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경주이씨 인물(송-신)

녹전 이이록 2009. 4. 12. 21:15

경주이씨 인물(송-신)


 

● 이송제(李松齊)


자 수부(秀夫)

호 죽암(竹菴)

생년 1648

연령 86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 중기

과거 및 취재 [문과] 숙종(肅宗) 5년 (1679) 기미(己未)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1위


1648(인조 26)∼1733(영조 9).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수부(秀夫), 호는 죽암(竹菴). 함평 출신.

 

아버지는 호군 의규(義奎)이며, 어머니는 오응상(吳應祥)의 딸이다.

 

1679년(숙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82년 전적에 임명되었다.

 

그 뒤 동복 · 자인 · 남포(藍浦) 등의 현감을 거쳐,

다시 삼례역(參禮驛) · 연서역(延曙驛)의 찰방에 임명되었다.

 

1728년(영조 4) 노직(老職)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 이수경(李壽卿)


1882(고종 19)~1955. 거문고의 명인

 

자는 치일(致一), 호는 송사(松史). 서울 출신.

 

헌종 때의 피리의 명인인 이인식(李寅植)의 장손이고

고종 때 피리의 명인인 이원근(李源根)의 장남이며 가곡의 명창 이병성(李炳星)의 아버지이다.

 

1892년(고종 29) 장악원에 보임되고 1901년의 진연(進宴) 때는 방향(方響)을 맡았고

1902년의 진연에는 편경(編磬)을 담당했다.

 

1903년에 가전악(假典樂)이 되고, 1913년 아악수장(雅樂手長)을 거쳐서 아악사(雅樂師)가 되었다.

 

1939년 이왕직 아악부를 사임할 때까지

김영제(金寧濟) · 함화진(咸和鎭) · 최순영(崔淳永) 등과 함께 아악의 보존과 육성에 공헌하였다.

 

그는 특히 영산회상(靈山會相. 일명 거문고회상)과 도드리의 연주가 절묘하였다.

 

1892년 11세 때 무동(舞童)이었기 때문에 궁중정재(宮中呈才)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현재 국립국악원에 전승되는 춤은 모두 그의 지도에 의한 것이며

종묘대제 때에 추는 일무(佾舞)와 악장(樂章)도 거의 그의 지도에 의하여 완성된 것이다.

 

그만큼 그는 춤과 피리, 아악의 거장(巨匠)이었다.

 

 

● 19세 이수림(李壽林) - 익재공파


?~1369(공민왕 18). 고려 말의 문신

 

명상 제현(齊賢)의 손자이고 전법총랑 달존(達尊)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성리학자 백이정(白?正)의 딸로서 고려 후기의 손꼽히던 명문세족의 후예이다.

 

1354년(공민왕 3) 군부판서가 되고 이어서 이부판서를 역임하고

1356년에 정조사(正朝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363년 원나라에서 덕흥군(德興君)으로 왕을 삼으려하자

동지밀직시사가 되어 홍순(洪淳)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백관과 기로(耆老)들이 공민왕을 옹호하는 글을 어사대에 바쳤다.

 

1369년 고려가 북원(北元)의 사신 노은(盧?)을 죽인 뒤에 배원(排元)정책을 천명하면서

지난날의 친원파들을 숙청할 때에 당시 밀직원사(密直院使)였던 공도 해를 입었다.


○ 이수림(李壽林)


?∼1369(공민왕 18). 고려의 문신.

 

할아버지는 추성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 우정승 영가부원군(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右政丞永嘉府院君)

제현(齊賢)이다.

 

아버지는 전법총랑(典法摠郞) 달존(達尊)이며,

어머니는 백이정(白이正)의 딸로서 고려 후기에 손꼽히던 명문세족 출신이다.

 

1354년(공민왕3) 군부판서(軍簿判書)가 되고 이어 이부판서(吏部判書)를 역임하였으며,

 

1356년 참지정사(參知政事) 이천선(李千善)과 함께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1363년 원나라에서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삼으려 하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어 밀직상의(密直商議) 홍순(洪淳)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백관 및 기로(耆老)들이 공민왕을 옹호하는 글을 어사대에 바쳤다.

 

1369년 북원(北元)의 사신으로 고려를 무마시키려고 온 노은(盧은)을 주살(誅殺)하고

고려가 배원정책(排元政策)을 천명하게 되자,

밀직원사(密直院使)의 직에 있던 그는 노은의 일파로 몰려

간첩 질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죽음을 당하였다.


○ 이수림(李壽林)


익재공 제현(齊賢)의 손자로 전리 총랑(典理摠郞) 달존(達尊)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성리학자 백이정(白이正)의 딸로서 고려 후기의 손꼽히던 명문세족의 후예이다.

 

충숙왕(忠肅王) 임신년(壬申年 1332)에 태어났고 1369년(공민왕 18년)에 사망하였다.

 

문과에 급제하고 1354년(공민왕3년) 군부판서(軍簿判書),

뒤에 이부판서(吏部判書)를 역임하였으며

1356년 참지정사(參知政事) 이천선(李千善)과 함께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1363년 원나라에서 덕흥군(德興君)으로 왕을 삼으려하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종2품)가 되어 밀직상의(密直商議) 홍순(洪淳)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백관(百官) 및 기로(耆老-연로한 신하들)의 공민왕을 옹호하는 글을

원(元)의 *어사대(御史臺)에 바쳤으며,

원나라에 벼슬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공민왕 18년(1369)에 추밀원사(樞密院使-종2품)가 되었으나

고려가 북원(北元)의 사신 노은(盧誾)을 죽인 뒤에 배원(排元)정책을 천명하면서

지난날의 친원파들을 숙청할 때에 당시 밀직원사(密直院使)였던 공도 해를 입었다.

 

노은당(盧誾黨)이라 하여 노은(盧誾)의 일파로 모함을 받아 죄 없이 사형을 당하였다.

 

^ 배는 행주 기씨(幸州奇氏) 찬성사(贊成使) 원(車+袁)의 따님으로

숭의(崇義), 숭도(崇道), 인도(仁道)와 1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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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대(御史臺)- 정치의 시비에 대한 언론활동 및 백관(百官)을 규찰하며

기강·풍속을 바로잡는 일을 맡은 관청. 사헌부의 역할


 

● 24세 이수일(李守一) - 국당공후 정순공파


1554(명종 9)~1632(인조 10).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계순(季純), 호는 은암(隱庵).

