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시조 익재 이제현

익재공 묘지명(益齋公墓誌銘) 역문(譯文)의 어려운 단어(單語) 풀이

녹전 이이록 2008. 12. 28. 13:14

● 익재공 묘지명(益齋公墓誌銘) 역문(譯文)의 어려운 단어(單語) 풀이

 

 

○ 기호의 쓰임은 아래와 같다.

 

[  ]안의 글은 족보에 실린 원문 내용이고
* 표시는 아래에 별도로 설명을 한 곳이며
- 표시는 *표시의 내용에 대한 설명이며
^ 표시는 * 설명 중 또 설명이 필요할 시 ^표시로 나타냄.
# 표시는 [  ]안의 내용을 풀어서 설명한 글이거나 한 부분을 설명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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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墓誌銘)- ^묘지(墓誌)에 기록한 글. ≒묘명(墓銘).

^묘지(墓誌) : 죽은 사람의 이름, 신분, 행적 따위를 기록한 글.
사기 판이나 돌에 새겨 무덤 옆에 묻거나 관이나 호(壺)에 직접 새기기도 한다.

 

 

*역문(譯文)- 번역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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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至正- 元順帝의 年號) 二十七年 정미(丁未- 공민왕36년 1367) 추7월(秋七月)에
추성량절 동덕협의 찬화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계림부원군 영예문관춘추관사
(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鷄林府院君領藝文館春秋館事)
익재 선생(益齊先生) 이공(李公)이 병환으로

자택(自宅)에서 하세(下世- 어른이 돌아가심)하였으니 *향년(享年) 81(八十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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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년(享年)- 나이를 높여 부르는 말. 한평생 살아 누린 나이. 죽을 때의 나이를 말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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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상(太常-   예조禮曹)에서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고 十月에 *유사(有司)가 의식을 갖추어 우봉현 도리촌(牛峰縣桃李村)에 장례를 지냈다.

 

九年 후 동10월(冬十月)에 현릉(玄陵-공민왕릉)의 *묘정(廟庭)에 *배향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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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有司)- 궁중 종친부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리.


한편 전통사회의 단체 또는 자생적 모임의 직책명으로 소임(所任)이라고도 한다.

 

*묘정(廟庭)- 나라와 정치(政治)를 다스리는 조정(朝廷). 묘당(廟堂) ·묘우(廟宇)


임금의 조상들을 제향하는 종묘(宗廟)·태묘(太廟).


왕이 정사(政事)를 돌보는 정당(政堂)의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배향(配享)- 공신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일. ≒종향(從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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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의 휘(諱-죽은 사람의 이름 앞에 붙이는 글자)는 제현(齊賢)이요, 자는 중사(仲思)이며, 성은 李氏이니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赫居世)의 좌명대신(佐命大臣)인 이알평(李謁平)이 시조(始祖)이다.

 

그 후에 소판(蘇判-진골만이 가지는 벼슬) 거명(居明)이 병부령(兵部令-현 국방장관) 금현(金現)을 낳았고,

병부령(兵部令)이 삼한공신(三韓功臣-고려 건국시) 태수(太守) 금서(金書)를 낳았다.

 

신라왕(新羅王) 김부(金溥-경순왕)가 토지를 바치고 고려조(高麗朝)에 들어와서 태조(太祖-왕건)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으니 금서(金書-금현의 아들)의 아내가 되어 윤홍(潤弘)을 낳았고,

 

윤홍(潤弘)이 승훈(乘訓)을 낳았으며, 승훈(承訓)이 주복(周復)을 낳고, 주복(周復)이 칭(稱)을 낳고, 칭(稱)이 치련(侈連)을 낳고, 치련(侈連)이 총섬(寵暹)을 낳고, 총섬(寵暹)이 춘정(春貞)을 낳고, 춘정(春貞)이 현복(玄福)을 낳고, 현복(玄福)이 선용(宜用)을 낳고, 선용(宜用)이 승고(升高)을 낳고, 승고(升高)가 *문림랑 상의 직장 동정(文林朗尙衣直長同正) 휘 득견(得堅)을 낳고 상의(尙衣- 尙衣直長同正을 간략하게 칭한 말. 즉 득견을 말함)가 증좌복야(贈左僕射) 휘 핵을 낳고,

 

*복야(僕射)가 검교정승(檢校政丞) 시(諡-시호) 문정공(文定公) 휘 진을 낳았는데, 대릉 참봉(戴陵慘奉) 박인육(朴仁育)의 따님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에게 장가들어 지원(至元- 원나라 세조의 연호元世祖年號) 정해(丁亥-충렬왕13년 1287)年 十二月 경진(庚辰)에 공(公-휘 제현)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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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림랑(文林朗)

- 고려시대 문산계의 종9품은 최하위 벼슬로 종9품 상(上)은 문림랑이고, 종9품 하(下)는 장사랑(將仕郞)으로 제29등급이었다.


문림랑은 문관의 품계(品階)로 1076년(문종 30) 29품계를 정할 때 제28계가 되었으며 1308년(충렬왕 34)까지 존속하였다. 
 

*상의(尙衣)

- 고려와 조선 시대의 상의사(尙衣司)가 어의(御衣)를 공급하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이었고 봉어(奉御)와 직장(直長) 등의 관직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을 통해 볼 때, 이 상의는 신라 때부터 궁중에서 의복을 관장하던 관직으로 보임.

 

*직장동정(直長同正)

- 령동정(令同正)이라고도 하며 시험을 본 뒤 아직 서용(敍用)- 벼슬자리에 등용함) 하기 전의 ^영직(影職)

^영직(影職)- 조선시대에 직함은 있으나 맡은 직무가 없던 관직으로 차함(借銜)이라고도 하였다.

 

무품관(無品官)인 사람에게 품계를 주고자 할 때 그 품계에 해당하는 명목만의 관직을 주고 실직(實職)은 맡기지 않은 경우를 말한다.

 

세조 때 고려시대부터의 검교(檢校)·첨설(添設) 등을 없애고 동정(同正)을 설치하였다.


이들은 조회(朝會)에도 나가지 못했고, 아무런 녹봉이나 과전(科田)도 받지 못하였다

 

*복야(僕射)- 상서성(尙書省)의 관직 이름.

