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익재공(益齋公) 평찬(評撰)-B
○ 고려사절요 제2권 목종 선양대왕(穆宗宣讓大王)
기유 12년(1009년), 송 대중상부 2년ㆍ거란 통화 27년
◇.............2월 무자일에 강조가 먼저 장계(狀啓)로 아뢰기를,
“성상께서 병환이 위독하신데 세자를 정하지 못하였으니, 간악한 무리들이 왕위를 엿보고 있습니다.
또 행간 등의 참소와 아첨만 치우치게 믿어 상이나 벌을 주는 일이 밝지 못하여 이러한 위란을 초래하였으니,
이제 명분을 정하여 인심을 붙잡아 매고 간악한 무리를 제거하여 여러 사람의 울분을 통쾌하게 씻으려고 합니다.
이미 대량군을 맞이하여 대궐로 나아가는데 성상께서 놀라실까 두려우니, 용흥사(龍興寺)나 귀법사(歸法寺)에 나가 계십시오.
곧 간사한 무리들을 소탕하고 난 뒤에 맞아들이겠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아뢴 바는 이미 알았다." 하였다.
이날에 황보유의(皇甫兪義)와 김응인이 함께 신혈사(神穴寺)에 이르니,
절의 중은 간사한 무리들이 보낸 사람인가 의심하여 대량군을 숨기고 내놓지 않았다.
유의 등이, 대량군을 맞이하여 임금으로 세울 것이라는 뜻을 자세히 말하니 그제야 대량원군이 나왔다.
유의 등이 드디어 대량군을 모시고 돌아왔다.
기축일에 햇빛이 붉은 장막을 펼쳐 놓은 듯하였다.
현운(鉉雲)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추문(迎秋門)에 들어와서 크게 떠드니,
왕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행간을 잡아 강조에게로 보내고,
탁사정(卓思政)과 하공진(河拱辰)은 모두 강조에게로 달아났다.
강조가 대초문(大初門)에 이르러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최항이 성(省 중추원)에서 나오자 강조가 일어나서 읍하였다.
최항이 말하기를,
“옛날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느냐." 하니, 강조가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군사들이 함부로 들어가자, 왕이 화를 면하지 못할 줄 알고 태후와 함께 하늘을 우러러보고 목놓아 울었다.
궁인ㆍ내시와 충순ㆍ충정 등을 거느리고 나가서 법왕사(法王寺 개성(開城)에 있음)에 거처하였다.
강조가 건덕전(乾德殿)의 어탑(御榻) 아래에 앉으니 군사들이 만세를 불렀다.
강조가 놀라 일어났다가 꿇어앉으며 말하기를,
“사군(嗣君)이 아직 이르지 않았는데 이것이 무슨 소리냐." 하였다.
조금 후에 유의 등이 대량군을 모시고 이르러, 드디어 연총전(延寵殿)에서 즉위하였다.
강조가 왕을 폐하여 양국공(讓國公)으로 삼고, 합문 통사 사인(閤門通事舍人) 부암(傅巖) 등을 시켜 왕을 지키게 하였다.
군사를 보내어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 등 7명을 죽이고, 그 무리와 태후의 친속 30여 명을 바다 가운데의 섬으로 귀양보내었다.
왕이 최항을 시켜 강조에게 말을 달라고 청하자, 한 필을 보내었고 또 민가에서 말 한 필을 가져와,
왕과 태후가 이것을 타고 선인문(宣仁門)으로 나와서 귀법사(歸法寺)에 이르러 어의를 벗어 음식과 바꾸어 먹었다.
강조가 최항 등을 불러 돌아오게 하니, 왕이 최항에게 이르기를,
“지난번 부고(府庫)에 화재가 나고, 뜻밖의 변고가 일어난 것은 모두 나에게 덕이 없는 탓이다.
다시 누구를 원망하리오. 고향에 돌아가 늙기만을 원하니,
경이 새 임금에게 이 사실을 아뢰고 또 새 임금을 잘 보좌해야 한다." 하였다.
드디어 충주(忠州)를 향하여 가는데, 태후가 음식을 먹으려고 하면 왕이 친히 반(盤)과 그릇을 받들었으며,
태후가 말을 타려고 하면 왕이 친히 고삐를 잡았다.
적성현(積城縣 경기 연천군(漣川郡))에 이르자 강조가 상약직장(尙藥直長) 김광보(金光甫)를 보내어 독약을 올렸다.
