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경주이씨 인물(몽-부)

녹전 이이록 2009. 4. 11. 18:25

경주 이씨 인물(몽-부)

 

 

● 24세 이몽규(李夢奎) - 상서공후 천휴당공파


1510(중종 5)~1563(명종 18). 조선 중기의 명현(名賢).

 

자는 창서(昌瑞), 호는 천휴당(天休堂)이다.

 

증이조판서 인신(仁臣)의 계자(季子- 막내)이고 명종 때의 명장 몽린(夢麟)의 넷째 아우이다.

 

태어나면서 특이하여 어려서 말을 배우고 글을 익혀 10세에 대의(大義)를 통달하므로

모두 국기(國器- 나라의 인재)라고 칭찬하였으며 상공(相公) 김극성(金克誠)이 사위를 삼았다.

 

거업(擧業)을 포기하고 처가가 있는 보령(保寧)으로 내려가서 임석(林石) 사이에 서실(書室)을 짓고

‘천휴당(天休堂)’이라 편액(扁額)했는데 나중에 그의 호(號)가 되었다.

 

그는 소쇄(瀟灑- 깨끗함)속에 홀로 앉아 마음을 비우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면서

학문과 수행(修行)을 평생 하였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 우애하였다.

 

물욕(物慾)에 눈을 돌리지 않았으므로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천휴당의 행장(行狀)에서

 

“오오 선생은 천품이 높고 일찍이 원식(遠識- 앞일을 내다봄)에 이르고 기도(氣度- 도량)는 초탈했으며

의기(意氣)와 생각은 범인(凡人) 보다 특출하였고 일찍부터 시사(時事)를 언급하지 않았으며

교교(皎皎- 맑고 밝은 모양)한 행실과 세상을 잘 아는 식견을 지녔으므로

탁명(濁名- 더러운 이름)에 보태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귤산(橘山) 상공(相公)은

“선생은 순정(純正)한 학문, 고상한 뜻에 있어서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과 백중(伯仲)일 것이라”고 하였다.

 

백형(伯兄) 병마절도사 포도대장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몽린(夢麟)의 상(喪)에 다녀와서

지병(持病)이 악화되어 그 해 여름에 졸하였는바 향년 54세였다.

 

행장(行狀)은 율곡(栗谷)이 짓고

증 대사헌(贈大司憲). 증 성균관좨주(贈成均館祭酒). 증 찬선(贈贊善)이 추서되고

화암 서원(花巖書院)에 배향되었다.

 

 

○ 천휴당(天休堂) 휘 몽규(夢奎)


자는 창서(昌瑞)이고 호는 천휴당(天休堂)이다.

 

증 이조판서(贈吏曹判書) 인신(仁臣)의 계자(季子-막내)이고 명종(明宗) 때의 명장 몽린(夢 麟)의 넷째 아우이다.

 

태어나면서 특이하여 어려서 말을 배우고 글을 익혀 10세에 대의(大義)를 통달하므로 모두 국기(國器)라고 칭찬하였다.

 

공(公)은 말을 배울 무렵에 벌써 책을 읽었고 여나뭇 살에는 대의를 깨우칠 정도로 명석했으니

공(公)의 스승은 제자의 재주에 탄복하여 후일 반드시 나라를 다스릴 재목이 될 것이라 하였다.

 

상공(相公) 김극성(金克誠)이 사위를 삼았다.

 

거업(擧業-예전에, 과거에 응시하던 일)을 포기하고 처가가 있는 보령(保寧)으로 내려가서

임석(林石) 사이에 서실(書室)을 짓고‘천휴당(天休堂)’이라 편액(扁額)했는데 나중에 그의 호(號)가 되었다.

 

천휴당이라는 호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그는 소쇄(瀟灑- 깨끗함)속에 홀로 앉아 마음을 비우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면서

학문과 수행(修行)을 평생 하였다.

 

본디 정신이 고상하고 부귀와 영달에 뜻이 없어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나

집안에는 선생을 흠모하여 찾아드는 명유(名儒)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후진 양성에 힘썼고,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선행을 베풀어 백성의 칭송이 자자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 우애하였으며 물욕(物慾)에 눈을 돌리지 않았으므로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천휴당의 행장(行狀)에서

 

“오오 선생은 천품이 높고 일찍이 원식(遠識-앞일을 내다봄)에 이르고 기도(氣度-도량)는 초탈했으며

의기(意氣)와 생각은 범인(凡人) 보다 특출하였고 일찍부터 시사(時事)를 언급하 지 않았으며

교교(皎皎-맑고 밝은 모양)한 행실과 세상을 잘 아는 식견을 지녔으므로

탁명(濁名-더러운 이름)에 보태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귤산(橘山-이유원李裕元) 상공(相公)은

 

“선생은 순정(純正)한 학문, 고상한 뜻에 있어서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과 백중 (伯仲)일 것이라”고 하였다.

 

백형(伯兄)인 병마절도사 포도대장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인 몽린(夢麟)의 상(喪)에 다녀와

지병(持病)이 악화되어 그 해 여름에 졸(卒)하였는바 향년 54세였다.

 

하세후(下世後)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추증(追贈)되었다.

 

행장(行狀)은 율곡(栗谷-李珥)이 짓고 *화암서원(花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증 대사헌(贈大司憲) 증 성균관좨주(贈成均館祭酒-'제'라고 읽지 않고 '좨'라고 읽는다)

찬선(贈贊善-조선 때 세자시강원에 속한 정3품 관직)이 추서되었다.

 

『해동명신록』에 수록되었고, 보령시 죽정동에 신도비가 있다.


○ 화암서원(化巖書院)


문화재자료 제138호

분류 유적건조물 / 서원

지정일 1984.05.17

소재지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 27-1

시대 조선시대

소유자 화암서원 유림회

상세문의 충청남도 보령시 문화공보담당관실 041-930-3225


이지함 · 이산보 · 이몽규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서원이다.

