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경주이씨 인물(갑-광)

녹전 이이록 2009. 4. 10. 22:06

 ■ 경주이씨 인물

 

 

● 이갑성(李甲成)

 

(1889~1981). 독립운동가. 3.1운동 민족대표의 한 사람. 호는 연당(硏堂).

1915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최연소자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1인으로 서명,

 학생 중심의 시위운동을 주도하고 태화관(泰和館)을 중심으로 전단 살포의 중책을 맡고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옥고(獄苦)를 치렀다.

 

1931년 신간회 사건(新幹會事件)으로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고,

 

1940년 귀국하여 흥업구락부 사건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렀으며

 

1945년 해방을 맞아 독립촉성 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의 회장이 되었고

 

1947년 김규식(金奎植) 등과 과도 입법의원으로 활동했다.

뒤에 33인 유족회장? 국산 부흥회장 등을 역임했다.

 

1965년에 광복회장에 취임하여 독립유공자의 복지증진에 노력하고 또 이준열사 기념 사업회 총재, 삼일동지회 고문으로 있었다.

80세 이후에는 33인의 유일한 생존자로 기념비적 역할을 하다가 생을 마쳤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 26세 이개립(李介立) - 국당공후 제정공파

 

1544(중종 39)~1625(인조 3).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자는 대중(大中). 호는 성오대(省吾臺). 역봉

 

임진왜란 때에 의병장으로 군량미의 조달에 공이 컸다.

 

자여(自如- 경남 창원) 찰방 · 낭천(狼川- 강원도 화천) 현감에 이어 산은(山隱)현감에 임명되었다.

 

○ 역봉공(역峰公) 휘 개립(介立)

 

생몰년은 1544(중종39)∼1625(인조 3)이다.

 

어모장군(禦侮將軍) 준(竣)의 아들이며 조선 중기의 의병장이다.

 

자는 대중(大中)이며 호는 역봉(역峰), 성오대(省吾臺)이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문인(門人)으로 진사인 그는 1586년(선조 19)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종9품)에 임명되었으나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퇴하였다.

 

1591년(선조 24) 장현광(張顯光)과 함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참봉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활약했는데 부족한 식량과 군량의 조달에 공이 컸던 것이다.

 

이러한 공에 의하여 수령(守令-지방을 다스리는 관원)을 감당할 인재 30명이 천거된 중에 그도 포함되어 1594년에 자여 찰방(自如察訪-종6품)에 임명되었다.

 

 다음해에 낭천 현감(狼川縣監-종6품)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96년 산은 현감(山隱縣監)에 임명되고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체찰사종사관(體察使從事官) 황여일(黃如一)의 천거로 향병대장(鄕兵大將)이 되었다.

 

 병마절도사 김경서(金景瑞)가 병사를 자기 휘하에 속하게 하지 않은 사실에 사감을 품고 무고하자 향리로 돌아가 후진을 양성했다.

 

 조경(趙絅)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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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遺逸) - 관리 등용책의 하나. 유일은 초야에 묻힌 숨은 인재라는 뜻이다.

* 묘갈명(墓碣銘) - 머리를 둥글게 만든 작은 비석에 새겨 넣는 글

 

○ 경북 영주시 장수면 갈산리

 

이 마을은 경주 이씨인 성오당(省吾堂) 이개립 선생의 후예(後裔)가 하갈(下葛)에서 살다가 수해를 당하고 이곳으로 이주하여 하갈보다 위쪽에 위치한 곳이라 해서 윗갈미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효자 이개립의 정자가 있는 마을로 영주시의 효 시범 마을이다.

 

갈미 마을은 65세 이상 노인 인구수가 많고 3세대 이상 가구가 26%를 차지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장수마을로 2007년 사망한 경북 최고령자 조덕자 할머니가 거주하던 마을이다

 

 이개립(李介立) 

 

자 대중(大中)

호 성오대(省吾臺) / 역봉(?峰)

생년 1544

연령 82

활동분야 항일/국방 / 의병

 

1546(명종 1)∼1625(인조 3). 조선 중기의 의병장.

 

자는 대중(大中), 호는 성오대(省吾臺)·역봉(역峰).

 

충의위공(忠義衛公) 해(立+亥)의 아들이다.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이다.

 

진사(進士)인 그는 1586년(선조 19)에 효행으로 천거(薦擧)되어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퇴하고, 1591년 장현광(張顯光)과 함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참봉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는데 부족한 식량과 군량의 조달에 공이 컸다.

 

이러한 공에 의하여 수령을 감당할 인재 30명이 천거된 중에 그도 포함되어 1594년에 자여찰방(自如察訪)에 임명되고, 다음해에 낭천현감(狼川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96년 산은현감(山隱縣監)에 임명되고, 다음해 정유재란 때 체찰사 종사관(體察使從事官) 황여일(黃汝一)의 천거로 향병대장(鄕兵大將)이 되었으나 병마절도사 김경서(金景瑞)가 의병을 자기 휘하에 속하게 하지 않은 데에 사감을 품자 고향에 돌아가 오로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조경(趙絅)이 묘갈명을 지었다.

 

양희공 휘 흥적의 6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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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遺逸)- 명망이 높은 사람으로 초야에 묻힌 사람. 또는 세상을 등지고 초야에 묻혀 숨어사는 선비. 뛰어난 선비.

 

● 35세 이건영(李健榮)- 상서공후 백사공파

 

생몰년 미상.  부통령 이시영의 형.

 

음사(蔭仕)로 관계에 진출, 금광(金鑛)에 관여하여 1885년에 삭주·벽동의 금광을 그가 전담하여 채굴했다.

 

일등군사(一等軍司)· 경리국과원· 법무회계국장· 탁지부사세국장· 토지소관법 기초위원· 전기철도사무사판위원 등을 거쳐 정령(正領. 지금의 대령)에 이른 군인이다.

 

1907년에 충청남도관찰사가 되고 이어서 중추원 찬의에 임명되었다.

 

○  이건영(李健榮)

 

활동분야 항일/국방 / 무신 / 무신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무신. 호는 춘관. 부통령 시영(始榮)의 형이다.

 

*음서(蔭敍)로 관계에 진출, 1883년(고종 20) 일본인과 공동명의로 경상남도 창원의 금광채취허가를 받았으나 갑신정변으로 폐기되었다.

 

또한, *장기·경주에서도 채광하였다.

 

1885년에는 *광무사(鑛務司)에서 *삭주·*벽동의 금광을 채광하였는데 *사용(司勇)인 그로 하여금 전적으로 관장하도록 하였다.