 

증 영의정 난(鸞)의 아들이고 우의정 완(浣)의 아버지이다.

 

1583년(선조 16)에 무과에 급제, 1590년 선전관이 되었고 이듬해에 장기현감으로 승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분전했으나 예천 · 용궁에서 패하였으나

오히려 밀양부사로 승진하였고

이어서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올라 왜적을 물리친 공으로 가선대부가 가자되었다.

 

1597년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1599년 북도방어사가 되었다가 북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602년 남도병마절도사로 보임되었으며

다음해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606년에 다시 길주목사에 방어사를 겸하였으며

수원부사로 내려왔다가 다시 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11년 지중추부사로 포도대장을 겸하였고

1612년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1614년에 다시 지중추부사로 복직하였고

1616년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가자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원수가 되어 출전하여

길마재(鞍峴)에서 적을 격파하여 서울을 수복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책록되었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1628년 형조판서가 되고 1631년 남한수어사(南漢守禦使)를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다.

 

졸(卒) 후에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 이수일(李守一) 


자 계순(季純)

호 은암(隱庵)

시호 충무(忠武)

생년 1554

연령 79

활동분야 항일/국방 / 무신

과거 및 취재 [무과] 선조(宣祖) 16년 (1583) 계미(癸未) 별시(別試) 병과(丙科) 338위

 

1554(명종 9)∼1632(인조 10).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계순(季純), 호는 은암(隱庵). 충주출신.

 

아버지는 증 영의정 난(鸞)이며, 어머니는 참봉 우담령(禹聃齡)의 딸이다.

 

아들은 우의정 완(浣)이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 훈련원의 벼슬을 거쳐,

 

1586년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이 되었다가 남병사 신각(申恪)의 막하로 들어갔다.

 

1590년 선전관이 되고, 다음해 장기현감으로 발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분전하였으나 예천·용궁에서 패전하였으며,

 

다음해 밀양부사로 승진, 이어 경상좌도수군절도사에 발탁되고 왜적을 격퇴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그 뒤 회령부사에 이어, 1597년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지역의 중요성을 감안한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요청으로

 

성주목사가 되었으나 명령을 어겨 장형(杖刑)을 받고 종군되었다.

 

1599년 북도방어사가 되었다가 곧 북도병마절도사로 자리를 옮겼다.

 

1602년 남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변방을 침범하는 야인들의 소굴을 소탕하였으며,

 

다음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창원에 있는 병영을 진주로 옮기도록 하였다.

 

1606년 길주목사로 방어사를 겸하고, 다음해 수원부사에 이어, 다시 북도병마절도사가 되고,

1611년(광해군 3) 지중추부사로 지훈련포도대장·원유제조(園유提調)를 겸하였다.

 

1612년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1614년 임기를 마치고 다시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1616년 숭정대부에 올랐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원수를 겸하여

길마재(鞍峴)에서 반란군을 무찔러 서울을 수복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2등에 책록되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1628년 형조판서가 되고,

 

1631년 남한수어사(南漢守禦使)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 20세 이승적(李升?) - 국당공후 제정공파


?~1413(태종 13). 조선 초기의 문신

 

문정공(文靖公) 달충(達衷)의 손자이다.

 

1382년(우왕 8) 성균시에 장원하였는데, 특히 방원(芳遠. 태종)과 동방(同榜)이었으므로

그 뒤에 태종의 후대를 받게 된다.

 

1400년(정종 2) 반간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협력한 공으로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고

이듬해에 좌대언이 되었으며

1407년 이조판서 남재번(南在潘)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12년 4월 형조판서에 올랐다.

 

시호는 처음에 공정(恭靖)이라 했으나 나중에 공의(恭懿)로 개시(改諡)되었다.

 

○ 이승적(李升?)

 

시호 공정(恭靖)/ 공의(恭懿)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 전기


?∼1413(태종 13). 조선 초기의 문신. 문정공(文靖公) 달충(達衷)의 손자이다.

 

1382년(우왕 8) 성균관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그 뒤 시행된 진사과에서도 합격하였다.

 

성균시에서 방원(芳遠: 태종)과 함께 합격하였으므로 그 뒤 태종의 특별한 후대를 받았다.

 

1400년(정종 2)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한 공으로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4등에 책록(冊祿) 되었다.

 

1402년 좌대언(左代言: 좌승지)이 되어 태종의 측근에서 왕명의 출납을 맡았다.

 

1407년 이조판서 남재번(南在潘)과 함께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12년 4월 형조판서가 되었다.

 

시호는 처음에는 공정(恭靖)이라 하였으나 뒤에 공의(恭懿)로 개시(改諡)되었다.

 

* 문정공(文靖公) 달충(達衷) - 17세 국당공(菊堂公. 휘 천)의 셋째 아들


 

● 25세 이승증(李承曾) - 교감공파


1515(중종 10)~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의병장이다

 

자는 희로(希魯), 호는 관란(觀瀾)이며 경주 출신으로

태종 때의 위사공신(衛社功臣) 공조판서 양(良)의 증손이다.

 

성리학자 김대유(金大有)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560년 추천으로 건원릉참봉·

1562년 사옹원제조·

1564년 상의원제조·

1580년 종부시전첨(宗簿寺典籤)·사도시직장 등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시묘를 하는데 아침 저녁으로 절하던 자리가 1척이나 움푹 파였으며

호랑이가 짐승을 잡아다가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관찰사가 공의 학문과 효행을 장계하여 정려(旌閭)가 내렸으며

마을사람들은 마을 이름을 ‘충효동(忠孝洞)’으로 바꿨다 한다.

 

말년에는 금학산(金鶴山)으로 들어가 삼회당(三會堂)을 짓고 후진을 가르쳤는데 문도가 수백명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8세의 노구로 창의(倡義)하여 1,000여명의 군사를 이끈 의병장으로

왜적(倭賊)이 자인(慈仁)에 침입하므로

군사(軍師) 박응성(朴應誠)에게 퇴로(退路)를 막으라 하고

전면(前面)에서 들이치니 왜적이 대패하여 시체가 10리에 깔렸다.

