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세 이을규(李乙奎) - 판전공파
자 문경(文卿)
호 호계(虎溪)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중기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문경(文卿), 호는 호계(虎溪).
아버지는 한주(漢柱)이며, 어머니는 조계량(曺繼亮)의 딸이다.
1531년(중종 26)에 진사가 되고,
1535년에 문과 *별시(文科別試)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형조좌랑(刑曹佐郞)을 거쳐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에 이르렀다.
1537년에 *사은사 겸 진하사(謝恩使兼進賀使) *남세웅(南世雄)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것을 비롯하여
모두 3차에 걸친 중국*사행(中國使行)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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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시(別試)- 천간(天干)으로‘병(丙)’자가 든 해.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임금이 지방에 내려갔을 때 그 지역에서 행하던 임시 과거 시험.
*승문원(承文院)- 외교에 대한 문서를 맡아보던 관아
*교리(校理)- 집현전, 홍문관, 교서관, 승문원 따위에 속하여 문한(文翰)의 일을 맡아보던 문관 벼슬.
정5품 또는 종6품이었다.
*사은사(謝恩使)- 중국의 황제에게 사은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보내던 사절. ≒진헌사.
*진하사(進賀使)- 중국 황실에 경사가 있을 때에 축하의 뜻으로 보내던 사절(使節).
*남세웅(南世雄)- 중종(中宗)8년(1513년), 식년시(式年試) 병과8(丙科8)
생졸년(生年)은 미상이고 자(字)는 국간(國幹)이며 본관(本貫)은 의령(宜寧)이다.
중종(中宗)8년(1513년), 식년시(式年試) 병과8(丙科8)로 급제하여 벼슬은 호군(護軍)으로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다.
아버지 남변(南?)은 삭령 군수를 지냈으며 그 아들이 7형제인데 남세웅(南世雄)은 병조참판,
남세형(南世衡)은 부사, 남세평(南世枰)은 안성군수, 남세준(南世準)은 이조참판,
남세측(南世測)은 병절교위, 남세건(南世健)은 예조참판, 남세언(南世彦)은 인천부사를 역임하였다.
*사행(使行)-‘사신 행차’를 줄여 이르던 말.
*서장관(書狀官)- 조선시대 중국에 보내던 사행(使行) 중 정관(正官).
인조 이전의 명(明)나라, 인조 이후의 청(淸)나라에 정기·부정기적으로 파송되던 사행에는 양국 협약에 따라 규정된 인원을 보냈는데, 서장관은 정사(正使)·부사(副使)와 함께 3사(使)라 하여 외교 실무에 큰 역할을 하였다.
서장관은 기록관이라고도 하여 행대어사(行臺御使)를 겸하였으며, 일본에 보내던 통신사(通信使)에도 서장관이 따라갔다.
○ 호계공(虎溪公) 휘 을규(乙奎)
자는 문경(文卿)이고 호는 호계(虎溪)또는 양졸당(養拙堂)이다.
아버지는 한주(漢柱)이고 어머니는 조계량(曺繼亮)의 딸이다..
예로부터 인재의 고장으로 이름난 경주에서 무진(戊辰-1508. 중종3)년 3월13일에 태어났고
병오(丙午. 1546년. 명종1)년 8월30일 39세로 타계(他界-다른 세상으로 떠남. 죽음)하였다.
어려서부터 *소학(小學)을 공부하였다.
20대에 주로 *심경(心經)과 * 근사록(近思錄)을 통하여 성리학(性理學)을 공부하였다.
1531(辛卯. 중종26)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535(乙未.중종中宗30년)에 문과(文科) 별시(別試) 갑과1(甲科1)에 장원급제하였다.
권지교서관부정(權知校書館副正) 직책을 시작으로 형조좌랑(刑曹佐郞)을 거쳤다.
곧 승문관 교리 겸 경연 춘추관 기사관(承文院校理兼經筵春秋館記事官)에 이르렀다.
1537년 사은사 겸 진하사(謝恩使兼進賀使) 남세웅(南世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
라 황제를 알현하매 황제가 그 학문에 감동하여 쇠 화로를 하사하였다.
