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재공의 소악부(小樂府) - 펌 자료
악부(樂府)는 원래 한 대(漢代)에 음악을 맡은 관부(官府)의 명칭으로 전(轉- 변화되어. 바뀌어서)해서 악장(樂章)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그런데 왜 <악부>가 아닌 <소악부>라 해서 한 격을 낮추어 놓았을까?
<소악부>의 창시자인 이제현은 아무런 설명도 남기지 않았다.
우리는 이에 대해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중국 재래의 악부와 구별하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제현은 우리나라 문인 중에 *사곡(詞曲)에 능통(能通)한 유일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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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곡(詞曲)- 악가(樂歌- 악곡樂曲 또는 악장樂章에 따라 부르는 노래)와 속요(俗謠- 민간에서 널리 떠도는 속된 노래)를 아울러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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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詞- 중국 운문의 한 형식)를 자유로이 창작(創作)할 수 있을 만큼 중국의 악조(樂調)에 조예가 깊었었다는 그가 중국 재래의 악부를 의식하면서 그것과는 완전히 출발부터 달리한 이 작품들을 <소악부>라고 명명했음이 그럴 성도 싶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려 재래의 아악(雅樂), 당악(唐樂), 기타 궁정악 등과 구별하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제현은 궁정악인 아악, 당악계 사곡과는 순연히 별도로 민간의 풍요(風謠), 즉 속요(俗謠)를 시로 옮긴 것이다.
궁정악이 아닌 민간의 노래 - 속요를 시로 옮긴 것이므로 <소악부>라고 명명했음직 하기도 하다.
어쨌든 이제현은 종전에 없었던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우리 나라 한문학 사상에 <소악부>라는 새 명칭의 작품을 생산함으로써 획기적(劃期的) 업적(業績)을 이룩한 것이다.
<소악부>는 모두 11장인데, 편의상 전(前) 9장, 후(後) 2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처음 이제현이 전 9장을 발표했을 때 당시 사대부(士大夫) 사이에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지우(知友)들 중에 곧 그것을 본떠서 화답(和答)하려는 의사를 표시하는 이도 있었다.
급암(及庵) 민사평(閔思平)과 같은 이가 그 예이다.
이제현은 그것을 전해 듣고 곧 후(後) 2장을 지어 민사평에게 화답을 재촉하기도 했다고 한다.
● 만권당 시회(詩會)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기울어져 가는 고려왕조(高麗王朝)를 글과 끈질긴 위국(爲國)의 정열과 그리고 군주를 향한 일편단심으로 지켰던 문장가요, 성리학자요, 유능한 외교관이며 대정치가 이기도 했다.
그 선대(先代)가 모두 문장세가(文章世家- 여러 대를 문장가로 이어오는 집)이다.
충렬왕(忠烈王) 13년에 *경주에서 정승인 진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 다섯의 어린 나이로 등과(登科)했으니 그가 얼마나 영특한 천재인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 등과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경전(經典- 성현의 말이나 행실을 적은 책) 연구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당시로서는 신학문(新學問)인 성리학(性理學)을 공부했다.
22세에 비로소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발탁되어 문명(文名- 글을 잘하여 세상에 알려진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고, 동료들도 그의 문덕(文德- 문인文人이 갖춘 위엄과 덕망)을 숭상하게 되었다.
28세에 충선왕의 무름을 받아 원나라의 서울인 연경(燕京)으로 가게 되었다.
원나라의 내란을 평정하는데 많은 공을 세운 충선왕(忠宣王)은 원나라에 머물러 있으며 고려의 왕위는 아들 충숙(忠肅)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연경의 만권당(萬卷堂)에서 학문과 예술을 전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만권당에는 천하의 선비가 모두 모였을 뿐만 아니라 요수(姚수), 조맹부(趙孟부) 등 당대의 일류 문사들도 있어서, 충선왕은 자기 밑에는 이런 문사들과 시문을 겨룰 만한 사람이 없음을 걱정하여 결국 이제현을 연경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어느 날 왕이 만권당에서 대륙의 쟁쟁한 시인 문사들과 시회(詩會)를 열었다.
이 때 충선왕의 시에 “닭소리는 흡사 문전의 버들 같고나”라는 시귀가 있었다.
만좌(滿座- 여러 사람이 가득하게 늘어앉은 자리)한 시인들이 그 출처를 물었다.
왕은 창졸간에 대답이 잘 나오지 않아 당황한 빛을 보였다.
