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시조 익재 이제현

우정승 문충 익재 선생전(右政丞文忠益齋先生傳) 역문 전문

녹전 이이록 2009. 1. 31. 19:50

 ● 우정승 문충 익재 선생전(右政丞文忠益齋先生傳) - 高麗 名臣錄(고려 명신록)



이제현(李齊賢)의 자는 중사(仲思)이고 초명(初名)은 지공(之公)이니 검교정승(檢校政丞) 진()의 아들이다.

  

충렬왕 27년(二十七年) 신축(辛丑. 一三O一)에 나이가 15(十五)세로 성균시(成均試)에 장원(壯元)하고 또 병과(丙科)에 합격하였으되 ‘이것이 나의 학업(學業)에 다가 될 수 없다’ 하고 드디어 문을 닫고 공자(孔子). 맹자(孟子). 사마천(司馬遷). 한유(韓愈)의 글을 읽어 익숙해지자 붓을 대어 글을 쓰면 옛날 작가(作家)의 풍이 있으니 진(. 아버지)이 기뻐하여 ‘우리 가문(家門)을 키울 사람은 반드시 이 아들이다’ 하였다.

 

충렬왕 34년(三十四年)에 예문관 춘추관(藝文館春秋館)에 선발되고 충숙왕(忠肅王) 원년(元年) 기유(己酉. 1309)에 두정(실사변斗正)에 발탁되고 여러 번 옮겨 성균 악정(成均樂正)이 되었다.

 

충선왕(忠宣王)이 인종(仁宗- 원나라 4대 왕)을 도와서 이미 내란을 평정하고 무종(武宗)을 영립(迎立)하니 매우 총애를 받았다.

 

드디어 충숙왕(忠肅王)에게 전위(傳位)하기를 정하고 태위(太尉)로서 연경(燕京)의 저택에 머물면서 만권루(萬卷樓)를 장원(莊苑) 안에 세우고 서사(書史)를 읽으며 스스로 즐기었다.

 

인하여 말하되  ‘경사(京師- 원의 서울)의 문학(文學)하는 선비는 모두 온 천하에서 선출되었는데 우리 부중(府中)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하고 드디어 제현(齊賢)을 불러 이르게 하였다.

 

이때 *요수(姚火+遂) *염복(閻復) *원명선(元明善) *조맹부(趙孟非+頁) 등 여러 사람이 모두 함께 있었다.

 

제현이 날마다 같이 놀아 문장이 날마다 진보되니 요수 등이 감탄을 마지않았다.

 

성균 좨주(成均祭主)에 옮겨 서촉(西蜀)에 사신 가니 이르는 곳마다 시(詩)를 읊어 사람들이 외우고 좋아했다.

 

선부전서(選部典書)에 올랐고 충선왕이 강남(江南)으로 내려갈 때 제현이 *권한공(權漢功)과 함께 따르니 왕이 강산(江山) 누대(樓臺)를 만날 적마다 빈객(賓客)들과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면서 ‘여기에서 이생(李生- 익재)이 없을 수 없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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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元)나라 때 한인(漢人) 학자

 

*요목암(姚牧菴)- 목암(牧菴)은 요수(姚火+遂)의 호이다.

허형(許衡)의 문인(門人)으로 벼슬이 한림학사(翰林學士)이고 시호는 문(文)이다.

 

*염자정(閻子靜)- 자정(子靜)은 염복(閻復)의 자이다.

호는 정헌(靜軒)이고 벼슬이 평장정사(平章正事)였다.

 

*원복초(元復初)- 복초(復初)는 원명선(元明善)의 자이다.

시호는 문민(文敏)이고 춘추(春秋)에 정통했으며 벼슬이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이다.

 

*조자앙(趙子昻)- 자앙(子昻)은 조맹부(趙孟兆+頁)의 자이다.

호는 송설도인(松雪道人), 구파(鷗波)로 시문(時文)과 서화(書畵)에 능하였다.

 

*권한공(權漢功)- ?∼1349(충정왕 1)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일재(一齋) 첨의평리(僉議評理).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 저서- 일재집(一齋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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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옮기고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칭호를 주었으며 또 전토(田土- 논밭)와 노비를 주어 포상하고 연(燕)과 오(吳)에 시종(侍從)했던 공(功)으로 황제에게 아뢰어 *고려왕부단사관(高麗王府斷事官)을 주었다.