 

상서성에는 2품 이상의 재상 4인, 즉 상서령(尙書令)과 좌ㆍ우복야(左右僕射)와 지성사(知省事)로 구성되어 있고 도성의 장관인 상서령은 중서령(中書令)ㆍ 문하시중(門下侍中)과 함께 최고관품인 종1품이고 좌ㆍ우복야, 지성사도 중서문하성의 평장사(平章事)와 동렬적인 위치에 있다.

 

^사(射)자는 '쏠 사'로 '사'로 읽으나 벼슬이름에 붙을 때는 '야'로 읽는다.


 '사'로 읽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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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이 어릴 때부터 숙성하여 성인(成人)과 같았다.


이미 글을 지을 줄을 알아서 작가(作家)의 기상이 있었다.


대덕(大德-元成宗의 年號) 신축(辛丑-충렬왕27년 1301)에 公의 나이가 15(十五)인데 정상시선(鄭常侍 인변+善-상시 정선)이 성균관(成均館) 학생을 시험 보았다.

 

응시한 자들이 자기의 재능을 믿고 서로 자부하다가 公의 지은 바를 듣고 움츠리어 감히 앞을 다투지 못하더니 公이 과연 1등(一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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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李穡)이 찬(撰-글을 지음)한 '판서 박공(判書朴公) 묘지명(墓誌銘)'에
"영해 박씨(寧海朴氏) 전법판서(典法判書) 박원계(朴元桂)는 19세 때인 신축(辛丑)년에 정상시 희(鄭常侍僖- 常侍 鄭僖)가 성균관(成均館)에서 선비를 뽑을 때 이익재(李益齋) 시중(侍中)이 나이 15세에 장원(壯元)에 뽑히고 공(公-판서 원계)은 그 다음이었다." 라는 글이 있어 익재공이 15세에 장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족보 본문에는 '정상시 선(鄭常侍인변+善)'이라 되어있고 박공 묘지명에는 '정상시 희(鄭常侍僖)라고 기록이 되어 있어 이름이 상이하나 우리 족보에 기록된 휘가 바르다.

 

*상시(常侍)- 문하부에 속한 벼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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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에 *국재(菊齊-권부의 호) 권공(權公) 부(溥)와 열헌(悅幹-조간의 호) 조공(趙公) 간(簡)이 예조(禮曹)에서 시험을 보이매 公(익재공)이 또 병과(丙科)에 합격했고 *권공(權公)이 그 따님을 아내로 주었다. 
 

公은『이것은 조그만 재주일 따름이니 나의 덕량(德量-어질고 너그러운 마음씨나 생각)을 크게 축적하지 못한다.』하고 여러 서적(書籍)을 토론하여 널리 관통하고 정밀히 연구하여 *정당으로 절충(折衷)하니 문정공(文定公-동암공 휘 진)께서 크게 기뻐하며 말씀하되

『하늘이 혹 우리가문(家門)을 크게 창성(昌盛)시킬 것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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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재(菊齊) 권공(權公) 부(溥)와 열헌(悅幹) 조공(趙公) 간(簡)


- 국재공 권부와 열헌공 조간 (경주 이씨 15세 열헌공 휘 핵 할아버님의 호와 같음)

 

* 국재공(휘 권부)이 그의 따님을 익재공의 아내로 주었다. 즉 익재공을 사위로 삼았다.

 

*정당으로 절충(折衷)하니- 책을 읽고 토론하고 널리 통하고 정밀히 연구하여 서로 다른 사물이나 의견, 관점 따위를 알맞게 조절하여 서로 잘 어울리게 하여 정당한 논리에 이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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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묘(癸卯-先生十七歲)년에 임시적으로 *봉선고 판관(奉先庫判官-9품), *연경궁 녹사(官廷慶宮錄事 -9품)를 맡았고, 무신(戊申-先生二十二歲)年에 선출되어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니 *관내(館內)사람들이 미루어 사양하고 감히 글을 의논하지 못하였다.

 

그 해 겨울에 *제안부 직강(齊安府直講-정7품)으로 옮기고 기유(己酉-先生23歲)년에 *사헌 규정(司憲糾正-종6품)에 발탁되었다.

 

경술(庚戌-先生24歲)년에 *선부산랑(選部散郞-정6품)으로 옮기고, 신해(辛亥-先生25歲)년에 두 번째 *전교시승(典校寺丞-종5품)에 전직하고 세 번 판관(判官)을 맡으매 있는 곳마다 직책을 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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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고 판관(奉先庫判官)- 임금과 왕비의 제사에 쓸 쌀을 저축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판관(判官)- 고려 시대에 중앙에 둔, 5-9품까지의 벼슬.

 

*연경궁 녹사(廷慶宮錄事)- 연경궁에 속한 9품

 

*관내(館內) 사람들이 미루어 사양하고 감히 글을 의논하지 못하였다.


-예문관내에서 학사들이 익재공에게 일마다 사양하고 글에 대한 뛰어난 식견으로
감히 의논하지 못하였다.


*제안부 직강(齊安府直講)- 세자부의 정7품 또는 왕자부의 종6품 벼슬

 

*사헌 규정(司憲糾正)- 본래 어사대의 감찰어사이다.


충렬왕 34년에 사헌규정으로 이름을 고쳤다. 정5품 내지 종6품의 품계

 

*선부 산랑(選部散郞)- 선부는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전조(銓曹), 병조(兵曹), 의조(儀曹)를 합쳐 설치한 관아이고 산랑은 선부·총부·민부·언부(언部)에 둔 정6품 벼슬 
 

*전교시승(典校寺丞)- 경적(經籍-經書-성현의 가르침을 기록한 책)·축소(祝疏-축문)를 맡아보던 관아로 승(丞)은 정원 1~4명이었고, 주로 중앙의 각 관청에서 실무를 담당한 종5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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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皇慶-元仁宗 年號) 임자(壬子-忠宜王4年. 1312)에 선발하여 서해도 *안렴사(西海道按廉使)가 되매 옛 사람의 직간(直諫)하는 풍토가 있었다.

