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시조 익재 이제현

익재공의 묘소 위치

녹전 이이록 2009. 1. 21. 18:42

● 익재공(益齋公)의 묘소 위치(墓所位置)

 

 

익재공(益齋公- 齊賢)의 아버지 동암공(東菴公- 王+眞)과 익재공(益齋公)과 밀직공(密直公- 彰路)의 묘소(墓所)는 지금의 북한(北韓)에 있다.

 

그 당시(當時)의 묘소 주소(墓所住所)는 김천현 장단군 소남면 지금리 원촌(金川縣長湍郡小南面知琴里院村)으로 일명(一名) 우봉 도리촌(牛峰挑李村)이라고도 하였다.

 

한 때는 장단군(長湍郡)을 개성부(開城府)라고 한 적도 있다.

 

경순왕릉(敬順王陵)이 있는 고랑포리 북쪽이며 임진강의 지천인 사미천이 흐르는 곳이다.

 

동암공(東菴公)의 묘소(墓所)는 방향(方向)으로 볼 때 계좌(癸坐)이고 그 옆에 익재공(益齋 公)의 묘소(墓所)는 자좌(子坐)이며, 밀직공(密直公)의 묘소(墓所)는 약간 떨어져 옆산 능선(稜線)에 있다.

 

 

고려 시중 익재 이선생 유지(高麗侍中益齋李先生遺址)라고 각자되어 있다.

 

 

덕봉공(휘 진택)이 세운 익재선생 유허비. 익재공의 15대손이라고 각자되어 있다.

 

[송경(松京- 송도. 개성)의 자남산(子南山)에 이른바 죽림당(竹林堂)의 옛 터라는 것이 바로 익재공(益齋公-李齊賢)의 유지(遺址)이다.

지지(地誌)에는 부(府)의 남쪽 수철동(水鐵洞)에도 유지(遺址)가 있다고 하였으나 확인되지 않으므로 여기에 덧붙여 둔다.]라는 글귀도 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익재선생 유허비를 세워 제1541호 보존유적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아래의 여러 선영도는 각 파보에 올려진 익재 선생 묘역을 나타내는 묘역도이다.  

 

 

 

 

 

위쪽 산자락에 익재공과 묘 2기. 아래쪽 산자락에 동암공과 밀직공 2기의 묘인데 높은 쪽이 동암공 묘이고 아래쪽(그림에서 보아 왼쪽)이 밀직공 묘이다.

 

그 아래쪽 산자락에 지인주사 부자 묘이다.

 

 

 ● 익재공 유지비 각자(益齋公遺址碑刻字)

- 이진택 찬(李鎭宅撰), 1798년(정조 22).

 

 

경기도 개성(京畿道 開城)에 있는 익재공(益齋公)의 집터에 세운 비문을 탁본한 것이다.

 

1매는 고려 시중 익재 이선생 유지(高麗侍中益齋李先生遺址)라는 제호(題號)를 탁본한 것이고, 1매는 비문의 본문을 탁본한 것이다.

이 비(碑)는 익재공(益齋公)의 15대손인 이진택(李鎭宅)이 개성부(開城府)에 경력(經歷)으로 부임하여 세운 것이다.

 

본문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송경(松京- 송도. 개성)의 자남산(子南山)에 이른바 죽림당(竹林堂)의 옛 터라는 것이 바로 익재공(益齋公-李齊賢)의 유지(遺址)이다.

지지(地誌)에는 부(府)의 남쪽 수철동(水鐵洞)에도 유지(遺址)가 있다고 하였으나 확인되지 않으므로 여기에 덧붙여 둔다] 

 

 

 

덕봉공집 4권에 게재된 익재공 묘산도

 

 

● 묘소의 지명 변천

 

 

북한당국에 의해 세 차례 행정구역을 조정하였는데,

 

1946년에는 황해도 장풍군 소담리라 하였고

 

1952년에는 개성시 장풍군 십탄리로 지명이 바뀌었고

 

2003년 6월에 황해북도 장풍군 십탄리 서원동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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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해 북도 지도- 3시 16개군

 

 

 

장풍읍 부근

 

 

10여개의 여울이 있어 십탄리라 한다. 

