失傳世系의 考察

'실전 세계(失傳世系)의 고찰(考察)' 해설

녹전 이이록 2009. 2. 22. 17:27

● '실전 세계(失傳世系)의 고찰(考察)' 해설

 

 

* 대종보 총론 287-292쪽에 실린 글로  역문한 한글 문장도 어려운 어휘로 말미암아 이해가 곤란함으로 이를 좀 더 알기 쉽게 풀어 씀.

* ○은 '실전세계의 고찰' 내용중 주요 항목이고 [  ]은 본문. (의견). - . * 는 풀어쓴 글임.

 

 

○ '실전 세계(失傳世系)의 고찰(考察)' 의 지은이

 

대종보 총편 287∼293 페이지 사이에 한글과 한자 혼용으로 글쓴이는 미상(未詳)이다.    

 

경주 이씨 여러 보학자들의 조사분석 연구를 찬(撰)한 글이다.
 

○ 6촌장 출현에 대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의 차이


6촌장(六村長) 출현의 경우

 

삼국사기는 북에서 내려온 유민으로 기록하고 삼국유사에는 천강설(天降設)로 기록하여 차이가 있다.

 

표암(瓢巖)의 탄강지(誕降地)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

 

 

※ 아래의 처음 본문 앞의 글은 '문자 이전과 이후의 기록에 대한 글'로 이는 모두 생략함.

 

 

○ 시조(始祖)에 대한 기록

 

 

[우리 경이(慶李)의 실전 상계(失傳上系)는 신라시대 *약 천년간의 세계(世系)가 실전 되고 있으나 시조가 양산촌장(楊山村長)으로 휘는 알평(謁平)이요,

 

신라 건국 당시 6촌장회의(六村長會議)를 주재하였고, 유리왕(儒理王) 9년(서기32년)에 이(李)씨 성(姓)을 하사(下賜) 받은 사실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와 또한 기타 여러 문헌에도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 우리 경주 이씨의 실전(失傳)된 윗대의 계대(系代)는 신라 초부터 신라 말까지 약 1000년 간의 세계(世系)가 실전 되었으나 우리 경주 이씨의 시조(始祖)님이 신라 6촌 중의 하나인 양산촌(楊山村)의 촌장(村長)으로 휘는 알평(謁平)이다.

 

신라 건국 당시 6촌장회의(六村長會議)를 주재하였고 서기 32년 유리왕(儒理王)9년에 이(李)씨 성(姓)을 하사(下賜) 받은 사실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기타 여러 문헌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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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천년간- 신라건국이 서기전 57년이고 신라가 망한 해가 서기 935년으로 시조께서 유리왕으로부터 이씨 성을 사성 받은 이후와 소판공의 활동시기를 신라말경으로 보면 실전 세계를 대충 약 1000년 간으로 보나 자세히 따지면 900여 년 전후가 더 정확하다.

 

 

○ 실전세계(失傳世系)란?

 

 

[알평 시조이후 *원대손(遠代孫) 소판공(蘇判公) 휘 거명(居明)까지의 대수(代數)는 물론 선세조(先世祖)의 *휘(諱)자까지도 알 길이 없으니 그러기에 *실전세계(失傳世系)라 하고 있다.]

 

- 휘 알평 시조 이후 먼 후대의 자손인 소판공 휘 거명 까지의 대수(代數)는 물론 대대로 이어진 선조님들의 휘(諱)까지 조금도 알 길이 없으니 이러한 까닭에 이를 실전 세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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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대손(遠代孫)- 먼 후대의 자손. 자손인 것은 분명한데 천년이 지난 후에 밝혀졌으므로 원대손으로 칭한 것이다.  
* 휘(諱)- 죽은 사람의 이름을 높여 부를 때 씀.
* 대수(代數)와 휘(諱)를 실전한 이유
수 없는 전쟁과 화재와 분실. 반란 그리고 책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결여 및 보관 소흘 등으로 
* 실전세계(失傳世系)- 일정 기간동안 실전된 계통. 계대

 

 

○ 각 성씨 족보간행과 경주 이씨의 족보(族譜)간행

 

 

[이조 중엽(李朝中葉)에 이르러 각 성씨들이 족보를 간행하였다.


이에 우리 경주 이씨도 1613년경 광양현감 휘 종언(宗彦) 선생께서 *동종계(同宗禾+契)를 창설하였으니 백사(白沙) 휘 항복(恒福)선생께서 쓰신 서문(序文)만 전해 오고 있다.

 

다음해 1614년에 서계(西溪) 휘 득윤(得胤. 德胤)선생이 수초(手抄)하였다는 단권보(單券譜)가 현재 청주(淸州) 거주 종인(宗人)이 소장하고 있다고 하나 찾을 길이 없다.

 

그 후에 1684년에 발간된 갑자보(甲子譜)와 1748년 무진보(戊辰譜) 그리고 1814년 갑술보 (甲戌譜)를 갑무갑(甲戊甲) 삼대보라 하고 우리 경주 이씨의 *근간보(根幹譜)로 하고 있다.]

 

 

- 우리나라의 족보는 고려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 고려 의종(18대, 1146 ∼ 1170)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왕대종록(王代宗錄)』이 처음이다.

 

그러나『고려사』를 보면 고려 때에도 양반 귀족은 그 씨족계보를 기록하는 것을 중요시하였고, 관제(官制)로서도 종부시(宗簿寺)에서 족속 보첩을 관장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귀족 사이에는 보계를 기록 보존하는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 집안에서 사적(私的)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였으나, 1476년(성종7년)의『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가 체계적인 족보 형태를 갖춘 최초의 족보이다.

 

이후 1565년(명종20년)에는『문화유씨 가정보(文化柳氏 嘉靖譜)』가 혈족 전부를 망라하여 간행되면서 이를 표본으로 하여 명문세족에서 앞을 다투어 족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7세기 이후 여러 가문으로부터 족보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족보가 이 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간행된 족보의 대부분은 족보간행을 위해 초안을 하고 관계 자료를 충실히 보완한 뒤 간행에 착수하여 내용에 하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후의 족보들은 초안이나 관계 자료의 검토, 고증도 없이 자의적으로 간행된 것이 많았다.

 

그리하여 자의적인 수식이 가하여 졌음은 물론이며 조상을 극단적으로 미화하고, 선대의 벼슬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조작하고, 심지어 명문 집안의 족보를 사고 팔거나 훔치는 경우도 있었다.

