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경주이씨 인물(교-기)

녹전 이이록 2009. 4. 11. 08:07

경주 이씨 인물(교-기)


 

● 이교영(李敎榮)


1838(헌종 4)~ ? .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치이(稚而),

 

1876년(고종13)에 문과에 급제,

 

1887년 대사간, 성균관대사성, 이듬해에 대사헌,

 

1896년에 개성부관찰사,

 

1899년에 궁내부특진관에 올랐다.


○ 이교영(李敎榮)


자 치이(稚而)

생년 1838

활동분야 문신 / 관료 / 조선후기

과거 및 취재 [문과] 고종(高宗) 13년 (187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9위


1838(헌종 4)∼?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치이(稚而).

 

계형(啓亨)의 손자로, 유대(裕大)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청풍 김씨(淸風金氏)로 주묵(周默)의 딸이다.

 

1876년(고종 1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동지 겸 사은정사(冬至兼謝恩正使) 조석여(曺錫輿)와 *동부사 이규영(李珪永)을 수행하여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79년 *시강원 *문학을 지내고

1883년 이조 참의에 올랐으며, 이듬해에는 영흥 부사를 지냈다.

 

1887년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다.

 

1890년 *대거승지(對擧承旨), 이듬해에는 사헌부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894년 이조참판이 되었고, 그 해에 개성부 *유수에 임명되었으며,


1896년 개편된 지방 직제에 따라 *개성부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897년 *중추원 *일등 의관에 임명되고,


1898년 *경효전 *제조,


1899년 *비서원승을 역임하고 그 해 12월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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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겸 사은정사(冬至兼謝恩正使)- 조선 시대에 임금이 해마다 동짓달에 중국으로 보내던 사신 겸 중국 황제에게 사은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보내던 사절의 우두머리

*동부사(同副使)- 같은 사신으로 정사(正使)를 돕던 버금 사신. ≒아사(亞使).

*서장관(書狀官)- 조선시대 중국 베이징(북경)에 보내는 사신 가운데 기록을 맡아보던 임시벼슬.

정사·부사·기록관 등 3사신 중 기록관을 이르며, 외교문서에 관한 일을 분담하였다.

정4품에서 6품 사이의 관원으로 임명했으며, 임시로 1품 상위(一品上位)의 직함을 함께 주었다.

서장관은 사신행차 중에 매일의 사건을 기록하고 돌아온 뒤에 왕에게 견문한 바를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또한 일행을 감찰하고 국경을 넘을 때는 마부와 말, 짐바리를 점검하는 행대어사(行臺御史)를 겸하였다.

일본에 가는 통신사에도 서장관이 따라갔다.

*시강원(世子侍講院)- 조선시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관청

관원으로는 영의정이 겸임하는 사(師:정1품) 1명, 부(傅:정1품) 1명, 이사(貳師:종1품) 1명, 좌·우빈객(左右賓客:정2품) 각 1명, 좌·우부빈객(左右副賓客:종2품) 각 1명은 타관직(他官職)이 겸임하고, 찬선(贊善:정3품)· 보덕(輔德:정3품)· 겸보덕(兼輔德:정3품)· 진선(進善:정4품)· 필선(弼善:정4품)· 겸필선(兼弼善:정4품)· 문학(文學:정5품)· 겸문학(兼文學:정5품)· 사서(司書:정6품)· 겸사서(兼司書:정6품)· 설서(說書:정7품)· 겸설서(兼說書:정7품)· 자의(諮議:정7품) 각 1명을 두었는데 1889년(고종 26)에는 전서관(典書官)· 장서관(掌書官) 각 1명을 더 두었으며, 이속(吏屬)으로는 서리(書吏) 17명, 서사(書寫) 2명, 장책(粧冊) 1명, 사령(辭令) 15명, 수공(水工) 1명, 군사(軍使) 4명을 증원하였다.

*문학(文學)- 조선 시대에, 세자시강원에 속하여 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던 정5품 벼슬.

*사간원(司諫院)- 조선시대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담당한 관청.

간원(諫院)·미원(薇院)이라고도 한다.

사헌부와 함께 대간(臺諫), 홍문관(弘文館)· 사헌부와 함께 삼사(三司), 형조(刑曹)· 사헌부와 함께 삼성(三省)이라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조선시대 간쟁 ·논박을 맡았던 사간원(司諫院)의 으뜸벼슬.

정3품으로 정원 1명을 두었다.

*대사성(大司成)- 유학과 문묘의 관리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다.

법제상 전임직(專任職)이었지만 겸직하는 예가 많았는데, 정3품관이 아닌 상위(上位)의 1 ·2품 관원이 겸직하는 예도 있었다

*유수(留守)- 임금을 대신(代身)하여 머물러 지킨다는 뜻.

수도(首都) 이외(以外)의 요긴(要緊)한 곳을 맡아 다스리던 특수(特殊) 외관직(外官職). 고려(高麗) 때에는 동경(東京;廣州)ㆍ서경(西京;平壤)ㆍ남경(南京;漢陽)의 삼경(三京)에 두었고, 조선(朝鮮) 시대(時代) 때에는 개성ㆍ강화ㆍ광주(廣州)ㆍ수원ㆍ춘천에 두었으며 완산(完山;全州)에 일시적(一時的)으로 두었다가 이내 폐함.

품계(品階)는 정ㆍ종2품(從二品)이었음.

*개성부(開城府)- 조선시대에 고려의 수도(首都)였던 개성(開城)을 관장한 관청

개성부의 관리는 외관이 아니라 경관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향리(鄕吏)가 없었으며 서울의 4부학당을 본떠 동몽훈도(童蒙訓導)를 두었다.

《경국대전》에는 개성부의 관원에 종2품의 유수(留守), 종4품의 경력, 종5품의 도사, 종6품의 교수(敎授),

종9품의 분교관(分敎官), 종9품의 검률(檢律) 등이 있다고 하였다.

*관찰사(觀察使)- 조선시대 각 도에 파견된 지방 행정의 최고 책임자.

감사(監司)·도백(道伯)·방백(方伯)·외헌(外憲)·도선생(道先生)·영문선생(營門先生) 등으로도 불렀다.

