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시조 익재 이제현

익재 영정(益齋影幀)의 이모본들

녹전 이이록 2009. 1. 29. 17:44

● 이제현 초상(李齊賢 肖像-익재 영정益齋影幀)의 이모본들

 

 

[초상은 4본이 전해오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전라남도 장성군 가산서원(佳山書院)에는 같은 양식의 본이 전해 온다.

 

충청북도 청원군에 있는 수락영당(水洛影堂)과 전라남도 강진군 구곡사(龜谷寺)에도 반신, 전신의 구별은 있으나 동일한 상용 형식을 지닌 화상이 소장되어 있다.]

 

인터넷 검색 결과 현존 초상(肖像)이 4본이라 했는데 9본이 나온다.

 

이것도 대부분 이모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마 위의 글을 작성할 때 조사된 영정이 처음에 4본이었던가 보다. 

 

이제현 초상(李齊賢 肖像- 익재 영정)이 4본뿐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9본이나 되고 그중 2본이 설명에 의하면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 소장본(所藏本)의

이모본(移模本- 원그림을 보고 다시 그린 그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아래에는 5본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의 이모본이라고 되어 있다.

 

처음 2개의 이모본이 어느 것인가는 확인할 수 없다.

 

조사된 영정 9본의 소재지는 아래와 같다.

 

①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 소장본(所藏本): 국보 110호

* 소재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57 국립중앙박물관
* 작자: 원(元)의 화공  진감여(陣鑑如)
 

② 가산사(佳山詞) 소장본(所藏本): 전남 문화재자료 164호
* 소재지: 전남 장성군 삼서면 홍정리 488-2
* 작자: 미상(未詳).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 소장본(所藏本)의 이모본(移模本-원그림을 보고 그린 그림)

 

③ 구곡사(龜谷祠) 소장본(所藏本): 전남 유형문화재 제189호
* 소재지: 전남 강진군 대구면 구수리 895
* 작자: 조중묵(趙重默).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 소장본(所藏本)의 이모본(移模本)

 

④ 수락영당(水落影堂) 소장본(所藏本): 비지정 문화재(유교유적)
* 소재지: 충북 청원군 미원면 가양리
* 작자: 미상(未詳).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 소장본(所藏本)의 이모본(移模本)

 

⑤ 구강서원(龜岡書院) 소장본(所藏本): 경북 문화재 자료 90호
* 소재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양월리 777-1<구강서원내>
* 작자: 미상(未詳).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 소장본(所藏本)의 이모본(移模本)

 

⑥ 장산영당(長山影堂- 宗中影堂) 소장본(所藏本): 충북 유형문화재 제72호
* 소재지: 충청북도 보은군 탄부면 하장리 327(忠淸北道 報恩郡 炭釜面 下長里)
* 작자: 미상(未詳).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 소장본(所藏本)의 이모본(移模本)

 

⑦ 용암영당
* 소재지 : 충남 보령시 미산면 용수리

 

⑧ 도동영당
* 소재지 : 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기리

 

⑨ 도론영당
* 소재지 : 전남 진도군 고군면 도성리

 

 

○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 소장본(所藏本):

국보 110호 -   이제현 초상(李齊賢 肖像익재영정益齋影幀)

 

소재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57 국립중앙박물관
분류: 초상화
수량: 1폭
지정일: 1962.12.20
시대: 고려 충숙왕
소유자: 국립중앙박물관
관리자: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익재 이제현(1287∼1367)의 초상화이다.

 

가로 93㎝, 세로 177.3㎝로 의자에 앉은 모습을 비단에 채색하여 그렸다.

 

그림 위쪽에는 원나라 문장가인 탕병룡이 쓴 찬(贊)과 잃어버린 줄 알았던 이 그림을 33년 만에 다시 보고 감회를 적은 익재의 글이 있다.

대부분의 초상화가 오른쪽을 바라보는데 비해 왼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비단 테를 두른 흰 베로 짠 옷을 걸치고 두 손은 소매 안으로 마주 잡고 있다.

