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경주이씨 인물(녹-명)

녹전 이이록 2009. 4. 1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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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 인물(녹-명)


 

● 상서공(尙書公) 이녹천(李錄千) - 시랑공(10세 휘 춘림) 계대


고려사에 녹천(祿千)이라 하였다.

 

계대(系代)는 중조 10세인 순흥 부사(順興府使) 춘정(春貞)의 동생 문하시랑(門下侍郞) 춘림(春林)의 아들이다.

 

중조 11세로 생년 미상이다.

 

벼슬은 공부상서(工部尙書)이며 인종(仁宗) 을묘(乙卯. 1135)에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주사(舟師- 수군)를 거느리고 서경(西京- 평양)의 도적 묘청의 여당(餘黨- 남은 잔당)을 쳤다. 

 

이 일이 고려사에 있다.

 

후손으로 7대손 중조 18세 승(丞) 길상(吉祥)의 네 아들 양오. 존오. 존중. 존사가

각기 직장공파. 석탄공파. 진사공파. 교감공파의 대파로 분파한다.  


○ 동문선권지29(東文選卷之二十九) 비답(批答)


上將軍李祿千請老三表依允 

壯而陳力。老則佚身。非唯臣子遂進退之宜。抑亦朝廷優耆艾之德。始終之義。典禮具存。

卿宿衛有年。捍禦多效。今其老矣。固欲息焉。姑抑朕貪賢之至懷。以成爾知止之雅尙。


동문선 제29권   비답(批答)


상장군 이녹천이 늙었다고 세 번 표를 올려 사직함으로 윤허하였다.

 

장년(壯年)에 힘을 다하다가 늙어서 쉬는 것은 신하가 진퇴를 완전히 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또한 조정이 원로를 우대하는 덕인바, 시종(始終)을 온전히 하는 의리에 대해서는 규정이 갖추어져 있다.

 

경은 여러 해 동안 궁궐을 숙위하여 경호(警護)에 허다한 공적을 남겼는바, 이제 늙어 쉬려 함은 당연한 것이다.

 

이에 짐의 어진 이를 탐하는 지극한 마음을 억제하여, 경의 그칠 줄 아는 고상한 뜻을 성취케 하노라.


 

● 18세 이달존(李達尊) - 익재공파


1313(충선왕 5)~1340(충혜왕 복위 1). 고려의 문신

 

자는 천각(天覺), 호는 운와(雲窩). 제현(齊賢)의 차자.

 

1330년 문과에 급제, 감찰장령, 전의부령 등을 역임하고

 

1339년 충혜왕이 원으로 잡혀갈 때 아버지와 함께 배종하였고

 

복위되자 전리총랑(典理摠郞)이 되었으나 이듬해 귀국도중 장림역(長林驛)에서 병사하였다.

 

특히 문장이 뛰어났다.


○ 운와공(雲窩公) 달존(達尊)


익재공(益齋公) 휘 제현(齊賢)의 둘째 아들이다.

 

자는 천각(天覺)이고 호는 운와(雲窩)이다.

 

충선왕(忠宣王) 계축년(癸丑年 1313)에 태어났다.

 

1330년 나이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장령, 전의부령 등을 역임하고

보문각 직제학(寶文閣 直提學-정4품)에 이르렀다.

 

경진년(庚辰年 1339) 충혜왕이 원으로 잡혀갈 때 아버지와 함께 배종(陪從)하였고

복위되자 전리총랑(典理摠郞)이 되었으나

이듬해 귀국도중 장림역(長林驛)에서 병사하였으니 겨우 나이 28세이었다.

 

증직(贈職-죽은 뒤에 내리는 벼슬)은 *태상경(太常卿-정4품?)이고

임해군(林海君)에 추봉(追封-봉군이 추가됨)되었다.

 

특히 문장(文章)이 뛰어났다

 

^ 배는 남포 백씨( 浦白氏) 상당군(上黨君) 이정( 正)의 따님으로 덕림(德林). 수림(壽林). 학림(學林)과 1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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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상경(太常卿)- 의례와 제사에 관한 일을 총괄하던 관직으로 조선시대의 예조 판서와 같은 것이다.


○ 이달존(李達尊)


자 천각(天覺)

호 운와(雲窩)

생년 1313

연령 28

활동분야 문신/관료 / 문신-고려 / 문관


생몰(生沒)년은 1313(충선왕 5)∼1340(충혜왕 복위 1)이다.

 

고려의 문관으로 자는 천각(天覺)이고, 호는 운와(雲窩)이다.

 

문하시중 제현(齊賢)의 아들이다.

 

처음에는 음보(蔭補-蔭敍-조상祖上의 덕으로 벼슬을 얻음)로 별장(別將)이 되었으나,

 

1330년(충혜왕 즉위년) 문과에 급제하여 헌납·감찰장령·전의부령(典儀副令)을 역임하였다.

 

1339년(충숙왕 복위 8)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갈 때

아버지 제현과 함께 배종(陪從-임금이나 높은 사람을 모시고 따라가는 일)하였다가

충혜왕이 복위하자 전리총랑(典理摠郞)이 되어 이듬해 왕과 함께 귀국 도중 장림역(長林驛)에서 병사하였다.

 

특히 문장(文章)이 뛰어났다.


 

● 18세 이달충(李達衷) - 국당공후 제정공파


?~1335(우왕 11). 고려말의 문신

 

자는 지중(止中), 호는 제정(霽亭). 국당(菊堂) 천(蒨)의 아들이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좨주를 거쳐 전리판서*감찰대부를 역임하고

 

1360년 호부상서 겸 동북면병마사로 있을 때 직간(直諫)하다가 파면되었으나

 

1366년 밀직제학으로 기용되어 신돈이 천권(擅權- 권력을 제 멋대로 부림)하던 때에

신돈에게 주색을 일삼는다고 공석상에서 호통 친 것으로 파직되었으나

신돈이 주살된 뒤에 계림부윤이 되었고 1385년(우왕 11)에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 제정공(霽亭公) 이달충(李達衷)


자 지중(止中)

호 제정(霽亭)

시호 문정(文靖)

활동분야 교육/사상 / 학자 / 유학자, 문신


생년은 미상이고 졸(卒)은 1385(우왕 11)이다.

 

고려말의 유학자 ·문신이며 자는 지중(止中)이고 호는 제정(霽亭)이다.

