失傳世系의 考察

합천이씨 세보의 35대 실전세계의 오류

녹전 이이록 2009. 2. 25. 23:01

● 분적종 합천 이씨 세보의 '35대 실전세계'는 바른 세계가 아니다. 

 

 

많은 종친님들이 신라 초 시조님의 아들 대부터 신라 말 중시조님의 앞 대까지 약 900여 년 간의 실전 세계(失傳世系)가 분적종 합천 이씨 임신대보에 기록된 것을 보고 그 잃어 버렸던 35대(세)를 실제적인 계대(系代)인 것으로 여기고 '35대(=35세) 실전세계'를 그대로 인용하여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합천 이씨 세보에 기록된 '35대(세)의 계보'는 대종보에 참고용으로 실려있는 '35대(세)로 된 실전세계'와 같은 것으로 모두 사실과 어긋나며 고증이 안된 계대임을 알아야한다.

 

먼저 합천 이씨 세보(世譜)의 '35대(세) 계대'에 대하여 알아보자.    

 

합천 이씨는 1907년 이내에 아래와 같이 5회 세보를 발간하였다.

 

중묘(中廟) 을축보(1529). 영묘(英廟) 갑술보(1754). 순묘(純廟) 신유보(1801). 고종(高宗) 병자보(1876). 고종(高宗) 정미보(1907)이다.

 

그리고 이후 1932년 합천 이씨 임신 대보이다.

그러나 임신 대보 발간 전에 5회나 발간한 모든 족보에 '실전 선계(先系)'를 등재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단지 1932년 '임신대보(壬申大譜)' 간행시에 '35대 실전세계'를 처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1968년 무신(戊申)년에 간행한 강양 합천 이씨 계보전(系譜全)에 '시조 표암공 휘 알평이하 세계 원류보(始祖瓢巖公諱謁平以下世系原流譜)'라 하여 원편(元編) 14에 실으면서 1968년 대전 보전출판소에서 발간한 '익재공파보와 평창 이씨 세보에 의거한다'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1968년 익재공파보와 평창 이씨 세보를 보고 그것을 그대로 베껴 1968년 강양 합천 이씨 세보에 올린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 경주 이씨 족보 간행 역사를 살펴보자.

 

맨 처음이 1613년경 광양 현감 종언(宗彦) 선생께서 동종계(同宗契)를 창설하여 족보를 발간하였으나 백사공(휘 항복)의 서문만 전해오고 족보는 전해오지 않는다.

 

두 번째가 1614년 서계 득윤 선생이 손으로 베꼈다는 단권보가 청주에 거주하는 종인(宗人)이 소장하고 있다고 하나 지금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후에 발간된 족보로는 갑무갑(甲戊甲) 3대보(三代譜)인데 갑자보가 1684년. 무진보가 1748년. 갑술보가 1814년에 발간되었다.

 

이후 1848년(무신. 헌종 14년)에 발행된 국당공파보(菊堂公派譜)


1860년(경신. 철종 11년) 익재공파 경신보(益齋公派 庚申譜)


1868년(무진. 고종 5년) 백사공파 무진보(白沙公派 戊辰譜)


1873년 계유보(癸酉譜) 조선 고종 10년

 
1890년 경인보(庚寅譜) 고종 27년


1929년 원주보(原州譜) 기사(己巳. 일제시대)


1930년 경주보(慶州譜) 경오(庚午)


1931년 대구 신미보(大邱辛未譜) 신미(辛未)


1933년 대전보(大田譜) 계유(癸酉)


1978년 대전 보전보(大田보전譜)  무오(戊午) - 경주이씨 대동보


1987년 정묘보(丁卯譜) 중앙 표준보(中央標準譜). 경주이씨 대종보 -

총 80여 회에 걸쳐 대종보(大宗譜)와 파보(派譜)가 발행된 것이다.

 

위의 경주 이씨 족보 발행과 분적종 합천 이씨 족보 간행 년도를 정리해 보았다.

 

1978년 대전 보전소에서 발간한 무오보(戊午譜. 경주이씨 대동보)에는 '150여 년 전에 합천 이씨 가보에서 35대 실전 세계의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이 기록이 150년이나 되었으니 1978년의 150년 전은 1828년경이다.

 

1932년 합천 이씨 임신 대보에 처음으로 실전 선계를 등재하였다는데 1828년경에 합천 이씨 가보에서 실전세계를 발견하였다는 기록은 또 애매하다.

 

1932년 임신 대보에서 실전세계를 발견하였다고 하면 될 것을 구태어 1828년경에 합천 이씨 가보에서 실전세계를 발견하였다는 것은 기록에 신빙성이 없다.

