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시조 익재 이제현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익재공(益齋公) 평찬(評撰)

녹전 이이록 2009. 2. 3. 21:10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익재공(益齋公) 평찬(評撰)-A

 

 

'고려실록(高麗實錄)'은 남아있지 않고 '고려사 절요(高麗史節要)'가 있는데

중요한 내용마다 익재공의 논평이 실려 있어서 올린다.

 

 

○ 고려사절요 제1권  태조 신성대왕 (太祖神聖大王)

 

을미 18년(935), 후당 청태 2년ㆍ거란 천현 10년

 

임신일에 왕이 천덕전(天德殿)에 나아가서 재신과 백관을 모으고 이르기를,

 

“짐이 신라와 서로 피를 마시고 동맹을 맺어 두 나라가 각기 사직을 보전하여 영원히 잘 지내기를 바랐는데,

이제 신라왕이 굳이 신하로 일컫기를 청하며 경들 역시 옳다고 하니,

짐이 마음으로는 부끄럽게 여기나 의리상 굳이 거절하기는 어렵다."

하고, 이에 뜰 아래서 뵙는 김부의 예를 받으니, 뭇 신하들이 경하 드리는 소리가 궁궐에 진동하였다.

 

김부를 제수하여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 식읍 팔천호(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樂浪王政丞 食邑八千戶)

로 봉하고, 위(位)는 태자의 위에 두었다.

해마다 녹 1천 석을 주고, 신라국을 없애고 경주(慶州)라 하여 김부에게 주어 식읍으로 하게 하였다.

 

그 따라온 사람들도 모두 채용하고 토지와 녹을 주어 그전보다도 더 우대하였다.

또 신란궁(神鸞宮)을 세워 김부에게 주었으며,

김부를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아 부호장(副戶長) 이하 관직 등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이에 여러 공신들 역시 이를 본받아 각기 그 주(州)의 사심관이 되니, 사심관은 이때에 시작되었다.


 

예전에 봉휴(封休)가 와서 항복하겠다고 청할 적에, 왕이 두터운 예의로 대접하고,

그에게 돌아가 신라왕에게 알리게 하기를

“이제 왕이 나라를 과인에게 주니 그 은혜가 큽니다.

그러니 종실과 결혼하여 사위와 장인의 의(誼)를 계속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김부(경순왕)가 이 말을 듣고 회보하기를,

“나의 백부 잡간(잡干) 억렴(億廉)에게 딸이 있는데 심덕과 용모가 다 아름다우니,

이 사람이 아니면 내정(內政)을 갖출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드디어 장가드니, 이가 신성왕후(神成王后)이며, 안종(安宗) 욱(郁)을 낳았다.

 

(이 일을 두고) 이제현(李齊賢)이 말하기를

 

“김부식(金富軾)이 논하기를,

'신라의 경순왕(敬順王)이 우리 태조에게 귀순함은 비록 마지못해서 한 일이지만 역시 칭찬할 만한 일이었다.

그때 만약 힘껏 싸워 사수하여 고려 군사[王師]에게 항거했더라면 반드시 그 종족을 멸망시키고

죄없는 백성들에게까지 화가 미쳤을 것인데, 이에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부고(府庫)를 봉하고

군ㆍ현을 기록하여 태조에게 귀순하였으니 그가 조정에 공로가 있고 백성에게 은혜를 베풂이 매우 컸던 것이다.

옛날 전씨(錢氏)가 오월(吳越)의 땅을 송 나라에 바친 일에 대해 소자첨(蘇子瞻)이 그를 충신이라 일렀는데,

이제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 훨씬 나은 점이 있다.

우리 태조는 비(妃)ㆍ빈(嬪)이 많고 그 자손들도 번성했으나, 현종(顯宗)이 신라의 외손으로서 왕위에 올랐으며,

그 후에 왕통을 계승한 이가 모두 그의 자손이었으니 어찌 그 음덕(陰德)의 보답이 아니리오.' 하였다.

