(公)의 지은 바를 듣고 움추리어 감히 앞을 다투지 못하더니 공(公)이 과연 일등(一等)이 되었다.


이 해에 국제(菊齊) 권공 부(權公溥- 권부)와 열헌 조공 간(悅幹趙公簡- 열헌공 조간)이 예조(禮曹)에서 시험을 보이매 공(公)이 또 병과(丙科)에 합격했고 권공(權公- 권부)이 그 따님을 아내로 주었다.


공(公)은『이것이 조그만 말기이므로 나의 덕량을 크게 축적하지 못한다.』하고 여러 서적(書籍)을 토론하여 널리 관통하고 정밀히 연구하여 정당으로 절충하니 문정공(文定公-공의 아버지 휘 진)께서 크게 기뻐하며 말씀하되 하늘이 혹 우리 가문을 크게 창성(昌盛- 기세가 크게 일어나 잘 뻗어 나감) 시킬 것인가!』하였다.


계묘(癸卯- 17세)年에 임시적으로 봉선고 판관 정경궁녹사(奉先庫判官廷慶宮錄事)를 맡았고 무신년(戊申年- 22세)에 선출되어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니 관내(館內) 사람들이 미루어 사양하고 감히 글을 의논하지 못하였다.


그 해 겨울에 제안부직강(齊安府直講)으로 옮기고 기유년(己酉年- 23세)에 사헌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되었다.


경술년(庚戌年- 24세)에 선부산랑(選部散郞)으로 옮기고 신해년(辛亥年- 25세)에 두 번째 전교사승(典校寺丞)에 전직하고 세 번 판관(判官)을 맡으매 있는 곳마다 직책을 다 하였다.


황경(皇慶- 元仁宗 年號) 임자(壬子- 忠宜王4年 1312)에 선발하여 서해도 안렴사(西海道按廉使- 황해도)가 되매 옛 사람의 직간(直諫)하는 풍토가 있었다.


성균악정(成均樂正)에 승진되었다가 겨울에 제거풍저창사(提擧豊儲倉事)가 되었고 계축년(癸丑年)에 부령내부(副令內部)가 되었는데 풍저(豊儲)에서 두곡(斗斛)을 감독하고 내부에서 뇌수(瀨銖)와 척촌(尺寸)을 맡아보매 말질과 되질을 철저히 감독하고 저울눈의 한눈과 자질의 한 치와 한 자도 정확하게 하여 아무런 난색이 없이 처리하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공(李公)은 불기(不器- 그릇이 커서 일정하지 않음)의 군자라고 말 할 수 있다. 헤아리지 못할 기국이라』했다.


충선왕(忠宜王)이 원(元)의 인종(仁宗)을 보좌하여 내란(內難)을 정돈하고 무종(武宗)을 영립(迎立)하여 즉위하였다.


이에 원나라 인종과 무종의 두 조정에서의 충선왕에 대한 총애의 대우가 겨룰 이가 없었다.


따라서 충선왕이 아들 축숙왕(忠潚王)에게 전위(傳位)하기를 청하고 태위(太尉-원나라 영의정)가 되어 원(元)의 경랑(京郞)에서 머물면서 만권당(萬券堂)을 세우고 학문을 연구하고 스스로 즐기며 이르기를


『서울(元)에 있는 문학(文學)의 선비는 모두 천하에서 선발되었는데 우리 부내(府內)에 그런 사람이 있지 않으니 이는 나의 수치라』했다.


공(公)이 부름을 받고 왕도(王都- 심양)에 이르니 연우(延祐- 元仁宗 年號) 갑인(甲寅- 忠潚王一年 1314) 正月이다.


을묘년(乙卯年)에 선부의랑(選部議郞)에 옮기고 가을에 성균좨주(成均祭酒)를 배수하고 인하여 의랑(議朗)을 겸직했다.


병진년(丙辰年)에 서촉(西蜀)으로 사신을 갔는데 이르는 곳마다 지은 시가 사람의 입에 회자(膾炙)되었다.