관찰사의 임기는 조선 초기에 1년이었다가 후에 2년으로 되었으며, 고려말 4~6품의 관리가 임명되던 것을 조선시대에는 종2품으로 품계를 높였다.

관찰사가 행정 업무를 보는 관아를 감영(監營)·영문(營門)·순영(巡營)이라고 하며, 관원으로는 도사(都事)·판관(判官)· 중군(中軍) 등 중앙에서 임명한 보좌관이 있고, 일반 민정은 지방민에서 선출된 향리(鄕吏)로 하여금 감영에 속한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6방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중추원(中樞院)- 조선 전기 왕명의 출납, 병기(兵器)·군정(軍政)·숙위 등의 일을 맡아본 관청. 1392년에 설치되었다.

관원으로는 판사(判事:정2품)·사(使)·지사(知事) 각 1명, 동지사(同知事) 4명, 첨사(僉事) 1명, 부사(副使) 6명, 학사(學士) 1명, 상의원사(商議院事) 3명(이상은 모두 종2품), 도승지(都承旨)· 좌승지·우승지· 좌부승지·우부승지(이상은 정3품) 각 1명, 당후관(堂後官:정7품) 2명, 연리(?吏:7품관) 6명을 두었다.

중추원은 1400년(정종 2)에 삼군부(三軍府)로 고쳤다가 1409년(태종 9)에 중추원으로 복구하였으나, 1466년(세조 12) 중추부(中樞府)로 고쳐 문무(文武) 당상관으로서 임직(任職)이 없는 자를 일정한 사무를 맡기지 않고 우대하는 의미로 두게 되었다.

정원은 영사(領事:정1품) 1명, 판사(判事) 2명, 지사(知事) 2명, 동지사 7명, 첨지사(僉知事) 8명, 경력(經歷) 1명, 도사(都事) 1명을 두었으며, 경아전(京衙前)의 녹사(錄事) 4명, 서리(書吏) 6명이 이에 속했다.

그 후에는 지사·동지사·첨지사 등의 공석(空席)이 나면 승전(承傳)한 의관(醫官)·역관(譯官)으로 충원하였다.

*의관(議官)- 조선 후기 중추원(中樞院)에 소속된 관직.

1895년(고종 32)의 을미개혁 때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회의체를 폐지하고 중추원회의로 대체하였는데, 회의 구성원으로는 의장·부의장, 1등의관, 2등의관을 두었다.

의장으로는 2등 칙임관 1명, 부의장으로는 2등 칙임관 1명, 1등 의관(一等議官)으로 3등 칙임관 5명과 4등 칙임관 8명, 2등 의관으로 3등 주임관(奏任官) 13명을 임명하였다.

1905년(광무 9) 찬의(贊議)로 개칭하였다.

*경효전(景孝殿)- 조선 고종의 비 명성 황후의 신위를 모시던 혼전(魂殿). 덕수궁 안에 있었다.

*제조(提調)- 조선 시대에, 중앙에서 각 사(司) 또는 청(廳)의 우두머리가 아니면서 각 관아의 일을 다스리던 직책. ≒제거(提擧).

*비서원(秘書院)- 조선 시대에,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아.

1895년(고종 32) 승선원(承宣院)을 비서감으로 고쳤다가, 그해 비서원(秘書院)으로 개칭하였다.

1905년(광무 9)에 다시 비서감으로 고쳤다가, 1907년(융희 1) 폐지되었다.

*승(丞)- 조선 후기에, 비서원에 속한 벼슬. 칙임관(勅任官)과 주임관(奏任官)이 있었다.

*궁내부(宮內府)- 조선 후기에, 왕실에 관한 모든 일을 맡아보던 관아.

고종 31년(1894)에 설치하여 순종 4년(1910)까지 두었다.

*특진관(特進官)- 대한 제국 때에, 궁내부에 속하여 왕실에 관한 일을 보좌하던 칙임(勅任) 벼슬. 고종 32년(1895)에 설치하였다.

 

 

● 24세 이구(李龜) -  익재공후 창평공후 사미정공파


1469(예종 1)~1526(중종 2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장(子長), 사미정(四美亭). 익재 제현(齊賢)의 7대손으로 공린(公麟)의 아들이다.

 

1492년(성종 23)에 문과에 급제, 면천군수에 이르렀으나 무오 갑자사화에 동생 원(?)이 화를 입을 때 연좌되어 홍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소환되어 홍주 상주 등의 목사를 역임하고 홍천 결은리로 돌아와서 사미정(四美亭)을 짓고 만년을 보냈다.


○ 사미정공(四美亭公) 휘 구(龜) 


자 자장(子長)

호 사미정(四美亭)

생년 1469

연령 58

활동분야 문신/관료 / 문신-조선중기 / 문신


생몰년은 1469(예종 1)∼1526(중종 21)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장(子長), 호는 사미정(四美亭)이다.

 

제현(齊賢)의 방계 7대손으로 창평 현령(昌平縣令) 공린(公麟-창평공파 파조)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박팽년(朴彭年)의 딸이다.

 

1492년(성종 23)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 예빈시 직장 · 예조 좌랑 · 고성 현감 · 면천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무오 · 갑자사화 때 동생 원(?)이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화를 당하는 것에 연좌되어 홍천(洪川)으로 유배(流配)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다시 기용되어 이조 좌랑 · 호조 정랑 · 사헌부 지평 · 정언 · 교리 · 수찬 · 응교 · 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외직으로 충주·홍주·상주의 목사를 거쳐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벼슬을 사직한 뒤 홍천 결은리에 돌아와 은거하였다.

 

그 뒤 향리에 사미정(四美亭)이라는 정자(亭子)를 짓고 청절(淸節)한 생활을 하였다.

 

*사미정공파의 소파시조이다.

 

*창평공 공린의 아들 8형제를 8별(八鼈)이라 한다.

 

*창평공의 꿈에 나타난 8마리 자라와의 얽힌 이야기에서 지금도 이 집안에서는 자라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 사미정(思美亭) 휘 구(龜)


생몰년은 1469(예종 1)∼1526(중종 21)이다.

 

자는 자장(子長)이고 호는 사미정(思美亭)이다.