 

[김관의(金寬毅)ㆍ임경숙(任景肅)ㆍ민지(閔漬) 세 사람의 글에서는

모두 '대량원부인(大良院夫人) 이씨(李氏)는 태위(太尉) 정언(正言)의 딸로서

안왕(安王 안종(安宗)을 낳았다.' 하였는데, 어디에 근거한 말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 김부식이 신라왕 김부가 태조(왕건)에게 귀순한 것을 두고 공로가 있고 백성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 크다고 말한 내용이다.

 

태조(왕건)이

 

'신라 종실과 결혼하여 사위와 장인의 의(誼)를 계속하고자 합니다.' 하였는데

김부(경순왕)가 이 말을 듣고 회보하기를, 자기의 큰아버지 잡간(잡干) 억렴(億廉)에게 딸이 있는데

심덕과 용모가 아름다우니 이 사람과 결혼함이 좋다고 하니 태조왕이 드디어 장가드니,

이가 신성왕후(神成王后)이며, 안종(安宗) 욱(郁)을 낳았다 하는데

김관의(金寬毅)ㆍ임경숙(任景肅)ㆍ민지(閔漬) 세 사람의 글에서는 모두 '대량원부인(大良院夫人) 이씨(李氏)는

태위(太尉) 정언(正言)의 딸로서 안왕(安王 안종(安宗)을 낳았다.' 하였는데

이 말이 어디에 근거한 말인지 알 수 없다." 고 한 내용이다.

 '고려사절요'의 여러 사실에 대하여 익재공이 일일이 비평하거나 논한 것 중의 하나이다.

 

 

○ 고려사절요 제1권  태조 신성대왕 (太祖神聖大王)


 

임인 25년(942), 후진 천복 7년ㆍ거란 회동 5년

 

◇ 겨울 10월에 거란에서 사신을 보내어 낙타 50필을 가져왔다.

그러나 왕은

“거란이 예전부터 발해(渤海)와 화목하게 지내오다가 문득 다른 생각을 내어 옛날의 맹약을 돌아보지 않고

하루아침에 멸망시켰으니 무도함이 심하다. 그러니 멀리 화친을 맺어 이웃으로 삼을 만하지 못하다." 하고,

그 교빙(交聘-  나라와 나라 사이에 서로 사신을 보냄)을 끊었으며, 그 사자 30명을 바다에 있는 섬으로 귀양보내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밑에 매어 놓아, 모두 굶어 죽게 하였다.

 

 

(이 일을 두고) 이제현(李齊賢)이 말하기를

"충선왕(忠宣王)이 일찍이 신(臣) 제현에게 묻기를,

 

'우리 태조 때에 거란이 낙타를 선사하였는데 이것을 다리 밑에 매어 두어 먹이를 주지 않고 굶겨 죽였으므로

그 다리를 낙타교(駱駝橋)라고 불렀다.

낙타가 비록 중국에서 생산되지는 않으나 중국에서도 기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나라 임금으로서 수십 마리의 낙타를 기를 정도면 그 피해가 백성을 해치는 데는 이르지 않을 것이니,

우선 이를 물리치면 그만이지 어찌 굶겨서 죽이기까지 하였는가.'

하시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창업하여 자손에게 전해 주는 임금은 그 소견이 원대하고 그 생각이 깊어서 훗날의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송(宋) 나라 태조가 궁궐 안에 돼지를 길렀는데 인종(仁宗)이 돼지를 놓아 보내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후에 요술 부리는 사람을 잡았으나, 피를 채취할 데가 없었으니,

송 태조의 생각이 역시 거기까지 미쳤다는 것을 알겠으나 이 또한 정론(定論)은 될 수 없습니다.