선생의 왼편 뒤쪽에는 몇권의 책이 놓인 탁자가 있고, 오른편 앞쪽으로는 의자의 손잡이가 있어 앉은 모습이 안정되어 보이며, 화면구성도 짜임새 있다.

 

채색은 색을 칠한 다음 얼굴과 옷의 윤곽을 선으로 다시 그렸는데 부분적으로 표현을 달리 하여 날카롭지 않고 부드러워 보인다.

그림의 색감은 오랜 세월이 지나 변색된 듯하나 차분한 느낌을 준다.

 

이 그림은 충숙왕 6년(1319) 이제현이 왕과 함께 원나라에 갔을 때 당시 최고의 화가인 진감여(陣鑑如)가

그린 그림이다.

 

전해오는 고려시대 초상화가 대부분 다시 그려진 이모본(移模本-원본을 보고 다시 그린 그림) 인데 비해

직접 그린 원본으로, 안향의 반신상과 함께 현재 남아 있는 고려시대 초상화의 원본 2점 가운데 하나이다.

 

이 그림은 전신을 그린 것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얼굴과 의복을 선으로 표현한 것은 고려시대 다른 초상화들과 비슷하며, 조선시대 초상화가

 

인물이 오른쪽을 향하고 배경이 되는 바탕에 아무런 그림을 그려 넣지 않은 것에 비해 빈틈없는 구성과 왼쪽을 향하고 있는 모습에서 고려 초상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원나라 화가가 그린 것이지만 구도가 안정되고 인물 묘사가 뛰어난 우수한 작품으로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동일한 양식의 익재의 초상화 4점이 전해지는데 그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가장 뛰어난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이다.

 

이 초상화는 화폭 상단에 적힌 제문(題文)을 통하여 그 제작 시기 및 필자를 알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이 초상화는 이제현이 33세 때인 1319년(충숙왕 6년)에 충선왕을 시종하여 중국의 강호(江湖)를 유람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충선왕은 진감여(陣鑑如)를 불러 이제현을 그리게 하였다 한다.

당시의 석학인 탕병룡(湯炳龍)이 찬을 지었음도 아울러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이제현은 귀국할 때에 이 초상(영정)을 가지고 오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33년 후 다시 원나라에 건너갔을 때 우연히 그 초상(영정)을 다시 보게 되었고, 그 감회 를 40자의 시로 읊고 있다.

 

이제현 초상(李齊賢 肖像 익재영정〉은 단지 대상 인물인 이제현이 고려인일 뿐이다.

 

화가는 엄연한 원나라 화가로서 우리나라 초상화사에서는 방계적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 자체가 지닌 질적 수준에 있어서나, 당시 원나라에서 유행하던 초상화 양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참고할 만하다.

이 상은 우안팔분면(右顔八分面-오른쪽 얼굴을 8등분)으로서 심의(深衣- 높은 선비의 웃옷)를 입고 공수 자세(拱手姿勢-두손을 맞잡은 자세)로 앉은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 -의자에 앉은 전신 그림)이다.

인물을 중심으로 상부 공간에는 제문과 찬문을 여유 있게 적어 놓았다.

오른편에는 몇 권의 서책이 놓여진 탁상을 안배하여 밀도 있는 화면 구성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의자의 손잡이는 앞으로, 서탁(書卓-글을 읽거나 쓸 때의 탁자)은 인물의 뒤로 자연스럽게 배치됨에 따라 인물의 취세(取勢-취한 자세)의 안정성이 확보되어 있다.

이 초상화는 현재 전해 오는 몇 폭의 고려시대의 초상화가 대부분 이모본(移模本-원본을 보고 다시 그린 그림)이어서 전신(傳神)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실정에서 주목되는 진적(眞蹟- 당시 실제로 그린 그림. 글씨)이다.

또한 사신(寫神- 동양에서의 인물화)이 정묘하여 원나라 제일의 명수라 칭하여지던

진감여의 화필이 보여 주는 초상화의 묘법이 충분히 인정된다.