 

1895년에 *군무아문 주사가 되었다가 *부위(副尉)로 *군부 *군무국 *마정과원(馬政課員)· 일등군사(一等軍司)· 경리국과원을 지냈다.

 

1898년에는 담양군수로 임명되었으나 의원면직 되었고, 법무 회계국장· 탁지부 회계국장· 군부 경리국장· 탁지부 사세국장· 중앙은행 병설 사무위원· 토지 소관법 기초위원· 전기 철도사무 사판위원 등 *정령(正領)까지 진급한 군인으로서 재정방면에 임용되었다.

 

1907년에는 충청남도관찰사가 되었고, 곧 *중추원 *찬의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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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서(蔭敍)- 고려·조선 시대에, 공신이나 전·현직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일

*장기-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광무사(鑛務司)- 대한 제국 때에, 농상공부에 속하여 광산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

*삭주(朔州)- 압록강의 수풍(水豊)댐 남쪽 5km 지점에 위치.

정주(定州)와 수풍을 연결하는 평북선(平北線:定朔線)이 지나므로 역전 취락으로 발전.

*벽동(碧潼)- 동쪽은 자강도 우시군, 남쪽은 동창군, 서부는 창성군과 접하며 북쪽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마주하는 곳이다

*군무아문(軍務衙門)- 1894년(고종 31) 관제개혁에 따라 병조(兵曹)의 후신으로 군사에 관한 사무를 통할한 관청.

관원으로 대신 1명, 협판(協辨) 1명을 두고, 그 밑에 총무국· 친위국· 해군국· 의무국· 기기국· 군수국· 회계국의 8국을 두고, 각 국에 참의(국장) 1명과 주사 약간 명을 배치.

*부위(副尉)- 대한 제국 때에 둔 위관 계급의 하나. 정위의 아래, 참위의 위이다.

무관의 칠품 이하 벼슬에 붙였다.

 

*군부(軍部)- 조선 후기 국방에 관한 사무와 행정·인사에 관한 사무를 담당한 행정부서.

1895년의 관제개혁에 따라 군무아문을 개칭한 관청으로 대신관방장(大臣官房長)· 군무국· 포공국(砲工局)· 경리국· 군법국· 의무국· 정리국(整理局)을 두었으며, 1900년에는 육군법원, 1904년에는 군기창을 두었다.

주요관원으로 칙임관인 대신 1명과 협판 1명 외에 6국과 7과에 관방장(官房長)과 부장(副長) 각 1명을 두되 모두 군인으로 충원하고, 기사(技事)·기수(技手)·주사 등을 두었다.

*군무국(軍務局)- 조선 후기에, 원수부에 속한 한 국(局).

*마정과(馬政課)- 군부는 대신관방(大臣官房)· 군무국(軍務局)· 포공국(砲工局)· 경리국(經理局)· 군법국(軍法局)· 의무국(醫務局)· 정리국(整理局)이 있었고,

 

1900년에 육군법원을 1904년에는 군기창(軍器廠)을 부속 기관으로 두었다.

1904년 관제개혁으로 포공국과 정리국은 폐지되고, 해방국(海防局)이 신설되었다.

이 중 군무국은 협판을 국장에 충당하고 군사과(軍事課)· 마정과(馬政課)· 외국과(外國課)의 3과를 두어 업무를 분장하였다

마정과는 기병(騎兵) 및 치중병과영관(輜重兵科領官)을 과장에 임명하여 말(馬)의 보충·사육·위생·징발, 기병·치중병과 하사의 보충에 관한 사항 등을 담당하였다

 

*정령(正領)- 대한 제국 때의 영관 계급 가운데 하나. 참장의 아래, 부령의 위이다.

*중추원(中樞院)- 조선 전기 왕명의 출납, 병기(兵器)·군정(軍政)·숙위 등의 일을 맡아본 관청으로 1392년에 설치되었다.

중추원은 1400년(정종 2)에 삼군부(三軍府)로 고쳤다가 1409년(태종 9)에 중추원으로 복구하였으나, 1466년(세조 12) 중추부(中樞府)로 고쳐 문무(文武) 당상관으로서 임직(任職)이 없는 자를 일정한 사무를 맡기지 않고 우대하는 의미로 두게 되었다.

*중추원 찬의- 중추원에 속한 벼슬로 고종 32년(1895)에 의관, 뒤에 찬의로 고쳤다.

 

○ 이건영(李健榮)

 

백사의 10세 후손인 이유승(李裕承)은 고종때 이조판서를 지냈다.

 

그에게는 6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이 있었다.

 

첫째아들은 이건영(李健榮·1853~1940), 둘째 이철영(李石榮·1855~1934), 셋째 이석영(李哲榮·1863~1925), 넷째 이회영(李會榮·1867~1932), 다섯째 이시영(李始榮·1869~1953),

여섯째 이호영(李頀榮·1875~1933)이었다.

 

당시 이들이 살았던 집은 서울 명례방(明禮坊) 저동(苧洞) 일대였다.

현장답사 결과 YWCA 건물과 뒤편의 주차장 그리고 명동성당의 앞부분 일대가 바로 그 집터로 확인되었다.

명동성당을 바라보고 왼쪽에 서 있는 수령 150년 가량의 은행나무 두 그루는 이유승이 심은 나무라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서울에서 가장 잘 나가는 집안이자, 명동의 터줏대감이 바로 이 집안이었던 것이다.

 

생몰년(生沒年)은 1853. 5. 12 ∼ 1930. 12. 29이다.

경기도 개성(開城)에서 태어났으며 조선 말기의 무신이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시영(始榮)의 형이다.

 

음서(蔭敍)로 관계(官界)에 진출하였다.

 

1883년(고종 20) 일본인과 공동명의로 경상남도 창원의 금광채취허가를 받았으나 갑신정변으로 폐기되었다.

 

또한 장기·경주에서도 채광하였다.

 

1885년에는 광무사(鑛務司)에서 삭주·벽동의 금광을 채광하였는데 사용(司勇)인 그로 하여금 전적으로 관장하도록 하였다.

 

1895년에 군무아문주사가 되었다가 부위(副尉)로 군부 군무국 마정과원(馬政課員)· 일등군사(一等軍司)·경리국과원을 지냈다.

 

1898년에는 담양군수로 임명되었으나 의원 면직하고, 법무회계국장· 탁지부회계국장· 군부경리국장· 탁지부사세국장· 중앙은행병설사무위원· 토지소관법기초위원·  전기철도사무사판위원 등 정령(正領)까지 진급한 군인으로서 재정방면에 임용되었다.

 

1907년에는 평안도 관찰사(觀察使-종2품)가 되었고 곧 중추원 찬의(中樞院贊儀) 정5품에 임명되었다.