모두 3차례에 걸쳐 명(明)의 사행(使行-사신수행)을 수행하였다.
성리학의 거두 회재 이언적과는 도의로 맺어진 벗으로서 호계공이 과거응시차 상경할 때 회
재 선생이 지었다는 시 한 수가 전해온다.
경산 현령(慶山縣令)과 호계 군수(虎溪郡守)로 있을 때
청렴하고 공명정대한 일 처리로 목민관의 모범이 되었으니
백성들은 송덕비(頌德碑)를 세웠으며,
조정에서는 청백리(淸白吏)에 선정(選定)하였다.
뒤에 승정원 교리 겸 경연춘추관 기사관(承政院校理兼經筵春秋館記事官)에 이르렀다.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회재 이언적을 따라 학문을 강론하다가
명종 원년(1546)에 39세로 생을 마감했다.
호계공과 관련해 회재가 이르지 못한 3가지인 3불급이 전해오고 있다.
회재가 이르지 못한
'장원'(호계공은 문과(文科) 별시(別試) 갑과1(甲科1)에 장원급제함) 과 '중국사절' , '자식번창'이 그것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회재에 비견할 만큼 뛰어난 것을 풍자한 이야기로 생각된다.
그러나 학자로써 회재 이언적에 비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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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학(小學)- 중국 송나라의 유자징(劉子澄)이 주희의 가르침으로 지은 초학자들의 수양서.
응대(應對)·진퇴(進退)의 예법과 선행(善行), 가언(嘉言), 수신 도덕의 격언,
충신 효자의 사적(事績) 따위를 고금(古今)의 책에서 뽑아 편찬하였다.
1187년에 완성하였다. 6권 5책.
* 심경(心經)- 중국 송나라 진덕수의 저서. 성현의 마음을 논한 격언을 모으고, 여러 학자의 논설로써 주
(註)를 달았다. 1권.
* 근사록(近思錄)- 중국 송나라 때에 주자와 그 제자인 여조겸이 함께 편찬한 책.
주무숙(周茂叔),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장재(張載) 등의 저서나 어록에서
일상 수양에 긴요한 장구(章句) 622 조목을 추려서 14부로 분류하였다. 14권.
○ 북산서사(北山書社)
경주시 강동면 호명리에 소재하며 호계공(虎溪公) 이을교(李乙奎)를 향사하는 곳이다.
경내에는 지경사(持敬사)와 포요당(抱搖堂)이 있다.
이 서사는 본래 조선 순조 30년(1830)에 경주 북군동에 북산사(北山祠)로 창건되었데,
고종 5년(1868)에 금령에 의하여 헐린 것을 1967년에 호명리 101번지 호계정사가 있던 자리에 복원하였다.
<국조 문과 방목>
이을규(李乙奎) : 중종(中宗)30년(1535년), 별시(別試) 갑과1(甲科1)
○ 가족
조부(祖父) 이귀산(李龜山)
증조부(曾祖父) 이수(李修)
외조부(外祖父) 조계량(曹繼亮)
처부(妻父) 김회옥(金懷玉)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531(신묘) 진사시
전력(前歷) 진사(進士)
○ 호계실기(虎溪實紀)
관인(官人-관리) 학자(學者) 이을규(李乙奎. 1508-1546)의 문집이다.
후손 이완집(李完集)에 의거 유문(遺文-남긴 글) 및
가승 행장(家乘行狀-집안에 내려오는 호계공의 행적) 등을 수집 정리하여 1906년에 1책으로 만들었다.
실기(實紀)의 * 소지(小識)를 쓴 후손 이완집(李完集)에 의하면,
자신의 증조부가 이을규(李乙奎)의 유작(遺作-남긴 작품)을 수집(蒐集)하여 문집을 만들려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시 후손 이규복(李圭復)이 실기 완간(完刊)의 뜻을 비추어 비용을 모두 대고
이완집(李完集)이 이을규(李乙奎)의 유문(遺文) 및 가승행장(家乘 行狀) 등을 수집 정리하여
1906년 1책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실기의 목차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김도하(金道和)가 쓴 호계 선생 실기서(虎溪先生實紀序. 1906) 및 실기의 목록(目錄) 과 연보(年譜)가 있다.