 

한편, 이 초상화는 조선시대의 초상화가 거의 좌안을 고집하고 배경이 거의 없이 나타나는데 비하여

다채로운 화면 구성과 함께 우안(右顔-오른쪽 얼굴)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고려시대 초상화 성격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회화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원(元)의 화공 진감여(陣鑑如)가 그린 것이 그 찬기(贊記)에 의하여 알 수 있다.

 

# '익재집(益齋集)'에는 오수산(吳壽山)이라고 하면서 일본(一本 : 한장 )에 진감여(陣鑑如)로 쓴 것은 틀린 것이라고 하였지만 도리어 이것은 잘못이다.

호상(胡床-중국식 의자의 하나)에 약 30도(度)의 각도(角度)로 좌면(좌측)하여 앉아 있는 상이며 비수(肥瘦-필획이 굵고 가는 정도)없는 세선(細線- 가는 선)으로 설색후(設色後- 색을 칠한 후)에 다시 윤곽(輪廓)을 잡고 있는 고고유사묘식(高古遊사描式)의 초상(肖像) 인데 면모(面貌)에 의연(毅然)한 개성을 느끼게 한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초상화(肖像畵)가 대개 우측상(右側像)을 이루고 있는데 안유(安裕)의 초상화와 함께 좌측면(左側面)으로 되어 있는 것은 역시 시대풍조와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의 영정은 이리하여 여대(麗代-고려시대)의 희소(稀少)한 유품인 동시에 그것이 원(元)의 화백에 의하여 그려져서 원(元)의 화풍을 전하며 또 그 찬기(贊記)는 그 유래를 확실히 전하여 소중하다.

 

# 국보 110호 익재 영정(益齋影幀)에 대한 화평(畵評)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초상화(肖像畵) 원본(原本)으로는 *안향(安珦)의 반신상(半身像. 국보111호. 1318년작)과 익재공의 전신상(全身像. 국보110호. 1319년작)을 그린 2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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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향(安珦) - 고려시대 문신. 학자이다.
1260년(원종 1년) 문과 급제, 교서랑이 되고 1288년(충렬왕 14년) 정동행성의 원외랑을 거쳐
고려유학 제거(提擧)가 되고 이 해에 원나라에 들어가 연경에서 <주자전서>를 필사하여 돌아와 주자학을 연구하고 '섬학전'이란 육영재단을 설치하고, 국학대성전을 낙성하여 공자의 초상화를 비치하고 제기(祭器), 악기, 육경, 제자, 사(史) 등의 책을 구입하여 유학의 발전에 기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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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이제현 초상(李齊賢 肖像 - 익재 영정益齋影幀)은 우안(右顔- 오른쪽 얼굴) 8분면으로 심의(深衣-지위가 높은 사람이 입는 위옷)를 입고 공수(拱手-두 손을 맞잡는 것) 자세를 취한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 전신이 보이는 의자에 앉은 상)인데, 인물을 중심으로 상부 공간에는 제문(祭文)과 찬문(撰文)을 여유 있게 배치하였다.

인물의 오른편에는 몇 권의 서책이 놓여진 탁상을 배치하여 밀도 있는 화면 구성을 보이고 있다

 

왼편에 있는 의자의 손잡이는 앞으로, 서탁(書卓- 글을 쓰는 탁자)은 인물의 뒤로 자연스럽게 배치하여 인물의 앉음새가 균형을 이루면서 화면에 안정감을 주고 있다.

안면과 옷주름은 선염(渲染- 화면에 물을 칠하여 마르기 전에 붓을 대어 몽롱하고 침중한 묘미를 나타내는 기법)없이 필선(筆線-붓으로 그은 선)만으로 이루어졌으나 부위에 따라 성격을 달리하며 능숙한 처리가 부드럽게 마무리되어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정확한 세부묘사와 함께 채색 효과도 가라앉은 색조로 차분한 느낌을 주는 뛰어난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대상 인물이 고려인인데 반해 화가(畵家)는 원(元)나라 사람이어서 우리나라 초상화의 역사에서는 방계적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려 말기의 대표적인 학자였던 이제현의 풍모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당시 원나라 최고의 화가인 진감여의 초상화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작품 자체가 지닌 질적 수준은 드물게 보는 가품(佳品-질이 좋은 작품)이다.

