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시조 익재 이제현

중국여행.외교력.정치력.섭정승.동암

녹전 이이록 2009. 1. 13. 21:38

● 세 차례의 중국 여행

 

 

익재공의 원 나라에서의 생애와 관련해 특기할 것은 세 번에 걸쳐 중국 내륙까지 먼 여행을 했다는 사실이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해 서촉(西蜀)의 명산 아미산(峨眉山)에 치제(致祭- 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제사 지내던 일)하기 위해 3개월 동안 그곳을 다녀왔다.

 1319년에는 충선왕이 절강(浙江)의 보타사(寶陀寺)에 강향(降香- 향을 피워 올리는 것)하기 위해 행차하는 데

시종(임금 곁에서 모심)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1323년(충숙왕 10)에는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 위로하기 위해 감숙성(甘肅省)의 타사마(朶思麻)에 다녀왔다.

 

 이 세 번에 걸친 여행은 그의 견문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320년(충숙왕 7)은 그의 생애를 통해 또 하나의 분기점을 이룬다.

 

주로 만권당에 머물며 활동하는 동안에도 때때로 고려에 와서 관리로 복무해, 성균좨주(成均祭酒)·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선부전서(選部典書)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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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祭酒)로 읽으나 성균관 벼슬을 뜻할 때는 '좨주'로 읽는다.

겨울에 충선왕이 참소를 받아 원나라 조정에서 유배형을 받음으로써 자연히 그의 원(元)나라 생활도 6년 만에 끝나게 되었다.

 

 

● 성리학 학자

 

학자로서의 그는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 발전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우선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白蓬正)의 제자였고 ≪사서집주 四書集註≫를 간행해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보의 문생이요 사위였다.

또한 그의 제자가 이곡(李穀)·이색의 부자였다는 학통(學統)으로 보아 그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만권당에서 교유한 중국의 문인· 학자가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중국의 성리학에 직접 접하면서 그것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충목왕 때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한 것은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에만 경도되지는 않았고, 그 때문에 뒷날 성리학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 입성책동에 반대와 외교력 발휘

 

 

뒤이어 고려의 국가적 독립성을 말살시키고 원나라의 내지와 같은 성(省)을 세울 것을 주장하는

입성책동(立省策動)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또한 충숙왕을 내몰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심왕 고(瀋王暠)와 그 일파의 준동이 격화되었다. 
 

그는 1321년 아버지의 상을 치른 다음 1323년 원에 들어가 입성반대상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이어서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어 있는 충선왕의 방환(放還-석방되어 되돌아 옴) 운동도 벌였다.

 

오래지 않아 입성책동이 저지되고 충선왕이 타사마로 이배된 데에는

그가 벌인 활동의 영향이 적지 않았으리라 여겨지고 있다.

 

1339년 조적(曹적)의 난이 일어난 끝에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혀가자

그를 좇아 원나라에 가서 사태를 수습해 왕이 복위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년간 조적의 여당(餘黨)에 눌려 두문불출했는데,

그 동안 ≪역옹패설 饑翁稗說≫을 저술하였다.

 

 

● 정치력 발휘

 

그가 다시 정치의 표면에 나타나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은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한 직후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면서부터이다.

 

이때 문란해진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새로운 시책을 펴는 데 참여해 여러 항목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1348년 충목왕이 죽자 원에 가서 왕기(王祺: 뒤의 공민왕)를 왕에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해 새로운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이때부터 네 번에 걸쳐 수상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1353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서 두 번째로 지공거가 되어 이색(李穡) 등 35인을 등과자(登科者)로 선발하였다.

 

1356년(공민왕 5) 기철(奇轍) 등을 죽이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이 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가 다음해에 치사하고 관직에서 아주 물러났다.

 

그 뒤에도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서는 자문에 응했으며,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에는 남쪽으로 달려가 상주에서 왕을 배알하고 호종(扈從)하였다.

 

정치가로서의 그는 당시 고려가 원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시인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존립과 사회모순의 광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하였다.

 

당시 복잡한 정치상황 아래에서 원과 고려를 넘나들면서 활약해 최고의 지위에 오르지만,

 

화를 당하거나 유배된 적이 없었다.

 

 

● 공민왕 즉위 초의 익재공 활약

 

 

원나라에 있던 중 고려왕으로 즉위할 것을 명령받은 공민왕은 미처 귀국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선 이제현을 섭정승(攝政丞) 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로 삼아서 왕위 교체로 발생한 정치적 변화에 대처하게 하였다. 
 