 

그 후에 다시 원나라에 갔는데 유청신(柳淸臣). 오잠(吳潛) 등이 도성(都城)에 글을 올려 본국(고려)에다 성(省)을 세워 내지(內地- 중국)와 같이 하자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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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부단사관(高麗王府斷事官)-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에 둔 고려 왕부.

요동지역의 우리나라 백성들도 그 관할하에 두었다.

단사관은 종1품으로 왕부내에서 정치와 형벌을 행하는 지방행정 전반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는 최고책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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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현이 글을 지어 도당(都堂)에 올렸으니

 

[중용(中庸)에 말하되 ‘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림에 *구경(九經)이 있으니 그것을 시행함에는 하나의 성(誠)이다  했으며 끊어진 대(代)를 이어가고 폐지된 나라를 세워주며 어지러움을 다스려 주고 위태로움은 붙들어 주며 후하게 주고 박하게 받음은 제후(諸侯)를 품어주는 것이다’

 

했는데 설명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뒤가 없어진 것을 이어 주고 이미 멸망한 것을 봉(封)해주어 상하(上下)가 서로 편안하고 대소(大小)가 서로 불쌍하게 여기면 온 천하(天下)는 모두 충성(忠誠)과 역량(力量)을 다해서 왕실(王室)을 울타리로 보호 한다’ 하였다.

 

옛적에 제환공(齊桓公)이 형(邢)나라로 옮기자 백성들이 돌아왔고 위(衛)나라를 봉(封)해주자 도망민이 없어졌으니 이 때문에 제후를 규합하고 한 세상을 바로잡아 오패(五覇)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패도(覇道)를 하는 자도 오히려 이러함에 힘쓸 줄 알았는데 하물며 중국(中國)의 큰 땅을 차지하여 사해(四海)를 일가(一家)로 만든 자이리까?

 

그윽이 생각건대 소방(小邦- 우리나라)은 시조(始祖) 왕씨(王氏)가 나라를 만든 후에 400여년(四百餘年)을 지나고 성조(聖祖- 원 조정)에 신하 노릇하여 해마다 조공(租貢)을 바친 것도 또 100년(百年)이 넘었습니다.

 

백성에게 덕(德)을 베푼 것도 깊다고 아니하지 못할 것이고 조정(朝廷- 원나라)에 공(功)을 바친 것도 많지 않다고 못할 것입니다.

 

무인(戊寅. 1336)년에 요동민(遼東民)으로 외벽금산왕자(由밑巳蘗金山王子)란 자가 중국의 백성을 몰고 동쪽으로 도서(島嶼)지방에 들어와서 날뛰고 방자하니 태조성무황제(太祖聖武皇帝)가 합진(哈眞). 찰랄(札剌)두 원수를 보내서 토벌했습니다.

 

마침 하늘에서 큰 눈이 내려 양식이 유통되지 못했던데 우리 충헌왕(高宗인듯 하다)이 조충(趙沖)과 김취려(金就礪)에게 명령해서 양식을 공급하고 기구(器具)를 도와주며 도적을 사로잡았으니 파죽지세(破竹之勢)를 이루었습니다.

 

이에 두 원수(元首- 합진 찰랄)가 조충 등과 함께 맹서하여 형제가 되어 만세토록 잊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또 세조(世祖)황제가 강남에 돌아올 때 우리 충경왕(元宗인듯 하다)이 천명(天命)이 돌아오고 인심이 복종함을 알고 5000여리(五千餘里)를 건너가서 양(梁) 초(楚)의 교외(郊外)에서 뵈었고 충렬왕(忠烈王)도 몸소 조근(朝覲)을 닦아 일찍이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일본을 칠 때는 우리나라 군사를 동원해서 앞잡이가 되기도 하고 합단(哈丹)을 토벌할 때는 관군을 도와서 큰 괴수(魁首)를 베었으니 근왕(勤王- 황제를 위한 일을 말함)한 공로를 다 기록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주(公主)를 내려 보내서 생구(甥舅- 사위와 장인)의 인연을 돈독히 하고 옛 제도를 바꾸지 않아서 그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보전(保全)케 하고 대대로 황제(皇帝)의 소지(詔旨)만을 힘입어 왔습니다.