이해에 전교사 판사(典校寺 判事)가 되고 정사년(丁巳年)에 선부전서(選部典書)를 배수하고 을미년(乙未年)에 왕이 향강남(香江南)에 내려오니 누대(樓臺)와 풍물(風物)이 좋은 곳으로 안내하여 흥을 만나고 회포를 풀었는데 매양 조용히 말하기를 이 사이에 이생(李生)이 없을 수 없다.』했다.


경신년(庚申年)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내리었으며 지공거(知貢擧- 과거 시험관의 우두머리)로 있을 때에 선비를 얻었다고 칭찬이 있었으니 대저 공의 나이 34세였다.


문정공(門定公) 및 진한국부인 박씨(辰韓國婦人朴氏)와 외당(外堂- 舍廊. 내당의 바깥채) 권공(權公)의 부부(夫婦)가 모두 건강하였으므로 공(公)이 잔치를 열어 술을 올리니 온 세상에서 부러워했다.


이 해에 고려왕부(高麗王部) 단사관(斷事官- 원나라 수도 심양에 있던 고려왕부. 단사관은 고려 조정의 대리인. 관련 정무에 처결 권한이 있음)을 제수 받았고 지치(至治- 元英宗 年號) 임술년(壬戌年- 忠潚王 9年 1322年) 겨울에 원(元)나라 수도에서 서울로 오다가 도착하지 못하여 충선왕(忠宜王)이 참소를 당하고 서번(西蕃)으로 쫓겨났다.


공(公)이 원나라에 가서 배알하고 잘못을 밝히고 왕이 풀려났다.


왕래하는 도중에 시를 지어 읊었는데 충분(忠憤-충성스런 분노)의 마음이 애연하게 발로되었다.


태정(泰定- 元普宗의 年號) 갑자년(甲子年- 忠淵王十一年 1324)에 광정대부밀직사사(匡靖大夫 密直司事)를 가자(加資)하고 을축년(乙丑年)에 공신의 호를 다시 내리어 추성량절(推誠亮節)이라 하고 두 번 첨의평리 정당문학(僉議評理 政堂文學)에 전직되었다가 병인년 삼사사(丙寅年 三司事)에 옮기었다.


천력(天曆- 元明宗 年號) 경오년(庚午年)에 충혜왕(忠惠王)이 국권을 잡으매 다시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파직되었다.


지원(至元- 元順帝 年號) 병자년(丙子年- 忠淵王5年 1336)에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서 김해군(金海君)을 봉하고 영예문관사(領藝文館事)를 받았다.


을미년(乙未年) 봄 二月에 충숙왕(忠潚王)이 승하하였다. 


그 해 가을에 정승 조석(曺由+頁)이 백관(百官)을 위협하여 영안궁(永安宮)에서 군대를 둔치고 왕의 측근에 악당과 소인을 축출한다고 선언하고 속으로는 심왕(瀋王)을 위하였으므로 충혜왕(忠惠王)이 정기(精騎)를 인솔하고 공격하여 죽이었는데 그 여당(餘黨-남은 잔당)으로 심도(瀋都-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에 있는 자가 많았다.


반드시 충혜왕(忠惠王)에게 죄를 돌리려하니 인심이 의구(疑懼- 의심하고 두려워함)하여 화를 측량할 수가 없었다.


공(公)이 분격하여 몸을 돌아보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우리 임금의 아들을 알뿐이다』하고 경사(京師-원나라 서울)에 가서 말 대신에 글월로 대답하여 일을 분석(分析)하였으니 공로가 1등에 있었다.


이미 돌아오매 뭇 소인들이 더욱 선동하였다.


공(公)이 종적을 감추어 나오지 않고 『낙옹패설(木+樂翁稗說)』을 저술하였다.