이 때 왕을 모시고 있던 익재가,
“우리 동인(東人- 우리나라 사람) 시(詩)에 '옥두초일일금계창(屋頭初逸日金鷄唱), 이사수양요요장(怡似垂楊요요長)' 이라는 시귀가 있는데, 이는 닭울음소리의 가늘고 긴 것을 버들가지에 비유한 것입니다.
또 한퇴지(韓退之- 한유)의 <거문고>란 싯귀에도 “뜬구름 버들가지처럼 뿌리도 꼭지도 없네(浮雲柳絮無根蒂부운유서무근체)라는 말이 있으니 옛사람도 이는 곧 소리를 버들가지로 나타낸 것이 아니겠소” 하고 말하였다.
뭇사람들을 감탄케 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하여 지고 있다.
2년 후에 왕명을 받들어 중국 서부지역을 여행했고, 33세 때에 왕을 모시고 강남(江南)을 주유(周遊- 두루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며 놂)했고, 35세에 충선왕이 원 조정의 참소를 입어 토번(티베트 지방)으로 유배되었는데, 이때에 익재는 친히 왕을 뵙기 위해 1만 5천 리의 장거리 여행도 감행했다.
이와 같이 대륙의 오지(奧地- 두메 산골)를 누비면서 고생도 했고, 또 시도 짓고 기행문도 남기고 하여, 이 여행으로 인하여 그의 문학은 더 풍성한 결실을 가져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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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정승인 진의 아들로 태어났다. - 익재공의 출생지를 경주로 말한 글이다.
작성자 moodae5432 께서 쓴 글인데 출생지가 경주라는 근거 자료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대종보의 '우정승 문충 익재 선생전'과 '익재 문충공 묘지명'과 판윤공파보에 게재된 '문충공 익재 선생 연보'에도 출생지는 나타나 있지를 않다.
단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인물난에 동암공(휘 진)과 익재공(휘 제현)을 경주의 인물로 소개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경주에서 태어난 것으로 말한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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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두초일일금계창(屋頭初逸日金鷄唱), 이사수양요요장(怡似垂楊요요長)
- 집 머리 동트는 날 닭울음소리 수양버들 휘늘어져 한들거리듯-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한자가 틀린다.
'요'자는 '鳥아래 衣'자로 쓴 것이나 '한자 대사전'에는 없는 글자이다.
'요(搖)'자로 쓴 곳도 있다.
어떤 글에는 '옥두(屋頭)'라고 되어 있고 어떤 글에는 '미두(尾頭)'라고 쓴 곳도 있다.
'옥두(屋頭)'가 바른 표현인 것 같다.
● 李齊賢妻權氏墓誌銘(이제현 처 권씨 묘지명)
○ *永嘉郡夫人 權氏墓誌銘(영가군부인 권씨 묘지명)
*至順三年三月 高麗國*匡靖大夫 前*政堂文學李公齊賢之妻 永嘉郡夫人權氏
(지순 3년 3월 고려국 광정대부 전 정당문학 이공제현지처 영가군부인 권씨)
- 원(元)나라 문종(文宗) 3년 3월 고려국(高麗國) 광정대부(匡靖大夫)이며 전 정당문학(政堂文學) 이공 제현의 처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권씨(權氏)가
感疾以是月卄八日丁酉 卒于*楊堤坊之第 (감질이시월28일정유졸우 양제방지제)
- 질환에 감염되어 이 달 28일 정유(丁酉)일에 양제방(楊提坊)에서 돌아가셨다.
謀所以藏卜日得四月己未吉 (모소이장복일득4월기미길)
- 안장할 묘소를 모색하고 4월 기미(己未)일을 길일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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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군(永嘉郡)- 경상북도 안동시(安東市)의 고려시대 이름. 부인 권씨의 아버지가 권부(權溥)로 안동 권씨이다.
안동부(安東府)는 원래 신라의 고타야군인데 경덕왕은 고창군(古昌郡)으로 고쳤다.
태조 13년(930)에 후 백제왕 견훤(甄萱)과 이 군 지역에서 싸워 승리하였는데 그 때 이 군 사람인 김훤평(金萱平), 권행(權幸), 장길(張吉) 등이 태조를 도와 공로가 있었으므로 김훤평을 대광(大匡)으로, 권행과 장길은 각각 대상(大相)으로 임명하고 군을 안동부로 승격시켰다가 후에 영가군(永嘉郡)으로 하였으며 성종 14년에 길주자사(吉州刺史)라고 불렀다.