 

즉 1828년 이전의 합천 이씨 가보에 '35대(세) 계보가 기록되어 있었다'는 것인데 분적종 합천 이씨 종회에서 발간한 1828년 이전의 중묘 을축보(1529). 영묘 갑술보(1754). 순묘 신유보(1801)에는 '35대(세) 실전 세계(失傳世系)'의 계대(系代)가 전연 올라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앞서의 족보에 계대가 전연 올라있지 않은데 어떻게 1932년 임신 대보에 처음 기록이 있느냐는 것이다.   

 

맞지 않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여하간 기록으로는 '35대 실전 계보'가 합천 이씨 임신 대보에 처음 기록되었다.

 

이것을 당시 정보가 빠르지 못한 시대에 확인도 하지 않고 특별한 별다른 내용으로 알고 각 문중마다 사용하게 된 것으로 짐작이 되고 지금도 대종보에 실려 있는 실전 세계는 말하지 않고 합천 이씨 족보에 올라 있는 계대를 들먹이며 그 실전 세계가 바른 것인 양 '시조 몇 세'를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35대(세) 실전 세계'가 '합천 이씨 실전 선계'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 '28대(세) 실전세계'의 오류

 

○ 28대(세) 실전 세계의 언급

 

갑무갑(甲戊甲) 삼대보를 우리 경주 이씨의 근간보(根幹譜)로 한다.

 

그 이후 서기 1900년 이전까지는 어느 족보에도 '실전 세계'는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언급된 것이 1868년 무진(戊辰)년에 간행된 백사파보(白沙波派譜) *건(乾)권과 곤(坤)권의 2권 중

두 번째인 곤권(坤券) 끝 부분에 *귤산공(橘山公) 휘 유원(裕元)께서 쓰신 *발문(跋文)에 처음 '28대(세) 실전 세계'가 언급되고 잘못된 계대임을 말하고 있다.

 

[삼가 자세히 조사하여 살펴보니 급량부 대인(시조. 신라 3대 유리왕 때 행정조직을 개편하면서 신라 초기의 양산촌을 급량부로 고쳐 불렀는데 이후 시조를 높여 호칭한 것이다.)으로부터 소판공(휘 거명. 신라 말)에 이르기까지 실전한지가 1000년(실지 약 900년)이 되었다.

 

28대의 실전 세계는 서경(西京-평양)에서 발견되었다.

 

실계 28대를 원본에서 베껴 왔는데 이 상계 28대가 바르지 못한 것이다.

 

바르지 못한 이유로 국가의 행정 조직 및 직제(職制)가 삼한(三韓) 즉 고구려 백제. 신라의 관제와 달라 실질적인 바른 상계(上系)가 아니다.

 

것이 황허 강변의 대씨(戴氏)들이 그 근본을 복고하려 하는 것이 세속을 어지럽게 한 자와 무엇이 다르리오.]
----------------------
*건곤(乾坤)- 천지(天地). 음양(陰陽). 건방(乾方)과 곤방(坤方)을 아울러 이르는 말.
예전에 두 권으로 된 책의 순서를 앞 권과 뒷 권으로 매길 때에 쓰던 말.

 

*귤산공(橘山公) 휘 유원(裕元)- 1814~1888. 자는 경춘(景春), 호는 귤산과 묵농, 시호는 충문(忠文),

중조 34세로 상서공 18세, 백사공 9대손(세손)이다.


벼슬은 1841년(헌종7)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좌의정과 영의정에 올랐다.


1882년 전권대신으로 일본의 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나와 제물포조약에 조인하였다.


저서에 <귤산문고> <가오고략> <임하필기> <해동악부> <경주이씨 금석록> 등이 있다

*발문(跋文)- 책의 끝에 본문 내용의 대강이나 간행 경위에 관한 사항을 간략하게 적은 글.
*등초(謄抄)- 원본에서 베껴 옮김. ≒등기(謄記)·등사(謄寫)·등서(謄書)· 등초(騰草)

 

*삼한(三韓)- 원래 삼한은 한반도 남부의 마한, 진한, 변한을 뜻하는 말이었다.
마한, 진한, 변한이 멸망한 후 그 당에 삼국인 고구려, 백제, 신라가 건국하였으므로
이를 일러 삼한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를 뜻하는 말에 동국, 동방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삼한 또한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 28대(세)로 된 실전 세계의 오류

 

그러나 1868년 무진(戊辰)년에 간행된 백사파보(白沙波派譜)에 기록된 '28대(세)의 실전 세계'가 전해지지 않아 알 수 없던 것이 최근(1987년 전후)에 발견되어 이 28대로 된 실전 세계를 상세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 신라 관직명이 아닌 고려 시대나 이조시대의 것일 뿐 아니라

 

▲ 서문(序文) 4면에는 동익(東翼)이 소판공 30세손으로 되어 있는데 범례(凡例)에는 열헌공 22세손이라 하여 7세의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어 바르지 못하다.