권상(卷上-상권)은 이을규(李乙奎)의 일고(逸稿-빠트리고 실리지 않은 원고)로
시(詩-定慧寺 偶吟, 游小蓬島 등 9수) 몇 수와 〈擬虞伯益請 任賢勿貳〉라는 表文이 있다.
그 내용은 정치의 시작이, 현재(賢才-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를 얻어
직임(職任-임무를 맡김)을 맡기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니
'현재(賢才)를 임용(任用)하고 의심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이외 이을규(李乙奎)가 송암(松菴) 유권(柳灌)에게 보내는 편지글 및
이락당(二樂堂) 남응룡 (南應龍), 수암(首巖) 이약해(李若海) 등에게 보내는 편지글이 있다.
그리고 권하(卷下-하권)에는 부록(附錄)으로,
먼저 회재 이 선생 증별운(晦齋李先生贈別韻) 2수(首)와,
그 다음 후손 이달삼(李達三)이 쓴 유사(遺事-죽은 사람이 남긴 사적),
권운표 (權運標)가 쓴 유사(遺事)의 후서(後敍-뒤에 기록한다)가 있다.
또 이덕현(李德玄) 등이 쓴 묘갈명(墓碣銘-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한 작은 돌비석에 새긴글),
묘갈후식(墓碣後識-뒤에 경위를 설명한 글), 묘갈고구문(墓碣告具文),
개수갈고유문(改竪碣告由文-묘갈을 다시 개수한 후 그 내용을 적어서 사당이나 신명에게 알리는 글),
개갈시고유문(改碣時告由文), 묘지명(墓誌銘-묘지에 기록한 글. ≒묘명墓銘) 등이 있다.
이외에도 이석희(李錫禧)가 쓴 이을규(李乙奎)의 행장(行狀)과 마지막으로
서원(書院)과 관련한 수편의 통문(通文-차례로 돌려보는 통지하는 문서), 축문(祝文)
그리고 상량문(上樑文)이 있다.
가령 구강서원통문(龜岡書院通文), 향교통옥상서원통문(鄕校通玉山書院通文), 옥산서원답통문(玉山書院答通文),
북산서사개기축문(北山書社開基祝文), 북산서사기(北山書社記), 묘우개 기축문(墓宇開基祝文) 등이다.
실기의 끝에는 정진헌(鄭鎭憲)의 후서(後敍)와 이완집(李完集)의 실기 소지(小識. 1906)이 있다.
* 소지(小識- 識은 '식', '지'라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지'라고 읽음)
책의 체재로써 서, 발, 소지(小識), 고교(考校)의 과정중 하나인데 경위를 설명한 글.
● 이응춘, 이응호, 이대립 선생 - 평리공파
전남(全南) 순천시(順天市) 야흥동에는 전설처럼 전해오는 얘기가 있다.
일문삼충(一門三忠) - 한 집안에서 세 사람의 충신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응춘과 아우인 응호, 종질인 대립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을 쫓아 백의종군(白衣從軍)하여,
옥포(玉浦)와 당포(唐浦),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적 전함 수십 척을 불사 르는 공을 세우고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戰死)하니
나라에서는 일문삼충(一門三忠)의 정려(旌閭)를 내려 그 충절을 기렸다
응춘의 자는 여빈이며 모산공(茅山公) 해(蟹)의 증손이며 충서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무공 이순신의 막하에 종군하였다.
해상전투에 참전하여 옥포, 당포, 노량해전에서 적선 10여 척을 불사르고
조선인 포로들을 다수 구출하는 등 큰공을 세운 뒤 순국(殉國)하였다.
● 구충당공(求忠堂公) 휘 의립(義立)
1572(壬申 선조 5) ~ 1642(壬午 인조 20).
월성인 이관람의 후손으로 호는 구충당(求忠堂)이다.