 

○  오수산(吳壽山)이 그린 그림이냐? 진감여(陣鑑如)가 그린 그림이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110호인 이제현 초상(李齊賢 肖像- 익재 영정) 을 그린 화가가 누구인지 글마다 제각각이다.

 

아래의 글은 '익재집'에 실려 있는 글로 오수산이 그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우(延祐) 기미년(己未年 충숙왕 6년)에 내가 강남(江南) 보타굴(寶陀窟)로 향(香)을 내리려 가시는 충선왕(忠宣王)을 모시고 갔더니, 왕께서 옛 항주(杭州)의 오수산(吳壽山- 어떤 본에 陳鑑如라 했음은 잘못이다)을 불러내 보잘것없는 얼굴을 그리게 하고 북촌(北村) 탕 선생(湯先生)이 찬(贊)을 썼었다.

 

북으로 돌아오자 남이 빌어간 후로 그 소재(所在)를 잃었더니, 그 뒤 32년에 내가 본국의 표(表)를 받들고 경사(京師)에 가 다시 찾았다.

보니, 노년ㆍ장년의 얼굴 다름이 놀랍고 헤어지거나 만나는 데도 때가 있음을 느꼈기로 40자(字)로 적어본다

 

[延祐己未予從於忠宣王降香江南之寶陀窟王召古杭吳壽山令寫陋容而北村湯先生爲之贊
北歸爲人借觀因失其所在其後三年二年余奉國表如京師復得之驚老壯之異貌感離合之有時題四十字爲識]

 

위의 익재집(益齋集)에는 초상화를 그린 인물을 항주의 오수산(吳壽山)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림에는 진감여(陣鑑如)로 쓰여 있다고 한다.

 

당시의 석학인 탕병룡(湯炳龍)이 그림에 쓴 찬기(贊記)에는 진감여(陣鑑如)가 그린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 가산사(佳山詞) 소장본(所藏本): 문화재자료 164호

 

소재지: 전남 장성군 삼서면 홍정리 가산 마을 가산서원내

 

전남 장성군 삼서면 홍정리 487번지 가산 마을에 위치한 가산서원(佳山書院)은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선생과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을 봉안(奉安)하고 있다.

가산서원이 세워진 경유는 1498년(연산군 4년) 익재의 5대손인 현감공(縣監公) 재인(在仁)이 장수 현감(長水縣監)으로 재임시 종손(從孫-형님인 尹仁의 손자)인 원(再思堂-창평공 공린의 아들. 팔별 중 셋째)이  김종직의 문도로서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화를 입게 되었다.

이를 보고 현감공(縣監公) 재인(在仁)은 누가 미칠까 두려워 벼슬도 버리고 익재공(益齋公)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낙남(落南-남쪽으로 내려옴)하였다.

현 삼계면 백산촌(白山村)에 집을 지어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했다.

 

그 뒤 1559년 후손 대정(大貞)이 사우(祠宇-사당)를 지어 백산사(白山祠)라 하고 익재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기둥이 썩어 사당이 무너질 염려가 있으므로 1776년 후손 언경(彦慶) 이 낭월산 남쪽 기슭인 지금의 가산마을로 옮겨 새로 사우(祠宇)를 짓고 가산서원(佳山書院)이라 이름하였다.

이제현 초상(李齊賢 肖像- 익재의 영정)과 위패를 주벽으로 모시고 8대 방손(傍孫 : 익재공 17세-백사공이 25세)인 백사공(白沙公-항복)를 배향 하였다.

그 후 고종 5년(1868)에 다시 훼철(毁撤-헐어서 치워 버림)되었으나 초상(肖像)만은 가산 마을 중앙에 새로 지은 영당(影堂)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왔다.

이 때에 위패는 옛터에 묻어 지금까지 쌍분(雙墳)으로 전해오고 있다.