왕이 독약을 마시려 하지 않자, 광보가, 따라간 중금(中禁) 안패(安覇) 등에게 이르기를,
“강조가, '만약 독약을 올리지 못하거든 중금 군사를 시켜 큰 일(임금을 죽이는 일)을 행하고 자살로 보고하라.' 하였으니,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나와 너희들은 모두 남김없이 일족을 멸망당할 것이다." 하였다.
밤에 안패 등이 왕을 시해하고는 왕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고 아뢰고,
문짝을 가져다가 관(棺)을 만들어 임시로 관(館)에 매장하였다.
태후는 황주(黃州)로 돌아갔다.
한 달이 지나 현의 남쪽에 왕을 화장하고 능은 공릉(恭陵)이라 하였으며,
시호는 선령(宣靈)이라 하고 묘호(廟號)는 민종(愍宗)이라 하였다.
신민들은 원통하고 분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나 새 임금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거란이 군사를 일으켜 죄를 캐내어 물을 때에 와서야 시해되었음을 알고 시호를 선양(宣讓)으로 고치고
묘호를 목종(穆宗)으로 고쳤다.
(이 일을 두고) 이제현이 찬하기를,
“경보(慶父)가 노(魯) 나라에서 예를 범하고 여불위(呂不韋)가 진(秦) 나라에서 화(禍)를 전가(轉嫁)하였으니,
제환공(齊桓公)이 강씨를 죽이고 진시황(秦始皇)이 노애(??)를 찢어 죽였으나,
어찌 만세토록 전하는 수치를 씻을 수 있으랴.
목종이 옛일의 전철을 경계하여 처음에 방지하지 못하고,
결국 아들과 어머니가 함께 그 앙화를 당하고 사직은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아, 선양(宣讓. 목종穆宗)의 불행인가. 아니면 불행이 아닌가." 하였다.
○ 고려사절요 제3권 현종 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신미 22년(1031), 송 천성 9년ㆍ거란 흥종(興宗) 경복(景福) 원년
◇ 신미일에 왕의 병환이 위독하자 태자 흠(欽)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고 조금 후에 중광전(重光殿)에서 훙하였다.
시호를 원문(元文)이라 올리고 묘호를 현종(顯宗)이라 하였다.
태자가 즉위하여 익실(翼室)에 거처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슬피 울었다.
(이 일을 두고) 이제현이 말하기를,
“최중의 말은 세상에서 이른바 천명(天命)이다.
구천(句踐)은 쓸개를 씹어 회계산(會稽山)의 치욕을 씻었고,
소백(小白)은 거(?)의 고난(苦難)을 잊었기 때문에 화환(禍患)을 제(齊) 나라에 남기었다.
왕이 천명만 믿고 욕심을 방종히 부려 법도를 파괴하면 비록 나라를 얻었을지라도 반드시 잃고 마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군자는 세상이 다스려질 때에 어지러워질까 생각하고 편안할 때에 위태로워질까 생각하여,
끝을 신중히 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여 천명에 보답하니,
현종과 같은 이는 공자가 이른바 '나는 그에게 불만이 없다.'는 것이다." 하였다.
○ 고려사절요 제4권 정종 용혜대왕(靖宗容惠大王)
병술 12년(1046), 송 경력 6년ㆍ거란 중희 15년
◇ 정유일에 왕의 병환이 더욱 심해지자, 아우 낙랑군(樂浪君) 휘(徽)를 침소로 불러들여서 조하기를,
“국사를 대리로 도맡아 보라." 하고 그 날 훙하니, 낙랑군이 영구 앞에서 즉위하고 시호를 올려 용혜(容惠)라 하고,
묘호를 정종(靖宗)이라 하며, 주릉(周陵)에 장사지냈다.
유사들이 유명을 받들어 산릉의 제도를 한 문제(漢文帝)의 고사에 따라 모두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였다.
(이 일을 두고) 이제현이 찬하기를,
“거란은 욕심이 많고 사나워서 족히 믿을 것이 못 되므로 태조께서 깊이 경계를 하셨으나
거란이 한번 재앙 당한 것을 요행으로 생각하고 전날의 우호를 버렸으니, 역시 옳은 계책은 아니었습니다.
현종은 반정하고서 정사에 힘쓰느라 겨를이 없었고,
덕종은 방강한 나이가 채 되기도 전에 싸움을 더욱 경계하여야 하였으므로
왕가도가 화친을 끊자고 한 의견은 황보유의가 우호를 계속하여 백성을 쉬게 하자는 의논만 못하였다.