 

서간도(西間島) 지역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1910년을 전후하여 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신민회(新民會)에 의하여 구체화되었으니, 이들은 1910년을 전후하여 중국 만주지역에 한민족을 집단적으로 이주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당하자 신민회의 계획에 따라 가문의 장형(長兄)으로서 동생인 이석영(李石榮)· 이철영(李哲榮)·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이호영(李頀榮) 등과 함께 독립군 기지개척을 목적으로 일가권속을 이끌고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 추가가(鄒家街)로 망명하였다.

 

* 건영 일가족이 두만강을 배로 건널 때도 일화를 남겼다고 한다.

 

두만강을 건네준 뱃사공에게 아주 후하게 뱃삯을 지불하였던 것이다.

 

배삯이 10원이었는데 그 두 배인 20원을 지불하였다.

 

그리고는 고마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뱃사공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게 고마워하지 말고 한 가지 일을 해 주시오.”

 

“무엇이든 해드리겠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일본 경찰이나 헌병에게 쫓기는 투사가 돈이 없어 헤엄쳐 강을 건너려 하거든 나를 생각 하고 그 사람들을 배로 건너게 해주시오.”

 

“어른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제 힘이 닿는 한 독립군들을 배로 실어 나르겠습니다.”

 

그 두만강 뱃사공은 약속을 지켰다.

 

그 사실은 탈출하는 투사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망명지인 그곳에서 경학사(耕學社),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설립 등을 지원하였다.

 

또한 서당을 경영하며 동포 자제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그 후 봉천(奉天) 보안보(保安堡) 서탑대가(西塔大街)에 거주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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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서(蔭敍)- 공신 또는 현직 당상관의 자손을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일. 문음(門蔭-공신 또는 당상관의 훌륭한 가문)으로 채용된 관원을 음관(蔭官) 또는 남행관(南行官)이라 하였다.

 

● 이격(李格)

 

자 천로(天老)

호 만오(만悟)

생년 1748

연령 56

활동분야 항일 / 국방 / 무신

 

1748(영조 24)∼1803(순조3). 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천로(天老), 호는 만오(만悟). 동지중추부사 부만(溥萬)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글을 잘 지었으며, 성장하면서 *무재(武才)가 뛰어나 *선전관이 되었다.

 

1769년(영조 45)에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무관직을 거친 뒤, 1773년 부안 현감으로 나가  *선치(善治)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여 홍국영(洪國榮)의 누이를 원빈(元嬪)으로 삼자, 홍국영의 권세가 높아졌는데 이때에 그는 홍국영과 다투다가 *남양으로 유배당하였다.

 

얼마 뒤 풀려나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으며, *도총부 *총관(都摠府摠管)을 지냈다.

 

아들 현직(顯稷)이 *어영대장에 오르자 *좌참찬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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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재(武才)- 무예에 관한 재주.

*선전관(宣傳官)- 선전관청(宣傳官廳)에 속하여 왕의 시위(侍衛)· 전령(傳令)· 부신(符信)의 출납과 사졸(士卒)의 진퇴를 호령하는 형명(形名) 등을 맡아본 일종의 무직승지(武職承旨)의 구실을 한 무관(武官)이다.

9품부터 정3품 당상관(堂上官)까지.

 

*선치(善治)- 백성을 잘 다스림

*남양(南陽)- 경기도 화성군에 있는 면(面). 서해안 남양만에 있는 염전(鹽田) 지대이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조선 시대에, 각 지방의 병마를 지휘하던 종이품의 무관 벼슬. 세조 12년(1466)에 병마도절제사를 고친 것이다. ≒병사(兵使).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조선 시대에, 각 도의 수군을 통솔하는 일을 맡아보던 정3품 외직 무관(外職武官)의 벼슬.

세조 12년(1466)에 수군도안무처치사를 고친 것으로, 모두 당상관이었다. ≒수곤(水?)·수군장·수사(水使).

*도총부(都摠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를 이름.

조선 시대에, 오위(五衛)의 군무를 맡아보던 관아.

중앙의 최고 군사 기관으로, 세조 3년(1457)에 둔 오위진무소를 세조 12년(1466)에 고친 이름이다. ≒총부(摠府).

*총관(摠管)- 조선 시대에, 오위도총부에 속한 도총관과 부총관을 통틀어 이르던 말.

*어영대장(御營大將)- 조선 시대에 둔 어영청의 으뜸 벼슬. 품계는 종2품이다. 어장(御將).

*좌참찬(左參贊)- 조선 시대에, 의정부에 속한 정2품 문관 벼슬. 삼정승을 보좌하면서 국정에 참여하였다

 

● 이겸호(李謙浩)

 

(1895~1942). 한말의 독립운동가

 

1910년에 만주로 건너가서 이상룡· 이시영· 김동삼 등과 독립운동기지건설에 참여했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수료하고 서로군정서에 가담했다.

 

1925년 이후 국내에 잡입하여 독립자금책으로 활동하다가 두 번이나 옥고를 치렀다.

 

1980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 이경륜(李敬倫)

 

자 사서(士敍)

생년 1735

연령 55

활동분야 문신 / 관료 / 조선후기

과거 및 취재 [문과] 영조(英祖) 50년 (1774) 갑오(甲午) 정시(庭試) 을과(乙科) 2위

 

1735(영조 11)∼1789(정조 1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사서(士敍). 아버지는 종백(宗白)이며, 어머니는 *지중추부사 서문유(徐文裕)의 딸이다.

 

*영중추부사 종성(宗城)에게 입양되었다.

 

*음보로 벼슬길에 나가 남원부사를 지냈으며, 1774년(영조 50)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지가 되었고, 이듬해 대사간에 올랐다.

 

1776년 경연 참찬관을 겸하였으나 사도세자(思悼世子)와 관련된 *상계(上啓)로 인하여 신계현(新溪縣)으로 유배당하였으며, 얼마 뒤 풀려나 1784년(정조 8) 동지의금부사에 올랐다.

 

1788년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임소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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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중추부에 속한 정2품 무관(武官) 벼슬. ≒지중추·지중추사.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조선 시대에 둔 중추부의 으뜸 벼슬. 정1품의 무관 벼슬이다. ≒영부사·영중추.

*음보(蔭譜)- 조선 후기에 공신 또는 현직 당상관(堂上官)의 자제로 과거(科擧)에 의하지 않고 등용된 음관(蔭官) 1,235명의 성명 등을 기록한 책.

