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경주이씨 인물(사-세)

녹전 이이록 2009. 4. 12. 18:22
 경주 이씨 인물(사-세)


 

● 25세 경양군(慶陽君) 휘 사공(士恭) - 부정공파


세계(世系)는 17 부정공 매→ 18세 오성군 경지→ 19세 차자 집의당 당→ 20세 찰방공 주→ 21세 부사공 숙례→ 22세 참군공 문절→ 23세 참판공 효정→ 24세 경성군 장경→ 25세 3자 경양군 사공으로 이어진다.

 

과거에 급제하여 곽산 부사 겸 동지부사(郭山府使兼同知府使)로 재직 중 임진왜란을 당한 공(公)은 고관대작들조차 살길을 찾아 떠나버린 외로운 임금의 몽진(蒙塵)길을 몇 사람과 지켜 수차례 위급한 상황을 넘겼다.

 

한시도 임금 곁을 떠나지 않고 난리중의 나라 일에 진력(盡力)하였다.

 

공(公)의 헌신으로 선조(宣祖)는 무사히 의주(義州)에 당도하여 한숨을 돌렸다.

 

평란 후 공적에 따라 공(公)은 호성 1등 공신(扈聖一等功臣)에 봉하여 졌고, 자대부(資憲大夫- 정2품 문무관의 품계)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종2품)을 증직(贈職)하였으며 경양군(慶陽君)에 피봉(進封)되었다.

 

인조조(仁祖朝)에 별세(別世)하니, 임금은 사흘 동안이나 조정사무를 폐하고 위로 3대를 증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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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진(蒙塵)- 머리에 먼지를 쓴다는 뜻으로,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떠남.


 

● 24세 이사균(李思鈞) - 익재공후 청호공파


1471(성종 2)~1536(중종 31)

 

자는 중경(重卿), 호는 눌헌(訥軒).

 

1498년에 문과에 급제, 1509년 교리를 거쳐 장악원정․ 우승지에 이르고 1513년 도승지가 되고 1517년 공조, 형조참의 때에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한 때 조광조일파로 몰리어 좌천되었으나 이조판서․참찬으로 승진되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저서로 ≪訥軒集≫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剛)이다.


○ 이사균(李思鈞) 


자 중경(重卿)

호 눌헌(訥軒)

시호 문강(文剛)

생년 1471

연령 66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전기

과거 및 취재 [문과] 연산군(燕山君) 4년 (149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4위


1471(성종 2)∼1536(중종 3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중경(重卿), 호는 눌헌(訥軒).

 

아버지는 판관 식(湜)이며, 어머니는 부사 김숙(金潚)의 딸이다.

 

1498년(연산군 4)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로 등용되었다.

 

1500년 홍문관 정자 겸 경연 전경(弘文館正字兼經筵典經)이 되고,

 

1503년 저작·부사과를 거쳐 세자 시강원 설서가 되었다.

 

이듬해에 부수찬으로 폐비 윤씨(尹氏)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보은으로 유배되었다가 곤양(昆陽)으로 옮겨졌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부수찬으로 기용되고 이듬해에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조 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이 되었다.

 

1509년(중종 4)교리를 거쳐 부응교가 되고, 이듬해 전적을 거쳐 집의 겸 춘추관편수관이 되었다.

 

그 뒤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사성 겸 지제교· 장악원정· 우승지· 첨지· 장악원 판결사를 역임하고, 1513년에 도승지가 되었다.

 

1514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517년 공조와 형조의 참의가 되었다.

 

그 해에 중궁 책봉 주청사(中宮?封奏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19년 전주 부윤을 거쳐, 부제학으로 있을 때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趙光祖)일파로 몰려 한때 좌천되었다가 곧 공조참판이 되고, 이어서 이조판서가 되었다.

 

1534년 참찬으로 승직되었으나, 나세찬(羅世纘)을 구하려다가 경기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뒤에 다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저서로는 《눌헌집 訥軒集》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剛)이다.


* 익재공 후 21세 청호공 휘 희의 청호공파. 청호공의 증손자.

 

* 국당공파의 증 형판 휘 사균 할아버님과는 이름 끝 자가 다르다.

 

증 형판공은 이름 끝 자가 '고를 균(均)'이나 눌헌공 할아버님의 이름 끝 자는 '녹로 균(鈞)'이다.


 

● 39세 이상백(李相佰)


1904~1966.  사화학자 사학자 체육인. 호는 상백(想白), 백무일재(百無一齋).

 

시우(時雨)의 3남이며 맏형은 독립 운동가이며 중국군 중장인 상정(相定)이고, 중형은 시인 상화(相和)이며 아우는 수렵인(狩獵人) 상오(相旿)이다.

 

백부 일우(一雨)가 세운 우현서루(友絃書樓)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대구 보통학교와 와세다 제일고등학원을 거쳐 와세다 대학 문학부 사회철학과를 마치고 와세다 대학 동양사상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가 재외 특별연구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동양학을 더욱 궁구하였다.

 

그 사이에 본국에 자주 왕래하면서 진단학회의 창립에 참여하고 ≪진단학보≫에도 무게 있는 논문을 많이 발표했다.

 

1945년에 경성대학 교수로 취임하고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화학과를 신설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주임교수로 재직했다.

 

그의 학문은 국사학 사회학 체육 분야로 나눌 수가 있는데, 국사학 분야의 논문으로는 <庶孼差待의 淵源에 대한 一問題> <三峰人物考>  <李太祖의 私田改革과 建國後의 實績> <再嫁禁止習俗의 由來에 대한 硏究> 등 많고 사회학 분야는 스스로 강의를 통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고 외국의 사회학 이론서를 도입, 번역하였다.

 

사회조사에도 관심을 가졌고 ≪西海島嶼≫라는 회지를 발간하기도 하였으며 서울대학교에 동아문화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훈민정음을 해설한 ≪한글의 기원≫이라는 저서를 냈으며 논설. 기행문. 수필집 등을 출간했다.

 

그 밖에 젊어서 농구선수였던 것이 인연이 되어 체육이론가로서, 체육계의 지도자로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한국 체육회장(1964~1966) 한국 올림픽위원회 위원장(1964~1966)으로 한국 체육의 국제적 지위향상에 기여했으며 로스앤젤레스(1932) 베를린(1936) 런던(1948) 헬싱키(1952) 멜버른(1956) 로마(1960) 동경(1964) 등의 올림픽대회에 임원 선수단장 대표로 참석하여 국제적 명성을 얻은 다음에 IOC 위원으로 피선되었다.

 

그의 사후에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한일 학생농구 교환경기가 열리고 있으며 최우수선수에게는 <李相佰杯>가 수여된다.

 

이 외에도 고등고시위원 학술원회원 국사편찬위원 등에 참여하였다.

 

그의 장례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한국 사회학회 진단학회 대한 체육회 대한 올림픽위원회 등 5개 단체가 주관하는 <李相佰聯合葬>으로 엄수되었다.

 

1963년에 건국문화훈장이 수여되고 사후에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 39세 이상설(李相卨) - 익재공파


생몰년은 1870~1017 이다.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 충북 진천(鎭川) 출신. 행우(行雨)의 장남이며 7세 때 용우(龍雨)에게 입양되었다.

 

이범세(李範世)· 여규형(呂圭亨)·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등과 신학문을 배웠다.

 

헐버트(Hulbert, H.B.)와도 친교를 맺어 영어·불어를 익히고 수학· 물리· 화학· 경제학· 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

 

고종 31년(서기 1894) 문과에 급제하고 이이(李珥)를 조술(祖述- 학설을 이어받아 그것을 바탕으로 보충·서술함)할만한 학자라는 평을 받았다.

 

2년 후에 성균관 교수 겸 관장 · 한성 사범학교 교관 · 탁지부 재무관 등을 거쳐서 궁내부 특진관에 승진하였다.

 

1904년 6월 박승봉(朴勝鳳)과 연명으로 일본인의 황무지개척권의 요구를 거부해야 한다는 상소 곧 <일인요구 전국 황무지 개척권 불가소(日人要求全國荒蕪地開拓權不可疏)>를 올렸는데 고종이 상소를 받아들여 일인의 요구를 물리쳤다.

 

이해 8월 보안회의 후신인 대한 협동회(大韓協同會)의 회장에 추대되었다.

 

1905년 학부협판과 법부협판에 보임되고 11월초에 의정부 참찬(議政府 參贊)에 올랐다.

 

1905년 11월에 이완용(李完用) · 박제순(朴齊純) 등 5적의 찬성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려할 때 공은 대신회의의 실무책임자였으므로 회의에 참석하여 조약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일본의 철저한 제지로 끝내 들어가지 못하였다.

 

을사조약은 강제로 체결되었으나 고종이 인준하지 않았음을 알고 공은 5적을 즉시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나아가서 조병세(趙秉世) · 민영환(閔泳煥) · 심상훈(沈相薰) 등의 원로대신을 소두(疏頭)로 하는 백관 반대상소(百官反對上疏)와 복합 상소(伏閤上疏)를 올리도록 주선하였다.

 

11월말에 민영환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종로로 나와서 울면서 “민족의 궐기와 결사항일투쟁”을 호소한 다음에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1906년 봄에 이동녕(李東寧) · 정순만(鄭淳萬) 등과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여 8월에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숙장(塾長)이 되었다.

 

여기에서 이동녕 등과 함께 역사 · 지리 · 수학 · 국제법 · 정치학 등의 신학문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6월에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네델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파되었다.

 

이때에 공이 정사(正使)였고 부사(副使)로는 이준(李儁)과 이위종(李瑋鍾)이 보좌했다.

 

일행은 현장에 도착하여 ‘국권의 회복’을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일본의 간악한 선동에 의하여 회의에 참석조차 거부되는 참경에 이르렀으나 공은 대한제국의 현황과 주장을 밝힌 성명서 ≪공고사(控告詞)≫를 헤이그에 모인 세계 각국의 대표에게 보내는 등 국권회복에 있는 힘을 다하였다.

 

일행 가운데 이준은 불행하게도 숙환(宿患)으로 현지에서 죽어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 뒤에 헐버트 · 이위종 · 송헌주(宋憲澍) · 윤병구(尹炳球) 등을 대동하고 영국-프랑스-독일-미국-러시아 등지를 순방하면서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대한제국의 독립만이 동양평화를 보장하는 길이라는 것을 역설하였고 더불어 대한제국의 <영세중립>을 제의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애국활동을 문제삼은 일제는 그들의 주구(走狗)들을 시켜서 국내에서 공을 궐석재판에 회부하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1908년에는 1년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미국의 조야에 독립을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는 한편 각지에 산재해 있는 교포들을 규합하여 <조국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끌어올리는데 온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한 결실로서는 동년 8월에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열린 <애국동지대표자대회>를 꼽을 수가 있고 이듬해 4월에 열린 <국민회 제1회 이사회>를 들 수가 있다.

 

이때에 공과 함께 재미교포의 애국운동을 위한 조직화사업에 동참한 대표적인 인물은 이승만(李承晩)과 국민회 총회장 최정익(崔正益)이었다.

 

다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공은 이승희(李承熙)·김학만(金學萬)·정순만 등과 더불어 항카오(興凱湖) 남쪽 봉밀산(蜂密山) 부근의 땅 45만방(方)을 구입하여 한인 교포 100여 가구를 이주시키고 “한흥동(韓興洞)”이라고 명명하여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였다.