송 태조가 돼지를 기른 뜻이 피를 구하려는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지 않았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태조께서 이런 일을 하신 것이 오랑캐(거란)의 간사한 계책을 꺾으려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또한 훗날의 사치한 마음을 막으려 하신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대개 반드시 은미한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공경하고 묵묵히 생각하고 힘써 행하여 알아내시기에 달렸을 것이요,

 

어리석은 신이 감히 경솔하게 의논드릴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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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술……없었으니 : 요술을 부리는 사람을 잡을 때에는 짐승의 피를 끼얹으면 요술쟁이가 변화를 하지 못한다고 한다.

 

 

○  고려사절요 제1권  태조 신성대왕 (太祖神聖大王) 


 

계묘 26년(943), 후진 출제(出帝) 잉칭(仍稱) 천복 8년ㆍ거란 회동 6년

 

◇ 경오일에 신성대왕(神聖大王)이란 시호를 올리고, 묘호(廟號)를 태조(太祖)라 하였다.

 

◇ 임신일에 현릉(顯陵)에 장사지냈는데, 유명에 따라 상장(喪葬)과 원릉(園陵)의 제도는 한 문제와

위 문제의 고사에 따라 모두 검약하게 하고,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柳氏)를 부장(인변+付葬)하였다.

왕후는 정주(貞州) 사람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 천궁(天弓)의 딸이다.

 

천궁은 집이 큰 부자인데 고을 사람이 그를 장자(長者)라고 일컬었다.

태조가 장군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정주를 지나다가 오래 묵은 버드나무 밑에서 말을 쉬었는데,

태조가 길 옆 냇가에 서 있던 왕후의 용모가 덕성스러움을 보고, “뉘 댁의 딸이냐?"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이 고을 장자 집의 딸입니다. 잠시 저의 집에 쉬어 가시지요." 하니, 태조가 그 집에 가서 유숙하였다.

그 집에서는 온 군사를 매우 풍족하게 먹이고 왕후에게 태조를 모시고 자게 하였다.

 

그 후에 소식을 끊고 서로 알리지 않았는데, 왕후가 절개를 지켜 머리를 깎고 여승[尼]이 되었다.

태조가 이 소식을 듣고 불러 부인(夫人)으로 삼았는데 궁예를 쫓는 의거를 일으킬 때에 갑옷을 들고 입혀 대업을 도와 이룩하였다.

 

 

(이 일을 두고) 이제현(李齊賢)이 찬하기를,

“신이 충선왕(忠宣王)을 섬길 때에, 왕이 일찍이 이르기를,

'우리 태조의 규모와 덕량(德量)은, 중국에 나셨더라면 마땅히 송(宋) 나라 태조(太祖) 못지 않았을 것이다.

송 태조는 주(周) 나라 세종(世宗)을 섬겼는데, 세종은 현명한 군주였다.

 

송 태조를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고, 송 태조 역시 그를 위하여 힘을 다하였다.

 

그러나 공제(恭帝)의 나이가 어려서 정사가 태후의 손에서 결정되자,

여러 사람의 추대에 몰려서 주 나라 공제의 선위(禪位)를 받았으니 대개 마지못한 데서 나온 일이었다.

우리 태조께서 시기심 많고 포학한 임금인 궁예를 섬기셨으니,

삼한의 땅을 궁예가 그 3분의 2나 차지하게 된 것은 태조의 공이었다.

세상에 드문 큰공을 세워 의심받을 만한 처지에 있었으니 위태로웠다고 할 수 있을 텐데

나라 사람들이 진심으로 따르고 장졸들이 그를 추대하는 데도 오히려 굳이 사양하고 연릉(延陵)의 절조를 따르고자 하였으나,

도탄에 빠진 백성을 위로하고 죄 있는 임금을 친 일이야 어찌 그만둘 수가 있었으랴.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며, 공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주고, 죄가 있으면 반드시 벌을 주었으며,

공신들을 성심껏 대접하면서도 권세는 빌려 주지 않았으며,

제왕(帝王)의 기업을 세워 자손에게 이어 준 일은 진실로 그 법도가 송 태조와 한 가지였던 것이다.

