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시조 익재 이제현

익재 영정. 기마도강도.백사공 구한 익재공. 여한 구가

녹전 이이록 2009. 1. 16. 21:25

● 익재 영정

 

 

종목 : 국보 제110호
분류 :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 : 1폭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대 : 고려시대
소유자 : 국립중앙박물관
관리자 : 국립중앙박물관

 

 

고려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익재 이제현(1287∼1367)의 초상화이다.

 

현재 고려시대 영정 중 유일한 것은 이제현(1287∼1367)과 안향(1243-1306)의 영정밖에 없다.

 

전남 강진군 대구면 구수리의 귀곡사에 보존되고 있다가 현재 국립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중국 원나라 진감여의 작인 원본의 훼손으로 인해 18세기에 충실히 옮겨 그린 것이다.(93×177.3).

 

입고 있는 의상은 중국 송나라 *사인도의 양식과 비슷하다.

 

그런데 공복이 아닌 일상복(質孫)을 입고 그린 그림이다.

 

가로 93㎝, 세로 177.3㎝로 의자에 앉은 모습을 비단에 채색하여 그렸다.

 

그림 위쪽에는 원나라 문장가인 탕병룡이 쓴 찬(贊)과 잃어버린 줄 알았던 이 그림을 33년 만에 다시 보고 감회를 적은 익재의 글이 있다.

대부분의 초상화가 오른쪽을 바라보는데 비해 왼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비단 테를 두른 흰 베로 짠 옷을 걸치고 두 손은 소매 안으로 마주 잡고 있다.

선생의 왼편 뒤쪽에는 몇 권의 책이 놓인 탁자가 있고, 오른편 앞쪽으로는 의자의 손잡이가 있어 앉은 모습이 안정되어 보이며, 화면구성도 짜임새 있다.

채색은 색을 칠한 다음 얼굴과 옷의 윤곽을 선으로 다시 그렸는데 부분적으로 표현을 달리 하여 날카롭지 않고 부드러워 보인다.

그림의 색감은 오랜 세월이 지나 변색된 듯하나 차분한 느낌을 준다.

 

이 그림은 충숙왕 6년(1319) 이제현이 왕과 함께 원나라에 갔을 때 당시 최고의 화가인 진감여가 그린 그림으로, 전해오는 고려시대 초상화가 대부분 다시 그려진 이모본인데 비해 직접 그린 원본으로, 안향의 반신상과 함께 현재 남아 있는 고려시대 초상화의 원본 2점 가운데 하나이다.

이 그림은 전신을 그린 것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얼굴과 의복을 선으로 표현한 것은 고려시대 다른 초상화들과 비슷하며, 조선시대 초상화가 인물이 오른쪽을 향하고 배경이 되는 바탕에 아무런 그림을 그려 넣지 않은 것에 비해 빈틈없는 구성과 왼쪽을 향하고 있는 모습에서 고려 초상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원나라 화가가 그린 것이지만 구도가 안정되고 인물 묘사가 뛰어난 우수한 작품으로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동일한 양식의 익재의 초상화 4점이 전해지는데 그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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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도 -송나라 때 그림의 한 양식.

 

이제현 초상화는 생각하면서 걷는 듯한 모습으로 약간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입고 있는 의상은 중국 송나라 사인도의 양식과 비슷하여 이 초상화를 통해 고려시대의 초상화가 송대의 형식을 바탕으로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시대의 초상화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실정에서 보면 고려시대 초상화의 한 유형을 짐작케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 기마도강도 - 이제현 작

 

 

비단에 채색
28.8cm x 43.9cm
국립중앙박물관
14세기

 

이제현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작품이 간혹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이 〈기마도강도〉도 분명하게 단정할 수는 없으나, 익재(益齋)라는 서명과 이제현인(印)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어 오래 전부터 이제현의 작품으로 전해온다.

화풍으로 보아도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해오는 〈천산대렵도〉의 채색 기법과 닮은 데가 있어서 그 무렵의 작품일 것으로 추정된다.