 

이어서 국내외의 의병들을 통합하여 보다 강력한 항일전선을 구축하고자 1910년 6월에 유인석(柳麟錫) · 이범윤(李範允) · 이남기(李南基) 등과 회동하고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통합하여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였다.

 

7월에는 전 군수 서상진(徐相津)을 국내에 보내어 고종에게 13도의군의 편성을 아뢰고 군자금을 내려줄 것과 망명정부의 수립을 추진하겠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8월에 나라가 망하자 연해주와 간도 등지의 교포를 규합하여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였다.

 

9월에 일본의 음모에 넘어간 러시아가 공의 일행을 연해주의 니콜리스크로 추방하였기 때문에 함께 쫓겨 갔다가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1911년 한민장(韓民長) · 김학만 · 이종호(李鍾浩) · 최재형(崔在亨)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하여 ≪권업신문≫의 주간을 함께 맡기도 했다.

 

1913년 이동휘 · 김립(金立) · 이종호 · 정재관(鄭在寬) 등과 나자구(羅子溝)에 <사관학교>를 세워 광복군의 장교를 양성하였다.

 

이듬해에 이동휘·이동녕·정재관 등과 중국과 러시아령 안에서 동지들을 모두 규합하여 <대한 광복군 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수립하고 정통령(正統領)에 추대되었다.

 

1915년 3월 중국 상해(上海) 영국조계(英國租界)에서 박은식(朴殷植) · 신규식(申圭植) · 조성환(曺成煥) · 유동열(柳東說) · 유홍렬(劉鴻烈) · 이춘일(李春日) 등과 함께 <신한 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하고 본부장에 취임하였다.

 

그 뒤에도 조국광복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다가 1917년 3월 니콜리스크에서 48세의 한참 일할 나이에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구국(救國)의 일생’을 마감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이상설(李相卨) 


자 순오(舜五)

호 보재(溥齋)

생년 1870

연령 48

활동분야 항일 / 국방 / 독립운동가


1. 가계와 수업

 

1870(고종 7)∼1917. 충청북도 진천 출신.

 

행우(行雨)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다.

 

7세 때 용우(龍雨)에게 입양되었다.

 

이범세(李範世) · 여규형(呂圭亨) · 이시영(李始榮) · 이회영(李會榮) 등과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또 헐버트(Hulbert, H. B.)와도 친교를 맺어 영어·프랑스어 등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물리·화학·경제학·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


2. 반일운동

 

1894년(고종 31) 문과에 급제하여 이이(李珥)를 조술(祖述)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비서감비서랑(비書監비書郞)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교관·탁지부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에 승진하였다.

 

1904년 6월 박승봉(朴勝鳳)과 연명으로 일본인이 요구하는 전국 황무지개척권 요구의 침략성과 부당성을 배척하는 〈일인 요구 전국 황무지 개척권 불가소(日人要求全國荒蕪地開拓權不可疏)〉를 올렸는데, 고종이 이 상소를 받아들여 일본의 요구를 물리쳤다.

 

이를 계기로 상소가 연이었다.

 

이해 8월 보안회의 후신인 대한 협동회(大韓協同會)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1905년 학부협판(學部協辦)과 법부협판을 역임하였으며, 11월초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발탁되었다.

 

1905년 11월 이완용(李完用) · 박제순(朴齊純) 등 5적(五賊)의 찬성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당시, 그는 대신회의의 실무책임자인 참찬이었으나 일본의 제지로 참석하지 못하였다.

 

이 조약이 고종의 인준을 거치지 아니한 사실을 알고 고종이 순사직(殉社稷- 사직을 위하여 순절)의 결심으로 5적을 처단하고, 5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한편, 조약체결 직후 조병세(趙秉世) · 민영환(閔泳煥) · 심상훈(沈相薰) 등 원로대신들을 소수(疏首- 상소에서 맨 첫머리에 이름을 올림)로 백관의 반대상소와 복합항쟁(伏閤抗爭)을 벌이도록 주선하였다.

 

11월말 민영환의 자결소식을 듣고 종로에 운집한 시민에게 울면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3. 망명과 헤이그 특사 파견

 

1906년 봄 이동녕(李東寧) · 정순만(鄭淳萬) 등과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여, 8월경 그곳에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건립하고 숙장(塾長)이 되었다.

 

여기에서 이동녕 등과 역사·지리·수학·국제법·정치학 등의 신학문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6, 7월경 이준(李儁) · 이위종(李瑋鍾)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참석, 활약하였다.

 

대한제국의 실정과 국권회복문제를 제기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국력의 뒷받침이 없었고,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협상의 성격을 띤 회의였기 때문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해 6월 대한제국의 주장을 밝힌〈공고사 控告詞〉를 평화회의와 각국 위원에게 보냈다.

 

또, 헐버트와 이위종 · 송헌주(宋憲澍) · 윤병구(尹炳球)를 대동하고 영국 · 프랑스 · 독일 · 미국 · 러시아 등지를 순방하면서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관건임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한국의 영세중립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그 해 8월 본국정부에서는 재판에 회부되어 궐석 판결로 사형이 선고되기도 하였다.


4. 연해주에서의 독립활동

 

1908년부터 미국에 1년여 동안 머무르면서 미국 조야에 대한제국의 독립지원 호소를 계속하는 한편, 각지의 교포를 설득하여 조국독립운동의 새로운 계기를 만드는 데 힘썼다.

 

또한, 1908년 8월 콜로라도주 덴버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 대표자회의(愛國同志代表者會議)에 이승만(李承晩)과 연해주(沿海州)대표로 참석하였다.

 

1909년 4월 국민회(國民會) 총회장 최정익(崔正益) 등과 국민회의 제1회이사회를 열고 구체적 사업을 결정한 다음, 정재관(鄭在寬)과 연해주로 떠났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승희(李承熙) · 김학만(金學萬)·정순만 등과 항카호(興凱湖) 남쪽 봉밀산(蜂密山)부근에 땅 45방(方)을 사서 100여 가구의 한국교포를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였다.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하여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고자 1910년 6월 유인석(柳麟錫) · 이범윤(李範允) · 이남기(李南基)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하여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였다.

 

유인석과 상의하여 이해 7월에는 전 군수 서상진(徐相津)을 본국에 보내어 고종에게 13도의군 편성을 상주하고, 군자금의 하사와 고종의 아령파천(俄領播遷)을 권하는 상소문을 올려 망명정부의 수립을 기도하였다.

 

8월에 국권이 상실되자, 연해주와 간도 등지의 한족을 규합,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9월 일제와 교섭한 러시아에 의하여 연해주니콜리스크(雙城子) 로 추방되었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왔다.

 

1911년 한민장(韓民長) · 김학만 · 이종호(李鍾浩) · 정재관 · 최재형(崔在亨)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권업신문 勸業新聞》의 주간을 맡기도 하였다.

 

1913년 이동휘 · 김립(金立) · 이종호 · 장기영(張基永) 등과 나자구(羅子溝)에 사관학교를 세워 광복군 사관을 양성하였다.

 

1914년 이동휘 · 이동녕 · 정재관 등과 중국과 러시아령 안에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正統領)에 선임되었다.

 

1915년 3월경 상해 영조계(英租界)에서 박은식(朴殷植) · 신규식(申圭植) · 조성환(曺成煥)· 유동열(柳東說) · 유홍렬(劉鴻烈) · 이춘일(李春日) 등의 민족운동자들이 화합하여 신한 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하여 본부장에 선임되었다.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1917년 3월 니콜리스크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이상설(李相卨:1871∼1917)선생은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부재(溥齋)이며 자는 순오(舜五)이다.

 

선생은 1870년 12월 7일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직마을에서 경주 이씨 이행우 선생과 벽진 이씨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7세때 이용우 선생의 양자로 편입되어 서울로 상경한 그는 한학을 공부하는 한편, 독학으로 신학문을 깨우치는 등 두뇌가 명석하고 학문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였다.

 

신학문에 뜻을 두고 영어·러시아어·법률 등을 공부하였다.

 

이범세(李範世) · 여규형(呂圭亨) · 이시영(李始榮) 등과 신학문을 공부하였고 H.B. 헐버트와도 친교를 맺어 영어·프랑스어를 익혔다.

 

25세 때인 1894년(고종8년)에는 조선의 마지막 과거인 갑오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교수겸 관장, 한성사범학교 교관 등을 역임하였다.

 

궁내부특진관·학부협판을 역임하고 1904년 일본인의 황무지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서 일본의 요구를 물리쳤고, 보안회(保安會)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회장이 되었고, 1905년 법부협판(法部協辦)·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을 지냈다.

 

11월에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통분을 금치 못해 가두(街頭)에서 연설한 후 두문불출하였다.

 

또한 의정부 참찬의 자리에 있으면서 을사늑약의 강제를 막지 못하자 관직을 버리고 자결을 시도하며 을사늑약의 무효와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하였다.

 

1906년 이동녕(李東寧) 등과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노우키예프스크로 이주하였다.

 

그 곳에서 원동임야회사(遠東林野會社)를 세우고, 간도(間島) 룽징춘[龍井村]으로 가서 서전 서숙(瑞甸書塾)을 설립, 교포자녀의 교육과 항일민족정신 고취에 진력하였다.

 

1907년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과 함께 참석,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하여 전세계에 알리려 하였으나 일본의 계략으로 참석을 거부당하였다.

 

본국에서는 일본의 압력으로 궐석재판(闕席裁判)이 열려 이상설에게는 사형이,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그래서 귀국을 단념하고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했다.

 

1910년 국권피탈 뒤 유인석(柳麟錫)·이범윤(李範允) 등과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했다.

 

또 유인석(柳麟錫) 등과 성명회(聲鳴會)를 조직, 국권침탈의 부당성을 통박하는 성명서를 작성하여 각국에 발송하는 등 세계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일본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관헌에게 붙잡혀 투옥되었다.

 

이듬해 석방되어 이동녕 등과 권업회(勸業會-이주한인의 자치를 도모)를 조직하고, 《권업보(勸業報)》,《해조신문(海潮新聞)》 등을 발행,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4년 이동휘(李東輝)·이동녕 등과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正統領)에 선임되었고 1915년 상하이[上海(상해)] 영국조계(英國租界) 안에 박은식(朴殷植) 등과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선생은 건강이 점차 악화되어 결국 1917년 3월 2일에 48세를 일기로 니콜리스크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상설 선생의 생가 건물은 잡석(雜石)의 기단 위에 흙벽돌로 벽을 쌓고 진흙으로 마감한 초가(草家)로,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인데 40여년 전에 무너진 것을 근래에 복원 수리하였다.

 

1987년 3월 3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77호로 지정되었다.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에 위치한다.


 

● 28세 이상언(李尙彦) - 국당공파


자 용수(溶수)

호 성서(城西)

생년 1597

연령 70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중기 / 학자

과거 및 취재 [문과] 인조(仁祖) 26년 (1648) 무자(戊子) 정시(庭試) 을과(乙科) 1위

[생원진사시] 인조(仁祖) 11년 (1633) 계유(癸酉)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三等) 14위

 

1597(선조 30)∼1666(현종 7).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자는 용수(溶수), 호는 성서(城西).

 

아버지는 휘음(徽音)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두문(斗文)의 딸이다.