 

1957년 본손(本孫-익재공 후손)과 사람들이 옛터에 복원을 시작하여 1960년 3월 24일 완성하고 매년 9월에 향사(享祀-제사)하고 있다.

가산사(佳山詞)에 소장되어 있는 영정(影幀)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6년(1319年)에 그렸던 원화(原畵)에 의해 18세기에 이모(移模-원그림을 보고 다시 그림)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이모본(移模本)이지만 안면(顔面-얼굴)의 처리나 의습(依褶-옷 입은 맵시)의 표현 등이 원화(原畵-본디 그림)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다.

 

 

 

○ 구곡사(龜谷祠) 소장본(所藏本): 유형문화재 제189호

 

 

소재지: 전남 강진군 대구면 구수리 895 .
지정일: 1995년 12월 26일
시 대: 조선후기(18∼19세기)

 

구곡사(龜谷祠)는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367)과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영정(影幀)이 모셔져 두 분을 제사지내 온 사당(祠堂)이다.

 

구곡사에 소장된 두 영정은 작자(作者)나 제작연대(製作年代)가 밝혀져 있지 않으나 모두 18세기 이후에 추화(追畵- 추가로 그린 그림)된 이모(移模- 원 그림을 보고 그린 그림) 작품으로 생각된다.

구곡사에 모셔진 두 영정 가운데 여말(麗末)의 인물인 이제현의 영정에서는 여말 초상화의 한 유형을, 임진왜란 때의 공신인 이항복의 영정은 17세기 전반의 전형적인 공신도상(功臣圖像- 공신들을 대상으로 그린 그림 형태)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이모상(移模像-원그림을 보고 다시 그린 그림)이지만 한국의 초상화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작품들이다.

 

전신입상(前身立像- 앞면 몸체가 보이게 서 있는 상)인 이 영정은 사유보행상(思惟步行像- 생각하면서 걷는 모양)으로 약간 동세(動勢- 움직이는 자세)가 비치며 복식(服飾- 옷 모양) 에서는 중국 송대 사인도상(士人圖像-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들을 대상으로 그린 상)의 양식과 유사함을 보인다.

그래서 이 작품을 통해 고려시대 초상화가 송대(宋代) 형식을 바탕으로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현존하는 작품이 거의 없는 고려시대 초상화의 한 형식을 유추할 수 있다.

사적기(事蹟記)에 의하면 이 초상은 1870년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인 *조중묵 (趙重默)에게 의뢰하여 제작된 것이라고 하는데, 영정 입상의 화격(畵格-그림 그린 솜씨) 으로 보아 조중묵이 그린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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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서(圖畵署)
조선시대 그림 그리는 일을 관장한 관청이다.

* 화원(畵員)
화원은 죽(竹), 산수, 인물, 화조 등을 시험하여 선발하였는데, 주로 대대로 그림 그리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중인 신분

* 조중묵(趙重默)
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서문에 뛰어났고 그림은 산수·인물 등을 잘 그렸으며, 특히 초상화에 뛰어나 1846년
헌종어진도사憲宗御眞圖寫에 참여하고, 철종어진도사, 고종어진도사의 화사(畵師)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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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곡사(龜谷祠)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영정(影幀)은 후학과 후손들에 의해 추앙받은 덕망과 호협하고 의기로운 성품을 읽을 수 있는 대작이다.

비단 위에 채색으로 그려졌고 사모를 쓰고 가슴에 모란·공작 흉배를 한 대례복 차림의 정장한 전신의좌상(全身倚子像- 의자에 앉은 전신 모습의 상)이다.

바닥에는 재감이 표현된 화문석이 깔려져 있고 족좌(足座-발판) 위에 발을 얹고 곡교의(曲交椅-굽은 의자)에 앉아 있는 약간 우측면상(右側面像- 오른쪽 면이 보이는 상)이다.

이러한 영정은 조선시대 중기(17세기) 공신초상화(功臣肖像畵)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현재 모셔진 강진 구곡사 소장의 이제현 상과 이항복 상, 이 두 초상화는 18∼19세기에 이모(移模)된 것으로 당대의 원본을 충실히 옮겨 그려 초상화의 회화성도 제격을 갖춘 사료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또 두 인물의 역사적 위상으로 보아서도 의미가 크다.