지정(至正) 갑신년(甲申年) 겨울에 충목왕(忠穆王)이 왕위에 오르매 부원군(府院君-정1품 공신에게 주던 작호)에 진급하여 영효사관사(令孝思館事- 효사관 영사. 고려 태조 왕건을 신위를 모시던 곳)를 제수하니 서연(書筵- 임금의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던 자리)에서 공(公)으로서 스승을 삼았다.


병술년(丙戌年)에 충렬왕 실록을 편수하고 무자년(戊子年)에 판삼사사(判三司事-종1품)가 되었다.


신묘년(辛卯年) 겨울에 공민왕(恭愍王)이 왕위에 오르자 본국에 이르지 않아서 공(公)에게 우정승(右政丞)을 제수하고 임시로 정동성사(征東省事-원나라가 일본정벌을 위하여 고려에 서울에 설치한 관아)의 서리(署理)를 보게 했는데 수개월이내에 나라가 비게 되었다.


공(公)이 모든 일을 조처함이 적당하므로 사람들이 힘입어서 안정되었다.


임진년(壬辰年)에 추성량절동덕협의찬화공신(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의 호를 하사하니 원종공신 (原從功臣) 조일신(趙日新)이 공(公)이 자기의 위에 있음을 꺼리었다.


공(公)이 알고 세 번 상표(上表-임금에게 글을 올리던 일)하여 고사(固辭)했다.


그 해 겨울 10월에 조일신(趙日新)이 불측(不測)한 무리를 모아서 밤중에 궁중에 궁궐로 들어와 미운 자를 해치되 군사를 놓아 마구 베여 죽이었는데 공(公)은 벼슬을 사임(辭任)하였으므로 모면(謀免)하였다.


일신(日新)이 복주(伏誅- 형벌을 순순히 받아 죽음)되자 공(公)을 기용하여 우정승(右政丞)을 삼았더니 계사년(癸巳年) 정월에 사임하고 5월에 부원군(府院君)으로서 지공거(知貢擧-과거시험관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갑오(甲午) 12월에 다시 우정승(右政丞)이 되었다가 명년(明年-다음해)에 또 사임하니 공의 나이 70이다.


김해후(金海侯)를 봉하고 12월에 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이 되었다.


정유(丁酉) 5월에 본직(本職-현재의 문하시중 벼슬)으로서 치사(致仕-벼슬자리에서 물러남)할 것을 구하니 따라주었다.


국제(國制-나라 제도)에 군(君)을 봉(封)한 자가 치사(致仕)하매 녹봉(祿俸)을 반포함이 차등이 있으나 이미 늙어서 많은 녹봉을 받는 것이 의리에 불안하므로 이러한 소청이 있었는데 조정에서 의논하되 본직(本職)으로 치사(致仕)하는 것이 대신(大臣)을 공경(恭敬)하는 바가 아니라고 하여 임진년(壬辰年)에 다시 계림군(鷄林君)을 봉(封)하였다.


公이 15세(十五歲)때 과거에 오르므로 부터 명성이 한 세상을 덮었다.


조정에 선 이래로 오로지 문장(文章-문장가. 외교문서 등을 전담)을 맡았고 외직(外職-중앙이 아닌 지방관직)을 지낼 때에도 예문춘추(藝文春秋)의 양관(兩館)에 속관이 되었고 김해(金海), 계림(鷄林)의 양부(兩府)에 君을 봉함에도 일찍이 관직을 떠나지 않았는데, 오직 충정왕(忠定王) 3年에는 이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公이 일찍이 상소하여(上疏)하여 현릉(玄陵-恭愍王)을 임금으로 세우기를 청한 까닭이다.


그러나 충정왕 3년 겨울에 공민왕이 즉위하였는데 현릉(공민왕의 능호)이 원에서 돌아오기 전에 공을 미리 우정승에 임명하였다.


공(公)이 천품(天稟-타고난 기품)이 후중(厚重-무겁고 관후함)하고 학문으로서 보좌하여 고명 정대 (高明正大)하므로 언론(言論-말이나 글)에 발로(發露-겉으로 드러남)되고 사업(事業)에 조처함이 빛이 있어서 가히 볼만했다.