 

*성균악정(成均樂正-정5품)에 승진되었다가 겨울에 *제거풍저창사(提擧豊儲倉事-정5품)가 되었고, 계축년(癸丑年)에 부령내부(副令內部-종4품)가 되었는데 *풍저(豊儲)에서 *두곡(斗斛)을 감독하고 내부(內部)에서 치수(치銖-무게)와 척촌(尺寸-길이)을 맡아보매 公이 난색이 없이 처리하니 *사람들이 이르기를『李公은 헤아리지 못할 기국(碁局)이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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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렴사(按廉使)- 지방장관을 절도사(節度使)·안무사(按撫使)·안찰사(按察使)·
도부서(都部署) 등으로 부르다가 1276년(충렬왕 2) 안렴사로 고쳤다.

 

*성균악정(成均樂正)- 성균관에서 음악을 지도한 정5품 관직.

 

*제거 풍저창사(提擧豊儲倉事)- 풍저창의 으뜸벼슬인 정5품의 제거

 

*풍저창(豊儲倉)


- 고려 때 중앙의 제반 재정 업무를 주관하던 관청.


고려 문종(1046~83 재위) 때 개경에 설치되어 국가재정을 주관했던
좌창(左倉)·우창(右倉) 가운데 우창은 주로 공상미(供上米)를 관장하면서 전쟁과 가뭄·홍수 등 자연재해에 대비한 양곡을 관리했다.


우창은 1308년(충렬왕 34) 충선왕에 의해 풍저창으로 개칭되고,


공상미(供上米)를 관장하게 되었다.


관리로 사(使:정5품)·부사(副使:정6품)·승(丞:정7품)을 각 1명씩 두었다. 
 

*두곡(斗斛)


-곡식을 되는 말과 휘- 열 말의 용량. 또는 그 용량을 되는 연모. 한 말과 한 섬. 되질하는 일


* 사람들이 이르기를『李公은 헤아리지 못할 기국(碁局)이라』했다.

 

한자로 된 원문은 [인왈 이공 가위불기군자의(人曰李公可謂不器君子矣)]라고 되어 있다.


불기군자(不器君子)는 -子曰 "君子는 不器니라"라는 말에서 따 온 말이다.

 

- 공자께서 말씀하길 "군자는 그릇이 아니니라." 라는 말이다.


이 말은 그릇은 그릇의 용도로서 한가지 구실밖에 하지 못한다.

 

그러나 군자는 한가지 구실밖에 못하는 기물이나 기계가 아니다.


즉 훌륭한 인물은 한 곳에만 쓰이는 그릇이 되어서는 안 되고 편협하지 않은 전인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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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忠宜王) 때 원(元)의 인종(仁宗)을 보좌하여 내란(內難)을 정돈하고 무종(武宗)을 영립(迎立) 하였으므로 *두 조정에서 총애와 대우가 겨룰 이가 없었다.

 

드디어 *충숙왕(忠肅王)에게 전국(傳國-왕위를 넘김)하기를 청하고 *태위(太尉)가 되어 元의 경저(京邸-수도 연경燕京의 저택)에서 머물면서


만권당(萬券堂)을 세우고 학문을 연구하고 스스로 즐기며 이르기를

*서울에 있는 문학(文學)의 선비는 모두 天下에서 선발되었는데 *우리 부내(府內)에 그런 사람이 있지 않으니 이는 나의 수치라』했다.


公(익재공)이 부름을 받고 왕도(王都- 연경燕京)에 이르니 연우(延祐-元仁宗 年號) 갑인(甲寅- 忠肅王一年 1314) 정월(正月)이다.

 

*요목암(姚牧菴)·*염자정(閻子靜)·*원복초(元復初)·*조자앙(趙子昻)이 모두 왕의 문(門)에 와서 놀았다.

 

공(公)이 그 사이(위의 원나라 학자들)에 교류하여 학업이 더욱 진취되니 제공(諸公- 여러분)이 칭송하여 마지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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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조정에서 총애와 대우가 겨룰 이가 없었다.


-충선왕이 원나라 인종을 보좌하여 내란을 진압하고 무종을 맞았으므로 원나라와 고려의 두 조정에서의 사랑하심과 합당한 대우가 따를 사람이 없었다. 
 

*충숙왕(忠肅王)에게 전국(傳國-왕위를 넘김)하기를 청하고 -충선왕(忠宜王)이 스스로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러주고 원나라 태위(太尉)가 되어

 

*태위(太尉)


- 우리나라의 영의정. 元의 최고 관직으로 천자를 보좌하던 세 벼슬.


주나라 때는 태사(太師)·태부(太傅)·태보(太保)가 있었고 진(秦)나라때는 승상(丞相)·태위(太尉)·어사대부(御史大夫),


전한(前漢) 때는 대사마(大司馬)·대사공(大司空)·대사도(大司徒)가 있었으며 후한(後漢), 당나라, 송나라 때는 태위(太尉)·사도(司徒)·사공(司空)이 있었다.

 

*서울에 있는 문학(文學)의 선비는 모두 天下에서 선발되었는데 우리 부내(府內)에 그런 사람이 있지 않으니 이는 나의 수치라

 

- 수도인 연경의 문학자가 모두 천하에서 선발된 사람들인데 우리 부내(府內) 즉 원나라 수도 연경에 있는 승상부이며 만권당을 설립한 충선왕의 거처에는 아직 그런 사람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나의 수치이다.

 

*요목암(姚牧菴)- 목암(牧菴)은 요수(姚遂)의 호이다.

 
허형(許衡)의 문인(門人)으로 벼슬이 한림학사(翰林學士)이고 시호는 문(文)이다.

 

*염자정(閻子靜)- 자정(자정)은 염복(염복)의 자이다.


호는 정헌(靜軒)이고 벼슬이 평장정사(平章正事)였다.

 

*원복초(元復初)- 복초(復初)는 원명선(元明善)의 자이다.


시호는 문민(文敏)이고 춘추(春秋)에 정통했으며 벼슬이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이다.

 

*조자앙(趙子昻)- 자앙(子昻)은 조맹부(趙孟兆+頁)의 자이다.


호는 송설도인(松雪道人), 구파(鷗波)로 시문(時文)과 서화(書畵)에 능하였다.

 

○ 이때 진감여(陳鑑如)의 찬사(讚辭) 필적과 그림이 국보(國寶)로 지정되어 현재 덕수궁(德壽宮) 미술관에 보관되고 있다.

