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시조 익재 이제현

우봉 도리촌(牛峰桃李村)답사(踏査).익재공 묘역도 위치

녹전 이이록 2009. 1. 21. 13:29

● 우봉 도리촌(牛峰桃李村)의 선대 묘소(先代墓所) 답사(踏査)

 

 

- 우봉 도리촌 선영 묘단비(牛峰桃李村先塋墓壇碑) - 후손 유원(裕元) 지음

 

귤산공(橘山公)의 휘(諱)는 유원(裕元)이고 생몰(生沒)년은 순조14년∼고종25년(1814∼1888)이며 백사공(휘 항복)의 9세손이고 이조판서 계조(啓朝)의 아들로 영의정을 지냈다.

[      ]는 대종보에 실려는 있는 내용임

* 표는 뜻풀이고  # 표시는 설명부분.

 

[이씨(李氏)의 옛 족보(族譜)에 이르기를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선영(先塋)이 우봉 도리촌(牛峰桃李村)에 있다」고 하였으니 살피건데 우봉(牛峰)은 지금 *해서(海西- 황해도) 김천군(金川郡)이다.

*송양(山밑松陽)과의 거리가 30리(三十里)도 못되게 가까우니 우리 이씨(李氏)가 대대로 분묘(墳墓)를 쓴 것이 참으로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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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김천군(海西金川郡-黃海道金川郡)- 1850년 전후의 지명
- 황해도 김천현 장단군 소남면 지금리 원촌(黃海道金川現長湍郡小南面知琴里院村)이다. 
장단군(長湍郡)을 한때는 개성부(開城府)라고도 하였고 
지금리 원촌(知琴里院村)은 일명(一名) 우봉 도리촌(牛峰挑李村)이라고 하였다.

* 현재 묘소의 위치는 북한당국에 의해 세 차례 행정구역을 조정하였는데,
1946년에는 황해도 장풍군 소담리라 하였고
1952년에는 개성시 장풍군 십탄리로 지명이 바뀌었고
현재에는 황해북도 장풍군 십탄리 서원동이라 한다.

*송양(山밑松陽)- 개성(開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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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재(益齋)선생 휘(諱) 제현(齊賢)의 묘소와 그 자제(子弟) 밀직사(密直使) 창로(彰路)의 묘소가 현재 도리촌(桃李村)에 있어서 자손이 대대로 수호(守護)하고 그 위에 선조(先祖)의 묘소(墓所)가 있다고 운운(云云)한 것이 의심이 없으니 경주부(경주부) 금오산(금오산) 에 시조(시조)묘소의 고징이 없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족보(族譜)에 이르기를 태복야(太僕射) 열헌(悅軒) 휘 핵(月없는膈+羽)과 자제(子弟) 금교정승(檢校政丞) 동암(東菴) 휘 진(王+眞)과 다음 자제 대제학(大提學) 송암(松巖) 휘 세기(世基)와 그 자제 상서(尙書) 휘 과(초두밑過)의 3대에 네 분묘가 익재(益齋) 묘소의 위 날 등에 있다.」

하였으니 태복야(太僕射)와 대제학(大提學)은 나의 19세조(十九世祖). 18세조(十八世祖)이다.

세대(世代)가 요원(遼遠)하여 다만 익재(益齋)의 묘소와 밀직(密直)의 묘소만이 전할뿐이다.

익재(益齋)는 곧 동암공(東菴公)의 자제요, 상서(尙書)는 송암공(松巖公)의 자제로 태복야공(太僕射公 - 열헌공 휘 핵)이 한 할아버지가 된다.

유원(裕元)이 익재(益齋) 묘소를 참배하고 두루 여러 선조(先祖)의 산소를 찾아보았는데 익재(益齋) 묘소의 위에 두 분묘(墳墓)가 있고 밀직(密直) 묘소의 위에 또 큰 분묘가 둘이 있으니 3대(三代)의 네 분묘가 맡기는 하나 마침내 분별(分別)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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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암공(東菴公)의 묘소(墓所)는 방향(方向)으로 볼 때 계좌(癸坐)이고 그 옆에 익재공(益齋 公)의 묘소(墓所)는 자좌(子坐)이며, 밀직공(密直公)의 묘소(墓所)는 약간 떨어져 옆 산 능선(稜線)에 있다.

보첩에 기록된 대로 익재공(휘 제현. 17세) 묘소와 아들 밀직공(휘 창로. 18세. 익재공 3남)의 묘소 위치는 비명(碑銘)으로 정확히 알 수 있다. 
 

