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시조 익재 이제현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기록된 익재공(A)

녹전 이이록 2009. 2. 1. 17:18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기록된 익재공(A)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익재공(益齋公)-(1)

 

 

고려사절요 제24권  충숙왕(忠肅王) 병진 3년, 원 연우 3년

 

 

○ 여름 4월에 (생략) 민지(閔漬)를 여흥군(驪興君)으로...(생략)

이제현(李齊賢)을 진현관 제학(進賢館提學)으로 임명하였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익재공(益齋公)-(2)

 

 

고려사절요 제24권  충숙왕(忠肅王) 정사 4년, 원 연우 4년

 

선부전서(選部典書) 이제현(李齊賢)을 원 나라에 보내어 상왕의 생일을 축하하게 했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익재공(益齋公)-(3)

 

 

고려사절요 제24권 충숙왕(忠肅王) 계해 10년, 원 지치 3년 

 

○ 최성지ㆍ이제현이 원 나라에 있으면서 원 나라의 낭중(郞中)에게 글을 올리기를,

 

“간절히 생각건대, 소방이 사대한 지 백 년이 넘었습니다만, 해마다 직공(職貢)의 예를 게을리 한 적이 없었습니다.

 

옛날 요 나라 백성의 남은 종자(種子)인 금산왕자(金山王子)라는 자가 중원(中原)의 백성들을 노략해 몰고 와서

섬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조정에서, 합진(哈眞)ㆍ찰라(?剌)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할 때에,

날씨는 춥고 눈은 높이 쌓여서 군량을 수송하는 길이 끊어져 군사가 전진할 수 없게 되어서

흉도들의 웃음거리가 될 뻔하였는데, 우리 충헌왕(忠憲王)이 배신(陪臣) 조충(趙?)ㆍ김취려(金就礪)에게 명하여

군량을 실어 가서 군사를 구제하여 원 군사가 우리 군사와 협공(挾攻)하여 멸하였으며,

두 나라의 장수는 서로 형제되기를 언약하고 영원히 잊지 않기로 맹세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태조 황제 때에 진력한 일입니다.

 

또 세조 황제께서 남정(南征) 중에 회군하여 장차 대통(大統)을 계승하려 할 때,

그의 아우가 삭방(朔方)에서 변란을 선동하니,

제후(諸侯)들이 근심하고 의심하였으며, 길이 매우 험조(險阻)하였으나

우리 충경왕(忠敬王)이 세자(世子)로서 신하를 거느리고 양(梁)ㆍ초(楚)의 들에서 절하고 맞이하니,

천하(天下) 사람들이 먼 곳(고려)까지 진심으로 복종하는 것을 보고,

천명(天命)이 세조에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가 세조 황제에게 충성을 다한 것이었습니다.

 

충경왕이 왕위를 이어받고 본국으로 돌아오니, 충렬왕(忠烈王)이 다시 세자(世子)로서 들어가 황제를 곁에서 모시었습니다.

 

세조 황제가 그 공로를 생각하고 그 의리를 가상히 여겨서 공주(公主)에게 장가들게 하여 특별한 은혜를 베풀고

여러 번 조칙을 반포하여 고려의 옛 습속을 고치지 말라고 하니, 온 천하가 미담(美談)으로 칭송하였습니다.

 

우리 노심왕(老瀋王 충선왕(忠宣王))은 바로 공주의 아들이요, 세조의 친외손입니다.

 

세조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줄곧 5조(朝)에 벼슬하니, 친척이며 또 훈구(勳舊)입니다.

 

다만 공을 이룬 뒤에 정치에서 물러나지 않다가 예기치 않은 변을 만나,

머리를 깎이고 옷을 바꿔 입고 멀리 토번(吐蕃)의 땅으로 귀양가게 되었으니, 고국과 만 리도 넘는 거리입니다.

 

깎아지른 벼랑과 몹시 험한 길을 열 걸음에 아홉 번은 비틀거리고,

추운 곳을 지날 때는 층(層)을 이룬 빙판과 쌓인 눈이 1년 내내 변함이 없고,

열대 지방을 지날 때는 독한 남기와 장기(?氣)가 축축이 끼어 찌는 듯이 덥고,

도적들은 일어나니 가죽배로 대하(大河)를 건너며 소외양간에서 야숙(野宿)해야 했습니다.

 

이같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반 년 만에 이제 그 지역에 이르렀습니다.