 

화암 서원은 광해군 2년(1610) 처음 지었고, 숙종 12년(1686) 나라에서 ‘화암’ 이라는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에 따라 폐쇄된 것을 1920년 이지함의 후손이 다시 지었다.

 

이후 저수지 축조로 인해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으며 이정암·구계우 두 분을 추가하여 모두 5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다시 지을 당시 건물로는 사당 1동과 삼문 1동이 있었다.

 

후에 축대와 기단을 정비하고, 재실과 삼문을 보수하였으며, 1988년 강륜당을 세웠다.

 

1997년 외삼문을 솟을 형식으로 개축하여 서원의 면모를 갖추었다.

 

1998년 이지함의 영정을 제작하여 표준 영정으로 심의받아 모시고 있으며,

이지함을 중심으로 좌·우에 나머지 네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해마다 음력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광해경술건 숙종갑인액(光海庚戌建 肅宗甲寅額).

- 광해군2년 경술(庚戌. 1610) 처음 서원을 건립하였고,

숙종 12년 갑인(甲寅. 1686) 나라에서 ‘화암’ 이라는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되었다.

 

제향자는 

이지함(호 토정. 현감. 증 이판. 시호 문강. 본 한산).

이산보(호 명곡. 이판. 한흥부원군. 시호 문간. 본 한산).

이몽규(호 천휴당. 생원. 증 대사헌. 본 경주).

 

○ 이몽규(李夢奎)


자 창서(昌瑞)

호 천휴당(天休堂), 청천당(聽天堂)

생년 1510

연령 54

활동분야 사인 /


1510(중종 5)∼1563(명종 18). 조선 전기의 은사(隱士).

 

자는 창서(昌瑞), 호는 천휴당(天休堂) · 청천당(聽天堂)이다.

 

조부는 판관(判官)을 지냈으며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된 이성무(李成茂)이고

아버지는 주부(注簿)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통훈대부(通訓大夫) 이인신(李仁臣)이다.

 

어머니는 광주 반씨(光州潘氏)로 절도사(節度使) 반희(潘熙)의 딸이다.

 

종실이었던 이모부 흥녕부정(興寧副正) 이린(李?)이 아들이 없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그의 양자로 들어갔다.

 

1540년(중종 35) 경자 식년 사마시(庚子式年司馬試)에 생원 3등으로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으나 얼마 있지 않아 나왔다.

 

1547년(명종 2) 처가의 별장이 있는 보령(保寧)으로 이주하였다.

 

그곳에 서실(書室)을 짓고 천휴(天休)라 명한 후에 전원(田園)에 묻혀 오직 독서와 시 짓기에 전념하였다.

 

이단을 배척하여 평소 풍수지리사상과 불교 및 무당을 강하게 비판하였다고 한다.

 

어려서 눌재(訥齋) 박증영(朴增榮)의 기대를 샀으며, 성장하여서는 한 마을의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과 교류하였다.

 

*생부(生父)와 양부(養父) 모두에게 지극한 효성을 보여 사람들의 큰 인망을 얻었다.

 

1563년(명종 18) 병을 얻어 그 해 6월 5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증 대사헌(贈大司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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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부(生父)와 양부(養父)- 생부(生父)는 증 통훈대부(贈通訓大夫) 이인신(李仁臣)이고

양부(養父)는 흥녕부정(興寧副正) 이린(李?)이다.

*처가의 보령에서 살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고,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선행을 베풀어 백성의 칭송이 자자했다.

『해동명신록』에 수록되었고, 보령시 죽정동에 신도비가 있다.



 

● 24세 이몽량(李夢亮) - 상서공후 정헌공파


1499(연산군 5)~1546(명종 19) 조선 중기의 명신

 

자는 응명(應明). 증 좌찬성 예신(禮臣)의 아들이며 선조 때의 명상(名相) 항복(恒福)의 아버지이다.

 

1528년 형 보덕공 몽윤과 함께 문과에 급제.

사간원 정언을 거쳐 1539년 특명으로 경상도 어사가 되어 민정을 살피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이 되었고 대사간에 이르렀다.

 

1560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형조판서․우참찬에 이르렀다.

 

증 영의정에 추서되고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 정헌공(定獻공) 이몽량(李夢亮) 


연령 66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전기

과거 및 취재

[문과] 중종(中宗) 23년 (152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7위


1499(연산군 5)∼1564(명종 19). 자는 응명(應明). 진사 예신(禮臣)의 아들이다.

 

1522년(중종 17)생원시·진사시에 급제하고,

1528년 형 몽윤(夢尹)과 함께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승정원주서·사간원정언을 역임하고,

1539년 국왕의 특명으로 경상도어사가 되어 민정을 살피고 돌아왔다.

 

그 뒤 명종이 즉위하자 동부승지로 발탁되면서 위사공신(衛社功臣)3등으로 광산군(廣山君)에 봉해졌고,

이어서 대사간으로서 학문에 입각한 도학정치를 제창하였다.

 

1547년(명종 2)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도민의 진휼을 위하여 진력하였고,

이어서 예조참의·병조참지·대사간을 역임하고 1550년 도승지에 올랐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조식(曺植) 등 재야사림을 천거하였고, 이어서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그 뒤 대사간·병조참판·경기감사·예조참판·도승지를 역임하고, 1560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이어서 대사헌·형조판서를 지냈는데, 형조판서로서 형률을 잘못 처리하였다고 하여

한때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서용되어 동지중추부사·한성부판윤을 거쳐 우참판에 이르렀다.

 

성품이 온유하였고 형제 사이에 우의가 돈독하였다.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백사공(白沙公) 항복(恒福)의 아버지.


 

● 24세 이몽린(李夢麟) - 상서공후 주부공파


1496(연산군 2)~1563(명종 18). 명종 때의 명장.

 

자는 국서(國瑞)이고 증 이조판서 인신(仁臣)의 장남이며 명상(名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당숙이다.