 

할아버지인 증 병조참판 개립(介立-성오대공)에게 수학하였으며, 1624년(인조 2)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들어가 학문연마에 매진하였고, 1633년 진사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1637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뒤에 화의가 성립되자 벼슬에의 뜻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가 지냈다.

 

1648년 다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사간원의 정6품)에 제수되었고, 그 뒤 성균관 사예·사헌부 장령·병조 정랑 등을 역임하고 정선 군수를 거쳐

 

1654년(효종 5) 영광 군수(군수-종4품), 1656년 다시 성균관 직강에 임명된 뒤 안악군수· 성균관 전적을 역임하였고, 2년 뒤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 영암 군수가 되었다.

 

외직에 있을 때에는 선정으로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다음해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정3품)로 재직하다가 1661년(현종 2)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가 후진들을 교육시키며 김응조(金應祖)· 조임도(趙任道) 등과 산수(山水)를 유람하면서 세사를 잊고 지냈다.

 

그 뒤 1664년 함안 군수에 임명되어 재직하다가 1년 후 병으로 인하여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다음해에 죽었다.

 

저서로는 《성서문집》 6권 3책이 있다.


 

● 39세 이상옥(李相玉)


1908~1981. 사학자, 한학자

 

호는 한파(漢坡). 경기도 파주 출신.

 

1922년 양정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고

1928년 일본 동양대학(東洋大學) 문학부에 입학하여 중국문화과 역사를 전공하고

1933년에 졸업과 동시에 서울의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연구실에서 연구하다가

1934년 경성제국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동양철학을 연구하였다.

 

1946년 경기고등학교에서 한국사와 동양사를 담당하였고,

1950년 이후에는 서울대 치대에서 한국사를 강의하였고,

1956년 국학대학 교수로 취임하여 한국사연구에 전념하였다.

 

1960년 국학대학장, 우석대학교대학원장,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를 끝으로 정년퇴임하였다.

 

1963년 ≪한국의 역사≫ 전 12권을 저술하여 제4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고 우석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한국사의 대중화운동에도 앞장서 한국의 설화 및 민속연구에도 주력하여 이 분야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한국의 역사≫ 전 13권?≪한국사화≫·≪한국인≫·≪인간의 역사≫· ≪한국의 고경학(古經學)≫ 등과 130여편의 논문 및 논설이 있다.

 

 

● 39세 이상정(李相定)


1897~1947. 독립운동가

 

별명은 연호(然浩), 직(直). 호는 청남(晴南), 산은(汕隱). 대구 출신.

 

상화(相和) · 상백(相佰)의 장형.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가 경영하는 강의원(講義院)에서 수학하고 1912년 동경에 있는 성성중학교(成城中學校. 육군유년학교)를 졸업하고 미술학교와 상업학교를 거쳐 국학원대학(國學院大學)에서 역사학을 공부하였다.

 

1919년 귀국하여 오산(五山)·경신(儆新)·계성(啓聖) 등의 학교에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1923년 만주로 망명, 항일독립운동을 한 다음에 유동열(柳東說) · 최동오(崔東旿) 등과 풍옥상(馮玉祥) 장군의 서북국민부대의 장성참모, 장개석(蔣介石) 군대와의 통합으로 국민정규군 소장참모로 항일전선에 참여하였다.

 

그뒤 상해(上海)에서 남경(南京)·소주(蘇州)·항주(杭州)·무창(武昌)·북경(北京)까지의 전선을 석권했고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 등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윤봉길(尹奉吉)에게 폭약을 구해주었고, 1932년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민정부의 초청으로 중경육군참모학교의 교관을 지냈고 1938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의원 및 외교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 중국 유격대훈련학교 교수, 이듬해에 화중군사령부(華中軍司令部)의 고급막료로 남경전(南京戰)과 한구전(漢口戰)에 참전했다.

 

태평양전쟁의 종결과 동시에 육군중장(陸軍中將)으로 승진되어 중국북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북지나방면(北支那方面) 최고사령부 및 그 예하 부대의 무장해제를 담당하였으며 연합군 동경진주의 중국군사령부의 막료로 임명되었으나 소망하던 일본의 멸망이 성취되었으므로 사퇴하였다.

 

1947년 10월 어머니의 부음(訃音)을 듣고 귀국한지 40여일 만에 뇌일혈로 타계하였다.

 

유고(遺稿)로 ≪표박기(飄泊記)≫가 있고, 시(詩)·서(書)·화(畵)·전각(篆刻)에 뛰어났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이상정(李相定)


호 청남(晴南)/산은(汕隱)

기타 인명 이연호(李然浩)/이직(李直)

생년 1897

연령 51

활동분야 항일 / 국방 / 독립운동가


1897∼1947. 독립운동가.

 

별명은 연호(然浩)·직(直). 호는 청남(晴南)·산은(汕隱). 대구출신.

 

시우(時雨)의 맏아들로서 상화(相和, 尙火) · 상백(相佰) · 상오(相旿)의 형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 일우(一雨)밑에서 교육을 받았다.

 

큰아버지가 경영하던 당시 신학문과 민족정기의 요람이었던 강의원(講義院)에서 공부한 뒤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성성 중학교(成城中學校: 육군유년학교)를 마치고 미술학교· 상업학교를 거쳐 고쿠가쿠인 대학(國學院大學)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졸업 후 1919년 귀국하여 약 3년간 행동적 사도(師道- 선생님)로서 오산(五山)·경신(儆新)·계성(啓聖)·신명(信明) 등의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조국에서의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껴 1923년 만주로 망명, 북만주에서 약 2년간 민족교육을 통한 항일 독립운동을 한 뒤 유동열(柳東說)·최동오(崔東旿) 등과 함께 중국 펑위샹(馮玉祥)장군의 서북 국민부대의 장성참모로서,

 

그 뒤 장개석(蔣介石) 군대와의 통합으로 국민정규군 소장 참모로서 항일전선에 참전하였다.

 

그 뒤 상해와 난징(南京)을 중심으로 쑤저우(蘇州)·항저우(杭州)·우창(武昌)·북경까지 독립 일념으로 중국의 군벌· 학자들과 만나면서 또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 등의 독립지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윤봉길(尹奉吉)에게 폭약을 구해주는 등 독립운동에 전념하였으며, 1932년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장개석 국민정부의 초청으로 충칭 육군 참모학교(重慶陸軍參謀學校)의 교관을 지내고, 1938년 김구·김규식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및 외교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유동열 등과 신한민주 혁명당(新韓民主革命黨)을 조직하여 중앙위원 겸 군사부장에 취임하였다.

 

1941년 중국 육군 유격대 훈련학교의 교수를 거쳐 1942년 화중 군사령부(華中軍司令部)의 고급막료로 난징전(南京戰)·한커우전(漢口戰)에 참전하였다.

 

그 뒤 이른바 태평양 전쟁의 종결과 동시에 육군 중장으로 승진되어 일본국 북지나 방면 최고사령관 및 그 장병들의 무장해제를 담당하였고, 연합군 동경 진주의 중국군 사령부의 막료로 임명되었으나, 소망인 일본군 타도가 실현되었으므로 모든 지위를 사퇴하였다.

 

충칭에서 광복된 조국의 앞날을 신익희(申翼熙) 등과 토론, 상해로부터 급히 와서 도와달라는 교민들의 요청으로 그곳에 가서 중국인들의 한국인 박해로부터 교민보호에 진력하던 중 1947년 10월 어머니의 사망소식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40여일 만에 뇌일혈로 죽었다.

 

유고로 《표박기(飄泊記)》가 있고, 시(詩)·서(書)·화(畵)에 능하였으며, *전각(篆刻)에 뛰어났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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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篆刻)- 나무, 돌, 금옥 따위에 인장을 새김. 또는 그런 글자. 흔히 전자(篆字)로 글을 새긴 데서 유래한다


 

● 39세 이상협(李相協)


1893~1957. 언론인. 소설가

 

호는 하몽(何夢). 서울 출신.

 

보성중학을 졸업하고 1909년 일본에 건너가 게이오 대학(慶應大學)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여 1912년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1916년 편집장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 퇴사하여 동아일보 창간 때 발행인으로 허가를 얻고 주식회사로 발족하게 되자 28세로 편집국장에 오르니 우리나라 언론계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초대 편집국장·논설위원·사회부장·정리부장 등을 겸하고 1면의 <횡설수설(橫說竪說)>란과 사회면에 <휴지통>란을 신설하여 집필을 도맡는 등 1인 10역의 만능신문인으로 당시의 언론계에서 혜성같은 존재가 되었다.

 

1921년 편집 겸 발행인이라는 명예직을 사임하고 편집국장으로 근무하면서 1922년 4월 12일자 창간 2주년 기념호에 백악산인(白岳山人)이라는 필명으로 <齋藤實君에게 與함>이라는 논설을 발표하여 조선총독(朝鮮總督)의 비정(秕政)을 매섭게 성토하여 압수처분을 받기도 했다.

 

같은 해 8월 6일에 일본에 특파되어 니가타현(新潟縣) 시나노천(新濃川) 수력전기회사의 한국인 학살사건현장을 취재하여 특별보도하고, 외국의 광고까지 끌어와서 1923년 봄에 동아일보사 상무취체역· 편집국장· 정경부장이 되고  그해 9월 일본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 사건 때 단독으로 건너가서 목숨을 걸고 한인학살현장을 취재․보도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24년 4월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이상재(李商在) 사장 밑에서 이사 및 편집고문으로 입사하여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崔恩喜)의 특채 등으로 획기적인 지면(紙面) 쇄신을 단행하는 등 공이 컸으나 9월의 필화사건으로 신문이 무기정간되자 사직하였다.

 

1926년 11월 시대일보(時代日報)의 판권을 인수하여 중외일보(中外日報)로 제호를 바꾸어 발간하고 1931년까지 12년간 민간항일신문(民間抗日新聞)의 기반을 다지므로써 민간 3대지를 주재한 인물이 되었다.

 

1933년에 다시 매일신보에 부사장으로 복귀하여 1941년까지 8년간 활동하였고 해방후 매일신보가 미군정에 인계된 뒤에도 부사장으로 재직했으며 1951년 자유신문사 사장 또는 부사장으로 만년까지 활동했다.

 

작품으로는 ≪아라비안 나이트≫·≪해왕성≫·≪재봉춘(再逢春)≫·≪정부원(貞婦怨)≫·≪누(淚)≫·≪무궁화≫ 등이 있다.


 

 ● 39세 이상화(李相和)

 

학력 : 경성중학교 - 경희대학교 - 경희대학교대학원

출생지 : 충북 음성

가족 : 부인 서순애 씨, 1남(이후 사망)

화제 : 민족적 저항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인


호는 상화(尙火)이고 충북 음성에서 1906년에 출생했고 1943년 4월 25일 사망했다

 

1919년 서울 중앙고보를 3년수료하고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학생시위운동을 지휘하였다.

 

1922년 문예지《백조(白潮)》동인,〈말세(末世)의 희탄(희嘆)〉,〈단조(單調)〉,〈가을의 풍 경〉,〈나의 침실로〉,〈이중(二重)의 사망〉등을 발표하고

 

1923년 동경 유학하여 일본의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어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고 1924년 귀국하였다.

 

1927년 의열단 이종암 사건으로 구금.《개벽》지를 중심으로 시 · 소설 · 평론 등을 발표하고 시〈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에 가담하였으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수많은 지식인과 학생들의 독립의지를 일깨웠던 민족혼의 등불이 되었다

 

1935년부터 2년간 중국을 방랑하고 1937년 조선일보사 경북총국을 맡아 경영하기도 했다.