 

첨의참리(僉議參理) 천(풀초아래 사람인변+靑)의 아들이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를 거쳐서

공민왕 때 전리판서(典理判書)·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하였다.

 

1359년(공민왕 8) 호부상서로 동북면 병마사가 되었다.

 

호부상서로 있던 1360년 팔관회 때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면되었으나,

훌륭한 학자였으므로 1366년에 밀직제학으로 다시 기용되었다.

 

신돈이 전횡하던 때에 그에게 주색을 일삼는다고 공석에서 직언한 것이 화근이 되어 다시 파면되었다.

 

신돈이 주살(誅殺)된 뒤에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었고, 1385년(우왕11)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저서로는 《제정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 20세 이 담(李擔) - 익재공파.


1370(공민왕 19)~1405(태종 5).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제현(齊賢)의 증손이고 학림(學林)의 아들이며 중파 청호공파 파시조 청호공 휘 희의 아버지 이다.

 

1393년(태조 2)에 문과 을과에 급제, 명필로 상서사(尙書司)에 복무하다가

 

1401년(태종 1)에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우부대언에 이르렀는데 자기 집 개에 물려 죽었다.


○ 대언공(代言公) 이담(李擔) 

 
생년 1370

연령 36

활동분야 문신/관료

과거 및 취재 [문과] 태조(太祖) 2년 (139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3위


1370(공민왕 19)∼1405(태종5).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 제현(齊賢)의 증손자이고, 학림(學林)의 아들이다.

 

1393년(태조 2) 춘장문과(春場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글씨를 잘 써서 항상 상서사(尙瑞司-관리 임용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의 벼슬을 지냈으며,

1401년(태종 1) 직예문관으로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3년 의정부의 이방 녹사(吏房錄事)를 탄핵하여 의정부 당상(堂上-3품 이상)들이

시사(視事- 임금이 신하들과 나랏일을 돌보던 일)하지 않는다고 하여 물의가 빚어졌다.

 

그 뒤 우부대언(右副代言-밀직사에 속한 정3품 벼슬)에 이르렀는데, 자기 집 광견(狂犬)에 물려 죽었다.

 

세계(世系)는 익재공(휘 제현) → 차자 운와공(휘 달존) → 3자 소부윤공(휘 학림) → 대언공(휘 담)


○ 대언공(代言公) 휘 담(李擔)


1370(공민왕 19)∼1405(태종5).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친 문신이다.

 

중조 20세로 고려 말 문하시중(門下侍中) 제현(齊賢)의 증손자이고 소부윤(少府尹) 학림(學林)의 아들이다.

 

1393년(태조 2) 춘장문과(春場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글씨를 잘 써서 계속 상서사(尙瑞司)의 벼슬을 지냈으며

1401년(태종 1) 직예문관으로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3년 의정부의 이방녹사(吏房錄事)를 탄핵하여 의정부 당상들이

시사(視事-관청에 나가서 일을 돌봄)하지 않는다고 하여 물의가 빚어졌다.

 

그 뒤 우부대언(右副代言-승정원에 소속된 정3품)에 이르렀다.

 

자기 집 광견(狂犬)에 물려 죽었다.


○ 가족 상황

 

손(孫) 이문경(李文烱)

부(父) 이학림(李學林)

조부(祖父) 이달존(李達尊)

증조부(曾祖父) 이제현(李齊賢)

외조부(外祖父) 오중경(吳仲卿)

처부(妻父) 남약생(南若生)


○ 이력 및 기타사항

 

전력(前歷)- 생원(生員)

관직(官職)- 대언(代言)


 

● 27세 이대건(李大建) - 익재공후 창평공 생원공파


1550(명종 5년)~?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여립(汝立), 호는 오촌(梧村). 재사당 원(黿)의 증손.

 

진사였는데 숙종 때 우의정에 추서되고 송천서원(松泉書院)에 배향되었다.

 

 오촌(梧村) 이대건(李大建

 

자 : 여립(汝立)

호 : 오촌(梧村)

생년 : 1550

활동분야 : 문신/관료 / 조선중기

과거 및 취재 : [생원진사시] 선조(宣祖) 6년 (157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二等) 7위


1550(명종 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여립(汝立), 호는 오촌(梧村)이다.

 

8별의 셋째 재사당 원(黿)의 증손이다.

 

선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숙종 때 우의정에 추증되어 청주의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원(자라 원) 할아버님은 중조 24세로 '팔별' 즉 창평공(휘 공린)의 셋째 아들인 재사당공(再思堂公) 이시다.


 

● 27세 이대방(李大邦)


호 : 문송(聞松)

생년 : 1598

활동분야 : 교육/사상 / 학자


1598(선조 31)∼1664(현종 5).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문송(聞松)이고 사의(司義) 애(?)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정국공신(靖國功臣) 이성동(李盛仝)의 딸이다.

 

학문이 뛰어나고 사람됨이 밝고 깨끗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산림에서 글을 벗하고 지냈다.

 

또한 지극한 효자였는데, 어버이가 죽자 묘소 곁에 초막을 짓고 상이 끝날 때까지 아침저녁으로

*곡배를 하면서 지냈으며, 평생 어버이가 싫어하던 음식은 먹지 않았다.

 

네 명의 아우들을 모두 학문에 열중하도록 뒤를 밀어주었으며, 비록 천한 노비일지라도 사랑으로 대하였다.

 

산수를 좋아하여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면 어느 곳이나 찾아가서

이름난 선비들과 어울려 도학(道學)과 풍월(風月)을 즐겼다.

 

높은 학덕과 어진 인품이 널리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헌릉*참봉(獻陵參奉)으로 등용하였다.

 

그 뒤 *봉사(奉事)로 승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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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배(哭拜)- 울며 절하는 것

*헌릉(獻陵)- 조선 태종과 비 원경 왕후의 능.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참봉(參奉)- 조선 시대에, 여러 관아에 둔 종9품 벼슬. 능(陵), 원(園), 종친부, 돈녕부, 봉상시,

사옹원, 내의원, 군기시 따위에 두었다.

*봉사(奉事)- 조선 시대에, 관상감·돈녕부·훈련원 및 기타 각 시(寺)·원(院)·감(監)·서(署)·사(司)·창(倉) 따위에 둔 종8품 벼슬.


○ 문송공(聞松公) 휘 대방(李大邦)


1598(선조 31)∼1664(현종 5).

 

호는 문송(聞松)이며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사의(司義) 애(애)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정국공신(靖國功臣) 이성동(李盛仝)의 딸이다.