 

어려서부터 무술에 능하여 담장에 구멍을 뚫고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 백발백중하였다.

 

일찍이 무과에 등제하여 1523년(28세)에 단천 군수,

1524년(29세)에 정평(定平)부사,

1530년(35세)에 전라우도수군절도사에 보임된 뒤에 왜선(倭船) 1척을 파쇄하고 적군 17급을 사살했으며

궁시(弓矢)와 반의(斑衣) 및 잡물(雜物)을 노획하는 전공(戰功)을 올림으로써

남해와 서해에 출몰하는 왜구(倭寇)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 뒤 관사(觀射- 활쏘기 시험) 때마다 번번이 1등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와 숙마(熟馬) 1필을 받았다.

 

1536년(41세)에 동지중추부사로 있을 때에 관사(觀射)에서 매가 장전(帳殿- 임시로 꾸민 궁전)에 차린

어선(御膳- 임금에게 올리는 음식)을 노리며 맴돌므로 임금이 싫어하여 쏘아버리라 하므로 한 대신(大臣)이

“이몽린만이 할 수 있아 옵니다.”하니 “몽린을 부르라”했다.

 

공이 황급히 달려와서 여쭙기를

 

“매의 어디를 쏘오리까”하니 임금이 괴이쩍게 여기고

“매의 등을 쏘아보라.” 하시니 화살 두 대를 시위에 먹이어 한 대를 먼저 쏘고 이어서 다음을 쏘니

먼저 쏜 화살이 매의 왼쪽 날개를 맞히자 매가 놀라 뒤집히는 사이에 다음 화살이 매의 등을 맞힌 것이다.

 

매가 땅에 떨어져 주워보니 과연 등에 화살이 꽂혔으므로 임금과 신하들이 혀를 내둘렀고

이로부터 공의 명성이 전국에 울렸다.

 

뒤에 가의대부(嘉義大夫)를 받았고

1539년(44세)에 경상도 수군절도사,

1541년(46세)에 전라도 병마절도사,

1544년(49세)에 충청도 병마절도사,

52세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이르고

56세에 동지중추부사로 시사(試射)에서 3번을 1등하였다.

 

60세에 지돈녕 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고

62세에 포도대장으로 진력(盡力)하다가 65세에 졸하였다.

 

졸 후에 증 영의정에 추서되고 사패묘지(賜牌墓地)를 받았으며

3대 증직(三代贈職)이 되어 고(考)는 증 이조판서. 조부도 증이조판서. 증조부는 증 이조참판을 받았다.


*지사공(知事公)으로 호칭한다.

 

 

● 22세 이문보(李文輔)- 평리성암공후 전서공후 판서공파.   


성종 을미(을미 1475)년에 출생하였다.

 

임자(壬子 1492)년 이승소 방(李承紹榜)에 문과(文科) 등제(登第)하여

남상(南床- 홍문관 관직)을 역임하고 도승지(都承旨)를 하였다.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증직 받고 경림군(慶林君)에 봉하여졌다.

 

이옥산(李玉山). 김창강(金滄江)과 더불어 같이 교유하더니

사화를 당하여 10년 동안 벼슬을 하지 않다가

중종 정묘(丁卯 1507)에 안렴사(安廉使)에 올라 서도(西道)를 순시하니

백성들이 이로써 청렴하고 덕이 있음을 알고 비를 세워 주었다.   


*승지공(承旨公)이라 호칭한다

 

 

● 22세 이문좌(李文佐)- 평리성암공후 전서공후 세촌공파


세촌공파 파시조이다.

 

세종 신사(辛巳-1461)년에 태어났으며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자는 현도(顯道)이고 호는 세촌(細村)이며 수의부위(修義副尉) 전행사정(前行司正) 상(祥)의 아들이다.

 

세촌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있었다.

 

성종(成宗) 11년 경자(更子-1480)년에 소과(小科)인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김일손(金馹孫)·권오복(權五福) 등과 더불어 김종직(金宗直)에게 나아가 학문을 닦았다.

 

성종(成宗)14년 계묘(癸卯-1483년)년 춘당대시(春塘臺試) 갑과1(甲科1)에 장원급제하여 문명을 떨쳤다.

 

갑진(甲辰.1484)에 조정의 촉망을 받아 서장관(書狀官- 사신을 따라 보내던 임시 벼슬)으로

어서(御書)를 받들고 중국에 다녀왔다.

 

북경으로 가는 길에 부사(副使)가 노변에서 탐욕을 부리는 것을 보고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고자

돌아와서 권귀(權貴- 지위 높고 권력 있는 자)들을 물리치려 하였다.     

 

사헌부(司憲府) 대간(大諫- 임금에게 잘못을 고치도록 간하는 관직)의 물망에까지 올랐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에서 김종직의 당으로 몰려 안협 현감으로 좌천당하였다.

 

그러나 세촌공은 이에 개의치 않고 맡은 바 직무에 정성을 다했으니

안협 현감으로 재직시 고을에 흉년이 들자 세금을 면제하고 관아의 곡식을 풀어 천재지변에서 백성을 구하였다.

 

사화의 후유증으로 크게 중용되지 못하고 승문 교검 전적(承文校檢典籍). 목사에 머물렀다.

 

성종 신해(辛亥)에 전적(典籍) 관직으로 졸하니 향년이 31세이다.

 

공(公)은 풍모가 늠렬(凜冽- 차갑고 기품이 있음)하고 문장이 탁월하였다.

 

어렸을 적에는 점필재(佔인변+畢齋) 김종직(金宗直) 문하(門下)에서 지냈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과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과 더불어 도의(道義)로써 사귀었으나

일찍이 돌아갔기 때문에 뒤의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戊午士禍)를 면하게 되었다.

 

예천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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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오사화(戊午士禍/戊午史禍)- 조선 연산군 4년(1498)에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勳舊派-세조의 왕위 찬탈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된 뒤,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세력.