처음에 공(公)이 사기(史記)를 읽을 적에 필삭(筆削-기록하기도 깍기도 함)의 대의(大義)를 반드시 춘추(春秋-공자가 만든 역사서)를 법으로 삼았다.


측천기(則天紀)에 이르러서는 말하기를

「어찌 주(周)나라 여분(餘分)을 가지고 우리 당나라 일월 (日月)을 어둡게 하리요」했는데 후일에 주자강목(朱子綱目)을 얻어서 읽고 스스로 자기의 식견이 정대(正大)했음을 자부(自負)했다.


사람의 조그만 선행(善行)도 칭찬하여 알려지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선배(先輩)의 남긴 사업(事業)은 비록 작더라도 따르기 어렵다고 했다.


평생에 빠른 말과 급한 빛으로 상담패설(相談稗說)에 미치지 않았으며 손님을 대하여 술을 준비하고 예(禮)와 이재(理財-재물을 모음)를 평론하며 반기기를마지않으니 최졸옹(崔拙翁-이름은 해瀣. 졸옹은 호)이 감탄하며 이르기를 「선비가 작별한제 3일만에 눈을 닦고 서로 대한다는 것을 나는 익재에서 보았다.」고 헸다.


공(公)이 구법(舊法) 따르기를 힘쓰고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뜻이 어찌 옛 사람만 같지 못하리요. 다만 나의 재주가 옛 사람에 미치지 못한다.」했다.


공(公)의 손자(19세 수림)가 기씨(奇氏)와 혼인을 하매 공이 그 너무 성만(盛滿-풍성하고 그득함) 함을 꺼리었는데 그(손자)가 평장(平章)이 되자 공민왕이 양제(兩制-한림학사와 중서사인)에게 명하여 시(詩)를 지어 축하하도록 하고 또 공(公)에게 명(命)하여 그 일을 서술(敍述)하라 하니 공(公)이 사양하여 하지 않았고 스스로 호를 익재(益齋)라 했다.


신돈(辛旽)이 패망(敗亡)함에 공민왕(恭愍王)이 말하기를 「익재(益齋)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은 따르지 못하겠도다.


일찌기 돈(旽)은 단정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더니 이제 과연 실험(實驗)이 된다.」하였다.


공(公)이 젊어서부터 동년(同年)도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반드시 익재(益齋)라고 일컬었으며 재상(宰相)이 되어서는 귀천(貴賤)이 없이 모두 익재(益齋)라고 칭하였으니 그 세상에서 존중함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공(公)의 저술(著述)한 문집(文集) 약간 권(券)이 세상에 행하여지고 있다.


공(公)이 무릇 3취(三聚)했으니 길창국부인 권씨(吉昌國夫人權氏)며(궐한다.) 의화 택주 (義和宅主)를 봉한 수춘국부인 박씨(壽春國夫人朴氏)는 서경(西京) 등에서 만호(萬戶) 및 부만호(副萬戶) 중현대부(中顯大夫) 사복정(司僕正)을 제수받은 휘 거실(居實)의 따님이며(궐한다.) 서원군부인 서씨(瑞原君夫人徐氏)는 통직랑(通直郞) 지서주사(知瑞州事) 휘 중린(仲麟)의 따님이며 궐한다.


명(銘- 금석에 새긴 글자)에 이르기를


"天地가 정기를 모아 公이 태생하였고 규벽(奎壁)이 빛을 내었으니 公이 이에 드날리었네.


이름은 天下에 가득했고 몸은 해동(海東)에 살았도다.


도덕(道德)의 우두머리요. 문장(文章)의 종주(宗主)이네.


북두(北斗-북두칠성)와 태산(泰山-높고 큰 산)같으니 창려(昌黎)의 한퇴지(韓退之)이고 광풍(光風)과 제월(霽月)같으니 춘릉(春陵-봄 언덕)에 주렴계(周濂溪)로다.