정종이 왕위를 이은 지 3년 만에 우리 대부 최연하(崔延?)가 거란에 가고,
4년에 거란의 사신 마보업(馬保業)이 와서 이때부터 다시 우호의 맹세를 되다졌으니,
지성으로 감동시킨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만든 데는 반드시 기이한 꾀가 있었을 것이다.
군자가 말하기를,
'선대의 뜻을 잘 받들고 계승하여, 그 나라를 보전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 고려사절요 제5권 문종 인효대왕 (文宗仁孝大王)
계해 37년(1083), 송 원풍 6년ㆍ요 태강 9년
◇ 8월 계미일에 시호를 인효(仁孝)라 올리고 묘호를 문종(文宗)이라 올렸으며, 갑신일에 경릉(景陵)에 장사지냈다.
(이 일을 두고) 이제현이 말하기를,
“현ㆍ덕ㆍ정ㆍ문 네 임금은 아버지의 일을 아들이 잇고,
형이 죽으면 아우가 받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80년 동안이나 성대하였다 할 수 있다.
문종은 절약과 검소를 몸소 행하였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백성을 사랑하여 형벌을 신중히 하였고,
학문을 숭상하고 노인을 공경하였으며, 벼슬은 적임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주지 않았고,
권력은 근시에게 옮겨지지 않아서 비록 가까운 척리(戚里)라도 공이 없으면 상주지 않았고,
총애하는 근신이라도 죄가 있으면 반드시 벌하였다.
심부름하는 환관과 급사(給使)가 십수 명에 불과하였고 내시는 반드시 공과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 충당하였으니,
역시 20여 명을 넘지 않았다.
긴요하지 않은 관직을 생략하여 일이 간편하였고 비용이 절약되어 나라가 부유해지니
국창(國倉)의 곡식이 해마다 쌓여가고 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니 당시에 태평이라 일컬었다.
송 나라 조정이 매양 포상하는 명을 내렸고, 요는 해마다 왕의 생신을 경축하는 예를 표시하였다.
동으로는 왜가 바다를 건너 보배를 바쳤고, 북으로는 맥(貊)이 관문을 두드리고 살아갈 터전을 받았다.
그러므로 임완(林完)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어질고 성스러운 임금이시다.' 하였다.
다만 경기의 한 고을을 옮기고 절을 지었는데 높은 집은 궁궐보다 사치스럽고 높다란 담은 도성과 짝할 만하며,
황금탑을 만들고 온갖 시설을 이에 맞추어서 거의 소량(蕭梁)에 견줄 만하였으니,
남의 아름다움을 도와서 이루어 주고자 하는 이들(군자)이 이 점에 탄식하는 줄을 몰랐도다." 하였다.
○ 병신일에 국원공 운이 선정전에서 즉위하였다.
(이 일을 두고) 이제현이 말하기를,
“3년 동안 복상함은 천자로부터 서인까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재최복(齊衰服)을 입고 죽을 먹으며 슬픈 낯빛을 띠고 애통히 곡하는 것을
사방에서 조상하러 와서 보는 자마다 감복하였다 함은 등문공(?文公) 이후에는 듣지 못하였는데,
순종(順宗)이 문종의 상을 당해서 애통하다가 병이 되어, 넉 달만에 서거하였으니,
성인이 만든 예제로 보아서는 비록 너무 지나침이 있었으나 그 친애하는 정성만은 지극하였다." 하였다.
○ 고려사절요 제6권 선종 사효대왕(宣宗思孝大王)
갑술 11년(1094), 송 소성(紹聖) 원년ㆍ요 대안 10년
◇ 5월 임인일에 왕이 연녕전(延寧殿)에서 훙(薨- 죽음)하여, 원자(元子) 욱(昱)이 유명(遺命)을 받들어서
중광전(重光殿)에서 즉위하고, 시호를 사효(思孝)ㆍ묘호(廟號)를 선종(宣宗)이라 올리고 갑인일에 인릉(仁陵)에 장사지냈다.
이제현(李齊賢)이 찬(贊)하기를,
“시(詩)란 뜻의 표현이다.
마음속에 있을 때에는 뜻이라 하고 말에 나타날 때엔 시(詩)가 된다.
선종(宣宗)이 문덕전(文德殿)에서 지은 이약시(餌藥詩)를 보면 조맹(趙孟)이 햇볕을 멀건히 보며
'이럭저럭 날[日]이나 보내리라.'고 한 말과 같은 점이 있음은 왜 그럴까.