 

그 후 교남학교(嶠南學校) 교원으로 영어와 작문을 지도했고 1940년 이후 독서와 연구에 몰두《춘향전》영역,《국문학사》등의 집필을 기획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작품으로 위에 적은 외에 《비음의 서사》,《마음의 꽃》,《조소(嘲笑)》등 다수가 있다.

 

1943년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1948년 대구 달성공원에 이상화 시비를 세우고

1951년 시집 [상화와 고월]을 출간하고

1973년 시집 [상화시집]을 출간하고

1981년 시집 [이상화 전집]을 출간하였다.

 

천안 독립기념관 뜰에는 일제치하 최고의 저항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이상화의 시비가 자리하고 있다.


○ 이상화(李相和)


호 무량(無量) / 상화(尙火) / 상화(想華)

생년 1901

연령 43

활동분야 문학 / 시 / 시조인 / 시인


1901∼1943. 시인. 호는 무량(無量)·상화(尙火, 想華)·백아(白啞).

 

경상북도 대구출신. 아버지는 시우(時雨)이며, 어머니는 김신자(金愼子)이다.

 

7세에 아버지를 잃고, 14세까지 가정 사숙에서 큰아버지 일우(一雨)의 훈도를 받으며 수학하였다.

 

18세에 경성중앙학교(지금의 중동중학교)3년을 수료하고 강원도 금강산일대를 방랑하였다.

 

1922년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의 아테네 프랑세에서 2년간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가 동경 대지진을 겪고 귀국하였다.

 

친구 백기만(白基萬)의 《상화(尙火)와 고월(古月)》에 의하면, 1917년 대구에서 현진건(玄鎭健)·백기만·이상백(李相栢)과 《거화 炬火》를 프린트판으로 내면서 시작활동(詩作活動)을 하였다.

 

21세에는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朴鍾和)를 만나 홍사용(洪思容)·나도향(羅稻香)·박영희(朴英熙) 등과 함께 《백조 白潮》 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학생봉기를 주도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또한, 김기진(金基鎭) 등과 함께 1925년 파스큘라(Paskyula)라는 문학연구단체 조직에 가담하였으며, 그해 8월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27년에는 의열단(義烈團) 이종암(李鍾巖)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조선일보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하였다가 1년 만에 실패하였다.

 

1937년 3월에는 장군인 형 이상정(李相定)을 만나러 만경(滿京)에 3개월간 갔다와서 일본관헌에게 구금되었다가 11월말경 석방되었다.

 

그 뒤 3년 간 대구 교남 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권투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그의 나이 40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여 〈춘향전〉을 영역하고, 〈국문학사〉·〈불란서시정석〉 등을 시도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43세에 위암으로 죽었다.

 

문단데뷔는 《백조》 동인으로서 그 창간호에 발표한 〈말세의 희탄(?嘆)〉(1922)·〈단조 單調〉(1922)를 비롯하여 〈가을의 풍경〉(1922)·〈이중(二重)의 사망〉(1923)·〈나의 침실로〉(1923)로써 이름을 떨쳤다.

 

특히, 〈나의 침실로〉는 1920년대 초기의 온갖 주제가 한데 결합한 전형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떠한 외적 금제로도 다스려질 수 없는 생명의 강렬한 욕망과 호흡이 있고, 복합적인 인습에의 공공연한 반역·도전이 있으며, 이 모두를 포용하는 낭만적 도주의 상징이자 죽음의 다른 표현인 ‘침실’이 등장한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 〈몽환병 夢幻病〉(개벽, 1925)·〈비음 緋音〉(개벽, 1925)·〈이별(離別)을 하느니〉 (조선문단, 1925) 등이 있다.

 

이와는 달리 경향파적 양상을 드러내는 작품들로는 <가상〉·〈구루마꾼〉·〈엿장사〉·〈거러지〉(이상은 개벽, 1925)가 있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 1926)의 사회참여적인 색조로 원숙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개벽》지 폐간의 계기가 된 작품인만큼 치열한 반골기질의 표현으로 주목된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는 〈조소 嘲笑〉(개벽, 1925)·〈통곡 慟哭〉(개벽, 1926)·〈도―쿄에서〉(문예운동, 1926)· 〈파―란비〉 〈신여성, 1926〉·〈선구자(先驅者)의 노래〉(개벽, 1925)·〈조선병 朝鮮病〉(개벽, 1926)·〈비갠 아침〉(개벽, 1926)· 〈저므는 놀안에서〉(조선문예, 1928)가 있다.

 

그의 후기 작품경향은 철저한 회의와 좌절의 경향을 보여주는데 그 대표적 작품으로는 〈역천 逆天〉(시원, 1935)· 〈서러운 해조〉(문장, 1941) 등이 있다.

 

발굴된 작품으로는 《상화와 고월》에 수록된 16편을 비롯하여 58편이다.

 

문학사적으로 평가하면, 어떤 외부적 금제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연적 충동(情)의 가치를 역설한 이광수(李光洙)의 논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백조파’ 동인의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뛰어넘은 시인으로, 방자한 낭만과 미숙성과 사회개혁과 일제에의 저항과 우월감에 가득한 계몽주의와 로맨틱한 혁명사상을 노래하고, 쓰고, 외쳤던 문학사적 의의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비는 1946년 동향인 김소운(金素雲)의 발의로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졌다.


 

● 18세 이서종(李瑞種) - 익재공파


익재공(益齋公) 휘 제현(齊賢)의 장자(長子)이다.

 

벼슬은 봉상대부 종부시부령(奉常大夫宗簿寺副令-정4품)이었고 뒤에 증직으로 증 문하시랑(贈門下侍郞-정2품)을 받았다.

 

초배는 풍산 홍씨이며 밀직사 유의 따님(配풍山洪氏密直使侑女)으로 보림(寶林), 실림(實林) 두 아들과 2녀를 두었다.

 

계배는 김씨이며 낭장 송계의 따님(配金氏郎將松桂女)으로 아들 원익(元益)과 2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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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配) - 배우자

* 증직(贈職) -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죽고 난 뒤에 더해 주는 관직 앞에 붙임

* 수직(壽職) - 일반인은 90세, 관리는 80세 이상되는 해에 임금이 내리는 명예직.

* 종부시(宗簿寺) - 왕실의 보첩을 맡아보던 관청.

* 부령(副令) - 종친부에 속한 종5품직


○ 시랑공(侍郞公) 서종(瑞種)


아버지는 고려 말의 문신(文臣)으로 정치가(政治家)이며 성리 학자(性理學者), 시인(詩人)이신 익재공(益齋公) 휘 제현(齊賢)이시고 어머니는 길창국부인 안동 권씨이며 도첨의 정승 영가부원군 문정공 부의 따님(配吉昌國夫人安東權氏都僉議政丞永嘉府院君文正公溥女)이시다.

 

벼슬은 봉상대부 종부시 부령(奉常大夫宗簿寺副令-정4품)이고 증 문하시랑(贈門下侍郞)이다.

 

초배는 풍산 홍씨이며 밀직사 유의 따님(配豊山洪氏密直使侑女)이시다.

 

보림(寶林), 실림(實林) 두 아들과 2녀를 두었다.

 

장자(長子) 보림(寶林)은 익재공(益齋公) 장손(長孫)으로 대사헌(大司憲)·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는 등 관계에서 활약이 컸고 사후에는 문숙(文肅)이란 시호(諡號)가 내렸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그는 사람됨이 엄격하고 품행방정 하였으며 정치적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더 이상의 행적(行蹟)은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차자 실림(實林)은 그 행적이 문헌(文獻)으로 전하는 것이 없고 후사(後嗣) 마저 끊어져 족보(族譜)에도 이름만 올라 있다.

 

계배는 김씨이며 낭장 송계의 따님(配金氏郎將松桂女)이시다.

 

아들 원익(元益)을 두었다.

 

3자 원익(元益)도 역시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것으로만 기록되어 있을 뿐 다른 행적은 상고(詳考)할 수 없다.

 

^ 족보 아래쪽 기록을 보면 따님이 넷으로 횡성군(橫城君) 조무(趙茂), 감사(監司) 권기(權湛), 부사(府使) 이원적(李元積), 판윤(判尹) 허주(許周)에게 출가(出嫁)한 것으로 되어있다.


 

● 이석(李錫)


1882~1909 한말의 의병

 

자는 사옥(士玉). 경상북도 청송 출신.

 

1896년 의병이 각처에서 일어날 때 의병으로 나섰으나 정부의 의병 해산 조치로 산에 들어갔다가 1906년 영천을 중심으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이루어지자 의병장 정용기(鄭鏞基)의 수하 좌영장(左領將)이 되었다.

 

1907년 남석문(南錫文) · 정순기(鄭純基) 등과 청송 · 영덕에서 의병을 모집하다가 남석문이 잡혀 처형되니 본대로 돌아갔고

마침 의병장 정용기가 전사하자 중군(中軍)에 임명되었으며 얼마 후 의병장 정환직이 처형당하자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이 무렵 산남의 진은 의병장이 없는 소수부대로 전락하여 유격부대로 재편되었다.

 

그는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장기와 청하 등지에서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울산으로 이동하던 중에 일본군의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여 의병을 해산하였다.

 

삼유산(三踰山) 아래 도평촌(道坪村)에 은거하다가 1909년 7월 불들려서 3년형을 받고 복역 중에 탈옥했다가 잡혀서 처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이석(李錫)


자 사옥(士玉)

생년 1882

연령 28

활동분야 항일 / 국방 / 의병


1882(고종 19)∼1909. 한말의 의병. 자는 사옥(士玉). 경상북도 청송출신.

 

1896년 *을미의병이 각처에서 전개되자 의병부대에 *입진하였으나 의병부대 해산조치에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그 뒤 1906년 을사의병의 일환으로 영천을 중심으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구성되자 의병장 정용기(鄭鏞基)의 휘하에서 *초장(哨長)과 좌령장(左領將)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 남석문(南錫文)·정순기(鄭純基) 등과 청송·영덕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던 중 남석문이 붙잡혀 처형당하자 중도에서 귀대하였다.

 

이때 의병장 정용기가 전사하고 정환직(鄭煥直)이 의병장으로 추대되자 *중군(中軍)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 정환직이 청하에서 패전하여 처형당하자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였다.

 

한편, 당시 산남의 진은 의병장이 공석인 채 이미 구심력을 잃고 소규모의 유격부대로 재편되어갔다.

 

이에 소수의 부하만을 인솔하고 장기와 청하 등지를 진격,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이어서 울산으로 진군하던 중 일본군의 복병에게 크게 패하였다.

 

그 뒤 휘하의 의병을 해산하고 귀향하여 *삼유산(三踰山) 아래 도평촌(道坪村)에 은거하던 중 1909년 7월에 붙잡혔다.

 

3년형을 언도 받고 복역하던 중 탈옥하였으나 다시 붙잡혀 처형당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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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의병(乙未義兵)- 을미사변을 계기로 봉기한 한말 최초의 항일의병운동.

1895년(고종 32) 8월 20일 일본 낭인들에 의한 민비학살의 비보로 분노하고 있던 위정척사계열의 유생들은 민비의 폐위조칙이 발표되자, 즉시 '토역소'(討逆疏) 등을 올려 폐위에 반대함은 물론 나아가 친일내각의 타도와 일본세력의 축출을 목표로 하는 의병운동을 일으킬 움직임을 나타냈다.