*음서(蔭敍)- 고려·조선 시대 부父나 조부祖父가 관직생활을 했거나 국가에 공훈을 세웠을 경우에 그 자손을 과거에 의하지 않고 특별히 서용하는 제도이다.

문음(文蔭). 남행(南行). 백골남행(白骨南行). 음사(蔭仕). 음직(蔭職)이라고도 한다.

*상계(上啓)- 조정이나 윗사람에게 사정이나 의견을 아룀.

*임소(任所)- 지방 관원이 근무하는 곳.

 

○ 이경륜(李敬倫)

 

1735(영조 11)∼1789(정조 13).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사서(士敍). 아버지는 종백(宗白)이며, 어머니는 지중추부사 서문유(徐文裕)의 딸이다.

 

영중추부사 종성(宗城)에게 입양되었다.

 

음보(=蔭敍)로 벼슬길에 나가 남원부사를 할 때 1774년(영조50) 5월에 혜암 선사(惠庵禪師)가 그 전 해에 화재로 소실되었던 '천은사' 전각을 중수하면서 절을 새롭게 중창하였다.

 

혜암 선사는 수도암(修道庵)에 주석하고 있었는데 당시 남원부사로 있던 이경륜(李敬倫)의 도움으로 산내의 여러 사찰과 힘을 합쳐 2년간에 걸친 중창불사를 원만히 이루어냈다.

 

지금의 가람은 대부분 이때 이루어진 모습이니 이경륜의 도움에 혜암 선사의 중창은 절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774년(영조 50)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지가 되었고 이듬해 대사간에 올랐다.

 

1776년 경연참찬관을 겸하였으나 사도세자(思悼世子)와 관련된 상계(上啓)로 인하여 신계현(新溪縣)으로 유배당하였으며 얼마 뒤 풀려났다.

 

1784년(정조 8) 동지의금부사에 올랐다.

 

1788년 황해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임소에서 죽었다.

 

● 29세 이경억(李慶億) - 익재공후 창평공후 생원공파

 

1620(광해군 12)~1673(현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석이(錫而), 호는 화곡(華谷). 판서 시발(時發)의 아들.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

 

수염이 길고 풍채가 헌헌장부(軒軒丈夫)였다.

 

시호는 문익(文翼)이고 ≪화곡유고(華谷遺稿)≫가 있다.

 

○ 화곡공(華谷公) 이경억(李慶億)

 

자 석이(錫而)

호 화곡(華谷)

시호 문익(文翼)

생년 1620

연령 54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중기

 

과거 및 취재 [문과] 인조(仁祖) 22년 (1644) 갑신(甲申) 정시(庭試) 갑과(甲科) 1[장원(壯元)]위

 

1620(광해군 12)∼1673(현종 14).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석이(錫而). 호는 화곡(華谷). 서울출생.

 

아버지는 판서 시발(時發)이며, 어머니는 승지 신응거(申應거)의 딸이다.

 

7세에 아버지가 죽고 편모슬하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재지가 출중하여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수재였다.

 

1644년(인조 22) 25세의 젊은 나이로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세자시강원 사서가 되었다.

 

1651년(효종 2) 귀인 조씨(貴人趙氏)와 김자점(金自點)의 역모사건에 관련되어 파직된 대사헌 조석윤(趙錫胤)을 구하려고 간하다가 효종의 노여움을 사서 경성에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어 돌아왔다.

 

1653년 순안어사(巡按御史)가 되어 영남지방의 민정을 시찰하고 탐관오리를 징계하였다.

 

이듬해 정언이 되어 수천언의 봉사(封事)로 시폐를 진언하였고, 수찬·사인 등을 지냈다.

 

1659년 대사간을 지내고 이어서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1661년(현종 2) 좌승지를 거쳐 대사성이 되고, 1664년 부제학을 지낸 뒤 한성우윤·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1668년 동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이어서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뒤 이조와 호조 · 예조 · 형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그 뒤 1672년에는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

 

천성이 밖으로는 엄격하였으나 내부로는 따스한 인정이 넘쳤다.

 

수염이 길고 풍채가 아름다워 일견 미남자 이었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명백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의 사의가 간여하지 못하였다.

 

저서로는 《화곡유고》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 31세 이경일(李敬一) - 상서공후 백사공파

 

1734(영조 10)~1820(순조 20).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원회(元會), 호는 청헌(聽軒)으로 항복(恒福)의 6대손이다.

 

1775년에 문과 을과로 급제, 대사간·대사헌·황해도관찰사에 이르고 1800년(정조 24)에 공조판서· 형조판서· 좌찬성을 지내고

 

1804년(순조 4)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1808년 75세에 봉조하(奉朝賀)를 받았다.

 

시호는 효정(孝定)이고 문집 ≪청헌유고(聽軒遺稿)≫가 있다.

 

○ 청헌공(聽軒公) 이경일(李敬一)

 

자 원회(元會)

호 청헌(聽軒)

시호 효정(孝定)

생년 1734

연령 87

활동분야 문신 / 관료 / 조선후기

 

과거 및 취재 [문과] 영조(英祖) 51년 (1775) 을미(乙未) 정시(庭試) 을과(乙科) 1위

 

1734(영조 10)에 태어나고 1820(순조 20)에 졸(卒)하였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원회(元會), 호는 청헌(聽軒)이다.

 

항복(恒福)의 6세손이며 진사 종열(宗悅)의 아들로 도사 종악(宗岳)에게 입양되었다.

 

1768년(영조 44) *음덕으로 관직에 나와 온릉참봉· 덕산현감을 지내고,

 

1775년 문과정시에 을과로 급제, 예조좌랑· 사간원정언· 홍문관부수찬· 대사간· 대사성· 조참의· 황해도관찰사·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800년(정조 24) 공조판서에 오른 다음 이어 대사헌· 우참찬·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좌참찬 등을 지냈다.

 

1804년(순조 4)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우의정으로 있을 때, *성학(聖學)에 힘쓰고 정치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 제반시책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졌다.

 

1808년 나이 75세에 봉조하(奉朝賀)가 되고 오은군(鰲恩君)에 피봉되었다.

 

저서에는 시문을 모은《청헌유고》가 있다.

 

시호는 효정(孝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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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덕(蔭德)- 조상의 드러나지 않게 베푸는 덕. ≒음덕(陰德)- 남에게 알려지지 않은 덕행

*성학(聖學)- 성인(聖人)이 가르친 학문. 특히 유학(儒學)을 이른다.