 

이는 휘 동익이 소판공 30세손이면 열헌공이 중조 15세이니 열헌공 15세손이 되어야 하는데  열헌공 22세손으로 7세의 차이가 난다는 뜻으로 바르지 못하다는 내용이다..

 

(글쓴이는 '세'와 '세손'의 세수를 같이 읽고 있어 30세와 30세손을 같이 읽고 있다.)

 

▲ 또한 범례에 전후 연대가 상반되어 틀린 곳이 있다.

 

'1814년 갑술보가 발간된 후 67년이 되었는데 각파의 자손이 번창하였으므로 이제 파보를 간행하여 차례로 추가로 기록한다'라고 하였으니 1881년에 족보를 발간한 모양이 된다.

 

그런데 서문에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5정축(丁丑)'이라 하였으니 이는 1877년이다.

 

무인년 가을 8월 풍덕 동강진(豊德 東江津- 開豊郡 東南端)에서 건곤(乾坤) 2권의 파보(派譜)를 구했다고 하였으니 이는 1878년이다.

 

그러니까 범례에는 1881년에 족보가 발간되었다고 했는데 서문에는 1877년이라고 했다.

 

거기에다가 서문에 1877년에 발간한 족보를 다음해인 1878년에 건곤2권을 구하였다고 했으니 모든 것이 이치에 합당하지 않는 것이다.

 

이상 열기(列記)한 내용을 볼 때 '28대 실전 세계'가 족보의 범례에서는 족보 발간연도를 1881년으로 하였으나 서문에는 1877년에 발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건곤보 2권을 얻은 것이 1878년으로 족보 발간 연도보다 앞서고 발간한 다음해에 건곤보 2권을 구하였다는 것은 전후 연대(前後年代)가 상반되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로 여러 가지 오류가 있다.

 

 ▲ 더욱이 1877년 정축(丁丑)년 서문(序文)에 1870년 경오파보(庚午派譜)에 실전 세계를 기록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갑무갑 3대 근간보 이후 '실전 세계'가 처음 발견된 것은  *1878년 무인(戊寅)년에 구한 건권(乾卷)과 곤권(坤卷) 2권의 '실전 세계'로 귤산공(橘山公- 휘 유원裕元)께서 쓰신 발문(跋文)에 처음 언급되었는데

8년 전인 1870년에 파보(派譜)에 등재하였다는 것은 실로 말도 안 되는 말이다.

------------------------
*상찰(祥察)- 상세하고 자세히 살펴 봄


*범례(凡例)- 책머리에 그 책을 읽어 나가는 데 필요한 모든[凡] 사항들을 본보기[例]로 적은글’, 즉‘일러두기’를 이른다.


*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5정축(丁丑)의 뜻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5년정축(丁丑)' 은 숭정 연호를 사용한 해로부터 5년이라는 뜻으로 '숭정기원(崇禎紀元)'이 1628년이니 '5년 정축년'은 연도는 1633년이나 간지는 정축년이 아닌 계유(癸酉)년이 된다.

이렇게 읽으면 간지가 기록과는 달라지기 때문에 아래와 같이 이해해야 한다.

'년'자를 뺀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5정축(丁丑)'의 뜻은 '숭정기원후 5번째 돌아온 정축년'이라는 것이 바른 해석이다.

그러니까 1628년이 숭정기원이니 이때부터 정축년이 5번이 돌아 온 해이니까 1877년이 되는 것이다.

 

*1878년 무인(戊寅) 오류- 1868년 무진(戊辰)이 바르다.

 

 

● '35대(세)로 된 실전세계(失傳世系)'의 성찰과 오류

 

○ 35대(세)로 된 실전 세계의 첫 발견

'35대(세)로 된 실전 세계'에 대한 말이 나온 첫 시발은 광무8년 갑진(甲辰. 1904)년부터이다.

 

35대(세)로 된 실전세계는 서기 1900년까지는 전연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 광무8년 갑진(甲辰)년 즉 1904년에 발간된 족보에서부터이다.