 

학문이 뛰어나고 사람됨이 밝고 깨끗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산림에서 글을 벗하고 지냈다.

 

또한 지극한 효자였는데 어버이가 죽자 묘소 곁에 초막을 짓고 상이 끝날 때까지

아침저녁으로 곡배를 하면서 지냈으며 평생 어버이가 싫어하던 음식은 먹지 않았다.

 

네 명의 아우들을 모두 학문에 열중하도록 뒤를 밀어주었으며 비록 천한 노비일지라도 사랑으로 대하였다.

 

산수를 좋아하여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면 어느 곳이나 찾아가서

이름난 선비들과 어울려 도학(道學)과 풍월(風月)을 즐겼다.

 

높은 학덕과 어진 인품이 널리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헌릉 참봉(獻陵參奉-종9품)으로 등용하였다.

 

그 뒤 봉사(奉事-종8품)로 승진하였다.


 

● 27세 대병(大甹) -  익재공후 창평공후 재사당공파


*족보와 인터넷에 있는 휘는 ‘유‘로 읽고 있으나 옥편에는 ’이끌 병‘으로 읽고 있다.

'병(甹)'자를 '由'자 있으니 그냥 '유'자로 잘못 읽고 있다.

 

경자 1540(중종 35)에 태어나고 기유 1609(광해군 1)에 돌아갔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자는 경인(景引)이고 호는 활계(活溪)이며 아버지는 생원 종윤(悰胤)이고

어머니는 창원정씨(昌原丁氏)로 담(담)의 딸이다.

 

사숙(私淑) 조정암(趙靜菴)의 높은 제자로 유헌(遊軒) 정조리(丁操履) 문하에서

여러 가지를 스스로 깨우치고 이력을 닦고 수련하여 호남부자(湖南夫子)라고 불리었다

 

1570년(선조3) 생원시에 합격하고 우계(牛溪) 성혼(成渾)에 의하여

사옹원 참봉에 천거되었으나 얼마 뒤 어머니의 질병으로 사직하였다.

 

1595년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취임하지 못하였고 이듬해 사포서 별좌(司圃署別坐),

 

1600년 사근도 찰방(沙斤道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605년 사도시 주부에 제수되고 이어 형조좌랑(刑曹佐郞-정6품)에 승진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대학》을 즐겨 읽고 연구하였으며 인(仁)에 뜻을 두고 경(敬)을 먼저 실행하기에 힘썼다.

 

남원의 영천 서원(寧川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활계유고》 2권이 있다.

 

배는 전주 이씨 증 승지 혼의 따님으로(全州李氏贈承旨渾女) 효녕대군 보현의 손녀(孝寧大君補玄孫)이다


 

● 26세 이득윤(李得胤) - 익재공후 한당공파


1553(명종 8)~1630(인조 8). 조선 중기의 역학자, 악인(樂人)

 

초명은 덕윤(德胤). 자는 극흠(克欽), 호는 서계(西溪).

 

제현(齊賢)의 후손으로 1588년(선조 21)에 진사, 1597년에 참봉, 왕자사부, 의성현령을 지냈다.

 

광해군 때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거문고에 관련한 명(銘)*부(賦)*기(記)*시(詩)*서(書)*고금금보(古今琴譜) 등을 집대성하여

매우 소중한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를 남겼다.


○ 서계공(西溪公) 이득윤(李得胤) 


자 극흠(克欽)

호 서계(西溪)

생년 1553

연령 78

활동분야 교육/사상 / 학자 / 역학자(易學者), 악인(樂人)


1553(명종 8)∼1630(인조 8). 조선 중기의 역학자(易學者)·악인(樂人).

 

자는 극흠(克欽), 호는 서계(西溪).

 

고려말 문신 제현(齊賢)의 후손이다.

 

유학자 서기(徐起)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박지화(朴枝華)에게 역학(易學)을 배우고,

 

1588년(선조 21)에 진사가 되었다.

 

1597년 학행으로 추천되어 희릉 참봉(禧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독서에 전념하다가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고 이어서 형조좌랑·의성 현령을 지냈다.

 

광해군 때 혼란한 정계를 피하여 고향에 머무르면서

김장생(金長生)· 정두원(鄭斗源) 등과 서한을 교환하며 역학과 음악을 토론하였다.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두어 고향에 머무르는 동안에

거문고에 관련된 명(銘)·부(賦)·기(記)·시(詩)· 서(書)·악보·고금금보(古今琴譜) 등을 집대성하여

《현금동문유기 玄琴東文類記》라는 귀한 거문고악보를 후세에 남겼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선공감(繕工監)의 정(正)이 되고,

이듬해 괴산군수가 되어 이괄(李适)의 난으로 소란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관기를 바로잡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과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현금동문유기》 외에 저서로 《서계집 西溪集》·《서계가장결 西溪家藏訣》이 있다.

 

특히, 정두원과 나눈 서한의 내용을 담은 《현금동문유기》는 《안상금보 安常琴譜》·

 

《조성금보 趙晟琴譜》와 더불어 임진왜란 이전의 음악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 조선중기 - 이득윤(李得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이득윤과 ‘서계 이선생 가장결’

 

 ‘정감록’에 수록된 예언서의 저자들 중에도 비교적 낯선 인물이나 조선시대엔 상당히 유명한 예언가였다.

 

서계가 살던 16세기는 우리 역사상 별들의 시대였다.

 

퇴계 이황, 화담 서경덕, 하서 김인후, 율곡 이이, 고봉 기대승, 우계 성혼, 남명 조식 등

조선 유학사(儒學史)의 거장들이 일시에 배출되어, 성리(性理)를 궁구했다.

 

노수신· 백인걸· 유희춘. 임억령 등 선비의 기개를 떨친 이도 많았고, 최경창· 백광훈· 이달 등 시문의 대가도 적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북창 정렴, 토정 이지함, 격암 남사고 등은 신선의 세계를 드나들어 이채를 띠었다.

 

불가(佛家)에도 서산대사 같은 거물이 있었다.

 

위에 언급한 16세기의 인물 가운데 상당수는 예언서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우선 토정과 북창이 그렇고, 격암과 서산대사도 예외는 아니다.

 

서계도 이 부류에 속한다.

 

서계는 유학자인 동시에, 역술가요 음악가였다.

 

그가 지었다는 ‘서계 이선생 가장결’(西溪李先生家臧訣)은 현재 ‘정감록’의 일부로 되어 있다.