섭정승은 당시 고려의 국무를 관장하였던 도첨의사사의 최고위직인 정승을 대리하는 직책이었고,

권단정동성사는 고려와 원나라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던 정동행성의 업무를 임시로 총괄하는 직책이었다.

 

당시 정동행성의 최고위직인 승상(丞相)은 명목상 고려왕이 겸임하고 있었는데, 이제현에게 이를 대신하게 한 셈이었다.

 

곧 이제현은 글을 올려서 위의 직책에 임명된 것에 감격하며, 왕의 뜻대로 백성과 나라에 이로운 일을 힘써 행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당시까지 득세하였던 덕녕공주의 측근과 충정왕의 외척 세력을 숙청하였다.

 

이렇게 해서 많은 인물을 정치 일선에서 퇴장시켰는데,

그 예로 덕녕공주의 측근이었던 배전(裴佺)이 투옥되고,

노영서(盧英瑞)는 귀양가고, 정천기(鄭天起)는 좌천되었으며,

충정왕의 외척으로 권세를 휘둘렀던 윤시우(尹時遇)도 귀양갔다.

 

이 조치는 마땅한 조치로 평가받았다.

 

공민왕이 귀국하여 정식으로 즉위하자

이제현은‘대리’ 꼬리표를 떼고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으로 국정을 총괄하는 자리에 올랐다.

 

큰 포부와 야심을 가졌던 22세의 젊은 국왕이 학자로서 명망이 높은 65세의 나이 지긋한 재상을 등용하여

앞으로 벌일 개혁정치에 대한 구상을 구체화하려 한 것이다.

 

젊어서부터 고려를 개혁하려 하였고, 당시 명망도 높았으며,

게다가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노력하기까지 했던 이제현에게 공민왕은 큰 기 대를 걸었고,

이제현도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있던 공민왕 즉위를 계기로

고려 사회의 모순과 혼란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신의 포부를 실현시키려는 의욕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공민왕의 개혁적 시도에 반발하는 세력이 생겨나고,

이런 상황 속에서 조일신의 시기를 받게 된 이제현은 반년만에 사직하였다.

 

이제현은 부원배와 연결되는 조일신의 횡포를 공민왕이 용인하는 상황에서 개혁적 시책이 수행될 수 없다고 보았고,

스스로도 정치적으로 불안한 위치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제현이 물러난 뒤 얼마 후 조일신의 난이 일어났다. 
 

난이 진압된 뒤 이제현은 다시 우정승(右政丞)에 임명되어 뒷수습을 맡았고,

3개월 후 수습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김해부원군(金海府院君)으로 봉해지면서 다시 수상 자리에서 물러났다.

 

 

● 동암(東菴) 이진(李王+眞)

 

 

1244(고종31)∼1321(충숙왕 8). 

 

고려(高麗)의 문신(文臣)으로 초명(初名)은 방연(方衍)이고 자는 온고(溫古)이며 호는 동암(東庵)이오,

시호(諡號)는 문정(文定)이다.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의 후손, 제현(齊賢)의 아버지이다.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광주 사록(廣州 司錄)이 되고, 뒤에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기용되었다.

 

충렬왕이 시부(詩賦)로써 문신들을 시험하여 9명을 뽑을 때 둘째로 뽑혔으며,

기거중서사인(起居中書舍人)·안동 부사(安東府使)를 지내고, 군부 총랑(軍簿摠郞)에 전임(轉任)되고

1297년(충렬왕23) 우간의대부(右司議大夫)가 되었다.

 

그 뒤 대사성·밀직승지, 1303년(충렬왕29) 전법전서(典法判書)를 지내고,

1307년(충렬왕33) 판위위시사·권수밀직부사가 되어 적폐(積弊)의 일소를 상소한 것이 채택됨으로써

정당문학(政堂文學)에 특진되었다.

 

이듬해 충선왕이 즉위하자 사림학사·시우산기상시, 이어 좌승지·비서윤·지병조사·사림학사가 되었으며,

뒤에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를 거쳐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1313년 충숙왕이 즉위하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이 되어 임해군(臨海君)에 봉해졌으며,

1315년(충숙왕 2) 과거를 맡아보았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겨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하고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충주(忠州) 도통사(道統祠)에 배향(配享)되었다.

 

 

○ 이진(李王+眞)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백가(百家-여러 가지 학설이나 주장을 내세우는 많은 학자 또는 작자作者)에

박통(博通-온갖 사물에 널리 통하여 앎)하고 시(詩)에 능하다는 명성(名聲)이 있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광주*사록(廣州司錄)을 거쳐

직한림원(直翰林院-임금의 명령을 받아 문서를 꾸미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 되었다.