 

 

1) 이에 우리 경주 이씨도 1613년경 광양현감 휘 종언(宗彦) 선생께서 동종계(同宗벼禾+契. 볏단 계)를 창설할 때에 동종계의 내용은 전하지 않고 백사(白沙) 휘 항복(恒福) 선생께서 쓰신 동종계(同宗禾+契)의 서문(序文)만이 전해 오고 있다.

 

백사선생의 동종계서(同宗禾+契序)는 대종보 총론 38-39페이지에 한자 원문과 역문이 올라있다. 

 

2) 다음해인 1614년에 서계(西溪) 휘 득윤(得胤. 德胤)선생이 그때 그 때 간략하게 추려 적었다는 한 권으로 된 족보가 청주(淸州) 거주 종인(宗人-촌수가 먼 일가)이 소장하고 있다고 하나 찾을 길이 없다.

 

3) 그 후에 1684년에 발간된 갑자보(甲子譜)와 1748년에 발간된 무진보(戊辰譜) 그리고 1814년에 발간된 갑술보(甲戌譜)를 갑무갑(甲戊甲) 삼대보(三大譜)라 하고 우리 경주 이씨의 가장 기본이 되는 근간보(根幹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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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종계(同宗禾+契)- 대부분 '同宗契'로 나타내었는데 실지는 백사공의 동종계는 '同宗禾+契'로 '계'자가 '契'와 '禾+契'로 글자가 틀린다.

계(契)는 모임을 나타내는 맺을 계(契)이고, 계(禾+契)는 볏단 계(禾+契)자로 볏단처럼 단단하게 묶인 일가를 뜻하는 것으로 모임이라는 뜻에서는 같은 뜻인 것 같다.

 

한 조상을 둔 문중 사람이 모이는 모임을 화수계(花樹契),
한 문중의 같은 파 자손끼리 모이는 모임을 동종계(同宗契),
조상을 받들자는 존선계(尊先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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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간보(根幹譜)- 가장 기초가 되고 근원이 되는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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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대로 된 실전세계(失傳世系)의 언급과 귤산공의 기록 

 

 

[그 후 19세기 말까지 어느 족보에도 실전 세계는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언급된 것이 1868년 무진(戊辰)년에 간행된 백사파보(白沙波派譜) *건곤(乾坤) 2권 중 곤권말(坤券末)에 *귤산공(橘山公) 휘 유원(裕元)께서 쓰신 *발문(跋文)에 나와 있다. 

 

『삼가 안찰(按察)하건대 급량부 대인(시조)으로부터 소판공(휘 거명)에 이르기까지 실전한지가 천년이 되었다.

 

그런데 서경(西京-평양)에서 바르지 못한 상계 28대를 *등초(謄抄)하여 왔는데 관제(官制)가 *삼한(三韓)과 더불어 다름이 있으니 실적(實跡)이 아님이 틀림없다.

 

유원(裕元)은 기록한다.』라고 되어 있다.]

 

 

- 갑무갑(甲戊甲) 삼대보를 우리 경주 이씨의 근간보(根幹譜)로 한 뒤부터 서기 1900년 이전까지는 어느 족보에도 실전 세계는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언급된 것이 1868년 무진(戊辰)년에 간행된 백사파보(白沙波派譜) 건(乾)권과 곤(坤)권의 2권 중 두 번째인 곤권(坤券) 끝 부분에 *귤산공(橘山公) 휘 유원(裕元)께서 쓰신 *발문(跋文)에 나와 있다. 

 

삼가 자세히 조사하여 살펴보니 *급량부 대인(시조)으로부터 소판공(휘 거명. 신라 말)에 이르기까지 실전한지가 천년이 되었다.

 

28대의 실전 세계는 서경(西京-평양)에서 발견되었다.

 

상계 28대를 원본에서 베껴 왔는데 이 상계 28대가 바르지 못한 것이다.

 

그 이유로 국가의 행정 조직 및 직제(職制)가 삼한(三韓) 즉 고구려 백제. 신라의 관제와 달라 실질적인 바른 상계가 아니다. - 라고 귤산공께서 기록을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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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곤(乾坤)- 천지(天地). 음양(陰陽). 건방(乾方)과 곤방(坤方)을 아울러 이르는 말.
예전에 두 권으로 된 책의 순서를 앞 권과 뒷 권으로 매길 때에 쓰던 말.

 

*귤산공(橘山公) 휘 유원(裕元)
귤산공 유원(1814~1888)은 중조 34세로 상서공 18세, 백사공 9대손(세손)이다.
자는 경춘(景春), 호는 귤산과 묵농,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벼슬은 1841년(헌종7)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좌의정과 영의정에 올랐다.
1880년 치사(致仕)하고 봉조하가 되었다.
1882년 전권대신으로 일본의 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나와 제물포조약에 조인하였다.
저서에 <귤산문고> <가오고략> <임하필기> <해동악부> <경주이씨 금석록> 등이 있다

 

*발문(跋文)- 책의 끝에 본문 내용의 대강이나 간행 경위에 관한 사항을 간략하게 적은 글.
*등초(謄抄)- 원본에서 베껴 옮김. ≒등기(謄記)·등사(謄寫)·등서(謄書)·등초(騰草)

 

*삼한(三韓)

- 원래 삼한은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따르면 한반도 남부의 마한, 진한, 변한을 뜻하는 말이었다.
마한, 진한, 변한이 멸망한 후 삼국인 고구려, 백제, 신라를 삼한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백성과 선비들은 계속 삼한을 고구려, 백제, 신라를 뜻하는 말로 불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를 뜻하는 말에 동국, 동방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삼한 또한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급량부 대인- 시조. 신라 3대 유리왕 때 행정조직을 개편하면서 신라 초기의 양산촌을 급량부로 고쳐 불렀는데 이후 시조를 높여 호칭한 것이다.