 

익재공(益齋公) 제현(齊賢)의 7대손이며 창평 현령(昌平縣令) 창평공(昌平公) 공린(公麟)의 아들로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성종 23년(149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이후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예빈시 직장(禮賓寺直長)· 예조 좌랑(禮曺佐郞-정6품)· 고성 현감((高城縣監)· 면천 군수(沔川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무오사화(戊午士禍)·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아우 원(黿)이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화를 당하는 것에 연좌되어 홍천(洪川으)로 유배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이조 좌랑(吏曹佐郞)·호조 정랑(戶曹正郞)· 사헌부 지평(司憲俯持平)· 정언(正言)·수찬(修撰-정6품)·교리(校理-정5품)·응교(應敎-종4품) 등을 역임하였다.

 

충주(忠州)· 홍주(洪州)· 상주 목사(尙州牧使) 이후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홍천(洪川) 결은리에서 은거(隱居)하였다.

 

그 뒤 향리에 정자 사미정(思美亭)을 짓고 청절(淸節)하게 지냈다.

 

호는 이 정자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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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년문과(式年文科)-지방에서 치러진 초시初試의 합격자 2백 40명을

식년(式年) 봄에 한양으로 불러 모아 복시(覆試:會試)를 치르게 하여 다시 33명을 선발한 과거.


 

● 28세 이구징(李耉徵) - 익재공후 판윤공파


1609(광해군 1)~1688(숙종 14)

 

자는 대년(大年), 호는 죽헌(竹軒).

 

1657년(효종 8)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춘추관편수관에 이르고

 

1688년에 80세에 부호군에 제수되고 졸 후에 첨지중추부사에 추서되었다.

 

≪죽헌집(竹軒集)≫이 있다.


○ 죽헌공(竹軒공) 이구징(李耉徵)


자 : 대년(大年)

호 : 죽헌(竹軒)

생년 : 1609

연령 : 80

활동분야 : 문신/ 관료 / 조선 중기

과거 및 취재 : [문과] 효종(孝宗) 8년 (165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4위

[생원진사시] 인조(仁祖) 17년 (163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39위


1609(광해군 1)∼1688(숙종 1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대년(大年), 호는 죽헌(竹軒). 경주 출생.

 

아버지는 상일(尙一)이며, 어머니는 아주 신씨(鵝洲申氏) 간(?)의 딸이다.

 

7세부터 글을 배웠으며, 12세에는 숙천 도호부사로 떠나는 할아버지인 경한(景漢-판의금. 청와)을 따라 숙천으로 갔으며,

연일(延日)에 귀양 온 *이유성(李惟聖)의 문하생이 되었다.

 

스승이 영천으로 이배(移配)되자 함께 갔으며, 스승의 아들인 이태운(李泰運)과는 동갑으로서 경쟁하며 학업에 열중하였다.

 

1636년(인조 14) 향시에 합격하고,

1639년 명경시와 사마시에 모두 합격, 진사가 되었으며,

1657년(효종 8)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권지 성균관 학유가 되었다.

 

이듬해 봉상시 봉사, 1659년 박사 겸 봉사,

1660년에 율봉 찰방(栗峰察訪)· 전적· 병조 좌랑을 거쳐 예조 좌랑· 군위 현감· 사헌부 감찰· 진도 군수· 성균관 직강· 옥구 현감· 함안 군수· 사제감 첨정· 제용감 정· 봉상시 부정· 춘추관 편수관 등의 직을 지냈으며, 1688년에 80세로서 부호군에 제수되고, 죽은 뒤 첨지중추부사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죽헌문집》 3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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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성(李惟聖)- 자(字) 시중(時仲). 호(號) 사천(沙川). 본관(本貫) 전주(全州)이다.

소과(小科) 1606(병오) 생원시. 전력(前歷) 찰방(察訪). 관직(官職) 승지(承旨)

 

 

● 36세  이규인(李圭寅) - 익재공후 창평공후 재사당공파


1859년 음력 4월 16일 수봉공(秀峯公) 규인(圭寅) 선생은 고려의 문충공(文忠公) 익재(益齋-李齊賢)의 19세손으로

성종(成宗)과 연산조(燕山朝)의 명신(名臣)인 재사당(再思堂) 이원(李원)의 12대손(十二代孫)으로 태어났다.

 

철종10년(哲宗十年) 부친 재영(存榮)과 *무의공(武毅公)의 후예(後裔)인 모친 무안 박씨(務安朴氏) 사이에 2대 독자(二代獨子)로 태어났다.

 

지금의 경주 외동읍 괘리(慶州外東邑掛里) 487번지에서 7남매의 막내 외아들로 태어나다.

 

자(字)는 우서(瑀瑞)이고 호는 수봉(秀峯)이다.

 

1865年 나이 6세가 되자 규택(圭澤) 재종형(再從兄)이 훈장(訓長)으로 있는 서당에 다니다.

 

1872年 13세에 옥산의 여강 이씨(驪江李氏)와 혼인하다.

 

1877年 음력 6月20日에 부친(父親)을 여의고 가업(家業)을 물려받다.

 

가업(家業)인 농사(農事)를 물려받아 탁월한 경영으로 많은 재산(財産)을 모으고 구휼사업(救恤事業)을 펼치다.

 

1919年 오늘의 수봉학원(秀峯學園-현 慶州中高等學校)의 모태(母胎)라 할 수 있는 수봉정(秀峯亭)을 건립하고 또 "이수봉정(李秀峯亭)"의 이름으로 이제까지 주민들의 구휼사업(救恤事業)을 위해 쓰던 재산을 등기하여 체계를 세워 본격적으로 교육(敎育), 의료(醫療), 구휼(救恤)의 사회사업(社會事業)을 펼쳤다.

 

서거(逝去)하기까지 17년 동안 그 재원(財源)을 교학(敎學), 구휼(求恤)과 독립운동가의 지원을 위하여 사용하였다.

 

공은 뜻을 오로지 실용후생(實用厚生)에 두었다.

 

백성들이 기아(饑餓)에 허덕이는 참상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5천석의 부자인 공(公)은 '의식주(衣食住)가 족한 나머지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라는 신념에서이다.

 

걸출한 인물을 수 없이 배출(輩出)하고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손꼽히는 명문족(名門族)이었으나 이 당시까지도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가문의 뿌리인 시조사당(始祖祠堂)조차 마련하지 못한 처지였다.