열헌공(휘 핵. 15세. 익재공 조부)과 동암공(휘 진. 16세. 익재공 아버지. 열헌공 차자)과 송암공 (휘 세기. 17세. 익재공 숙부. 열헌공 3자)과 그 아들 상서공(휘 과. 18세. 휘 세기의 3남)의 3대의 4분묘가 있기는 한데 표석이 없어 확실히 누구의 것인지 분별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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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서 여러 종친(宗親)들에게 말하기를 "증자(曾子)가 공자(孔子)께 *종자(宗子)가 타국(他國)에 있으면서 그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예(禮)를 묻자 공자께서는 묘소를 바라보고 설단(設壇)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허락하시었다.

돌아보건 데 지금 천년 후에 다시 제사의 *의칙(儀則)을 강론(講論)함은 *예문가(禮文家)에서 혹 의심할 바이나 단(壇)을 베풀고 비석(碑石)을 세워 선영(先塋)을 표시함은 성인(聖人)의 뜻에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하니 모두 옳다고 하였다.

 

송암공(松巖工)께서 4자(사자)를 두었으니 맏이는 국당공(菊堂公) 천(초두밑인변+靑)이요, 다음은 부정공(副正公) 매(초두밑遇)요. 다음은 상서공(尙書公) 과(초두밑過)요, 다음은 사인공(舍人公) 조(초두밑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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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자(宗子)- 종가의 맏아들
*의칙(儀則)-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규칙이나 규범
*예문가(禮文家)- 예법(禮法)을 자세(仔細)히 알고 그대로 지키는 사람. 또는, 그러한 집안

 

# 선영(先塋)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우리들은 단을 설치하고 비석을 세워 선영을 표시하고 제사를 모심은 공자도 설단하여 제사를 모심을 허락했으니 예에 어긋남이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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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당공파(菊堂公派) 판서(判書) 현직(顯稷)과 승지(承旨) 학영(鶴榮)과 부총관(副總管) 용상(容象)과 상서공파(尙書公派) 좌의정(左議政) 유원(裕元)과 참판(參判) 유응(裕應)과 응교(應敎) 유승(裕承) 이 역사를 감독하며 익재(益齋) 후손 용우(龍雨)는 맏파로서 실상 주관하였고 그 사실을 유원(裕元)이 기록하였다.
 

아! 총(塚)은 높은 무덤이요. 롱(壟-土+龍)은 언덕이요. 묘(墓)는 묘역이니 옛날에 봉분을 쌓지 않고 비석을 세우지 않음은 그 검소함을 숭상함이요. 벽돌을 모아 단을 건축함은 사모(思慕)의 뜻을 부치는 것이다. 

이제 선조의 산판(山坂)에 단(壇)을 세워 제사를 받들고 비석을 세워 글을 새기어 후인(後人)으로 하여금 우리 집의 근본(根本)하는 의기를 알게 하노니 어찌 담장을 설치하고 정자(亭子)를 지어 *초동(樵童) *목수(牧 )를 금지할 뿐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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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樵童)- 땔나무를 하는 아이
*목수(牧 )- 더벅머리를 한 아이라는 뜻으로, ‘목동(牧童)’을 달리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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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戊辰. 1868)년 봄에 유원(裕元)이 몸소 도리촌(桃李村)을 살핀 사적(事跡)은 상세하게 묘단비(墓壇碑)에 기재(記載)하였다
 

이어서 족질(族姪) 민영(民榮)으로 하여금 다시 파서 확인한 즉 밀직공(密直公) 묘소 위 첫 번째 분묘(墳墓)에는 다만 하나의 *유시(鍮匙) 수저와 세 개의 철 못이 있는데 4-5촌(四五寸) 길이가 되었다. 
 

제일 위의 무덤에는 석관(石棺)앞에 돌 하나를 세웠는데 길이가 몇 자 가량 되고 세 개의 큰돌로 덮었으니 *천판(天板)과 같았고 아래에 이그러진 석판(石板)이 있는데 십여 명이 조금 열고 자세히 살펴보니 황토(黃土)가 가득 차 있고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대로 봉분(封墳)을 만들어 옛과(예와) 같게 하고 나무 뿌리와 풀 넌출을 모두 제거하고 익재공파 묘지기를 시켜 수호(守護)하도록 했다.

대개 고려(高麗)의 장례(葬禮)에는 널(널-관)에 철 못을 쓰고 반드시 밥 수저를 넣으며 예장(禮葬)에는 석관(石棺)을 쓰고 *한반석(限半石)을 넣었으니 첫 번째의 분묘가 *예장(禮葬)이 된 것을 알 수가 있다. 
 