 

◇ 서계 이득윤이란 예언가

 

서계는 어려서부터 성리학 공부를 많이 했다.

 

선조 21년(1588년)에는 진사(進士)가 되었으므로,

그의 실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서계는 수학과 역학(易學)에도 밝았다.

 

당시 역술의 대가 박지화(朴枝華)를 방문해 수준 높은 토론을 펼쳤다 하며,

이를 계기로 역학의 대가로 이름을 얻었다.

 

그는 우주자연의 생성과 운행원리에 관한 전문가였다.

 

쉽게 말해, 서계는 주역 점을 잘 치기로 유명했다.

 

아마 그런 덕택이었겠지만 정유재란이 일어나던 1597년 서계는 관직에 등용되었다.

 

처음엔 희릉 참봉(禧陵參奉)에 임명되었고 얼마 후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다.

 

이밖에 한두 가지 벼슬을 더 지냈다.

 

그러다 광해군이 집권하자 조정에서 물러났다.

 

오늘날 충북 청원군 미원면이 서계의 고향이었다.

 

그는 낙향 직후인 광해1년(1609) 미원면 일대 9곳에 이른바 ‘옥화구곡’(玉華九曲)을 정했다.

 

일찍이 성리학의 대가 주희(朱熹)가 송나라 때 푸젠성 무이산에 머물며

무이구곡(武夷九曲)에 묻혀 지낸 사실을 모범으로 삼은 것이다.

 

서계는 청원군 미원면을 남북으로 흐르는 박대천을 따라 하류에서 상류 쪽으로

만경대(萬景臺), 후운정(後雲亭), 어암(漁巖), 옥화대(玉華臺), 천경대(天鏡臺), 오담(鰲潭), 인풍정(引風亭) 및

봉황대(鳳凰臺)를 두었다.

 

옥화구곡이란 이름이 암시하듯 구곡 가운데서 서계에게 가장 중요한 곳은 제4곡 옥화대였다.

 

옥화란 옥구슬이 떨어지듯 아름답다는 뜻이다.

 

옥화대의 이름에서 유래한 미원면 옥화리엔 서계가 지은 추월정(秋月亭)도 남아 있다.

 

서계처럼 ‘구곡’을 정해놓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에 침잠하는 태도는 16세기 이후 선비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했다.

 

전라도 해남의 고산 윤선도 같은 이도 ‘고산구곡’을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무려 십여 년 동안이나 서계는 옥화구곡에 칩거했다.

 

이 때 그는 기호지방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서신을 통해

태극도(太極圖)와 역학에 관해 토론을 벌였다.

 

여기서도 재차 확인되듯, 일평생 서계의 가장 큰 관심거리는 역학이었다.

 

그에겐 또 하나 전문분야가 있었다.

 

음악이었다.

 

정두원(鄭斗源)을 상대로 거문고에 관한 지식을 교류했는데,

나중에 서계는 한국의 역대 금보(琴譜·거문고 악보)를 집성하여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를 만들었다.

 

일종의 거문고 악보였고, 이를 통해 서계는 한국음악사에 길이 남을 자료를 남겼다.

 

서계가 못마땅하게 여긴 광해군이 축출되고 인조가 즉위하자 그는 관직에 복귀했다.

 

선공감정(繕工監正)을 거쳐 충청도 괴산 군수에 임명됐다. 바로 그 때의 일이다.

 

‘실록’에 보면, 서계는 서울에 올라와 국왕에게 사은(謝恩)하는 길에 의미심장한 예언을 했다.

 

서울 사람들의 음성을 듣고 나서 서계가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쇳소리가 거세게 나오고 있으니, 난리가 끝이 안 났다.”

 

그 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서계의 예언이 맞았다며 그의 예언 능력에 감탄했다.

 

예언가 서계는 매우 유능한 지방관이기도 해 통치 실적이 당대 최고였다 한다(실록, 인조8년 5월28일 정미).

 

요컨대, 서계는 주역(周易)의 대가로 출세해 훌륭한 목민관(牧民官)이 되었고 정묘호란을 예언하기도 했다.

 

물론 예언가 서계의 명성은 그의 탁월한 주역 실력에 기인했다.

 

뒷날 서계는 후손과 후학들에 의해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과 귀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그들은 서계를 주역의 대가로서보다는 성리학자의 전형으로 기렸다.

 

이것은 예언가 서계에 관한 일반 민중들의 기억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 ‘서계 이선생 가장결’의 내막


서계가 남겼다는 예언서의 제목엔 ‘가장결’이란 용어가 포함돼 있다.

 

말 그대로라면 집안에 보존되어 오던 비결이어야겠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다.

 

앞서 말한 대로 후손과 후학들이 기억하는 서계는 근본적으로 성리학자 였다.

 

그런데 그 ‘가장결’의 내용을 보더라도 그것은 서계의 집안에 전승된 비결은 아니었다.

 

“선생이 사기막(沙器幕)에 살 때 이웃에 살던 최생(崔生)이 와서 여쭸다.

 

‘임진(壬辰)의 화는 피할 수 있었으나, 앞으로 2백여 년 뒤엔 반드시 큰 난리가 일어날 텐데,

그 일을 조목조목 적어두어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자 선생이

 

‘그럼 네게 말해줄까?’ 라고 대답했다.”(서계 이선생 가장결)

 

이 말을 곧이곧대로 따른다면, 문제의 예언서는 서계 집안에 전해진 것이 아니었다.

 

서계의 제자로 추측되는 최씨가 애써 부탁해서 얻은 예언서였던 만큼

그 전승과정에서도 최씨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봐야 한다.

 

과연 최씨는 서계의 예언을 받아 적었을까?

 

우선 당장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다만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이 예언서가 ‘정감록’과 대체로 일치한다는 점이다.

 

잠시 예를 들어보자.

 

“적호(赤虎): 이인(異人)이 남쪽으로부터 오니 한곳에 소동이 일어난다.

 

왜인(倭人) 같으면서도 왜인은 아닌데 화친을 주장한다.(중략)

 

청계(靑鷄): 천리 강산이 셋으로 나뉘니 어찌할 것인가.(중략)

 

흑룡·현사(黑龍·玄蛇): 푸른 옷과 흰옷이 함께 동쪽과 남쪽에서 나온다.”(‘서계 이선생’)

 

위에 인용한 내용은 말세의 시운을 말하는 것인데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말세엔 이인 또는 진인이 등장한다.