 

이에 공(公)이 향사(享祀)를 받들 위토(位土)를 내놓고 이종락 선생이 재복을 헌납하여 비로소 표암재(瓢菴齋)가 건립되니 늦게나마 조상의 음덕에 보답할 길이 열렸던 것이다.

 

1936년 음력 5월 3일 수봉정(秀峯亭)에서 서거(逝去)하였다.

 

묘는 경주시 소정산(慶州市蘇亭山-현, 九政洞소재)의 영역(塋域)에 모셔있다.

 

광복직후 모금에 의한 건국 최초의 동상(銅像)이 설립되고 드디어 1961年 공(公)에게 문화훈장(文化勳章)을 추서(追敍)하였다.

 

1993년 수봉정(秀峯亭)을 역사성에 의한 공적을 인정하여 경북문화재(慶北文化財)로 지정하였고 2차에 걸쳐 국비와 도비 및 시비로 보수하였다.

 

이어 유림(儒林)에서는 공의 실사구시(實事求是)적인 사상과 업적을 높이 사 근세인물백년사 (近世人物百年史)에서 사회사업과 육영사업 그리고 독립운동가의 지원이 인정되어 향의(鄕議- 지역민의 총체적인 의견)로써 설형(設享-향사를 설치)되는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괘동서사(掛洞書社)는 이러한 원사(院祠-지방 사원)라는 뜻에서 의의가 크다.

 

* 수봉공(秀峯公)이라 호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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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의공(武毅公) - 본관은 무안(務安)이며 이름은 의장(毅長)이다.

생몰(生沒)년은 1955-1615年이고, 15777年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시에 50여 차례 교전(交戰)하여 적을 물리치고, 1600년 1등 공신(一等功臣)으로 녹훈(錄勳)되었으며, 1615年 전사(戰死) 하였다.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호조판서겸 오위도총부도총관(戶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으로 증직(贈職)되었다.

시호(諡號)는 무의(武毅)이다.


○ 수봉정(秀峯亭) - 경상북도 기념물 제102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465번지(慶北慶州市外東邑掛陵里465番地)

 

본 건물은 1924년 서당(書堂)인 비해당(匪懈堂)과 약국(藥局)인 보인재(輔仁齋)를 갖춘 2층 건물로 건립하였다.

 

1953년 연구보존(永久保存)상 단층으로 개수되었다.


 

● 36세 이규일(李圭日)


자 경장(暻長)

호 사류재(四留齋)

기타 인명 이경일(李擎日)

생년 1826

연령 79

활동분야 문신 / 관료 / 조선후기

 

* 호가 같은 사류재(四留齋) 국당공 9세손 이정암과는 다른 조상이다.


1826(순조 26)∼1904. 조선 말기의 문신.

 

초명은 경일(擎日), 자는 경장(暻長), 호는 사류재(四留齋). 경북 경주 출생.

 

아버지는 작우(作雨)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주환(周煥)의 딸이다.

 

1850년(철종 1)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1859년에 성균관 *전적, 이듬해에 사간원 *정언을 거쳐 경기도사가 되었다.

 

1861년 사헌부 지평을 지내고 이듬해 황산 현령이 되었는데, 임지에서 *간리(奸吏)들을 엄하게 다스려 부정을 뿌리 뽑았으며 *외역(外驛)의 폐단을 엄중 단속하고 *토호(土豪)들의 *토색(討索)을 금지시켰다.

 

2년 뒤 다시 내직(內職)으로 *승차(陞差)하여 1869년(고종 6) 사헌부 *장령이 되고, 1872년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876년에 큰 흉년이 들어 고을 백성이 굶주리자 봉급을 털어 구제하였다.

 

1900년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을 지내고, 1903년 통정대부가 되었다.

 

만년에는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힘썼다.

 

저서로는 《사류재집》 6권이 있다.

 

*사류재공(四留齋公)이라 호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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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자(副正字)- 조선 시대에, 교서관·승문원에 속하여 경서 및 기타 문서의 교정을 맡아보던 종9품 벼슬.

*전적(典籍)- 조선 시대에, 성균관에 속하여 성균관의 학생을 지도하는 일을 맡아보던 정6품 벼슬.

*정언(正言)- 조선 시대에, 사간원에 속한 정육품 벼슬. 태종 1년(1401)에 문하부의 낭사가 사간원으로 독립할 때 습유를 고친 것이다.

 

*지평(持平)- 1308년(충렬왕 34) 감찰사(監察司)를 사헌부(司憲府)로 고치면서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1372년에 사헌부의 속관으로 재설치 되면서 고려시대를 이어 조선시대까지 존속하였다.

지평의 직무는 정치 시비에 대한 언론활동, 백관에 대한 규찰과 탄핵, 풍속 교정, 억울한 일을 풀어주는 일 등을 하였다.

*간리(奸吏)- 간사한 관리나 공리(公吏).

*외역(外驛)- 역참의 찰방 권한이 미치지 않는 역외의 지역을 흔히 외역(外驛)이라 불렀다.

이 외역의 관리들이 부패하고 폐단이 많았다

*토호(土豪)- 어느 한 지방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양반을 떠세할 만큼 세력이 있는 사람

*토색(討索)- 돈이나 물건 따위를 억지로 달라거나 빼앗음.

*승차(陞差)- 한 관청 안에서 윗자리의 벼슬로 오름.

*장령(掌令)- 고려와 조선시대에 감찰(監察)업무를 담당하던 관직.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설치하였던 사헌부의 세 번째 벼슬로 태조 때 시사(侍史)라 하던 것을

1401년(태종 1) 장령(정4품)으로 고치고 2명을 두었다.

*시독(侍讀)- 조선 후기에, 궁내부의 황태자궁 시강원에 속한 벼슬.

 

 

  36세 이규채(李圭彩) - 상서공후 통진공파


1888(고종 25)~1947. 독립운동가

 

일명 규보(圭輔), 자는 공삼, 호는 경산(庚山). 동아(東啞). 우정(宇精).

 

경기도 포천 출신.

 

3.1운동 이후 항일의식을 고취하다가 상해로 망명, 1924년 임시의정원 의원이다.