 

이 족보에 휘 계필(1902년∼1906년까지 4년간 경산군수 재직)께서 경산군수로 재직할 때에 쓴 서술(敍述- 사건이나 생각 따위를 차례대로 말하거나 적음)에 보면

 

「1902년 여름에 일가인 상준과 춘우가 "우리 시조 표암공(瓢巖公) 이하 소판공(蘇判公) 이상 35대의 대계(大系)가 쓰인 옛날 족보를 가져왔다. 책이 헐고 좀 벌레가 먹어 다시 간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조상을 그리며 생각함에 어찌 온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수선하기로 합의하여 오래지 않아 1904(甲辰)년에 완성하였다.」-

 

○ 무오보(戊午譜. 1978년)에 기록된 35대(세) 실전 상계 기록

다음으로 대전(大田) 소재 보전출판사((譜典出版社)에서 발행한 1978년에 발간된 무오보(戊午譜) 본문 5면에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다.

 

[실전상계가 약 150년 전쯤 분적종인 합천 이씨 가보(家譜)에서 발견됨으로서 시조 휘 알평에서 중시조 소판공까지의 세계(世系)를 알게 되었다.

 

이 상계에 따르면 소판공은 시조로부터 35대손(代孫)이 된다.

 

자기의 직계만을 표시한 가첩류나 살고 있는 지역이나 일부 일가만의 지역적인 편보에도 성씨 대관의 내용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
*36세손(世孫)- '세와 대를 달리 읽는 방법'에 의거하여
'세와 세손'을 같이 읽어 시조부터 중시조까지 36세이니 '36세손'이라고 한 것인데 이는 잘못 기록한 것이다. 
36세(대)이니 35대손(35세손)이라고 읽어야 한다.

*소극적인 파보(派譜)- 자기의 직계만을 적은 가첩 류


*지역적인 편보(偏譜)- 살고 있는 지역이나 일부 일가만의 파보 류


*한국성씨대관(韓國姓氏大觀)- 저자 : 최덕교. 발행처 : 創造社. 발행연도 : 1971
--------------------------

○ 합천 이씨 세보의 '실전 상계 발견'과 조처

 

분적종인 합천 이씨 세보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충북 진천(鎭川)에 살던 경주 이씨 후손인 이학영(李學榮)씨가 영조 41년 을유(乙酉. 1765년)년 7월에 주문사(奏文使)로 북경(北京)에 가다가 길가에서 경주 이씨의 묘비(墓碑)와 묘갈(墓碣)이 산방(산기슭 경사진 곳?)에 서 있음을 보았다.

 

의아스러워 근처에 사는 경주 이씨 먼 일가를 찾아가 물었다.

 

먼 일가가 대답하기를

 

"본인도 조선국(朝鮮國) 익재(益齋) 제현(濟賢) 선생의 피를 나눈 후손으로 고려 말경에 이 땅(중국 요동 땅)에 들어와 살고 있다." 하였다.

 

다시 묻기를 "보(譜)가 있느냐?" 하였더니 "있다." 하였다.

 

이곳에서 5일간을 더 머무르면서 선조(先祖)의 잃어버린 계대(系代)를 찾았다.

 

(의견)

 

왕명을 받들고 주문사(奏文使)로 북경에 가던 사신이 천재지변이 아닌 족보로 인하여 5일간이나 한 곳에 지체하였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다.

 

혹 돌아오는 길에 발걸음을 빨리 하여 선조의 잃어버린 계대를 찾았다면 모를까 사신으로 가던 길에 5일을 머물었다는 것은 목숨을 내 놓는 일이나 마찬가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주문사(奏文使)

 

- 조선 시대 중국과의 사이에 외교적으로 알려야 할 일이 있을 때 임시로 파견하였던 비정기적인 사신.


*비갈(碑碣)

 

- 묘비(墓碑)와 묘갈(墓碣)을 아울러 이르는 말.

사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쇠붙이나 돌에 글자를 새겨 세우는 것으로, 빗돌의 윗머리에 지붕 모양으로 만들어 얹은 것을 ‘비(碑)’라 하고,

그런 것을 얹지 않고 다만 머리 부분을 둥그스름하게 만든 작은 비석을 ‘갈(碣)’이라고 한다.

 

*산방(山榜)

 

- 산신제 지낼 때 쓰이는 지방. 여기에서는 비스듬한 산기슭의 넓은 곳을 의미하는 것 같다.

 

*조선국(朝鮮國) 익재(益齋) 제현(濟賢) 선생- 익재공은 본디 고려 말엽의 사람이다.

조선국이라고 표현한 것은 일반적으로 고려국에서 조선국으로 왕조는 바뀌었으나 같은 땅위에 세워진 같은 나라로 여겨 조선국이라고 한 것이다.
---------------------

○ 왕의 윤허  

 

판각(판각- 나무에 글씨를 새김)된 글을 당지(唐紙- 당나라 종이)에 찍어 만든 보첩 1권을 갖고 우리나라에 돌아왔다.

