失傳世系의 考察

「실전세계(失傳世系)의 고찰(考察)」

녹전 이이록 2009. 2. 22. 12:44

● 失傳世系(실전세계)의 考察(고찰)

 

 

*「失傳世系(실전세계)의 考察(고찰)」은 1987년 경주이씨 중앙 화수회 간행 「경주이씨 대종보(慶州李씨 大宗譜)」총편 P293에 실려있는 전문이다

 

過去(과거)의 事實(사실)을 正確(정확)하게 記錄(기록)하여 後世(후세)에 繼傳(계전)한다는 것이 심히 어렵다는 것은 周知(주지)하는 바이며 모든 民族史(민족사)나 國家(국가)의 變遷 (변천) 亦是(역시) 事實(사실) 그대로 傳(전)해지지 않음으로서 歷史學者(역사학자)들의 論爭(논쟁)의 原因(원인)이 되고 때로는 考證(고증)에 依據(의거)하여 바르게 修正(수정)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其(기) 理由(이유)를 文字(문자)가 있기 以前(이전)과 以後(이후)로 大別(대별)하여 生覺(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文字(문자)를 使用(사용)하기 以前(이전)은 口傳(구전)과 遺跡(유적) 등으로 流傳(유전)되는 것을 後世(후세)에 成文化(성문화) 하였으니 우리나라의 三國史記(삼국사기)나 三國遺事(삼국유사)만 하더라도 新羅(신라) 千年(천년)의 歷史(역사)를 筆者(필자) 金富軾(김부식)과 一然(일연) 僧侶(승려)가 中國文獻(중국문헌)도 斟酌(짐작)하면서 記錄整理(기록정리)했으나 그 內容(내용)이 一致(일치)하지 않으니 其一例(기일예)로서 六村長(6촌장)의 境遇(경우)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北(북)에서 내려온 流民(유민)으로 되어 있고 三國遺事(삼국유사)에는 天降設(천강설)로 되어 있다.     

 

둘째로 文字(문자)를 使用(사용)한 後(후)에는 거의 正確(정확)하게 記錄(기록)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記錄(기록) 當時(당시) 筆者(필자)의 偏見(편견)이나 執權者(집권자)의 壓力(압력) 等(등) 物理的作用(물리적 작용)에 依(의)하여 그릇 記述(기술)할 수도 있고 政權(정권)의 交替(교체) 또는 國家(국가)의 變革(변혁)으로 因(인)하여 記錄(기록) 當時(당시)의 現實(현실)과 政權(정권)을 美化(미화)하기 위하여 事實(사실)을 歪曲(왜곡) 記述(기술)함으로서 訛傳(와전)되는 事例(사례)는 흔히 볼 수 있다.  

 

우리 慶李(경이)의 失傳上系(실전상계)는 新羅時代(신라시대) 千年間(천년간)의 世系(세계)가 失傳(실전)되고 있으니 始祖(시조)가 陽山村長(양산촌장)이고 諱(휘)는 謁平(알평)이요.

 

新羅建國(신라 건국) 當時(당시) 六村長會議(6촌장회의)를 主宰(주재)하셨고 儒理王九年(유리왕 9년. 西紀三十二年서기32년) 李(이)로 賜姓(사성)받은 事實(사실)은 三國史記(삼국사기)에도 三國遺事(삼국유사)에도 또한 其他(기타) 여러 文獻(문헌)에도 明白(명백)히 記錄(기록)되어 있다.

 

謁平(알평) 始祖以後(시조이후) 遠代孫(원대손) 蘇判公(소판공) 諱 居明(휘 거명)까지 代數(대수)는 물론이고 先代祖(선대조)의 諱字(휘자)까지도 알 길이 없으니 그러기에 失傳世系(실전세계)라 하고 있다.
 

李朝中葉(이조 중엽)에 이르러 各姓氏(각 성씨)들이 族譜(족보)를 刊行(간행)하였는데 우리 慶李(경이)도 一六一三年頃(1613년경)  光陽縣監(광양현감) 宗彦先生(종언 선생)께서 同宗契(동종계)를 創設(창설)하였으니 白沙(백사) 恒福先生(항복 선생)께서 쓰신 序文(서문)만 전해 올뿐이며 다음해인 一六一四年(1614년)에 西溪(서계) 得胤先生(득윤 선생)이 手抄(수초)하였다는 單券譜(단권보)가 現在(현재) 淸州(청주) 居住宗人(거주 종인)이 所藏(소장)하고 있다고 하나 알 길이 없다.

 

其後(기후)에 發刊(발간)된 甲子譜(갑자보. 一六八四年)와 戊辰譜(무진보. 一七四八年) 그리고 甲戌譜(갑술보. 一八一四年)를 甲戊甲三大譜(갑무갑 3대보)라 하고 우리 慶李(경이)의 根幹譜(근간보)가 되고 있다.