 

 

○ 28대 실전세계의 상찰(祥察)과 오류(誤謬)

 

 

[그러나 여기에 기록된 28대의 실전세계가 전해지지 않고 있어 알 수 없었던 것이 최근에 발견되어 이 실전세계를 *상찰(祥察)한 바

신라 관직이 아닌 고려 또는 이조시대의 것일 뿐 아니라 서문(序文) 4면에는 동익(東翼)이 소판공 30세손으로 되어 있는데 *범례(凡例)에는 열헌공 22세손이라 하여 7세의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범례 처음에

 

「1814년 갑술보 족보가 나온 후 67년이 되었는데 각파의 자손이 번창하였으므로 이제 파보를 간행하여 차례로 추록한다.」라고 하였으니 1881년에 발간했다고 보는데

서문에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5정축(丁丑)3월하한(三月下澣) 잉상동(仍相東) 전명대근(前名大根) 근추서(謹追書) 이라고 하였으니 1877년이 되며 무인(戊寅)년 가을 8월 풍덕 동강진(今開豊郡 東南端)에서 건곤보(乾坤譜) 2권을 얻었다고 하였으니 1878년에 해당된다.]

 

 

- 1868년 무진(戊辰)년에 간행된 백사파보(白沙波派譜)에 기록된 28대의 실전 세계가 전해지지 않아 알 수 없던 것이 최근(1987년 이전?)에 발견되어 이 28대로 된 실전 세계를 상세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 신라 관직명이 아닌 고려 시대나 이조시대의 것일 뿐 아니라

 

◇ 서문(序文) 4면에는 동익(東翼)이 소판공 30세손으로 되어 있는데 범례(凡例)에는 열헌공 22세손이라 하여 7세의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 이는 서문(序文)에는 휘 동익이 소판공 30세손이라 하고 범례에는 열헌공 22세손이라 하여 휘 동익이 소판공 30세손이면 열헌공이 중조 15세이니 열헌공 15세손이 되어야 하는데 열헌공 22세손으로 나타내어 7세의 차이가 난다는 뜻으로 바르지 못하다는 내용이다..

 

◇ 또한 범례 처음에 '1814년 갑술보가 발간된 후 67년이 되었는데 각파의 자손이 번창하였으므로 이제 파보를 간행하여 차례로 추가로 기록한다'라고 하였으니 1881년에 족보를 발간했다.

 

그런데 서문에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5정축(丁丑)' 이라 하였으니 이는 1877년에 해당한다. 

 

무인년 가을 8월 풍덕 동강진(豊德 東江津- 開豊郡 東南端)에서 건곤(乾坤) 2권의 파보(派譜)를 구했다고 하였으니

이는1878년이다.

 

*그러니까 최근에 발견된 28대로 된 실전 세계를 살펴보니 범례에는 1881년에 족보가 발간되었다고 했는데 서문에는 1877년이라고 했다.

 

거기에다가 범례에 1881년에 발간한 족보를 1878년에 건곤2권을 구하였다고 했으니 이치에 합당하지 않고 1877년에 발간한 족보를 다음해인 1878년 구했다는 것도 이치에 맞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연도의 기록이 들쭉날쭉하여 신빙성이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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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찰(祥察)- 상세하고 자세히 살펴 봄
*범례(凡例)- 책머리에 그 책을 읽어 나가는 데 필요한 모든[凡] 사항들을 본보기[例]로 적은글’, 즉‘일러두기’를 이른다.

 

O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5정축(丁丑)의 뜻

 

어떤 글에 보면 위의 글의 해석을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5년정축(丁丑)'이라 하여 '5'자 뒤에 '년'을 붙이는데 이는 잘못 생각한 것이다.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5년정축(丁丑)' 은 숭정 연호를 사용한 해로부터 5년이라는 뜻으로 '숭정기원(崇禎紀元)'이 1628년이니 '5년 정축년'은 연도는 1633년이나 간지는 정축년이 아닌 계유(癸酉)년이 된다.

 

이렇게 읽으면 간지가 기록과는 달라지기 때문에 아래와 같이 이해해야 한다. 

 

'년'자를 뺀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5정축(丁丑)'의 뜻은 '숭정기원후 5번째 돌아온 정축년'이라는 것이 바른 해석이다.

 

그러니까 1628년이 숭정기원이니 1637년이 첫 정축. 다음이 1697년. 세번째가 1757년. 네번째 정축년이 1817년. 다섯번째 정축년이 1877년이다.

 

 

숭정 첫 정축년부터 정축년이 5번이 돌아 온 해이니까 1877년이 되는 것이다.

 

 

○ 황고지손세우(皇考之孫世雨)

 

 

[그리고 제5면에 기록되기를 황고지손세우(皇考之孫世雨)라 하였고 본인은 시영(時榮)이라 하였으니 대동항렬(大同行列)로 볼 때 아버지의 손자가 雨行이면 본인(本人)은 규행(圭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제5면에 '황고지손세우(皇考之孫世雨)'라 하였는데 본인을 시영(時榮)이라 하였으니 즉 '영(榮)'자 돌림인데 글에서는 아버지의 손자가 '雨' 항렬이면 본인(本人)은 '규(圭)' 항렬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말이다.

 

< 영(榮) --> 규(圭) --> 종(鍾) --> 우(雨)  >

 

 

(의견) 황고지손세우(皇考之孫世雨)의 잘못된 오역

 

 '실전세계의 고찰'에서 실전세계의 잘못된 여러 내용을 지적한 것 중 한 가지인데 이는 역문자의 잘못된 오역이다.

 

역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그리고 제5면에 기록되기를 황고지손세우(皇考之孫世雨)라 하였고 본인은 시영(時榮)이라 하였으니 대동 항렬(大同行列)로 볼 때 아버지의 손자가 '우(雨)' 행이면 본인은 '규(圭)' 항렬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

 

라고 한 부분으로 이 역문 부분은 잘못된 내용으로 생각된다.

 

대종보 총편 288페이지에 기록된 내용이다.

 

즉 '황고지손세우(皇考之孫世雨)' 라는 문장에서 '본인을 시영(時榮)이라 했으니 '손 세우의 '우' 항렬은 항렬에 맞지 않다'는 말이다.

 

'아버지의 손자'가 '우(雨)' 항렬이면 본인은 '규(圭)' 항렬이라야 맞는데 왜 '영(榮)'자 항렬이냐는 말이다.

 

 < 영(榮) --> 규(圭) --> 종(鍾) --> 우(雨)  >

 

역문에 '아버지의 손자'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는 아예 말이 안 되는 있을 수 없는 말임을 금방 깨달을 수 있다.