 

1930년 한국독립당 정치부위원 및 군사부참모장,

 

1933년 중화민국 제3군 상교참모(上校參謀),

 

1934년 신한 독립단 감찰위원장,

 

1935년 9월 25일 상해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10년 언도를 받고 복역하다가 1940년 가출옥하였고

 

1945년 단군전봉건회(檀君殿 奉建會) 부위원장, 반탁 국민 연맹회 상무위원, 미소공동회의 대책 국민연맹 대표위원, 대한독립 촉성 국민 대회장, 대종교 총본사 경의참의 등을 역임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우정공(宇精公) 이규채(李圭彩)


자 공삼

호 경산(庚山)/동아(東啞)/우정(宇精)

기타 인명 이규보(李圭輔)

생년 1888

연령 60

활동분야 항일 / 국방 / 독립운동가


1888(고종 25)∼1947. 독립운동가.

 

일명 규보(圭輔). 자는 공삼, 호는 경산(庚山)· 동아(東啞)· 우정(宇精).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철영(喆榮)의 아들이다.

 

1908∼1910년까지 *청성학교(靑城學校) 교원으로 재직하였다.

 

3·1운동 이후 *창신서화연구회(創新書畵硏究會)의 회장으로 있으면서 남녀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다가 일본경찰에 발각되자 상해로 망명하여 1924년 *임시의정원의 의원으로 피선되었다.

 

1930년 한국독립당의 정치부위원 겸 군사부참모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32년 총무위원장이 되었다.

 

1933년 중화민국 길림육군(吉林陸軍) 제3군의 *상교참모(上校參謀)가 되었으며,

 

1934년 신한독립당 감찰위원장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다음해 9월 25일 상해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10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1940년에 가출옥하였다.

 

1945년 광복 후 *단군전봉건회(檀君殿奉建會) 부위원장을 비롯, *반탁국민연맹회 상무위원, 미소공동회의 대책국민연맹 대표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대회장, *대종교총본사 경의참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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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성 학교(靑城學校)- 경기도 포천에 세?던 학교

*창신 서화 연구회(創新書畵硏究會)- 3·1운동 이후 서화 연구회를 창설하여 회장으로 취임. 이곳에서 남녀학생을 상대로 비밀리에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임시의정원 의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법기관이다.

1919년 상하이(上海)에서 개원되었고, 첫 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이후 1945년 광복 때까지 그 명칭과 조직을 유지하면서 임시정부의 입법 의결기관으로 역할 하였다.

*상교참모(上校參謀)- 중국 길림 육군 제3군 부대의 지금의 대령급 계급

*단군전 봉건회(檀君殿奉建會)- 1945년 이담(李淡)을 대 표로 한 <단군전 봉건회(檀君殿奉建會)>로부터 시작.

단군을 숭봉(崇奉)함으로써 민족의 주체의식을 앙양시키는 것.

*반탁 국민 연맹회- 1943년 12월의 카이로선언에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였고 이는 다시 1945년 7월의 포츠담 선언에서 재확인되었다.

분할된 상태로 미. 영. 소 3국 외상은 그 해 12월에 모스크바에서 회동하고 한반도에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국민은 맹렬한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대종교 총본사- 단군을 신앙으로 하는 대종교의 총본사(總本司)는 대종교의 중앙기구이다. 서대문구 홍은 2동에 소재한다.

*경의참의- 대종교 총본사의 중앙기구 조직의 하나


○ 이규채(李圭彩)


1888(고종 25) ~ 1948

 

1888년(고종 25) 경기도 포천(抱川) 가산면 방축리에서 출생

 

1908부터 1910년까지 청성 학교에서 후진양성

 

방축리에「이규채 선생 행적비」소재


□ 주요업적

 

1908~1910년까지 청성 학교(靑城學校)에서 교편을 잡고 후배교육에 힘썼다.

 

1910년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자 교육계에서 물러나 한학(漢學)과 서예에 정진하면서 때를 기다리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가담하였다.

 

3·1운동 이후 창신 서화 연구회(創新書畵硏究會)를 창설하여 회장으로 취임하여 남녀학생을 상대로 비밀리에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본경찰에 발각되자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이후 상해 혁명자 동지회(上海革命者同志會)에 가입하여 항일무장 투쟁의 선봉대로서 중국의 각지를 활동하여 일본의 군시설과 일본인 거류지를 습격, 방화하였다.

 

1924년 12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1930년 7월 26일 한족 자치 연합회를 모체로 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키 위한 목적으로 홍진(洪震)· 신숙(申肅)· 남대관(南大觀)· 지청천(池靑天) 등이 중심이 된 한국독립당이 창설되자 정치부의원 겸 군사부 참모장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3월 조경한(趙擎韓), 이종선(李鍾善) 등과 함께 아성현(阿城縣) 영발둔(永發屯)에 있는 중국군 사령관 고봉림(考鳳林)과 참모장 조린(趙麟) 등을 탐방하여 한·중군의 공동항일전 합작을 협의하였다.

 

이어 한국독립당의 총무위원장이 되어, 1933년 본부를 만주(滿洲)에서 북경(北京)으로 옮기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후 남경에 본부를 두고 있던 신익희(申翼熙)· 윤기섭(尹琦燮) 등의 한국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이 제휴하여 1933년 10월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으로 발전적 통일을 보게 되었다.

 

1934년 신한독립당의 감찰의원장으로 피선되어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1935년 9월 25일 상해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혀 그해 경성지방법원에서 10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

1940년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도 항상 일본경찰의 감시 속에 나라의 광복을 염원하면서 생전에 효도를 다하지 못한 어머니의 묘 앞에서 여막을 짓고 3년간 정성을 다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정계 일선에서 국가재건을 위하여 애쓰는 한편, 단군전 봉건회(檀君殿奉建會) 부위원장을 비롯하여 신탁통치반대 국민연맹위원직과 미소공동회의대책 국민연맹 대표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으로 큰 공을 세웠으며, 대종교 총본사 정의참의(政議參議)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문무(文武)를 겸비하였으며,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부모에 대한 효성이 매우 지극하였으며, 정교(政敎)가 한결같았다.

 

출생지인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에 행적비(行蹟碑, 향토유적 제10호)가 세워져 있다.

 

1963년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우정공(宇精公) 규채(圭彩) 


공은 1888년 6월 6일 경기도 포천(抱川)에서 태어나고 1947년 3월 2일에 사망했다.