현종 3년에 안무사로 하였고 9년에 지길주사(知吉州事)로 고쳤으며 21년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
- (『고려사』권57 지리2 상주목 안동부).
*군부인(郡夫人)- 공신 정1품· 종1품의 적처를 모군부인(某郡夫人)이라 칭하고 군부인의 앞에 읍호를 붙이도록 규정하였다.
*지순(至順)- 원(元) 문종(文宗)의 연호로서 지순 3년은 1332년(壬申). 충숙왕 복위
*광정대부(匡靖大夫)- 정·종2품 문관(文官)의 관계(官階).
충렬왕(忠烈王) 원년(1275)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를 이 이름으로 고쳤다가 동왕 24년에 폐하였고,
동왕 34년에 다시 두어 정2품으로 하였으며, 충선왕(忠宣王) 2년(1310)에 종2품의 상(上)으로 하였다가 공민왕(恭愍王) 5년(1319)에 폐하였고, 동왕 11년에 다시 두어 정2품으로 하였다가 동왕 18년에 또다시 폐하였다.
*정당문학(政堂文學)- 문하성. 첨의부. 도첨의사사. 도첨의부. 문하부 등의 종2품 벼슬. 문종(文宗) 때에 문하성(門下省)에 이를 두었고, 충렬왕(忠烈王) 원년(1275)에 첨의부에 참문학사(參文學事)를 두었다가, 동왕 16년에 정당문학으로 고쳤고, 충선왕(忠宣王) 때에 파하였다가 뒤에 다시 두었다.
- (『고려사』권76 지30 백관1 정당문학).
*양제방(楊堤坊)- 고려 현종 15년(1024)에 개성 5개부의 방리(坊里- 마을)를 개편하여 만든 동부의 7개방 중의 하나.
7개방- 양제방(楊堤坊). 안정방(安定坊). 봉향방(奉香坊). 영창방(令昌坊). 송영방(松令坊). 창령방(倉令坊). 홍인방(弘仁坊) - (『고려사』권56 지리1 왕경개성부).
* 익재공은 모두 세 번 혼인하여 부인이 세분이시다.
그 첫 부인이 길창국부인(吉昌國夫人)인 권씨(權氏)로 부(溥)의 딸이다.
*길창군(吉昌郡) : 경상북도 안동(安東)에 있던 고을.
● 익재공(益齋公)의 열 분 따님과 사위
*익재공(益齋公)의 따님 아홉 분이 [익재공파보]에 기록되어 있다.
◆ 길창국부인(吉昌國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
- 장남 서종(瑞種)과 차남 달존(達尊)외 3녀 생산
* 국부인(國夫人) - 고려시대에는 여자는 품계가 없었으나 문무관의 처인 경우 국부인, 군부인, 현부인 등으로 고관들의 부인들에게 불리웠고 조선시대에는 정경부인, 정부인 숙부인 숙인 등으로 품계가 정해졌다.
△ 장녀: 정순대부(正順大夫) 판사복사사(判司僕寺事). 풍천인(豊川人) 임덕수(林德壽)에게 출가하였다.
임덕수의 부(父)는 시중(侍中-광평성, 내사문하성, 중서문하성, 문하부의 으뜸 벼슬. 품계는 종1품)이고 아들 송(松)은 순의 판사(純義判事), 임(任)은 순례낭장(純禮郎將)이다.
△ 차녀: 중정대부(中正大夫) 전농정(典農正). 연안인(延安人) 이계손(李係孫)에게 출가하였다.
부(父)는 통례(通禮-국가의 의식에 관한 일을 담당) 지(漬)이고 아들 언?문(좌변부+小아래 馬文)은 삼사좌사(三司左使-전곡의 출납·회계사무를 총괄하던 정2품 관직)이고 량전(亮典)은 의감정(醫監正-전의감 등에 딸린 정3품 당하관)이다.
문) 연안 이씨 부사공파의 중시조이신 이지 선조의 아드님이신 계손 선조께서 계림부원군 익재공 이제현의 사위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경주 이씨의 족보나 다른 서적에서 사실인지 확인이 되는 것입니까?
답) 확인이 됩니다. 안동 권씨 족보로도 확인이 되고요.
(권부의 사위 이제현, 이제현의 사위 이계손, 그 아들 즐과 량이라고 다 실려 있습니다.)