송 태조는 강남(江南)의 이씨(李氏)를 와탑(臥榻)에서 코를 골고 잠자는 사람에게 비하였으며,

석진(石晉)은 거란에게 분양한 산후(山後) 16주를 대개 주머니 속의 물건처럼 보아서 이미 북한(北漢)을 회수하고는

멀리 군사를 몰아 진(秦)ㆍ한(漢) 시대의 영토를 평정하려고 하였다.

우리 태조께서는 왕위에 오른 후에, 김부(金傅)가 아직 귀순하지 않았고 견훤이 포로가 되기 전이었는데도

자주 서도(西都)에 행차하여 친히 북방의 변경을 순수(巡狩)하였었다.

그 의도 또한 동명왕(東明王)의 옛 영토를 집안에 대대로 전해오는 물건처럼 여겨서 반드시 모조리 거두어 차지하려 하였으니,

어찌 다만 계림(鷄林)을 취하고 압록강(鴨綠江)을 칠[操鷄搏鴨] 뿐이었으리오.

이렇게 본다면 비록 크고 작은 형세는 같지 않으나, 두 조(祖 송 태조와 고려 태조)의 규모와 덕량은 이른바,

'그 처지를 바꾸면 모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충선왕은 총명하여 옛 글을 좋아하였으며,

중국의 박학(博學)한 선비인 왕구(王構)ㆍ염복(閻復)ㆍ요수(姚燧)ㆍ소구(蕭?)ㆍ조맹부(趙孟?)ㆍ우집(虞集) 같은 이들이

모두 그 북경 저택(北京邸宅)의 문정(門庭)에서 어울렸으니,

아마도 일찍이 그들과 함께 옛 사람의 행적에 관해 논한 적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 고려사절요 제2권  혜종 의공대왕(惠宗義恭大王)


 

을사 2년(945), 후진 개운 2년ㆍ거란 회동 8년

 

◇ 무신일에 왕이 중광전에서 훙(薨)하였다.

 

시호를 올려 의공대왕(義恭大王)이라 하고, 묘호는 혜종이라 하였으며, 순릉(順陵 경기 개성(開城)에 있음)에 장사지냈다.

신하들이 왕의 아우 요를 받들어 즉위하도록 하였다.

 

 

(이 일을 두고) 이제현(李齊賢)이 찬(贊)하기를,

“우보(羽父)가 환공(桓公)을 시해하도록 청하고 태재(太宰 관명(官名))가 되기를 요구하였는데,

은공(隱公)은 듣지도 않고 그를 토죄하지도 않더니 마침내 위씨(蔿氏)의 화를 입게 되었다.

 

왕규가 두 왕제(王弟)를 참소한 것 역시 우보의 뜻과 같았는데, 혜종이 그를 죄주지 않고 도리어 측근에 있도록 하였으니,

칼을 감추고 사람이 벽 속에 숨었다가 왕을 해치려던 그 음모를 면한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이때는 태조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왕규가 불의(不義)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있었으니,

이미 한(漢)ㆍ위(魏) 시대의 조씨(曹氏)ㆍ사마씨(司馬氏)와 능히 같을 수 있었던가.

그를 내쫓거나 죽이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아, 소인을 멀리하기가 이토록 어려우니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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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羽父)가 ……요구하였는데 : 노(魯) 나라 환공이 적자(嫡子)이나,

아직 어리므로 그 서형(庶兄)인 은공이 임시로 임금노릇을 하고 있다.

그러자 우보가 은공에게, “내가 공자(公子 환공)를 죽일 터이니 태재(太宰) 벼슬을 주시오." 하였다.

 

*은공(隱公)은……화 : 은공이 우보의 말을 거절하자 얼마 후에 우보가 은공을 위씨의 집에서 죽인 밀을 말한다.