 

其後(기후) 十九世紀末(19세기말)까지 어느 族譜(족보)에도 失傳世系(실전세계)는 나타나지 않던 中(중) 처음으로 言及(언급)된 것은 一八六八年戊辰刊(1868년 무진간) 白沙派派譜(백사파 파보) 乾坤二券(건곤 2권) 中(중) 坤券末(곤권 말)에 橘山裕元先生(귤산 유원 선생)이 쓰신 跋文(발문)에


『謹按自及梁大人至蘇判公失傳殆千禩而京騰傳贋系二十八代官制與三韓有異非實跡也審矣此傳何異於江右戴氏本以復古而適以亂俗者歟裕元識(근안 자급량대인 지소판공 실전 태천 사이경등전안계 28대 관제 여삼한 유이비실적야 심의 차전하이 어강우대씨본 이복고이 적이란속자여 유원식)


- 삼가 안찰하건대 급량부 대인으로부터 소판공에 이르기까지 실전한지가 천년이 되었다.

 

그런데 서경(현재 평양)에서 바르지 못한 상계 二十八代를 등초하여 왔는데 관제가 삼한(三韓)과 더불어 다름이 있으니 실적이 아님이 틀림없다.


 이것이 어찌 강우대씨의 근본을 복고하려한다고 마침내 세속을 어지럽게한 자와 다르리오.  


유원(裕元)은 기록한다. -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 記錄(기록)된 二十八代(28대)의 失傳世系(실전세계)가 傳(전)해지지 않고 있어 알 수 없었던 것이 最近(최근)에 發見(발견)되어 詳察(상찰)한바  新羅(신라) 官職(관직)이 아닌 高麗(고려) 또는 李朝時代(이조시대)의 것일 뿐 아니라 序文(서문) 四面(4면)에 東翼(동익)이 蘇判公(소판공) 三十世孫(30세손)으로 되어 있는데 凡例(범례)에는 悅軒公(열헌공) 二十二世孫(22세손) 東翼(동익)이라 하였으니 七世(7세)의 差異(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凡例(범례) 처음에 

『戊譜之後殆至六十七年各派子姓繁衍今刊派譜第次追錄(무보지후 태지육십칠년 각파 자성번연 금간 파보제차추록)

- 一八一四年 족보가 나온 후 六十七년이 되었는데 각파의 자손이 번창하였으므로 이제 파보를 간행하여 차례로 추록한다.라고 하였으니 一八八一年(1881년)에 發刊(발간)했다고 보는데 序文(서문)에는 '崇禎紀元後五丁丑三月下澣雲仍相東-全名大根-謹追序(숭정기원후 오정축삼월하한 운잉상동-전명 대근-근추서)라고 하였으니 一八七七年(1877년)이 되고 '戊寅秋八月豊德東江津-今開豊郡東南端(무인추팔월 풍덕동강진-금개풍군 동남단)'에서 乾坤譜二券(건곤보 2권)을 얻었다 하였으니 一八七八年(1878년)에 該當(해당)된다.
 

그리고 第五面(제 5면)에 記錄(기록)되기를 皇考之孫世雨(황고지손 세우)라 하였고 本人(본인)은 時榮(시영)이라 하였으니 大同行列(대동 항렬)로 볼 때 아버지의 孫子(손자)가 雨行(우항)이면 本人(본인)은 圭行(규항)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以上(이상) 列記(열기)한 바로 볼 때 全然(전연) 前後年代(전후 연대)가 相反(상반)될 뿐 아니라 行字(항자)조차 符合(부합)되지 않는다.
 

더욱이 一八七七年(1877년) 丁丑年(정축년) 序文(서문)에 一八七O年(1870년) 庚午派譜(무오파보)에 記錄(기록)했다고 하였으니 失傳世系(실전세계)가 發見(발견)되기 八年前(8년전)에 派譜(파보)에 登載(등재)하였다는 것은 實(실)로 語不成說(어불성설)이다. 

 

다음으로 三十五世失傳世系(35세 실전세계)라 하여 說往說來(설왕설래)되고 있는 것을 細密(세밀)히 探察(탐찰)한바 그 始發(시발)을 光武八年(광무8년. 一九O四年) 甲辰(갑진)으로부터라 볼 수 있다.
 