 

둘째, 국토가 분단된다.

 

셋째, 남동쪽에서 정체불명의 침략군이 쳐들어온다는 것이다.

 

참고로 말해, 인용문에 나오는 ‘적호’와 ‘청계’ 같은 것은 60갑자를 이용해 연도를 표시한 것이다.

 

예컨대 ‘청계’의 ‘청’은 갑(甲)과 을(乙), ‘계’는 유(酉)를 가리킨다.

 

청계는 곧 을유년이다.

 

‘서계 이선생’은 을유년에 천리강산이 셋으로 나뉜다고 하였다.

 

이미 말했다시피 3국 분국설은 18세기 이래 정감록의 골자를 이뤘다.

 

‘서계 이선생’은 그 전통에 충실한 예언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일제식민지에서 해방되던 1945년이 바로 을유년이었다.

 

예언서의 내용과는 달리 나라는 셋으로 쪼개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 해에 남북으로 분단된 것은 틀림없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서계의 예언이 또 적중했다고 믿었다.

 

그것은 물론 우연이었다.

 

적호(병인)에 이인이 나와 화친을 주장한다는 내용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적중했다고 볼 수 있다.

 

무리한 점이 없지 않으나 고종 3년의 병인양요(1866)를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흑룡(임진) 현사(계사) 연간에 정체불명의 외국군대가 침략해 온다고 본 것은 전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만일 병인양요에 관한 예언이 들어맞았다면 그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병인양요를 겪은 뒤에 창작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서계 이선생 가장결’은 일단 1860∼1870년대에 창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서계 이선생’의 저술연대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자.

 

첫째, ‘서계 이선생’이 19세기 후반에 저술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그 근거는 예언서에서 발견된다.

 

“이상 하도다, 세상의 재난이여! 병란도 아니요, 칼날도 아니로다. 가뭄이 아니면 수재요,

흉년이 아니면 역병이다.”(‘서계 이선생’)

 

여기서 보듯, 이 예언서에서 거론되고 있는 말세의 가장 중요한 조짐은 외침이나 내전을 비롯한 전쟁이 아니었다.

 

문제는 천연재해와 전염병이었다.

 

인플루엔자와 장티푸스, 콜레라가 한국을 강타해 많은 피해를 주었던 시기에 ‘서계 이선생’은 쓰여 졌다고 본다.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가며 민중을 몹시 괴롭히던 때 ‘서계 이선생’을 빙자한 말세의 예언이 나왔다고 추정된다.

 

그 때는 다름 아닌 19세기 후반이었다.

 

그러나 아직 갑오동학농민전쟁이나 청·일전쟁 같은 대사건이 터지기 전이었다.

 

그렇다면 병인년(1866) 이후 갑오년(1894) 이전에 저술됐다는 이야기다.

 

둘째, 19세기 후반 창작설을 뒤집을 만한 근거도 ‘서계 이선생’에서 발견된다.

 

문제의 예언서를 자세히 분석해보면 서계가 활동하던 16세기의 사정을 반영하는 부분도 있다.

 

이 기회에 ‘서계 이선생’의 특징을 간략히 요약해 보자.


△ ‘서계 이선생 가장결’의 특징


이 예언서의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 위에서 언급한 대로 말세의 징후를 전염병과 자연재해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정감록’은 대체로 전쟁의 발발을 말세의 시작으로 본다.

 

둘째, 피란지를 충청도, 그것도 주로 충청북도에 설정하였다는 점이다.

 

충북 보은에 있는 속리산의 증항(甑項), 황간(黃澗)과 영동(永同) 사이, 청주(淸州) 남쪽과 문의(文義) 북쪽,

옥천(沃川)이 주요한 길지로 부각된다.

 

충청남도의 경우 진잠(鎭岑)과 공주의 유구(維鳩)와 마곡(麻谷)도 거론된다.

 

길지로 선정된 지역이 충청북도에 많고, 특히 청주와 보은을 중심으로 사방에 배치된 점이 인상적이다.

 

실제로 서계 이득윤의 고향이 충북 청원군 미원면 옥화리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연치 않은 것 같다.

 

설사 말세의 징조에 관한 예언은 서계의 붓끝에서 직접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길지에 관한 언급은 서계와 모종의 관련이 있었을 법하다.

 

서계와 동시대의 인물이던 격암 남사고가 그랬듯,

서계도 자기 고향을 중심으로 길지를 논의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셋째, 이 예언서엔 부지런히 농사짓는 것이 말세를 헤쳐 나가는 최고의 방법으로 돼 있다.

 

이런 세상을 맞아 남편은 땅을 갈고 아내는 베를 짜되 벼슬자리에 오르지 말고

농사짓는 데 부지런히 힘씀으로써 스스로 살길을 버리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이런 구절도 있다.

 

“밭이여, 밭이여!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농사일에 진력하면 난세를 이겨낸다고 주장한 것이 흥미롭다.

 

이것은 여느 예언서와는 다른 점이다. 간혹 ‘정감록’에 밭(田) 또는 개활지에 살길이 있다고 된 부분이 있긴 하다.

 

하지만 ‘서계 이선생’처럼 뚜렷하게 독농(篤農)을 주장한 경우는 없다.

 

굳이 부자가 될 필요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서계 이선생’은 힘써 농사짓기를 거듭 강조한다.

 

이런 대목은 생전에 훌륭한 지방관으로 이름을 날리던 서계의 진심과 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서계 이선생’엔 비록 부분적으로나마 서계의 본뜻을 담고 있는 대목도 있지 싶다.

 

그러나 어떤 부분은 서계가 작고한지 300년가량 지난 19세기 후반, 그 이름을 빌려 위작한 것으로 봐야 옳겠다.


△ 16세기는 예언가들의 전성시대

 

신기하게도 서계가 활동하던 16세기에는 문화계에 많은 별들이 등장했다.

 

특히 그 가운데 이름난 예언가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쏟아져 나왔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다음의 세 가지로 짐작한다.

 

첫째, 당시 사회가 무척 불안정했다는 점이다.

 

16세기에는 여러 차례 사화(士禍)가 일어나 억울하게 핍박을 받는 선비들이 많았다.

 

그들은 자연히 인간의 길흉화복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고, 그런 문제를 직접 연구하는 선비들도 생겨났다.