 

이때는 '손자 孫'이 아니고 '후손 孫'으로 읽어야 그래도 조금 뜻이 통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손자'라는 말은 아예 말이 안되지만 '아버지의 후손'이라는 말은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오류는  '황고'의 뜻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황고(皇考)'라는 뜻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높임말'로도 쓰이지만 '증조 할아버지'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일반적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높임말' 로만 해석하니 위의 항렬이 맞지 않는 것이다.

 

이는 '증조 할아버지'의 높임말로도 쓰인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그러면 황고지손세우(皇考之孫世雨)를 '孫'자를 '손자 孫'으로 읽어 [아버지의 손자 세우(世雨)]가 아닌 [증조부의 후손 세우(世雨)]' 라고 하면

항렬이 '영(榮)'이 맞으니 '시영(時榮)'의 이름이 맞는 말이다.
  

○ 상반되는 연대

 
[이상 열기(列記)한 바로 볼 때 전연 전후연대(前後年代)가 상반(相反)될 뿐 아니라 "行字'조차 부합되지 않는다.

 


더욱이 1877년 정축(丁丑)년 서문(序文)에 1870년 경오파보(更午派譜)에 기록했다고 하였으니 실전세계(失傳世系)가 발견되기 8년 전에 파보(派譜)에 등재하였다는 것은 실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 앞서 열기(列記)한 내용을 볼 때 전후 연대(前後年代)가 상반되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로 여러 가지 오류가 있다.

 

더욱이 1877년 정축(丁丑)년 서문(序文)에 1870년 경오파보(庚午派譜)에 기록했다고 하였는데 갑무갑 3대 근간보 이후 실전 세계가 처음 발견된 1878년 무인(戊寅)년에 구한 건권(乾卷)과 곤권(坤卷) 2권의 실전 세계가 발견되기 8년 전에 파보(派譜)에 등재하였다는 것은 실로 말도 안 되는 말이다.


 

○ 처음으로 발견된 35대로 된 실전세계(失傳世系)

 
[다음으로 35세 실전세계(失傳世系)라 하여 설왕설래(說往說來)되고 있는 것을 세밀히 탐찰(探察)한 바 그 시발(始發)을 광무8년(光武8年. 1904년) 갑진(甲辰)으로부터라고 볼 수 있다.

 

35세로 된 실전 세계가 19세기 말까지는 전연 기록을 찾아볼 수 없고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 광무 8년(1904년) 갑진(甲辰)년에 발간된 족보에서

*휘 계필(啓弼)께서 경산군수(慶山郡守) 재직 중에 계필(啓弼)씨가 쓴 서술을 보면(光武8년 甲辰發刊)

 

『후손 계필이 임인(壬寅. 1902년) 여름에 마침내 이 고을 군수로 왔는데 일가사람 상준, 춘우가 옛날 간행본 한 권을 받들고 와서 말하기를

 

"우리 시조 표암공(瓢巖公) 이하 소판공(蘇判公) 이상 35대의 대계(代系)가 써 있는데 책이 헐고 좀벌레가 먹어 다시 간행(刊行)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으니 그 추모(追慕)함에 있어 어찌 성력(誠力)을 다하지 않으리오"

 

이에 수선하기로 합의하여 오래지 않아 완성되었다.』라고 하였다.

 

휘 계필 - 1902년∼1906년까지 4년간 경산군수 재직.]


- 35세로 된 실전 세계에 대한 말이 나온 첫 시발은 광무8년 갑진(甲辰.1904)년부터이다.

 

35세로 된 실전세계는 서기 1900년까지는 전연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 광무8년 갑진(甲辰)년 즉 1904년에 발간된 족보에서부터이다.

 

이 족보에 휘 계필 선조님께서 경산군수로 재직할 때에 쓴 서술(敍述- 사건. 생각 따위를 차례대로 말하거나 적음)에 보면 1902년 여름에 일가인 상준과 춘우가 우리 시조 표암공(瓢巖公) 이하 소판공(蘇判公) 이상 35대의 대계(大系)가 쓰인 옛날 족보를 가져왔는데 책이 헐고 좀벌레가 먹어 다시 간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이에 수선하기로 합의하여 오래지 않아 1904(甲辰)년에 완성하였다 라고 하여 35대로 된 실전세계를 처음으로 발견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 무오보(戊午譜. 1978년)의 실전 상계 기록

 

 

[다음으로 대전(大田) 소재 보전출판사((譜典出版社)에서 발행한 경주 이씨 무오보(1978년 발간) 본문 5면을 보면 '실전상계(失傳上系)가 약 150년 전쯤 분적종(分籍宗)인 합천 이씨(陜川李氏) 가보에서 소판공(蘇判公)의 상계에 관한 기록이 발견됨으로서 시조(始祖) 휘 알평(謁平)에서 중시조(中始祖) 소판공까지의 세계(世系)가 명백히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소판공은 시조로부터 *36세손(世孫)이 된다고 하였고 혹 경주 이씨의 *소극적인 파보(派譜)나 *지역적인 편보(偏譜)에도 성씨대관(姓氏大觀)과 같은 내용으로 기록된 바 있다.']

 

 

- 대전(大田) 소재 보전출판사((譜典出版社)에서 발행한 1978년에 발간된 무오보(戊午譜) 본문 5면에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다.

 

'실전상계가 약 150년 전쯤 분적종인 합천 이씨 가보(家譜)에서 발견됨으로서 시조 휘 알평에서 중시조 소판공까지의 세계(世系)를 알게 되었다.

 

이 상계에 따르면 소판공은 시조로부터 35대손(代孫=세손)이 된다.

 

자기의 직계만을 표시한 가첩류나 살고 있는 지역이나 일부 일가만의 지역적인 편보에도 성씨 대관의 내용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는 35대로 된 실전상계가 분적종 합천 이씨 가보에서 기록이 발견되었음을 밝히는 내용으로 무오보 본문 5면에 기록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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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세손(世孫)

- '세와 대를 달리 읽는 방법'에 의거하여 '세와 세손'을 같이 읽어 시조부터 중시조 까지 36세이니 36세손이라고 한 것 같은데 이는 잘못 읽은 것으로 35세손(대손)이 정확한 표현이다.
'세와 대를 같이 읽는 방법'을 사용하여 36세(대)이니 35대손(35세손)이라고 읽어야 한다.

 

*소극적인 파보(派譜)- 자기의 직계만을 적은 가첩 류
*지역적인 편보(偏譜)- 살고 있는 지역이나 일부 일가만의 파보 류  
*한국성씨대관(韓國姓氏大觀)- 저자 : 최덕교. 발행처 : 創造社. 발행연도 : 1971. 페이지수 : 139p.  원문(原文)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확인할 수 있음.