 

홍문관 도승지인 전주 후(全州后- 전주 이씨. 전주 사람) 이인명(李仁明)에게 말을 하였다.

 

이인명이 이에 대한 내용의 글을 지어 임금에게 올렸더니 임금이 허락하기를

"실전된 많은 성들이 있는 가운데 다행히 경주 이씨는 실제 계대(系代)를 찾았으니 매우 다행한 일이다.
다시 계보(系譜)에 올려 계승하도록 할 것이며 청(淸)나라에 주문사로 간 이학영에게 별부직영(別副直營- 별도 기관에서 사업을 직접 관리 경영?)하게 하고 태릉(泰陵)에서 해야 할 것은 즉부향사(卽赴向事- 곧 일을 추진하여 마치게 하라)" 하시었다.
----------------
*별부(別副)

- 별도로 만든 임시 관청. 주무기관 다음의 부기관.

 

본래 쪽지나 조각을 뜻하는 말로 공식 문건의 내용을 보충하는 형식으로 첨부된 문건을 의미함. ≒ 별단(別單). 별파(別?).

 

○ 상반된 내용을 후일에 밝힐 것을 주문

 

 '합천 이씨 임신 대보(壬申大譜)를 1932년에 발간시에 대계(大系)를 죽 늘어놓고 순서에 따라 편집한 것이기에 기록을 전한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35대(세)로 된 당지 판각(唐紙板刻)의 보첩(譜牒)을 살펴보니

 

① 성씨대관(姓氏大觀)의 내용과 자신의 직계만을 나타낸 가첩류의 소극적인 파보(派譜) 및 가까운 일가나 한 지역을 중심으로 발간한 지역 편보(偏譜- 파보)의 내용이 서로 틀리거나 어긋날 뿐 아니라

 

② '충북 진천(鎭川)에 살고 있는 경주 이씨 이학영(李學榮)과 전주인 이인명(李仁明)이라는 사람을 이씨 조선의 역사서. 국조 방목, 사마 방목, 국조 실록 등 여러 자료에서 찾아보았으나 두 사람의 행적이 기록과 같은 사신 관직과 거주지 등이 확인이 안되고 내용에 믿기 어려운 것들이 있어 의심이 들므로 별도로 기록하여 두었다가 후일에 밝혀 주기를 바란다.' 라고 1978년에 발간된 무오보(戊午譜) 본문 5면에 기록되어 있다.
---------------------
*나열(羅列)- 여러 사실(事實)이나 내용(內容)을 글이나 말에서 죽 늘어놓는 것

*편차(編次)- 순서에 따라 편집함

*소극적인 파보(派譜)- 자신의 직계만을 나타낸 가첩 류 등

*지역 편보(偏譜)- 가까운 일가나 한 지역을 중심으로 발간한 파보 등

*국조방목(國朝榜目)

 

- 조선 태조 원년(1392)부터 고종 14년(1877)까지의 문과 급제자를 기록한 책.

 

책머리에 고려 광종 때 한림학사 쌍기(雙冀)의 제안에 따라 시(詩), 부(賦), 송(頌), 시무책(時務策)으로 진사를 뽑은 일과 고려 때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성명도 약간 수록하였다. 10권 10책. ≒방목(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처음으로 소과(小科)에 급제한 진사(進士), 생원(生員)의 성명·자(字)·

 

생년간지(生年干支)·본관·주소 등을 비롯하여, 부(父)의 관위(官位)·생존여부, 형제의 이름·자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국조실록(國朝實錄)- 조정에 관한 실제의 기록.
---------------------------
○ 합천 이씨 족보의 발간과 선계(先系) 등재

 

1932년 간행 합천 이씨 임신 대보 이전에 발간된 합천 이씨 족보는 다음과 같다.

 

중종 24년 때의 기축보(1529). ^ 영조 30년 때의 갑술보(1754). ^ 순조 1년 때의 신유보(1801). ^

고종 14년 때의 병자보(1876). ^ *순종 1년 때의 정미보(1907) 등 이조 말까지 5회를 발간하였지만

'실전세계'를 등재한 사실이 없다.

 

이렇게 1529년에 발간한 중묘 기축보부터 1907년 고종 정미보까지 5회 발간한 합천 이씨 족보에 없던

'실전세계'가 그 뒤 1932년 임신 대보를 발간할 때에

 

'시조 휘 알평이하 세계원류원도(始祖諱謁平以下世系原流圓圖)를 싣고 「鎭川居慶州后李學榮乙酉………別式圓圖付于編首비竣後巧」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세계원류원도의 발견과정과 처리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앞서의 5회 발간한 족보에는 실전 세계가 없다가 1932년 임신대보 발간시에 '실전세계'를 처음으로 올린 것이다.