 

토정 이지함과 북창 정렴 등은 그 대표적인 경우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당쟁이 심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왜적이 침략해 사회는 위기감에 젖어들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은 16세기에 활동한 기인(奇人)과 이승(異僧)의 언행에서 예언을 발견하려는 분위기가 더욱 강화됐다.

 

둘째, 16세기까지만 해도 한국의 문화계는 성리학 일변도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그 시기엔 성리학계에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대두해 자웅을 겨뤘다.

 

하지만 조선의 사상계는 아직 그다지 경화되지는 않았다.

 

이 시대의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여러 학설에 골고루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대가들이 이단으로 지목한 불교, 도교 및 음양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한 마디로, 학계의 분위기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런 까닭에 격암 남사고의 경우처럼 역학 또는 음양학의 대가들도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을 받았다.

 

이 번호의 주인공 서계 이득윤 역시 그러했다.

 

셋째, 한국역사상 드물게 지방문화가 융성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실 통일신라시대는 물론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고급문화의 생산과 소비는 수도에서만 가능했다.

 

그 시대엔 지방에 고급문화가 거의 존재하지 안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중앙과 지방의 문화적 편차는 조선시대에 들어가자 급격히 줄어들었다.

 

중국에서 창안된 강남농법(江南農法)이 전해지면서 지역개발 붐이 일어났고,

 

새 시대의 국가적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의 이상에 따라 전원문화(田園文化)가 고급문화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16세기에는 경상, 전라, 충청도 각지가 경제적인 면에서 골고루 개발됐고, 그 문화적 수준도 서울과 비등하였다.

 

각지에 고급문화의 거점이 들어섬으로써 성리학이든 역술이든 대가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예컨대 남사고는 경상도 출신이며, 이지함과 이득윤은 충청도 출신이었다.

 

서산대사는 평안도에서 자라나 전라도와 강원도를 비롯한 각지에서 활동했다.

 

조선 후기에도 사회적 불안은 수그러지지 않았다. 어떤 점에서는 더욱 심해졌다고까지 하겠다.

 

지방의 문화적 수준은 여전히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비해 서울과의 문화적 편차는 더욱 커졌다.

 

사상적인 면에선 어떠했나?

 

이른바 ‘이단’(異端)이 공식적인 논의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심지어는 성리학 내부에서도 사상적 통일을 강조하는 경향이 지나쳤다.

 

지배층이 내세운 이론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멀쩡한 성리학자들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배척되었다.

 

이처럼 사회분위기가 경직되다 보니 새 예언가가 ‘공식적으로 탄생’하기란 불가능했다.

 

예언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더욱 늘었지만 누구도 자기 이름을 내걸고 예언가로 행세할 수는 없는 분위기였다.

 

이런 판국이라 16세기를 수놓은 예언가들의 화려한 이름은 계속 도용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본래 예언가로 정평이 나있던 토정이나 서계의 이름을 빌려 새 예언서가 여러 차례 만들어졌다.

 

그와 더불어 그들은 해묵은 명성을 더욱 드날렸다.

 

(푸른역사연구소장) [저작권자 (c) 서울신문사]


 

● 20세 이래(李來) - 석탄공파


1362(공민왕 12)~1416(태종 16).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초명은 내(徠), 자는 낙보(樂甫). 석탄공 존오(存吾)의 아들이다.

 

10세의 어린 나이로 전객녹사(典客綠事)에 특임되고 1383년(우왕 9)에 문과에 급제, 우사의대부에 올랐다.

 

1392년(공민왕 4)에 정몽주의 일당으로 몰려 게림(鷄林)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렸고

1399년(정종 1)에 좌간의대부,

이듬해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추층좌명공신(推忠佐命功臣) 2등에 책록되었고

계림군(鷄林君)에 책봉되었다.

 

1402년(태종 2)에 대사간을 거쳐 공조판서에 오르고

1404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었고

1407년에 죄빈객, 이듬해에 지의정부사 겸 판경승부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경절(景節)이다.

 

태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 경절공(景節公)  이래(李來) 


자 낙보(樂甫)

시호 경절(景節)

생년 1362

연령 55

활동분야 문신/관료


1362(공민왕 11)∼1416(태종 16).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초명은 내(徠). 자는 낙보(樂甫). 우정언(右正言) 존오(存吾-石灘公. 석탄공파 파조)의 아들이며,

우현보(禹玄寶)의 문인이다.

 

1371년(공민왕 20) 아버지 존오가 신돈(辛旽)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유배되어 울화병으로 죽고,

이어 신돈이 처형되자, 10세의 어린 나이로 전객녹사(典客錄事-종8품)에 특임되었다.

 

1383년(우왕 9) 문과에 급제하고, 공양왕 때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정4품)에 올랐다.

 

1392년(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계림(鷄林)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서 공주에 은거하였다.

 

1399년(정종 1) 좌간의대부로 등용되고,

이듬해인 1400년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추충좌명공신(推忠佐命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곧 좌군동지총제가 되었고, 계림군(鷄林君)으로 봉작되었다.

 

1402년(태종 2) 첨서승추부사(僉書承樞府事)가 되었다가

그 해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공조판서(工曹判書-정3품)에 승진되었다.

 

1404년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곧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이듬해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었고,

1407년 경연관(經筵官)을 거쳐 세자의 스승인 좌빈객(左賓客)을 지냈으며,

1408년에 지의정부사 겸 판경승부사에 이르렀다.

 

태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경절(景節)이다.


△ 계성군 이래의 졸기

 

계성군(鷄城君) 이내(李來)가 졸(卒)하였다.

 

이래(李來)의 옛 이름은 내(徠)요, 자(字)는 낙보(樂甫)인데, 경주(慶州) 사람이다.

 

아비는 우정언(右正言) 이존오(李存吾)인데,

전조 공민왕(恭愍王)을 섬겨 신돈(辛旽)의 간악함을 논함에 말이 심히 간절하고 곧아서

왕이 크게 노하여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신돈이 그 도당(徒黨)에게 사주하여 국문하여 다스려서 장차 죽이려 하는데,

이색(李穡)의 거듭 구원함에 힘입어서 죽음을 면하고,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폄출(貶出)되었으나, 근심하고 분개하여 병이 되어 죽었다.

 

신돈이 주살을 당하자 공민왕이 감동하여 깨닫고

이존오에게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을 증직하고

이래(李來)의 나이 겨우 10살인데,

어필(御筆)로 간신(諫臣-간하는 신하) 이존오(李存吾)의 아들이라고 써서

특별히 전객 녹사(典客錄事)를 제수하였다.