* 봉조하(奉朝賀) : 조선시대 전직 종2품 고위관리로 사임한 사람에게 특별히 대우하여 마련한 벼슬로 골신과 공신의 적장자손(嫡長子孫), 동·서반 당상관 이상의 사람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그들이 재직했을 때의 신분과 품계에 따라 일정한 녹봉을 내린 일종의 훈호(勳號)로서 실제 사무에는 종사하지 않고 국가의식이 있을 때에만 조복(朝服)을 입고 참석하여 종신토록 녹봉(祿俸)을 받았다.

조정의 일을 청하면 항상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며 봉조하는 하례에만 참여한다는 뜻이다.

세조 10년(1464)에 봉조청을 바꾼 것이다. ≒삼자함.

 

● 27세 이경하(李擎厦) - 상서공후 보덕공파

 

자 근임(謹任)

생년 1573

연령 69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중기

 

1573(선조 6)∼1641(인조 19).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근임(謹任).

 

건원릉 참봉 봉남(鳳男)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이항복(李恒福)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김상헌(金尙憲) 등과 교유하였다.

 

음사(蔭仕-과거를 거치지 아니하고 조상의 공덕에 의하여 맡은 벼슬)로 관직에 올라 수령직을 역임하였다.

 

1604년(선조 37) 우봉 현령(牛峯縣令)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2월 전임 군자감 판관 때의 *해유(解由)가 나오지 않아 *체차(遞差)된 일도 있다.

 

광해군 때에 계축옥사(癸丑獄事-1613년. 광해군 5. 대북파大北派가 일으킨 옥사)가 일어나는 등 북인(北人)의 전권이 심하여지자 경기도 영평(永平- 포천)에 퇴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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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유(解由) - 벼슬아치가 물러날 때 후임자에게 사무를 넘기고 호조에 보고하여 책임을 벗어나던 일.

*체차(遞差) - 관리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일을 이르던 말.

 

● 26세 이경한(李景漢) - 익재공후 판윤공파

 

호 청와(淸窩)

활동분야 문신-조선중기 /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청와(淸窩). 부친은 주부(主簿) 이진(李津)이다.

 

천문으로 장차 임진왜란이 일어날 기미를 예측하고 이극복(李克福)과 이백인(李伯仁) 등과 경주(慶州) 안압지(雁鴨池)에 모여 국난이 일어나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조했다.

 

왜란이 발발하자 형인 이경해(李景海)와 아우 이경호(李景湖)와 함께 의병에 참여하여 크게 전공을 세웠다.

 

벼슬은 여러 곳의 부사를 역임하였고 이괄의 난 진압에 공헌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녹신 되었고, 품계는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경주 *향청(鄕廳)에 그와 사적에 관련된 글이 판본으로 새겨 걸려있는데 내용은 * '충성은 사직을 다하고, 이름은 *인각(麟閣)에 빛났다.

 

지극한 효성으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고, 포창하는 은전은 충(忠)과 효(孝)가 나란히 드러났다.’고 하였다.

 

후에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추증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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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청(鄕廳)- 조선 시대 지방의 수령을 자문, 보좌하던 자치기구. 조선 초기에 설치된 유향소(留鄕所)를 임진왜란 이후 대개 향청이라 불렀다.

*인각(麟閣)- 관직자들의 논공행상과 공신들의 일을 맡은 관부로서 충훈부의 별칭임

 

* '충성은 사직을 다하고, 이름은 *인각(麟閣)에 빛났다. 지극한 효성으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고, 포창하는 은전은 충(忠)과 효(孝)가 나란히 드러났다.’

 

- 충성은 사직을 지키는데 다하고 이름은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행하는 충훈부에서 널리 빛난다.

 

부모님께 지극한 효성이 있었고 나라에서는 크게 은혜를 입었다.

 

나라에서 받은 포창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께 효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호칭으로 청와공(淸窩公). 판의금공(判義禁公)이라 한다.

 

● 29세 이경휘(李慶徽) - 익재공후 창평공후 생원공파

 

1617(광해군 9)~1669(현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군미(君美), 호는 묵호, 춘전거사(春田居士).

제현(齊賢)의 후손인 28세 벽오 시발(時發)의 아들.

 

1644년 문과에 급제,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경기감사,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  춘전공(春田公)

 

이경휘(李慶徽) 

 

자 군미(君美)

호 묵호(默好)/ 춘전거사(春田居士)

시호 익헌(翼憲)

생년 1617

연령 53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중기

 

과거 및 취재 [문과] 인조(仁祖) 22년 (1644) 갑신(甲申) 별시(別試) 병과(丙科) 10위

[생원진사시] 인조(仁祖) 11년 (163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1등(一等) 4위

 

1617(광해군 9)∼1669(현종 1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군미(君美), 호는 묵호(默好) 또는 춘전거사(春田居士).

 

제현(齊賢)의 후손으로, 형조판서 시발(時發)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며 문장에 뛰어났고 17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 뒤 1644년(인조 2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된 뒤, 이듬해 검열을 거쳐 1647년 지평에 올랐다.

 

1653년(효종 4) 행홍문관수찬·지제교 겸 경연검토관(知製敎兼經筵檢討官)을 역임하고, 춘추관기사관으로 《인조실록》 편찬사업에 참여하여 헌납이 되었다.

 

그가 언관으로 있을 때에 인품이 온순 단정하며 도량이 넓고 평소에도 말이 적어 주변에서 그를 두려워하였지만, 반면에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인물을 아끼기로 유명하였다.

 

또, 이조참의로 있으면서 양제신(陽濟臣)의 수령 임명시에 의망(擬望)을 거부하여 체직(遞職)되기도 하였다.

 

한편, 1668년(현종 9) 현종이 온천에 행차할 때 삼남지방의 세선(稅船)들이 안흥진(安興津)에서 자주 파손되자 태안에 새로 포(浦)를 만들 것을 의논하여 이미 실행단계에 들어갔는데, 그 부당성을 상소하여 중단된 일도 있었다.

 

그 뒤 강화유수·경기감사 등 외직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 21세 이계번(李繼蕃) - 익재공파.

 

아버지는 가선대부 제주 도안무사(嘉善大夫濟州都按撫使) 휘 신(伸)이시고 어머니는 경주 최씨(慶州崔氏) 판서 오(墺)의 따님으로 지번(之蕃), 계번(繼蕃), 희번(希蕃) 3형제 중 공(公)은 둘째이다.

 

자는 지실(之實)이고 태조(太祖) 갑술년(甲戌年. 1394)에 태어나시고 세종(世宗) 기사년(己 巳年. 1449)에 돌아가시니 향년 56세이었다.

 

계묘년(癸卯年)에 무과(武科)에 오르고 낙안 군사(樂安郡事)에 이르렀으며 재임시 임소(任 所-근무하던 것)에서 돌아가셨다.

