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시조 익재 이제현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녹전 이이록 2008. 12. 27. 20:36

■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익재공파 대파조 중조 17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생몰(生沒-태어나고 죽음) 연대는 정해(丁亥. 1287. 충렬왕 13년)년에 태어나시고 정미(丁未. 1367. 공민왕 16년)년에 돌아가시니 수 81세이다.

고려 말의 문신(文臣)으로 정치가(政治家)이며 외교가이고 성리 학자(性理學者)이며 시인(詩人)으로 문학가이다.

초명(初名)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 실재(實齋), 역옹(木+樂翁)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아버지는 검교정승(檢校政丞) 진(王+眞)이시고 어머니는 진한국태부인 춘천 박씨 대능직 인육의 따님(辰韓國太夫人朴氏戴陵直仁育女)이시다.

백이정(白이正)의 문인이며 경주 이씨 중조 17세로 익재공파(益齋公派) 파조(派祖)이시다. 
 

연도별로 나타낸 할아버님의 행적이다.

 

1301년 (辛丑年 충렬왕27년) 15세에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

1303년 (癸卯年) 권무 봉선고 판관(權務奉先庫判官) 연경궁 녹사(延慶宮錄事) 등을 거쳐

1308년 (戊申年) 예문 춘추관(藝文春秋館)에 등용되고 제안부 직강(齊安府直講)을 지낸 후

1309년 (己酉年) 사헌부 규정(司憲府糾正)에 역임되고

1310년 (庚戌年 충선왕 2년) 선부산랑(選部散郞-이조, 예조, 병조가 합친 관아)

1311년 (辛亥年) 전교시승(典校侍丞-서적 관리) 삼사판관(三司判官-전곡의 출납과 회계)등을 역임하였다, 
 

1312년 (壬子年) 25세에 서해도 안렴사(西海道安廉使- 서해도-황해도)로 나갔다가 그 해 성균관 악정(成均館樂正) 풍저창 제거(豊儲倉提擧-조제조와 같음. 곡식 종이 등)를 지냈다.

 

1313년 (癸丑年) 내부부령(內府副令) 풍저감두곡(豊儲監斗斛- 술, 장, 꿀 같은 직조를 맡는 곳)을 역임하고

1314년 (甲寅年 충숙왕 1년) 백이정의 문하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공부하였다. 
 

이해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萬券堂)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燕京)에 가서 원나라 학자 요목암(姚牧菴-요수姚燧의 호), 조자앙(趙子昻-조맹부趙孟膚의 字), 염자정(閻子靜-閻復의 字), 원복초(元復初-元明善의 字) 등과 함께 고전을 연구했다. 
 

1315년 (乙卯年) 선부의랑(選部議郞)이 되고 가을에 성균제주(成均祭酒)가 되었다.

1316년 (丙辰年) 서촉(西蜀) 사신. 전교사판사(典校寺判事)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에 승진

1317년 (丁巳年) 선부 전서(選部典書)로 원나라에 가서 상왕(上王)의 생일을 축하했다.

1319년 (己未年) 충선왕을 수행하여 중국 강남지방을 유람하였으며

1320년 (庚申年) 34세 때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고 공거(工擧)직도 맡아보았다,

원나라에 가서 고려왕부 단사관(高麗王府 斷事官-왕부에 병사를 두어 다스리는 지역) 종일품(從一品)을 제수 받았다. 
 

1322년 (壬戌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충선왕이 빠이앤투그스(伯顔禿古思)의 모함을 받고

서번(西蕃)으로 유배되자 1323년 (癸亥年) 다시 원나라에 가서 부당함을 밝혀 1323년 풀려 나오게 했다. 
 

1324년 (甲子年) 광정대부 밀직사사(匡靖大夫密直司使)에 승진하고

1325년 (乙丑年)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이 되고 첨의평리(僉議評理)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1326년 (丙寅年) 삼사사(三司事)로 전임

1330년 (庚午年) 충혜왕이 복권되자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전임되었다가 얼마 후 그만 두었다. 
 