네 번 국권(國權)을 잡았고 나이는 팔순이 넘었는데 기린과 봉황새 같은 상서(祥瑞)요. 시초(蓍草-콩과 식물)와 거북같이 신통하였네.


공로는 사직(社稜)에 존재하고 덕택은 생민(生民-백성)에게 흘렀다.


종묘(宗廟)에 배향(配享)되었으니 슬퍼함과 영화로움이 따를 이가 없구나.


오직 자손(子孫)들은 충효(忠孝)를 따를지어다.


앎이 없다고 이르지 마오. 公이 구원(九原-저승)에 계시니라."


* 위의 익재공 묘지명은 대종보에 올라있는 내용그대로를 옮겨 적은 글이다.


본문 내용중 세 곳에 (궐한다)라는 글이 나온다.


'궐한다'라는 뜻은 '원문의 글을 빼어 버린다. 삭제한다'라는 뜻이다.


읽어보면 익재할아버지의 3취(3배)에 대한 내용은 소개되나 이 할머니께서 낳은 자식에 대하여서는 모두 (궐한다)는 말로 소개 설명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이 부분이 없기 때문에 다른 글과 다르게 보는데 글 내용은 거의 같다.


아래에 궐한 부분을 올리니 참고 하기 바란다.


[公凡三娶。吉昌國夫人權氏。生二男三女。長男曰瑞種。奉常大夫宗簿副令。次曰達尊。

奉常大夫典理摠郞,寶文閣直提學知製敎。長女適正順大夫判司僕寺事任德壽。

次適中正大夫典農正李係孫。次適銀靑光祿大夫簽書樞密院事,翰林院大學士金希祖。封義和宅主 ]


- 공은 모두 세 번 장가들었다.


첫째 부인인 길창국부인(吉昌國夫人) 권씨(權氏)는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서종(瑞種)은 봉상대부(奉常大夫) 종부 부령(宗簿副令)이고, 다음 달존(達尊)은 봉상대부 전리총랑 보문각직제학 지제교(典理摠郞寶文閣直提學知製敎)이다.


장녀는 정순대부(正順大夫)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임덕수(任德壽)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중정대부(中正大夫) 전농 정(典農正) 이계손(李係孫)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첨서추밀원사 한림원태학사(簽書樞密院事翰林院太學士) 김희조(金希祖)에게 출가하여 의화택주(義和宅主)에 봉해졌다.


[壽春國夫人朴氏。宣授西京等處萬戶府副萬戶,中顯大夫司僕正諱居實之女。生一男三女。

男曰彰路。奉翊大夫。開城尹。長女適正順大夫判典農寺事朴東生。次適奉順大夫判典校寺事宋懋。

次惠妃。今爲尼 ]


- 둘째 부인인 수춘국부인(壽春國夫人) 박씨(朴氏)는 선수(宣授) 서경등처만호부 부만호(西京等處萬戶府副萬戶) 중현대부(中顯大夫) 사복 정(司僕正) 휘(諱) 거실(居實)의 딸인데,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 창로(彰路)는 봉익대부(奉翊大夫) 개성 윤(開城尹)이다.


장녀는 정순대부(正順大夫)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박동생(朴東生)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봉순대부(奉順大夫)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송무(宋懋)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혜비(惠妃 공민왕의 왕비)인데 지금은 비구니(比丘尼)가 되었다.


[瑞原郡夫人徐氏。通直郞,知瑞州事諱仲麟之女。生二女。長適中正大夫三司右尹金南雨。

次適奉善大夫典醫副正李有芳。側室生二女。長適中郞將林富陽。次幼。]


- 셋째 부인인 서원군부인(瑞原郡夫人) 서씨(徐氏)는 통직랑(通直郞) 지서주사(知瑞州事) 휘 중린(仲麟)의 딸인데, 2녀를 낳았다.