 

 

● 황해북도와 장풍군과 십탄리

 

 

○ 황해북도

 

과거의 황해도를 동서로 나뉘어 서해 쪽에 위치하는 황해남도의 오른편에 위치한다.

 

장풍군은 황해북도의 남쪽에 위치하며 왼쪽부터 개풍군. 개성공업지구. 장풍군이 위치한다.

 

2003년 9월 현재 황해북도의 행정구역은 도청소재지인 개성시와 사리원시와 송림시 등 3개시와
황주군, 봉산군, 은파군, 인산군, 서흥군, 연탄군, 수안군, 연산군, 신평군, 곡산군,
신계군, 평산군, 금천군, 토산군, 장풍군, 개풍군 등 16개 군과 개성공업지구(개성시)로 되어 있다

 

○ 장풍군

 

황해북도의 남동부에 자리한 군이다.

 

동쪽은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경기도 연천군, 서쪽은 개성시·금천군과 접하며, 남쪽은 판문군·파주군, 북쪽은 황해북도 토산군, 북동쪽은 임진강을 끼고 강원도 철원군과 접해 있다.

한 때 개성직할시 일 때는 1개시 2개군 가운데 하나였다.

 

행정구역은 군소재지인 장풍읍과 덕적 · 자하 · 구화 · 석촌 · 장좌 ·가곡 · 십탄 · 월고 · 서암 · 사시 · 고읍 ·

국화 · 임강 · 석둔 · 솔현 · 귀존 · 냉정 · 가천 · 장학 · 사암 · 나부 · 항동 · 세골 등 1개읍 23개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장풍군은 본래 고구려의 장천성군(長淺城郡)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에 장단으로 개칭하고 우봉군에 속했다.

 

그 후 단주(端州)로 승격되었다가 장단현이 되었고 고려 문종 때에는 개성부에 직속되었다.

 

조선시대 태종 때에 임강현과 통합되어 장립군이 되었다가 세종 때에 다시 장단현이 되었고, 세조 때에는 군으로 승격되었다.

예종 때에는 도호부가 되었다가 1895년에 경기도 장단군이 되었다.

 

1945년 국토가 분단되면서 대남 · 소남 · 강상 · 대강 등 4개면과 진서 · 장도 · 장남면 등의 일부가 북한 관할하에 들어갔으며, 개풍군의 영북면과 영남면을 흡수하여 장풍군이 되었다.

1952년 행정구역 개편 때 진서면이 판문군에 속하게 되었고, 영북면의 3개리도 황해북도 금천군에 이속되었다.

 

장풍군은 1954년 황해북도에 이전되었다가 1960년 3월 개성직할시에 편입되었으며, 1961년 강원도 철원군의 석둔·솔현·냉정·가천·귀존·장학리 등 6개리를 흡수했다.

지형은 아호비령 산맥의 말단부로 산지가 우세하며 북부와 서부가 높고 남동부로 갈수록 점차 낮아진다.

 

북쪽과 서쪽 경계를 따라 수룡산(716m)·국사봉(764m)·월양산(576m) 등이 솟아 있고, 남서쪽에는 화장산(558m)·대덕산(236m) 줄기가 경계를 이룬다.

군내에는 임진강을 비롯하여 81개의 크고 작은 하천이 있다.

 

임진강이 철원군과의 경계를 흐르며, 사미천이 군의 중앙부를 남동 방향으로 흘러 충적지와 구릉지대를 이루고 군사분계선을 지나 임진강에 흘러든다.

기반암은 지질구조가 복잡하여 역암·석회암·편마암·화강암 등으로 되어 있으며, 토양은 적갈색 삼림토가 넓게 분포한다.

 

농업이 주산업으로 경지면적은 군면적의 17.3%에 불과하고 그중 밭이 63.6%를 차지한다.

 

임진강 및 사미천 유역에서 생산되는 쌀과 옥수수·조·콩 등의 잡곡을 주로 생산한다.

 

특히 콩은 인접한 연천군의 콩과 함께 장연대두(長漣大豆)라 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특용작물로 인삼·담배를 재배하며, 양잠 및 왕골제품 등의 가내공업도 활발하다.

 

지방도로에 의해 황해북도 토산군 및 금천군과 연결되어 있으나 교통이 불편하다.