 

병조참판(兵曹參判-종2품)에 증직(贈職) 되었다.

 

낙안 군사로 재직하였기 때문에 후손들이 낙안공(樂安公)이라 칭한다.

 

묘는 용인군 외사면 근삼리 수산곡(龍仁郡外四面近三里水山谷)이다.

 

배는 무송 윤씨(戊淞尹氏) 현감(縣監) 상(常)의 따님으로 슬하에 6남 1녀를 두었다.

 

장자는 평안감사(平安監司) 윤인(尹仁), 차자는 장수현감(長水縣監) 재인(在仁). 3남은 호군 (護軍) 존인(存仁), 4남은 대사헌(大司憲) 유인(有人), 5남은 참판(參判) 처인(處仁), 6남 은 평시령(平市令) 원인(元仁)이 있고 따님 한 분은 여흥인(驪興人) 민성(閔惺)에게 시집갔다.

 

장자 평안감사 윤인(尹仁)의 아들이 익재공후 창평공파 파조이신 창평공(昌平公) 공린(公麟)이시고 공의 아들들이 유명한 [8별집]이다.

 

세계는 17세 익재공 제현→ 18세 차자 운와공 달존→ 19세 군사공 덕림→ 20세 도안무사공 신 → 차자 낙안공 계번으로 이어진다.

 

묘는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 근삼리 수산곡 도안무사 공국내 경좌 (墓龍仁市백암(外四)面近三里水山谷都按撫使公局內庚坐)-현재 지명임

 

* 낙안공(樂安公)이라 호칭된다.

 

● 32세 이계조(李啓朝) - 상서공후 백사공파

 

1793(정조 17)~1856(철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덕수(德?), 호는 동천(桐泉). 항복(恒福)의 7대손으로 이조판서 석규(錫奎)의 아들이다.

 

1831년(순조 31)에 문과 갑과 제2에 급제한 뒤 경상감사 공조판서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글씨에 뛰어나 <겅릉비(景陵碑)>가 남아있다.

 

○  동천공(桐泉公) 이계조(李啓朝)

 

자 덕수(德?)

호 동천(桐泉)

시호 문정(文貞)

생년 1793

연령 64

활동분야 문신/관료 / 문신-조선후기 / 문신

 

1793(정조 17)∼1856(철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덕수(德?), 호는 동천(桐泉).

 

항복(恒福)의 7대손이며, 이조판서를 지낸 석규(錫奎)의 아들이다.

 

서울에서 살았다.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831년(순조 31)에 *판관으로서 *식년문과에 갑과 제2인으로 급제, 이조참의·경상감사·대사성·공조판서를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글씨에도 뛰어나 작품으로 〈경릉비 景陵碑〉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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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관(判官)- 조선 시대에 중앙에 둔, 정5품 벼슬.

돈령부, 한성부, 상서원, 봉상시, 사옹원, 내의원, 상의원, 사복시, 군기시 따위에 두었다.

*식년문과(式年文科)- 조선 시대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된 과거 시험.

^식년(式年)- 자(子), 묘(卯), 오(午), 유(酉) 따위의 간지(干支)가 들어 있는 해.

3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데, 이해에 과거를 보이거나 호적을 조사하였다.

식년문과를 대비과(大比科)라고도 하였다.

 

‘대비’라는 것은 ≪주례 周禮≫에 “3년은 ‘대비’로 이 해에 그 덕행(德行)과 도예(道藝)를 고찰하여 현명하고 유능한 자를 뽑아 관리를 등용한다는 문구에서 나왔다.

 

식년시에는 크게 소과, 문과. 무과가 있다.

 

이 제도의 시작은 1084년(고려 선종 1)의 일이지만 조선시대 이전에는 그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1393년(태조 2) 이후부터 비로소 제도적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와서도 국가적인 변고나 국상(國喪) 혹은 그 밖의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경우, 이를 연기하거나 시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식년시는 그 해 1월에서 5월 사이에 시행하는 것이 초기의 예였다.

 

그 뒤 시험 관리의 문제, 시험 기간의 촉박성,

 

농번기와 겹치는 피해 등의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한 개선책이 마련되었다.

 

이에 생원·진사의 초시는 식년 전해 8월 15일 이후에, 문과·무과의 초시는 같은 해 9월 초순에 각각 실시하되

 

생원·진사의 복시와 문과·무과의 복시는 식년의 2월과 3월에 각각 실시하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과거제에서 무엇보다 중시된 문과의 경우 식년시의 급제 정원은 33인이었는데, 이것은 불교의 33신(身)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시행된 식년문과는 총 163회에 걸쳐 6,063인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이 통계에 따르면 1회 평균 36인이 되므로 1회 33인의 원칙이 반드시 지켜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무과의 경우 식년시의 급제 정원은 28인이었다.

 

잡과는 식년시에 역과 19인, 의과 1인, 율과 9인, 음양과 9인 등 모두 38인이 합격 정원이었다.

 

○ 이계조(李啓朝)

 

1793년(정조 17년)에 태어나고 1856년(철종 7년)에 졸(卒)하였다.

 

항복의 7세손이며 이조판서 석규(錫奎)의 아들이다.

 

조선의 문신으로 서울에서 살았고 자는 덕수(德搜), 호는 동천(桐泉)이다.

 

1831년(순조 31년) 판관(判官)으로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처, 헌종 때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올랐다.

 

이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성균 대사성(大史成) 등을 역임하고, 1849년 철종 즉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1852년 공조판서를 거쳐 1854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글씨에 뛰어나 구리시(九里市)의 동구릉(東九陵) 내에 있는 헌종(憲宗)의 〈경릉비명(景陵碑銘)〉을 썼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23세 이공린(李公麟) - 익재공후 창평공파

 

생몰년 미상이다.

제현(齊賢)의 6대손으로 관찰사 윤인(尹仁)의 아들이다.

박팽년(朴彭年- 사육신)의 사위로 장인의 죄에 연좌되어 관직에 나가지 못하다가 사면되었으나 뒤에 1504년(연산군 10)에 갑자사화 때 아들 원(?)의 죄에 연좌되어 해남에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풀리어 청주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른바 ‘8별(八鼈)’의 아버지이다.

 

○ 창평공(昌平公) 휘 공린(公麟)

 

생몰년 미상이며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익재공(益齋公) 휘 제현(齊賢)의 6대손이며 평양 관찰사(平壤觀察使) 윤인(尹仁)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났고 포부가 원대하였다.

 

세조 임금시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朴彭年)의 사위로 장인의 죄에 연좌되어 30년간 관직에 나갈 수 없었다.