공의 할아버지인 이호는 경주의 효자리에 살았을 때 보문 보사업을 이르켜 농사에 크게 이바지한 분이라 전해 온다.
공의 선대가 울산시 울주 땅으로 오게 된 것은 할아버지 때에 두서면 전읍리로 옮겨왔다.
구충당공은 1572년(선조5년) 5월18일 지금의 울산시 두서면 전읍리에서 태어났다.
7세에 이미
"봄바람에 까마귀 반포하며/
날아가고 또 날아드네./
이르노니 멀리 떠나지 마라./
어미가 외로이 숲에서 슬퍼한다."
라는 내용의〈오포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는 자라면서부터 자질이 총명하여 격물에 통달하였고 어버이 섬기기에 효도가 지극하여 그 이름이 인근에 높았다.
그는 불행하게 10세 때 어머니 설씨를 사별하고 또한 21세 때에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 외로운 몸이 되었다.
이의립은 효행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인조 14년, 그의 나이 18세 되던 해에 첫 아들을 얻었는데, 때마침 그의 부친이 위독함으로
손가락을 잘라서 생명을 구한 것은 가히 전설적인 이야기가 되어있다.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자라서는 나라에 충성을 다했다.
선고 3년 상을 마친 1593년. 23세 때의 어느 날 그는 감연히 일어나 크게 탄식하면서
"자식으로서 뜻을 세우지 못하면 사람의 자식이라 할 수 없고
백성으로서 나라의 위난을 당하여 순국의 정성을 다하지 못한다면 어찌 신하라 할 수 있으랴.
이미 양친이 다 세상을 떠났으니 어버이를 섬기는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뛰어 나감이 옳다.
나라의 위난을 눈앞에 보고 이를 해결함은 병(兵)과 농(農)보다 더 막중한 것이 없고
조총과 화약은 유황이 없이 는 무용지물이요,
솥과 농구는 무쇠없이 이루어 질 수가 없다.
유황 수철 모두 우리나라에 생산됨이 없으니 이를 찾아 나서서 나라의 어려움에 보국하리라"
하고 큰 뜻을 가슴에 품었다.
그 후 치술령에 올라가서 백일 동안 산신에 기도하여 나라를 위하는 일에 있어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빌었다.
그는 효과 충을 다했으면서도 벼슬을 마다하고 철장을 운영하여 나라에 도움을 준 인물이다.
그의 부친이 별세하자 그는 다하지 못한 효도를 나라사랑으로 승화시키기에 이른다.
그는 우리나라에 철과 유황이 없을 이유가 없다며
"내가 지성으로 팔도강산을 답사하여 탐광을 해서 병농(兵農)에 도움이 되게 하리라"
하고 결심한지 10여 년, 마침내 1657년(효종 8년) 농소면 달내의 철광을 재발견하여 개척하였다.
쇠의 제련법과 유황의 자조법을 해득한 선구적인 과학자이며 실업가였다.
39세 때 군사용 무기와 농기구 제조에 필요한 철과 유황의 제련법을 왕에게 바치니 현종은
그에게 동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다.
전란의 상처와 당쟁으로 암울하던 조선후기에 입신양명의 길을 마다하고 피폐한 광산의 개발과
철강제조법 연구에 몰두하여 우리나라 광업사에 한 획을 그었던 위대한 인물이었다.
선생은 고대이래 철과 유황산업의 맥이 끊겨 생필품은 물론 무기제작조차 어려운 실정임을 통찰하고
위국안민의 일념으로 십여년에 걸친 탐사 끝에 마침내 철과 유황광을 발견하고 제철법까지 독학연구로 밝혀냈다.
현종(顯宗) 임금은 선생의 지성에 감동하여
"장하도다. 임진난(壬辰亂)과 병자난(丙子亂)을 겪고 거의 백년이 됨에 군비가 풍성해서
남북이 평안하고 백성들이 쟁기로 논밭 갈고 가마솥으로 음식을 만드는 편리함이 어찌 이의립의 덕(德)인줄 모르리오."
라고 칭송하였다.