 

○ 익재공은 문장에 밝을 뿐만 아니라 외교적 수완도 비상해서 원(元)나라 정치가들이 그를 따르는 자들도 많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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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년(乙卯年)에 *선부의랑(選部議郞-정4품)에 옮기고 가을에 *성균좨주(成均祭酒-정3품)를 배수하고 인하여 의랑(議朗)을 겸직했다.

 

병진년(丙辰年)에 서촉(西蜀-고대 중국의 진秦나라 서쪽에 속해있던 지명)으로 사신을 갔는데 이르는 곳마다 지은 시가 사람의 입에 *회자(膾炙)되었다.

 

이 해에 *전교시 판사(典校寺判事-정3품)가 되고 정사년(丁巳年)에 *선부전서(選部典書-정3품)를 배수하고

을미년(乙未年)에 王(충선왕)이 향강남(香江南)에 내려오니 누대(樓臺-누각)와 풍물(風物)이 좋은 곳으로 흥을 만나고 회포를 풀었는데 매양 조용히 말하기를 *『이 사이에 李生(익재공)이 없을 수 없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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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랑(議郞)- 육부(六部)에 둔 정4품 벼슬. 충렬왕 34년(1308)에 시랑을 고친 것으로,
공민왕 5년 (1356)에 다시 시랑으로 고쳤다가, 21년(1372) 이후 총랑으로 고쳤다. 
 

*성균 좨주(成均祭酒)- 성균관(成均館)의 정3품 벼슬. 주로 석존(釋奠)의 제향(祭享)을 맡음.


학덕이 높은 사람이 맡았다.


^'祭酒(제주-제사에 올리는 술)'라고 읽으나 벼슬을 말할 때는 '성균 좨주'나 '성균관 좨주'라고 읽는다.


*회자(膾炙)- 회와 구이를 나타내는 말이다.

 

누구나 좋아하는 음식으로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하여 소문이 도는 것을 말한다.


익재공의 시를 사람들이 그와 같이 좋아한다는 의미이다.


*전교시 판사(典校寺判事)- 경적(經籍-經書-성현의 가르침을 기록한 책)·


축소(祝疏-축문)를 맡아보던 관아로 판사(判事)는 재상이 겸임하던 삼사(三司)와 상서육부의 으뜸 벼슬이나 사헌부(司憲府) · 통례문 · 전교시 따위에 둔 정3품 벼슬.


*선부전서(選部典書)- 선부(選部)·민부(民部)·헌부(헌部)에 둔 으뜸 벼슬.

 

*『이 사이에 李生(익재공)이 없을 수 없다.』


공이 33세때인 기미년에 왕이 강남을 구경할 때 좋은 누대와 풍물을 보면 빈객들과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회포를 풀었는데 이럴 때에 「익재공이 없으면 안된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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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년(庚申年)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밀직사 지사. 종2품)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내리었으며 *지공거(知貢擧- 과거시험관의 우두머리)로 있을 때에 선비를 얻었다고 칭찬이 있었으니

대저 공의 나이 34歲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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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 밀직사에 속한 종2품 벼슬. 충렬왕 때 지추밀원사를 고친 것이다. ≒지밀직 · 지밀직사 · 지사사.


*지공거(知貢擧- 과거시험관의 우두머리)로 있을 때에 선비를 얻었다고 칭찬이 있었으니


-지공거로 실력있는 선비를 급제시켜 왕으로부터 칭찬이 있었다.


최갑룡(崔甲龍)등 33명을 급제시켜 왕으로부터 은병 50과 쌀 백석을 하사받고 잔치연을 받았다.

 

○ 나라의 바른 기틀과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지극히 존중하는 익재공은 충숙왕(忠肅王) 10년 (1323)에 유청신(柳淸臣)과 오잠(吳潛)등이 원나라에 글을 올려 고려(高麗)를 원나라의 성(省)으로 하여 원의 제성(諸省- 여러 성))과 동등하게 해 달라고 청하였을 때 익재공은 도당(都堂-  원나라의 의정부)에 글을 올려 고려(高麗) 400년의 토대가 이로 말미암아 무너진다고 간곡히 호소하여 성(省)이 되는 것을 철회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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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文定公-동암공 진) 및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 박씨(朴氏)와 외구(外舅-장인) 권공(權公- 文正公 權溥)의 부부가 모두 건강하였으므로 공이 잔치를 열어 술을 올리니 온 세상에서 부러워했다.

 

이 해에 *고려왕부 단사관(高麗王府斷事官)을 제수 받았고 지치(至治-元英宗 年號) 임술(壬戌- 忠肅王9年 1322)년 겨울에 元나라 서울로 올라오다가 도착하지 못하여 *충선왕(忠宜王)이 참소를 당하고 서번(西蕃- 토번이나 서역을 의미)으로 쫓겨났다. 
 

公이 찾아가 배알하고 왕래하는 도중에 시를 지어 읊었는데 충분(忠憤- 충의로 인하여 일어나는 분한 마음)의 마음이 애연하게 발로(發露)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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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문정공(文定公)과 어머니 진한국부인 박씨,
그리고 장인인 문정공(文正公) 부부가 모두 건강하여 익재공이 잔치를 열어 만수무강을 비는 술을 올렸다.

 

^ 35세에 아버지 동암공의 상사를 당하였다. 


*고려왕부 단사관(高麗王府斷事官)


-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에 두었던 왕부이며

 

단사관은 왕부내에서 정치와 형벌을 행하는 지방행정 전반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는 최고책임자이다. 
 

*충선왕(忠宜王)이 참소를 당하고 서번(西蕃- 토번이나 서역을 의미)으로 쫓겨났다.


-임술(壬戌-忠肅王9年 1322)년 겨울에 단사관을 제수 받고 元나라 연경으로 올라왔는데 연경에 도착하지도 못하여 충선왕이 원 조정의 참소를 당하여 서번으로 귀양살이를 갔다.


익재공이 서번에서 귀양살이하는 충선왕을 찾아뵙고 왕래하는 도중에 시를 읊었는데 분한 마음이 지은 시(詩)속에 애연하게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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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정(泰定-元普宗의 年號) 갑자(甲子-忠淵王十一年 1324)년에 광정대부(匡靖大夫-종2품) 밀직사사 (密直司事)를 가자(加資-품계를 더함)하고 을축년(乙丑年)에 공신의 호를 다시 내리어 추성량절(推誠亮節)이라 하고

두 번 *첨의평리(僉議評理-종2품) *정당문학(政堂文學-종2품)에 전직되었다가


병인년(丙寅年) *삼사사(三司事)에 옮기었다.