 

또 하나 같은 내용의 세계(世系)가 1968년 무신(戊申)년에 간행(刊行)한 강양 합천 이씨 계보(江陽陜川李氏系譜) 전(全)에 '시조 표암공 휘 알평이하 세계원류보(始祖瓢巖公諱謁平以下世系源流譜)'라 하여 원편(元編-처음 엮은 책) 14에 실려 있다.

 

이 상계(上系-위 계대)는 지금의 대동보(大同譜. 1968년)를 발간할 때에 대전 출판소에서 '경주 이씨 익재공파보(益齋公派譜)와 평창 이씨 세보(平昌李氏世譜)에 의거(依據)한다.'라고 되어 있다.

 

즉 1968년 무신년에 간행한 합천 이씨 대동보에 올려진 상계(上系)는 같은 해에 대전 출판소 간행 익재공파보와 평창 이씨 세보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실전 상계'는 합천 이씨 1932년 간행 임신 대보에 실전 세계를 올렸으나 그 이전 다섯 차례의 발간 세보에는 '실전세계'의 기록이 없다는 것인데 임신대보의 실전상계는 어디서 갖고 온 것일까?

 

1968년 무신(戊申)년에 간행(刊行)한 강양 합천 이씨 계보(江陽陜川李氏系譜) 전(全)에 같은 내용의'실전세계'를 올리면서 1932년 간행 임신 대보에 '실전 세계'에 대하여는 말이 없고 같은 해 대전 출판소 간행 익재공파보와 평창 이씨 세보에서 '실전세계를 가져온 것'이라는 등 전후 간행된 세보의 기록이 신뢰성이 없다.

 

여러 가지 점에서 의혹이 가는 상계임에도 불구하고 합천 이씨 계보에 올린 것에 불과하다.
----------------
* 고종 정미보(1907)- 1907년은 엄밀히 말해서 고종이 아니고 순종 1년 즉 융희 1년이 되는 해를 말한다.

* 강양((江陽)

 

- 지금의 경남 합천군 일대를 말한다.

고대에는 가야연맹의 다라국(多羅國), 초팔국(草八國)으로 추정되고 565년(신라 진흥왕26)에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하고 757년 (신라 경덕왕16)에 강양군(江陽郡)으로 개칭하였다.

 
고려때 1018년(현종 9)에 합주(陜州)로 승격하였으나 조선때인 1413년(태종 13)에 합천군으로 강등되었다.
근대인 1914년에 합천군에 초계군, 삼가군을 병합시키고 1979년 합천면이 읍으로 승격.
----------------------

○ *주문사(奏文使)는 실록(實錄) 기록에 없다.

고려와 조선의 양 시대에는 중국의 원(元), 명(明), 청(淸)나라의 사신으로 정기적으로 동지사(冬至使)와 정조사(正祖使- 正朔使. 賀正使)를 보냈다.

 

해마다 신년에 가는 정조사는 동짓달에 가는 동지사를 겸하였다.

 

사신의 대표격인 정사(正使)는 삼공육경(三公六卿)이 되었으며 그 다음의 부사(副使)와 서장관(書狀官)이 수행했다.

 

중국에 정기적으로 가는 사신 이외에 주청사(奏請使)와 주문사(奏聞使)가 있었는데 이조실록(李朝實錄)을 보면 주문사(奏聞使)가 10회 중국에 갔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합천 이씨 세보에 기록된 본문에 있는 '주문사(奏文使)'라는 정조사는 실록(實錄)에 기록이 없다.

 

또한 '홍문관 도승지인 전주 후....'라는 기록에서도 홍문관(弘文館)에는 승지(承旨)나 도승지(都承旨)가 없고 승지나 도승지는 승정원(承政院)에만 있다.

 

해서 합천 이씨 세보에 기록된 '주문사(奏文使)'라는 정조사 명이나 '홍문관 도승지'운운은 정확하지 못한 표현으로 잘못된 것이다.
--------------
*주문사(奏文使)라는 정조사는 실록(實錄)에 기록이 없다.

^주문사(奏聞使)는 기록이 있어도 주문사(奏文使)는 기록에 없다. 聞 - 文 글자가 틀림

*동지사(冬至使)- 조선 시대에, 해마다 동짓달에 중국으로 보내던 사신. ≒하동지사.

 

*정조사(正祖使)

 

- 조선시대 신년 축하를 위해 중국으로 보낸 수석사신(首席使臣). 하정사(賀正使)라고도 한다.

해마다 3번씩 정기적으로 보내는 사신 중의 하나로서 2품 이상의 관원을 뽑아 보낸다.