 

이제 조정(朝廷)에서 소방(小邦- 우리나라)에다 행성(行省)을 세워 중원(中原- 중국)의 제로(諸路)와 같이 한다하니 만약 그렇게 한다면 소방(小邦)의 공로는 말할 것도 없지만 세조(世祖)의 소지(詔旨)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엎드려 읽어 보건데 몇 년 전 11월(十一月)에 새로 내린 조서에서 사(邪)와 정(正)으로 하여금 길을 달리하고 해우(海宇-海內- 국내)가 편안하고 다스려서 중통(中統- 원 연호) ․ 지원(至元; 元朝의 연호)의 정치를 회복하였으니 성상(聖上)이 이러한 음덕(陰德)을 발한 것은 실상 천하사해(天下四海)의 복이었습니다.]

 

홀로 소방(小邦-우리나라)에게만 세조(世祖)의 소지(詔旨)를 이행치 않으면 되겠습니까?

 

용(中庸)의 글은 성문(聲門)에서 후세에 가르침을 드리운 것이고 공연한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의 뜻을 관찰해 보면 끊어진 자는 내가 이루어 주고 폐지된 자는 내가 일으켜 주고 어지러운 자는 다스려 주고 위태로운 자는 편안케 해준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까닭 없이 조그마한 나라의 400년(四百年) 공업(功業)을 하루아침에 폐절(廢絶)시켜 사직(社稷)이 주인이 없고 종묘(宗廟)의 제사가 없어지게 하여하니 사리로 미루어 볼 때 반드시 응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생각건대 소방(小房)은 땅이 천리에 불과하고 산림(山林)과 천수(川藪)에 쓸모없는 땅이 10분(十分)의 7(七)은 되고 그 땅에서만 세(稅)받고 조운(漕運- 수운을 말함)에 미치지 않으며 그 백성에게 부검(賦歛)해도 봉록을 지급하지 못하니 조정의 용도에 비하면 구우일모(九牛一毛)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땅도 멀고 백성도 어리석으며 언어(言語)도 상국(上國)과 같지 않으며 취향(趣向)도 중화(中華)로 더불어 아주 다르니 백성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니 집집마다 타일러서 안정시킬 수 없습니다.

 

또한 왜민(倭民)과 더불어 바다 건너 서로 바라보이니 만약 들으면 우리나라를 경계를 삼으면서 스스로 좋은 계책을 얻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집사(執事) 합하(閤下)는 세조(世祖)께서 공로를 생각해 준 뜻을 따르고 중용(中庸)의 세상을 가르치는 말을 기억해서 그 나라는 나라대로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두고서 그 정치와 부세(賦稅)를 닦으며 울타리가 되게 하고 우리 무궁한 국운(國運)을 받들게 하면 어찌 삼한(三韓)의 백성이 서로 경축하며 성덕(成德)을 노래할 뿐이리오?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영혼도 장차 명명(冥冥)한 속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하니 의논이 드디어 그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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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九經)- 천하를 경영하는 원칙


1)수신(修身); 천하를 경영하기 전 자신을 수양하라!

2)존현(尊賢); 능력 있는 인재를 우대하라!

3)친친(親親); 친척들을 소중히 여겨라!

4)경대신(敬大臣); 대신을 공경하라!

5)체군신(體群臣); 신하를 내 몸처럼 생각하라!

6)자서민(子庶民); 서민들을 내 자식처럼 여겨라

7)래백공(來百工); 기술자들을 초빙하라!

8)유원인(柔遠人);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을 부드럽게 대하라!

9)회제후(懷諸候); 이웃 나라 제후들을 잘 품어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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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忠宣王)이 참소(讒訴)를 입어 토번(吐藩)으로 유배(流配)되니 제현(齊賢)이 또 최성지(崔誠之)와 함께 원랑(元郞)과 승상(丞相) 배주(拜住)에게 글을 올려 충선왕(忠宣王)이 억울함을 아뢰니 배주(拜住)가 황제에게 말해서 충선왕(忠宣王)을 타사마(朶司馬)로 옮겼다.

 

제현(齊賢)이 충선왕(忠宣王)을 길에서 뵈옵고 밀직사사(密直司事) 되고 추성양절(推誠亮節) 공신(功臣)의 칭호(稱號)를 받았다.

 

다시 첨의평리(僉議評理)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또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다.

 

충숙왕(忠肅王)이 죽으매 조적(曺頔)이 난을 일으키자 충혜왕(忠惠王)이 공격하여 죽였다.