계보상으로는 여말의 혁명파 사대부- 역성 혁명 주도- 조선초 관학파)가

김종직 중심의 사림파(士林派-조선 초기에, 산림에 묻혀 유학 연구에 힘쓰던 문인들의 한 파.)에 대해서 일으킨 사화이다.

4대 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로 《성종실록》에 실린 사초(史草) 조의제문(弔義帝文- 조선 전기의 학자 김종직金宗直이

세조世祖의 찬탈纂奪을 비난한 글)을 트집잡아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목을 베고

김일손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을 죽이고 귀양 보냈다.


○  세촌공(細村公)  이문좌(李文佐) 


자 현도(顯道)

호 세촌(細村)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전기


생몰년 미상. 자는 현도(顯道), 호는 세촌(細村). 감무 계상(繼祥)의 아들이다.

 

일찍이 김일손(金馹孫) · 권오복(權五福) 등과 더불어 김종직(金宗直)에게 나아가 학문을 닦았다.

 

1483년(성종 14) 생원으로 춘당 문과(春塘文科)에서 갑과 1인으로 급제하여 문명을 떨쳤다.

 

그렇지만 안협 현감(安峽縣監)에 임명되어 당시 사람들로부터 모두 애석하게 여겼으며,

사화(士禍)의 후유증으로 크게 중용(重用-크게 쓰임)되지 못하고 전적(典籍)에 머물렀다.

 

예천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수정)

* '생몰년 미상이니' 한 곳도 있지만 족보에 신사(辛巳-1461)생이라 되어 있고

31세에 돌아가셨으니 1491년 성종 22년 신해(辛亥)에 졸하였다.  

 

*'춘당문과에서 갑과 1인으로 급제하였지만 안읍 현감으로 임명되어 모두 애석하다'고 했는데

이는 잘못 표현한 것 같다.

 

안협 현감으로 좌천당한 것은 무오사화(戊午士禍)에서 김종직의 당으로 몰려서 좌천된 것이다.


 

● 22세 이문형(李文炯)- 익재공후 청호공파


시호 문안(文安)

기타 인명 이문경(李文烱)

활동분야 문신/관료


?∼1466(세조 12). 조선 전기의 문신. 담(擔)의 손자로, 관찰사 희(?)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등(安騰)의 딸이다.

 

1447년(세종 29) 궁직(宮直)으로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1452년(문종 2)에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1453년(단종 1)계유정난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 되었으며 정랑(正郞)이 되었다.

 

1455년(세조 1) 정랑에서 집의를 거쳐 1460년에는 시를 잘 지은 것이 계기가 되어 승지로 발탁되었고,

예문관 직제학으로 《손자주해(孫子註解)》를 교정하였으며,

집의 · 동부승지를 거쳐 이듬해에는 우부승지가 되어 《역대병요(歷代兵要)》를 교정하였다.

 

그 뒤 좌부승지 · 우승지를 거쳐 1463년에 형조참판 · 이조참판에 이르러서는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명황계감 明皇誡鑑》의 가사를 교정하기도 하였다.

 

이듬해(1464) 한성부윤을 거쳐, 동지중추원사에 이르렀다.

 

1466년 표류민을 돌려보낸 데 대한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었다.

 

그 해(1466) 귀국하던 중 통주(通州)에서 병사하였다.

 

성품이 온아하고 국량(局量)이 있었으며,

침묵을 지켜 말이 적고 비록 급한 일이 있을지라도 침착하고 조용하게 처리하였다.

 

아들이 없었으나, 첩을 두지 않고 조카로 후계를 삼았는데도 가정이 화목하고 엄하였다.

 

문장이 뛰어났으며 고고한 한담(閑談)으로 문아(文雅)가 한때를 천단(擅斷- 마음대로 처리함)하니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고 공경하였는데,

그의 죽음을 듣고 슬퍼하고 애석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한다.

 

《북정록 北征錄》을 교정하였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문안공(文安公)이라 호칭한다.

 

 

● 19세  이반(李蟠) - 밀직공파


밀직공(密直公) 휘 창로(彰路)의 장자이다.

 

벼슬은 참판(參判-종2품)이다.

 

홍무 16년(洪武16- 우왕禑王) 계해년(癸亥年 1383)에 진사에 급제하니 제11위였다.

 

태종과 동년배(同年輩)로 고려 말에 태어나 조선 초기에 활동하였다.

 

고려사에 공이 형랑(刑郞)으로 명을 받고 남은(南誾), 조박(趙璞) 등을 수원(水原)감옥에서

 

국문(鞠問)하고자 하였는데 미처 수원 감옥에 당도하기 전에

태조 임금이 해주(海州)로 부터 궁(宮)에 돌아와서 남은 등을 용서하여 놓아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 배는 전주 최씨(全州崔氏) 재신(宰臣) 을의(乙義)의 따님으로 종인(種仁), 종지(種地) 두 형제와 6녀를 두었다.


* 참판공(參判公)이라 호칭한다.

 

 

●  이벽(李蘗)-  국당공후 문정공파


생몰년은 1754(영조 30)∼1786(정조 10)이다.

 

자는 덕조(德操)이며 호는 광암(曠庵)이다.

 

지퇴당(知退堂) 이정형(李廷馨) 후손으로 무신 계열인 이부만(李溥滿)의 둘째 아들이다.

 

조선 후기의 천주교인으로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했으나 서울로 이사하여 수표교 근처에 살면서

남인계의 소장 유생인 이수훈(李承薰), 정약전(丁若銓), 정약종(丁若鍾) 등과 친교를 맺었다.

 

형 이격(李格)과 동생 이석(李晳)은 모두 무관이었으나 그는 유학에 힘써 정약용(丁若鏞)이

그의 학덕을 기릴 만큼 심오한 학식을 쌓았다.