 

공이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나니 조정에서 정려(旌閭)를 내리고

사림(士林)은 지곡(智谷)서원 · 도연(道淵)서원 · 문호(汶湖)서원에 공을 각각 배향하였다.     


○ 이승증(李承曾) 


자 희로(希魯)

호 관란(觀瀾)

생년 1515

연령 85

활동분야 항일/국방 / 의병

1515(중종 10)∼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의병.

 

자는 희로(希魯), 호는 관란(觀瀾). 경주출신.

 

아버지는 훈도 계간(季干)이며, 어머니는 영천 이씨(永川李氏)이다.

 

김대유(金大有)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여 추천으로

 

1560년 건원릉참봉(建元陵參奉), 1562년 사옹원제조(司饔院提調),

 

1564년 상의원제조(尙衣院提調), 1572년(선조 5) 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

 

1580년 종부시전첨(宗簿寺典籤), 1585년 사도시직장(司?寺直長) 등에 차례로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시묘를 하는데,

아침저녁으로 절을 올린 자리에 땅이 한자(尺)나 패었으며, 호랑이가 짐승을 잡아다가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이에 관찰사가 문장과 효행을 조정에 알려 정려(旌閭)가 내려졌고,

마을 사람들은 그 효행에 감탄하여 마을 이름을‘충효동(忠孝洞)’으로 고쳤다.

 

만년에는 *금학산(金鶴山)에 들어가 삼회당(三會堂)이라는 서당을 짓고 은거하며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여 문도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최동보(崔東輔)·최여호(崔汝琥)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을을 지켰다.

 

*도연서원(道淵書院)에 봉향되었고, 저서로는 《*관란문집》 1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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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학산(金鶴山)- 금성산(金城山). 금산(金山)이라 불리기도 한다.

경북 의성군 금성·가음·춘산·사곡면에 걸쳐 있으며, 의성읍 남쪽에 우뚝 솟은 명산이다.

서쪽에 탑리를 끼고, 남으로는 산운리 마을을 감싸고 솟아 있는 모습이 흡사 가마(轎)를 닮았다고 해서

이곳 사람들은 가마산이라고도 한다.

옛 기록에는 영니산(盈尼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금성산은 금성(金城-초기 경주를 이르는 지명으로 신라 도성에는 대궁· 양궁· 사량궁 세 대궐이 있었는데

대궁의 다른 이름이 금성이었다)의 이름을 딴 것이라 하는데 그 유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도연서원(道淵書院)-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서동리

*관란문집(觀瀾文集)- 조선 중기 이승증(李承曾)의 시문집.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원호(元昊)의 시문집이 ‘관란유고(觀瀾遺稿)’이고,

조선 중기 이승증(李承曾)의 시문집이 ‘관란문집(觀瀾文集)’이고,

조선 후기 고회(高晦)의 문집이 ‘관란재유고(觀瀾齋遺稿)’이다

 

* 교감공파(校勘公派)- 중조 19세 교감공 휘 존사께서 교감공파 파조이시다.

관란공(휘 승증)은 교감공의 6세(대)손이시다.


 

● 25세 이승직(李繩直) - 월성군후 대사헌공파 


활동분야 문신-조선전기


생몰년은 기록이 없음. 조선 전기의 문신.

 

월성군 지수의 방현손이며 사복시공 원림(元林)의 손자이며

판서공 만실(蔓實)의 아들로 이량(李亮)의 딸과 혼인하였다.

 

1410년(태종 10) 태종이 광탄(廣灘-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행차했을 때 호군(護軍- 정4품)으로 수행하였다.

 

이듬해 장령(掌令- 사헌부司憲府에 속한 정4품 벼슬)이 되었으며,

 

1412년 박저생(朴抵生)과 그의 계모 곽씨(郭氏)가 가산 때문에

쟁송(爭訟)했던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하지 못하여

지의주사(知宜州事- 의주 지사로 도의 도통사都統使 밑에 딸린 5- 6품까지의 벼슬)로 좌천되었다.

 

1425년(세종 7) 양주부사(楊洲府使- 도호부사都護府使의 줄임말. 정5품 이상)를 지냈고

 

1427년에는 공조(工曹)·형조참의(刑曹參議- 육조六曺에 딸린 정3품)를 거쳐

 

1429년 *대사헌(大司憲- 종2품)에 임명되었다.

 

대사헌을 역임하던 1430년에는 명에 가는 사신에게 감찰(監察)을 파견하여

소지하고 있는 금물(禁物)을 수검(搜檢)해야 한다는 소(疏)를 올렸다.

 

또 공신천첩(功臣賤妾-공신과 천한 첩)의 소생을 충의위(忠義衛)에 소속시키는 조치를 반대하는 소를 올려

족속의 분별을 밝혀 명분의 엄격함을 제시하기를 바랐다.

 

또한 조말생(趙末生)이 노비를 함부로 점유하고 토지를 약탈하며,

뇌물을 받고 관직을 임명한다고 비판하고 그 *장오죄(贓汚罪)를 논하였다.

 

이 해 10월 숙선옹주(淑善翁主)가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과 집터 문제로 분쟁이 있었는데,

사헌부에서는 보통 부녀의 일로 소송을 단순히 마무리하여 한성부(漢城府)에 넘겨버렸다.

 

이 일이 문제가 되어 의금부(義禁府)에 갇히기도 하였다.

 

아들 물민(勿敏)은 1444년(세종 26) 갑자 식년 문과(甲子式年文科)에 정과(丁科) 14등으로 급제하여 한림(翰林)을 지냈다.

 

^ 21세 월성군 휘 지수의 월성군파에서 공(公)은 대사헌공파로 분파한 분파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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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군(護軍)- 오위(五衛)에 속한 정4품 벼슬.

현직(現職)이 아닌 정4품의 무관이나 음관(蔭官) 가운데에서 임명.

* 대사헌(大司憲)- 대헌(大憲)이라고도 하며 사헌부(司憲府)의 으뜸벼슬로 품계(品階)는 종2품이다.

시정(時政)에 대한 탄핵, 백관(百官)에 대한 규찰, 풍속을 바로잡고,

원억(寃抑)을 펴며, 참람허위(僭濫虛僞)의 금지 등의 임무를 맡았다.

*장오죄(贓汚罪) - 장죄(贓罪)라고 하며 벼슬아치가 부정하게 뇌물을 받거나 관유물을 사사로이 취하고, 직권이나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취득한 죄. 장물죄(贓物罪).