△ 3녀 :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첨서추밀원사 한림원태학사(簽書樞密院事翰林院太學士) 언양인(彦陽人) *김희조(金希祖)에게 출가하였다.
부(父)는 우의정(右議政) 윤(倫)이다
*김희조(金希祖)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언양이다.
언양군(彦陽君) 좌정승(左政丞) 윤(倫)의 여섯째아들로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354년(공민왕 3) 군부판서(軍簿判書), 1356년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가 되고 1359년 추밀원사(樞密院使)에 올랐다.
홍건적(紅巾賊)이 쳐들어 왔을 때 왕의 남행(南幸)에 호종(扈從), 수복 후 평장사(平章事) 이공수(李公遂). 참정(參政) 황상(黃裳)과 함께 수도(開京)를 지켰다.
또한 왕을 호종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으나 얼마 후 순천(順天)에 유배되었다.
「고려사」와「고려사절요」에 전한다.
※김희조는「언양읍지」(1916)에 수사도상주국언양백(守司徒上柱國彦陽伯) 검교시중(檢校侍) 경직(敬直)의 아우로 되어 있고, 또「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 문하시중 (門下侍中)이며 도강백(道康伯)으로 봉해져 도강 김씨(道康金氏)의 관조(貫祖)로 되어 있는데 동일인인지의 여부는 미고(未考)이다.
- 도강(道康) : 전남 강진의 옛 지명
- 3녀 경주 이씨는 *의화택주(義和宅主)에 봉작(封爵)되었다.
*택주(宅主)
고려시대에는 제군(諸君-군 칭호를 받은 자)의 정처를 택주(宅主)라 하였는데 김희조는 군(君)이 아닌데도 부인인 경주 이씨가 의화택주(義和宅主)에 봉작(封爵)되었다.
이는 고려 말에 조선 태종 때 2품의 정처에게 내린 택주 별호를 고려 말에 이미 2품 관직의 부인에게 봉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단 2자 명(二字名)을 붙여 제군의 정처와 구분하였다,
예) 의화 택주(義和宅主), 수성 택주(綏城宅主), 정화 택주(靜和宅主) 등
◆ 수춘국부인(壽春國夫人) 춘천 박씨(春川朴氏)
- 창로(彰路)외 3녀
△ 장녀 : 정순대부(正順大夫)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영해인(寧海人) 박동생(朴東生)에게 출가하였다.
부(父)는 판서(判書) 원계(元桂)이다.
장자 경(經)은 판사(判事)이고 차자 위(緯)는 목사(牧使)이며 3남 수문(殊文)은 정랑(正郞)이다
△ 차녀 : 봉순대부(奉順大夫)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진천인(鎭川人) 송무(宋懋)
부(父)는 찬성(贊成) 지백(之伯)이고 아들 면(勉)은 군수(郡守)이다.
△ 3녀 : 공민왕(恭愍王) 후비(后妃)인 혜비(惠妃)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으로 고려 제31대 공민왕의 후비(后妃)이다.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아들이 없자, 재상들이 명가의 딸로서 자식 둘 자를 청하였는데,
이에 익재공의 딸이 뽑혀 혜비로 봉하여졌다.
이 때문에 노국공주가 분하게 생각하여 진수(珍羞)를 진상하지 않고 참소와 고자질이 다투어 일어났는데 이는 공주가 투기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민왕 말기에 홍륜(洪倫)·홍관(洪寬)·한안(韓安) 등 자제위(子弟衛)의 무리들이 제비(諸妃-여러 후비)를 강제로 욕보일 때에 혜비·정비(定妃)·신비(愼妃)는 완강히 거절하여 따르지 않았다.
공민왕이 시역(弑逆)을 당하자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 서원 군부인(瑞原郡夫人) 서씨(徐氏)
- 2녀 생산
△ 장녀 : 중정대부(中正大夫) 삼사우윤(三司右尹) 광주인(光州人) 김남우(金南雨)
부(父)는 전리판서(典理判書) 광리(光利)이고 유랑장(維郞將)에서 현감(縣監)이 된 김직(金織), 김효복(金孝福), 김효로(金孝老)는 중랑장(中郞將)이다.
△ 차녀 : 봉선대부(奉善大夫) 전의부정(典醫副正) 이유방(李有芳)
◆ 측실(側室)
- 2녀 생산
△ 장녀는 중랑장(中郞將) 임부양(林富陽)에게 출가하였다.
△ 차녀 - 출가한 기록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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