 

그러다가 성종조에 공(公)의 어머니 남양 홍씨(南陽 洪氏) 가 절부(節婦)로 정려(旌閭)를 받음으로써 사면되어 마침내 환로(宦路-벼슬 길)에 올라 무반의 직을 잠시 가졌다가 천거로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가 되고 한성부 참군을 겸하였다.

 

이어 흥덕 현감(興德縣監)· 함열 현감(咸悅縣監)· 창평 현감(昌平縣監)을 역임하면서 향리를 잘 통솔하고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뒤에 1504년(연산군 10)에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아들 재사당 원(원)의 죄에 연좌되어 해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신원(伸寃)되었다.

 

여러 번 자신의 죄가 아닌 일에 연좌되었고 또 나이가 많아 관직에 있기를 바라지 않았으므로 청주(淸州)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이른바‘8별(八鼈)집’의 아버지이다.

 

◇ 창평공(昌平公)은 '팔별 집'의 일화로 더욱 유명하다.

 

공(公)은 유명한 사육신중 한 분인 박팽년 (朴彭年)공의 사위가 되었다.

 

신혼 첫날밤, 장모가 사위를 대접하려고 자라를 8마리 사다가 기둥에 매달아 두었는데 그 날 밤에 공의 꿈에 용왕의 사자인 커다란 자라가 나타나 울면서 "내 아들 8형제를 살려주시오" 라고 애원하므로 즉시 일어나 신부에게 물으니 새 사위를

 

대접하려고 자라 8마리를 사다가 부엌에 두었다는 것이다.

 

공은 신부 박씨와 함께 자라 8마리를 물에 놓아주었는데 그만 그중 한 마리가 죽고 말았다.

 

공은 후에 박(朴)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 여덟을 두었다.

 

오(鰲)ㆍ구(龜)ㆍ원ㆍ타ㆍ별(鼈)ㆍ벽ㆍ경(鯨)ㆍ곤(鯤)이라고 거북 구(龜) 아니면 고기 어(魚)를 넣어 이름을 지었는데 모두가 문장에 뛰어나 <8문장(文章)>으로 꼽혔다.

 

여덟 명의 아들이 모두 현달하여 '팔별집'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런데 셋째 아들 재사당 원이 중종 때의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게 됨으로 첫날 밤 8마리 자라 중 한 마리가 죽은 것과 떨어졌다는 이야기다.

 

이후로 5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경주 이씨 익재공파의 '팔벌집' 후손들은 일체 자라를 죽이거나 먹지 않게 가법(家法)으로 지켜왔다.

 

세계(世系)는

(17) 익재공 제현→ (18) 차자 운와공 달존→ (19) 장자 군수공 덕림→ (20) 장자 도안무사공 신→ (21) 차자 낙안공 계번→ (22) 장자 감사공 윤인 → (23) 창평공 공린(창평공파 파조) → (24세) 8별(오. 구. 원. 타. 별. 벽. 경. 곤)

 

○ 이공린(李公麟)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중기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제현(齊賢)의 6대손이며, 관찰사 윤인(尹仁)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났고 포부가 원대하였다.

 

그러나 장인 *박팽년(朴彭年)의 죄에 연좌되어 몇 년간 관직에 나갈 수가 없었다.

 

그 뒤 사면되어 무반의 직을 잠시 가졌다가 천거로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가 되고,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을 겸하였다.

 

이어 흥덕현감· 함열현감· 창평현감(昌平縣監)을 역임하면서 향리를 잘 통솔하고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그의 아들 원(?)의 죄에 연좌되어 해남(海南)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의하여 풀려났다.

 

여러 번 자신의 죄가 아닌 일에 연좌되었고, 또 나이가 많아 관직에 있기를 바라지 않았으므로 청주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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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朴彭年) - 1417(태종 17)∼1456(세조 2).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인수(仁馬), 호는 취금헌(醉琴軒)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 때 사육신(死六臣)의 한사람이다.

세종 16년(1434)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연산군이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키면서 많은 선비들을 제거하고 포악한 정치를 계속함에 이에 맞서 박원종, 성희안 등이 연산군을 폐위시키기 위해 반정을 모의하였다.

1506년 9월 18일(음력 9월 2일) 거사하여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옹립된 사건을 말한다.

* 8별(좌랑공-휘 오. 사미정공-휘 구. 재사당공- 휘 원. 생원공- 휘 타. 장육당공- 휘 별. 참판공- 휘 벽. 진사공- 휘 경. 한당공- 휘 곤)의 아버지. 창평공파 파조(중조 22세 공린) - 창평 현감(昌平縣監)으로 재직시의 지명인 창평(昌平)을 따서

창평공(昌平公)이라 부른다.

 

● 26세 이광윤(李光胤) - 익재공후 창평공후 한당공파

 

자 : 극휴(克休)

호 : 양서(讓西)

생년 : 1564

활동분야 : 문신/관료 / 조선중기

 

과거 및 취재 : [생원진사시] 선조(宣祖) 18년 (158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55위

 

1564(명종 19)∼?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극휴(克休), 호는 양서(讓西). 진사 섬계공 잠(潛)의 아들로 서계공 득윤의 동생이다.

 

3세에 이미 글자를 배우고 8, 9세에 문장을 지었으며 초서를 잘 썼다.

 

1585년(선조 18)에 진사가 되고,

 

159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602년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교리·수찬 등을 역임하고,

 

1607년 서천군수·부제학을 지냈다.

 

도승지에 추증되고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익재공후 창평공후(공린) 한당공파(곤)

 

양서공(讓西公)은 중조 26세로 서계공(西溪公. 휘 득윤)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

 

아버지 진사공(進士公) 잠(潛)은 섬계공(剡溪公)이라고도 칭한다.

 

*양서공(讓西公)이라 호칭한다

 

● 29세 이광좌(李光佐) - 상서공후 백사공파

 

1674(현종 15)~1740(영조 16).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상보(尙輔), 호는 운곡(雲谷). 영의정 항복(恒福)의 현손이다.

 

1694년(숙종 20)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708년에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712년 평안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 1721년과 다음해에 소론이 득세하자 병조판서,

 

1723년에 우의정, 1728년에 영의정에 올라 ≪경종실록≫과 ≪숙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733에 봉조하를 받고 1737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755년에 나주벽서사건으로 관직이 추탈되었다.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 운곡공(雲谷公) 이광좌(李光佐) 

 

자 : 상보(尙輔)

호 : 운곡(雲谷)

생년 : 1674

연령 : 67

활동분야 : 문신/관료 / 조선후기

 

과거 및 취재 : [문과] 숙종(肅宗) 20년 (1694) 갑술(甲戌) 별시(別試) 갑과(甲科) 1위[장원(壯元)]

 

1674(현종 15)∼1740(영조 16).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상보(尙輔), 호는 운곡(雲谷).