 

● 28세 이시발(李時發) - 익재공후 창평공후 생원공파(8별집 휘 타 계대)


1569(선조 2)~1626(인조 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양구(良久), 호는 벽오(碧梧) 또는 후영어은(後潁漁隱). 이덕윤(李德胤)의 문인이다.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배속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낙상지(駱尙志)가 이끄는 명나라 군사가 경주에 주둔했을 때 접반관(接伴官)으로 임명되었고, 도체찰사 유성룡의 종사관으로 복무하였다.

 

1594년 병조좌랑으로 있을 때 명나라 유격장(遊擊將) 진운홍(陳雲鴻)을 따라

고니시(小西行長)의 군영을 방문하여 정탐하기도 하였고

이듬해 병조정랑으로 승진, 순무어사를 겸하였다.

 

1596년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토벌한 공으로 장악원정으로 승진하였으며

이해 겨울에 찬획사(贊劃使)로 임명되어 충주의 덕주산성(德周山城)을 쌓고 조령(鳥嶺)에 방책(防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호조참의로 명나라 원병의 군량미보급관을 맡았다.

 

1602년 경상도관찰사로 나가서 선정을 베풀었고

1604년에는 함경도관찰사로 포루(砲樓)와 성곽을 수축하였으며

가을에 예조참판·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광해의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다가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사임하였으며

1619년 광해군의 특명으로 5도참획사(五道贊劃使)로 평안도에서 민폐를 바로잡고 둔전(屯田)을 설치하였다.

 

이 무렵 공의 친척인 옥강만호(玉江萬戶) 변일(邊溢)이 청병(淸兵)의 침입을 막지 않고 도망한 일로 사형에 처했는데,

그 책임을 공에게 묻자 병을 칭탁하고 사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한성판윤이 되었고

이어서 형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이괄의 난 때에는 체찰부사(體察副使)로 난을 수습하였고

뒤에 삼남도검찰사(三南道檢察使)가 되어 남한산성의 역사(役事)를 감독하였다.

 

졸후에 영의정이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저서로 ≪주변록(籌邊錄)≫과 ≪벽오유고(碧梧遺藁)≫가 있다.


○ 이시발(李時發) 


자 양구(養久)

호 벽오(碧梧)/후영어은(後潁漁隱)

시호 충익(忠翼)

생년 1569

연령 58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중기

과거 및 취재 [문과] 선조(宣祖) 22년 (1589) 기축(己丑)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8위


1569(선조 2)∼1626(인조 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양구(養久), 호는 벽오(碧梧) 또는 후영어은(後潁漁隱).

 

아버지는 진사 대건(大建)이며, 어머니는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도(燾)의 딸이다.

 

*이덕윤(李德胤)의 문인이다.

 

6세에 아버지가 죽었고,

1589년(선조 22)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낙상지(駱尙志)가 인솔하는 명나라 군대가 경주에 주둔하여 있을 때

접반관(接伴官)으로 임명되었고,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그 뒤 전적·정언·사서를 역임하였다.

 

1594년 병조좌랑에 재직중 명나라 유격장(遊擊將) 진운홍(陳雲鴻)을 따라

적장 고니시(小西行長)의 군영을 방문하여 정탐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이듬해 병조정랑으로 승진하여 순무어사(巡撫御史)를 겸임하였다.

 

1596년 이몽학(李夢鶴)이 홍산(鴻山: 지금의 부여)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토벌하는 데 전공을 세워 난이 평정된 뒤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승진하였다.

 

그 해 겨울 찬획사(贊劃使)로 임명되어 충주의 덕주산성(德周山城)을 쌓고, 또 조령에 방책(防책)을 설치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분조(分朝)의 호조참의가 되어 명나라 원병의 군량미보급을 관장하였다.

 

1602년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어 4년간 선정을 베풀었으며,

 

1604년 형조참판을 지내고, 이듬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포루(砲樓)와 성곽을 수축하고

그 해 가을에 예조와 병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였다가 *양사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였으며,

 

1619년(광해군 11) 광해군의 특명으로 오도참획사로 임명되어

다음해 평안도에 가서 민폐를 크게 고치고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군량을 충족하게 하였다.

 

이때 고향의 친척인 옥강만호(玉江萬戶) 변일(邊溢)이 청병(淸兵)의 침입을 막지 않고

성을 버리고 도망함으로써 사형에 처한 사건이 있었는데,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그 책임을 그에게 묻자 신병을 칭탁하고 사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한성부 판윤에 등용되었고,

이어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 체찰부사(體察副使)로 난의 수습에 공을 세웠다.

 

그 뒤 삼남도 검찰사(三南道檢察使)가 되어 남한산성의 역사(役事)를 감독하였다.

 

저서로《주변록 籌邊錄》·《벽오유교》가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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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윤(李德胤)- 초휘가 덕윤(德胤). 휘는 득윤(得胤). 호는 서계(西溪)

-한당공 휘 곤 계대.

*양사(兩司)-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

 

 

● 27세 이시술(李時術) - 상서공후 백사공파


1606(선조 39)~1672(현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사강(士强). 명상 항복(恒福)의 손자이며 부사 정남(井男)의 아들이다.

 

1630년(인조 8) 진사시에 급제하고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 등을 지낸 다음

1652년(효종 3) 정랑으로 있을 때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하고

1655년 정언에 오르고 사서· 헌납· 부수찬· 부교리· 사간· 교리 등을 역임하고

1659년(현종 1) 사은정사(謝恩正使) 홍득기(洪得箕)와 함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선천부사와 의주부윤을 지내고

형조참의·부승지· 대사간· 호조참의· 병조참의· 이조참의· 승지 등을 거쳐

1668년에 가선대부에 가자(加資)되었다.

 

1669년 변조참판과 이조참판에 이르러

1671년 12월에 졸하였다.


○ 이시술(李時術)


자 사강(士强)

생년 1606

연령 67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후기

과거 및 취재 [문과] 효종(孝宗) 3년 (1652) 임진(壬辰)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4위

[생원진사시] 인조(仁祖) 8년 (1630) 경오(庚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35위


1606(선조 39)∼1672(현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사강(士强). 항복(恒福)의 손자이며, 부사 정남(井男)의 아들이다.