 

 

○ 합천 이씨 세보의 35대로 된 실전 상계 발견과 조처

 

 

[그리고 분적종 합천 이씨 세보에는 진천에 살던 경주 이씨 후(后) 이학영(李學榮)씨가 을유 (乙酉) 7월에 주문사(奏文使)로 북경(北京)에 가다가 노변(路邊)에서 경주 이씨의 *비갈(碑碣)이 *산방(山榜)에 서 있음을 보고 의아스러워 근처에 사는 동종인(同宗人)을 찾아가 물어 대답하기를

 

"본인도 *조선국 익재 제현 선생의 혈손으로 귀국왕(貴國王) 말(末)에 이 땅에 들어와 산다." 하기에 다시 묻기를

 

"보(譜)가 있느냐?" 하였더니 "있다." 하여 5일간을 더 머무르며 선조(先祖)의 실계(失系)를 찾아.......]

 

 

- 분적종인 합천 이씨 세보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충북 진천(鎭川)에 살던 경주 이씨 후손인 이학영(李學榮)씨가 영조 41년 을유(乙酉. 1765년)년 7월에 주문사(奏文使)로 북경(北京)에 가다가 길가에서 경주 이씨의 묘비(墓碑)와 묘갈(墓碣)이 산방(山榜)에 서 있음을 보았다.

 

의아스러워 근처에 사는 경주 이씨 먼 일가를 찾아가 물었다.

 

그 동종인(同宗人)이 대답하기를

 

"본인도 조선국(朝鮮國) 익재(益齋) 제현(濟賢) 선생의 피를 나눈 후손으로 고려 말경에 이 땅(중국 요동 땅)에 들어와 살고 있다." 하였다.

 

다시 묻기를 "보(譜)가 있느냐?" 하였더니 "있다." 하였다.

 

이곳에서 5일간을 더 머무르면서 선조(先祖)의 잃어버린 계대(系代)를 찾았다.-

 

 

* 위의 글은 합천 이씨 세보에 기록된 내용으로 35대로 된 실전세계의 발견과정을 말하고 있는데 한가지 지적하고자하는 내용은 왕명(王命)을 받들고 주문사(奏文使)로 북경(北京)에 가던 사신(使臣)이 천재지변(天災地變)이 아닌 족보로 인하여 5일간이나 한 곳에 지체하였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다.

 

혹 돌아오는 길에 발걸음을 빨리 하여 선조의 잃어버린 계대(系代)를 찾았다면 모를까 사신으로 가던 길에 5일을 머물었다는 것은 목숨을 내 놓는 일이나 마찬가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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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사(奏文使)- 조선 시대 중국과의 사이에 외교적으로 알려야 할 일이 있을 때 임시로 파견하였던 비정기적인 사신.
*비갈(碑碣)- 묘비(墓碑)와 묘갈(墓碣)을 아울러 이르는 말.
사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쇠붙이나 돌에 글자를 새겨 세우는 것으로, 빗돌의 윗머리에
지붕 모양으로 만들어 얹은 것을 ‘비(碑)’라 하고, 그런 것을 얹지 않고 다만 머리 부분을 둥그스름하게 만든 작은 비석을 ‘갈(碣)’이라고 한다.

 

*산방(山榜)- 산신제 지낼 때 쓰이는 지방. 산기슭에 펼쳐진 너른 지역?
*조선국(朝鮮國) 익재(益齋) 제현(濟賢) 선생- 익재공은 본디 고려 말엽의 사람이다.
조선국이라고 표현한 것은 일반적으로 고려국에서 조선국으로 왕조는 바뀌었으나 같은 땅위에 세워진 같은 나라로 여겨 조선국이라고 한 것이다.

 

 

○ 왕의 윤허-  별부직영(別副直營)하여 직부향사(直副向事)

 

 

[당지 판각(唐紙板刻)으로 된 보첩(譜牒) 1권을 받들고 본국에 돌아와 홍문관 도승지인 전주 후 이인명(李仁明)에게 말하였더니 이인명이 찬(撰)하여 진계(進啓)하니 왕이 윤허(允許)하기를

 

"실전이 만성(萬姓)중에 혹 많이 있으되 다행히 실계(實系)를 찾았으니 더욱 다행한 일이다.

 

다시 계보에  계승할 것이며 입북(入北)한 이학영에게 별부직영(別副直營)하여 태릉에 거행(擧行)할 것은 직부향사(直副向事)케 하라" 하시었다.]

 

 

- 판각(판각- 나무에 글씨를 새김)된 글을 당지(唐紙- 당나라 종이)에 찍어 만든 보첩 1권을 갖고 우리나라에 돌아왔다.

 

홍문관 도승지인 전주 후(全州后- 전주 이씨. 전주 사람) 이인명(李仁明)에게 말을 하였다.

 

이인명이 이에 대한 내용의 글을 지어 임금에게 올렸더니 임금이 허락하기를

 

"실전된 많은 성들이 있는 가운데 다행히 경주 이씨는 실제 계대(系代)를 찾았으니 매우 다행한 일이다.

 

다시 계보(系譜)에 올려 계승하도록 할 것이며 청(淸)나라에 주문사로 간 이학영에게 "별도로 직접 글을 지어 태릉(泰陵)에서 고제를 지내라" 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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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부(別副)- 별도로 만든 임시 관청. 주무기관 다음의 부기관. 
본래 쪽지나 조각을 뜻하는 말로 공식 문건의 내용을 보충하는 형식으로 첨부된 문건을 의미하기도 함. ≒ 별단(別單)

 

 

(의견)  잘못된 한문자의 오타(誤打)


 

대종보 총편 290쪽의 역문에서 세로줄 6∼7줄 내용 중 7줄 끝  부분에

 

'별부직영(別副直營)하여 태릉에 거행(擧行)할 것은 직부향사(直副向事)케 하라'는 문장이 있다.

 

역문 중 '직부향사(直副向事)'라는 글귀가 오타이다.

 

한자 원문에는 '즉부향사(卽赴向事)'라고 되어 있다. 

 

이는 '즉부(卽赴)와 직부(直副)'가 발음이 비슷하다보니 잘못 오기한 것 같다. 