 

보릿가루를 먹으며 흙방에서 거처하니 신산(辛酸)하고 괴로운 갖가지 형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길가는 사람들도 듣고 오히려 원통해하거든 하물며 그에게 신하로서 몸을 바친 자야 오죽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저는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르며, 누웠다간 다시 일어나 마음이 초조해지고 다급하여 끊임없이 피눈물을 흘립니다.

 

대체로 먼 속국을 회유하고 친척과 돈목(敦睦)하는 것은 선왕(先王)의 정치이며,

공(功)으로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은 춘추(春秋)의 법(法)입니다.

 

족하(足下)는 왜 조용히 승상(丞相)에게 말하며, 노 심왕이 지난날 다른 뜻이 없었고,

오늘날 회개(悔改)하고 있으며, 여러 대의 충근(忠勤)을 저버릴 수 없고,

본국 사람들의 사모하는 마음을 막을 수도 없으며,

세조(世祖)의 폐부친속(肺腑親屬)을 잊어버릴 수 없다는 것을 밝혀서, 들어가 황제에게 아뢰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금계(金鷄)의 은택(恩澤)을 내려 환(環)을 주어서 동으로 돌아와 다시 하늘의 해를 보게 하고,

성스러운 천자의 세상에서 홀로 구석을 향하여 우는 이가 없도록 하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면 대승상(大丞相)의 아름다운 덕은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더욱 드러날 것이며,

천하 사람들이 모두 족하(足下)를 칭송할 것입니다.

 

어찌 우리나라 군신들이 살에 새기고 뼈에 새겨 그 은혜의 만 분의 일이라도 갚기를 꾀하는 데 정도에서 그치겠습니까." 하였다.

 

 
또 승상 배주(拜住)에게 글을 올리기를,

 

“지난해에, 천자께서 진노하셔서 우리 노심왕이 몸둘 바를 모르니,

집사(執事)께서 가엾게 여기어 천둥과 번개같은 진노 밑에서 죽은 이를 살려내듯 백골에도 살을 붙이듯 하여,

가벼운 법을 좇아서 용서하여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하였으니 다시 살려 주신 은혜는 부모보다도 더합니다.

 

그러나 그 곳이 매우 멀고 또 궁벽하여 언어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며, 풍토와 기후는 아주 다릅니다.

 

불의에 일어나는 도적 떼와 닥쳐오는 굶주림과 목마름에 몸은 여위고 머리털은 모두 희어졌습니다.

 

신고(辛苦)의 상태는 말만하여도 눈물이 흐릅니다.

 

그 친속 관계를 말하면 세조의 친외손이며, 그 공을 말하면 선제(先帝)의 공신입니다.

 

또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국가가 처음 용흥(龍興)할 때부터 의(義)를 사모하여 남보다 먼저 복종하여,

대대로 충성을 바쳐 온 공이 있습니다.

 

경전(經傳)에 이른 바, '오히려 10대에 걸쳐서도 죄를 용서하여 줄 만한 자' 입니다.

 

쫓기어 귀양간이래 4년이 되었습니다.

 

마음을 고 치고 허물을 많이 뉘우쳤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집사(執事)께서는 처음에도 힘을 다하여 구출하였으니,

끝까지 은혜를 베풀 것을 잊지 말으시고, 천자에게 정상(情狀)을 거듭 자세히 아뢰어서

두터운 은혜를 내리도록 유도하여 주소서." 하였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익재공)-(4)

 

 

고려사절요 제24권 충숙왕(忠肅王) 갑자 11년, 원 태정제(泰定帝) 원년

 

 

○ (생략)
이제현(李齊賢)을 밀직사사로, 박문충(朴文忠)을 지밀직사사로,(생략)

 

 

○ 11월에 이제현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하였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익재공(益齋公)-(5)

 

 

고려사절요 제25권  충혜왕(忠惠王) 갑신 5년(1344), 원 지정 4년

 

 

○ 여름 4월에 (생략)

 

이제현(李齊賢)을 판삼사사에,........(생략)

 

 

 ○ 김해군(金海君) 이제현(李齊賢)이 도당(都堂)에 글을 올리기를,

 

“지금 우리 국왕께서는, 옛적 원자 같으면 입학할 나이로, 천자의 밝은 명을 받아 조종의 중업(重業)을 계승하시었습니다.