조맹은 열국(列國)의 경상(卿相)인데 그 말이 구차스러웠으므로 군자가 오히려 기롱하였는데 하물며 임금이랴.
선종(宣宗)의 총명함으로써 학문을 좋아하여 성현(聖賢)의 글이 아니면 읽지 않았으며,
구차스러운 뜻이 없었으니 명량(明良)의 화답하는 시가는 바랄 수 없더라도,
대풍가(大風歌)와 같은 강개스러운 시가는 어찌 짓지 못하였던가.
3년이 못 되어서 드디어 세상을 버렸으니 슬프도다." 하였다.
○ 고려사절요 제6권 헌종 공상대왕(獻宗恭?大王)
을해 원년(1095), 송 소성 2년ㆍ요 수륭(壽隆) 원년
◇ 겨울 10월 기사일에 제(制)하기를,
“짐이 선고(先考)의 남기신 업(業)을 받들어서 외람되이 대위(大位)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리며 몸도 또한 병들고 파리하여, 능히 나라의 대권을 총람하여 백성들의 기대에 충족시키지 못하고,
음모와 이의(異議)가 권문(權門)에서 번갈아 일어났고, 역적과 난신이 여러 번 궁중에 범하였는바,
이것은 모두 박덕한 소치라 임금 노릇하기가 어려움을 항상 생각하였노라.
대숙 계림공(鷄林公) 희(熙)는 역수(曆數)가 그의 몸에 있으므로, 귀신과 사람이 그에게 역적을 제거하는 데 손을 빌렸다.
아, 너희 여러 사람들은 이분을 받들어서 대위(大位)를 잇게 하라.
짐은 마땅히 후궁으로 물러나서 잔명(殘命)을 보전하리라." 하고,
이에 근신 김덕균(金德鈞) 등에게 명하여 종저(宗邸)에 가서 계림공을 맞이하게 하니,
공이 굳이 사양하다가 두 번 세 번 만에 궁중에 들어와서 경오일에 중광전(重光殿)에서 즉위하였다.
(이 일을 두고) 이제현이 말하기를,
“우(禹) 임금이 아들에게 왕위를 전함은 후세를 염려해서이다.
유복자(遺腹子)를 세우고 선왕의 입던 위복[委복]을 걸어 놓고
조회를 받아도 천하가 요동하지 아니함은 분(分)이 본래 정해진 까닭이다.
현종(顯宗)의 세 아들이 형제 간에 왕위를 서로 전하여서 순종(順宗)에게 이르렀던 것이나,
순종은 상중에 있으면서 지나치게 애통하다가 후사도 없이 요절하여 왕위는 선종(宣宗)에게 전하여졌고,
선종이 훙(薨)하여서는 태자(太子)가 이었으니 이분이 헌종(獻宗)이다.
국인(國人)이 현종의 아들이 형제간에 서로 전한 것을 보고 듣는데 익숙하였으므로,
선종이 다섯 아우가 있었는데도 어린 아들을 세웠다 하여,
그것을 그르게 여기니 생각하지 못함이 어찌 그렇게 심한가.
오직 주공(周公) 같은 친족이나 박륙후(博陸侯) 같은 신하를 얻어서 위임하여 돕게 하지 못하였으니,
그 위태롭고 어지러움이 곧 오게 되었던 것이다.
후세에도 불행히 강보 속에 있는 어린 아들에게 벅차고 어려운 왕업을 전하게 되는
이는 이것으로 경계를 삼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 고려사절요 제7권 숙종 명효대왕 2(肅宗明孝大王二)
을유 10년(1105), 송 숭녕 4년ㆍ요 건통 5년
◇ 병진일에 왕이 편찮았다.
정사일에 서경을 떠났다.
겨울 10월 을축일에 병이 매우 심했는데 금교역(金郊驛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에 이르렀다.
병인일 밤에 금교를 떠나 장평문(長平門) 밖에 이르러 수레 안에서 훙(薨-죽음)하여,
밝을 녘에 서화문(西華門)에 이르러 발상(發喪)하였다.
태자와 여러 신하들이 곡용(哭踊-죽음을 슬퍼하여 우는 것)하고
연영전(延英殿)에 봉입(奉入- 받들어 모시다. 시신을 안치함)하였다.
선덕전(宣德殿)으로 빈궁(殯宮)을 옮겼다.
