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시조 익재 이제현

익재공의 시(詩)- 정과정.범려. 보덕굴

녹전 이이록 2009. 1. 9. 13:49

● 익재공의 시(詩)

 

 

○ 鄭瓜亭(정과정)

 

憶君無日不霑衣/ 억군무일부점의/ 님 그려 옷 적시지 않는 날이 없으니,
政似春山蜀子規/ 정사춘사촉자규/ 바로 봄산의 자규와 비슷하도다.
爲是爲非人莫問/ 위시위비인막문/ 옳거니 그르거니 사람들아 묻지 마오.
只應殘月曉星知/ 지응잔월효성지/ 응당 새벽달과 별이 알 것이로다.

 

풀이 : 이제현
시간적 배경 : 이른 아침, 새벽
시형 : 소악부- 중국의 악부를 볼 때, 우리나라의 민간 가요에서 제재를 취하여
정서(호 과정)가 7언절구의 형식으로 지은 한시
주제 : 님을 그리워함

 

정과정곡(鄭瓜亭曲)

내 님믈 그리사와 우니나니 (내 그대를 그리워 우니)

졉동새 난 비슷하요이다. (산 접동새와 난 비슷하구나.)

아니시며 거츠르신 줄 아으 (억울하며 거짓인 것을 아으!)

殘月曉星이 아라시리이다. (잔월효성이 아시이다.)

넉시라도 님은 한대 녀져라 아으 (넋이라도 그대는 함께 있으나 아으!)

벼기시더니 뉘러시니잇가. (벼르시던 이 누구인가?)

과도 허물도 천만 없소이다. (과도 허물도 천만 없소이다.)

말힛마리신뎌 (말들이 많아지니)

살읏븐뎌 아흐 (살얼음판 같구나 아으!)

니미 나랄 하마 니자시니잇가 (그대여 나를 벌써 잊으려고 하시는 구려)

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 (그대여 돌이켜 들었던 것을 거두어 주오.)

 

(내용 연구)

새벽달과 별이 알 것이로다 : 새벽달과 별을 절대자로 보고 있음. 자신의 억울함을 알아주는 존재로 파악

 

(이해와 감상)

이 노래는 충신 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 충신이 임금을 사모하는 노래)로 사람들에게 널리 애송되었으며,

궁중에서도 이를 전악(典樂- 궁중의 고아(高雅)한 음악)으로 보존하여 모두 익히도록 할 정도로 귀히 여긴 고려 가요이다.

고려 가요 중 향가의 잔영으로서 대표적인 작품인데, 작자가 유배 상황에서 임금을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향가계(鄕歌系) 여요(麗謠)로 향가계 여요는 신라의 향가에서 고려 가요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생긴 과도기적 형식의 노래를 총칭하는 개념이다.

(참고)

「정과정」은 현전하는 고려시가 가운데 가장 분명하게 작자가 밝혀진 시가로 그 창작배경도 자세하게 내려오는 작품이다.

 

작가와 제작 동기에 대한 서술이 확실하여, 작품해석을 하는데 이견이 많진 않지만, 정서가 지은 「정과정」의 원문은 없고, 이제현이 「정과정」의 뜻을 풀어서 쓴 시와 樂學軌範(악학궤범)과 大樂後譜(대악후보)에 한역되어 기록된 작품만이 남아있어, 많은 논의가 되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충신연주지사라는 평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작자인 정서의 인품을 性輕薄有才藝(성경박유재예)

라 표현하여 상극된 해설이 나오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정과정」의 작가인 정서(鄭敘)는 인종과 동서 사이로서 인종의 총애를 받았음을 물론 공예태후와도 각별히 가까워 궁중에서 막강한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생물연대는 정확히 알 길이 없고, 생애를 소상하게 밝힌 문헌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가 취한 행동거지나 처세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인물됨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는 호를 瓜亭이라 하였고, 동래 정씨 시조 정지원의 5대손으로 고조인 정지원과 증조 정문도는 다 동래군 안일호장이었으며, 조부 정목은 문과에 급제한 상서좌복시 섭태부경이었다.

 

부 정항은 인종에게 크게 사랑을 받던 중신으로 『고려사』名臣傳에 그의 전기가 기재되어 있으며 벼슬이 예부상서에 이르렀다.

 

정항은 4남 3녀를 두었으나 위로 3남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정서가 장자가 된 셈이다.