 

천력(天曆-元明宗 年號) 경오년(庚午年)에 충혜왕(忠惠王)이 국권을 잡으매 다시 정당문학 (政堂文學)이 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파직되었다.

 

지원(至元-元順帝 年號) 병자(丙子-忠淵王5年 1336)에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으로서 김해군 (金海君)을 봉하고 *영예문관사(令藝文館事-예문관 영사. 정1품)를 받았다. 
 

을미년(乙未年) 봄 二月에 충숙왕(忠肅王)이 승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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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의평리(僉議評理)- 도첨의사사와 도첨의부, 문하부에 둔 종이품 벼슬.


공민왕 11년(1362)에 평리를 고친 것이다. 
 

*정당문학(政堂文學)- 중서문하성에 속한 종2품 벼슬. 뒤에 참문학사로 고쳤다

 

*삼사사(三司事)- 전곡(錢穀)의 출납과 회계에 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삼사(三司)의 으뜸 벼슬. 품계는 종1품으로 재신(宰臣)이 겸하였다. ≒판사사

 

*영예문관사(令藝文館事)- 사명(辭命-임금의 말이나 명령)을 짓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공민왕 11년(1362)에 한림원을 고친 것으로 공양왕 원년(1389)에 춘추관을 합하여 예문춘추관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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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가을에 정승 조석(曺석=由+頁)이 백관(百官)을 위협하여 영안궁(永安宮)에서 군대를 둔치고 왕의 측근에 악당과 소인을 축출한다고 선언하고 속으로는 심왕(瀋王)을 위하였으므로 충혜왕(忠惠王)이 정기(精騎)를 인솔하고 공격하여 죽이었는데 그 여당(餘黨-남은 잔당)으로 심도(瀋都-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에 있는 자가 많았다.

 

반드시 충혜왕(忠惠王)에게 죄를 돌리려하니 인심이 의구(疑懼- 의심하고 두려워함)하여 화를 측량할 수가 없었다. 
 

공(公)이 분격하여 몸을 돌아보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우리 임금의 아들을 알뿐이다.' 하고 경사(京師-원나라 서울)에 가서 말 대신에 글월로 대답하여 일을 분석(分析)하였으니 공로가 1등에 있었다.

 

이미 돌아오매 뭇 소인들이 더욱 선동하였다.

 

공(公)이 종적을 감추어 나오지 않고 『낙옹패설(木+樂翁稗說)』을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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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승 조석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충혜왕이 정병을 이끌고 공격하여 잡아 죽였지만
조석을 따르던 남은 무리들이 심왕를 위하여 날뛰었다.

 

반드시 충혜왕에게 죄를 물을 것 같아 모두 두려워하였다.


이에 분격한 익재공이 직접 심양에 가서 원나라 조정과 글월로 문답하였다.

 

사리를 따지고 자세한 내용을 밝혀 이 일이 무사히 처리되었으므로 공로가 1등이었다.


그러나 돌아오자 뭇소인들이 더욱 왈가왈부 말이 많으므로 익재공을 몸을 숨겨 나오지 않았으니 그 사이에 유명한 『낙옹패설(木+樂翁稗說)』을 저술하였던 것이다.

 

○ 1336년엔 심양왕(瀋陽王) 고(暠)의 모역으로 충숙왕(忠肅왕)이 잡혀가자 연경(燕京)에 가서 이를 해명하고 이듬해에 귀국해서 향리(鄕里)에 은거하였다.

 

○ 심양왕(瀋陽王- 심왕)


고려시대 원(元)나라에서 고려 왕 또는 왕족에게 수여했던 봉작(封爵)의 일종.


1308년(충렬왕 34) 고려의 전왕(前王)인 충선왕을 심양왕으로 봉한 것이 시초이다.

 

이것은 당시 심양(瀋陽) 등지에 고려인 전쟁포로나 유민들이 거주하여 특수한 지역을 형성하였을 뿐 아니라 교통·군사·경제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이 지방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것으로, 심양에 대한 통치권한을 어느 정도 인정하여 주었다. 
 

이후 심왕(瀋王)으로 개칭되었는데, 충선왕의 조카인 연안군(延安君) 고(暠)가 심왕이 된 뒤부터는 실권행사가 어렵게 되어 명예적인 봉작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고려왕과 심양왕은 서로 견제심리에 의해 반목과 질시의 대상이 되어 심양왕의 지위를 둘러싸고 분규가 잦았으며, 고려 조정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무리들이 심양왕과 결탁, 심양왕을 왕으로 추대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관계를 교묘히 이용한 원나라는 쇠약해진 국력으로도 고려에 대한 외교정책에서 주도적으로 군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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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至正) 갑신년(甲申年) 겨울에 충목왕(忠穆王)이 왕위에 오르매 부원군(府院君-정1품 공신에게 주던 작호)에 진급하여 영효사관사(令孝思觀事- 효사관 영사. 고려 태조 왕건을 신위를 모시던 곳)를 제수하니 서연(書筵- 임금의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던 자리)에서 *공(公)으로서 스승을 삼았다.

 

병술년(丙戌年)에 충렬왕 실록을 편수하고 무자년(戊子年)에 판삼사사(判三司事-종1품)가 되었다.

 

신묘년(辛卯年) 겨울에 공민왕(恭愍王)이 왕위에 오르자 본국에 이르지 않아서 *공(公)에게 우정승(右政丞)을 제수하고 임시로 정동성사(征東省事-원나라가 일본정벌을 위하여 고려에 서울에 설치한 관아)의 서리(署理)를 보게 했는데 수개월이내에 나라가 비게 되었다. 
 

공(公)이 모든 일을 조처함이 적당하므로 사람들이 힘입어서 안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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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으로서 스승을 삼았다.


- 충목왕이 익재공을 스승으로 삼았다.


*공(公)에게∼∼


- 공민왕이 원나라의 허락을 받아 왕위에 오르자 우리나라에 오기 전에 먼저 익재공에게 우정승의 관직을 내리고 임금이 비는 수개월동안 임시로 정동성사(征東省事)의 서리(署理) 맡겼다. 
 