 

1895년 8월 22일 서울에 창의 고시문이 나붙고, 제천에서는 유인석을 중심으로 한 그의 문인 수백 명이 유생대회인 향음례(鄕飮禮)를 하는 중에 거의소청(擧義掃淸)의 방법으로 공론을 모았다.

 

또한 10월 11일 충청북도 보은에서 문석봉(文錫鳳)을 중심으로 의병이 일어나 보은 장터에 격문을 붙이고 회덕으로 진격하여 관아를 습격, 무장하고 의병전쟁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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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진(入陣)- 진영이나 진지, 성채(城砦) 따위에 들어감

*초장(哨長)- 초(哨- 약 백 명을 단위로 하던 군대의 편제)의 우두머리.

*중군(中軍)- 각 군영(軍營)에서 대장, 절도사, 통제사 등의 밑에서 군대를 통할하던 장수.

*삼유산(三踰山)- 경북 청송 지역에 있는 산

*추서(追敍)- 죽은 뒤에 관등을 올리거나 훈장 따위를 줌.


 

● 20세 이석(李碩) - 평리성암공후 검교공파


고려 말에 公이 일찍 進士가 되고 權武科로 歷檢校護軍으로 시작하여 兵馬節度使가 되어 戰功이 많았다.

 

고려 말 이성계의 혁명으로 관직을 포기하고 錦城 居平 향리로 숨어들어 두문자정(杜門自靖-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스스로 마음의 평안 평정을 찾으려고 하는 것)하고 의리를 굳건히 지키려고 하니 太祖가 여러 번 兵曹判書로 불렀으나 종래 응하지 않았다.  

 

권장하고 나아가게 후학을 가르치며 의리를 명확히 밝혔다.

 

이로써 그 생애를 다하였다.  

 

경자(更子. 1960)년에 士林이 협의하여 榮江祠에 配享하였다.


 

● 20세 이석(李碩) - 익재공후 판윤공파

 

○ 판윤공파보의 기록

 

세종 갑자(甲子. 1446)년 진사(進士)가 되고 권무검교호군(權武檢校護軍)으로 시작하여 관직이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단종(端宗)이 손위할 때 벼슬을 버리고 금성 거평(錦城居平) 향리에 돌아와 은거하면서 후학을 가르치며 의리를 홀로 밝히니

세조(世祖)가 여러 번 부르되 높은 뜻을 굴하지 아니하고 문을 닫아 걸고 스스로 자정(自靖- 스스로 평안. 평정을 꾀함)하며 행위가 정결(貞潔)하니 사림(士林)의 공론으로 영강사(榮江祠)에 배향(配享)하였다.


세종 갑자(甲子. 1446)년 진사(進士)가 되고 권무검교호군(權武檢校護軍)으로 시작하여 관직이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 대종보의 기록

 

단종(端宗)이 손위할 때 벼슬을 버리고 금성 거평(錦城居平) 향리에 돌아와 은거하면서 후학을 가르치며 의리를 홀로 밝히니

세조(世祖)가 여러 번 부르되 높은 뜻을 굴하지 아니하고 문을 닫아 걸고 스스로 자정(自靖- 스스로 평안. 평정을 꾀함)하며 행위가 정결(貞潔)하니 사림(士林)의 공론으로 영강사(榮江祠)에 배향(配享)하였다.


* 대종보와 판윤공파보의 기록에서 휘 석을 찾을 수 있다.

 

같은 인물이다. 

 

각기 태조의 조선 건국 당시와 세조의 단종 왕위 찬탈 때로 두 기록이 틀리는데 태조 때로 보는 것은 고려왕조에 대한 의리이고

세조 때로 보는 것은 단종 임금에 대한 충성과 의리로 보면 된다.

 

그러니까 대종보의 기록을 판윤공파보에서 단종시대로 바르게 바꾼 것이다.

 

대종보의 기록이 오래된 기록이나 2000년도에 발간한 판윤공파보에서 그 내용을 바꾸었다면 이는 이 내용이 더 정확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계대를 따져보니 병판공(휘 석)의 활동시기를 고려 말로 보면 계대가 맞지 않는다.

 

단종 시대로 바꾸니 계대가 맞는다.

 

갑자보 이후 200-300년 동안 대종보의 기록대로 전해진 것이다.   


 

● 32세 이석규(李錫奎) - 상서공후 백사공파


1758(영조 34)~1839(헌종 5)

조선 후기의 문신. 초명은 영석(永錫). 자는 치성(穉成). 호는 동강(東江). 경기도 진위(振威) 출신. 항복(恒福)의 7대손으로 경관(敬寬)의 아들이다.

 

1783년 사마시에 올라 참봉을 거쳐 고양군수로 재직 중에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1818년 성균관 대사성, 1820년 대사간을 거쳐 1821년 충청도 관찰사로 나아가 단양군의 전세(田稅)·대동미(大同米)·군포(軍布) 등을 돈으로 대납하도록 하여 민폐를 줄였다.

 

1825년 형조판서에 오른 뒤에 이조·공조·예조의 판서를 거쳐 의정부 좌우참찬, 한성부판윤·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고 보국승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 이석규(李錫奎)


자 치성(穉成)

호 동강(東江)

시호 효정(孝貞)

기타 인명 영석(永錫)

생년 1758

연령 82

활동분야 문신 / 관료 / 조선후기


1758(영조 34)∼1839(헌종 5). 조선 후기의 문신.

 

초명은 영석(永錫), 자는 치성(穉成), 호는 동강(東江). 진위(振威)출신.

 

항복(恒福)의 7대손으로, 경관(敬寬)의 아들이다.

 

1783년(정조 7)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참봉을 거쳐 고양군수로 재임중인 1807년(순조 7)알성문과에 급제하였다.

 

1818년 성균관대사성,

1820년 대사간을 거쳐

1821년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충청도관찰사로 재임중 단양군의 전세(田稅)· 대동미(大同米)· 군포(軍布) 등을 돈으로 대납할 것을 청하여 허락 받았다.

 

1825년 형조판서에 임명된 이래 이조· 공조· 예조 등의 판서, 의정부 좌·우참찬, 좌부빈객, 한성부 판윤, 판의금 부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다가 1833년 파직 당하였다.

 

품계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이르렀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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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田稅)- 논밭에 부과되는 조세.

*대동미(大同米)- 조선 후기에, ^대동법에 따라 거두던 쌀.

^대동법- 조선 중기·후기에, 여러 가지 공물(貢物)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

조선 시대에, 하급 관리나 상인들이 공물을 백성을 대신하여 나라에 바치고 백성에게서 높은 대가를 받아 내던 방납(防納)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하여 일찍이 조광조, 이이, 유성룡 등이 제기하였으나 광해군 즉위년(1608)에 이르러서야 이원익 등의 주장에 따라 경기 지역부터 처음 실시하였다.

지역에 따라 쌀 대신에 베를 거두기도 하였는데, 고종 31년(1894)에는 쌀 대신 돈으로 바치게 하였다. ≒대동(大同).

*군포(軍布)- 조선 시대에, 병역을 면제하여 주는 대신으로 받아 들이던 베.

≒군보(軍保) ·군보포·군역포·군포목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조선 시대에 둔, 정1품 문무관의 벼슬.

고종 2년(1865)부터 문무관, 종친, 의빈(儀賓)의 품계로도 함께 사용하였다. ≒보국.


 

● 23세 이석손(李碩孫)- 익재공후 소경공파


태조(太祖) 정축(丁丑 1397)년에 태어났고 성종(成宗) 신축(辛丑 1481) 7월14일에 졸(卒)하였으니 수가 85세이다.

 

초휘는 중손(仲孫). 자는 덕회(德晦). 호는 둔암(遯菴)이다.

 

유학을 공부하여 세종조(世宗朝)에 집현전에 선발되어 들어가 학문을 기르고 쌓아 관직이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에 이르렀다.

 

단종조(端宗朝)에 사직(司直)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계유(癸酉. 1453- 계유정난 수양대군의 단종 왕위 찬탈)년에 벼슬을 떠났다.

 

부인과 장인 대호군(大護軍) 박연생(朴衍生)옹과 담양 월산(潭陽月山)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세조조에 여러 차례 관직으로 불렀으나 불응하고 마침내 늙어 산에서 질그릇을 굽으니 이로 인하여 칭하기를 포옹(逋翁)이라 하였다.

 

‘망세음(忘世吟)’ 1권을 저술 하였다.

 

김시습(金時習). 성담수(成聃壽)와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유언으로 훈계하기를 을해(乙亥. 1455 세조1) 이후의 직명은 쓰지 말고 단지 단종임금 때 받은 관직인 사직(司直)만 쓰라고 했다.

 

중조조(中宗朝)에 증 이조참판(贈吏曹參判)하고

현종(顯宗) 무신(戊申. 1668)에 사림(士林)이 스스로 협의하야 월산사(月山祠)에 제향하였다.

 

숙종10년 갑자(甲子. 1684)에 숙모전(肅慕殿)에 배향(配享)하였다.

 

○ 숙모전(肅慕殿)


종 목 문화재자료 67호

명 칭 숙모전 (肅慕殿)

분 류 사묘재실

수 량 1동

지정일 1984.05.17

소재지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소유자 숙모회

관리자 숙모회


단종(1441∼1457)과 단종의 죽음을 막기 위해 노력한 충신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단종은 아버지 문종에 이은 조선 6대 왕이다.

 

어린 나이에 왕에 올라 많은 충신들의 도움으로 정치를 하던 중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곳은 원래 초혼각으로 사육신의 시신을 장례한 후 제사지내던 곳이었다.

 

영조 4년(1728)에 불탄 것을 순조 27년(1827)에 다시 세웠고, 고종 1년(1864) 초혼각 북쪽에 단종의 위패를, 동벽에 고려 후기 충신 7위를, 서벽에는 사육신 등 7위를 모셨다.

 

고종 41년(1904)에 이름을 ‘숙모전’이라 바꾸고 단종의 부인이었던 정순왕후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산 자락이 자리잡은 동학사(東鶴寺) 경내에 있다.

 

단종(1441-1457)과 단종의 죽음을 막기 위해 노력한 충신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숙모전에는 매월당 김시습의 충절과 애통함이 서려 있다.

 

1455년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김시습은 머리를 깎고 동학사에 와 통곡을 하였다.

 

다음 해 사육신이 참수를 당한 뒤에는 시신을 거두어 노량진 언덕에 매장하고 동학사로 다시 돌아와 단을 만들고 제사하였다.

 

2년 뒤 세조가 동학사에 들렸다가 이 내력을 듣고 자신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은 280명을 위해 초혼각을 짓고 초혼제를 지냈다.

 

이 초혼각은 1728년(영조 4)에 불에 타 1827년(순조 27)에 다시 세웠으며, 1904년(고종 41)에 중건하면서 숙모전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현재 매년 봄과 가을에 추모제를 지낸다.

 

숙모전 내부에는 단종과 단종비 정순왕후를 비롯해 동무에는 엄홍도를 비롯해 47위를 모시고, 서무에는 사육신을 비롯해 47위를 모시고 있다.


 

● 32세 이석표(李錫杓) - 익재공후 생원공파


1704(숙종 30)~미상

 

자는 운원(運元), 호는 남록(南麓). 판서 인엽(寅燁)의 손자, 학자 하곤(夏坤)의 아들.