그것은 三十五世(35세)로 된 失傳世系(실전세계)가 十九世紀末(19세기말)까지 全然(전연) 記錄(기록)을 찾아 볼 수 없고 慶山郡守(경산군수) 在職中(재직중)에 啓弼氏(계필씨)가 쓴 敍述(서술)을 보면(光武八年甲辰發刊 광무8년 갑진 발간)

『後孫啓弼壬寅夏適守是郡宗人相駿春雨奉舊刊一本曰我鼻祖瓢巖先生以下至蘇判公以上三十五代代系卷樣今旣O弊不容重譜云云其在追慕曷不殫誠乃合議修繕不日告訖噫甲戌譜刊於是郡此譜又於是郡一地再刊恐非偶然遂爲之謹叙 正三品通政大夫時慶山郡守啓弼記(후손 계필 임인하 적수시군 종인 상준 춘우 봉구간 1본 왈 아비조 표암선생이하 지소판공이상 35대대계 권양금기O폐불용 중보운운 기재추모 알불단성 내합의 수선불일고걸억 갑술보간어시군 차보우어시군 일지재간공비우연 수위지근서 정삼품통정대부시경산군수계필기)


- 후손 계필이 壬寅(임인. 一九O二年) 여름에 마침내 이 고을 군수로 왔는데 일가사람 상준, 춘우가 옛날 간행본 1권을 받들고 와서 말하기를 "우리 시조 표암선생이하 소판공이상 三十五代의 대계가 써 있는데 책이 헐고 좀벌레가 먹어 다시 간행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으니 그 추모함에 있어 어찌 성력을 다하지 않으리오"

이에 수선하기로 합의하여 오래지 않아 완성되었다.

 

아! 갑술보(一八一四年)도 이 고을에서 간행하고 이 족보도 또 이 고을에서 간행하였으니 한 고을에서 두 번 발간함이 우연한 일이 아닌가 싶다.

 

드디어 삼가 서술한다.』라고 했다.

 

※ 一九O二年(1902년)부터 一九O六年(1906년)까지 四年間(4년간) 慶山郡守(경산군수) 在職(재직)

 

다음으로 大田所在(대전 소재) 譜典出版社(보전 출판사)에서 發行(발행)한 慶州李氏戊午譜(경주이씨 무오보一九七八年) 本文(본문) 五面(5면)을 보면 失傳上系(실전 상계)가 약 一五O年(150년) 前(전)쯤 分籍宗(분적종)인 陜川李氏(합천이씨) 家譜(가보)에서 蘇判公(소판공)의 上系(상계)에 관한 기록이 發見(발견)됨으로서 始祖(시조) 諱謁平(휘 알평)에서 中始祖(중시조) 蘇判公(소판공)까지의 世系(세계)가 明白(명백)히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蘇判公(소판공)은 始祖(시조)로부터 三十六世孫(36세손)이 된다고 하였고 或(혹) 慶州李氏(경주이씨)의 小極的(소극적)인 派譜(파보)나 地域的(지역적)인 偏譜(편보)에도 姓氏大觀(성씨대관)과 같은 內容(내용)으로 記錄(기록)된 바 있다. 
 

그리고 分籍宗(분적종)인 陜川李氏(합천이씨) 世譜(세보)에는 鎭川(진천)에 살던 慶州李氏后(경이씨 후) 李學榮氏(이학영씨)가 乙酉(을유) 七月(7월)에 奏文使(주문사)로 北京(북경)에 가다가 路邊(노변)에서 慶州李氏(경주이씨)의 碑碣(비갈)이 山傍(산방)에 서 있음을 보고 의아스러워 近處(근처)에 사는 同宗人(동종인)을 찾아가 물어 본 즉 대답하기를

 

'本人(본인)도 朝鮮國(조선국) 益齋(익재) 齊賢(제현) 先生(선생)의 血孫(혈손)으로 貴國王(귀국왕) 末(말)에 이 땅에 들어와 산다' 하기에 다시 묻기를  '譜(보)가 있느냐' 하였더니 '있다' 하여 五日間(5일간)을 더 머무르며 祖先(조선)의 失傳系(실전계)를 찾아 唐紙板刻(당지판각)으로 된 譜牒(보첩) 一卷(1권)을 받들고 本國(본국)에 돌아와 弘文館都承旨(홍문관 도승지)인 全州(전주) 后(후) 李仁明(이인명)에게 말하였더니 李仁明(이인명)이 撰(찬)하여 進啓(진계)하니 王(왕)이 允許(윤허)하기를

"失傳(실전)이 萬姓中(만성 중)에 或(혹) 많이 있으되 多幸(다행)히 失系(실계)를 찾았으니 더욱 多幸(다행)한 일이다.


다시 譜(보)에 繼承(계승)할 것이며 入北(입북)한 李學榮(이학영)에게 別副直營(별부직영)하여 泰陵(태를)에 擧行(거행)할 것은 *直副向事(직부향사) 케 하라" 하시었다.(* 直副向事(직부향사) 卽赴向事(즉부향사)


陜川李氏(합천이씨) 壬申大譜時(임신대보. 一九三二年)에 나열하여 編次(편차)한 故(고)로 記錄(기록)을 傳(전)한다 라고 되어 있는데 살피건데 姓氏大觀(성씨대관)의 內容(내용)과 慶州李氏(경주이씨) 小極的(소극적)인 派譜(파보) 및 地域偏譜(지역편보)의 內容(내용)이 相左(상좌)될 뿐 아니라 慶州李氏(경주이씨)에 鎭川居(친천거) 李學榮(이학영)이란 사람과 全州人(전주인) 李仁明(이인명)이란 사람이 李朝史中(이조사 중)  國朝榜目(국조방목), 司馬榜目(사마방목), 國朝實錄等(국조실록 등) 여러 書籍(서적)에도 考證(고증)이 없으므로 不可信不可疑(불가신불가의)라 別記(별기)하여 後日(후일)에 밝혀 주기를 바란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陜川李氏(합천이씨) 族譜(족보)를 探知(탐지)한 결과 다음과 같이 發刊(발간)되었다. 