 

그러나 그의 무리가 심도(瀋都)에 있는 자가 매우 많으므로 충혜왕(忠惠王)에게 죄를 씌우려고 하였다.

 

원(元)나라는 사신을 보내서 충혜왕(忠惠王)을 부르니 인심(人心)을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화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제현(齊賢)이 분개(憤慨)하여 말하되

 

’나는 우리 임금의 아들을 알뿐이다‘

 

하고 충혜왕(忠惠王)을 따라 원나라 경사(京師)에 가서 사실을 밝혔으니 1등공신(一等功臣)으로 철권(鐵拳)을 받았다.

 

이미 돌아오자 뭇 소인들이 기뻐하지 않아서 밤낮으로 선동(煽動)해서 제현(齊賢)을 해치려고 하였다.

 

제현(齊賢)이 자취를 감춰 나오지 않고 낙옹비설(木+樂翁稗說)을 지었다.

 

충혜왕(忠惠王)이 원(元)나라에게 잡혀가고 충목왕(忠穆王)이 들어서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고 부원군(府院君)도 봉(封)하였다.

 

도당에게 글을 올려 말하되

 

‘이제 우리 국왕(國王) 전하(殿下)가 옛날 원자 입학(元子入學)하는 나이로 천자(天子)의 명(命)을 받아 조정(朝廷)의 중업(重業)을 이었는데 전왕(前王)이 전복(顚覆)된 후에 당했으니 조심하고 공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경하고 조심하는 실상은 덕을 닦는 것 같음이 없고 덕을 닦는 요점은 배움을 향함 같음이 없습니다.

 

지금 좨주(祭主) 전숙몽(田淑蒙)이 이미 사(師)라 하지만 다시 현유(賢儒) 두 사람을 선택해서 숙몽과 함께 효경(孝經),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강명(講明)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誠意) 정심(正心)하는 도(道)를 익히고 의관(衣冠) 자제(子弟)로써 직언(直言)하고 근후(謹厚)하며 배움을 좋아하고 예(禮)를 사랑하는 자 열 사람을 가리어 모시고 배우며 좌우로 보도(輔道)하며 사서(四書)에 익숙하거든 육경(六經)도 차서(次序)대로 연구하게 하고 교만하고 사치하고 음탕하여 성색(聲色)과 구마(狗馬)는 귀와 눈에 접하지 않아서 익힘이 성품과 함께 이뤄지고 덕(德)이 모르는 속에 진보되게 함은 당무(當務)에 비하여 막급(莫急)한 자입니다.

 

군신(君臣)은 의리가 일체와 같으니 머리와 팔 다리가 서로 붙지 않으면 옳겠습니까?

 

이제 재상(宰相)도 연회가 아니면 서로 접하지 않고 특별히 부르지 않으면 나와 뵙지 않으니 이것은 무슨 도리입니까?

 

마땅히 날마다 편전(便殿)에 앉아 늘 재상과 함께 정사(政事)를 의논하되 혹은 날짜를 나누어 진대(進對)하고 비록 일이 없더라도 이러한 예(禮)를 폐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신(大臣)이 날마다 멀어지고 환시(宦侍)가 날마다 가까워져서 민생의 고락과 종사(宗社)의 안위(安危)가 임금께 알려질 수 없을 것입니다.

 

정방(政房)이란 이름은 권신(權臣- 최우를 말함)의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옛날 제도가 아닙니다.

 

정방을 고쳐서 전리군부(典理軍簿)에 돌리고 고공사(考功司)를 두어 그 공과를 표시하고 그 재부(才否)를 의논하여 매년 6월. 12월에 도목고정안(都目考政案)을 받아서 내리고 올려주는 것을 길이 따라갈 법규(法規)로 삼으면 청탁하는 무리를 끊고 요행을 바라는 틈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만약 그대로 두고 옛 제도를 회복치 않으면 장래에 양장(梁將), 조륜(租綸), 박인수(朴仁壽), 고겸(高謙)의 무리가 벌떼처럼 일어나서 *흑책(黑冊)의 훼방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응방(鷹坊)과 *내승(內乘)은 백성의 *독해(毒害- 독이 주는 해로움)가 더욱 심한 것이라 전에 이미 명령을 내려 개혁하자고 했다가 다시 지연하니 온 나라가 실망하고 고용보(高龍普)로 하여금 달려 나온 것이 문책을 당했으니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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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책(黑冊)- 종이는 귀한 것이었다.