나라 살림을 잘 처리하고 모든 일에 부당함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안심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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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壬辰年)에 추성량절동덕협의찬화공신(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의 호를 하사하니 원종공신 (原從功臣) 조일신(趙日新)이 공(公)이 자기의 위에 있음을 꺼리었다.

 

*공(公)이 알고 세 번 상표(上表-임금에게 글을 올리던 일)하여 고사(固辭)했다.

 

그 해 겨울 10월에 조일신(趙日新)이 불측(不測)한 무리를 모아서 밤중에 궁중에 궁궐로 들어와 미운 자를 해치되 군사를 놓아 마구 베여 죽이었는데 공(公)은 벼슬을 사임(辭任)하였으므로 모면(謀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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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이 알고 세 번 상표(上表-임금에게 글을 올리던 일)하여 고사(固辭)했다.


-우정승(右政丞)을 제수하고 임시로 정동성사(征東省事)의 서리(署理)로 국정을 운영하고 공신(功臣)의 호를 더하니 원종공신(原從功臣) 조일신(趙日新)이 익재공이 자기의 위에 있음을 알리었음을 알고 임금에게 글을 올려 우정승 사임을 굳이 청했다.

 

뒤에 조일신이 난을 일으키어 중신들을 마구 죽였는데 다행이 공은 벼슬을 사임하였기 때문에 화를 면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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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日新)이 복주(伏誅- 형벌을 순순히 받아 죽음)되자 공(公)을 기용하여 우정승(右政丞)을 삼았더니 계사년(癸巳年) 정월에 사임하고 5월에 부원군(府院君)으로서 지공거(知貢擧-과거시험관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갑오(甲午) 12월에 다시 우정승(右政丞)이 되었다가 명년(明年-다음해)에 또 사임하니 공의 나이 70이다.


김해후(金海侯)를 봉하고 12월에 *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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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하시중(門下侍中)- 중서문하성의 종1품 으뜸 벼슬.


성종 1년(982)에 처음으로 두고 문종 때 정원 및 품계를 정하였으며, 충렬왕 1년(1275)에 첨의중찬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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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丁酉) 5월에 본직(本職-현재의 문하시중 벼슬)으로서 *치사(致仕-벼슬자리에서 물러남)할 것을 구하니 따라주었다. 
 

국제(國制-나라 제도)에 군(君)을 봉(封)한 자가 치사(致仕)하매 녹봉(祿俸)을 반포함이 차등이 있으나 이미 늙어서 많은 녹봉을 받는 것이 의리에 불안하므로 이러한 소청이 있었는데 조정에서 의논하되 본직(本職)으로 치사(致仕)하는 것이 대신(大臣)을 공경(恭敬)하는 바가 아니라고 하여 임진년(壬辰年)에 다시 계림군(鷄林君)을 봉(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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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나이가 많아서 본직인 문하시중 벼슬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니 나라에서 허락하였다.

 

나라의 제도에 군(君)을 봉한 자가 벼슬에서 물러남을 청하여 녹봉을 줌에 본직(문하시중)에서 물러남과 차등이 있다. 
 

그러나 익재공이 많은 녹봉을 받는 것이 미안스럽고 불안하여 녹봉을 감하는 소청을 하였는데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본직(문하시중)으로 치사하는 것은 대신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고 의논되어 다시 계림군에 봉하여 졌다. 
 

*녹봉(祿俸)


- 벼슬아치에게 일 년 또는 계절 단위로 나누어주던 금품을 통틀어 이르는 말.


쌀, 보리, 명주, 베, 돈 따위이다. ≒녹·녹료·녹조·녹질·봉록·봉질·식록·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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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이 15세(十五歲)때 과거에 오르므로 부터 명성이 한 세상을 덮었다. 
 

조정에 선 이래로 오로지 문장(文章-문장가. 외교문서 등을 전담)을 맡았고 외직(外職-중앙이 아닌 지방관직)을 지낼 때에도 예문춘추(藝文春秋)의 양관(兩館)에 속관이 되었고 김해(金海), 계림(鷄林)의 양부(兩府)에 君을 봉함에도 일찍이 관직을 떠나지 않았는데, 오직 충정왕(忠定王) 3年에는 이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公이 일찍이 상소하여(上疏)하여 현릉(玄陵-恭愍王)을 세우기를 청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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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15세에 과거에 장원하여 벼슬길에 오른 후 계속 관직을 가졌다.

 

지방관직으로 지방에 나갈 때도 예문관과 춘추관에 속하였으며 김해군, 계림군에 봉하여 졌을 때도 관직을 떠나지 않았다. 
 

다만 충정왕 3년에만 관직을 떠났는데 이는 익재공이 충정왕 때 공민왕을 왕으로 세우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조정의 미움을 사 벼슬에서 물러난 것이다.

 

그러나 충정왕 3년 겨울에 공민왕이 즉위하였는데 현릉(공민왕의 능호. 공민왕을 능호인 현릉으로 불렀다)이

원에서 돌아오기 전에 공을 미리 우정승에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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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이 천품(天稟-타고난 기품)이 후중(厚重-무겁고 관후함)하고 학문으로서 보좌하여 고명 정대 (高明正大)하므로 언론(言論-말이나 글)에 발로(發露-겉으로 드러남)되고 사업(事業)에 조처함이 빛이 있어서 가히 볼만했다.

 

처음에 공(公)이 사기(史記)를 읽을 적에 필삭(筆削-기록하기도 깍기도 함)의 대의(大義)를 반드시 춘추(春秋-공자가 만든 역사서)를 법으로 삼았다.

 

*측천기(則天紀)에 이르러서는 말하기를 「어찌 주(周)나라 여분(餘分)을 가지고 우리 당나라 일월 (日月)을 어둡게 하리요」했는데 후일에 주자강목(朱子綱目)을 얻어서 읽고 스스로 자기의 식견이 정대(正大)했음을 자부(自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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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익재공의 타고난 기품이 관후하고 무거운데다가 학문이 뒷받침되어 높고 발라
말이나 글에 드러나고 일을 함에 그 처리하는 것이 뛰어났다 
 

사기를 읽을 때는 대의를 춘추를 기본으로 삼았다.