 

구곡 마을은 경주 이씨(慶州李氏) 집성촌(集成村)이다.

 

원래 익재 선생을 모신 사당은 순조 4년(1804) 강진의 경주 이씨 후손들이 그 유덕을 기리 추모하기 위해

군동면 금곡에 세웠으나 고종 5년(1868) 훼철령(毁撤令-헐어버리라는 영)에 따라 철폐되었다.

 

그 후 후손들의 세거지(世居地)인 대구면 구곡 마을에 다시 구곡사를 짓고 선생의 영정을 배향하고 있다.

 

익재와 백사가 강진에 머물 당시 남긴 시문이 이곳에 전하고 있다.

 

 

○ 수락영당(水落影堂) 소장본(所藏本): 비지정 문화재(유교유적)

 

소재지: 충북 청원군 미원면 가양리

수락영당(水落影堂)은 조선 광무 2년(1898)에 충북 진천군 초평면 양호사(陽湖祠)에 봉안했던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문충공(文忠公) 문하시중(門下侍中) 익재(益齋) 이재현(李齋賢, 1278∼1367)의 영정을 충북 청원군 미원면 가양리로 이전(移轉) 봉안(奉安)한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사당이다.

매년 음력 3월 15일과 9월 9일에 향사(享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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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영당(水落影堂) 소장본(所藏本)의 영정을 두고 오수산이 그린 것을 이모했다고도 하고

진감여가 그린 것을 이모했다고도 한다.

 

* 오수산이 그린 것을 이모했다는 설.


[이 영정은 고려 충숙왕 6년(1319)에 원(元)나라의 오수산(吳壽山)이 그린 이재현의 초상화를 후대에 모사한 것이다.

선비복장을 한 반신상으로 그렸으며, 가로 49cm, 세로 93cm의 설채견본(設彩絹本-비단에 채색함)이다.]

오수산의 작품이라고 하는 이유는 '익재집' 에 이 그림을 오수산(吳壽山)이 그린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 진감여가 그린 것을 이모했다는 설.

[이 영정은 고려 충숙왕 6년(1319)에 당시 원나라 항주에 사는 일급 초상화가였던 진감여 (陳鑑如)가 그린 것을 후대에 모사한 유교복장을 한 반신상으로 가로 49cm, 세로 93cm의 비단에 채색한 것이다.]

진감여가 그린 그림이라고 하는 이유는 초상화의 화폭 상단에 제문(題文)이 적혀 있어서 그를 통하여 그 제작 시기 및 필자를 알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이 초상화는 이제현이 33세 때인 1319년(충숙왕 6년)에 충선왕을 시종하여 중국의 강호(江湖)를 유람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충선왕은 진감여를 불러 이제현을 그리게 하였다고 씌여 있다.

당시의 석학인 탕병룡(湯炳龍)이 찬(撰)을 지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현은 귀국할 때에 이 영정을 가지고 오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33년 후 다시 원나라에 건너갔을 때 우연히 그 영정을 다시 보게 되었고, 그 감회를 '40자의 시'로 읊고 있다.

 

그림 상단에 위와 같은 내용이 씌여 있기 때문에 진감여가 그린 그림을 보고 이모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영정의 윗부분에는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쓴 제기(題記)가 있는데, 이것은 이제현이 고려 충정왕 2년(1350)에 지은 자찬문(自贊文)을 옮겨 쓴 것이다.

지금의 영당은 1971년에 중건한 건물로 정면 2간, 측면 1간반 겹처마 팔작 지붕의 목조 기와집으로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분합문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으며 "수락영당(水落影堂)" 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영당의 앞에는 솟을대문을 세우고 둘레에 담장을 둘렀다.

 

마당에는"서운 이필영 유적비(西雲李苾榮遺蹟碑)"가 있다.