동지(冬至)에 보내는 동지사(冬至使)가 동지와 정월이 가까운 관계로 정조사를 겸하였다.

 

구성인원은 부사(副使)·서장관(書狀官)·종사관(從事官)·통사(通事:통역)·감원(監員)·

사자관(寫字官)·서원(書員)·압마관(押馬官) 등 수행원 40명을 거느리고 일정한 공물(貢物:朝貢)을 헌납,

 

그 대가로 회사품(回賜品)을 받았으며 베이징[北京]의 회동관(會同館)에 유숙하였다.

 

*정사(正使)

 

- 사신 가운데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 또는 그런 지위. ≒상사(上使).

 

정사(正使)는 삼공육경(三公六卿)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되었다.

 

*삼공육경(三公六卿)

 

- 고려조(高麗朝)의 삼공(三公)은 사마(司馬). 사공(司空). 사도(司徒)를 칭하고 이조(李朝)때에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삼정승(三政丞)을 말했으며, 육경(六卿)은 육조(六曹)의 판서(判書)를 말한다.

 

*부사(副使)- 정사(正使)를 돕던 버금 사신. ≒아사(亞使).

 

*서장관(書狀官)

- 외국에 보내는 사신 가운데 기록을 맡아보던 임시 벼슬. 겸대(兼臺)

 

정사(正使)· 부사(副使)와 함께 삼사(三使)로 불리며, 직위는 낮지만 행대 어사를 겸하였다. ≒ 서장(書狀)·

 

^행대(行臺)

- 조선시대 중국으로 파견된 사신(使臣)의 일원인 서장관(書狀官)이 임시로 겸한 사헌부의 관직. 겸대관의 약칭으로 행대(行臺), 또는 행대어사라고 하였으며, 그 직명은 대개 겸지평(兼持平)·겸장령(兼掌令)·겸집의(兼執義)라 하였다.


서장관은 이와 같은 사헌부의 직함을 겸하여 본래의 기록보존 임무 외에 약 300명에 달한
사신일행의 불법행위를 단속하였다.

 

*주청사(奏請使)

 

- 조선 시대에, 동지사(冬至使) 이외에 중국에 주청할 일이 있을 때 보내던 사절. ≒주문사(奏聞使)·진주사(陳奏使).

 

*주문사(奏聞使)- 주청사(奏請使)
-----------------------------
○ 이학영(李學榮)과 이인명(李仁明)의 행적

그리고 앞서 기록한 전주 사람(전주 이씨) ^이인명은 조선왕조실록에 1750년부터 1770년 사이에 4번 기록이 나타나 실제 인물이긴 하나 당시 벼슬이 홍문관 도승지로 기록된 이인명은 홍문관에는 직(職)을 두지 않았다.

 

주문사(奏文使)로 중국에 다녀온 이학영은 보첩에는 이름이 있으나 충북 진천에 살았던 기록은 확인할 수 없고 주문사(奏文使)의 사신(使臣) 직(職)을 역임했다면 마땅히 족보에 올라져 있어야 할 것인데 보첩에 그러한 기록이 전연 없다.
---------------------
O 실록의 이인명

 

[전주인(全州人) 이인명(李仁明)에 대한 실록 기록

영조 76권 28년 4월 26 일 (정사) 002 / 죄인 초정이 물고 되고, 죄인들에게 형을 내리다.

 

죄인 초정(草貞)이 물고(物故- 죄를 지은 사람을 죽임)되었다.

 

이성(李城)과 이보(李堡)는 형조로 하여금 놓아 보내게 하고, 이경명(李景明)· 이인명(李仁明)을 모두 섬에 정배 하게 하며, 김덕해(金德海)와 미처 체포하지 못한 죄인 김수일(金守一)은 아울러 놓아 보내라고 명하였다.]

 

옥사(獄事)이지만 극비에 부쳐 쉬쉬하며 넘어간 사건으로 기록에도 전하는 바가 없어 자세한 내막을 모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에 이인명(李仁明)이 이 옥사와 관련이 되어 섬에 정배되었다는 기록이다.

*홍문관(弘文館)

- 조선 시대에, 삼사(三司) 가운데 궁중의 경서, 문서 따위를 관리하고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 관·문원(文垣)·서서원·영각(瀛閣)·옥당(玉堂)·옥서(玉署).

*사신역직(使臣歷職)- 사신의 직을 역임함

 

*입보(入譜)- 족보에 올림
--------------------------
○ 관직명이 신라 관직명과 상이하다

 

'35세 실전세계'에 적혀있는 관직명이 옛 신라시대의 관직명과 다르니 믿을 수 없다.