 

직부향사(直副向事)의 뜻이 '곧 일을 추진하여 마치도록 하라'는 즉부향사(卽赴向事)의 뜻과 같은 뜻이 아니다.

 

역문자가 원문의 '즉부향사(卽赴向事)'라는 말 대신에 '직부향사(直副向事)'라고 했다면 이는 고칠 것이 아니라 원문대로 해야할 것이다.

 

 

○ 합천 이씨 족보의 발간과 선계(先系) 등재

 

 

[또한 합천 이씨 족보를 탐지(探知)한 결과 다음과 같이 발간되었다.

 

1. 중묘 기축보(1529).  1. 영묘 갑술보(1754).  1. 순묘 신유보(1801).  1. 고종 병자보(1876).  1. *고종 정미보(1907)

 

 
이조 말(李朝末)까지 이상 5회 족보를 발간하였으나 실전 선계(失傳先系)를 등재한 사실이 없고 1932년 임신 대보(壬申大譜)시에

'시조 휘 알평이하 세계원류원도도(始祖諱謁平以下世系原流圓圖)를 싣고 「鎭川居慶州后李學榮乙酉………別式圓圖付于編首비竣後巧」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내용의 세계(世系)가 1968년에 무신(戊申)년 간행(刊行) *강양 합천 이씨 계보(江陽陜川李氏系譜) 전(全)에

 

 
'시조 표암공 휘 알평이하 세계원류보(始祖瓢巖公諱謁平以下世系源流譜)'라 하여 원편(元編) 14에 실리고 상계(上系)는 지금의 대동보(大同譜. 1968년) 간행시 대전 출판소에서 경주 이씨 익재공파보(益齋公派譜)와 평창 이씨 세보(平昌李氏世譜)에 의거(依據)함이라고 되어 있다.]

 

 

- 여태까지 발간된 합천 이씨 족보를 찾아서 알아본 결과 다음과 같이 발간되었다. 

 

중종 24년 때의 기축보(1529). ^ 영조 30년 때의 갑술보(1754). ^ 순조 1년 때의 신유보(1801). ^ 고종 14년 때의 병자보(1876).  ^ *순종 1년 때의 정미보(1907) 등 이조 말까지 5회를 발간하였지만 실전세계를 등재한 사실이 없다.

 

이렇게 1529년에 발간한 중묘 기축보부터 1907년 고종 정미보까지 5회 발간한 합천 이씨 족보에 없던 실전세계가 그 뒤 1932년 임신대보를 발간할 때에 '시조 휘 알평이하 세계원류원도(始祖諱謁平以下世系原流圓圖)를 싣고 「鎭川居慶州后李學榮乙酉………別式圓圖付于編首비竣後巧」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세계원류원도의 발견과정과 처리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앞서의 5회 발간한 족보에는 실전 세계가 없다가 1932년 임신대보 발간시에 실전세계를 처음으로 올린 것이다 .

 

(「  」안의 한자 원문 생략. 진천 거주 경주 후손 이학영 운운에 대한 내용은 대종보 '실전 세계(失傳世系)의 고찰(考察) P290-291의 중간 한자 원문 내용을 참조하세요)

 

또 하나 같은 내용의 세계(世系)가 1968년 무신(戊申)년에 간행(刊行)한 강양 합천 이씨 계보(江陽陜川李氏系譜) 전(全)에

 

'시조 표암공 휘 알평이하 세계원류보(始祖瓢巖公諱謁平以下世系源流譜)'라 하여 원편(元編-처음 엮은 책) 14에 실려 있다.

 

이 상계(上系-위 계대)는 지금의 대동보(大同譜. 1968년)를 발간할 때에 대전 출판소에서 경주 이씨 익재공파보(益齋公派譜)와 평창 이씨 세보(平昌李氏世譜)에 의거(依據)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1968년 무신년에 간행한 합천이씨 계보에 올려진 상계(上系)는 익재공파보와 평창이씨 세보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실전 상계는 여러 가지 점에서 출처가 불분명하고 의혹이 가는 상계임에도 불구하고 합천 이씨 계보에 올린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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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 정미보(1907)- 1907년은 엄밀히 말해서 고종이 아니고 순종 1년 즉 융희 1년이 되는 해를 말한다.
* 강양((江陽)- 지금의 경남 합천군 일대를 말한다.
고대에는 가야연맹의 다라국(多羅國), 초팔국(草八國)으로 추정되고 565년(신라 진흥왕26)에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하고 757년(신라 경덕왕16)에 강양군(江陽郡)으로 개칭하였다.

고려때 1018년(현종 9)에 합주(陜州)로 승격하였으나 조선때인 1413년(태종 13)에 합천군으로 강등되었다.
근대인 1914년에 합천군에 초계군, 삼가군을 병합시키고 1979년 합천면이 읍으로 승격. 

 

 

○ 주문사(奏文使)는 실록(實錄)에 기록이 없다. 

 

 

[이상 내용을 상고(詳考)한 즉 려조(麗朝)와 이조시(李朝時)에 원 명 청(元明淸)나라 사신으로는 정기적으로 *동지사(冬至使)와 *정조사(正祖使- 正朔使. 賀正使)를 보냈고, 정조사는 동지사와 겸하였는데 *정사(正使)는 *삼공육경(三公六卿)이 되었으며 *부사(副使)와 *서장관(書狀官)이 수행했다.

 

정기적으로 가는 사신 이외에 *주청사(奏請使)와 *주문사(奏聞使)가 있었는데

이조실록(李朝實錄)을 보면 주문사(奏聞使)가 10회 갔던 사실이 있다.

그러나 본문에 있는 *주문사(奏文使)는 실록(實錄)에 기록이 없고 또한 홍문관(弘文館)에는 승지(承旨)나 도승지(都承旨)가 없고 승정원(承政院)에만 있다.]

 

 

- 고려와 조선의 양 시대에는 중국의 원(元), 명(明), 청(淸)나라의 사신으로 정기적으로 동지사(冬至使)와 정조사(正祖使- 正朔使. 賀正使)를 보냈다.

 

해마다 신년에 가는 정조사는 동짓달에 가는 동지사를 겸하였다.

 

사신의 대표격인 정사(正使)는 삼공육경(三公六卿)중에서 되었으며 그 다음의 부사(副使)와 서장관(書狀官)이 수행했다.