 

항복(恒福)의 현손이며, 장령 세구(世龜)의 아들이다.

 

1694년(숙종 20)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697년 부수찬이 되었다.

 

1703년 수찬·부교리·교리를 거쳐 사헌부헌납·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708년에는 전라도관찰사로 나아갔다가 중앙으로 돌아와 이조참의가 되었다.

 

그 뒤 1712년 부제학·평안도관찰사를 거쳐 다음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었고, 1715년에는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숙종이 소론을 배척하여 윤선거(尹宣擧)의 문집을 훼판(毁板)하는 병신처분(丙申處分)을 내리자 이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1718년에는 예조참판에 등용되고, 1721년(경종 1) 호조참판을 거쳐 사직(司直)에 있으면서 왕세제인 연잉군(延?君) 금(延: 뒤의 영조)의 대리청정을 적극 반대하여 경종으로 하여금 이를 취소하게 하는 등 경종의 보호에 명분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1721년과 그 다음해에 각각 김일경(金一鏡) 등의 소(疏)와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사건이 벌어진 신임사화가 발생, 노론이 제거되고 소론이 정권을 잡게 되자 예조판서를 거쳐 평안도관찰사로 나아갔다.

 

이듬해 좌부빈객(左副賓客)을 역임하고, 병조판서로 원접사(遠接使)가 되었으며, 1723년에는 우의정에 올랐고, 1725년(영조 1)에는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노론의 등장으로 파직당하고 말았다.

 

1728년에 정미환국으로 소론정권이 다시 등장하게 되자 영의정에 올라 실록청 총재관(實錄廳摠裁官)이 되어 《경종실록》·《숙종실록》 보유편의 편찬을 담당하였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노론 측에서 김일경의 잔당이 난을 일으킨 것이라 규탄하였음에도

 

영조는 끝내 소론정권에 의하여 난을 평정하였는데, 난이 평정된 뒤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 1등에 봉하여졌다.

 

그 뒤 1729년에 벼슬을 그만두었다가 영중추부사로 복직하였다.

 

1730년에는 소론의 거두로 영조에게 탕평책을 상소하여 당쟁의 폐습을 막도록 건의하였고, 왕의 간곡한 부탁으로 노론 민진원(閔鎭遠)과 제휴, 노론과 소론의 연립정권을 수립하여 재임기간 하에는 비교적 격심한 당쟁이 없도록 하는 데 힘썼다.

 

1733년에는 봉조하(奉朝賀)가 되고, 1737년에는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740년 영의정으로 재직 중 박동준(朴東俊) 등이 중심이 되어 삼사의 합계로 호역(護逆)한 죄를 들어 탄핵을 해오자 울분 끝에 단식하다가 죽었다.

 

1755년 나주벽서사건으로 소론의 준소계열이 무너질 때에 관직이 추탈되었다.

 

글씨와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 운곡공(雲谷公) 이광좌(李光佐)

 

1674년(현종 15년)에 태어나고 1740(영조 16년)에 돌아갔다.

 

백사공(白沙公)의 4세손이며 장령 세구(世龜)의 아들이다.

 

조선 후기 문신으로 자는 상보(尙輔), 호는 운곡(雲谷)이다.

 

1694년(숙종 20)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697년 부수찬이 되었다.

 

1703년 수찬·부교리·교리를 거쳐 사헌부헌납, 이조좌랑을 역임하고 1708년에는 전라도관찰사 등을 거쳐 이조참의·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그 뒤 1712년 부제학·평안도관찰사를 거쳐 다음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었고, 1715년 동지사로 청(淸)나라에 다녀왔고, 1716년 숙종이 소론을 배척하여 윤선거(尹宣擧)의 문집을 훼판(毁板)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1718년에는 예조참판에 등용되고, 1721년(경종 1) 호조참판을 거쳐 사직(司直)에 있으면서 왕세제인 연잉군(뒤의 영조)의 대리 청정을 반대하여 경종으로 하여금 이를 취소하게 하는 등 경종의 보호에 명분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1721∼1722년에 걸쳐 각각 김일경(金一鏡) 등의 소(疏)와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사건이 벌어진 신임사화가 발생, 노론이 제거되고 소론이 정권을 잡게 되자 예조판서를 거쳐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1922년 좌부빈객(左副賓客)을 역임하고, 병조판서로 원접사(遠接使)가 되었으며, 1723년에는 우의정에 올랐고, 1725년(영조 1) 영의정이 되었으나 노론의 등장으로 파직되었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으로 다시 영의정에 올랐고, 실록청총재관이 되어《숙종실록》,《경종실록》보유편의 편찬을 담당하였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노론측에서 김일경의 잔당이 난을 일으킨 것이라 규탄하였음에도 영조는 끝내 소론정권에 의하여 난을 평정하였는데, 난이 평정된 뒤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 1등에 봉하여졌다.

 

그 뒤 1729년에 벼슬을 그만두었다가 영중추부사로 복직하였다.

 

1730년 소론의 거두로 영조에게 탕평책을 상소하여 당쟁의 폐습을 막도록 건의하였고, 왕의 간곡한 부탁으로 노론 민진원(閔鎭遠)과 제휴하고 노·소론 연립정권을 수립하여 재임 기간 하에는 비교적 격심한 당쟁이 없도록 하는 데 힘썼다.

 

1733년에는 봉조하(奉朝賀)가 되고, 1737년에는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740년 영의정에 있을 때 박동준(朴東俊) 등이 중심이 되어 삼사의 합계로 호역(護逆)한 죄를 들어 탄핵을 해오자 울분 끝에 단식하다가 죽었다.

 

1755년 나주괘서사건(羅州卦書事件)으로 소론의 중소계열이 무너질 때에 관직이 추탈되었다.

 

글씨와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 23세 이광전(李光?) - 성암평리공후 어모공파

 

참판공 후(厚)의 아들로 자는 언화(彦華)이다. 

 

중종 신사(辛巳 1521)년에 태어나고 선조 계사(癸巳 1593)년에 돌아가니 향년 73세이다. 

 

계묘(癸卯 1543)년에 문과(文科)에 올라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종부시 주부(行宗簿寺主簿). 상의원 판관(尙衣院判官)을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에 대공(大功)을 쌓아 특별히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제수 받고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고종 임진(壬辰 1892)에 충절(忠節)로 정려(旌閭)를 받았다.  

 

*참의공(參議公)이라 호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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