 

1630년(인조 8) 진사시에 합격하고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 등을 지냈으며,

1652년(효종 3) 정랑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55년 정언에 제수되고, 이어 사서·헌납·필선·부수찬·부교리·보덕·사간·교리 등을 역임하고,

1659년(현종 즉위) 사은정사(謝恩正使) 홍득기(洪得箕)와 같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선천부사와 의주부윤을 지내고, 이어 형조참의·부승지·대사간, 호조·병조·이조의 참의·승지를 거쳐

1668년에 철원부사 등을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위계에 올랐다.

 

1669년 병조참판에 제수되고 이어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1671년 12월 병을 얻어 성남(城南)의 사제에서 죽었다.

 

의주부윤으로 재임중에는 문묘를 증수하고 매월 삭망예를 올렸으며, 수재들을 향교에 모아 학문에 정려하도록 힘썼다.

 

그러나 민간인들 가운데 월경범법자(越境犯法者)가 나타나 청나라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마침내 사신을 보내어 책임관장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조정에서는 왕의 특지로 영상 정태화(鄭太和), 형조판서 허적(許積) 등이

직접 청사(淸使- 청의 사신)에게 양해를 구하였으며

가족친지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는데, 그는 오직

 

“사생은 하늘이 정하는 바에 따를 뿐 인력으로 좌우할 수 없다.”고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는 태도를 보였다.

 

 

● 35세 이시영(李始榮) - 상서공후 백사공파


1869(고종 6)~1953.

 

선생은 저 유명한 구국의 명신 백사공(白沙公)의 10대손이다.

 

아시는 바와같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공은 임진왜란 때에 다섯번이나 병조판서를 맡으면서

끝까지 이 땅에서 왜적(倭賊)을 몰아내고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분으로서

임진, 정유의 6년에 걸친 전쟁이 끝나고 한성(漢城)으로 환도(還都)한 뒤에 선조대왕께서 

“종사(宗社)가 한성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참으로 모든 대신들이 한 몸이 되어 애쓴 공로에 의함이지마는,

반드시 그 공로의 순위를 따지기로 한다면 그 첫 번째의 공훈은 부득불 경(卿)에게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다.

(宗社還于舊都只是賴諸卿力爾諸卿誠同功一體然必欲論首功不得不歸之卿耳)”

라고 말씀하시던 바로 그분이다. 

 

백사공의 가문은 그 유례가 없을 만큼 번창하여 10대손인 성재선생에 이르기까지

부통령 1인, 영상(領相) 6인, 그리고 3인의 문형(文衡)을 배출한 명문이다.

 

성재선생은 우찬성(右贊成) 유승(裕承)공과 동래정씨(東來鄭氏) 사이에서 7형제 중 5자로 태어났다.

 

초취(初娶) 부인은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따님이였으나 일찍이 사별하셨고

재취 부인도 만주의 독립투쟁 중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17세에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출사(出仕)하여

2년 뒤인 19세에 형조좌랑이 되었으며

23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다음 요직을 거쳐

26세에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 정3품)에 이르고

을미년(乙未年. 단기4228.서기1895)에 왕명으로 청일전쟁의 ‘관전사(觀戰使)’가 되어

요동반도(遼東半島)와 여순(旅順), 대련(大連) 등 전투현장을 시찰하였다.

 

38세에 엄친의 기세(棄世)로 거상(居喪) 중에 평안남도(平安南道) 관찰사(觀察使)에 임명되고

이듬해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그 다음해에 한성재판소장, 고등법원판사에 이르렀으며 종2품 태극팔괘장(太極八卦章)을 받았다.

 

을사조약(乙巳條約. 단기4238. 서기1905)이 체결되자

나라의 위기를 직감한 우국지사들이 비밀리에 모임을 가졌었는데,

그 주요 멤버는 선생을 위시하여 이회영(선생의 4째형), 전덕기(全德基), 이동녕(李東寧), 양기탁(梁起鐸) 등이었고

서울의 상동(尙洞) 공옥학교(攻玉學校)에서 만나 나라의 장래에 대하여 숙의(熟議)하였다.

 

헤이그 정사로 이상설(李相卨)공을 파견할 것을 건의한 것도 이 모임이었고

일본의 노골적인 박해를 피하여 해외로 나가서 조직적인 항일투쟁을 하기로 결의한 것도 이 모임이었다.

 

드디어 이회영, 이동녕, 장우순(張祐淳) 등 세분이 경술년(庚戌年. 단기4243.서기1910) 봄에 남만주를 답사하고

독립운동의 활동무대로 안동(安東), 환인(桓仁), 유하(柳河), 통화(通化)를 지정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이해 8월 29일에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나라가 망하니

이분들의 예측이 적중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라가 넘어가게 되니 한 나라의 진신(縉紳. 고관)이라는 것들의 추태가 가관이었다.

 

어떤 부류는 금품에 매수되어 함구하거나 또는 작위(爵位)를 받고 매국(賣國)에 동조했으며

이른바 유림(儒林)의 논객(論客)이라는 부류들도 모두 이런저런 이유로 적에게 빌붙거나 은둔하는 등

조야가 모두 패배주의로 기울 때에 우당선생과 성재선생의 6형제는 전 가족을 분연히 솔가(率家)하여

만주로 망명한 다음 구국투쟁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의하였던 것이다.

 

나라가 망하던 해 12월에 전 가족 40여명을 6~7조로 나누어 용산, 남대문, 장단(長湍) 등의 기차역에서

차례로 차를 태우고 만주로 떠났다.

 

신의주에 도착했으나 일본경찰의 검색이 심하므로 한밤중에 얼어붙은 압록강을 썰매를 타고 건너

안동에서 며칠 쉬고 다시 환인을 거쳐 유하에 도착하여 비로소 짐을 풀었다.

 

누구 하나 반기는 이 없는 타국, 살을 에이는 만주벌판에 정착한지 2년 만에

어렵사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敎)≫를 설립하였는데,

이해에 선생의 둘째형 석영(石榮. 고종 때의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에게 입양됨)공이

1만여 석의 가재(家財)를 방매하여 가지고 오니 그 자금으로 통화현 합니하(哈泥河)에

넓은 대지를 새로 매입하고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무관학교를 세웠으며

주변의 3~4 곳에 분교(分校)를 설치하여 10여년 동안이나 인재양성을 하게 되니

만주 일대에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3,000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의 《대판매일신문(大阪每日新聞)》이 선생을 일러

“무관(無冠)의 제왕(帝王)” 이라고 추겨 세운 뒤에

“만주 일대의 살인강도의 두령” 이라고 대서특필하기에 이른 것이다.