그래서 글씨를 처음 배우는 아이들은 종이에 까맣게 먹칠을 한 뒤 기름을 먹여서 그 위에 글씨를 썼다.

기름먹인 종이여서 글씨를 다 쓴 다음에는 물로 씻어 지워버리고 다시 쓸 수 있었다.

이렇게 종이를 아꼈다.

지우고 다시 쓰는 것이 마치 오늘날의 '칠판' 같았다.

이 글씨 연습장을 '흑책(黑冊)'이라고 불렀다.

 

고려 말 학자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에 이 '흑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임금 충숙왕이 병 때문에 사람을 만나려 하지 않자 몇몇 권신들이 임금 대신 인사권을 주물렀다.

인사발령장에 이름을 썼다가 뭉개고, 지우고 고쳐 썼다.

그랬더니 글씨 연습장인 '흑책'처럼 되고 말았다.

물론 '코드'에 가장 맞는 사람의 이름이 최종적으로 적혔을 것이다.

사람들이 이를 비웃어 '흑책정사(黑冊政事)'라고 했다.

나라의 정사를 글씨 연습하듯 처리했던 것이다.

부녀자와 어린아이에게까지 '흑책정사'라는 말이 유행했다.

 

*응방(鷹坊)- 고려·조선 시대에 매(鷹)의 사냥과 사육을 위해 두었던 관청이다.

응방의 제도는 몽골이 고려를 복속하게 한 뒤에 몽골에서 들어와 그들이 조공품(朝貢品)으로 요구하는 해동청(海東靑:사냥매)을 잡고 길러서 몽골에 보내기 위해 설치하였다.

응방에 관한 기록은 1275년(충렬왕 1)에 처음으로 보인다.

 

*내승(內乘)- 고려(高麗) 말(末) 때, 승여(乘輿- 어가)를 맡아보던 관아(官衙).

사복시(司僕寺) 외(外)에 궁중(宮中)에 따로 두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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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金銀)과 금수(錦繡)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으므로 전배(前輩) 공경(公卿)들은 의복을 다만 흰 비단을 썼고 그릇은 유기와 구리와 도자기를 썼습니다.

 

덕릉(德陵- 고려 충선왕의 능)은 옷 한 벌을 만드는데 값이 중하다하여 그만 두었고 의능(毅陵)은 일찍이 전왕(前王)의 금박(金箔)을 박은 옷과 깃을 꽃은 갓이 우리 선조(先祖)의 법(法)이 아니라고 책(責)하였으니 국가가 400여년(四百餘年) 동안 사직(社稷)을 능히 보전(保全)함은 한갓 검소한 덕(德)으로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래(近來)에 풍속(風俗)이 사치를 궁극하니 민생(民生)이 곤궁하고 국용(國用- 나라 살림)도 빈약해짐이 이 때문입니다.

 

청하옵건대 재상(宰相)도 이제부터는 비단으로 옷을 하고 금옥(金玉)으로 그릇을 하지 않을 것이며 화려한 옷을 입고 말을 탄 자들이 뒤에 따르지 않게 하고 각각 검소함을 힘써 위 사람을 간하고 아래 사람을 교화(敎化)하면 풍속(風俗)을 후(厚)한 데로 돌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전(前)에 급박(急迫)하게 징수했던 포(布)는 마땅히 납자(納子)에게 돌려주어야 하나 관리(官吏)들이 그것으로 인하여 부정한 짓을 하면 세민(細民)들이 그 해택을 받지 못할까 두렵기 때문에 재사(諸司)에 나누어 내년 잡공(雜貢)에 충당해서 먼저 드리고 빌리고 꿰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합니다.

 

행성(行省)이 이미 이문(移文)하였으니 일찍 시행해야 합니다.

 

삼식읍(三食邑;임금이 직접 부세를 받아쓰는 고을)을 이미 설립한 후에 백관(百官)의 봉록(俸祿)이 갖추지 못합니다.

 

한 나라의 임금으로 뭇 신하들을 공급할 재산을 가져다가 사사로운 창고에 채워도 어찌 후세(後世)에 조롱을 남기지 않겠습니까?

 

양궁(兩宮)에 주문(奏聞)해서 식읍(食邑)을 없애고 광흥창(廣興倉)에 환속(還屬)시켜 봉록에 충당토록 하소서.