 

면적은 443㎢, 인구는 10여만이 넘을 듯한데 1988년에 추정으로 97,900명이다.

 

 

○ 개성

 

개성은 한 때 개성직할시였고 개성시, 개풍군, 장풍군의 1시 2군으로 구성된 광역 행정구역으로 평양과 남포에 이어 북한의 제 3의 도시였다.

6·25전쟁 전까지는 남한에 속했던 지역이다.

 

고려의 도읍지로 475년간 영화를 누려온 도시답게 유명한 역사·문화 유적지가 많으며 고려인삼, 개성상인으로도 유명하다.

고려의 전성기에는 인구 70만(13만 호)의 국제도시로 동남아와 아라비아까지도 무역을 하였으며, 이 때 코리아란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개성 지역은 기후가 대체로 온화하고, 지하자원이 풍부하며, 농업과 공업이 균형적으로 발전된 지역이다.

 

2002년 11월 북한이 개성공업지구 법을 발표하면서 새로이 주목받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지금은 황해북도에 속한 한 지방시일 뿐이다.

 

고구려 때 부소갑, 신라 때 송악으로 불리다가 919년(태조 2)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개성군(지금의 개풍군)을 합하여 개주라고 하였다.

935년 신라를 복속한 뒤 국도로 하였으며, 960년(광종 11) 개경으로, 995년 개성부로 고쳤다.

1062년(문종 16) 개성부사(開城府使)를 부활시켜 우봉군(牛鳳郡)을 이속시켰다.

1308년(충렬왕 34) 개성부로 승격시켰고 따로 개성현령을 두어 도성 밖을 다스리게 하였다.

조선이 개국하여 1405년(태종 5) 개성 유후사(開城留後司)를, 1438년(세종 20) 개성 유수(開城留守)를 두었으며, 1896년(고종 33) 관찰부(觀察府)로 개칭하였다가 다시 개성 부윤(開城府尹)을 두었다.

1906년 군수를 임명. 1914년 송도면(松都面)으로 개칭하였다가 30년 개성부로 하였다.

1949년에 개성시로 개칭하였으며, 1955년 개풍군·장풍군(長豊郡)·판문군(板門郡) 등을 포함하여 개성 직할시가 되었고 1989년 현재 개성시·장풍군·판문군·개풍군의 1시 3군으로 되어 있다.

2003년 6월 개성직할시의 장풍군과 개풍군이 황해북도로 편입되었다.

2003년 9월에 개성직할시가 일반시로 격하되어 황해북도에 편입되었다.

 

 

○ 십탄리

 

십탄리는 장풍군의 중심에 위치한 리이다.

 

북우천에 10여 개의 여울이 있어서 십탄리라 한다.

 

주요 농산물로 벼 옥수수 콩 팥 녹두 들깨 등이다.

 

예부터 누에고치 산지로 유명하며 과수업도 발달되었는데 사과 배 복숭아가 유명하다.

 

교통은 고읍리-장풍읍까지 3급 도로가 놓여 있고 군소재지 장풍읍까지는 9km이다

 

십탄리는 북쪽의 아호비령 산줄기에서 흐르는 사미천이 서쪽에서 흘러와 북쪽으로 흐르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자곶천과 만나 남쪽방향으로 고깔 모양으로 흐르는 지형의 서쪽 강변에 위치한 마을이다.

 

물길이 남동쪽만 틔고 서북동은 강물이 감싸 안는 모양으로 흐르는 곳에 십탄리가 위치하고 있다.

 

 

● 정포은 댁과 이웃 

 

 

익재공(익재공)의 생졸(생졸)년은 1287-1367년이고, 포은(포은) 선생은 1337-1392년으로 50년의 연차가 난다.

 

포은 선생은 1360년 문과에 장원하여 검열 등을 거쳐 1364년 판관이 되나 익재공은 71세인 1357년 문하시중을 사퇴한 시기임으로 조정에서 함께 하지는 못한 것 같다.

문집이나 사적 편에서 포은 선생 댁과는 이웃하였다 하였는데 묘산도에도 나란히 나타나 있다.

 

 

익재선생 유허지. 죽림당. 포은 정선생. 관황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