 

계해년 과거에 합격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우사의 대부(右司義大夫)에 이르렀다.

 

임신년 4월에 정몽주(鄭夢周)에게 당부(黨附-한편이 되어 아부함)하였다고 하여 곤장을 때리어

계림(鷄林)에 귀양 보내었는데, 이해 겨울에 사유(赦宥-죄를 용서하여 줌)를 입어

공주 석탄 별업(公州石灘別業)에 거주하였다.

 

기묘년에 상왕이 불러서 좌간의 대부(左諫議大夫)를 제수하였다.

 

경진년 정월에 이래(李來)가 방간(芳幹)의 처족으로서 방간이 난을 꾸미고자 꾀하는 것을 알고

그 *좌주(座主-은문恩門 ) 우현보(禹玄寶)에게 고하여 주상에게 전달하였다.

 

일이 평정되자 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로 발탁하여 추충 순의 좌명(推忠徇義佐命) 공신의 호를 내려 주었다.

 

을유년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는데, 이때에 종친(宗親-임금의 집안 사람)으로 불법(不法)한 자가 있었으므로,

곧 탄핵하여 아뢰고 잡아 가두니, 임금이 노하여

지평(持平) 이흡(李洽)을 불러 힐난하여 꾸짖고 명하여 순금옥(巡禁獄)에 가두었다.

 

이래(李來)가 예궐(詣闕-입궐)하여 *간쟁(諫爭)하니,

임금이 감동하여 깨닫고 이흡(李洽)을 용서하였다.

 

여러 번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전임(轉任)하고,

정해년에 좌빈객(左賓客)으로 세자를 따라 중국에 조현(朝見)하였고,

무자년에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겸 판경승부사(判敬承府事)가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 55세였다.

 

이래(李來)가 마음가짐이 단정하고 근신하고, 몸을 행동하는 것이 겸허하고 공손하고,

일가에게 은혜로 화목하고 사람을 신의로 접대하니,

임금의 예우(禮遇)가 심히 두터워서 서연(書筵)의 일을 이래에게 위임하였고, 이내도 또한 자임하였다.

 

그러므로 세자가 용자(容姿)를 고치어 예(禮)로 대접하였다.

 

병이 심하여 세자가 친히 가서 살펴보았다.

 

부음(訃音)이 들리니, 놀라고 슬퍼하여 따로 *치부(致賻-사부賜賻)하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부증(賻贈-상장喪葬)· *예장(禮葬)은 나라의 *상전(常典-상규常規)이 있다.

이것은 나의 사사 *부의(賻儀) 이다.”하고,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사신을 보내어 사제(賜祭)하였다.

 

시호를 경절(景節)이라 하였다.

 

첩의 아들이 이직생(李直生)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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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주(座主)- 은문(恩門) 이라고도 하며 고려 시대에, 과거의 급제자가 시관試官을 이르던 말.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간쟁(諫爭)- 어른이나 임금에게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간절히 말함.

*치부(致賻)-사부(賜賻)라고도 하며 임금이 특명으로 신하에게 부의(賻儀)를 내려 주던 일.

*부증(賻贈)-상장(喪葬)을 돕기 위해 돈이나 물건을 보냄.·

 

*예장(禮葬)-국왕과 왕비의 장례는 국장(國葬), 세자와 세자빈의 장례는 예장(禮葬),

황제의 장례는 어장(御葬) 이라 불렀다.

국장 다음의 장례이다

*상전(常典)- 상규常規 라고도 하며 늘 변하지 아니하는 규칙.

*부의(賻儀)- 상가(喪家)에 부조로 보내는 돈이나 물품. 또는 그런 일. ≒전의(奠儀)·향전(香奠).

*사제(賜祭)- 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제사를 지내 주던 일.


 

● 26세 이명민(李命敏) - 월성군파


?~1453(단종 1)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이회(而晦), 호는 지지당(知止堂). 대사헌 승직(繩直)의 아들이다.

 

1448년 내불당(內佛堂)의 신축을 감독한 일로 호조좌랑, 선곤감 부정에 오르고

1452년(단종 1) 이후 안악 군수,

이듬해에 계유정란(癸酉靖亂) 때에 김종서*황보인 등과 함께 수양대군 일파에게 살해되었다.

 

숙종 때에 병조참판이 추증되었고 영월의 팔충신 조사단(八忠臣朝士壇)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 지지당(知止堂) 명민(命敏)

 

생년월일은 미상이고 돌아가신 때는 1453(단종 1)년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이회(而晦)이고 호는 지지당(知止堂)이다.

 

대사헌 승직(繩直)의 아들이다.

 

1448년(세종 30) 내불당(內佛堂)을 짓는 일을 감독한 뒤,

호조좌랑·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지내며 토목공사의 일을 잘 맡아 하였다.

 

세종30년 1448년 쓰여진 숭례문 상량문에는

 

"정통(正統) 13년 무진(戊辰) 3월 7일 인손시(寅巽時) 입주상량(立柱上樑)" 이라고 상량한 날짜가 적혀 있고,

그 뒤에 제조에는 의정부 좌참찬 정차(鄭茶)와 형조판서 민신(閔伸), 하부조직의 감독과

자재의 출납을 담당한 하급관리 감역관은 선공감직장(繕工監直長) 이명민(李命敏)이라고 되어있다.

 

1451년(문종 1) 6월에는 충청도 선군(수군)을 1회에 1, 2천 명씩 동원하여

사직단 북쪽 도성의 무너진 곳을 이명민(李命敏)과 김자행(金自行)이 감독관이 되어 수축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년) 단종의 즉위와 함께 선공부정(繕工副正) 이명민(李命敏)의 감독으로

인정전과 흥인문 등 건물의 개수와 경내(境內)의 정비가 있었는데

이것은 그동안 세조조 후반부터 경복궁에 이어한 관계로

퇴락(頹落)한 궁전을 개신 입거(改新 入居)하기 위하여서였던 것이다.

 

직장·안악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453년 계유정난 때 김종서(金宗瑞)·황보 인(皇甫仁) 등과 함께 수양대군(首陽大君)일파에게 살해되었다.

 

조극광 황보인 등이 서문 쪽 제3문으로 들어오자 철퇴로 때려죽이고

사람을 보내어 윤처공과 이명민을 또한 죽였다.