 

경기도(京畿道) 토전(土田)을 조업(祖業)의 구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나누어 주어 녹과전(祿科田)을 삼아 행한 지가 50년(五十年)이 되었는데 근일에 권문호족(權門豪族)이 모두 수탈(收奪)해서 점령하므로 중간에 여러 차례 의논해서 개혁하려 했으나 문득 위협하는 말로 임금의 귀를 속여 끝내 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대신(大臣)이 굳게 집행(執行)하지 못한 고치입니다.

 

과연 개혁만 한다면 기뻐하는 사람이 많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권문호족(權門豪族) 몇 십 명일뿐이리니 무엇 때문에 과감하게 못합니까?‘

 

뒤에 안축(安軸- 안향) 이곡(李穀) 안진(安震) 이인복(李仁復)과 함께 민지(閔漬)가 찬술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增修)하고 또 충렬(忠烈) 충선(忠善) 충숙(忠肅) 3조실록(三朝實錄)을 수정(修整)했다.

 

공민왕(恭愍王)이 임금 자리에 올라 나라에 미쳐 이르지도 않아서 제현(齊賢)에게 명령하여 정승(政丞)을 대행(代行)하고 정동성(征東省)의 일까지 맡게 하였고 조금 있다가 도첨의정승(都僉義政丞)이 되었다.

 

제현이 다스림을 하되 배전(裵佺)과 박수명(朴守明)을 행성옥(行省獄)에 심문하고 직성군(直城君) 노영서(盧英瑞)는 가덕도(可德島)에, 찬성사 윤시우(尹時遇)는 각산(角山)에 유배하고, 찬성사 정천기(鄭天起)는 제주목사(濟州牧使)를, 도첨의 한대순(韓大淳)은 기장감무(機張監務)를 삼았다.

 

이에 왕이 원나라에 있어 나라가 비었고 권귀(權貴)한 소인들이 틈을 타서 일을 하니 인심이 흉흉해서 모두 아침저녁으로 난리가 일어난다 하되 제현(齊賢)이 왕명(王命)을 받아 중한 책임에 거(居)해서 조치를 적당히 함으로 사직(社稷)이 멸망하지 않게 되었다.

 

조일신(趙日新)이 제현(齊賢)의 직위가 자기 위에 있음을 알고 깊이 꺼리었다.

 

제현(齊賢)이 왕에게 아뢰기를

 

‘신(臣)이 일신(日新)의 위에 거(居)할 수 없다’하여 벼슬을 사양하되 들어주지 않았다.

 

또 말에서 떨어지어 발을 다치고 글을 올려 굳게 사표(辭表) 하되 또 듣지 않고 추성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이란 칭호를 더해 주자 제현(齊賢)은 또 세 번이나 글을 올려 굳게 사양하기를 마지않았고 드디어 벼슬을 내놓고 물러왔다.

 

조일신(趙日新)이 무리를 모아 밤에 궁중에 들어가서 미운 자를 해치되 군사를 놓아 마구 베었으나 제현(齊賢)은 벼슬에서 물러남으로 면하였다.

 

일신(日新)이 복주(伏誅)되자 제현(齊賢)을 기용해서 우정승(右政丞)을 삼고 순성직절 동덕찬화 공신(純誠直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주었다.

 

명년(明年)에 사면(辭免)하고 부원군(府院君)으로서 지공거(智貢擧)가 되어 이색(李穡) 등을 선발하고 다시 우정승(右政丞)이 되었으나 사면(辭免)했다.

 

김해후(金海侯)를 봉하고 문화시중(門下侍中)으로 옮기자 또 사양하되 듣지 않았다.

 

6년(六年- 공민왕)에 본직(本職)으로 물러나기를 구하고 따라서 또 글을 올려 퇴로(退老)를 청하니 인하여 명령하기를 집에 있으면서 국사(國史)를 찬술(撰述)케 하니 사관(史官)과 삼관(三館- 성균관, 예문관, 통문관)들이 모두 모였다.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왕이 남쪽으로 떠났다.

 

제현(齊賢)이 상주(尙州)에서 뵈옵고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하기를

 

‘오늘의 파천(播遷- 왕이 서울을 떠남)이 어찌 당 현종(唐玄宗) 때 안록산(安祿山)의 난리와 다르겠는가?’