장녀는 중정대부(中正大夫) 삼사 우윤(三司右尹) 김남우(金南雨)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봉선대부(奉善大夫) 전의 부정(典醫副正) 이유방(李有芳)에게 출가하였다.


측실 소생으로 2녀가 있는데, 장녀는 중랑장(中郞將) 임부양(林富陽)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어리다.


[宗簿娶密直使兼監察大夫洪侑之女。生一男二女。男曰寶林。匡靖大夫政堂文學,

商議會議都監事,進賢館大提學,上護軍。長女適通憲大夫判衛尉寺事趙茂。

次適中顯大夫順興府使李元。又娶檢校中郞將金松柱之女。生一男。曰乃猷。曹溪宗廣度寺住持。]


- 종부(宗簿)는 밀직사 겸 감찰대부(密直使兼監察大夫) 홍유(洪侑)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 보림(寶林)은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 상의회의도감사 진현관대제학 상호군 (政堂文學商議會議都監事進賢館大提學上護軍)이다.


장녀는 통헌대부(通憲大夫)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조무(趙茂)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중현대부(中顯大夫) 순흥 부사(順興府使) 이원적(李元)에게 출가하였다.


종부 영은 또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 김송주(金松柱)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이름은 내유(乃猷)로 조계종(曹溪宗) 광도사(廣度寺)의 주지(住持)이다.


[摠郞娶上黨君白頤正之女。生三男一女。長曰德林。朝奉郞。驪興郡事。次曰壽林。

奉翊大夫同知密直司事。仕元朝爲翰林學士資善大夫。以故贈公太常卿。具勳階爵。

次曰學林。中顯大夫小府尹。女適奉翊大夫開城尹,光祿大夫同知樞密院事奇仁傑。]


- 총랑(摠郞)은 상당군(上黨君) 백이정(白頤正)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 덕림(德林)은 조봉랑(朝奉郞) 여흥 군사(驪興郡事)이다.


다음 수림(壽林)은 봉익대부(奉翊大夫)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인데, 원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자선대부(資善大夫)가 되었으므로, 공에게 태상경(太常卿)이 추증되고, 훈호(勳號)와 품계(品階)와 작위(爵位)가 갖추어 내려졌다.


다음 학림(學林)은 중현대부(中顯大夫) 소부 윤(小府尹)이다.


공은 봉익대부(奉翊大夫) 개성 윤(開城尹) 광록대부(光祿大夫)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기인걸(奇仁傑)에게 출가하였다.


 [開城娶重大匡,淸城君諡平簡諱公義之女韓氏。生一女。適春秋檢閱元序。

繼室正順大夫判典客寺事金昴之女。生二男一女。長曰蟠。删定都監判官。

次曰衮。慶仙店錄事。女幼。]


- 개성(開城)은 중대광(重大匡) 청성군(淸城君) 시(諡) 평간(平簡) 휘 공의(公義)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는데, 춘추 검열(春秋檢閱) 원서(元序)에게 출가하였다.


창로의 계실(繼室)은 정순대부(正順大夫)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김묘(金昴)의 딸로,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 반(蟠)은 산정도감 판관(刪定都監判官)이고, 다음 곤(袞)은 경선점 녹사(慶仙店錄事)이며, 딸은 어리다.


[司僕生二男四女。長男曰純義。奉善大夫軍器少尹。次曰純禮。中郞將。

長女適通直郞,起居郞,知製敎申渾。次適中正大夫親禦軍大護軍朴永忠。

次適奉善大夫小府尹黃侃。次適中郞將金錘。]


- 사복(司僕)은 2남 4녀를 낳았다.


장남 순의(純義)는 봉선대부(奉善大夫) 군기 소윤(軍器少尹)이고, 다음 순례(純禮)는 중랑장(中郞將)이며,

장녀는 통직랑(通直郞) 기거랑 지제교(起居郞知製敎) 신혼(申渾)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중정대부(中正大夫) 친어군 대호군(親禦軍大護軍) 박영충(朴永忠)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봉선대부(奉善大夫) 소부 윤(小府尹) 황간(黃侃)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중랑장 김추(金錘)에게 출가하였다.