송암공(松巖公)은 고려의 대관(大官)이다.

 

반드시 시설의 볼 만함이 있을 것인데 이제 확인할 수가 없고 기와 쪽과 벽돌장이 전후(前後)에 나왔을 뿐이다.

 

대저 분묘(墳墓)가 품질(品秩-품계品階)이 낮은 이의 장례가 아니고, 지역도 우리 이씨의 선영(先塋)인즉 송암공(松巖公-휘 세기)의 묘소(墓所)가 틀림이 없으나 이미 확인할 표시(標示)가 없으니 후손(後孫)의 한(恨) 스러움이 무궁(無窮)할 뿐이다.

단을 모아 사실을 기록하고 그 끝에 또 이렇게 부쳐 두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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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鍮匙)- 놋숟가락
*천판(天板)- 널찍하고 평평한 윗부분. 관의 뚜껑이 되는 석판
*한반석(限半石)- ?
*예장(禮葬)- 예식을 갖추어 치르는 장사

 

# 묘소가 확인 된 밀직공(휘 창로. 18세) 묘소 첫 번째 분묘를 파서 확인한 결과 놋 수저와 4, 5촌 길이의 쇠못 세 개가 나왔다.

 

제일 위쪽의 무덤에는 석관(石棺)앞에 돌 하나를 세웠는데 길이가 몇 자 가량 되고 세 개의 큰돌로 덮었으니 천판(天板)과 같았고 아래에 이그러진 석판(石板)이 있는데 십여 명이 조금 열고 자세히 살펴보니 황토(黃土)가 가득 차 있었다.

고려(高麗)의 장례(葬禮)에는 널(널-관)에 철 못을 쓰고 반드시 밥 수저를 넣는다.

예장(禮葬)에는 석관(石棺)을 쓰고 한반석(限半石)을 넣었으니 첫 번째의 분묘가 예장(禮葬)이 된 것을 알 수가 있다.

 

예장을 지낸다함은 상당한 지위에 있는 사람, 품계가 높은 사람이 죽었을 때에 치루는 장사를 말한다.

송암공(휘 세기. 16세. 익재공 숙부)은 대관(大官)이다.

송암공의 묘소라고 생각하는 분묘(墳墓)가 품질(品秩-品階)이 낮은 이의 장례가 아니고, 거기에다 우리 이씨의 선영으로 송암공(松巖公)의 묘소(墓所)가 틀림이 없으나 이미 확인할 표시(標示)가 없어 한(恨)서러울 뿐이다.


 

● 익재공 묘역도 위치 

  

* 익재공의 묘역도를 보면 표시가 다른 두 종류가 있다.

그러니까 주위의 묘역 표시가 각기 틀리게 표시되어 있다는 뜻이다.

 

아래의 글은 동암공 지석 내용과 묘산도  등에서 익재공과 주변의 묘의 위치를 말한 글이다.

 

 

 

 

(一) 동암공 휘 진 묘

(二) 익재공 휘 제현 묘

(三) 밀직공 휘 창로 묘

 

 

 

 

이 묘역도는 위의 묘역도의 묘의 표시와 다르다.

익재공의 묘소 위치 자좌 위에 동암공 묘소가 있는 것으로 표시하고 있다.

 

 

 

 

*맨 위 산자락 기슭에 익재공- 동암공 2남. 시호는 문충. 묘는 선고(아버지)묘 오른쪽 자좌.

*중간 산줄기 기슭에 밀직공과 그위에 동암공- 휘 진 .열헌공 2남.시호는 문정.

묘는 개성부 소남면 지금리 원촌. 지금은 장단군. 옛날에는 금천 우봉 도리촌 

^밀직공- 휘 창로. 익재공 3남. 묘 선고묘 동쪽 산기슭

*아래 산줄기 기슭에 인천공 부자(지인주사) 

 

 

◆ [동암공(문정공. 휘 진)의 묘는 묘갈문(墓碣文)에서 묘소가 실전 되었다가 경술(1910년)년에 도적이 *굴총(掘塚)하여 文良(문량) *趙簡(조간- 찬성사)이 찬한 지석이 발견되어 鍾弼(종필), 鍾震(종진), 鍾翊(종우), 鍾億(종억), 鍾璇(종선), 相慶(상경), 相益(상익)과 함께 상경하여 휘와 호, 선대와 *배위(配位)를 알게 되어 세보(世譜)에 등재하였으나 외조(外祖)의 휘(諱)와 *초배(初配) 성씨(姓氏)는 망가져 알 수가 없었고 묘소를 개수(改竪)하니 3월 22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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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총(掘塚)- 묘를 파헤침. 특히 남의 무덤을 불법적으로 파내는 일을 이른다.