말을 탄 다섯 사람이 얼어붙은 강을 건너는 장면을 묘사하였는데, 산천은 강을 따라 지그재그 식으로 이어져 화면에 변화를 주고 있다.

눈 내린 경치가 맑고 말 탄 인물의 모습이 의젓하며 고요한 가운데 움직이는 생동감이 있어 격이 높은 화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배경의 산수는 필치가 섬약하고 인물에 비해 매우 소략하다.

 

 

● 백사(白沙- 이항복) 구한 익재공(益齋公)

 

 

위험에 처한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을 구한 이제현(李齊賢)대감의 이야기

 

때는 이항복(李恒福)이 태어난 지 1년이 되기 전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항복(李恒福)의 유모가 우물 가까이 가서 그를 땅 위에 놓아두고는 앉아서 그 모습을 보며 잠시 쉬다가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어린애들 잠시만 한눈 팔면 큰일나지 않습니까?

 

항복이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유모가 잠시 조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어린 항복이가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놀다가 우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유모의 꿈에 수염이 희고 얼굴이 긴 한 남자가 나타나, 지팡이로 유모의 정강이를 탁 치면서 '어찌해서 애를 보지 않느냐?'는 꾸지람에 유모가 화들짝 놀라 꿈에서 깨어보니 어린 항복이가 우물로 빠지려는 게 아닙니까?

놀란 유모는 냅다 쫓아가서 항복이를 얼른 붙잡았습니다.

 

다행히 간발의 차이로 우물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유모는 꿈에서 지팡이로 맞은 정강이가 실제로 여러 날 아파서 이를 이상하게 여겼는데 이 일이 있은 뒤 어느 날, 집안에 제사가 있어 방조(傍祖) 이제현(李齊賢)의 영정을 대청에 걸어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모가 이를 보고 크게 놀라 외치며 '앞전에 제 정강이를 때린 이가 바로 저분이옵니다.' 라는 것이 아닙니까?

삼백년전 조상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선생이 한참 후손인 이항복(李恒福)을 위험에서 구해주었던 것입니다

 

 

● 여한 9가(麗韓九家)  

 

 

창강(滄江) 김택영은 고려·조선 천년의 문장가를 식별하여 고려의 김부식·이제현 두 문장가에 조선의 장유·이식·김창협·박지원·홍석주·김매순·이건창 등 7인을 더해  ‘여한9가’, 즉 고려와 조선의 9대 문장가를 선정하였다.

나라가 망할 무렵 중국으로 망명해버린 김택영은 자신의 제자인 개성의 왕성순(王性淳)에게 유언을 남겼다.

 

나라는 망했지만 역대 문장가들의 글은 없어지지 않고 세상에 영원토록 전해지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왕성순은 김택영의 명을 받아 그 책을 간행하였다.

 

자신의 스승인 김택영의 글을 뽑아 함께 넣어 ‘여한10가문’이라는 책으로 중국 양계초의 서문을 받아 1921년 중국의 남통에서 간행하였다.

 

 

● 벼슬을 떠난 후

 

 

공민왕(恭愍王) 6년(1357)엔 벼슬을 떠났었다.

 

벼슬살이를 떠나서는 시를 썼고 성리학자로서 후진들에게 이기(理氣)에 대한 강론을 펴서 학문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던 것이다.

1362년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였을 때는 왕과 함께 상주. 청주로 피난하였으며 그 후는 왕명으로 실록을 편찬하였었다.

당대의 큰 성리학자로서 각 문장으로 특히 외교문서에 뛰어났고 나라를 아끼는데 그 힘이 대단한 학자이며 정치가였다.

고려(高麗)말엽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우기 위해 가진 고통을 안으로 소화해내면서 안으로 튼튼한 나라가 세워지기에 힘썼으며 기울어져 가는 사직을 바로 세우기 위해 가진 노력을 바치다가 죽은 위대한 학자이며 정치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