 

중국에 정기적으로 가는 사신 이외에 주청사(奏請使)와 주문사(奏聞使)가 있었는데 이조실록(李朝實錄)을 보면 주문사(奏聞使)가 10회 중국에 갔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합천 이씨 세보에 기록된 본문에 있는 주문사(奏文使)라는 정조사는 실록(實錄)에 기록이 없다.

 

또한 '홍문관 도승지인 전주 후....'라는 기록에서도 홍문관(弘文館)에는 승지(承旨)나 도승지(都承旨)가 없고 승지나 도승지는 승정원(承政院)에만 있다.

 

해서 합천 이씨 세보에 기록된 '주문사(奏文使)'라는 정조사 명이나 '홍문관 도승지'운운은 정확하지 못한 표현으로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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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사(奏文使)라는 정조사는 실록(實錄)에 기록이 없다.
- 주문사(奏聞使)는 기록이 있어도 주문사(奏文使)는 기록에 없다. 聞 - 文 글자가 틀림
*동지사(冬至使)- 조선 시대에, 해마다 동짓달에 중국으로 보내던 사신. ≒하동지사.

 

*정조사(正祖使)- 조선시대 신년 축하를 위해 중국으로 보낸 수석사신(首席使臣). 하정사(賀正使)라고도 한다.
해마다 3번씩 정기적으로 보내는 사신 중의 하나로서 2품 이상의 관원을 뽑아 보낸다.
동지(冬至)에 보내는 동지사(冬至使)가 동지와 정월이 가까운 관계로 정조사를 겸하였다.
구성인원은 부사(副使)·서장관(書狀官)·종사관(從事官)·통사(通事:통역)·감원(監員)· 사자관(寫字官)·서원(書員)·압마관(押馬官) 등 수행원 40명을 거느리고 일정한 공물(貢物:朝貢)을 헌납, 그 대가로 회사품(回賜品)을 받았으며 베이징[北京]의 회동관(會同館)에 유숙하였다.

 

*정사(正使)- 사신 가운데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 또는 그런 지위. ≒상사(上使).
정사(正使)는 삼공육경(三公六卿)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되었다.
*삼공육경(三公六卿)- 고려조(高麗朝)의 삼공(三公)은 사마(司馬). 사공(司空). 사도(司徒)를 칭하고

이조(李朝)때에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삼정승(三政丞)을  말했으며,
육경(六卿)은 육조(六曹)의 판서(判書)를 말한다.
*부사(副使)- 정사(正使)를 돕던 버금 사신. ≒아사(亞使).

 

*서장관(書狀官)- 외국에 보내는 사신 가운데 기록을 맡아보던 임시 벼슬. 겸대(兼臺) 정사(正使)· 부사(副使)와 함께 삼사(三使)로 불리며, 직위는 낮지만 행대 어사를 겸하였다. ≒ 서장(書狀)· ^행대(行臺)^행대(行臺)- 조선시대 중국으로 파견된 사신(使臣)의 일원인 서장관(書狀官)이 임시로 겸한 사헌부의 관직.
겸대관의 약칭으로 행대(行臺), 또는 행대어사라고 하였으며, 그 직명은 대개 겸지평(兼持平)·겸장령(兼掌令)·겸집의(兼執義)라 하였다.
서장관은 이와 같은 사헌부의 직함을 겸하여 본래의 기록보존 임무 외에 약 300명에 달한 사신일행의 불법행위를 단속하였다.

 

*주청사(奏請使)- 조선 시대에, 동지사(冬至使) 이외에 중국에 주청할 일이 있을 때 보내던 사절. ≒주문사(奏聞使)·진주사(陳奏使).
*주문사(奏聞使)- 주청사(奏請使)
*주문사(奏文使)- 실록에 주문사(奏文使)라는 정조사는 기록에 없다. 聞 - 文 글자가 틀림.

 

 

○ 이학영(李學榮)과 이인명(李仁明)의 행적

 

 

[그리고 전기(前記) 이인명은 이조실록(李朝實錄) 1750년부터 1770년 사이에 4회 나타나기는 하나 *홍문관(弘文館)에 직(職)을 두지 않았고 이학영 역시 진천(鎭川)에 살았던 것을 확인할 수 없으며 *사신역직(使臣歷職)을 하였다면 마땅히 *입보(入譜)하였을 것이어늘 보첩(譜牒)에 기록이 없고 실전계(失傳系)에 나열(羅列)된 관직이 신라시대 관직과 상이(相異)하니 믿을 수 없다고 아니할 수 없다.]

 

 

- 그리고 앞서 기록한 *전주 사람(전주 이씨) ^이인명은 이조실록에 1750년부터 1770년 사이에 4번 기록이 나타나 실제 인물이긴 하나 당시 벼슬이 홍문관 도승지로 기록된 이인명은 홍문관에는 직(職)을 두지 않았다.

 

주문사(奏文使)로 중국에 다녀온 이학영 역시 충북 진천에 살았던 기록을 확인할 수 없는데다가 주문사(奏文使)의 사신(使臣) 직(職)을 역임했다면 마땅히 족보에 올라져 있어야 할 것인데 보첩에 그러한 기록이 전연 없고 35세 실전세계에 적혀있는 관직명이 옛 신라시대의 관직명과 다르니 믿을 수 없다.

한 예로 35세로 된 실전세계의 시조 3세 태사령공 휘 타(陀-부수 좌부변 없음. 뱀타)의 기록이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 거서간조'의 기록과 거의 비슷한 사실에서 속단하기 어렵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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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인(全州人) 이인명(李仁明)에 대한 조선왕조 실록 기록 영조 76권 28년 4월 26 일 (정사) 002 / 죄인 초정이 물고 되고, 죄인들에게 형을 내리다 

 

 

죄인 초정(草貞)이 물고(物故- 죄를 지은 사람을 죽임)되었다.

 

이경명(李景明)·이인명(李仁明)을 모두 섬에 정배하게 하며, 김덕해(金德海)와 미처 체포하지 못한 죄인 김수일(金守一)은 아울러 놓아 보내라고 명하였다.

 

옥사(獄事)이지만 극비에 부쳐 쉬쉬하며 넘어간 사건으로 기록에도 전하는 바가 없어 자세한 내막을 모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에 이인명(李仁明)이 이 옥사와 관련이 되어 섬에 정배되었다는 기록이다.