 

정서는 당대의 명문가 출신이다.

 

그리하여 그는 음사로 인종 때 사성승동정이 되었고, 후에 내시랑중이 된다.

 

그러나 그는 의종 5년(1511)에 대령후와 사귀어 그 집에서 놀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그 해 5월 25일에 동래로 귀양가게 되었다.

 

그 뒤 그는 의종의 몇 차례의 사면에도 풀려나지 못하다가, 의종 25년 8월에 정중부의 쿠데타에 의하여 의종이 밀려나고, 명종이 즉위한 해 10월에 대사령이 내려지고 나서야 20여년간의 귀양살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범려 

 

이제현이 원나라의 백주 승상에게 '백주 승상에게 올리는 글(上伯住丞相書)'을 보내면서 충선왕의 유배지는 보다 내륙인 감숙성(甘肅省)의 타사마(朶思麻)로 옮겨지는데, 이제현은 단신으로 타사마까지 가서 충선왕을 배알한다.

이런 와중에 가는 곳곳마다 시를 읊었다.

이러한 이제현의 시(詩) 중에 '범려'를 읊은 것이 있다.

 

범려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성어를 낳은 춘추시대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참모로서 강대국 오(吳)나라 멸망에 결정적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제현은 '범려'에서 아래와 같은 시를 노래했다.

 

論功豈破强吳(논공기파강오) 공을 논하면 어찌 강국 오를 쳐부순 것뿐이랴/
最在扁舟泛五湖(최재편주범오호) 가장 큰공은 오호에 조각배를 띄운 데 있네/
不解載將西子去(부해재장서자거) 서시를 배에 싣고 떠나지 않았더라면/
起宮還有一姑蘇(기궁환유일고소) 월 나라 궁전에도 고소대가 또 하나 있었으리라.

 

○ 충선왕의 유배에 익재공이 읊은 시

 

고려 충숙왕 7년(1320) 폐위된 선왕(先王) 충선(忠宣)은 고려 출신 환관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의 참소를 당해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에서 1만5천리 떨어진 토번(吐藩: 티베트)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충선왕에게 붙어 있어봤자 별 볼일 없고 끝이 났다고 판단한 재상(宰相) 최성지(崔誠之)는 호종(扈從- 임금을 호위하여 따르던 일)을 거부하고 도주해 버렸다.

이때 고려에서 원나라로 향하던 이제현(李齊賢)은 황토점(黃土店)이란 곳에서 이 소식을 듣고 시를 읊었다.

 

傷心無術身生翼(상심무술신생익)
飛到雲一叫(비도운일규)

 

- 상심한 마음도 몸을 날개로 바꿀 수 없어
하늘까지 날아서 궁문 밖에 외치지 못하네 .

 

○ 普德窟(보덕굴)

 

陰風生巖谷(음풍생암곡)....바윗골 사이에서 시원한 바람 일고
溪水深更綠(계수심경록)....시냇물은 깊어서 더욱 푸르네

倚杖望層(의장망층전)....지팡이 집고 겹겹 지붕을 쳐다보니

駕雲木(비첨가운목)....날씬한 추녀 끝에 구름과 나무 얹혔네

 

보덕굴은 금강산 법기봉 밑 만폭동에 있는 절이다.

7세기 경 普德이 절벽 중간에 있는 동굴에서 수도하며 세운 절인데 12세기 초 고구려승 회정 스님이 그 자리에 중건하였다.

절벽을 뚫어 굴을 파고 구리기둥과 쇠사슬로 벼랑에 고정시킨 절의 모습이 마치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반부는 보덕굴 주변 풍경을 묘사했다.

법기봉 계곡 바람과 만폭동 계곡 물 모두 시원하다.

후반부는 절의 모습을 표현했다.

절벽 밑에서 3층 누각을 보니 사뿐히 들린 추녀 끝 위로 하얀 구름과 푸른 나무가 마치 이 절을 타고 앉은 것처럼 보인다.

많은 이들이 3구의 ?(전)을 산봉우리로 번역하는데 이 절의 독특한 생김새를 보지 못해서 범하는 잘못된 번역이다.

현존하는 절은 1808년 중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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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巖(암) ; 바위
*(전) ; 산마루, 산꼭대기, 山頂(산정), 이 시에서는 보덕굴의 지붕을 산마루라 표현함

*(첨) ; 처마, ?牙(첨아)

*駕(가) ; 가마, 멍에를 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