 

이명(異名)은 규보(圭輔)라고 하며 자는 공삼(公三) 호는 경산(庚山)· 동아(東啞)· 우정(宇精)이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상서공후 통진공 후예 철영(喆榮)이다.

 

1908~1910년까지 청성학교(靑城學校)교사로 후배교육에 힘을 기울이다 1910년에 사임하였다.

 

1919년 삼일운동 당시 대대적인 만세시위로 전국제일의 의거지역으로 유명했던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칠곡리. 이곳은 대대로 평리공파 어모공 후손들의 세거지로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맨손으로 일경에 대항했던 애국투사 대부분이 어모공의 후손들이었다.

 

당시 현장에서 총상을 입거나 타살된 자가 부지기수였고 혹독한 고문 끝에 옥고를 치른 사람도 백여 명에 이르렀다.

 

독립운동사에 남을 이날의 의거로 삼일운동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팔십인 중 경주 이씨 어모공 후손이 무려 마흔 네 분에 달한다

 

3. 1운동후 공은 창신서화연구회(創新書畵硏究會)를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하고 학생에게 항일 의식을 고취하였다.

 

1921년 10월 일본 경찰에 발가되자 상하이[上海(상해)]로 망명하였다.

 

1924년 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 충청도의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으며

 

1930년 7월 26일에 한족자치 연합회를 모체로 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키 위한 목적으로 홍진(洪震)·신숙(申肅)·남대관(南大觀)·이청천(李靑天) 등이 중심이 되어 창설한 한국독립당에 가입, 정치부 위원 겸 군사부 참모장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각부에 소속되었던 독립군 중에서 정예대원을 뽑아 한국독립당군(韓國獨立黨軍)을 편성하고, 당에는 6개의 위원회를 두는 한편 중앙당부, 지당부(支黨部), 구당부(區黨部)를 설치하고 만주전역의 독립단체를 총망라하여 진영을 강화하였다.

 

1932년 한국독립당 총무위원장으로 선임되어 본부를 만주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기는 역할을 담당했다.

 

본부를 옮김에 따라 한국독립당군은 해체하게 되었다

 

1933년 지린(吉林길림) 육군제3군의 중국군 상교참모(上校參謀)로 있다가

 

1934년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 감찰위원장이 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35년 남경(南京)에 본부를 두고 있던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과 한국독립당이 제휴하여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조직하게 되자 그는 감찰위원장(監察委員長)으로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9월 25일 상하이에서 일본영사관 소속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경성형무소(京城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0년 10월11일에 가출옥하였다.

 

1945년 해방 후 단군전봉건회(檀君殿奉建會) 부위원장, 반탁국민연맹회 상무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대회장, 대종교총본사 경의참의, 미·소공동위원회의 대책국민연맹 대표위원 등을 지냈다.

 

1963년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36세 이규헌(李圭憲) - 상서공후 통진공파


(1896~1976). 자는 성빈(聖斌), 호는 긍당(肯堂), 공주출신

 

항일투사이며 숙부(叔父)인 철영(喆榮)에게 수학했다.

 

항일투사인 철영의 유업을 지키며 위선사업(爲先事業)에 심혈을 기울였고 조선의 명신 이유태(李惟泰)의 유허비 건립에 참여했고, 철영의 ≪성암집(醒菴集)≫ 출간, 이유태의 ≪초려전집(初廬全集)≫등을 중간하는데 참여했다.

 

유고로는 ≪긍당집(肯堂集)≫이 있다


○ 긍당공(肯堂公) 이규헌(李圭憲)


자 성빈(聖斌)

호 긍당(肯堂)

생년 1896

연령 81

활동분야 교육 / 사상 / 학자


1896∼1976. 근대의 학자. 자는 성빈(聖斌), 호는 긍당(肯堂). 공주출신.

 

아버지는 회영(晦榮)이며, 어머니는 신창 맹씨(新昌孟氏) 희술(羲述)의 딸이다.

 

재종숙 하영(夏榮)에게 입양되었으며, 작은아버지 철영(喆榮)에게 수학하였다.

 

항일투사인 철영의 유업을 지킴으로써 많은 사찰과 조사를 당하면서도 의연하게 지조를 지켰고, *송병관(宋炳瓘)·*오진영(吳震泳) 등과 교유하였으며, 또한 문장이 뛰어나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는 조상을 위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 *제전(祭田)과 재실(齋室) 등을 구비하였다.

 

조선시대의 명신 이유태(李惟泰)의 유허비 건립에 참여하였으며, 철영의《성암집 醒菴集》을 편집, 간행하였고, 이유태의《초려전집 草廬全集》중간과《사례홀기 四禮笏記》·《문산문답 文山問答》등을 간행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는 작은아버지이며 스승이었던 철영의 사상을 이어받아 배일(排日)은 물론 광복 후에도 양풍(洋風)의 급진(急進)을 걱정하며 전통사상과 예의를 고수하였다.

 

저서로는 《긍당집》 7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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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관(宋炳瓘)- 한말(韓末)의 학자.

자는 형숙(瑩叔)이고 호는 극재(克齋)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오적사(吾適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著書)로는 극재집(克齋集) 19권(卷)이 있다.

*오진영(吳震泳)- 유학자.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석농(石農),

1905년 그는 일본의 불의(不義)를 규탄하는〈포고천하문 布告天下文〉을 지었고, 그의 문인들이 안성(安城) 경앙사(景仰祠)에 배향하였다.

*제전(祭田)- 조상의 제사를 받들기 위하여 설정한 위토(位土). 제사(祭祀)에 드는 비용(費用)을 마련하기 위(爲)하여 장만한 토지(土地).


 

● 36세 이규홍(李圭弘)


1881(고종 18)~1928). 한말의 의병장

 

자는 원오(元五), 호는 오하(梧下). 익산 출신. 중추원의관 기영(琪榮)의 아들.

 

1906년 4월 태인에서 최익현(崔益鉉)과 임병찬(林炳瓚)을 만나 의병에 동참하기로 약속하고

 

이듬해 10월 의병 200명 총기 300여 자루를 갖추고 1907년 11월부터 270명으로 불어난 의병을 이끌고 고산 진안 장수 용담 등의 산악지대에서 왜병 100여명을 사살했다.