 

측천기(則天紀)를 읽고 익재공이

'주 나라를 망하게 한 왕후 포사의 남은 짓거리를 측천무후가 따라하여

우리 당나라를 어두운 나라로 만드는데 이는 가당치 않은 일이다'

라고 평을 했는데 뒷날 주자강목에서 자기의 읽고 느낀 평이 옳았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측천기(則天紀)


- 당나라 측천무후의 역사. 그는 고종의 황후였는데 고종이 죽은 후에 아들을 물리치고 스스로 황후가 되어 나라 이름을 주로 고치었다.


16년 만에 다시 당나라가 복원되었다. 
 

익재는 그 기록을 보다가 개탄을 금치 못했다가 주자강목에서는 주나라에게 왕통을 주지 않았음을 보고서 자기의견과 같았다고 기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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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조그만 선행(善行)도 칭찬하여 알려지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선배(先輩)의 남긴 사업(事業)은 비록 작더라도 따르기 어렵다고 했다.

 

평생에 빠른 말과 급한 빛으로 상담패설(相談稗說)에 미치지 않았으며 손님을 대하여 술을 준비하고 예(禮)와 이재(理財-재물을 모음)를 평론하며 반기기를 마지않으니 최졸옹(崔拙翁-이름은 해瀣. 졸옹은 호)이 감탄하며 이르기를 「선비가 작별한제 3일만에 눈을 닦고 서로 대한다는 것을 나는 익재에서 보았다.」고 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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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익재공은 다른 사람의 조그만 착한 일과 칭찬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선배들이 남긴 여러 사업들이 작더라도 그 일을 해내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익재공의 세밀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평생을 빠르고 급한 말과 급한 얼굴을 볼 수 없었고 더러운 말을 하지 않았다.

 

손님을 대하여 술을 준비하고 예의와 재물을 다스리는 것을 평론하며 반갑게 맞는다.

 

최졸옹(崔拙翁)이 익재공의 손님맞이에 대하여 마음에 맞고 뜻이 통하는 선비는 헤어져도 또 만나기를 원하여 3일만에 단정하게 하여 대한다는 것을 익재공 한테서 보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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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이 구법(舊法) 따르기를 힘쓰고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뜻이 어찌 옛 사람만 같지 못하리요. 다만 나의 재주가 옛 사람에 미치지 못한다.」했다. 
 

공(公)의 손자(19세 수림)가 기씨(奇氏)와 혼인을 하매 공이 그 너무 성만(盛滿-풍성하고 그득함) 함을 꺼리었는데 그(손자)가 평장(平章)이 되자 공민왕이 *양제(兩制-한림학사와 중서사인)에게 명하여 시(詩)를 지어 축하하도록 하고 또 공(公)에게 명(命)하여 그 일을 서술(敍述)하라 하니 공(公)이 사양하여 하지 않았고 스스로 호를 *익재(益齋)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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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익재공이 구법 따르기를 좋아하고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유인즉 새 법을 만들어 백성들을 편안히 살도록 하는 것과 같은 뜻은 옛 사람과 같지만 나의 재주가 옛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니 재주가 미치지 못하는 내가 구법을 고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손자인 19세 밀직사사 수림(壽林)이 행주 기씨(幸州奇氏) 찬성사(贊成事) 원(轅)의 따님과 혼인을 하는 것이 당시 기씨들의 권세가 높아 꺼리었다.


손자가 평장이 되자 공민왕이 한림학사와 중서사인에게 축하 시를 짓도록 하고 익재공에게는 서술하라하니 익재공이 사양했다.

 

호를 익재라 자호했다.

 

뒷날 한림공(翰林公 휘 수림. 익재공 차자 달존의 차자)은 노원당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다.

 

*양제(兩制)


- 외제와 내제를 말함이니 내제는 한림학사이고 외제는 중서사인이니 모두 왕명에 의해 글을 짓는 벼슬이다. 
 

*익재(益齋)


- 문충공의 호이다.


자호(自號)-스스로 지었다.


익(益)은 더할 '익'이고 재(齋)는 재계할 '재'이니 몸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함을 더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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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辛旽)이 패망(敗亡)함에 공민왕(恭愍王)이 말하기를 
 

「*익재(益齋)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은 따르지 못하겠도다.

 

일찌기 돈(旽)은 단정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더니 *이제 과연 실험(實驗)이 된다.」하였다.

 

공(公)이 젊어서부터 동년(同年)도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반드시 익재(益齋)라고 일컬었으며 재상(宰相)이 되어서는 귀천(貴賤)이 없이 모두 익재(益齋)라고 칭하였으니 그 *세상에서 존중함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공(公)의 저술(著述)한 문집(文集) 약간 권(券)이 세상에 행하여지고 있다.

 

*공(公)이 무릇 3취(三聚)했으니 길창국부인 권씨(吉昌國夫人權氏)며(궐한다)

 

화 택주 (義和宅主)를 봉한 수춘국부인 박씨(壽春國夫人朴氏)는 서경(西京) 등에서 만호(萬戶) 및 부만호(副萬戶) 중현대부(中顯大夫) 사복정(司僕正)을 제수받은 휘 거실(居實)의 따님이며(궐한다)

 

서원군부인 서씨(瑞原君夫人徐氏)는 통직랑(通直郞) 지서주사(知瑞州事) 휘 중린(仲麟)의 따님이며 *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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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재(益齋)의 선견지명(先見之明)


공의 나이 15세에 과거에 급제 후 벼슬길에 나아가 향년81세에 돌아가셨으니 66년간이며 관직에 몸을 담은 것은 17세에 9품인 봉선고 판관. 연경궁 녹사로 시작하여 71세에 문하시중으로 나이가 많아 벼슬을 치사하게 되었는데 충목왕 때 공민왕 세우기를 주장하다가 충정왕이 즉위했는데  그 일로 오직 충정왕 3년간(1349-1351)은 관직을 떠난 것을 제외하면 50여년간 관직에 몸을 담았던 것이다. 
 