*한(漢)……사마씨(司馬氏) : 한(漢) 나라 말기에 조씨(曹氏)의 세력이,

위 나라 말기에는 사마씨(司馬氏)의 세력이 임금보다 강하였다.

 

 

○ 고려사절요 제2권  혜종 의공대왕(惠宗義恭大王)


 

기유 4년(949), 후한 건우 2년ㆍ요 천록 3년

 

◇ 3월 병진에 왕의 병환이 위독하자, 동모제(同母弟) 소(昭)를 불러 선양(禪讓)하고,

제석원(帝釋院)으로 옮겨가서 훙하였다.

문명(文明)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묘호(廟號)를 정종(定宗)이라 하며, 안릉(安陵 경기 개성(開城))에 장사지냈다.

 

예전에 도참(圖讖)을 믿어서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고자 장정을 징발하고

시중(侍中) 권직(權直)에게 명하여 궁궐을 경영하게 하니, 노역이 끊이지 않았다.

또 개경의 민가를 뽑아 서경에 채우니,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아 원망이 일어났다.

 

왕이 훙하니, 역부들이 듣고 뛸 듯이 기뻐하였다.

 

 

(이 일을 두고) 이제현이 찬하기를,

 

“정종이 존귀한 왕의 신분으로 10리나 떨어진 사원까지 걸어가서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고,

또 7만 석의 곡식을 하루만에 여러 중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한 번 하늘의 견책을 받자 정신을 잃고 병환이 났으니,

이른바 '군자는 간사한 짓으로 복을 구하지 않는다.'는 옛글을 일찍이 들은 적이 없었던가.

그러나 병이 이미 위독해지자, 종묘사직을 친아우에게 맡겨서 왕규 같은 자에게 그 사이를 엿보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 일은 칭찬할 만하다." 하였다.

 

 

○ 고려사절요 제2권  광종 대성대왕(光宗大成大王)


 

을해 26년(975), 송 개보 8년ㆍ요 보녕 7년

 

◇ 여름 5월에 왕이 병환이 나서 갑오일에 정침(正寢)에서 훙(薨- 죽음)하였다.

 

대성(大成)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묘호(廟號)는 광종(光宗)이라 하며,

헌릉(憲陵- 경기 개풍군開풍郡 영남면嶺南面 심천리深川里에 있음)에 장사지냈다.

태자가 즉위하여 크게 사면령을 내려서 귀양간 사람을 돌아오게 하고 옥에 갇힌 사람을 놓아 보내며,

죄적(罪籍- 죄상을 기록한 명부)을 씻어 주고 벼슬길이 막혀 있던 사람을 탁용(擢用- 뽑아서 씀)하며,

관작을 회복시켜 주고 흠채(欠債- 빚. 부채)를 면제해 주며,

조(租- 조세)ㆍ조(調- 토지土地)를 대상(對象)으로 하는 전세田稅)를 감면해 주고

임시 감옥을 헐어 버리며 참서(讒書- 미래의 일에 대한 주술적 예언을 기록한 책)를 불살라 버리니,

서울과 지방에서 크게 기뻐하였다.

 

 

(이 일을 두고) 이제현이 찬(贊)하기를,

 

“광종(光宗)이 쌍기(雙冀- 과거제도를 도입한 사람)를 임용한 것은 현인을 탁용함에 한계를 두지 않은 것이라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쌍기가 과연 어질었다면 어찌 임금에게 선한 도리에 대해 말씀을 드려 왕이 참소를 믿고

 형벌을 지나치게 행하지 않도록 할 수 없었던가.

그러나 과거를 설치하여 선비를 뽑은 일은, 광종이 본래 문(文)을 가지고 풍속을 변화시키려 했던 뜻을 보고서

쌍기 역시 그 뜻을 받들어 따라서 그 아름다움을 이루었으니, 도움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부화(浮華- 실속은 없이 겉만 화려함.)한 글을

먼저 창도(唱導- 어떤 사상이나 주장을 앞장서서 부르짖어 사람들을 인도함.)하였으므로

후세에 와서 그 폐단을 감내할 수 없게 되었다." 하였다.