 

그런데 전왕이 실패한 뒤이니, 더구나 매우 조심하여 경건하고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경하고 삼가는 실은 덕을 닦는 것이 가장 중요하오며, 덕을 닦는 방법은 학문을 닦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지금 좨주(祭酒) 전숙몽(田淑蒙)이 지명되어 왕의 스승이 되어 있으니,

다시 어진 학자 두 사람을 더 선택하여 숙몽(淑蒙)과 함께 《효경》《논어》《맹자》《대학》《중용》을 강의하여서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道)를 배우시도록 하고,

사대부가의 자제 가운데서 정직ㆍ근후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예를 소중히 여기는 자 10명을 선발해서

시학(侍學)으로 삼아 좌우에서 보좌ㆍ인도하게 하고, 사서(四書)의 공부가 익숙하여지면

육경(六經)을 차례대로 공부하여 교만ㆍ사치ㆍ음란ㆍ방탕과 노랫가락이나 여색이나 사냥질과

같은 쾌락을 이목에 접하지 않도록 하여 습관이 성격을 이루게 되면,

모르는 중에 덕(德)이 이루어질 것이오니, 이것이 당면한 가장 급한 일입니다.

 

군신의 의(義)는 한 몸과 같으니, 머리와 팔다리가 친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오늘날 재상들이 연회가 아니면 접촉할 수 없으며, 특히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나아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무슨 이치입니까.

 

바라옵건대, 날마다 편전(便殿)에 앉으시어 항상 재상들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시고,

혹은 날짜를 정해서라도 나아가 뵈옵게 하여, 비록 아무 일이 없더라도 이 예는 폐하지 않게 하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대신들은 전하와 날로 소원해질 것이며,

환시(宦侍)들과는 날로 친근하여져서 백성들의 좋고 나쁜 것이나

종묘 사직의 안위를 왕에게 알려 드릴 수 없을까 걱정됩니다.

 

정방(政房)의 명칭은 권신들의 세대에 생긴 것이지 옛 제도는 아닙니다.

 

마땅히 정방제도를 혁신하여 이것을 전리(典理)와 군부(軍簿)에 귀속시키고,

고공사(考功司)를 설치하여 그 공과를 평정하며,

그 재능의 유무를 의논하여 매년 6월과 12월에는 도목(都目)을 받아서

정안(政案)을 조사하여 파면 또는 승진시켜서 이것을 항규로 한다면,

청알(請謁)하는 무리를 근절시키고, 요행으로 벼슬을 바라는 길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만일 어물어물 넘기고 옛 제도를 복구하지 아니하면,

장래에 양장(梁將)ㆍ조륜(祖倫)ㆍ박인수(朴仁壽)ㆍ고겸지(高謙之)와 같은 무리가 들고 일어나서

흑책(黑冊- 인사문서를 고치고 지우고 하는 것)의 폐단을 막지 못할까 깊이 걱정이 됩니다.

 

응방(鷹坊)과 내승(內乘)은 백성에게 해독을 끼침이 더욱 심한 것이라, 전에 이미 영을 내려 폐지하게 하였으나,

뒤에 다시 폐지하는 것이 지연되어 중앙과 지방이 모두 실망하였고,

마침내 고용보(高龍普)가 말을 달려 나와 책망을 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덕녕(德寧 江原 襄陽)ㆍ보흥(普興) 등의 고(庫)와 같이, 무릇 옛 제도에 없는 것은 일절 없애버리면,

아마도 애쓰시고 딱하게 여기는 황제의 뜻을 영구히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사나 수령으로 합당한 사람을 얻으면 백성들은 복을 받을 것이고,

좋은 사람을 얻지 못하면 백성들은 해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품계가 높던 자를 강등시켜 임명하면 교만하고 방자하여 법을 지키지 아니하며,

나이 들어서 벼슬을 구하는 자는 어둡고 나약하여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혹 청탁을 통해서 시골에서 기용되어 금어(金魚)를 늘어뜨리는 자는 더구나 말할 것도 없습니다.