이날 태자 우(?)는 유조를 받들어 중광전에서 즉위하고, 시호를 명효(明孝), 묘호를 숙종(肅宗)이라 하였다.
갑신일에 영릉(英陵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津西面) 판문리(板門里))에 장사지냈다.
(이 일을 두고) 이제현(李齊賢)이 말하기를,
“한(漢) 고조(高祖)의 사람을 알아보는 밝은 지혜로도,
매양 혜제(惠帝)는 유약하고 조왕(趙王) 여의(如意)가 나를 닮았다 하여 여러 번 태자를 바꾸려 하면서
대왕(代王- 문제文帝)이 마침내 태평천자가 될 줄은 모르고 그를 변방에 봉했다.
그러나 대왕(代王)이 여(呂)씨의 화를 모면한 것은 고조의 총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唐) 태종의 현명함으로도 후계자를 옳게 정하지 못하고 마침내 혼암한 자[高宗]를 세웠다가
흉한 암탉으로 하여금 그 자손을 쪼아 거의 다하게 한 것은 더욱 탄식할 만한 일이었다.
양한(兩漢) 4백 년에 천자 노릇한 자는 모두 효제ㆍ문제(文帝)의 후예요,
당 3백 년에 중종(中宗)ㆍ예종(睿宗)으로부터 소종(昭宗)ㆍ애종(哀宗)에 이르기까지 역시 대제(大帝)의 후손이었으니,
이로써 본다면 하늘의 뜻이지 사람이 한 일은 아니었다.
우리 문종께서는 아들이 열아홉이면서도, 어린 숙종을 문종이 그가 나라를 중흥시킬 것이라고 기대하더니,
숙종이 번후(藩侯 지방에 봉한 황자(皇子))로서 대통(大統)을 이어 지혜로 난을 평정하고,
인덕(仁德)은 태평을 이룩하였으며, 아들과 손자가 현명하고 닮아서 대대로 이어받아
지금까지 4백 년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옛 책에 이르기를
'아들을 알아보는 것은 아버지만한 이가 없다.' 하였는데, 그것은 문종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 고려사절요 제16권 고종 안효대왕 3(高宗安孝大王三)
갑오 21년(1234), 송 단평(端平) 원년ㆍ금 천흥 3년ㆍ몽고 태종 6년
시중 김취려가 졸하였다.
취려는 계림 언양군(彦陽郡) 사람으로, 절약하고 검소하며 정직하였다.
일찍이 조충(趙沖)과 더불어 거란 군사를 막아 싸울 때, 군중의 일은 모두 조충에게 사양하고,
싸움에 임하여 적을 제어함에 이르러서는 기이한 계교를 많이 내어 큰공을 이루었다.
정승이 되어서는 안색을 바르게 하여 아랫사람을 거느리니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진정으로 충성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시호를 위열(威烈)이라 하였다.
(이 일을 두고) 이제현(李齊賢)이 논하여 말하기를,
“국가의 덕이 아직 쇠하지 않았을 때에 화란의 싹이 혹 일어나면,
반드시 걸출하고 재지가 있는 신하가 임금의 위임을 받아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하게 되니,
사직의 신령이 가만히 도와 주는 것이다.
우리 태조가 나라를 세운 뒤로 고종(高宗)에 이르기까지 3백여 년이 흘렀다.
그런데, 최씨 부자가 대를 이어 정권을 잡아, 안으로는 견고한 병갑에 의지해 권력을 휘두르니, 지혜 깊은 자가 쓰일 수 없다.
또 밖으로는 나약한 군사에게 공격과 전투의 책임을 맡겨 놓고 공을 많이 세운 자는 의심하니,
이런 때에는 공을 세우려 힘쓰는 것도 역시 어려운 일이다.
금나라가 운이 다되자 요나라의 흉악한 자들이 난을 일으키어 우리나라 강토를 엿보고 소굴을 삼으려고 꾀하였는데
멀리까지 와서 싸우는 궁한 도적이라 그 칼날을 당할 수 없었다.
원나라 태조가 일어나자 만리에 장수를 보내어 국경을 압박하고 군사를 징발하여 적을 토벌하자고 타일렀다.
그러나 그에 응하려 하자니 그들의 뜻대로 맡겨 둘 수 없었고, 그에 거스르자니 반드시 다른 변고가 생길 염려가 있었다.
국가의 안위가 판가름나는 급박한 상황에서 좌우로 보좌하여 멀리 있는 나라와 연합하고 가까운 나라를 공략하였다.