 

○ 150년 전 합천 이씨 가보의 '35대(세)로 된 실전세계'

 

'35대(세) 실전 세계'가 처음 등재된 것이 합천 이씨 임신대보(壬申大譜. 1932)인데 대전(大田) 소재 보전출판사((譜典出版社)에서 1978년에 발행한 경주 이씨 무오보(戊午譜)에 150여 년 전 합천 이씨 가보에서 발견하였다는 것은 사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150년 전이라면 1828년경이다.

 

실전 세계가 처음 등재된 것이 1932년에 발간된 합천 이씨 임신 대보라면 임신대보 발간 이전에 이미 5회나 발간된 합천 이씨 족보에 '35대로 된 실전 세계'의 내용이 전연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32년 이전에 합천 이씨 족보가 다섯 차례 발간되었고 이 5회 발간의 족보에 '35대로 된 실전세계'가 전연 기록이 없는데 1928년경에 합천 이씨 가보에서 35대로 된 실전세계를 발견하였다는 것은 사리에 당치 않는 기록이다.

 

○ 35대(세) 실전 세계의 실존 여부

 

따라서 *120년 전인 1868년 무진년 발행 백사파보의 발문을 쓰신 유원(裕元. 호 귤산橘山)선생께서 28대 실계(實系)에 대하여 분명하게 드러내어 명시(明示)하였음을 볼 때 그 당시에는 35대(세) 실전세계가 전연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조 말에 요동반도(遼東半島)로 이거(移居)한 익재공(益齋公)의 혈손(血孫-피를 나눈 후손)이 실전세계를 소장하고 있었다면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같은 후손이 모를 까닭이 없었을 것이 아니냐. 
-----------------
* 120년- 대종보 발간시기가 1987년이고 이 '실전세계의 고찰' 이라는 글도 이 즈음에 쓴 글이라고 보면

귤원공께서 백사파보에 발문을 쓴 시기가 1868년 백사파보를 발간한 시기와 비슷하므로 그 차이가 120년 정도이다.

 

○ 귤산공(橘山公. 휘 유원裕元) 의 발문(跋文) 내용은 아래와 같다

 

『삼가 안찰(按察-자세히 살펴봄)하건대 급량부 대인(시조)으로부터 소판공(휘 거명)에 이르기까지 실전한지가 천년이 되었다.

 

그런데 서경(西京-평양)에서 바르지 못한 상계 28대를 등초(謄抄- 원본을 베낌)하여 왔는데 관제(官制)가 삼한(三韓- 삼국시대를 일러 삼한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과 더불어 다름이 있으니 실적(實跡- 실지의 확실한 자취)이 아님이 틀림없다. 유원(裕元)은 기록한다.』
-----------------------
○ 양 실전 세계는 사실이 아니다

1684년에 발간된 갑자보(甲子譜)와 1748년 무진보(戊辰譜) 그리고 1814년 갑술보 (甲戌譜) 즉 갑무갑(甲戊甲) 삼대보(三大譜)는 물론이고 그 외 가첩류 등의 소극적 파보와 중파 소파 등 지역적 각 파보(派譜)에서 조차 서기 1900년까지는 한 곳에서도 실전 세계가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28대(세)로 된 실전 세계는 1868년 무진년 간행 백사파보 곤권 끝에 쓰인 귤산공(휘 유원)께서 쓰신 발문에 처음 언급되었고 35세로 된 실전세계는 1904년 갑진년 발간시 경산군수 휘 계필께서 쓴 서술에 처음 언급되었다.

 

이렇게 보면 여태까지 없던 내용이 이때 처음 기록되었다는 것은 1904년 경산군수 계필 선생이 독단적으로 편간(編刊)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도 된다.

 

현재까지(1987년) 나타난 기록을 추상(推想- 미루어서 생각함)할 때 결론은 양 실전 세계(兩失傳世系)는 사실(事實)이 아니라고 볼 수밖에 없다.

 

사실이 아니나 이 양 실전 세계(兩失傳世系)를 그대로 족보에 올려 참고(參考)로 제공한다.

 

다행이 후일(後日)에 옛 문헌에 기초하여 증거를 세워 이론적으로 밝혀 줄 것을 원하는 바이다.
 
이로써 28대(세) 실전세계와 35대(세) 실전세계는 여러 가지 모순되고 사실에 어긋나는 점이 많아
세계(世系)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다만 참고로 할 뿐이다.

 

약 900년 간의 잃어 버렸던 28대(세), 35대(세) 실전 세계를 알게 되었으나 이는 사실과 어긋나기 때문에 또 다른 정확한 실전 세계의 발견 없이는 함부로 사용하여 혼란을 가중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