 

청하건대, 옛 제도와 같이 조사(朝士)로서 아직 입참하지 않은 자에 대하여는

반드시 감무(監務)ㆍ현령(縣令)을 거쳐서 4품(四品)에 이르게 하고, 그 다음에 으레 수령이 되게 하는데,

감찰사(監察司)ㆍ안렴사(按廉使)가 반드시 성적을 고사하여 상벌을 주도록 하고,

만일 부득이하여 이른바 벼슬이 품계보다 높은 자, 나이 많은자,

청탁을 통하여 시골에서 기용되는 자가 있으면,

차라리 경관(京官)을 줄지언정 백성들과 가까이하는 임무는 주지 아니하기를 20년 동안 실시한다면,

흩어져 나간 백성이 돌아오지 않거나 공부(貢賦)가 부족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금은과 비단은 우리나라에서는 생산되지 아니합니다.

 

전에는 공경(公卿)들이 의복으로 무늬없는 천만을 쓰면서도 명주 비단옷 입는 듯이 하였고,

그릇은 놋쇠ㆍ동ㆍ자기 만을 사용하였습니다.

덕릉(德陵 충선왕)께서 옷 한 벌을 짓고자 하여 그 값을 물었다가 비싸서 그만두었으며,

의릉(毅陵 충숙왕)께서는 일찍이 전왕에게, '금실로 수놓은 옷과 새 깃을 꽂은 갓은 우리 조상의 옛 법이 아니었다'

고 책하였으니, 국가 4백여 년 동안 사직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검소한 덕에 의하였던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근래에 사치한 풍속이 극심하게 되었는데, 민생이 곤궁하고 나라의 경비가 부족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바라옵건대 지금부터는 재상들이 비단 옷을 입거나 금이나 옥으로 그릇을 만들지 못하게 하고,

또한 성장을 하고 말 탄 자는 그 뒤를 옹위 하지 못하게 하여, 각자가 검약하기를 힘쓰며

위로는 왕에게 풍간(諷諫)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감화시키면, 풍속이 순후하게 될 것입니다.

 

기왕에 강제로 징수하고 횡포하게 거두어들인 포(布)는 마땅히 곧 납부자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이오나,

관리들이 이를 기화로 농간을 부리면 국민들은 실지로 혜택을 입지 못할 듯 하오니,

마땅히 여러 관사(官司)에 분부하여 내년에 바칠 잡공(雜貢)으로 충당하게 하여

먼저 납부하기 위하여 빌리는 폐단을 면하게 하옵소서.

 

행성(行省)에서도 이미 통첩이 와 있으니 조속히 시행하도록 하십시오.

 

세 곳의 식읍(食邑)이 설립된 뒤로는 백관들의 봉록(俸祿)도 마련되지 못하온데,

무릇 한 나라의 왕이 여러 신하들의 염결(廉潔)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생활비를 빼앗아 사생활을 위한 창고를 채운다면 어찌 후세에 비난을 받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이것을 양궁(兩宮)에 알리어 식읍을 폐지하고 광흥창(廣興倉)에 환속시켜 그 봉록에 충당하도록 하옵소서.

 

경기(京畿)지방의 토전은 조상 때부터 내려오던 구분전(口分田)을 제하고 나머지는 모두 떼어 주어

녹과전(祿科田)으로 만든 지 거의 50년인데, 근자에는 권력 있는 집안에서 거의 모두 빼앗아 가졌기 때문에,

중간에 여러 번 혁파할 것을 논의하였으나, 문득 위언(危言)으로 왕을 기만하여 마침내 실시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는 대신들이 고집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과연 이것을 혁파할 수 있다면 기뻐하는 자는 매우 많을 것이요,

 

기뻐하지 않을 자는 권호(權豪) 수십 명뿐일 것입니다.

 

무엇을 꺼려서 실시하지 못하십니까.

 

주 ㆍ군에서 여러 해 동안 포흠(逋欠)된 공부(貢賦)는 관계관들이 모든 계책을 다하여 강력히 징수하여도

10분의 1도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만 원망을 살뿐이오니, 바라건대 영을 내리시어 지정(至正) 3년 이전에 포흠한 공부(貢賦)는

일체 면제하도록 하옵소서.

 

몇 해 전에 횡포하게 거두어들이니 빈궁한 백성들이 아들과 딸을 잡히거나 파는 자가 있었습니다.