 

1729년 진사시에 장원급제하고

1733년에 알성분과에 장원급제한 뒤 6품직에 등용되어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때 1735년 8가지 시폐(時弊)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가운데 당시의 영상 김흥경(金興慶)이 논척되었다.

 

영조는 겉으로는 직서하는 자를 우대한다는 구실로 함열 현감을 제수하고 말을 하사하였으나 사실은 좌천이었다.

 

결국 김흥경은 귀양가고 대사헌과 대사간이 바뀌는 파란이 일어난 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와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의 변호로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홍문관교리를 거쳐 대사간에 이르렀다.

 

학문이 뛰어나 성균관대사성·홍문관부제학 등을 여러번 겪고 전라도관찰사를 끝으로 치사(致仕)했다.

 

시문집으로 ≪잡저문고(雜著文藁)≫ 6책이 있다. 


○ 32세 이석표(李錫杓)


자 운원(運元)

호 남록(南麓)

생년 1704

활동분야 문신 / 관료 / 조선후기

과거 및 취재 [문과] 영조(英祖) 9년 (1733) 계축(癸丑) 알성시(謁聖試) 갑과(甲科) 1[장원(壯元)]위

[생원진사시] 영조(英祖) 5년 (172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1등(一等) 1[장원(壯元)]위


1704(숙종 30)∼?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운원(運元), 호는 남록(南麓).

 

판서 인엽(寅燁)의 손자이며, 벼슬은 하지 않았으나 학문으로 이름 있던 하곤(夏坤)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평판이 자자하였으며,

 

1729년(영조 5) 25세에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였고,

 

1733년 29세에 알성문과에도 장원급제하였다.

 

6품직에 바로 올라 성균관 전적이 된 이래 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 등 양사의 관직에 여러 차례 임명되었다.

 

입이 무거워 한때 그의 재주를 의심받기도 하였으나

 

1735년에 장문의 상소를 올려 8가지 조목으로 나누어 *시폐(時弊)를 *직서하였으며 그 과정에 영의정 김흥경(金興慶)도 *논척되었다.

 

이로 인하여 영조는 직서하는 자를 우대한다 하여 함열 현감에 임명하고 말을 내어주는 특혜를 베풀었으나 실제로는 좌천이었다.

 

이 상소로 인하여 영의정이 귀향하여 버리고 대사헌·대사간이 갈리는 등 조정에 파문을 일으켰다.

 

결국 좌의정 김재로(金在魯), 우의정 송인명(宋寅明) 등의 변호로 다시 내직에 보임되었으나 강직한 기개를 굽히지 않았고, 이조정랑·홍문관 교리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쳐 대사간에 올랐다.

 

학문이 뛰어나서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등을 여러 차례 역임하였고 전라도 관찰사를 끝으로 일생을 마쳤다.

 

시문집으로 《잡저문고 雜著文藁》 6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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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폐(時弊)- 그 시대의 잘못된 폐단. ≒시병(時病).

*직서(直敍)- 상상이나 감상 따위를 덧붙이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 서술함

*논척(論斥)- 옳고 그름을 따져 물리침

*청요직(淸要職)- 문관직은 그 기능과 대우면에서 청요직(淸要職)과 서관(庶官)으로 구분 되었다.

뜻으로는 청직(淸職)과 요직(要職) 즉 맑은 관직인 대간 등과 실권이 있었던 이조 병조의 관리 등을 합칭하여 부르는 말이다.


 

● 20세 이선(李瑄) - 익재공파


대사성공(大司成公) 휘 원익(元益)의 아들이다.

 

소경공 지회와 판윤공 지대의 아버지이다. 

 

호는 정헌(正軒)이고 벼슬은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이다.

 

^ 배는 미상(配未詳-족보)이며 지회(之會)와 지대(之帶) 두 아들과 1녀를 두었다.

 

○ 판서공(判書公) 선(瑄)


아버지는 대사성공(大司成公) 휘 원익(元益)이시며 어머니는 최씨(崔氏)로 밀직사(密直使) 항(沆)의 따님이시다.

 

호는 정헌(正軒)이고 벼슬은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이다.

 

*원익(元益)의 외아들인 선(瑄-판윤공의 아버지)은 호(號)가 정헌(正軒)이고 벼슬이 병조판서(兵曹判書)로 기록되어있으나

『고려사(高麗史)』나『조선왕족실록(朝鮮王族實錄)』에서 정헌공(正軒公- 휘 선)의 행적(行蹟)이 확인되지 않으며 배위(配位)도 실전(失傳)으로 나타나 있어 행적이 궁금할 뿐이다.

 

그러나 정헌(正軒)이란 아호(雅號)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학식을 지녔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로서는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

 

* 배는 미상(未詳)이며 지회(之會)와 지대(之帶) 두 아들을 두었다.

 

장자인 소경공(少卿公) 지회(之會)는 벼슬은 태상소경(太常少卿)이나 세종조(世宗朝)에 사직하고 자호(自號)를 가은(佳隱)이라 하며 송국(松菊-소나무와 국화)과 좌우도서(左右圖書-서재의 책)로 자락(自樂-스스로 즐기며)하며 천수(天壽)를 다하는 것으로 기록은 남긴다.

 

반면 정헌공(휘 선瑄)의 차자(次子)였던 지대(之帶)는 벼슬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이르렀는데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할 조짐이 보이자 낙남(落南)하여 경주(慶州)의 구량리(九良里 -中里)에 정착하게 되었다.

 

* 21세 장자인 소경공(휘 지회)은 중파인 소경중파 파시조이고 차자(次子)인 휘 지대께서 한성 판윤으로 벼슬하신 '판윤공파' 파조이시다.


 

● 21세 이성경(李晟慶) - 익재공후 밀직공파


아버지는 참판공(參判公) 종지(種地)이고 어머니는 정안 김씨(廷安金氏) 정산군(廷山君) 효성(孝誠)의 따님이다.

 

초휘(初諱)는 철남(哲男)이고 호는 농암(聾菴)이다.

 

벼슬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갑자년(갑자년)에 북청(北靑)으로 유배 갔다.

 

다음해에 이성(利城-利原)으로 옮겨 거주지로 정하니 자손이 대대로 세거(世居)하였다.

 

^ 배는 선산 김씨(善山金氏) 쌍성군(雙城君) 득례(得禮)의 따님으로 부(富)와 문현(文顯) 두 아들을 두었다.


 

● 이성룡(李聖龍)


1672(현종 13)~1748(영조 24). 조선 후기의 문신

 

초명은 운룡(雲龍), 자는 자우(子雨), 호는 기헌(杞軒).

 

1714년(숙종 4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경종 때에 사간원 정언 · 사헌부 지평으로 몇 차례 군덕(君德)에 관한 소를 올렸다.

 

여러 번 승지로 발탁되고 동지사(冬至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전라도관찰사 · 도승지를 거쳐 1740년 대사간으로 있을 때 죽은 유봉휘(柳鳳輝)와 조태구의 삭탈관직과 이광좌(李光佐)의 파직을 주장하다가 삭직되고 이듬해 공조판서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시호는 혜정(惠靖)이다.


○ 이성룡(李聖龍)


자 자우(子雨)

호 기헌(杞軒)

시호 혜정(惠靖)

기타 인명 이운룡(李雲龍)

생년 1672

연령 77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중기


1672(현종 13)∼1748(영조 24). 조선 중기의 문신.

 

초명은 운룡(雲龍), 자는 자우(子雨), 호는 기헌(杞軒).

 

군수 여주(汝柱)의 아들이다.

 

1714년(숙종 4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경종 때에 사간원 정언 · 사헌부 지평으로 있으면서 몇 차례 군덕(君德)에 관한 소를 올렸다.

 

1725년(영조 1) 삼사(三司)에서 복합(伏閤)하여 유봉휘(柳鳳輝)를 문초하자고 주장할 때 사헌부 집의로 있으면서 불참한 것 때문에 한때 파직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복관 되었고 여러 차례 승지로 발탁되었으며, 동지사(冬至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전라도관찰사·도승지 등을 거쳐, 1740년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이미 죽은 유봉휘와 조태구(趙泰耉)의 삭탈 관작과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의 파직을 주장하다가 도리어 삭직 당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특별히 가자(加資)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관직은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혜정(惠靖)이다.


 

● 19세 이성림(李成林)- 이암공파


대종보의 기록이다

 

[이암공(怡庵公) 관(琯)의 손자.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고려사에 신우(辛禑) 정묘(丁卯 1387에 조반(趙胖)이 염흥방(廉興邦)의 종을 베자 염흥방이 조반을 국문(鞠問)을 당할시 우(禑-임금)가 최영(崔塋)의 집에 가서 옥사(獄事)를 의논하여 물었더니 조반이 염흥방. 임견미(林堅味). 이성림(李成林). 왕복해(王福海) 등을 베고 강보에 있는 그 자손까지 강에 던지었다고 하였다.

 

구보(舊譜)에 충렬왕 무진(戊辰 1328)에 염흥방의 난리에 이성림이 화를 입었다한 것은 아마도 오록(誤錄)인 듯하다.] 


*구보에 충렬왕 무진(1328)에 염흥방의 난리로 이성림이 화를 당한 것으로 기록하였으나 이는 신우 정묘(1387)에 일어난 사건으로 구보가 오록으로 잘못된 글이라는 뜻이다.


 

● 22세 이성무 묘표(李成茂墓表) - 상서공파 


[증 이조판서 행 안동 판관(贈吏曹判書行安東判官) 이성무(李成茂)의 묘. 증 정부인(贈貞夫人) 창녕 성씨(昌寧成氏)를 합장함.

 

공의 이름은 성무(成茂)이고 마지막 관직은 안동부 판관이다.

 

증조부 이승(李昇)은 건국초기에 전농판관(典農判官)을 지냈고, 조부 이연손(李延孫)은 공조 참판을 지냈으며 모두 진위현(振威縣) 동쪽 7리쯤 되는 동천동(東泉洞)에 묻혀 있다.

 

부친 이숭수(李崇壽)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고, 양주(楊州)의 금곡(金谷)에 묘지가 따로 있으며 어머니 한양 조씨(漢陽趙氏)는 감사 조수량(趙遂良)의 딸로서 양주의 외송산(外松山)에 묻혀 있다.

 

공(公-이성무)의 장지는 진위현 서남쪽 마산(馬山) 건향(乾向 : 북서향)의 언덕에 있고, 인 창녕성씨가 합장되어 있다.

 

부인은 장사랑(將仕郞 : 종9품 문관) 성민(成敏)의 딸이다.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시조는 사량부(沙梁部大人) 알평(謁平)으로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크게 번성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동천동(東泉洞)의 묘비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공은 대대로 내려온 무성한 기운을 이어받아 덕을 뿌리고 인(仁)을 쌓았는데 자신이 넘치게 받지 않아 후대에게 돌아갔다.

 

아들 여섯을 두었다.

 

주부 인신(仁臣), 의신(義臣), 세상에서 은덕을 칭송하던 진사 예신(禮臣), 지신(智臣), 신신(信臣), 정신(貞臣)이 그들이다.

 

주부 이인신의 아들 이몽린(李夢麟)은 명장으로서 절도사를 지냈고, 이몽규(李夢奎)는 이름 높은 선비로서 호가 천휴당(天休堂)이며, 외예(外裔-외가 후손)에서 장열왕후(壯烈王后)가 나왔다.