 

 

○ 고려사절요 제2권 경종 헌화대왕(景宗獻和大王)


 

신사 6년(981), 송 태평흥국 6년ㆍ요 건형 3년

 

◇ 가을 7월에 왕의 병환이 오래도록 낫지 않자, 갑진일에 *당제(堂弟) *개녕군(開寧君) 치(治)를 불러 *선위하였다.

 

*유조(遺詔)의 대략에,

“과인이 *사조(四朝)가 남긴 사업을 계승하고 삼한(三韓)의 왕업을 받아,

산천과 토지를 보전하고 종묘와 사직을 편안히 하고자 날로 더욱 조심한 지가 모두 7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수고로 인하여 마침내 병을 얻으니, 중한 책임을 벗어놓아 정신을 화평히 하길 바라고

장차 훌륭한 이에게 왕위를 전하여 근심을 풀려 하노라.

정윤(正胤 태자太子) 개녕군 치는 국가의 어진 종친이요,

내가 우애롭게 여기는 사람이니 반드시 능히 조종의 대업을 받들고 국가의 창성한 터전을 보전할 것이다.

아아, 너희 공경ㆍ재신들은 나의 개제(介弟 큰동생)를 보호하여 길이 우리나라를 편안하게 하라.


과인이 매양《예경(禮經)》을 볼 때마다,

'남자는 부인의 손에서 운명(殞命)하지 않는다.' 한 구절에 이르면 일찍이 글을 대하여 감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오늘에 이르러 좌우의 궁녀들을 이미 물러나게 하였으니 설혹 생명이 연장되지 못하고 갑자기 죽은들

다시 무엇을 한탄하리오.

상기(喪期)의 경중은 한(漢) 나라 제도를 따라서 달을 날로 바꾸어 13일을 소상(小祥)으로 하고

27일을 대상(大祥)으로 하고, *원릉(園陵)의 제도는 검약하게 하여야 한다.

서경ㆍ안남(安南)ㆍ등주(登州) 등 여러 도가 진수(鎭守)의 임무를 맡고 있는데,

군대의 권한을 가진 자는 맡은 임무가 가볍지 않으니 어찌 잠시라도 *임소(任所)를 비워 둘 수 있으랴.

 

임지를 떠나 대궐로 오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각기 임소에서 곡하고 3일 만에 상복을 벗도록 하며,

그 나머지 일은 모두 *사군(嗣君)의 처분에 맡긴다." 하였다.

병오일에 *정침에서 *훙하였다.

 

헌화(獻和)란 시호를 올리고, 묘호는 경종(景宗)이라 하며,

영릉(榮陵 경기 개풍군(開?郡) 진봉면(進鳳面) 미동리(米洞里)에 있음)에 장사지내었다.

 


(이 일을 두고) 이제현이 찬(撰)하기를,

“등문공(?文公)이 정전제(井田制)를 맹자(孟子)에게 묻자, 맹자가 말하기를,

 

 '*인정(仁政)은 반드시 경계(經界)로부터 시작되니, 경계가 바르지 않으면 *정지(井地)가 고르지 못하고 *곡록(穀祿)이

공평하지 못하게 된다.

 

이 때문에 포악한 군주와 부정한 관리는 반드시 그 경계를 소홀히 하나니,

경계가 바르게 되면 토지를 분배하고 녹봉을 제정하는 일은 가만히 앉아서도 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삼한의 땅은 사방에서 배와 수레가 모여드는 곳이 아니므로, 산물이 풍부하다던가 재화가 불어나는 이익이 없다.