 

1914년 3월에는 임병찬의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部)에 참여하고 계속하여 싸우다가

 

1917년 10월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충남 대덕군 산내면 오도산성(五道山城)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탈출,

 

1918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김규식(金奎植)의 독립청원서 제출을 위한 파리 출장비로 1,300원을 제공하고

1920년 만주로 이동하여 김좌진(金佐鎭)에게 군관학교 운영자금으로 3,000원을 주었다.

 

다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보부상으로 위장, 국내에 잠입, 활동하다가 1924년 2월 8일 서울에서 왜경에게 잡혀 4개월 동안 고문을 당하고 보석으로 출감하였다.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오하공(梧下公) 이규홍(李圭弘)


자 원오(元五)

호 오하(梧下)

생년 1881

연령 48

활동분야 항일/국방 / 의병 / 의병장


1881(고종 18)∼1928. 한말의 의병장. 자는 원오(元五), 호는 오하(梧下).

 

전라북도 익산 출신. 중추원의관 기영(琪榮)의 아들이다.

 

1906년 4월 박이환(朴?桓)· 문형모(文亨謨)와 더불어 태인에서 최익현(崔益鉉)과 임병찬(林炳瓚)을 만나 의병활동에 동참할 것을 맹약하였다.

 

이듬해 10월까지 의병 200여명, 총기 300여 자루, 탄환 등을 준비한 뒤 1907년 11월 257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고산· 진안· 장수· 용담 등지에서 전투를 벌여 1908년 초까지 왜병 100여명을 사살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그가 이끄는 의병부대는 용담 주자천(朱子川: 지금의 朱川)에서 1908년의 새해를 맞고, 정월 초하루부터 초사흘에 이르기까지 진산·금산 등지를 계속 행군하며 왜군과 접전하는 동안 왜병 56명을 죽였다.

 

1914년 3월에는 임병찬의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部) 창립계획을 수립하는 데 참여하였다.

 

1917년 10월 거처를 탐지한 일본경찰의 급습을 받아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오도산성(五道山城)에서 일본경찰과 교전 끝에 탈출, 1918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와 접촉, 김규식(金奎植)의 독립청원서 제출을 위한 파리 여비로 1,300원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에 협력하다가, 1920년 3월 항일운동의 무대를 만주로 옮겨 김좌진(金佐鎭)에게 군관학교 운영자금으로 3,000원을 헌납하였다.

 

그 해 6월 자신은 독립운동의 자금조달을 위하여 국내에 잠입하여 보부상으로 가장, 활약하였다.

 

1924년 2월 8일 서울에서 일본경찰에 잡혀 4개월 동안 고문을 받은 뒤 보석 출감되었다.

 

1968년 대통령표창이,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28세 이극복(李克福) - 익재공후 판윤공파


1548(명종 3)~1596(선조 29).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자는 유사(有司), 호는 모석(慕石) 또는 모의당(慕義堂)이다.

 

일찍이 병법과 서상(筮象)을 탐구하면서 궁마술(弓馬術)을 익히더니 1586년 산사(山寺)에서 글을 읽다가 혜성(彗星)이 뻗치는 것을 보고 병란(兵亂)을 예견하고 양곡을 300여석을 북산 굴에 저장하고 1592년 정월에 이경한(李景漢)? 이백인(李伯仁) 등과 경주 안압지(雁鴨池)에서 만나 의병을 일으키기로 약속하고 4월에 왜병이 침입하자 그는 총병(摠兵)으로 안강? 월성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단주성(檀州城)에서 대승하였고 이어서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郭再祐)와 합세하여 싸웠다.

 

1594년 형제가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첨정(訓練僉正)이 되었고 이듬해에 이여송(李如松)과 합세하여 남한산성에서 왜군을 대파했으며 1596년 팔공산 싸움에서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뒤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유고로 ≪모석유고(慕石遺稿)≫가 있다.

 

 

○ 모석공(慕石公) 이극복(李克福) 


자 : 유사(有司)

호 : 모석(慕石)/모의당(慕義堂)

생년 : 1548

연령 : 49

활동분야 : 항일/국방 / 의병장


1548(명종 3)∼1596(선조 29). 조선 중기의 의병장.

 

자는 유사(有司), 호는 모석(慕石) 또는 모의당(慕義堂).

 

가선대부(嘉善大夫) 윤(倫)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조호익(曺好益)의 문인이다.

 

박학하여 섭렵하지 않은 글이 없었으나, 특히 이수(理數)와 서상(筮象)에 관한 책을 탐구하였다.

 

일찍이 《육도 六韜》와 《삼략 三略》 등의 명서를 공부하여 지략을 넓히고 궁마술(弓馬術)을 익혀 국란에 대비하였다.

 

1586년 산사에서 글을 읽다가 혜성(彗星)이 뻗치는 것을 보고 병란(兵亂)을 예견하고, 그에 대비하기 위하여 양곡 300여 섬을 준비하여 북산 굴속에 저장해두고,

 

1592년 정월 이경한(李景漢)·이백인(李伯仁) 등과 안압지(雁鴨池)에 모여 국란이 있으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였다.

 

4월에 왜병이 침입하자 모의당에 모여 의병을 일으키고, 준비하여둔 양곡을 군량미로 사용하였다.

 

총병(摠兵)이 되어 안강·월성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단주성(檀州城)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郭再祐)와 합세하여 적을 무찔렀다.

 

유성룡(柳成龍)의 추천으로 사복(司僕)이 된 뒤, 1594년 형제가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첨정(訓鍊僉正)이 되었다.

 

이듬해 이여송(李如松)과 합군하여 남한산성에서 적을 대파하였다.

 

1596년 팔공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모석유고》 1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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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석유고(慕石遺稿)

- 조선 중기의 의병장 이극복(李克福)의 시문집.

1767년(영조 43) 6대손 중석(重錫)이 편집, 간행하였다.

시 11수, 서(書) 7편, 일기 1편과 부록으로 유사 2편, 만사 6수, 제문 1편, 행장 1편, 묘갈문 1편, 기 1편, 상량문 1편, 후지(後識) 3편 등이 실려 있다.