 

하고 도적이 물러가자 또 홍언박(洪彦博)과 함께 말하기를

 

‘옛사람이 일컫기를 장하다! 산하(山河)여 이는 위(魏)나라의 보화(寶貨)로다 하였으니 만약 성을 쌓고 요새(要塞)를 지켰으면 이김을 기필할 수 있었을 것인데 일찍 도모하지 못함이 한이로다.

 

도적이 만약 들에서 싸웠으면 우리군사가 꼭 패배(敗北)했을 것인데 다만 눈이 내리고 도적이 뜻밖에 나갔으므로 이기었으니 이는 종묘사직(宗廟社稷)과 산하(山河)에 도움을 힘입은 것이다’

 

하고 드디어 언박(彦博)과 함께 손을 잡고 방황하기를 한참동안 하곤 하였다.

 

제현(齊賢)이 상모(狀貌- 면상)가 괴위(魁偉- 본받을 만큼 뛰어남)하며 평생에 급한 말과 급한 빛이 없었다.

 

남의 착함을 보면 비록 미천하여 아래 지휘에 있는 자라도 천거하고 기리어 사람들이 모를까 두려워하고 의논과 사업에 발현된 것도 학문의 도움이 있었다.

 

 유독 고치고 변경함을 좋아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나의 뜻도 어찌 옛사람 같지 못 하리오만은 다만 나의 재주가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늘그막에 한가롭게 살며 손님이 이르면 문득 술을 장만하고 고금(古今) 인물의 고하(高下)와 이의 옳고 그름을 의논하여 들을 만 하였다.

  

최해(崔瀣)가 일찍이 감탄하되

  

‘익재(益齋)는 천하(天下)의 선비이다’ 하였다.

  

16년(十六年- 공민왕)년에 졸(卒)하니 나이가 81(八十一)이고 시호가 문충(文忠)이다.

 

 처음에는 공민왕(恭愍王)이 신돈(辛旽)을 총애(寵愛)할 때 제현(齊賢)이 왕께 아뢰기를

  

‘신(臣)이 한번 신돈(辛旽)을 보았는데 그 모양 생김이 옛 흉인(凶人)을 닮았으니 왕께서 가까이 마소서’

하였으므로 신돈(辛旽)이 매우 함험(銜險- 험하게 원한을 품음)하여 훼방을 백가지로 하되 늙었으므로 해치지 못하고 왕에게 이르기를

  

‘유자(儒者)들이 좌주(座主)니 문생(門生)이니 하며 중외(中外- 나라 안팎을 아울러 이르는 말)에 퍼져있어 서로 청탁(請託)하고 찾아다닙니다.

 

 지금 선비들도 이제현(李齊賢)의 제자(弟子)라고 하는 자들이 드디어 나라에 가득한 도적이 되었으니 왕은 살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신돈(辛旽)이 패배(敗北)하고 왕이 말하되

  

‘익재(益齋)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은 따를 수 없다’하였다.

  

젊어서부터 친구들도 이름을 부르지 않고 익재 선생(益齋先生)이라고 했으므로 왕이 또한 호(號)를 불렀다.

  

후에 공민왕(恭愍王) 사당(祠堂)에 배향(配享)하고 저술(著述)한바 난고십권(亂藁十券)이 세상에 간행(刊行)되었다.

  

제현이 일찍이 국사(國史)가 갖추지 못함을 걱정해서 백문보(白文寶)와 이달충(李達忠)으로 더불어 기년(紀年), 전(傳), 지(志)를 지었는데 제현(齊賢)은 태조(太祖)에서 시작하여 숙종(肅宗)에 이르고 문보(文寶)와 달충(達忠)은 예종(睿宗)이하를 찬술(撰述)하는데 문보(文寶)는 겨우 예종(睿宗), 인종(仁宗)의 두 조정을 초안하고 달충(達忠)은 원고를 이루지 못했다가 남쪽으로 파천(播遷)할 때에 모두 흩어졌고 오직 제현(齊賢)의 태조 기년(太祖紀年)만 있다.

  

삼자(三子)는 서종(瑞種)과 달존(達尊). 창로(彰路)이니 서종의 아들은 보림(寶林)이다.

  

달존(達尊)의 자는 천각(天覺)이니 문장(文章)이 좋았고 처음에 음관(蔭官)으로 별장(別將)이 되었는데 충숙(忠肅) 때에 과거에 올라 정대(鞓帶)을 받고 사보(司補)로 말미암아 헌납(獻納)에 오르고 조금 있다가 감찰(監察), 장령(掌令), 전의(典儀). 부령(副令)으로 옮겼다.