 

그러므로 백성의 생계는 토지의 생산력을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압록강이남 지방은 모두 산이므로 해마다 농작물을 심을 만큼 비옥한 땅이 거의 없다.

그러니 경계를 바로잡는 데에 만약 소홀히 한다면 그 손해는 중국에 비하여 훨씬 더할 것이다.

 
태조는 신라가 혼란스럽고 태봉(泰封)이 사치스럽고 포학하던 뒤를 이어, 모든 일이 시작되던 시기였으므로

날마다 바쁘고 여가가 없어 구분법(口分法)만 만들었고, 4대를 지나 경종(景宗)이 전시과(田柴科)를 마련하니,

비록 데면데면한 데는 있으나 역시 옛날에 대대로 관록을 주던 뜻이었으며, 9분의 1을 조(助)로 하거나,

10분의 1을 부(賦)로 하는 것, 군자와 소인을 넉넉히 살게 하는 점에 관해서는 논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므로 훗날에 여러 번 이를 정리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구차스럽게 되고 말았으니,

대개 그 시초에 경계를 시급한 일로 삼지 않아 그 근원을 어지럽혀 놓고는 그 하류가 맑기를 구하니 어찌 될 수 있으랴.

애석하다.

 

그 당시의 신하들이 맹자의 말씀으로 법제를 강구해서 임금을 인도하여 힘써 행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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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金鷄)- 신라

*당제(堂弟)- 집안 동생

*개녕군(開寧君) 치(治)- 고려 제6대왕 성종

*선위(禪位)- 왕의 자리를 물려 줌

*유조(遺詔)- 임금의 유언.

*사조(四朝)- 첫째 왕부터 4대째의 왕까지. 고려 5대 경종 앞까지의 4왕.

*원릉(園陵)- 능원. 임금의 능

*임소(任所)- 관원이 근무하는 곳.

*사군(嗣君)- 사왕(嗣王). 선왕(先王)의 대를 물려받은 임금. 임금자리를 이은 임금

*정침(正寢)- 주로 일을 보는 곳으로 쓰는 몸채의 방.

*훙(薨)- 황족(皇族)이나 삼품(三品) 이상인 사람의 죽음에 대한 높임말

*인정(仁政)- 어진 정치

*정지(井地)- 반듯하게 정지된 땅

*곡록(穀祿)- 곡식과 녹(봉급)

 

○ 고려사절요 제2권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정유 16년(997), 송 지도 3년ㆍ거란 통화 15년

 

◇ 겨울 10월 무오일에 왕이 병환이 매우 위독해져서 조카 개령군(開寧君) 송(誦)을 불러 왕위를 전하고

내천왕사(內天王寺)에 옮겨 거처하였다.

평장사 왕융(王融)이 사면령을 반포하도록 청하니, 왕이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어찌 죄 있는 자를 놓아주어 부정하게 목숨을 연장하려 하기까지 하겠느냐.

더구나 나를 계승할 사람은 무엇을 가지고 새 은전을 펼 수 있으랴." 하고, 허가하지 않고 훙하였다.

 

이날에 송이 즉위하였다.

문의(文懿)란 시호를 올리고, 묘호는 성종(成宗)이라 하고,

강릉(康陵- 경기) 개풍군(開?郡) 청교면(靑郊面) 배야리(排也里) 강릉동(康陵洞))에 장사지내었다.

 

 

(이 일을 두고) 이제현이 찬하기를,

 

“성종은 종묘를 세우고 사직을 정하였으며, 태학에 재물을 넉넉하게 하여 선비를 기르고

복시를 시행하여 어진 이를 구하였으며, 수령을 독려하여 백성을 구휼하고,

효도와 절의를 권장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였으며, 수찰(手札)을 내릴 적마다 글의 뜻이 진정으로 측은히 여기어

속세의 풍습을 고치는 것을 임무로 여겼다.