 

평소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를 가까이하던 그는 1779년경 권철신(權哲身)을 중심으로

천진암(天眞庵) 주어사(走魚寺)의 강학(講學) 모임에 참가하여

천주 교서(天主敎書)를 공동 검토하면서 천주신앙에 대한 믿음의 확신을 얻었다.

 

1783년에 친구인 이승훈(李承薰)이 서장관(書狀官)인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갈 때

북경 천주당을 방문하여 천주교에 관해 보다 자세한 정보를 얻어오도록 당부하였다.

 

북경에서 정식 천주교인이 된 이승훈이 귀국한 후 수표동 자신의 집에서

권일신(權日身), 김범우(金範禹) 등과 같이 세례를 받고 천주교 전파에 나서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명례동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신자들이 모여 정기적인 신앙집회를 가지면서

지도자로 활약하던 중 을사 추조 적발 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부친의 배교(背敎) 강요를 받고 일선 신앙생활에서 물러나 고민하다가 병을 얻어 1786년 봄에 사망하였다.

 

학문에 뛰어나고 신앙이 굳었던 그는 조선 천주교회 창설에 참여하는 한편 전교활동을 열심

히 전개하였으며 한글로 교리서를 번역하였다.

 

또 한글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지어 노래 전교를 시도하였다.

 

그의 이러한 천주신앙의 학문적 이해는 그가 저술하였다고 전해지는《성교요지(聖敎要旨)》에 잘 나타나 있다.

한편 유학에 대한 학식의 정도는 정약용(丁若鏞)의《중용강의》세주(細註)에 언급된 단편적 내용을 통해 추찰할 수 있다.

 

유교에도 학식이 깊었던 그는 청국에서 들여온 한문교리서(漢文敎理書)를 통해

보유론적(補儒論的)인 입장에서 천주신앙을 수용했던 학자교인으로

한국 천주교회 창설에 핵심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다.


○ 경기도 광주 천진암.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 유명한 이곳에는 경주 이씨 가문에서 가장 이채를 띠는 인물이 한 분이 모셔져 있다.

 

선생은 조선후기 성리학의 모순을 깨닫고 천주교 서적을 치밀하게 연구한 결과 스스로 천주교를 수용하여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천진암 강학회를 통해 권철신, 정약용 등 당대의 석학들에게 천주교를 전하는 한편

승훈을 중국 북경대교구로 보내 세례를 받도록 하고 선생도 세례를 받았으니 세례명은 요한 세자이다.

 

유학에 바탕을 둔 교리해석과 교단조직 정비를 통해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자생적인 천주교를 수용하는 기적을 이룩했으나

부친의 결사적인 반대에 부딪혀 고뇌 끝에 단식으로 순교하였다.

 

서른 한 살의 짧은 생애를 오직 이 땅에 천주교 발전을 위해 바쳤던

광암 선생의 거룩한 희생은 후일 천주교가 대박해를 이겨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  광암공(曠庵公) 이벽(李檗)


자 덕조(德操)

호 광암(曠庵)

기타 인명 요한 세자

생년 1754

연령 33

활동분야 교육/ 사상 / 학자


1754(영조 30)∼1786(정조10). 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덕조(德操), 호는 광암(曠庵).

 

세례명은 요한 세자. 세거지인 경기도 광주출신.

 

무반으로 이름 높은 가문의 후손으로, 부만(溥萬)의 아들이다.

 

정약용(丁若鏞)의 누이와 결혼하였다.

 

이익(李瀷)을 스승으로 하는 남인학자의 일원이었으며,

이가환(李家煥)· 정약용· 이승훈(李承薰)· 권철신(權哲身)· 권일신(權日身) 등과 깊은 교유관계를 맺었다.

 

무반으로 출세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소원을 뿌리쳤으며,

문신으로도 진출하지 않고 *포의서생(布衣書生)으로 생애를 마쳤다.

 

이른 시기부터 조선 후기 주자학의 모순과 당시의 유교적 지도이념이 흔들리고 있음을 깨달아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던 중, 사신들을 통하여 청나라로부터 유입된 *서학서(西學書)를 열독하였다.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서양선교사들과 중국의 실학자 서광계(徐光啓)· 이지조(李之藻) 등이 저술한

한문으로 된 천주교서적들은 천주교의 교리· 신심· 철학· 전례와 아울러

서구의 과학· 천문· 지리 등의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러한 서적들을 치밀히 연구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수용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였다.

 

1779년(정조 3) 권철신·정약전(丁若銓) 등 기호지방의 남인학자들이 광주의 천진암(天眞庵)과

주어사(走魚寺)에서 실학적인 인식을 깊이 하고 새로운 윤리관을 모색하려는 목적의 강학회(講學會)를 열었는데,

이때 그가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동료학자들에게 전하고,

후일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천주교신앙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1784년 이승훈이 중국에 서장관으로 가게 되었을 때 영세를 받아올 것을 부탁하고, 그 절차를 잘 가르쳤다.

 

그리하여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많은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오자,

다시 그에게서 세례를 받아 정식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서울 *수표교(水標橋)에 집을 마련하여 교리를 깊이 연구하는 한편,

교분이 두터운 양반 학자와 인척들 및 중인 계층의 인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천주교를 전교 하였다.

 

이때 세례 받은 사람들은 권철신· 권일신· 정약전· 정약용· 이윤하(李潤夏) 등

남인 양반 학자들과 중인 김범우(金範禹) 등이었다.

 

그 뒤 천주교의 의식이나 전교를 위하여 교단조직과 교직자가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다른 신자들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교단조직인 이른바‘가 성직자 계급(假聖職者階級)’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교단 조직은 자발적으로 수용된 한국 천주교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벽은 이 교단 조직의 지도자로서 그의 집에서 포교(布敎)· 강학(講學)· 독서· 사법(師法) 등의

천주교 전례의식(典禮儀式)을 주도하였으며, 새로 입교한 남인 학자들은 모두 그의 제자로 칭하였다.