 

충렬왕이 시부(詩賦-운문韻文 형식의 시와 부賦-줄글)로써 친히 문신들을 시험하여 9명을 뽑았는데 제2등으로 뽑혔다.

 

기거중서사인(起居中書舍人-왕의 좌우에 시종하는 자리. 중서문하성에서 간쟁諫諍을 맡아보던 종4품 벼슬)이 되었다가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나가 민폐를 없애고 학교를 일으키는 데 공헌하였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군부총랑(軍部憁郞- 1275년. 충렬왕 1년에 시랑侍郎을 고쳐 부른 이름)이 되고, 1297년(충렬왕 23)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사림원학사(詞林院學士) *시우산기상시(試右散騎常侍)를 거쳐 *대사성 밀직승지(大司成密直承旨)가 되었으며, 1303년에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1307년 적폐(積弊)의 일소를 상소한 것이 채택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 중서문하성에 속한 종2품 벼슬)이 된 뒤

*상의 도첨의사사 찬성사(商議都僉議司事贊成事-종1품)가 되었다.

 

1313년에 충숙왕이 즉위하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이 되고 임해군(臨海君)에 봉하여졌으며, 1315년에는 과거의 고시관(考試官)이 되어 진사(進士)를 뽑았다.

1320년에는 아들 제현(齊賢)이 과거의 고시관 되어 새 문생(門生)을 거느리고 수(壽)를 칭송하자 전왕인 충선왕이 은병(銀甁) 200개와 쌀 200석을 하사하였다.

체구가 크고 마음이 너그러웠으나 아들 제현(齊賢)의 세력에 의지하여 남의 노비(奴婢)를 탈취(奪取)한 것이 많아 호소하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학문(學文)과 시(詩)와 술(酒)로 소요(逍遙)하였다.

 

충주 도통사(道統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 《동암집》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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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 중조 3세로 고려 건국시 태조 왕건을 도왔다.

중원태수 호부랑중의 관직에 있었고 신라 경순왕의 셋째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으니 즉 태조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가 경순왕에게 시집을 갔는데 이들의 3녀가 태수공(휘 금서)의 배(配)이다.

*사록(司錄)- 경(京), 도호부(都護府), 목(牧)에 설치되어 수령을 보좌하던 관원.

제술과 급제자가 초직(初職)으로 받는 정7품의 외직(外職)이었음.

속읍을 순찰하고 속읍의 행정을 감독하였으며, 주읍과 속읍의 향리들이 결탁하는 폐단을 방지하였음.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중서문하성에 속한 정4품 낭사 벼슬. 우간의 대부를 고친 것이다

*사림원 학사(詞林院學士)- 임금의 명령을 받아 문서를 꾸미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학사는 사림원에 속한 종3품 벼슬. 학사승지가 종2품이다.

*시우산기상시(試右散騎常侍)- 사림원 문하부의 정3품관

*대사성 밀직 승지(大司成密直承旨)- 유학과 문묘의 관리, 의례(儀禮)·접대(接待) 등의 일을 맡아 본 정3품.

*전법판서(典法判書)- 고려 시대 법률(法律) 사송(詞訟) 형옥(刑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전법사(典法司)의 벼슬 이름.

정3품의 품계로서 판사(判事) 다음에 해당함.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고친 이름임.

*상의 도첨의사사(商議都僉議司事)- 서무, 간쟁과 봉박을 관장. 내의성. 내사문하성. 중서문하성. 첨의부. 도첨의사사. 문하부.

*검교(檢校)- 고려 말기에 높은 벼슬자리를 정원 외에 임시로 늘리거나,

실지로 사무는 맡기지 않고 이름만 가지게 할 때 그 관직명 앞에 붙인 말.

*첨의정승(僉議政丞)- 문하시중(門下侍中), 첨의좌정승(僉議左政丞), 첨의우정승, 수시중(守侍中) 등

고려 시대 최고 중앙행정관청에서 일하는 부총리급의 관직.

 

 

○ 16세 동암공(東菴公)진(王+眞)

 

 

갑진년(甲辰年 1244 고종 3)에 태어나고 신유년(辛酉年 1321 충숙왕 8)에 돌아가셨다..

 

고려 충숙왕 때의 충신이시다.

 

중조 16세로 부(父)가 열헌공(悅軒公) 휘 핵(부수10획 솥력.격+羽)이며 차자(次子)로 태어났는데 평리공(評理公) 휘 인정(仁挺)이 형님이시고 아우가 송암공(松菴公) 휘 세기(世基)이시다.

 

초명은 방연(方衍)이며 자는 온고(溫古). 호는 동암(東庵)이고 휘(諱-돌아가신 분을 높여서 부르는 이름)는 진(王+眞)이시다.