 

바라옵건대, 각 도(道)의 존무사(存撫使)와 안렴사(按廉使)를 시켜 방을 붙여서

그 백성들이 서울에 와서 고할 것을 허락하고, 관재(官財)로 그 값을 계산하여 갚아주어 아들과 딸을 도로 찾게 하고,

산 사람도 자수하게 하되 만일 자수하지 않으면 그 값을 주지 않고 강제로 부모에게 돌려주게 하며,

심한 자에 대하여는 죄를 다스리게 하옵소서." 하였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익재공(益齋公)-(6)

 

 

고려사절요 제25권  충목왕(忠穆王) 병술 2년, 원 지정 6년

 

 

○ 겨울 10월에 교서를 내리기를,

 

“태조(太祖)께서 개국한 지 4백 29년인데, 그 사이의 법전과 문화와 좋은 말씀과

훌륭한 행실을 숨기고 전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후세에 보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충선왕(忠宣王)께서 민지(閔漬)에게 명하여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수찬하게 하였으나

아직도 빠진 것이 많으니, 마땅히 내용을 보태어 찬술하여 중앙과 지방에 반포하라."

 

하고, 곧 부원군 이제현(李齊賢), 찬성사 안축(安軸), 한산군(韓山君) 이곡(李穀), 안산군(安山君) 안진(安震),

제학(提學) 이인복(李仁復)에게 명하여 편찬하여 올리게 하였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익재공(益齋公)-(7)

 

 

고려사절요 제25권   충목왕(忠穆王) 무자 4년(1348), 원 지정 8년

 

 

○ 정승ㆍ왕후 등이 이제현(李齊賢)을 원 나라에 보내어 표문을 올리기를,

 

“국왕이 근일에 병을 얻어 훙(薨)하시어 온 나라가 애통하고 있습니다.

 

왕은 나이 어리고 후사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복속 되지 않는 일본(日本)을 이웃하고 있어 하루라도 왕위를 비울 수 없습니다.

 

지금 왕기(王祺)가 있는데 그는 보탑실리(普塔失理)왕의 동복동생으로,

일찍이 황제의 조정에 들어가서 모신 적이 있으며 나이는 19세입니다.

 

그리고 왕저(王저)는 보탑실리왕의 서자(庶子)인데 현재 우리나라에 있으며, 나이는 11세입니다.

 

엎드려 폐하께 바라옵건대, 선택하는 것은 오직 황제의 마음에 달려 있사오니, 백성들의 바라는 바를 따르시옵소서." 하였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익재공(益齋公)-(8)

 

 

고려사절요 제26권   충정왕(忠定王) 신묘 3년(1351), 원 지정 11년

 

 

○ 왕이 전 판삼사사 이제현(李齊賢)을 섭정승 권단정동성사(攝政丞權斷征東省事)로 임명하였다.

 

이제현이 모든 처리를 합당하게 하여 백성들이 그를 믿고 안심하였다.

 

 

○ 찬성사 조일신(趙日新)이 비목(批目)을 받아 가지고 원 나라에서 돌아왔는데,

그 내용은 이제현(李齊賢)을 도첨의정승으로, 이몽가(李蒙哥)를 판삼사사로, 조익청(曺益淸)ㆍ

전윤장(全允臧)을 찬성사로, 조일신(趙日新)ㆍ조유(趙瑜)를 참리로....., (생략) 삼는 것이었다.

 

 

권단정동성사 이제현이 배전(裵佺)과 박수명(朴守明)을 옥에 가두고,

직성군(直城君) 노영서(盧英瑞)를 가덕도(可德島)로 유배 보내며,

찬성사 윤시우(尹時遇)를 각산(角山)으로 유배 보내고,

 찬성사 정천기(鄭天起)를 제주목사로 폄직 시키고,

지도첨의 한대순(韓大淳)을 기장감무(機張監務)로 폄직 시켰다.

 

 

○ 이제현이 사직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조일신이 왕을 원 나라에서 시종한 공을 믿고 횡포하고 교만 방자하였는데,

이제현이 자기보다 위에 있는 것을 심히 질투하였다.

 

 

○ 이제현이 조일신의 시기를 피하여 세 번이나 글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익재공(益齋公)-(9)

 

 

고려사절요 제26권  공민왕 1(恭愍王一) 임진 원년(1352), 원 지정 12년

 

 

○ 이제현(李齊賢)을 우정승으로, 조익청(曹益淸)을 좌정승으로,

유탁(柳濯)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홍언박(洪彦博)ㆍ김승택(金承澤)을 찬성사로.....,(생략)  삼았다.

 

홍탁(洪鐸)을 회원현령(檜原縣令)으로 좌천시켰다.

 

홍탁은 일신의 장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