[典農正生二男一女。長曰騭。郞將。次曰亮。中郞將。女適通憲大夫判繕工寺事安翊。

判典農生三男一女。長曰經。奉善大夫軍器少尹。次緯。別將。次殊文。別將。女幼。

典校生一男。幼。左尹生二男。長曰上佐。次曰廣大。女皆幼。]


- 전농 정(典農正)은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즐(騭)은 낭장(郞將)이고, 다음 양(亮)은 중랑장(中郞將)이며, 딸은 통헌대부(通憲大夫) 판선공시사(判繕工寺事) 안익(安翊)에게 출가하였다.


판전농(判典農)은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 경(經)은 봉선대부(奉善大夫) 군기 소윤(軍器少尹)이고, 다음 위(緯)는 별장(別將)이고, 다음 수문(殊文)도 별장이며, 딸은 어리다.


전교(典校)는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좌윤(左尹)은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상좌(上佐)이고, 다음은 광대(廣大)이며, 딸은 모두 어리다.


[曾孫男女若干人。趙衛尉生二男二女。長曰從善。中郞將。次遷善。權務。女皆幼。

李順興生一男二女。男曰有喜。崇恩殿直。女皆幼。驪興生二男二女。長男曰伸。

承奉郞供造署令。次曰密。長女適正順大夫判衛尉寺事李承源。次適宣德郞,通禮門祗候郭游禮。]


- 증손(曾孫)으로 남녀 약간 명이 있다.


조 위위(趙衛尉)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종선(從善)은 중랑장(中郞將)이고, 다음 천선(遷善)은 권무(權務)이며, 딸은 모두 어리다.


이 순흥(李順興)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유희(有喜)는 숭은전 직(崇恩殿直)이고, 딸은 모두 어리다.


여흥(驪興)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신(伸)은 승봉랑(承奉郞) 공조서 영(供造署令)이고, 다음은 밀(密)이며, 장녀는 정순대부(正順大夫)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이승원(李承源)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선덕랑(宣德郞) 통례문 지후(通禮門祗侯) 곽유례(郭游禮)에게 출가하였다.


[密直生二男二女。長曰崇義。次崇道。典客錄事。女皆幼。小府生一男二女。男幼。

長女適司憲持平金萬具。次幼。奇開城生一男。曰愼。]


- 밀직(密直)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숭의(崇義)이고, 다음 숭도(崇道)는 전객 녹사(典客錄事)이며, 딸은 모두 어리다.


소부(小府)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어리고, 장녀는 사헌 지평(司憲持平) 김만구(金萬具)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어리다.


기 개성(奇開城)은 1남을 낳았으니, 이름은 신(愼)이다.


[純義生一女。幼。純禮生一男。曰滋。一女幼。申渾生一男二女。男曰浩。大殿指諭中郞將。

長女適郞將黃允奇。次幼。大護軍生三男三女。長曰龍壽。別將。餘皆幼。

黃小府生一男二女。男曰藥奴。餘皆幼。騭生一男一女。男曰孝奴。女幼。亮生三男一女。

長曰伯恭。次伯謙。餘幼。]


- 순의(純義)는 1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순례(純禮)는 1남을 낳았는데, 이름은 자(滋)이고, 딸 하나는 어리다.


신혼(申渾)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호(浩)는 대전지유 중랑장(大殿指諭中郞將)이고, 장녀는 낭장(郞將) 황윤기(黃允奇)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어리다.


대호군(大護軍)은 3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 용수(龍壽)는 별장(別將)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황 소부(黃小府)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약노(藥奴)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즐(騭)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효노(孝奴)이고, 딸은 어리다.


양(亮)은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백공(伯恭)이고, 다음은 백겸(伯謙)이며, 나머지는 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