책머리에 박정신(朴正新)의 서문과 책끝에 중석의 발문이 있다.

시는 주로 나라를 위해 죽음을 각오한 저자의 뜻을 보인 것이다.

 

<모의당일기(慕義堂日記)>는 1591년(선조 24) 10월부터 96년 9월까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체험한 것을 쓴 것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적과 싸운 장소와 전과 등이 기록되어 있어 임진왜란사 연구에 자료가 된다.

1책. 석인본. 연세대학교도서관 소장.

 

* 22세 익재공후 판윤공파 참봉공(휘 연) 계대입니다.

 

 

● 26세 이기남(李箕男) - 상서공후 백사공파


1598(선조 31)~1680(숙종 6).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정숙(靜叔), 항복(恒福)의 아들이다.

 

정경세(鄭經世)의 천거로 관직에 나아가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였고

뒤에 신천 군수. 서흥 부사 등을 지내고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풍천부사에서 체직(遞職)될 때 쌀 한 섬만을 가지고 올만큼 청렴하였다고 한다.


○ 부사공(府使公)  이기남(李箕男) 


자 정숙(靜叔)

생년 1598

연령 83

활동분야 항일/국방 / 무신

과거 및 취재 [생원진사시] 인조(仁祖) 8년 (163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3위


1598(선조 31)∼1680(숙종 6).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정숙(靜叔)이다.

 

영의정 항복(恒福)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감찰 오언후(吳彦厚)의 딸이다.

 

1630년(인조 8) 진사가 되고, 어머니의 절행(節行)으로 정경세(鄭經世)가 경연(經筵)에서 천거하여 벼슬에 나갔다.

 

1631년 북방 야인이 자주 침구하므로 자진 출전하여 공을 세웠고,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왕을 호종하였으며, 예조판서라 가칭하여 청나라 진지에 내왕하기도 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홍원 현감 · 영암 군수를 거쳐 동지중추부사로 승진하였으나, 당시 평안·황해 양도가 호란으로 인하여 문란하여졌던 민정(民情)이 회복되지 않았고, 연행(燕行)의 요충지이며 청나라 사신들이 빈번히 내왕하는 곳이어서 많은 읍들이 피폐하였으므로,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1638년 영원 군수로 부임하였다.

 

그 뒤 양덕 현감 · 수안 군수를 거쳐, 1651년(효종 2) 백령 첨사 · 이산 군수 · 풍천 부사 · 신천 군수 · 서흥 부사를 지냈다.

 

1664년(현종 5)에는 장연 부사·상원 군수 등 관서지방의 외직을 역임하였다.

 

그 뒤 지중추부사에 이르러 정헌대부(正憲大夫)의 위계에 올랐다.

 

풍천 부사에서 체임(遞任)할 때에는 오직 쌀 한 섬만을 싣고 귀향할 만큼 청백하였다.

 

 

● 이기룡(李起龍)


자 : 군서(君瑞)

호 : 궤은(궤隱)/ 동비야인(東鄙野人)

생년 : 1600

활동분야 : 예술/ 화가


1600(선조 33)∼?. 조선 중기의 도화서(圖畵署) 화가.

 

자는 군서(君瑞), 호는 궤은(?隱) 또는 동비야인(東鄙野人).

 

화원(畵員) 집안 출신으로 이홍규(李泓?)의 아들이다.

 

도화서 화원으로 교수(敎授)를 역임하였다.

 

1643년(인조 21) 통신사 윤순지(尹順之)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는데, 일본에서〈송암비우도(松巖飛羽圖)〉를 그렸다고 전하며 이 그림에 김의신(金義信)이 “한 마리는 날고 한 마리는 서서 천기(天機)가 자재(自在) 하다(一飛一立天機自在).” 라는 화제(畵題)를 썼다고 한다.

 

그의 작품으로 1629년에 그린 〈*남지기로회도 南池耆老會圖〉가 전해올 뿐 현존하는 유작이 드물어 화풍을 잘 파악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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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지기로회도

- 기로연(耆老宴)을 그린 기념화(記念畵)로서 성루(城樓)와 성곽 너머 보이는 연못과 건물 안에 12명의 연회장면을 담았는데, 주변을 안개로 감싸서 정리하였으며 연못 좌우의 버드나무와 건물 뒤편의 숲을 표현한 필치에서 조선 중기의 기로연도의 격식을 엿볼 수 있다.

* 기로연(耆老宴)

- 조선 시대 기로소(耆老所)의 문신들을 위해 삼짇날[上巳, 3월 3일]과 중양절(重陽節, 9월 9일)에 국가에서 베풀었던 잔치. 정2품의 실직(實職)을 지낸 70세 이상의 문과 출신 관원만 참석함.

종친으로 70세 이상의 2품 이상인 자, 정1품관, 경연 당상관들을 위해서는 훈련원이나 반송정에서 기영회(耆英會)라는 잔치를 베풀었음. ≒ 기로(耆老). 기영회(耆英會).

 

*정근(正根) - 수형(壽亨) - 홍규(泓)로 이어지는 화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그도 도화서(圖畵署) 화원으로 교수를 지냈다.

1643년(인조 21) 김명국(金命國)과 함께 통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일본에서 그린 그림 중 〈송암비우도 松巖飛羽圖〉에 김의신(金義信)이 화제(畵題)를 썼다고 한다.


○ 이기룡필남지기로회도(李起龍筆南池耆老會圖)


종 목 보물 866호

명 칭 이기룡필남지기로회도(李起龍筆南池耆老會圖)

분 류 풍속화

수 량 1축

지정일 1986.10.15

소재지 서울 관악구 신림동 산56-1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유자 국유

관리자 서울대학교


이기룡필(李起龍筆) 남지기노회도(南池耆老會圖)는 서울 숭례문(崇禮門)밖 남지(南池)에서 열린 기노회(耆老會) 회원(윤동로, 이귀 등)의 계회(契會)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그림의 왼쪽, 오른쪽, 아래쪽에는 참가자들의 좌목(座目)과 계회의 성격을 자세히 기록하였으며, 상단(上段)의 제자(題字)는 전서체(篆書體)로 단아하게 썼다.

 

16세기 임진왜란 이전의 계회 모습을 그린 조선초기의 그림으로서 특히 안견화풍(安堅畵風)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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