 

홍범도(洪範圖)의 지휘 아래 왜군 100여명을 사살한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와

김좌진(金佐鎭), 이범석(李範奭)의 통솔로 수1,000명의 왜군을 섬멸한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가

신흥무관학교 출신에 의한 대첩(大捷)이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기미년(己未年. 단기4252.서기1919) 1월에 고종황제가 독시(毒弑)되었다는 소식에 전 민족이 통곡하고 있는데,

마침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를 주창하였다는 외신(外信)을 접한 선생은

“이 기회에 국내외의 동포들이 ‘독립, 자존’을 외치며 떨쳐 일어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북경(北京)에 있는 중형(이회영)의 집에서 이회영, 이동녕, 조성환(曺成煥), 이광(李光) 등과 함께

3·1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국내외에 알렸으며

얼마 뒤에 본국에서 민족대표로 파견된 여운형(呂運亨), 현순(玄楯)을 이끌고

북경의 이회영, 이동녕, 조성환, 이광 등과 함께

상해로 내려가서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창설하고

법무총장과 재무총장, 의정원장에 추대되었다.

 

이때의 임시정부 조직과정에서 지출된 모든 경비가, 고종황제께서 시해되기 전에 비밀리에

이회영 선생에게 하사하신 5만원 중에서 지출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무인년(戊寅年. 단기4271.서기1938)에 장개석정권(蔣介石政權)이 중경(重慶)으로 옮기자

임시정부도 함께 이사하게 되어 선생은 이때부터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임시정부의 법무총장과 재무총장을 번갈아 맡으면서 임시정부의 명맥유지에 진력하였다.

 

이와 같이 독립, 구국투쟁에 여념이 없던 계유년(癸酉年. 단기4266. 서기1933) 여름에 우연히 들린 서점에서

황염배의 ≪조선(朝鮮)≫이라는 신간(新刊)을 보고 거기에 쓰인,

“조선족은 미개(未開)한 종족인데 일본이 지배하게 되면서 일본의 교화(敎化)에 의하여 비로소 문명한 민족이 되었다”

는 내용을 읽고 어찌 비분강개하지 않으셨겠는가.

 

이런 연유로 선생은 항일투쟁의 와중인데도 1년 가까이 항주의 여관에서

한민족(韓民族)을 모독한 황염배의 글을 통박(痛駁)하고

더불어 세계를 향하여 <한민족의 위대성>을 펼쳐 보임으로써

한민족의 긍지(矜持)를 제고시키고자 피맺힌 글 ≪駁黃炎培之韓史觀≫이라는 저서를 집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을유년(乙酉年. 단기4278.서기1945)에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함으로써 한민족은 36년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해방은 되었으나 그것이 남의 힘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뜻하지 않았던 불행한 사태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을 든다면, 우선 국토의 분단이 그 첫 번째이고

이로 인하여 야기된 민족의 분열과 갈등 그리고 골육상쟁의 참상을 지적할 수가 있으며

그 두 번째의 커다란 비극이 점령군인 미군사령부에서 ≪임시정부≫라는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통고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기쁨보다는 조국으로부터 날아오는 실망스런 소식에 탈진이 된 채 귀국 길에 올랐는데,

마침 장개석 총통 부부가 비행기를 주선해주고 몸소 나와서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환송하는 가운데

선생도 이해 겨울에 중경을 떠나 상해에 닿았고 여기서부터는 미군이 제공한 비행기로 환국했으나

점령군의 요구대로 임시정부는 해체되고 정부요인들은 ‘개인의 자격’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생은 해방된 고국에 돌아와서 성균관 총재에 추대되고 대한독립 촉성국민회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그러나 지도층이라는 자들이 사분오열로 나뉘어 싸우는 것을 보고

단기4280년(서기1947) 9월에 대종교(大倧敎)의 대표직만 빼놓고 일체의 공직에서 탈퇴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선생이 80세가 되던 1월에 ‘5.10 총선’ 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고,

3월에 군정장관 하지의 방문을 받고 한국이 처한 현실과 장래에 대하여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으며,

7월 3일에는 국회 본회의에 나아가서 198명의 민의원에게

“국호(國號)를《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해야한다”고 강조하고 그 필연성을 역사적 사실을 들어 역설하였다.

 

7월 12일 대한민국 헌법이 통과되고 16일 정부조직법이 가결되면서

20일에는 대망의 정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는데,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선생이 당선되었는바 득표수는 132표였다.

 

선생은 부통령에 당선된 뒤에 대통령인 이승만에게

“대통령 선서식은 이미 취임식장에서 경과하였으나 국조단군(國祖檀君)께 드리는

경봉(敬奉)의 절차가 없을 수는 없지 않소”

라고 하여 단군성전(檀君聖典)에 고유(告由)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 일은 비록 조그마한 사건 같이 보이지만

장차 한민족(韓民族)의 역사를 바로 세울 때에 중요한 기맥(起脈)의 역할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할 대목이면서 선생의 민족적 정통성에 대한 집념을 확인할 수 있는 단면으로 이해된다.

 

선생은 단기4284년(서기1951) 5월 9일 이승만의 독재정치에 반대하여 부통령직을 사퇴하기로 결심하고

국회에 사표를 제출함과 동시에 저 유명한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국회에서는 2일 후에 만장일치로 사표를 반려했으나 13일에 다시 제출하므로 할 수 없이 수리하였다.

 

이로부터 1년 후에 선생은 이승만 독재정권을 반대하는 민주세력과

국민의 여망을 거부할 수 없어서 대통령 출마를 결심하고 대국민성명을 발표한다.

 

단기4285년(서기1952) 7월 27일에 발표한 성명서에서 선생은,

 

“이제 내가 목적으로 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다만 하나입니다.

그것은 특권정치를 부인하고 민주정치를 확립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여 독재, 부패정권 타도와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의지가 여실히 드러나 있었으므로

언론도 <이 이상 4년 더 기다릴 수 없다>는 선생의 선거 슬로건을 대서특필하여

독재와 부패에 시달리는 국민에게 한 가닥의 꿈을 안겨주었으나

이승만 일파의 공작에 의하여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만다.