*조간(趙簡)-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김제(金堤).
시부(詩賦)를 시험할 때 수석을 차지하여 황패(黃牌)를 받고 국학직강(國學直講)으로
왕명에 의하여 새로운 악곡을 작곡하기도 하였고 충숙왕 때 검교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를 역임한 뒤 찬성사에 올랐다.
시문에 뛰어나 조선 영조 때 유광익(柳光翼)의 《풍암집화 風巖輯話》에도 수록되어 있다. 

 

*배위(配位)- 남편과 아내가 다 죽었을 때에 그 아내를 높여 이르는 말.

*초배(初配) 성씨(姓氏)- 족보에 동암공의 초배는 기록 미상이나 생1남(生一男)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익재공의 형이 되는 이암공 휘 관이다.

 

 

◆ [묘산도는 道天書院(도천서원- 경산)에서 발간한 별지(別紙)로 된 것이다.

 

묘산도를 보면 왼쪽 능선에 익재공(휘 제현)의 묘소가 있고 그 상부에 미상(未詳) 2기, 중앙에 동암공(휘진)과 밀직공(휘 창로)의 묘소가 있고, 우측이 인천공 부자의 묘소이다.

지인주사공 가계는 익재공파로 達尊(달존. 18세) 운와공, 德林(덕림. 19세) 군수공, 伸(신. 20세) 안무사공, 繼蕃(계번. 21세) 락안공, 尹仁(윤인. 22세) 감사공, 公麟(공린. 23세) 창평공, 타(24세) 생원공, 渤(발. 25세) 좌승지공, 憬胤(경윤. 26세) 이조판서공, 大健(대건. 27세) 오촌공, 時發(시발. 28세) 벽오공, 慶徽(경휘. 29세) 춘전공, 寅식(인식. 30세) 처사공의 장자인 成坤(성곤. 31세)이 인천지사로 宗城(종성. 32세)이 *묘지(墓誌)를 *찬(撰)하였는데 아들 錫祉(석지. 32세)와 상하분(上下墳)이고, 그 옆이 道川(도천)서원이고 교리공은 알 수가 없다.

인식 처사공도 익재공의 *외록(外麓) 건좌이며 *비갈(碑碣)이 있다하였고, 차자 元坤(원곤) 현감공도 익재공 남록(南麓) 자좌라 하였고 아들 錫宗(석종)도 신좌에 있다 하였으며,  석지 처사공의 아들 百源(백원)도 익재공 *안산(安山) 자좌라 하였고, 송암공과 아들 부정공과 상서공도 우봉촌이라 하였으며 기타 선조들도 이곳으로 기록됨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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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誌(묘지)


돌(石)이나 陶板(도판)에 글을 새겨서 무덤 옆에 파묻는 것으로 壙誌(광지)라고도 한다.

△墓碣(묘갈)은 무덤 앞에 세우는 머리 부분이 둥그스름한 작은 돌비로 5품관 이하에서 주로 세웠으며,

△墓碑(묘비)는 상석 우측에 세우는 비로 籠臺(농대) 또는 盤石(반석) 위에 碑身(비신)을, 그 위에 加첨石(가첨석)을 얹었으며, 
 

△神道碑(신도비)는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으로 종2품 이상만 허용하였으며, 묘비와 더불어 특별한 경우에는 龜趺(귀부) 위에 비신을 얹고 이首(이수)를 얹는 것도 있으며, 모두 묻힌 사람의 성명, 사적, 직계 존비속의 성명 등과 銘文(명문)을 새긴다. 
 

*찬(撰)- 글을 지음이나 엮음.
*외록(外麓)- 다른 산 기슭. 山麓= 산기슭
*비갈(碑碣)- 비석. 네모진 비석 모양을 碑, 위가 둥그런 비석 모양을 碣이라 함.
*안산(案山)- 집터나 묏자리의 맞은편에 있는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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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봉집 묘산도에서 6기의 미상 묘소가 표시되어 있다.

'재사 아래의 산자락엔 진천 종인들의 대(代)를 이은 묘소 10여기가 있다

(齋舍其下麓鎭川宗人繼葬者十餘墳 재사기하록진천종인계장자십여분)는 것으로 보아 당시 *세장지(世葬地)인 듯하다.