 

1. 中廟己丑譜(중묘 기축보. 一五二九年1529년). 一冊(1책) 後孫草溪郡守福老序(후손 초계군수 복로서)
1. 英廟甲戌譜(영묘 갑술보. 一七五四年1754년). 五冊(5책) 外裔正言咸平李鳳壽序(외예정언함평이봉수서)
1. 純廟辛酉譜(순묘 신유보. 一八O一年1801년). 十一冊(11책) 後孫致儉序(후손 치검서)
1. 高宗丙子譜(고종 병자보. 一八七六年1876년). 十八冊(18책) 吏曹判書廣陵李宣翼序(이조판서광릉이선익서
1. 高宗丁未譜(고종정미보. 一九O七年1907년). 十三冊913책) 後孫敦寧府都正埰壽序(후손돈령부도정채수서)

 

李朝末(이조말)까지 以上9이상) 五回(5회) 發刊9발간)했으나 失傳(실전) 先系(선계)를 登載(등재)한 事實(사실)이 없고 一九三二年(1932년) 壬申大譜時(임신대보시)에 始祖(시조) 諱 謁平(휘 알평) 以下(이하) 世系原流 圓圖(세계원류원도)를 싣고

「鎭川居慶州后李學榮乙酉七月日以奏文司入北京路邊見慶州李氏山榜碑碣疑惑滋甚往訪同宗使通譯人問來歷則曰玆土居人本以朝鮮國益齋公諱齊賢之血孫貴國王末入北云更問有譜乎曰有也留連五日言其祖先之失傳得唐紙板刻譜牒一卷奉還本國其言于弘文館都承旨全州人李仁明矣仁明撰進啓答 允曰失傳萬姓中或多有之幸得失世尤極爲幸更譜繼承而入北李學榮別副直營擧行泰陵卽赴向事今修大同譜時矑列編次似有末妥故別式圓圖付于編首+卑竣後巧」라고 記錄(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內容내용)의 世系(세계)가 一九六八年(1968년) 戊申年(무신년) 刊行(간행) 江陽(강양) 陜川李氏(합천이씨) 系譜(계보) 全(전)에 '始祖(시조) 瓢巖公(표암공) 諱(휘) 謁平(알평) 以下(이하) 世系源流譜(세계원류보)'라 하여 元編十四(원편 14)에 실리고 上系(상계)는 今(금) 大同譜時(대동보시.一九六八年1968년)) 大田出版所(대전 출판소)에서 '慶州李氏 益齋公派譜(경주이씨 익재공파보)와 平昌李氏世譜(평창이씨 세보)에 依據(의거)함이라' 라고 되어 있다.

 

以上(이상) 內容(내용)을 詳考9상고)한 즉 麗朝(려조)와 李朝時(이조시)에 元(원). 明(명). 淸(청)나라 使臣(사신)으로는 定期的(정기적)으로 冬至使(동지사)와 正朝使(정조사- 正朔使정삭사. 賀正使하정사)를 보냈고, 正朝使(정조사)는 冬至使(동지사)가 兼(겸)하였는데 正使(정사)는 三公六卿[3공6경. 高麗朝(고려조)의 三公(삼공)은 司馬(사마) 司空(사공) 司徒(사도)를 稱(칭)칭했고 李朝時(이조시)에는 三政丞(삼정승)을 말했으며, 六卿(6경)은 六曹(6조)의 判書(판서)를 말함.]이 되었으며 副使(부사)와 書狀官(서장관)이 隨行(수행)했다.

定期的(정기적)으로 가는 使臣外(사신외)에 奏請使(주청사). 奏聞使(주문사)가 있었는데 李朝實錄(이조실록)을 보면 奏聞使(주문사)가 十回(10회)를 갔던 事實(사실)이 있다.

 

그러나 本文(본문)에 있는 奏文使(주문사)는 實錄(실록)에 記錄(기록)이 없고 또한 弘文館(홍문관)에는 承旨(승지)나 都承旨(도승지)가 없고 承政院(승정원)에만 있다. 
 

그리고 前記(전기) 李仁明(이인명)은 李朝實錄(이조실록) 一七五O年(1750년)부터 一七七O年(1770년) 사이에 四回(4회) 나타나기는 하나 弘文館(홍문관)에 있지 않았고 李學榮(이학영) 亦是(역시)  鎭川(진천)에 있었던 것을 確認(확인)할 수 없으며 使臣(사신) 歷職(역직)을 하였다면 마땅히 入譜(입보) 하였을 것이어늘 譜牒(보첩)에 記錄(기럭)이 없고 失傳系(실전계)에 羅列(나열)된 官職(관직)이 新羅時代(신라시대) 官職(관직)과 相異(상이)하니 믿을 수 없다고 아니할 수 없다. 
 