 

1785년 봄에는 장례원 앞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사대부·중인 수십 명이 모인 가운데

‘설법교회(說法敎誨)’하는 모임을 매우 엄격하게 진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천주교 모임은 그 해 *을사 추조 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세상에 드러나 커다란 타격을 받았으며, 성균관 유생들의 *척사운동으로 인하여 일단 해산되었다.

 

그 뒤 천주교 신앙에 대한 아버지의 결사적인 반대를 받아,

당시 사회에서 포기할 수 없었던 효정신(孝精神)의 윤리관과 새로운 진리로 체득한 천주교 사상 중에서

양자택일을 하여야 하는 심각한 갈등 속에서 고뇌하다가 페스트에 걸려 죽었다.

 

그의 말년의 신앙에 대하여 달레(Dallet, C. H.)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배교로 단정하고 있으나,

효를 절대적인 이념으로 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그렇게 단순히 처리할 수는 없다는 견해도 있다.

 

《성교요지 聖敎要旨》가 유일한 저작으로 전한다.

 

이것의 전반부는 신구약성서를 중심으로 한 한시로 기독교 성서의 이해와

복음 정신의 사회화인 *구세관(救世觀)을 표현하고,

후반부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하여 사회 정의론(社會正義論)이라 할 수 있는 *정도관(正道觀)을 서술한 것으로서,

저자의 성서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당시 우리나라의 자발적인 천주교 수용이 성서를 기반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는 기독교 사상과 동양 유학 사상이 결합된 윤리와 규범을 제시하였으며,

그것은 후일 한국 천주교가 유래 없는 대 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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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서(西學書)- 조선 중기 이후 조선에 전래된 서양사상과 문물(文物)을 소개한 책.

서학이라고 하면 좁은 의미에서는 가톨릭교를 의미하며,

그 때문에 이를 서교(西敎) 또는 천주학(天主學)이라고도 하였다.

*수표교(水標橋)- 조선 세종 때에, 서울의 청계천에 놓은 다리

*포의서생(布衣書生)- 베로 지은 옷. 유학(儒學)을 닦는 사람을 이르는 말로 벼슬이 없는 선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을사 추조 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 후 돌아와

한국 교회가 창립되자 이에 같이 참여했으며

이듬해인 1785년에는 서울 명례방의 김범우 집에서 신앙 집회를 개최하다가 추조(형조)관리들에게 발각된 사건.

*척사운동(斥邪運動)- 보수적인 유학자들에 의하여 외세의 간섭과 개화를 반대하는 운동

 

*배교(背敎)- 그리스도교에서 배교는 불신앙(不信仰, infidelitas), 이단(異端, haeresis),

시스마(schisma) 등과 함께 신앙을 거스르는 죄들에 속하며, 항상 중죄로 여겨져 왔다

*구세관(救世觀)- 기독교서의 이해와 복음정신의 사회화로 난세(亂世)를 종식시키고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이념

*정도관(正道觀)- 사회정의론적인 이념


 

● 27세 이병(李炳) - 국당공파 정순공파


자 문우(文雨)

생년 1646

연령 49

활동분야 교육/사상 / 학생 / 유생

과거 및 취재 [생원진사시] 숙종(肅宗) 13년 (168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55위


1646(인조 24)∼1694(숙종20). 조선 중기의 유생. 자는 문우(文雨).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난(鸞)의 현손으로, 정언 익(瀷)의 손자이며,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 인실(仁實)의 아들이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이 일어난 뒤 이현령(李玄齡) 등의 상소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문묘에서 출향(黜享)되자

그해 3월에 진사로서 유봉휘(柳鳳輝)· 이사중(李師中) 등의 뒤를 이어,

경기유생 200여명을 이끌고 소두(疏頭)가 되어 대궐 앞에 엎드려 이이 · 성혼의 출향의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이 때문에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단천으로 정배되었다가 그해 가을에 대한(大旱)으로 인하여 사면되었다.

 

유배가 풀린 뒤로는 세상에 뜻이 없어 아우 정(?)과 함께 가솔(家率)을 모두 데리고

충주의 선롱(先壟)으로 이거하여 자제들을 가르쳤다.

 

저서로는 단천에 유배되었을 때에 지은 《부춘당북천록(富春堂北遷錄)》이 있다.

 

* 23세 월성부원군(휘 난鸞)- 원문에 월성부원군의 휘를 '식(寔)'자로 나타내었는데 오타로 휘가 난(鸞)이다.

난(鸞)의 현손자이고 정언 간옹공(휘 익)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사어공 인실이다.

 

* 호칭 - 부춘당공(富春堂公)?

 

 

 

● 이병성(李炳星)


1909~1960. 호는 두봉(斗峰)

 

고종 때의 거문고의 대가인 수경(壽卿)의 아들이다.

 

1922년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제 2기생으로 피리를 전공하였고 양금을 겸하였다.

 

하규일(河圭一)에게 가곡을 배워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926년 위의 양성소를 졸업한 뒤 아악수․ 아악수장․ 아악사를 역임하고

1950년 구왕궁아악부 촉탁, 1952년 국립국악원 국악사를 지내고

1960년 국악진흥회의 국악상을 받았다.

 

그의 가곡은 장남 동규(東圭)에게 계승되었다.


* 호칭은 두봉(斗峰)선생이다.

 

 

● 19세 이보림(李寶林) - 익재공파


생몰년 미상. 고려 말의 문신

 

문하시중 제현(齊賢)의 손자이고 서종(瑞種)의 아들이다.

 

1359년 남원부사 때에는 재정을 긴축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었고

경산(京山)부사 때는 송사를 잘 처리하여 평판이 좋았다.

 

1375년에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치적(治積)이 뛰어나서 대사헌으로 승진하였다.

 

이어서 밀직부사가 되었는데 때에 제주도에서 바친 검은 염소를 여러 주에 나누어 기르게 했는데,

한 고위 관리가 사사롭게 분양을 요구하므로 그 부정함을 규탄하고 묵살해버렸다.