 

현재 경주 이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  구강서원(龜岡書院) 소장본(所藏本): 문화재 자료 90호

 

소재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양월리 777-1<구강서원내>
시대: 조선 숙종<肅宗> 13년(1688)
수 량: 1폭
지정일: 1985.08.05
소유자: 이상천

고려 후기의 학자인 익재(益齋) 이제현(李齋賢. 1287∼1367) 선생의 초상화이다.

이 영정은 우안팔분면(右顔八分面-오른쪽 얼굴 8등분 면)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 전신이 보이는 의자에 앉은 상)으로서 심의(深意-높은 선비의 웃옷)를 입고 공수자세 (拱手姿勢- 두 손을 맞잡은 자세)를 하고 있다.

원(元)나라 화공(畵工) 진감여(陳鑑如)가 그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이제현 초상(李齊賢 肖像-익재영정益齋影幀- 국보 제110호)과 동형동규(同形同規-같은 모양과 같은 규격)의 초상화(肖像畵)이다.

작자(作者)는 미상(未詳)이며 전하는 바로는 숙종(肅宗) 13년(1688)에 제작(製作)하여 구강서원(龜岡書院)에 봉안(奉安)되었다고 한다.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본이나 가산서원 본(佳山書院本)을 모사(模寫)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생의 초상화는 모두 4점이 전하고 있는데, 이 초상화는 그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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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수(拱手)
왼손을 오른손 위에 놓고 두 손을 마주 잡아 공경의 뜻을 나타냄. 또는 그런 예.
팔짱을 끼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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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산영당(長山影堂- 종중영당宗中影堂) 소장본(所藏本): 충북 유형문화재 제72호

 

소재지: 충청북도 보은군 탄부면 하장리 327

 

이 영정 화상(96×165cm)의 형식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본(국보 제110호)과 동일하며, 조선시대에 옮겨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이 상은 심의(深衣- 높은 사람이 입는 윗옷)를 입고 의자에 앉은 전신상(全身像)이다.

 

인물을 중심으로 윗 부분에는 그림의 제작에 관한 내용과 그림을 찬(撰)하는 글을 적고, 오른편에는 몇 권의 책이 놓여진 책상을 배치하여 재미있는 화면구성을 보이고 있다.

또한 전체적인 표현형상이 원본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이모본(移模本-원그림을 보고 그린 그림)이기는 하지만 고려시대 초상화의 한 면모를 말해준다.

충청북도 보은군 탄부면 하장리 경주 이씨 종중이 소장하고 있다.

이 영정은 말미(末尾)에 묵기(默記- 필묵으로 기록)와 낙관(落款-도장을 찍음)이 있어 익재공(益齋公)의 수 79세때 상(像)임을 알 수 있고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조선 중기 후손 이사균(李思均)에 의해서 국보 제110호인 영정(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모사(模寫)한 것으로 보이며 크기나 채색이 원본과 거의 같다.

호상(胡床- 의자의 한 종류)에 좌측면관좌상(左側面觀坐像- 좌측면이 보이는 앉은 상)으로 세선(細線-가는 선)으로 그리고 엷은 색을 칠한 후에 다시 윤곽을 잡았다.

남색의 깃을 대고 탕건(宕巾- 모자의 하나)과 신발은 흑색이다.

 

화법이 섬세하고 사실적이다.

 

영당(影堂)은 조선 연산군 10년(1504)에 후손 눌헌(訥軒) 이사균(李思均)이 부수찬 (副修撰)으로 폐비 윤씨의 복위 운동을 반대한 죄로 이곳 보은에 중도부처(中途付處- 정상을 참작하여 배소로 가던 중 도중에 어느 한 곳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던 형벌) 되었을 때 영당(影堂)을 건립하고 영정(影幀)을 봉안하였다 한다.

 

본 영정은 이 무렵에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영당 건물은 목조 기와집으로 건평 약 10평에 정면 2칸, 측면 1.5칸의 익공(翼工- 보가 얹혀지도록 기둥 상부에 얹는 돌출된 나무)을 달은 맛배 집(양옆으로만 지붕이 있는 집)이다.

 

 

익재 초상 영호사 봉안

소재 :  전남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 망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