失傳世系(실전세계)가 처음으로 登載(등재)된 것이 壬申大譜(임신대보. 一九三二年1932년)였으니 大田(대전)서 刊行(간행)된 慶州李 氏(경주이씨) 戊午譜(무오보)에 一五O餘年(150여년) 前(전) 陜川李氏(합천이씨) 家譜(가보)에서 發見(발견)되었다는 것은 事實(사실)과는 相當(상당)한 差異(차이)가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一二O年前(120년 전)에 裕元(유원) 先生(선생)께서 二十八代失系(28대 실계)를 明示9명시)하였음을 볼 때 그 當時(당시)에 三十五世 失傳世系(35세 실전세계)가 없었음을 알 수 있으며, 麗朝末(려조 말)에 遼東半島(요동반도)로 移居(이거)한 益齋(익재) 血孫(혈손)이 失傳世系(실전세계)를 所藏(소장)하고 있었다면 本國(본국) 後孫(후손)이 모를 까닭이 없었을 것이어늘 甲戌甲(갑무갑) 三大譜(3대보)는 勿論(물론)이고 各(각) 派譜(파보)에 조차 世紀末(세기 말)까지 한 곳도 나타나지 않음을 보면 一九O四年(1904년) 慶山郡守(경산 군수) 啓弼(계필)선생이 編刊(편간)한 것이 아닌가 疑惑(의혹)도 되는 바이며 現在(현재)까지 나타난 記錄(기록)을 推想(추상)할 때 結論(결론)은 事實(사실)이 아니라고 볼 수밖에 없으나 兩失傳世系(양대 실전계)를 그대로 登載(등재)하여 參考(참고)에 供(공)하는 바이며 多幸(다행)이 後日(후일)에 考證(고증)이 發見(발견)되기를 願(원)하는 바이다. 


(참고) 


*이로써 '28대 실전세계'와 '35대 실전세계'는 여러 가지 모순되고 사실에 어긋나는 점이 많아 세계(世系)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다만 참고로 할 뿐이다.  

 

O. 많은 종친님들이 가장 접하기 쉬운 카페에서 지식을 습득하는데 일부 카페 운영자나 보학에 밝다는 종친님들이 잘못된 지도를 하고 있다.

 

실례로 중시조 40세 "희(熙). 형(炯)'항렬을 '시조 75세'로 설명하고 있는 경향이 많은데 위의 글에서 '35대로 된 실전세계' 는 사실적이지 않은 계대라고 하였는데 이를 활용하여 시조세수를 헤아려 읽는 것은 잘못이다. 

 

계대(系代)가 정확한 '중시조세수'로 읽는 것이 정확하다.


실전세계의 고찰(한글)


과거의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하여 후세에 계전(繼傳)한다는 것이 심히 어렵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이며 모든 민족사나 국가의 변천 역시 사실 그대로 전해지지 않음으로서 역사학자들의 논쟁의 원인이 되고 때로는 고증(考證)에 의거하여 바르게 수정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그 이유를 문자가 있기 이전과 이후로 대별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문자를 사용하기 이전은 구전(口傳)과 유적(遺跡) 등으로 유전되는 것을 후세에 성문화(成文化)하였으니 우리나라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만 하더라도 신라 천년의 역사를 필자 김부식(金富軾)과 일연(一然) 승려가 중국문헌도 짐작하면서 기록정리했으나 그 내용이 일치하지 않으니 그 일예(一例)로서 6촌장의 경우 삼국사기에는 북(北)에서 내려온 유민(遺民)으로 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천강설(天降說)로 되어 있다.     

 

둘째로 문자를 사용한 후에는 거의 정확하게 기록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기록 당시 필자의 편견이나 집권자의 압력 등 물리적 작용에 의하여 그릇 기술할 수도 있고 정권의 교체 또는 국가의 변혁으로 인하여 기록 당시의 현실과 정권을 미화하기 위하여 사실을 왜곡 기술함으로서 와전되는 사례는 흔히 볼 수 있다.  

 

우리 경이(慶李)의 실전상계(失傳上系)는 신라시대 천년간의 세계(世系)가 실전되고 있으니 시조가 양산촌장(梁山村長)이고 휘(諱)는 알평(謁平)이요.

 

신라 건국 당시 6촌장회의(六村長會議)를 주재하셨고 유리왕 9년. 서기 32년 이(李)로 사성(賜姓)받은 사실은 삼국사기에도 삼국유사에도 또한 기타 여러 문헌에도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알평 시조이후 원대손(遠代孫) 소판공(蘇判公) 휘 거명(諱居明)까지 대수는 물론이고 선대조(先代祖)의 휘자(諱字)까지도 알 길이 없으니 그러기에 실전세계(失傳世系)라 하고 있다.
 