1333년 (癸酉年 충혜왕 복위 4년) 원나라 사신이 왕을 포박해 가므로 글을 올려 사면을 요청했고

1336년 (丙子年) 삼중대광 예문관 영사(三重大匡藝文館領事)에 제수 받고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다. 
 

1339년 (己卯年) 심왕(瀋王) 고(暠)가 모역(謀逆)하다 실패하자 원나라에 충숙왕을 모함하여 원사(元使), 두린(頭麟)등이 왕을 잡아가자 이때 연경에 가서 사실을 해명하고 이듬해 귀국 후 시골에 은거하고 락옹비설(낙翁稗設-력옹패설)을 저술하였다. 

 

1344년 (甲申年) 겨울 충목왕이 즉위하자 부원군으로 승진시키고 효사관영사(孝思觀領事)를 제수하고 서연(書筵-이조의 경연)의 스승이 되었다. 
 

1346년 (丙戌年) 충렬왕 실록(忠烈王實錄)을 편수

1348년 (戊子年) 삼사판사(三司判事)가 되었다.

충목왕이 죽자 제조경사도감(提調經史都監)으로 원나라에 가서 충정왕의 승계을 요청했고,

 

1351년 (辛卯年)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정승 권서 정동성사(右政丞權署征東省事)로 발탁되어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을 제수 받았고 

 

1352년 (壬申年) 추성량절 동덕 협의찬화 공신(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에 올랐다.

 

원종공신 조일신(趙日新)이 자기보다 윗자리에 있는 것을 시기함을 알고 세 번이나 사표를 제출하여 사직했더니 일신이 야간에 궁중에 침입하여 난리를 일으키다가 주륙(誅戮-마구 죽임)되자 다시 우정승에 임명되었다.

 

1353년 계사년(癸巳年) 정월에 사직하였다가 5월에 부원군으로서 공거(貢擧)를 맡았다.

1354년 (甲午年) 12월 다시 우정승이 되었다. 
 

1355년 (乙未年) 나이 70세로 그만 두었다. 김해후(金海候)에 봉하였다

12월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1357년(丁酉年) 5월에 치사(致仕-나이가 많아 벼슬을 떠나는 것)하고 저술과 학문 연구에 전심하였다

1362년 (壬寅年)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 왕을 청주(淸州)에 호종(扈從)하고

 

이 해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만년에 은퇴한 후 왕명으로 실록(實錄)을 편찬했다.

 

1367년 (丁未年) 공민왕 16년. 81세의 수를 누리고 타계하였다.

 

공민왕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고 경주(慶州)의 귀강서원(龜岡書院),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배는 길창국부인 안동 권씨이며 도첨의 정승 영가부원군 문정공 부의 따님으로(配吉昌國夫人安東權氏都僉議政丞永嘉府院君文正公溥女) 서종(瑞種)과 달존(達尊) 두 아들과 3녀를 두었다. 
 

△ 배는 의화 택주에 봉해진 수춘국부인 춘천 박씨 사복정 거실의 따님으로 (配封義和宅主壽春國夫人春川朴氏司僕正居實女) 아들 창로(彰路)와 3녀를 두었다. 

 

△ 배는 서원군부인 통직랑 서주지사 중린의 따님으로(配瑞原郡夫人通直郞知徐州事仲隣女) 2녀를 두었다. 
 

★ 이중 수춘국부인이 낳은 셋째 따님이 공민왕(恭愍王) 후비(后妃)인 혜비(惠妃)이다.

 

○ 원나라 진감여(陳鑑如)가 익재공(公)의 초상화를 그리고 탕병용(湯炳龍)이 찬(贊)을 썼는데 그 필적과 그림이 국보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미술관에 보관되고 있다. 

 

○ 당대의 명문장가(名文章家)로 외교문서에 뛰어났고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했으며 원나라 조맹부의 서체(書體)를 고려에 도입하여 널리 유행시켰다. 

 

○ 저서로는 익재난고, 익재집, 역옹패설, 효행록, 서정록, 사략 등이 있다.

 

* 익재난고(益齋亂藁) 소악부(小樂府)에 17수의 고려의 민간 가요를 한시(漢詩) 칠언절구로 번역하여 이것이 오늘날 고려 가요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