익재공 묘소 앞에 비석을 세웠다는 [墓前有碑刻(묘전유비각)]과 청룡 쪽에 밀직의 묘소와 비갈이 있다는

[靑龍有碣乃先生三子密直使上護軍諱彰路之墓(청룡유갈내선생삼자밀직사상호군휘창로지묘)]와

외백호엔 재사가 있고 묘를 지키는 사람이 있다는 [外白虎內有齋舍墓直韓贊徵(외백호내유재사묘직한찬징)] 기록으로 보아 당시에 실존하였음이 입증되고 있다,

 

송암공 추모비명에서 밀직의 묘 위에 큰 무덤 둘이 있으며 하나는 송암공의 묘소임이 *자명(自明)하여 덕봉공이 *수갈(竪碣)한지 70년이 지난 1868년에 후손 裕元(유원)이 *굴험(窟驗)하였으나 확인하지 못하였다 하였는데, 42년 후인 1910년에 우연히 동암공 묘소임을 확인하고 개수하였고 1921년에 후손 鍾瀅(종형)이 짓고 鄭寅杓(정인표- 學山, 비서승)선생이 쓴 *묘갈(墓碣)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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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장지(世葬地)- 집안 대대로 일가 친척들이 묘지로 쓴 땅
*자명(自明)- 누구의 증명(證明)이 필요(必要) 없이 그 자신(自身)으로 이미 명백(明白)함.

자신(自身)의 직관(直觀)에 의(依)하여 명백(明白)함.
*수갈(竪碣)- 비석을 세움

*유원(35세)- 호가 橘山(귤산), 시호는 文忠(문충), 영의정으로 저서로는 가오고략, 임하필기, 금석록 등이 있고 恒福(항복) 백사공의 10세손이며 啓朝(계조. 34세) 동천공의 아들이며, 종형(37세)은 참판공으로 생원공 타(24세)의 후손이며 圭哲(규철. 36세)의 아들로 진천 초평의 종가이며, 종필(37세)의 호는 紀堂(기당), 공조참의, 궁내부 특진관으로 생원공 타의 후손으로 군수공 集星(집성. 34세)의 증손이며 도정 圭昌(규창. 36세)의 아들이다.

*굴험(窟驗)- 묘의 굴을 실지로 파서 증험함.
*묘갈(墓碣)- 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한 작은 돌비석.

 

◆ [익재공의 신도비는 李穡(이색- 牧隱, 한산군)선생이 찬한 묘지명을 1924년에 후손 鍾弼(종필)이 찬(撰)하고 *지문(識文-식문)은 후손 鍾瀅(종형)이 썼다.

묘산도에선 중앙 능선엔 2기뿐이나 귤산집과 덕봉집엔 3기로 되어 동일한 입장을 보인다.

덕봉공도 익재공과 밀직공 사이 능선을 굴험하였다는 것으로  '선영 묘역내 동쪽 산자락의 두 분묘도 우리 집안 선영이므로 굴험하였으나 표지석이 없었다.

(局內側東邊支麓有二陳墳亦吾家先塋故掘驗以無表誌石  - 국내측동변지록유이진분역오가선영고굴험이무표지석)' 라고 하였는데 1726년 (부친)과 1719년(아들)에 졸(卒)한 인천지사 부자의 묘역인 듯 하나 당시에도 오천공(32세 휘 종성)이 찬(撰)한 지석이 보이지 않았으며, 귤산공(휘 유원)의 굴험에도 아무런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가 후일 발견되었으니 행운이라 아니할 수가 없겠으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묘소가 이북이라 참배나 *시향(時享)하지 못함으로 1986년 익재공파 대종회에서 용인 외사에 설단(設壇)하여 숭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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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성(宗城. 30세)- 호는 梧川(오천), 시호는 文忠(문충)이며 영의정으로 莊祖(장조)의 묘정에 배향되고 오천집이 있으며 白沙 恒福(백사 항복. 25세)의 5세손으로 鵝谷 台佐(아곡 태좌. 29세) 충정공의 아들이며,

*송암(松巖. 17세)- 세기의 호이고 시호는 文僖(문희)로 검교정승이며, 슬하에 국당, 부정, 상서, 사인을 두었다.
 

*지문(識文-식문)- 글을 지음. 글을 지어 알게함.


*시향(時享)- 음력 시월에 먼 조상의 무덤 앞에 지내는 제사. 세일사. 시사. 시제(時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