이조 중엽에 이르러 각 성씨들이 족보를 간행하였는데 우리 경이(慶李)도 1613년경 광양현감(光陽縣監) 종언(宗彦)께서 동종계(同宗契)를 창설하였으니 백사(白沙) 항복(恒福) 선생께서 쓰신 서문(序文)만 전해 올뿐이며 다음해인 1614년에 서계(西溪) 득윤(得胤) 선생이 수초(手抄)하였다는 단권보(單券譜가 현재 청주 거주 종인이 소장하고 있다고 하나 알 길이 없다.

 

그 후에 발간된 갑자보(甲子譜. 1684년)와 무진보(戊辰譜. 1748년) 그리고 갑술보(甲戌譜. 1814년)를 갑무갑 3대보(甲戊甲三大譜)라 하고 우리 경이(慶李)의 근간보(根幹譜)가 되고 있다.

 

그 후 19세기말까지 어느 족보에도 실전세계는 나타나지 않던 중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868년 무진간(戊辰間) 백사파(白沙派) 파보(派譜) 건곤(乾坤) 2권 중 곤권 말(坤券末)에 귤산(橘山) 유원(裕元) 선생이 쓰신 발문(跋文에


『謹按自及梁大人至蘇判公失傳殆千禩而京騰傳贋系二十八代官制與三韓有異非實跡也審矣此傳何異於江右戴氏本以復古而適以亂俗者歟裕元識(근안 자급량대인 지소판공 실전 태천 사이경등전안계 28대 관제 여삼한 유이비실적야 심의 차전하이 어강우대씨본 이복고이 적이란속자여 유원식)


- 삼가 안찰하건대 급량부 대인으로부터 소판공에 이르기까지 실전한지가 천년이 되었다.

 

그런데 서경(현재 평양)에서 바르지 못한 상계 二十八代를 등초하여 왔는데 관제가 삼한과 더불어 다름이 있으니 실적이 아님이 틀림없다.


 이것이 어찌 강우대씨의 근본을 복고하려한다고 마침내 세속을 어지럽게한 자와 다르리오.  


유원은 기록한다. -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 기록된 28대의 실전세계가 전해지지 않고 있어 알 수 없었던 것이 최근에 발견되어 상찰(詳察)한바  신라 관직이 아닌 고려 또는 이조시대의 것일 뿐 아니라 서문(序文) 4면에 동익(東翼)이 소판공 30세손으로 되어 있는데 범례(凡例)에는 열헌공(悅軒公) 22세손 동익(東翼)이라 하였으니 7세의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범례 처음에 

『戊譜之後殆至六十七年各派子姓繁衍今刊派譜第次追錄(무보지후 태지육십칠년 각파 자성번연 금간 파보제차추록)

- 1814년 족보가 나온 후 67년이 되었는데 각파의 자손이 번창하였으므로 이제 파보를 간행하여 차례로 추록한다.라고 하였으니 1881년에 발간했다고 보는데 서문에는 '崇禎紀元後五丁丑三月下澣雲仍相東-全名大根-謹追序(숭정기원후 오정축삼월하한 운잉상동-전명 대근-근추서)라고 하였으니 1877년이 되고 '戊寅秋八月豊德東江津-今開豊郡東南端(무인추팔월 풍덕동강진-금개풍군 동남단)'에서 건곤보 2권을 얻었다 하였으니 1878년에 해당된다.
 

그리고 제 5면에 기록되기를 皇考之孫世雨(황고지손 세우)라 하였고 본인은 시영(時榮)이라 하였으니 대동 항렬(大同行列)로 볼 때 아버지의 손자가 우항(雨行)이면 본인은 규항(圭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상 열기(列記)한 바로 볼 때 전연 전후 연대가 상반될 뿐 아니라 항자(行字)조차 부합되지 않는다.
 

더욱이 1877년 정축년(丁丑年) 서문(序文)에 1870년 무오파보(戊午派譜)에 기록했다고 하였으니 실전세계가 발견되기 8년전에 파보에 등재하였다는 것은 실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다음으로 35세 실전세계라 하여 설왕설래(說往說來)되고 있는 것을 세밀히 탐찰(探察)한바 그 시발(始發)을 광무8년(光武八年. 1904년) 갑진(甲辰)으로부터라 볼 수 있다.
 