 

*홍문관(弘文館)- 조선 시대에, 삼사(三司) 가운데 궁중의 경서, 문서 따위를 관리하고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 문원(文垣)·영각(瀛閣)·옥당(玉堂)·옥서(玉署).

 

*사신역직(使臣歷職)- 사신의 직을 역임함
*입보(入譜)- 족보에 올림

 

 

○ 관직명이 신라 관직명과 상이하다

 

 

[실전세계가 처음으로 등재된 것이 임신대보(壬申大譜. 1932)였으니 대전서 간행된 경주이씨 무오보에 150여 년 전 합천 이씨 가보에서 발견하였다는 것은 사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실전 세계가 처음 등재된 것이 합천 이씨 임신대보(壬申大譜. 1932)인데 대전(大田) 소재 보전출판사((譜典出版社)에서 1978년에 발행한 경주 이씨 무오보(戊午譜)에 150여 년 전 합천 이씨 가보에서 발견하였다는 것은 사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실전 세계가 처음 등재된 것이 1932년 발간된 합천이씨 임신대보인데 임신대보 발간 이전에 5회나 발간된 합천 이씨 족보에 전연 실전 세계에 대한 내용이 언급된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연대상으로 합천 이씨 임신 대보와 경주 이씨 무오보의 발간연도 차이가 46년의 차이인데 150여 년 전 운운은 상당한 차이가 나는 것이다. 

 

 

○ 35세 실전 세계의 실존 여부

 

 

[따라서 120년 전에 유원(裕元)선생께서 28대 실계(實系)를 명시(明示)하였음을 볼 때 그 당시에 35세 실전세계가 없었음을 알 수 있으며

려조(麗朝) 말에 요동반도(遼東半島)로 이거(移居)한 익재공(益齋公) 혈손(血孫)이 실전세계를 소장하고 있었다면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후손이 모를 까닭이 없었을 것이어늘]

 

 

- 따라서 *120년 전인 1868년 무진년 발행 백사파보의 발문을 쓰신 유원(裕元. 호 귤산橘山)선생께서 28대 실계(失系)에 대하여 분명하게 드러내어 바르지 못한 상계라고 명시(明示)하였음을 볼 때 그 당시에는 35세 실전세계가 전연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조 말에 요동반도(遼東半島)로 이거(移居)한 익재공(益齋公)의 혈손(血孫-피를 나눈 후손)이 실전세계를 소장하고 있었다면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같은 많은 후손이 28대로 된 실전세계를 모를 까닭이 없었을 것이 아니냐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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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년- 대종보 발간시기가 1987년이고 이 '실전세계의 고찰' 이라는 글도 이 즈음에 쓴 글이라고 보면 귤원공께서 백사파보에 발문을 쓴 시기가 1868년 백사파보를 발간한 시기와 비슷하므로 그 차이가 120년 정도이다.

 

 

# 귤산공(橘山公. 휘 유원裕元) 의 발문(跋文) 내용은 아래와 같다

 

- 28대 실전 세계의 발문에

 

 

『삼가 안찰(按察-자세히 살펴봄)하건대 급량부 대인(시조)으로부터 소판공(휘 거명)에 이르기까지 실전한 지가 천년이 되었다.

 

그런데 서경(西京-평양)에서 바르지 못한 상계 28대를 등초(謄抄- 원본을 베낌)하여 왔는데 관제(官制)가 삼한(三韓- 삼국시대를 일러 삼한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과 더불어 다름이 있으니 실적(實跡- 실지의 확실한 자취)이 아님이 틀림없다.

 

유원(裕元)은 기록한다.』

 

 

○ 양 실전 세계는 사실이 아니다

 

 

[갑술갑(甲戌甲) 삼대보(三大譜)는 물론이고 각 파보(派譜)에 조차 서기 1900년까지 한 곳도 나타나지 않음을 보면 1904년 경산군수 계필 선생이 편간한 것이 아닌가 의심도 되는 바이며 현재까지 나타난 기록을 추상(推想)할 때 결론은 사실(事實)이 아니라고 볼 수밖에 없으나 양 실전 세계(兩失傳世系)를 그대로 등재(登載)하여 참고(參考)에 공(供)하는 바이며 다행이 후일(後日)에 고증(考證)이 발견되기를 원하는 바이다.]

 

 

 

- 1684년에 발간된 갑자보(甲子譜)와 1748년 무진보(戊辰譜) 그리고 1814년 갑술보 (甲戌譜) 즉 갑무갑(甲戊甲) 삼대보(三大譜)는 물론이고 그 외 가첩류 등의 소극적 파보와 중파 소파 등 지역적 각 파보(派譜)에서 조차 서기 1900년까지는 한 곳에서도 실전 세계가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28세로 된 실전 세계는 1868년 무진년 간행 백사파보 곤권 끝에 쓰인 귤산공(휘 유원)께서 쓰신 발문에 처음 언급되었고 35세로 된 실전세계는 1904년 갑진년 발간시 경산군수 휘 계필께서 쓴 서술에 처음 언급되었다. 

 

이렇게 보면 여태까지 없던 내용이 이때 처음 기록되었다는 것은 1904년 경산군수 계필 선생이 독단적으로 편간(編刊)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도 된다.

 

현재까지(1987년) 나타난 기록을 추상(推想- 미루어서 생각함)할 때 결론은 양 실전 세계(兩失傳世系)는 사실(事實)이 아니라고 볼 수밖에 없다.

 

사실이 아니나 이 양 실전 세계(兩失傳世系)를 그대로 족보에 올려 참고(參考)로 제공한다.

 

다행이 후일(後日)에 옛 문헌에 기초하여 증거를 세워 이론적으로 밝혀 줄 것을 원한다.

 

*이로써 28대 실전세계와 35대 실전세계는 여러 가지 모순되고 사실에 어긋나는 점이 많아 세계(世系)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다만 참고로 할 뿐이다.

 

약 900년 간의 잃어 버렸던 28세, 35세 실전 세계를 알게 되었으나 이는 사실과 어긋나기 때문에 또 다른 실전 세계의 발견과 기이 발견된 실전 세계의 정확한 근거 없이는 함부로 사용하여 혼란을 가중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많은 종친님들이 '희 형' 항렬은 '시조 75세' 라고 말하고 일부 보학자와 지도층 인사들도 '시조 몇 세'라고 잘못 후손들을 지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대종보의 '실전세계의 고찰'을 한번만 숙독 하시면 생각을 달리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