 

선생은 85세 되시던 단기4286년(서기1953) 4월 15일 새벽 2시경에

부산 동래(東萊) 온천의 우사(寓舍)에서 영면하셨다.

 

장례는 전 국민의 애도 속에서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명예위원장에 부통령 함태영(咸台永), 위원장에 민의원의장 신익희(申翼熙), 부위원장에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

국무총리서리 백두진(白斗鎭) 등 국무위원 전원과 각계의 유지가 모두 참예하였다.

 

선생은 일생을 화랑의 ‘세속 5계(世俗五戒)’를 애송(愛誦)했으며 항상말씀하시기를,

 

“공직에 종사하는 자는, 공로는 남에게 돌리고(功歸于人), 허물은 내가 받는다(歸咎于身)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한다”

고 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초취부인을 잃고 만주로 망명 후에 얼마 있지 않아서

또 상처를 당한 42세 이후에는 다시는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이 지구 위에 망한 나라도 많고 애국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마는

6형제 40여명의 전 가족이 솔가하여 구국투쟁에 몸을 던진 사례가 과연 있었던가.

 

1만여 석의 가산을 방매하여 무관학교를 짓고 독립군을 직접 길러냈으며

모진 고난 속에 시달리던 애국자들을 보살피면서 만주에서의 항일투쟁도,

중국에서의 임시정부도 모두 선생과 우당선생을 비롯한 6형제분들의 도움에 의하여 부지해나갔던 것이니

그 쓰라렸던 고난의 길, 36년의 피맺힌 세월을 누가 있어 선생과 우당선생

그리고 나머지 4형제분들과 그 가족의 혈성(血誠)에 견줄 수가 있을 것인가.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레즈의' 전통적 표상이라고 할만하다.


○ 35세 이시영(李始榮)


자 성옹(聖翁)

호 성재(省齋)/시림산인(始林山人)

생년 1869

연령 85

활동분야 항일 / 국방 / 독립운동가, 정치가

과거 및 취재 [생원진사시] 고종(高宗) 22년 (1885) 을유(乙酉)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3등(三等) 70위


1. 관직


1885년(고종 22) 관직에 나아가 10여년간 형조좌랑·홍문관교리·승정원부승지·궁내부수석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 관직을 물러난 뒤로는 중형 이회영(李會榮)·이상설(李相卨) 등과 근대학문탐구에 몰두하였다.

 

1905년 외부 교섭국장에 임명되었으나 을사조약의 강제체결을 계기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1906년 재차 평안남도관찰사에 등용되었고, 근대학교설립 및 애국계몽운동에 종사하였으며,

 

1907년 중추원칙임의관,

 

1908년 한성재판소장·법부 민사국장·고등법원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으로는 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동녕(李東寧)·이회영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2. 서간도 망명과 신흥무관학교 설립

 

국권피탈 후 신민회의 국외독립운동기지건설계획에 의거하여 6형제의 가재(家財)를 재원으로 삼아

1910년말 서간도(西間島)유하현 삼원보 추가가(柳河縣三源堡鄒家街)로 솔가, 망명하였다.

 

1911년 4월 유하현 삼원보 대고산(大孤山)에서 노천군중대회를 개최하여

교육진흥 및 독립군양성을 표방한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설립을 주도하였다.

 

경학사 초대사장에는 이상룡(李相龍)이, 신흥강습소 초대교장에는 이동녕이 추대되었다.

 

1912년에는 통화현 합니하(通化縣哈泥河)에 토지를 매입하여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확대 발전시켰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는 유하현 고산자로 이전하였고, 합니하의 교사는 분교역할을 하는 등

1910년대 서간도지역 독립군양성의 총본산이 되었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 때까지 재만항일독립군의 핵심간부를 양성하였으며,

이들은 청산리대첩의 주역으로 활동하는 등 1920년대 국외독립전쟁의 골간으로 성장하였다.


3. 임시정부 참여

 

1913년 9월에는 북경에서 위안스카이(袁世凱)정부와 한·중연합전선의 결성을 도모하였으나

위안스카이의 사망으로 중단되기도 하였다.

 

1919년 1월 고종황제의 죽음을 계기로 북경에서 이동녕·조성환(曺成煥)·이광(李光) 및 이회영 등과

국내 3·1운동에 호응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상해(上海)로부터 북경에 온 여운형(呂運亨)·현순(玄楯)과 논의,

이회영·이동녕·이광 등과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에 참여,

임시정부 초대법무총장에 선임되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재무총장을 거쳐 1926년 무렵까지 임시정부국무위원으로 재임하였다.

 

1929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창당에 참여, 감찰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31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거 때에는 미리 항저우(抗州)로 가서 임시정부요인들의 피신처를 장만하였다.

 

1933년 중반 자싱(嘉興)에서 김구(金九)·이동녕·송병조(宋秉祚)·차이석(車利錫)·조완구(趙琬九)·

김붕준(金朋濬) 등과 함께 임시정부활동을 재건하고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었다.

 

1934년 《감시만어 感時漫語》를 저술하여 한국사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1935년 10월에는 김구 등과 함께 임시정부 지원정당으로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여 감사를 맡았다.

 

1938년 중일전쟁 발발 후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동한 이후

임시정부 국무위원·재무부장·의정원의원을 역임하는 등 광복 직전 임정활동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4. 광복 후 교육사업과 초대부통령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과 함께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자격으로 환국한 이래

 

1946년 봄 성균관총재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위원장에 선출되기도 하였으며,

대종교(大倧敎)활동에 진력하여 사교교질(司敎敎秩)·원로원장·사교(司敎)·도형(道兄) 등의 주요직책을 역임하였다.

 

또한, 환국 직후부터 신흥무관학교부활위원회를 조직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이념 계승과 인재양성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1947년 2월 재단법인 성재학원(省齋學園)을 설립,

신흥전문학관(新興專門學館)으로 발전시켜 1·2회졸업생을 배출하였지만

한국전쟁으로 일시 침체국면에 처하기도 하였으며, 그뒤 현재의 경희대학교로 계승되었다.

 

한편, 1947년 9월 공직사퇴 성명을 발표, 임시정부 국무위원직을 사퇴하였다.