그것은 35세로 된 실전세계가 19세기말까지 전연 기록을 찾아 볼 수 없고 경산군수(慶山郡守) 재직중에 계필씨(啓弼氏)가 쓴 서술(敍述)을 보면(광무8년 갑진 발간)

『後孫啓弼壬寅夏適守是郡宗人相駿春雨奉舊刊一本曰我鼻祖瓢巖先生以下至蘇判公以上三十五代代系卷樣今旣O弊不容重譜云云其在追慕曷不殫誠乃合議修繕不日告訖噫甲戌譜刊於是郡此譜又於是郡一地再刊恐非偶然遂爲之謹叙 正三品通政大夫時慶山郡守啓弼記(후손 계필 임인하 적수시군 종인 상준 춘우 봉구간 1본 왈 아비조 표암선생이하 지소판공이상 35대대계 권양금기O폐불용 중보운운 기재추모 알불단성 내합의 수선불일고걸억 갑술보간어시군 차보우어시군 일지재간공비우연 수위지근서 정삼품통정대부시경산군수계필기)


- 후손 계필이 임인(壬寅. 1902년) 여름에 마침내 이 고을 군수로 왔는데 일가사람 상준, 춘우가 옛날 간행본 1권을 받들고 와서 말하기를 "우리 시조 표암선생이하 소판공이상 35대의 대계가 써 있는데 책이 헐고 좀벌레가 먹어 다시 간행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으니 그 추모함에 있어 어찌 성력을 다하지 않으리오"

이에 수선하기로 합의하여 오래지 않아 완성되었다.

 

아! 갑술보(1814년)도 이 고을에서 간행하고 이 족보도 또 이 고을에서 간행하였으니 한 고을에서 두 번 발간함이 우연한 일이 아닌가 싶다.

 

드디어 삼가 서술한다.』라고 했다.

 

※ 1902년부터 1906년까지 4년간 경산군수(慶山郡守) 재직

 

다음으로 대전(大田) 소재 보전출판사(譜典出版社)에서 발행한 경주이씨 무오보(慶州李氏戊午譜. 1978년) 본문 5면을 보면 실전 상계가 약 150년 전쯤 분적종(分籍宗)인 합천이씨(陜川李氏) 가보에서 소판공의 상계(上系)에 관한 기록이 발견됨으로서 시조 휘 알평(諱謁平)에서 중시조 소판공(蘇判公)까지의 세계(世系)가 명백히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소판공은 시조로부터 36세손이 된다고 하였고 혹 경주이씨의 소극적인 파보나 지역적인 편보(偏譜)에도 성씨대관(姓氏大觀)과 같은 내용으로 기록된 바 있다. 
 

그리고 분적종인 합천이씨 세보(世譜)에는 진천(鎭川)에 살던 경주이씨 후 이학영씨(李學榮氏)가 을유(乙酉) 7월에 주문사(奏文使)로 북경(北京)에 가다가 노변에서 경주이씨의 비갈(碑碣)이 산방(山傍)에 서 있음을 보고 의아스러워 근처에 사는 동종인(同宗人)을 찾아가 물어 본 즉 대답하기를

 

'본인도 조선국(朝鮮國) 익재(益齋) 제현(齊賢) 선생의 혈손(血孫)으로 귀국왕(貴國王) 말(末)에 이 땅에 들어와 산다' 하기에 다시 묻기를  '보(譜)가 있느냐' 하였더니 '있다' 하여 5일간을 더 머무르며 조선(祖先)의 실전계(失傳系)를 찾아 당지판각(唐紙板刻)으로 된 보첩(譜牒) 1권을 받들고 본국에 돌아와 홍문관(弘文館) 도승지(都承旨)인 전주 후(全州后) 이인명(李仁明)에게 말하였더니 이인명이 찬(撰)하여 진계(進啓)하니 왕이 윤허(允許)하기를

"실전(失傳)이 만성 중(萬姓中)에 혹 많이 있으되 다행히 실계(失系)를 찾았으니 더욱 다행한 일이다.


다시 보(譜)에 계승할 것이며 입북(入北)한 이학영(李學榮)에게 별부직영(別副直營)하여 태릉(泰陵)에 거행할 것은 *직부향사(直副向事) 케 하라" 하시었다.[* 直副向事(직부향사) 卽赴向事(즉부향사)]


합천이씨(陜川李氏) 임신대보시(壬申大譜時. 1932년)에 나열하여 편차(編次)한 고로 기록을 전한다 라고 되어 있는데 살피건데 성씨대관(姓氏大觀)의 내용과 경주이씨 소극적인 파보 및 지역편보(地域偏譜)의 내용이 상좌(相左)될 뿐 아니라 경주이씨에 진천거(鎭川居) 이학영(李學榮)이란 사람과 전주인(全州人) 이인명(李仁明)이란 사람이 이조사 중(李朝史中)  국조방목(國朝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국조실록(國朝實錄) 등) 여러 서적에도 고증(考證)이 없으므로 불가신불가의(不可信不可疑)라 별기하여 후일에 밝혀 주기를 바란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합천이씨 족보를 탐지한 결과 다음과 같이 발간되었다. 