 

뒤에 정당문학에 오르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 계림군공(鷄林君公) 이보림(李寶林) 


시호 문숙(文肅)

 

활동분야 문신/관료 / 문신-고려 / 문신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문신. 문하시중을 지낸 제현(齊賢)의 손자이며, 서종(瑞種)의 아들이다.

 

1357년(공민왕 6) 염철 별감(鹽鐵別監)을 여러 도에 보내려고 하자 우사간(右司諫)으로

우간의(右諫議) 이색(李穡) 등과 함께 그 폐단을 들어 혁파하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재상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1359년 남원부사가 되어서는 재정계획을 정하고 재정을 집행하게 하여 백성들에게 함부로 걷는 것이 없게 하였다.

 

또한, 경산부사(京山府使)로 옮겨서는 어려운 송사를 잘 처리하여 평판이 좋았다.

 

1375년(우왕 1) 판 안동부사로 있을 때는 치적이 최상이라 하여 대사헌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임박(林박)이 북원(北元)에 보내는 글에 서명하지 않자 그를 탄핵하여 유배시켜

당시 사람들로부터 이인임(李仁任)의 뜻에 아부하는 지조 없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어 밀직부사가 되었으며,

제주에서 바친 고력(??: 일종의 牝黑羊)을 여러 주에 나누어 기르게 하였는데

죽는 것이 많아지자 백성들에게 그 값을 물리므로 권중화(權仲和)와 함께 부당성을 지적하여 정지시켰다.

 

그 뒤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 이보림(李寶林)


생몰년(태어나고 죽은 해) 미상으로 공민왕 우왕 때의 문신이다.

 

문하시중을 지낸 제현(齊賢)의 손자이며 시랑공(侍郞公- 문하시랑門下侍郞-정2품) 서종(瑞種)의 첫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풍산 홍씨(豊山洪氏)로 밀직사(密直使) 유(侑)의 따님이시다.

 

1357년(공민왕 6) 우사간(右司諫-종5품)으로 있을 때

우간의(右諫議) 이색(李穡)· 전녹생(田祿生)· 정추(鄭樞) 등과 함께 염철 별감(鹽鐵別監)을 여러 도에 보내려고 하자

그 폐단을 들어 혁파하라는 상소(上疏)를 올렸으나, 재상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1359년 남원부사(南原府使)때에는

재정계획을 정하고 재정을 집행하게 하여 백성들에게 함부로 걷는 것이 없게 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경산 부사(京山府使)에 재임시에는 어려운 송사(訟事)를 잘 처리하여 명성을 날렸다.

 

1375년(우왕 1) 판 안동부사(判安東府事-정3품)로 부임하여

치적(治積)이 뛰어나서 대사헌(大司憲-정2품)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임박(林박)이 북원(北元)에 보내는 글에 서명하지 않자 그를 탄핵하여 유배시켜

당시 사람들로부터 이인임(李仁任)의 뜻에 아부하는 지조없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후 밀직부사(密直副使-정3품)가 되었을 때에 제주도에서 바친

고력(빈묵양牝黑羊- 검은 염소)를 여러 주에 나누어 기르게 했는데

죽는 것이 많아지자 한 고위 관리가 사사롭게 분양을 요구하며

백성들에게 그 값을 물리므로 권중화(權仲和)와 함께 부당성을 지적하여 정지시켰다.

 

뒤에 정당문학(政堂文學-종2품)에 이르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배는 문화 류씨(文化柳氏)로 문화군(文化君) 진(鎭)의 따님이며 아들 봉승(鳳升-司諫)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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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안동부사(判安東府事) - 안동부사 앞에 판(判)을 붙이는 까닭

안동부사의 정식 명칭은 판안동대도호부사(判安東大都護府事)로 정3품이 맡았다.

이 벼슬에 판사(判事-종1품)급의 높은 관리가 임명되었기 때문에 앞에 판(判)을 붙인다.


 ○ 이보림의 지혜

 

이보림이 경산부의 수령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한 나그네의 말이 느닷없이 밭으로 뛰어들어 한창 자라고 있는 보리를 마구 뜯어먹었다.

 

보리밭 주인이 깜짝 놀라 달려왔을 때는 이미 뜯어 먹힌 면적이 어지간한 상태였다.

 

보리밭 주인은 변상을 요구했고 말 주인도 자신의 말이 한 짓이므로 여름이 되면 물어주겠노라고 했다.

 

그런데 보리가 목이 오르고 수확기인 여름이 되자 말 주인은 물어주기가 아까웠다.

 

그래서 보리밭 주인에게

 

‘우리말이 뜯어먹은 보리에서 이삭이 나서 수확을 했는데 뭐가 문제냐’ 며 변상을 거부했다.

 

그래서 화가 난 보리밭 주인은 그를 관에 고소해 버렸다.

 

이보림은 두 사람을 모두 가까이 불렀다.

 

그리고 말 주인은 낮은 자리에 앉게 하고 보리밭 주인은 높은 곳에 서게 했다.

 

그리고 나서 보리밭 주인과 말 주인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그 상태대로 시합을 하도록 하겠다. 달음질을 하는데 따라가지 못하는 자는 벌을 주겠다.”

 

두 사람은 괴상한 달리기 시합에 어안이 벙벙했으나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말 주인이 아무리 힘을 다해 달려도 서서 달리는 보리밭 주인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말 주인이 볼멘 소리로 불공평함을 호소했다.

 

“사또, 이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저 사람은 서서 뛰고 저는 앉아서 뛰어야 하니 어떻게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이보림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너는 어찌 너의 경우만 생각하느냐!

뜯어 먹히고 난 뒤의 보리이삭이 보통 보리처럼 수확이 제대로 될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그리고 말 주인에게 곤장을 치고는 보리 값을 물어주도록 했다.

 

말 임자는 공연히 꾀를 부리다가 도리어 곤장까지 얻어맞고 보리는 보리대로 물어주고 말았다.