 

그러나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선거에서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李承?)의 전횡에 반대하여

1951년 5월 9일 국회에 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국정혼란과 사회부패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요지의 대국민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승만 정부를 떠났다.

 

이어 1952년 8월 5일 시행된 제2대대통령선거 때에는

야당인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그 뒤 국민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다가 죽었다.

 

장례는 9일간의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서울 정릉묘소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 수유리 현 묘소로 이장하였다.


○ 이시영 

 

1869(고종 6)∼1953. 독립운동가·정치가.

 

자는 성옹(聖翁), 호는 성재(省齋)·시림산인(始林山人). 서울출신.

 

이조판서 유승(裕承)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동래 정씨(東萊鄭氏)이다.

 

첫 부인은 영의정 김홍집(金弘集)의 딸이며, 둘째 부인은 반남 박씨이다.


 

● 27세 이시현(李時顯)  - 상서공후 백사공파


1622(광해군 14)~1678(숙종 4)

 

자는 사영(士榮). 명상 항복(恒福)의 손자이고 부사 성남(星男)의 아들이다.

 

1659년(효종 10) 병조판서 송준길(宋浚吉)의 추천으로 사옹원봉사가 된 뒤에

사복시직장 · 홍산현감을 거쳐 개령현감에 이르렀다.

 

때마침 가뭄으로 기근이 들었으나 비축미가 없어서

경비의 절약으로 기민을 구제하는 비상수단으로 많은 백성을 죽음에서 건졌다.

 

이 사실이 암행어사 신정(申晸)이 장계(狀啓)하여 이듬해에 성주목사로 승진하였다.

 

이곳에서도 선정을 베풀어 통정대부가 가자되었고 이어서 공주목사에 이르렀다.


○ 27세 이시현(李時顯)


자 사영(士榮)

생년 1622

연령 57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중기


1622(광해군 14)∼1678(숙종 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사영(士榮). 영의정 항복(恒福)의 장손으로 부사 성남(星男- 철원공)의 아들이다.

 

1659년(효종 10) 병조판서 *송준길(宋浚吉)의 천거로 *사옹원 봉사가 된 뒤 직장(直長)이 되고,

이어서 *사복시 주부·홍산 현감을 거쳐 1671년(현종 12) 개령 현감이 되었다.

 

때마침 기근이 들었으나 비축미(備蓄米-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미리 갖추어 모아 둔 쌀)가 없었으므로

경비를 절약하여 기민(饑民-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 사실이 암행어사 *신정(申晸)에 의하여 보고되어 이듬해 성주 목사가 되었다.

 

이곳에서도 *진정(賑政)을 잘하여 통정대부에 오르고, 이어서 공주 목사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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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길(宋浚吉)- 조선 현종 때의 문신·학자(1606~1672).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우참판, 이조 판서를 지내면서 노론의 거두로 활약하였다. 성리학, 예학에 능하였다.

저서에 《동춘당집》, 《어록해》 따위가 있다.

 

*사옹원(司饔院)- 조선시대 궁중의 음식을 맡아본 관청.

이조(吏曹)의 속아문(屬衙門)으로, 1392년에 설치한 사옹방(司饔房)을 개칭한 것이다.

관원으로는 정(正:정3품) 1명, 제거(提擧:정 ·종3품) 2명, 제검(提檢:정·종4품) 2명,

첨정(僉正:종4품) 1명, 판관(判官:종5품) 1명, 주부(主簿:종6품) 1명, 직장(直長:종7품) 2명,

봉사(奉事:종8품) 3명, 참봉(參奉:종9품) 2명을 두었다.

 

*봉사(奉事)- 종8품 문관벼슬. 돈령부(敦寧府) 봉상시(奉常寺) 사옹원(司饔院) 등에 둠.

*직장(直長)- 종7품 문관 벼슬.

*사복시(司僕寺)- 궁중의 가마·마필(馬匹)·목장 등을 관장한 관청.

*주부(主簿)- 종 6품 문관 벼슬

*현감(縣監)- 작은 현(縣)의 으뜸 벼슬. 종6품으로 고려 시대의 감무(監務)를 고친 것임.

 

*신정(申晸)- 1628~1687. 조선 중기 문신. 본관 평산(平山). 자는 백동(伯東). 호는 분애(汾厓).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1648(인조 26년) 사마시 합격. 문과 급제. 대사간. 도승지. 이조판서. 한성부 판윤.

강화부 유수 재임 중 죽었다.

시서(詩書)에 능하고 저서로 분애집(汾厓集)이 있다.

 

*진정(賑政)- 진휼(賑恤)에 관한 행정

진휼(賑恤)- 흉년을 당하여 가난한 백성을 도와줌.

≒섬휼(贍?)·주진(?賑)·진구(賑救)·진제(賑濟).


 

● 21세 이식(李植)- 성암평리공 어모공파


자는 경원(敬元). 세종 을묘(乙卯 1435)에 태어나고 중종 정묘(丁卯 1507) 졸하였다.

 

관직은 어모장군(禦侮將軍) 충좌위부호군이다.

 

세조조(世祖朝)에 왕을 바꾸자 단종에 대한 절개를 굽히지 않고 벼슬을 하지 않았다.

 

향년 73세로 졸하니 증 승지(贈承旨)를 내리고 고종 임진(壬辰 1892)에 충절로써 정려(旌閭)를 내렸다.

 

성암평리공파의 중파인 어모공파 파시조이다.


 

● 20세 이신(李伸)- 익재공파


운와공의 손자이며 군사공(郡事公) 휘 덕림(德林)의 아들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제주 도안무사(濟州都按撫使- 종2품) 이다.

 

둘째 동생 교리공(校理公) 미(美)가 태종(太宗)의 부름에 나가지 않자 제주도(濟州道)에 유배되었다.

 

다행히 도안무사공(都按撫使)께서 제주도에 부임하여 3년간 재직하면서

동생에게 광택양전(廣宅良田-넓은 집과 좋은 밭)을 마련하여 생활하도록 도와주었다.(족보 교리공 약력 참조)

 

^ 배는 경주 최씨(慶州崔氏) 판서(判書) 오(墺)의 따님으로

지번(之蕃) 계번(繼蕃) 희번(希蕃) 세 아들과 2녀를 두었다.

 

익재공후 참군공파 휘 지번이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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