 

1. 중묘 기축보(中廟己丑譜. 1529년). 1책 후손 초계 군수 복로서(後孫草溪郡守福老序)

1. 영묘 갑술보(英廟甲戌譜 1754년). 5책 외손 후예 정언 함평 이봉수서(外裔正言咸平李鳳壽序)
1. 순묘 신유보(純廟辛酉譜. 1801년). 11책 후손 치검서(後孫致儉序)

1. 고종 병자보(高宗丙子譜. 1876년). 18책 이조판서 광릉 이선익서(吏曹判書廣陵李宣翼序)
1. 고종정미보(高宗丁未譜. 1907년). 13책 후손 돈령부 도정 채수서(後孫敦寧府都正埰壽序)

 

이조 말(李朝末)까지 이상 5회 발간했으나 실전 선계(先系)를 등재한 사실이 없고 1932년 임신대보시(壬申大譜時)에 시조 휘 알평(諱謁平) 이하 세계원류원도(世系原流 圓圖)를 싣고

「鎭川居慶州后李學榮乙酉七月日以奏文司入北京路邊見慶州李氏山榜碑碣疑惑滋甚往訪同宗使通譯人問來歷則曰玆土居人本以朝鮮國益齋公諱齊賢之血孫貴國王末入北云更問有譜乎曰有也留連五日言其祖先之失傳得唐紙板刻譜牒一卷奉還本國其言于弘文館都承旨全州人李仁明矣仁明撰進啓答 允曰失傳萬姓中或多有之幸得失世尤極爲幸更譜繼承而入北李學榮別副直營擧行泰陵卽赴向事今修大同譜時矑列編次似有末妥故別式圓圖付于編首+卑竣後巧」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내용의 세계(世系)가 1968년 무신년(戊申年) 간행 강양(江陽) 합천이씨(陜川李氏) 계보 전(全)에 '시조 표암공(瓢巖公) 휘 알평(諱謁平) 이하 세게원류보(世系源流譜)'라 하여 원편(元編) 14에 실리고 상계(上系)는 지금 대동보 발간시(1968년) 대전출판소에서 '경주이씨 익재공파보(慶州李氏 益齋公派譜)와 평창이씨 세보(平昌李氏世譜)에 의거함이라' 라고 되어 있다.

 

이상 내용을 상고(詳考)한 즉 려조(麗朝)와 이조시(李朝時)에 원(元). 명(明). 청(淸)나라 사신으로는 정기적으로 동지사(冬至使)와 정조사(正朝使- 正朔使정삭사. 賀正使하정사)를 보냈고, 정조사(正朝使)는 동지사(冬至使)가 겸하였는데 정사(正使)는 3공6공(三公六卿 - 고려조의 3공은 사마(司馬) 사공(司空) 사도(司徒)를 칭했고 이조시(李朝時)에는 3정승을 말했으며, 6경(六卿)은 6조(六曹)의 판서를 말함.]이 되었으며 부사와 서장관이 수행했다.


정기적으로 가는 사신 외에 주청사(奏請使). 주문사(奏聞使)가 있었는데 이조실록(李朝實錄)을 보면 주문사(奏聞使)가 10회를 갔던 사실이 있다.

 

그러나 본문에 있는 주문사는 실록에 기록이 없고 또한 홍문관(弘文館)에는 승지(承旨)나 도승지(都承旨)가 없고 승정원(承政院)에만 있다. 
 

그리고 전기(前記) 이인명(李仁明)은 이조실록(李朝實錄) 1750년부터 1770년 사이에 4회 나타나기는 하나 홍문관(弘文館)에 있지 않았고 이학영(李學榮) 역시 진천(鎭川)에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없으며 사신 역직(歷職)을 하였다면 마땅히 입보(入譜) 하였을 것이어늘 보첩(譜牒)에 기록이 없고 실전계(失傳系)에 나열된 관직이 신라시대 관직과 상이하니 믿을 수 없다고 아니할 수 없다. 
 

실전세계(失傳世系)가 처음으로 등재된 것이 임신대보(壬申大譜. 1932년)였으니 대전서 간행된 경주이씨 모오보(戊午譜)에 150여년 전 합천이씨 가보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사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120년 전에 유원(裕元) 선생께서 28대 실계(失系)를 명시하였음을 볼 때 그 당시에 '35세 실전세계'가 없었음을 알 수 있으며, 려조 말(麗朝末)에 요동반도(遼東半島)로 이거한 익재(益齋) 혈손이 실전세계를 소장하고 있었다면 본국 후손이 모를 까닭이 없었을 것이어늘 갑무갑(甲戌甲) 삼대보(三大譜)는 물론이고 각 파보에 조차 세기 말(世紀末)까지 한 곳도 나타나지 않음을 보면 1904년 경산군수(慶山郡守) 계필(啓弼)선생이 편간한 것이 아닌가 의혹도 되는 바이며 현재까지 나타난 기록을 추상할 때 결론은 사실이 아니라고 볼 수밖에 없으나 양 실전계를 그대로 등재하여 참고에 공(供)하는 바이며 다행이 후일에 고증이 발견되기를 원(願)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