시호는 문정(文定)으로 3한(三韓)공신 금서(金書)의 후손이시다.

 

일찍이 백가(百家- 여러 학자들의 저서)에 통하여 시명(詩名)이 알려졌다.

 

문과에 급제하여 사림원(詞林院)에 들고 광주(廣州)의 사록(司錄-정8품)을 지내고 직한림(直翰林-검열을 달리 읽는 말 정8품)이 되었다.

충렬왕 때(庚辰年) 시부(時賦)로 문신들의 시험을 보아 9명을 뽑을 때 을과(乙科)에 제2위 를 차지하고 동생 세기(世基)는 병과(丙科)에 3위를 하였다.

이에 호를 천장급제(天場及第)라 하였으니 체모(體貌)가 번듯하고 생김생김이 우람하고 도량이 넓어(局量) 관대하고(寬) 널리 백가서를 통하여 많이 알고(弘博通 百家名) 시로 이름이 나고 어려운 운자라도 붓을 들면 곧 시를 지었다.

상서 이송진(李松縉)이 한 번 보고 기특하여 가로되 큰그릇이라 하였다.

 

이후 기거중서사인(起居中書舍人-종5품)·안동부사(安東府使-종3품)·대사성(大司成-정3품) · 일지승지(日誌承旨-정3품)를 거쳐 충선왕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정2품) 상의도첨의사사(商議都僉議使司)의 찬성사(贊成事-정2품)를 역임하였다.

1298년(戊戌年)에 승지(承旨)직에서 출납으로서 사림원에 들어가 학사 박전지(朴全之), 오한경(吳漢卿), 권수구(權水俱)와 같이 바르게 하니 왕의 총애가 각별하였다.

충숙왕이 즉위하자 검교정승(檢校政承-예우차원의 형식적 벼슬)이 되고 임해군(臨海君)에 피봉 되었다.

 

충숙왕(忠肅王) 신유년(辛酉年)에 돌아가셨으니 수(壽) 78세로 시호는 문정(文定)이시다.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 들었고 실제로 세상에 행한 기록이 있다.(有實記行于世)

 

'시와 술로 사오' 라고 할 만큼 퇴관 후 선비, 중들과 시주(詩酒-시와 술)로 소일했으며 역옹(역翁) 휘 제현(齊賢)은 그의 아들이다.

묘는 우봉 도리촌(牛峰 挑李村-북한 개성 부근)에 있다.

첫 부인 배는 미상(配未詳)으로 아들 관(琯)을 두었다.

계배(繼配)는 진한국태부인 박씨이며 대능직 인육의 따님으로(辰韓國太夫人朴氏戴陵直仁育
女-대능직: 참봉) 두 아들 제현(齊賢)과 지정(之正) 두 아들을 두었다.

* 큰아들인 장자(長子) 관(琯)은 이암공파(怡庵公派) 파조(派祖)이시고

4자인 지정(之正)은 호군공파(護軍公派) 파조이다.

 

* 차자인 체원은 스님이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이진(李王+眞)

 

 

고려사절요 제22권 충렬왕 4(忠烈王四) 무술 24년 (1298), 원 대덕 2년

 

○ 왕이 연등절(燃燈節)이므로 봉은사(奉恩寺)에 가서, 문한학사(文翰學士) 최감(崔?)ㆍ박전지(朴全之)ㆍ오한경(吳漢卿)ㆍ이진(李王+眞)에게 상승국(尙乘局- 궁중의 수레나 말을 맡아  보는 곳)의 안마(鞍馬- 안장 얹은 말)를 하사하였다.

여러 신하가 헌수(獻壽- 장수를 비는 뜻으로 술잔을 올림)하였는데, 차례가 네 학사에게 이르자 왕이 '앞으로 나오라' 하여 술잔을 주고 이르기를, “오직 너희 여러 학사들은 바른 말을 하고 숨기지 말라." 하였다.

 

○ 사림학사(詞林學士) 박전지(朴全之)ㆍ오한경(吳漢卿)과 시독학사 이진(李王+眞)과 시강학사 권영(權永)에게 붉은 가죽띠를 하사하였다.

왕은 항상 좌우를 물리치고 사림원에 행차하여 네 학사와 더불어 정치에 관한 것을 상의하며 손수 주식(晝食- 점심밥)을 주면서 조용히 하루를 보내고, 혹 밤중까지 이르게 되면 궁 안의 촛불을 내주어 집까지 보내 주기도 하였으니, 총애함이 이에 비길 데가 없었다.

 

*익재공의 아버지 동암공(휘 진王+眞)이 왕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