 

 충혜왕(忠惠王)이 원(元)나라에 갈 때 그 아버지와 함께 따랐고 왕이 복위(復位)하자 전리총랑(典理摠郞)을 주었는데 동(東)으로 돌아오다가 길에서 졸(卒)하였으니 28세(二十八歲)이었다.

  

아들은 덕림(德林)과 수림(壽林)이다.

  

보림(寶林)은 사람됨이 근엄하고 방정(方正)해서 정사(政事)에 재능이 있었다.

  

일찍이 남원부사(南原부사)가 되어 새로 제용재(濟用財)를 설치해서 지공(支供)의 비용으로 쓰고 백성에게 함부로 걷지 않았다. 

 

 또 경산부(京山府에) 원(員)이 되었는데 길에서 부인(婦人)의 곡성(哭聲)을 듣고 말하되

  

‘곡성이 슬프지 않고 기뻐함이 있는 것 같다’ 하여 잡아다가 심문하니 과연 간부(奸夫와) 함께 남편을 죽인 자였다.

  

어떤 사람이 송사(訟事)하되 ‘이웃사람이 우리 소의 혀를 잘랐습니다.’ 하니 이웃사람은 승복하지 않았다.

  

보림(寶林)이 그 소를 목마르게 한 다음 마을 사람을 모아놓고 물에다 된장을 섞으면서 명령하기를

 

‘차례대로 소에게 장물을 마시게 하되 소가 마시려고 하거든 그치게 하라’ 마을 사람들은 명령대로 했다.

  

송사 당한 사람에게 이르니 소가 놀래어 달아났다.

  

심문(審問)한즉 과연 승복(承服)하기를 그 소가 우리 벼를 뜯어 먹었으므로 혀를 잘랐습니다하였다.

  

또 어떤 사람의 말이 뛰어나와 남의 보리 싹을 뜯어먹었다.

 

 보리 주인이 송사(訟事)를 하려하니 말 주인이 말하되

  

‘우리 보리밭에 있으니 결실(結實)하면 너에게 주리니 소송하지 말라’하므로 보리밭 주인은 허락했다.

  

여름이 되어 보리 싹이 다시 돋아 거둘 것이 있으니 말 주인이 말하기를 ‘너의 보리도 결실도 있었으니 줄 수 없다’하였다 하므로 보리밭 주인이 소송을 하였다.

  

보림(寶林)이 명령하여 말 주인은 앉게 하고 보리밭 주인은 서게 하고서 말하기를

 

'함께 달리되 따르지 못하는 자는 벌을 주리라‘ 하였다.

  

말 주인이 따르지 못하거늘 책망(責望)하며 말하기를

  

‘저 사람은 서고 나는 앉았으니 능히 따를 수가 있겠습니까?’ 하자 보림(寶林)이 말하되 ‘보리도 그와 같다. 뜯어먹은 후에 돋은 싹이 결실을 잘 할 수가 있겠는가?

 

 너의 말이 뛰어나와 보리 싹을 먹게 한 것이 첫 번째 죄이고 관청(官廳)에 고하지 못하게 한 것이 두 번째 죄이고 약속을 어기고 주지 않은 것이 세 번 째 죄이니 법(法)을 어지럽히는 백성은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곤장을 때리고 보리를 소송한 자에게 주라하였으니 정사(政事)가 근엄(謹嚴) 명백(明白)함이 이와 같다.

  

신우(辛禑)의 초기에 판안동부사(判安東府使)가 되어 다스림이 최(最)라 하여 대사헌(大司憲)에 발탁(拔擢)되었다.

  

조금 있다 밀직부사(密直府使\事로) 옮기었다.

  

제주(濟州)에서 진상(進上)한 염소를 여러 고을에 나누어 기르되 많이 죽고 번식되지 못하므로 그 값을 거두게 하였다.

 

 재상(宰相)들이 그 나머지를 나누어 기르자고 하거늘 보림(寶林)이 권중화(權重仲)와 더불어 말하되

 

‘백성(百姓)들은 값을 내게 하고 우리는 나누어 가지면 의리(義理)에 맞겠는가?’

 

하고 드디어 그만두었다.

  

벼슬은 정당문학(正堂文學)에 이르고 계림군(鷄林君)을 봉(封)하였으며 졸(卒)한 후에 시호(諡號)는 문숙(文肅)이고 아들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