비록 신돈의 사람됨을 일찍부터 깨닫고 임금에게 알린 것은 고사하고라도 손자 수림의 기씨와의 혼인도 매우 꺼리었다는 점에서 앞을 내다보았으나 당시의 어쩔 수 없는 사정에 의해 기씨와의 사돈이 맺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서 조일신의 시기에 우정승을 사임하였고 원나라에 가서 충혜왕이 덮어쓸 죄를 필담으로 좋게 마무리짓고 돌아와서도 소인배들의 분탕질에 몸을 숨기고 낙옹패설을 저술한 것 등은 선견지명이 없고서는 이루지 못할 일이다.

 

*이제 과연 실험(實驗)이 된다


- 원문이『嘗辛旽非端人(상신돈비단인)이러니 今果驗(금과험)이라하다』이다.


이는 '일찍이 신돈은 단정한 사람이 아니라더니 이제야 과연 경험한 대로다.'라고 해야 한다.

 

*세상에서 존중함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 스스로 지은 호가 '익재(益齋)'이다.

 

몸을 더욱 깨끗이 정결하게 더해 간다는 뜻이다.


젊어서부터 동년배(同年輩)도 감히 이름(초휘는 지공之公. 자는 仲思. 제현齊賢)을 부르지 못하고 반드시 익재(益齋)라고 불렀으며 재상(宰相)이 되어서도 계급의 귀하고 천함이 없이 모두 익재 선생(益齋先生)라고 칭하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중함을 받았다.

 

*공(公)이 무릇 3취(三聚)했으니∼∼.


-익재공이 81세의 수를 누리는 동안 부인만 세 분을 맞이하여 3남 9녀를 두었다.


물론 첩(妾)도 있고 딸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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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銘- 금석에 새긴 글자)에 이르기를


"天地가 정기를 모아 公이 태생하였고 *규벽(奎壁)이 빛을 내었으니 公이 이에 드날리었네.

 

이름은 天下에 가득했고 몸은 해동(海東)에 살았도다.

 

도덕(道德)의 우두머리요. *문장(文章)의 종주(宗主)이네.

 

북두(北斗-북두칠성)와 태산(泰山-높고 큰 산)같으니


*창려(昌黎)의 한퇴지(韓退之)이고 *광풍(光風)과 제월(霽月)같으니


춘릉(春陵-봄 언덕)에 *주렴계(周濂溪)로다.

 

*네 번 국권(國權)을 잡았고 나이는 팔순이 넘었는데


기린과 봉황새 같은 상서(祥瑞)요. 시초(蓍草-콩과 식물)와 거북같이 신통하였네.


공로는 사직(社稜)에 존재하고 덕택은 생민(生民-백성)에게 흘렀다.

 

*종묘(宗廟)에 배향(配享)되었으니 슬퍼함과 영화로움이 따를 이가 없구나.


오직 자손(子孫)들은 충효(忠孝)를 따를지어다.

 

앎이 없다고 이르지 마오. 公이 구원(九原-저승)에 계시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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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벽(奎壁)


- 별자리 28수중의 ^규수(奎宿)와 벽수(壁宿)이다.


두 별은 문운(文運)을 주관하기에 보통 문원(文苑)을 비유한다


^규수(奎宿)- 이십팔수(二十八宿)의 열 다섯째 별자리.


초여름에 자오선을 지나며, 주성(主星)은 안드로메다자리의 제타성이다.

 

^벽수(壁宿)- 이십팔수의 열 넷째 별자리. ≒벽(壁).


*문장(文章)의 종주(宗主)- 문장가의 으뜸

 

*창려(昌黎)의 한퇴지(韓退之)


당(唐)의 문장가로 자는 퇴지(退之)이고 이름은 유(愈)이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고문(古文)의 대가이며 중국 근세 문장의 조(祖)로 유명하다.


시문집으로『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이 있다. 
 

*광풍(光風)과 제월(霽月)- 비가 갠 뒤에 맑은 햇살과 시원한 바람과 하늘의 밝은 달

 

*주렴계(周濂溪)


- 송나라 신종 때 유학자로서 이름은 돈이(敦臣+頁)이다


태극도설을 주창했는데 신라 때 창건한 감은사지 석탑장대석에 새겨진 태극도형은 682년으로 보아 주렴계의 태극도설 보다 388년이나 앞섰다.


연꽃을 좋아했던 주렴계(周濂溪)는‘애련설’(愛蓮說)을 쓰면서, 연꽃의 특징을 군자의 성품에 비유하였다.

 

*네 번 국권(國權)을 잡았고


- 신묘년(1351) 겨울 65세에 우정승.
- 임진년(1352) 10월 66세에 우정승

(조일신의 시기로 사직을 했다가 일신이 제거된 후 다시 우정승 제수)
- 갑오년(1354) 12월 68세에 우정승으로 복위
- 병신년(1356) 12월 70세에 문하시중 제수 
 

*종묘(宗廟)에 배향(配享)


- 홍무9년(洪武九年. 우왕禑王2년. 1376) 병진년(丙辰年)에 공민왕(恭愍王-顯陵) 묘정(廟廷)에 배향(配享)함.

 

○ 네 번의 정승


 1351년 겨울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정승(右政丞)에 임명되었다.

 

자기보다 윗자리에 있는 것을 시기하는 조일신의 시샘을 눈치채고 3번 사표 후 물러났다.


1352년 10월 조일신이 반란을 일으켜 주륙당하자 다시 우정승을 제수 받고 1353년 1월 사표

 

1354년 12월에 다시 우정승에 복위되었다가 1355년 정승 사임


1356년 12월에 문하시중이 되고 1357년 5월에 본직으로 치사하였다.

 

* 네 번의 정승 관직이 모두 수개월만 재직하였고 총 재직기간이 2년 미만이다. 


○ 치사(致仕-벼슬을 떠남)후 하세(下世-돌아가심)까지

 

- 정유년(1357) 5월 71세 치사(致仕)함


- 임인년(1362 - 공민왕 11년) 76세에 다시 계림부원군에 봉함

 

- 정미년(1376) 7월 80세 하세(下世). 태상(太常)이라 존칭. 시호 문충(文忠).


10월 국장(國葬)의 예(禮)로 장사 - 우봉도리촌 선영하 안장.


- 우왕 2년(1376) 공민왕(恭愍王-顯陵) 묘정(廟廷)에 배향(配享)함.

 

○ 벼슬살이를 떠나서는 시를 썼고 성리학자로서 후진들에게 이기(理氣)에 대한 강론을 펴서 학문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