 

진사 이예신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문장에 뛰어났다.

 

이몽윤(李夢尹)은 원정(院正)을 지냈고, 이몽량(李夢亮)은 우참찬을 지냈다.

 

이몽량의 아들 이항복(李恒福)은 영의정을 지냈고 휼륭한 업적이 국사에 기록되어 있으며, 세상에서는 백사 선생(白沙先生)이라고 불렀다.

 

이항복으로 인해 추은(推恩)을 받아 공(公-이몽량)은 이조판서로, 부인은 정부인으로 증직되었다.

 

후손 중 이름난 문벌을 다 기록할 수 없어 가장 두드러진 사람을 들면, 오산군(鰲山君) 이탁남(李擢男), 이조참판을 지낸 이시술(李時術), 이조정랑을 지낸 이세장(李世長), 오천군(鰲川君) 이세장(李世章), 형조참판을 지낸 이세필(李世弼)이 있다.

 

사헌부 장령을 지낸 이세구(李世龜)는 음관(蔭官)으로서 부름을 받았으며, 이세필의 아들 이태좌(李台佐)는 이조판서를 지냈고,

이세구의 아들 이광좌(李光佐)는 우의정을 지냈다.

 

묘석(墓石)은 이태좌가 다시 구비한 것이고 이광좌가 글을 지었다.

 

돌아보건대 세대가 멀어져 생몰 연대와 이력 등을 자세히 알 수 없으니 어떻게 실례를 들어 언행을 다 기록할 수 있었겠는가? 슬프다.]


○ 백사공(白沙公)의 선대 세계(先代世系)

 

17세 이과 → 18세 이원보 → 19세 이승 → 20세 이연손 → 21세 이숭수 → 22세 이성무

 

*22세 이성무→ 23세 *이인신, 이의신, *이예신, 이지신, 이신신, 

*23세 이인신→ 24세 이몽린(절도사), 이몽규(천휴당. 학자)

*23세 이예신→ 24세이몽윤(원정), *이몽량(우참찬) →  25세이항복(백사, 영의정, 오성부원군)

 

 

● 18세 이성중(李誠中) - 국당공후 정순공파


1331(충혜 1)~1410(태종 10). 고려말 조선 초의 문신

 

자는 계저(季著). 대제학 검교정승(檢校政丞) 세기(世基)의 손자이고 대제학 문하시랑평장사 천(蒨)의 아들이다.

 

1347년(충목왕 3)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 대언· 호부랑중· 병부령· 상서· 판밀직사사를 거쳐 보문각 대제학에 이르고 이어서 공안부사(恭安府事)에 임명되었다.

 

태종과 동문수학한 인연으로 개국에 협력하여 개국원종공신에 책록되고 보국승록대부가 가자되었으며 검교좌정승에 이르러 기로사(耆老社)에 들었다.

 

1410년(태종 10)에 졸하니 왕이 명으로 예장(禮葬)하라 하고 하교(下敎)하기를 “검교정승 이성중은 노덕(老德)이 있으니 마땅히 예(禮)로써 우대할 것이요, 또 종1품 이상은 모두 예장(禮葬)하니 비록 검교정승이나 어찌 종1품의 아래라 하랴. 이제부터 예장지법(禮葬之法)을 세우라.”고 하였다.

 

공이 소시(少時)에 보검(寶劍)을 태종에게 바쳤는데 그 사실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제28장에 실려있다.

 

시호는 정순(靖順)이고 전주 구호원(龜湖院)에 배향되었다. 


○ 18세 이성중(李誠中) 


시호 정순(靖順)

생년 1330

연령 82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전기


1330(충숙왕 17)∼1411(태종 11).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고려 말 문과 출신으로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다.

 

1396년(태조 5) 축성도감제조(築城都監提調)로 있을 때 축성한 것이 견고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하옥되었다.

 

그 뒤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오른 뒤,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를 거쳐 검교 좌정승(檢校左政丞)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순(靖順)이다.


 

●  28세 이세구(李世龜) - 상서공후 백사공파


1646(인조 24)~1700(숙종 26)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수옹(壽翁)· 호는 양와(養窩). 항복(恒福)의 증손이며 목사 시현(時顯)의 아들.

 

1672년(현종 13) 진사시에 들고 1695년(숙종 21)에 추천을 받아 예산(禮山)현감에 보임되고 2년 뒤 장령을 거쳐 서연관(書筵官)· 홍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경학(經學)·예설(禮說)·역사에 박통(博通)하였고, ≪대학(大學)≫의 ‘물격설(物格說)’에 있어서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해석이 모두 정주(程朱)와 다르다고 반박했으며,  ‘정심장(正心章)’에 대해서도 이황의 해석의 잘못을 지적했다.

 

 ‘기해예설(己亥禮說)’에 관해서도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이었으며 ≪가례(家禮)≫도 여러 학설을 집대성하여 독자적인 주석을 붙였다.

 

역사에도 밝아서 한사군(漢四郡)과 삼한(三韓)의 위치를 논증하는 글을 남겼다.

 

박세채(朴世采) · 윤증(尹拯) · 남구만(南九萬) · 최석정(崔錫鼎) 등 소론(少論)에 속했던 학자들과 학문적 교류를 가졌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홍주(洪州)의 혜학서원(惠學書院)에 제향되었다.

 

유고(遺稿)로는 ≪양와집(養窩集)≫ 13책이 있다.


○ 28세 이세구(李世龜) 


자 수옹(壽翁)

호 양와(養窩)

생년 1646

연령 55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중기

과거 및 취재 [생원진사시] 현종(顯宗) 14년 (1673) 계축(癸丑)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二等) 2위


1646(인조24)∼1700(숙종26).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수옹(壽翁), 호는 양와(養窩). 항복(恒福)의 증손이며, 목사 시현(時顯)의 아들이다.

 

박장원(朴長遠)의 문인이다.

 

1672년(현종 13)진사시에 합격하고,

 

1685년(숙종 11)에 음보(蔭補)로 경양도 찰방(景陽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그 뒤 1695년 다시 추천을 받아 예산현감에 임명되고,

 

1697년 장령을 거쳐 서연관(書筵官)·상의원 첨정(尙衣院僉正)·홍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경학(經學)·예설(禮說)·역사 등에 걸쳐 박통하였다.

 

《대학》의 물격설(物格說)에 대하여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해석이 모두 정주(程朱)와 다르다고 반박하고, 정심장(正心章)에 대해서도 이황의 해석에 비판을 가하였다.

 

기해 예설에 관해서는 비교적 객관적인 견해를 보였으며, 여러 학설을 집대성하여 《가례》를 독자적으로 주석하였다.

 

역사에도 밝아 한사군과 삼한의 위치를 논증하는 글을 남겼다.

 

박세채(朴世采)· 윤증(尹拯)·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 소론에 속하였던 학자들과 학문적 교류가 있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홍주의 혜학서원(惠學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양와집》 13책이 있다.


○ 양와공(養窩公) 이세구(李世龜),


1646년(인조 24년)에 태어나고 1700년(숙종 26년)에 돌아갔다.

 

자는 수옹(壽翁), 호는 양와(養窩)이다.

 

항복(恒福)의 증손이며, 목사 시현(時顯)의 아들이다.

 

박장원(朴長遠)의 문인이다.

 

1672년(현종 13)진사시에 합격하고,

1685년(숙종 11)에 * 음보(蔭補)로 경양도찰방(景陽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그 뒤 1695년 다시 추천을 받아 예산현감에 임명되고,

1697년 장령을 거쳐 서연관(書筵官)· 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홍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경학(經學)·예설(禮說)·역사 등에 걸쳐 박통하였다.

 

《대학》의 물격설(物格說)에 대하여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해석이 모두 정주(程朱)와 다르다고 반박하고, 정심장(正心章)에 대해서도 이황의 해석에 비판을 가하였다.

 

기해예설에 관해서는 비교적 객관적인 견해를 보였으며, 여러 학설을 집대성하여《가례》를 독자적으로 주석하였다.

 

역사에도 밝아 한사군과 삼한의 위치를 논증하는 글을 남겼다.

 

박세채(朴世采)· 윤증(尹拯)·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 소론에 속하였던 학자들과 학문적 교류가 있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홍주의 혜학서원(惠學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양와집》 13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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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보(蔭補) -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음.


 

● 28세 이세장(李世長) - 상서공후 백사공파


1628(인조 6)~1668(현종 9).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도원(道遠), 영의정 항복의 증손이며 이조참판 시술(時術)의 아들이다.

 

1652년(효종 3)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갔으며,

1662년(현종 3)에 증광문과 을과에 올라 승문원 가주서가 되고 이듬해 예문관 검열이 되고 이어서 성균관 전적에 이르고 예조좌랑을 거쳐 영남어사가 되고 사람들이 꺼리는 절해9絶海)의 도서(島嶼)들을 두루 살피고 그 실정을 보고하였다.

 

1667년 사강원 사서·지평·지제교에 오르고 옥당(玉堂)에 선입되었으며 이조좌랑으로 승진하였다.

 

1668년 병조좌랑으로 옮겼다가 다시 이조로 보임되었으나 병으로 죽었다.

 

 

○ 이세장(李世長) 


자 도원(道遠)

생년 1628

연령 41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중기

과거 및 취재 [문과] 현종(顯宗) 3년 (1662) 임인(壬寅) 증광시(增廣試) 을과(乙科) 6위

[생원진사시] 효종(孝宗) 3년 (1652) 임진(壬辰)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3등(三等) 2위

[생원진사시] 효종(孝宗) 3년 (1652) 임진(壬辰)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2등(二等) 18위


1628(인조 6)∼1668(현종 9).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도원(道遠). 영의정 항복(恒福)의 증손이며, 이조 참판 시술(時術)의 아들이다.

 

1652년(효종 3) 생원·진사 양시에 모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662년(현종 3)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들어가 가주서가 되었다.

 

다음해 예문관 검열이 되고, 1665년 대교에서 봉교로 승진하고, 이어 성균관 전적에 올랐다가 사간원 정언 · 예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영남어사가 되어 경상도로 내려가 다른 사람이 가기를 꺼리는 절해 각 도서들을 두루 돌아다니며 백성의 실정을 낱낱이 살펴 보고하였다.

 

1667년 시강원 사서 · 지평 · 지제교에 *제수되었으며, 옥당에 선입되어 부수찬에 *제배되고, 이조 좌랑으로 승진되었다.

 

교리·헌납을 역임하고, 다시 이조 정랑으로 사서를 겸하였다.

 

1668년 병조 좌랑으로 *체배 되었다가 이조로 *환배되었으나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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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수(除授)- 천거에 의하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리던 일. ≒제배(除拜).

*제배(除拜)- ≒제수(除授)

*체배(遞拜)- 벼슬아치를 바꾸어 임명하던 일.

*환배(還配)-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서 돌아오던 일


 

● 28세 이세필(李世弼) - 상서공후 백사공파


1642(인조 20)~1718(숙종 44).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자는 군보(君輔)·호는 구천(龜川). 명상 항복의 증손이고 이조참판 시술(時術)의 아들이며 좌의정 태좌의 아버지이고 영의정 종성의 조부이다.