 

● 26세 이봉남(李鳳男)- 상서공파

 

 

자  서중(瑞仲)

생년  1537

연령  57

활동분야   교육/사상 / 학자 

 

 

1537(중종 32)∼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서중(瑞仲).

 

사도시정(司도寺正. 보덕공) 몽윤(夢尹)의 손자이며, 안복(安福)의 아들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 밑에서 자라 16세에 처음으로 글을 배웠는데

“내 이미 부모를 잃었으니 진실로 힘써 배워 자립하지 아니하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소학》과 《근사록 近思錄》을 탐독하였다.

 

성균관에 입교하여 송익필(宋翼弼)· 정철(鄭澈)· 김장생(金長生) 등과 교유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요승 보우(普雨)의 죄를 극론하는 소를 올려 풍속을 바로잡고, 민심을 현혹하는

*음사(淫祠)를 때려 부순 송도유생(松都儒生)을 구하였다.

 

벼슬을 단념하고 할머니와 숙부모를 친어버이와 같이 지극한 효성으로 섬겨서 선비의 모범을 보였다.

 

그의 인품과 학식에 감동한 내외 다수인의 천거로 희릉 참봉(禧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할머니 상을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가서 3년간 시묘하였다.

 

* 참봉공(參奉公)으로 호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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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사(淫祠)- 내력이 올바르지 않은 귀신을 모셔 놓은 집


 

● 27세 이봉수(李鳳壽) - 익재공후 판윤공파


자 기옹(岐翁)

호 죽헌(竹軒)

활동분야 무신 /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기옹(岐翁), 호는 죽헌(竹軒).

 

부친은 첨정(僉正) 이시명(李時明)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이만수(李萬壽)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 도산 전투(島山戰鬪)에서도 큰 전공을 세웠으나 적탄을 맞아 형제가 모두 전사하였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縱功臣) 2등에 녹선 되었다.

 

벼슬은 충청병사(忠淸兵使)·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 계대(系代) - 익재공후 판윤공파

 

21세 판윤공(휘 지대)→ 22세 3자 퇴우당공(휘 연)→ 23세 3자 정사랑공(휘 신형)

→ 24세 성균생원공(휘 종려)→ 25세 현감공(휘 단)→ 26세 천정공(휘 시명)→

27세 차자 죽헌공(휘 봉수)

 

*족보에 기록된 내용

 

[생년(生年)은 미상(未詳)이나 인묘 병자(丙子. 1636)년 2월15일에 돌아갔다.

 

또 하나의 이름은 봉수(鳳秀)요, 자는 기옹이고 호는 죽헌이다.

 

선묘조 때에 한성판관으로 통정에 올랐다.

 

임진란에 적을 토벌하고 공을 세워서 선무원종훈에 기록되고

*철권이 있으니 이 사실이 경주와 울산 양 읍지에 나타나 있다.

 

시고(詩稿-시를 지은 원고)가 있으며 공의 시문과 장적은 여러 번 병화를 만나 없어지고 오직 두어 편만 남아 있다.

 

후손 특진관 병참 종필이 일찍이 공의 시편을 보고 가로되

'*이는 곧 곤륜산에 한 조각 옥(玉)과 단산의 봉의 깃털과 같으니 어찌 흰옷에 고기를 먹어야 맛을 아느냐'라고 하였다.]

 

* 호칭은 판관공(判官公)으로 호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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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권(鐵券)- 공신녹권(功臣錄券)

공신에게 수여하던 상훈 문서 ≒ 공신축

*'이는 곧 곤륜산에 한 조각 옥(玉)과 단산의 봉의 깃털과 같으니 어찌 흰옷에 고기를 먹어야 맛을 아느냐'

- 이의 뜻은 죽헌공의 시편이

'곤륜산의 옥 조각과 같고 단산의 봉의 깃털과 같다며 시가 아주 잘 지어졌음을 의미함이고,

시의 맛은 흰옷에 고기를 먹어야만 제 맛이 나는 게 아니고 여러 가지로 되새겨 보아야 맛을 안다'는 뜻이다.


 

● 17세 부(榑) - 평리 성암공파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문신.

 

1283년(충렬왕 9) 국자시(國子試)에 합격,

국자생으로 있던 중 찬성사 한강(韓康)이 *지공거(知貢擧),

국자좨주(國子祭酒) 이익배(李益培)가 *동지공거(同知貢擧)였던 1286년의 과거에서 급제하였다.

 

1314년(충숙왕 1) 상왕인 충선왕이 승(僧) 경린(景麟)과 경총(景聰)의 고신(告身)에 서명하기를 거부하는

간관(諫官) *이조은(李朝隱) 등을 축출하기 위한 관직개편과정에서 우사보(右思補)에 임명되었다.

 

아버지는 16세 성암공(誠巖公-휘 인정)이고 동생이 헌납공(獻納公-휘 규. 일명 조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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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공거(知貢擧)- 과거를 관장하던 주 시험관

* 동지공거(同知貢擧)- 과거의 고시관(考試官).

* 이조은(李朝隱)- 헌납공 휘 규의 다른 이름


○ 사인공(舍人公) 휘 부(榑)

 

16세 평리공(성암공-휘 인정)의 장자이고 헌납공(휘 규)은 동생이다.

 

사인공(휘 부)에 대한 내용은 족보에 등 성균괴, 등 문괴, 벼슬 명 내서사인만 기록되어 있고

그 외의 자손들 기록은 계대가 없다.

 

자식이 없다는 뜻의 '무후'라는 기록도 없다.

 

맨 위쪽의 글은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이다

 

간관(諫官)이었던 동생 이조은(헌납공-이규. 자신의 동생)이

임금이 공도 없는 사람을 임명하려 하는 것을 보고 임명장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이조은(이규의 다른 이름)을 축출하려한 관직개편과정에서

형인 사인공(舍人公 휘 부)이 우사보(右思補)에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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