 

그러나 확실히 죽이지 않아 다음 날 아침에 정신이 깨어난 이명민은 들것에 실려 도망을 갔으나

어떤 사람이 홍달손에게 일러바치니 호군 박제함을 보내어 죽임을 당했다.

 

숙종 때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영월의 팔충신 조사단(八忠臣朝士壇)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충민공 일화 -  지지당(知止堂)

 

단종이 이조· 병조에 전지하기를,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북경에 나아갔을 때, 수종(隨從)하였던 사람과《병요(兵要)》병서 (兵書)를 수찬한 사람들과

조충손(趙衷孫)에게 가자(加資-품계를 올림)한 것은 아울러 모두 환수(還收)하도록 하라.”

하니 이는 유성원(柳誠源)이 임금에게 힘써 간(諫)한 때문이었다.

 

김종서(金宗瑞)가 이를 듣고 말하기를,

 

“근일에 가자한 것은 우리들의 아들들이 참여되었기 때문에 이를 말하는 자가 있어도

우리들이야 대체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러나 하비(下批) 하는 것은 곧 임금의 명이었는데 이제 곧 환수(還收)하는 것은 가벼운 것 같다.”

 

하니 황보인(皇甫仁)이 매우 싫어하여 춘추관(春秋館)에 출근하여 김종서에게 이르기를,

“그 아비 유사근(柳士根)도 성미가 급하고 스스로 어진 체하다가 불행하게 단명(短命)하였다.

 이제 이 사람도 그 아비를 본받고자 하는 것인가?” 하였다.

 

이명민(李命敏)이 이 말을 듣고 분개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경복궁(景福宮)을 조성(造成)할 때에는 하륜(河崙)이 제조(提調)가 되었고,

창덕궁(昌德宮) 때에는 이직(李稷)이 제조가 되었는데

내가 전례(前例)를 두루 상고하여 상서(上書)하려고 하다가 사람들에게 만류를 당하여 감히 실행하지 못하였다.

 

저 유성원(柳誠源)은 일개 *소유(小儒)인데 겨우 *협책(挾冊)을 면하고 집현전(集賢殿)의 관원이 되자

고론(高論)하기를 좋아하나 국가의 대체를 알지 못하는 자이다.

 

내가 장령(掌令) 유규(類規)를 보고 꾸짖으니,

유규가 말하기를 ‘내가 한 짓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라고 하며 유성원의 인물됨을 크게 꾸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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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下批)- 임금이 종이에 적힌 세 사람의 후보자 가운데 하나를 골라 점을 찍어 벼슬아치를 임명하던 일.

신하가 올린 글을 재가(裁可)  할 때 임금이 그 글 끝에 쓴 의견문.

*소유(小儒- 유교를 적게 공부한 사람)

*협책(挾冊-조선 시대에, 과장에 책을 가지고 들어가던 일. 협서)

 

○ 이명민(李命敏) 


활동분야 문신/관료


?∼1453(단종 1).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이회(而晦), 호는 지지당(知止堂).

 

대사헌 승직(繩直)의 아들이다.


1448년(세종 30) *내불당(內佛堂)을 짓는 일을 감독한 뒤,

호조좌랑· *선공감 부정(繕工監副正)을 지내며 토목공사의 일을 잘 맡아 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년)에 직장· 안악 군수 등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계유정난 때 김종서(金宗瑞)· 황보 인(皇甫仁) 등과 함께 수양대군(首陽大君) 일파에게 살해되었다.

 

숙종 때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영월의 *팔충신 조사단(八忠臣朝士壇)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 계유정난 때 이명민(李命敏)이 죽은 뒤 (다른 수양대군에 반대하는 무리들과 마찬가지로 죽임을 당한 후)

가족들은 모두 주로 공신들에게 공적에 따라 노비로 나누어진다.

 

'이명민의 아내 맹비(孟非)는 좌승지(左承旨) 한명회(韓明會) 에게 주고....' 라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 17세 극랑의 세계로 21세 월성군 휘 지수의 5세손으로 월성군파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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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불당(內佛堂)- 조선 시대에, 세종이 경복궁 안에 지은 불당(佛堂). 세종 30년(1448)에 만들었다.

*선공감(繕工監)- 고려 시대에, 토목과 영선(營繕)에 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팔충신 조사단(八忠臣朝士壇)- 영월(寧越) 장릉(莊陵) 홍살문(紅箭門) 밖의 조사단(朝士壇). 8충신을 모셨다.

1455년(단종 3년)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장조카인 제6대 임금을 폐할 목적으로

나라의 장수인 김종서(金宗瑞)를 방망이로 죽이고 불복한 여섯 신하(六臣)와 연계자도 목베어 죽인 후

단종의 자리를 강제로 빼앗고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봉(封)하여 영월로 쫓아 보낸 다음

세조(世祖)가 임금이 되었다.

 

8충신 - 사육신과 이명민. 최시형


 

● 38세 이명우(李明雨)


1901~?. 촬영기사. 영화감독

 

형은 우리나라 최초의 촬영기사이며 녹음기사인 필우(弼雨)이다.

 

계성 학교(桂成學校) 졸업 후에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 입사하여 촬영기술을 배웠다.

 

1927년 김해운(金海運) 감독의 <운명>을 촬영하여 영화게에 데뷔했고

<월남 이상재 선생 장례 실황>(1927년)을 감독, 촬영, 편집까지 맡아서 성공리에 마쳤다.

 

1930년 이영구(李龜永) 감독의 <아리랑, 그뒤의 이야기>를 촬영, 편집하고

무성영화시대의 대표작인 <방아타령>(1931년. 감독 김상진(金尙鎭)),

<임자 없는 나룻배>(1932년. 감독 이규환(李圭煥)) 등을 촬영하였다.

 

1935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발성영화인 <춘향전>(경성촬영소)의 감독 촬영 편집을 맡았고

형 필우는 녹음 현상 조명을 맡았다.

 

그의 감독 작품으로는, <홍길동전 후편>(1936)*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9)등이 있다.

 

1937년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세계적인 영화감독 스탠버그는

그가 촬영한 <장화홍련전>(1936)을 보고 촬영기법이 매우 높다고 칭찬하였다.

 

광복 후에 영화재건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6.25동란 때에 최인규 감독과 함께 납북되었다.

 

그는 무성 발성의 도입기에 한국영화의 촬영과 녹화, 녹음의 기술적 측면에서 커다란 공헌을 한 거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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