거란이 병탄할 생각을 가지고 장수를 보내 침략해 오자 일찍이 서도(西都)로 친히 나아가 안북(安北)에 진군하니,

곧 *구준(寇準)이 행했던 전연(?淵)의 계책이었다.

*관방(關防)을 절령(절嶺- 자비령慈悲嶺)으로 옮기고 쌓인 곡식을 대동강에 버리고자 했던 일은

그 당시 용렬한 신하의 의논이었을 뿐, 반드시 성종의 본뜻이 아니었을 것이다.

일찍이 만약 *최승로(崔承老)의 상서(上書)를 보았을 때에, 기뻐하고 유의하여 *부과(浮誇)를 버리고 *독실(篤實)을 힘쓰며,

옛것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정치를 구하여 이를 게으름 없이 행하되,

빨리 이루고자 하는 마음은 경계하며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깨달아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도록 하였더라면,

제(齊) 나라를 변하게 하여 노(魯) 나라에 이르게 하고 노 나라를 변하게 하여

도에 이르게 함(《논어》에 있는 말)을 바랄 수 있었을 것이다.

*소손녕(蕭遜寧)이 어찌 능히 성종이 백성의 일을 돌보지 않는다고 *무망(誣罔)하여 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킬 수 있었겠으며,

*이지백(李知白)이 어찌 감히 본토의 풍속을 개혁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적을 물리칠 계책이라고 하였으리오.

그러나 아직 늙기 전에 후계자를 세운 일은 국가를 위한 생각이 깊은 것이요,

죽음에 다달아 사면령 내리기를 아꼈던 일은 생사(生死)의 이치에 밝게 통달하였던 것이니,

이른바 '뜻이 있어 함께 훌륭한 일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아아, 어지셨도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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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준(寇準)이 행했던 전연(?淵)의 계책이었다-

북송(北宋) 진종(眞宗) 때의 재상인 구준(寇準)은 정의롭고 강직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이름난 정치가이자 시인이면서 재상자리에까지 올랐다.


진종(眞宗;968~1022) 때, 거란이 대거 침입해 왔다.

전연(전淵)에서 맹약을 맺고 은(銀) ·비단 등의 세폐(歲幣; 맹약에 따라 兄인 宋은 弟인 契丹에 매년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보냄)를 주어 화목하였으므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관방(關防)- 변방의 방비를 위하여 설치한 요새.

*최승로(崔承老)- 고려 성종 때 문신. 경주 출신으로 신라가 항복할 때 아버지와 함께 경순왕을 따라

고려에 귀순하여 일찍부터 고려에서 벼슬을 한 학자 출신의 중앙 관료였습니다.
시무 28조의 시무책은 광종 사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새로운 정치 질서 수립의 필요성을 느낀 성종 때에 건의하는데

지금 22개조만 남아 있고 6개조는 전하지 않는다.

*부과(浮誇)- 부화하고 과장함

*독실(篤實)- 인정 있고 성실하다. 독지(篤志), 돈실(敦實), 돈후(敦厚), 성실(誠實)

*소손녕(蕭遜寧)- 거란의 장수. 993년(성종12년)에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북서쪽 국경을 침입해오자

임금은 서희를 보내어 강화 하니, 소손녕의 병사는 퇴각하였다.
*무망(誣罔)- 남을 속여 넘김. ≒기망(欺罔)·기만(欺瞞)

*이지백(李知白)- 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문신.

983년(성종 2) 좌승(佐丞)으로서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임명되었다.

뒤에 관직이 민관어사(民官御事)에 이르렀다.

993년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많은 관료들이 서경(西京)이북의 땅을 내어주고 황주(黃州)자비령을 경계로 삼자는 의견을 내세웠으나

이때 서희와 같이 항복을 반대하며 국토를 가볍게 적국에게 넘겨주는 것을 의연히 반대하였다.
995년 거란에 사신으로 가서 방물(方物)을 바쳤다.
1027년(현종 18)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1033년(덕종 2) 대광(大匡)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