 

1674년(현종 15) 제2차 복상문제로 송시열(宋時烈)이 삭직당하자 그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영광에 유배되어 5년 동안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1678년(숙종 4) 유배에서 풀려나 1680년 창릉참봉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에 동몽교관이 되고,

1684년 형조좌랑을 거쳐 용안현감으로 부임하여 가뭄으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과세를 감하여 주고 부역(賦役)을 줄이는 등 선정을 베푸는 한편 학교를 일으켜 준재(俊才)를 뽑아 가르쳤다.

 

이어서 진위현령(振威縣令)을 거쳐 1694(숙종 20년) 김제군수· 사복시정․ 장악원정에 이르고

1696년에 제용감정, 1699년 사헌부 장령, 상주목사에 보임되고

1703년(숙종 23) 삼척부사로 나아가서 선정을 베풀고 자신의 녹봉으로 용산서원(龍山書院)을 세워 후진을 가르쳤다.

 

1705년에 사헌부 집의를 받고 돌아왔다가 다시 1706년에 충청관찰사로 나갔고 뒤에 공조참의를 받았다.

 

1711년(숙종 37) 한성부우윤·공조참판·형조참판에 오르고 1718년(숙종 44)에 졸하니 향년 77세였다.

 

좌찬성이 추증되었다가 영조 때에 영의정을 추서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논변경설(論辯經說)』·『답문의례(答問疑禮)』20여권이 있으며, 그 가운데『왕조례비지(王朝禮批旨)』는 임금의 특명으로 비각(秘閣)에 소장되었다.

 

전북 김제의 <용암(龍岩)서원>·전북 익산의 <학봉(鶴峯)서원.·전남 영광의 ,백산(栢山)서원>· 강원 동해시의 <용산(龍山)서원> 등 4서원에 배향되었다.


○ 구천공(龜川公) 이세필(李世弼).


1642년(인조 20년)에 태어나고 1718년(숙종 44년)에 돌아갔다.

 

백사의 회손(會孫)이며 이조참판 시술(時術)의 아들이다.

 

자는 군보(君輔)이고. 호는 구천(龜川)이다.

 

삭녕(朔寧) 군수를 거쳐 형조 참판, 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숙종 43년(1717)에 노론 이이명의 전횡을 탄핵하고 사직하였다.

 

증직으로 영의정(領議政)이다.

 

저서에《악원고사(樂院故事)》, 《소주서(小朱書)》, 《왕조례(王朝禮)》 따위가 있다.

 

 

○ 28세 이세필(李世弼)


자 군보(君輔)

호 구천(龜川)

시호 문경(文敬)

생년 1642

연령 77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 중기 / 학자


1642(인조 20)∼1718(숙종 44).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자는 군보(君輔), 호는 구천(龜川). 항복(恒福)의 증손이며, 이조참판 시술(時術)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났다.

 

1674년(현종 15)제2차 복상문제로 송시열(宋時烈)이 삭직당하자 그를 적극 옹호하였다.

 

그는 평소에 송시열을 모르는 사이였으나, 개연히 선비들을 설득하여 상소, 송시열의 원통함을 호소하다가 영광에 유배되었는데,

적소에 5년 동안이나 있으면서도 문밖을 나가지 않았으며《퇴계집》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었다고 한다.

 

1678년(숙종 4) 귀양에서 풀려 나오자 학행으로 천거되어

 

1680년 창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동몽교관이 되었고,

 

1684년 형조*좌랑을 거쳐 용안 *현감이 되었다가 *진위령을 지내고 삭녕 *군수로 부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이이(李珥)·성혼(成渾)을 *문묘로부터 *출향(黜享)하려 하자 관직을 버리고 진위(振威)로 돌아왔다.

 

생활이 매우 곤궁하였으나, 개의하지 않고 날마다 《대학》·《중용》을 외우며 *‘격물궁리(格物窮理)’ 공부에 전심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다시 김제 군수가 되고, 이어 *사복시정· *장악원정을 지냈다.

 

그 뒤 한성부 *우윤· 형조 *참판을 제수 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717년 상신 이이명(李이命)이 *독대(獨對)를 전횡하자 상소하여 그 잘못을 극론하였다.

 

그는 고향에 돌아온 뒤부터는 성리학에 전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대학》을 가장 깊이 연구하였다.

 

만년에는 *예학에 힘을 쏟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금예설을 두루 연구하였다.

 

저술로는 *경설을 논한 것과 예에 관하여 논답한 것 등 20여권이 있으며 《악원고사 樂院故事》 1책이 있는데, 이는 *묘악(廟樂)의 *전고(典故)를 설명하고, *악장(樂章)에 관한 여러 사람의 논의를 수집하여 엮은 것이다.

 

1722년(경종 2)에 아들인 호조판서 태좌(台佐)의 *추은(推恩)에 의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가 이듬해에 다시 의정부 *좌찬성이 내려졌다.

 

영광의 백산 서원(柏山書院)과 김제의 용암 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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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봉(參奉)- 조선 시대에 여러 관아에 둔 종9품 벼슬.

능(陵), 원(園), 종친부, 돈녕부, 봉상시, 사옹원, 내의원, 군기시 따위에 두었다.

*동몽교관(童蒙敎官)- 조선 시대에 어린이를 교육하기 위하여 각 군현에 둔 벼슬.

동몽훈도를 고친 것이다.

*좌랑(佐郞)- 고려 시대에 육부(六部)·사사(四司)·육사(六司)·육조 따위에 둔 정5품 벼슬.

조선 시대 육조의 정6품 벼슬.

*현감(縣監)- 조선 시대에 둔, 작은 현(縣)의 으뜸 벼슬.

품계는 종6품으로 고려 시대의 감무(監務)를 고친 것인데 감무보다는 권한이 강하였다.

*군수(郡守)- 군(郡)의 행정을 맡아보는 으뜸 직위에 있는 사람. 또는 그 직위.

조선 시대에 둔, 지방 행정 단위인 군의 으뜸 벼슬. 종4품으로 군의 행정을 맡아보았다.

*문묘(文廟)- 공자를 모신 사당. 원래 선사묘(先師廟)라고 하였다가 중국 명나라 성조 때 문묘(文廟) 또는 성묘(聖廟)라고 하였으며, 청나라 이후 공자묘(孔子廟)라 하였다.

중국 산둥 성(山東省) 취푸(曲阜)에 있는 것이 가장 크고 유명하다.

우리나라에는 성균관과 향교에 있는데 곳에 따라 사성(四聖), 공자의 제자, 역대의 거유(巨儒) 및 신라 이후의 우리나라의 큰선비들을 함께 모신 곳도 있다.

≒근궁·성당(聖堂)·성묘(聖廟).

*출향(黜享)- 종묘나 문묘에 배향한 위패를 거두어 치우던 일.

*격물궁리(格物窮理)- 격물치지(格物致知).

송명(宋明)의 성리학자들의 인식론은 격물치지 혹은 격물궁리를 중심으로 하는 궁리의 문제를 주요한 범주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문제는 거경궁리(居敬窮理) 즉 인식을 기초로 하여 도덕을 실천하고 수양한다는 수양의 문제까지 논의하고 있다.

궁리란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여 깨달아 아는 외적 수양 방법이다.

*사복시정(司僕寺正)- 조선 시대에, 궁중의 가마나 말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의 으뜸 벼슬자리 정3품.

내사복(內司僕)과 외사복(外司僕)이 있었으며, 태조 원년(1392)에 설치하여 고종 2년(1865)에 폐했다. ≒사복(司僕)·사어(司馭)·외사복.

*장악원정(掌樂院正)- 조선 시대에,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의 으뜸 벼슬 정3품.

전악서를 고친 이름이다. ≒대악감·성음서·이원(梨園)·장악서.

*우윤(右尹)- 고려 시대에, 삼사(三司)에 속한 종3품 벼슬.

조선 시대에, 한성부에 속한 종2품 벼슬

*참판(參判)- 조선 시대에, 육조(六曹)에 둔 종2품 벼슬. 판서의 다음 서열이다.

*독대(獨對)- 다른 사람 없이 혼자 임금을 대하여 정치에 관한 의견을 아뢰던 일.

*예학(禮學)- 예법에 관한 학문. 조선 시대에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나타났는데 특히 상장 제례(喪葬祭禮)를 중시하였다.

*고금예설(古今禮設)- 옛날과 지금의 예절에 관한 학설

*경설(經說)- 경서(經書-유교에 관한 책)에 쓰인 성인의 말. 경서의 뜻을 풀이한 책.

*묘악(廟樂)- 종묘 제전 때 연주하는 아악

*전고(典故)- 전례(典例)와 고사(故事)를 아울러 이르는 말. 전거(典據)로 삼을 만한 옛일.

*악장(樂章)- 조선 초기에 발생한 시가 형태의 하나.

나라의 제전(祭典)이나 연례(宴禮)와 같은 공식 행사 때 궁중 음악에 맞추어 불렀으며, 주로 조선 왕조의 개국과 번영을 송축하였다.

〈용비어천가〉, 〈문덕곡〉 따위가 여기에 속한다. ≒악부(樂府)·악장문(樂章文).

*추은(推恩)- 조선 시대에, 시종(侍從)·병사(兵使)·수사(水使) 등의 아버지로서 70세가 넘는 사람에게 품계를 주던 일.

* 판서(判書)- 조선시대 6조의 으뜸 관직. 정2품으로 한성판윤. 홍문관 대제학과 더불어 정경이라함.

*좌찬성(左贊成)- 조선 시대에, 의정부에 속하여 백관(百官)을 통솔하고 일반 정사(政事)의 처리, 국토 계획, 외교 따위를 맡아 하던 종1품 벼슬


 

● 28세 이세현(李世賢)


1656(효종 7)~1697(숙종 2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석경(碩卿). 1681년(숙종 7) 성균시에 급제하고 출사(出仕)하여 예조좌랑 · 형조좌랑 · 공조좌랑을 역임하였는데, 이때에 기사사화(己巳士禍)가 일어났다.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희빈 장씨 소생의 아들로 세자를 삼으려는 숙종에 반대한 송시열(宋時烈) 등의 서인(西人)이 이를 지지한 남인(南人)에 의하여 패배하고 정권이 남인에게 넘어간 사건을 이른다.

 

극력 반대하던 송시열은 파직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고 그를 따르던 김수흥(金壽興) ․ 김수항(金壽恒) 등 수명이 파직되어 유배되었다.

 

이렇게 정국이 삼엄한 때에 공(公)이 분연히 나서서 홀로 상소를 올려서 그 부당함을 통박했으나 미치지 못하였고 오히려 득세한 남인들의 미움을 사서 어천 찰방(魚川察訪)으로 좌천되었다.

 

공(公)이 도성을 떠날 때 공과 교유를 했던 친구들인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 ·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 · 이우당(二憂堂) 조태채(趙泰采) · 소재(蘇齋) 신태영(申泰英) · 한포재(寒圃齋) 이건명(李健命) 등과 석정(惜情)을 나눴고 특히 친숙했던 네 친구, 나중에 ‘노론 4대신(老論四大臣)’으로 불리웠던 이이명 · 김창집 · 이건명 · 조태채의 4대신이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지어준 시(詩)가 ≪사대신 풍월축(四大臣風月祝)≫이라 하여 가보(家寶)로 전하고 있다.

 

공은 임지(任地)에 도착하여 얼마 후에 졸(卒-죽음)하였고 에 옥구 삼현사(三賢祠)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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