그렇게 하여, 몽고가 일어나는 초기에 종맹(宗盟)을 정하고, 숨돌릴 사이에 국가를 안정하게 하였으니,
어찌 걸출하고 재지가 있는 신하이면서 사직의 신령이 가만히 도운 것이 아닌가.
그가 좋은 음식을 마다한 채 부하들의 거친 밥을 나누어 먹으니 그들이 나라를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하였고
명령하면 반드시 그대로 행하여져서 추호도 범하지 않은 것을 보면 옛날 명장의 기풍이 있다 하겠다.
개평(開平)의 전쟁에는 그가 두 번이나 중군(中軍)을 구하였는데, 사현(沙峴)의 전쟁에서는 노공(盧公)이 도와주지를 않았다.
그러나 끝내 한 마디 불평이 없었기 때문에 혐극(嫌隙)이 생기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고 다른 여러 사람에게 공을 돌렸으니 이는 대인 군자의 마음씀씀이다.
먼저 합진(哈眞)에게 나아갔던 것은 진실로 동맹한 우방의 마음을 굳히게 하였고,
만노(萬奴)에게 절하지 않는 것은 존왕의 의리를 분명히 한 것이다.
다지(多智)와 한순(韓恂)의 목을 베고서는 군사를 거두어 전투를 끝내어 변방 백성을 편안히 하였으니
원모(遠謨)와 대절(大節)이 더욱 견줄데 없다.
사관(史官)이 그 충의를 칭도하고 태상(太常 시호를 논의하는 관청)에서 위열(威烈)이라고 시호를 내리니,
역시 의당하지 않느냐." 하였다.
○ 고려사절요 제17권 고종 안효대왕 4(高宗安孝大王四)
기미 46년(1259), 송 개경(開慶) 원년ㆍ몽고 헌종 9년
임인일에 왕이 유경의 집에서 훙하였다.
대장군 김인준이 안경공을 받들어 왕위를 이으려 하니, 양부(兩府)가 의논하기를,
“맏아들이 계통을 잇는 것은 고금에 통용되는 법이다.
하물며 태자가 왕을 대신하여 조회하러 들어갔는데 아우를 왕으로 삼는 것이 옳으냐?" 하였다.
드디어 유조(遺詔)를 반포하였는데, 그 내용에 덕은 부족하고 짐은 무거운데 병이 오래도록 낫지 않는다.
오직 왕위는 오래 비울 수가 없는데, 마침 나의 맏아들은 그 덕이 족히 상제(上帝)에게 들릴 만하므로 이에 왕위를 명하노니,
무릇 너희들 관사(官司)는 각각 직무에 충실하여 사왕(嗣王)의 명령을 듣도록 하라.
사왕이 환국하지 못하는 동안은 군국(軍國)의 서무(庶務)를 태손(太孫)에게 듣도록 하라." 하였다.
인준이 군복을 입고 갑옷 입은 군사와 동궁의 관속들을 거느리고 태손 심(諶)을 모시고
대궐에 들어가서 임시로 나라 일을 보았다.
별장 박천식을 보내어 몽고에 부고를 전하였다.
(이 일을 두고) 이제현(李齊賢)이 말하기를,
“왕이 예전에 유승단(兪升旦)에게 수학(受學)하여 나라를 이은 지 거의 50년이나 되었다.
대개 학문으로 덕을 쌓고,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것으로 왕위를 보전하였으니,
백성이 기뻐하고 하늘이 도운 것이다." 하였다.
○ 고려사절요 제19권 충렬왕 1(忠烈王一)
정축 3년(1277), 송 경염 2년ㆍ 원 지원 14년
봄 정월에 중찬 김방경에게 명을 내려, 장모의 복(服)을 공제(公除)하게 하였다.
재상(宰相)으로 복(服)을 제(除)하는 예(禮)는 일찍이 없었던 것인데,
이때 군국(軍國)의 사무가 번다하여 처음으로 이런 명을 내렸다.
사신 이제현(李齊賢)이 말하기를,
“삼년상과 오복(五服)의 제도는 선왕이 무궁한 애통의 뜻을 절제하여,
어진 이로 하여금 감히 그 기한을 지나치지 못하게 하고 불초한 자도 기한을 정한대로 좇게 한 것이다.
국가에서 기한을 정하여 휴가를 주는 것도 예법에 어긋남이 이미 심한데,
더구나 권도(權道)로 편의를 따라 길복을 입게 하고 후에 그 복제를 행한다는 것인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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