○ 울산의 쇠 생산
멀리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변진지방의 쇠는 특히 유명하여 삼한 사회는 물론 동예와 왜국에서도 무역을 해갔으며,
낙랑과 대방을 거쳐 중국에까지 공급되어 모든 매매에 있어서 마치 화폐와 같이 통용되었다 한다.
달천의 쇠는 화봉동 서당골 점터를 비롯하여 100여개의 쇠부리 유적을 만들어 놓았다.
돈을 찍어내던 전읍마을에서 태어난 이의립은 젊은 나이에 지배계급으로서의 호강할 기회를 버리고
효를 향한 덕행과 국가에 충성할 길을 찾으며 한평생을 보냈다.
○ 두서면 전읍리
전읍리(錢邑里)는 조선초기부터 '돈마을' 즉 '회은촌'이라 불렀던 곳이다.
경주군 외남면에 속할 때는 너부(仍甫)에 딸린 마을이었다가 정조 때 처음으로 독립되어 전읍리가 되었다.
신라 때 돈을 만드는 주전소가 있었다는 설도 있고 실제 전읍리는 "돈말"이라 불리던 곳이기도 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 역원조에 회은촌원으로 나타난다.
이 회은촌은 이두 표기로서 순 우리말로는 바로 "돈말"이 된다.
회(回)는 "돌"로서 "ㄹ"이 탈락되며, 은은 "ㄴ"으로, 회은은 곧 "돈"이 되고 촌(村)은 마을이 줄어서 "말"이 되는 것이다.
경주읍지인 동경잡기에는 회은촌을 혹 전읍이라 이른다고 되어있다.
전읍리 일대에는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있으며, 유촌 서쪽 산에는 쇠붙이와 깊은 관련이 있는
구충당(求忠堂) 이의립(李義立)의 묘가 있다.
○ 구충당공 문집 발간
이기형씨가 국역한〈구충당 문집〉은 선생의 일대기와 선생이 남긴 시, 서, 잡저, 제문 등이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쉽게 한글로 풀어 적어놓고 한자도 병기하고 있다.
말미에는 그를 추모하는 후세들의 글과〈구충당 문집〉의 원문을 그대로 옮겨 실었다.
〈구충당 문집〉은 그동안 구충당에 대해 알려진 것을 더욱 소상하고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구충당이 왕으로부터 받은 교지 등 자료도 함께 실려있어 구충당에 관한 자료적 가치가 높다.
● 25세 이 익(李瀷) - 국당공후 정순공파
1579(선조 12)~1624(인조 2).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형여(泂如), 호는 간옹(艮翁), 옥포(玉浦). 판관 유일(惟一)의 아들이다.
1612년(광해군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에 등용되고
뒤에 사서·전언·헌납·지평·예조정랑·병조정랑을 거쳐 직강에 이르렀다.
인목대비의 폐비논의가 일자 반대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문초를 받았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았으며
다행히 기자헌(奇自獻)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제주에 안치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사예와 장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미처 왕을 호종하지 못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사후에 전한(典翰)에 추서되었다.
○ 이익(李瀷)
자 형여(泂如)
호 간옹(艮翁)/옥포(玉浦)
생년 1579
연령 46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중기
1579(선조 12)∼1624(인조2).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형여(泂如), 호는 간옹(艮翁)·옥포(玉浦).
아버지는 판관 유일(惟一)이며, 어머니는 참봉 민덕룡(閔德龍)의 딸이다.
1612년(광해군 4)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해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곧 검열에 등용되고, 1615년 전적에 승직 되었다.
그 뒤에 사서·정언·헌납·지평·장령·예조정랑·병조정랑을 거쳐 *직강(直講)을 역임하였다.
1618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려는 논의가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문초를 받았으나 끝내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행히 *기자헌(奇自獻)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제주에 *안치(安置)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다시 사예와 장령 등에 임용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미처 왕을 호종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전한(典翰)에 추증(追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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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년문과(式年文科)- 60갑자 가운데 자(子) 묘(卯) 오(午) 유(酉)가 드는 해에 정기적으로 치룬 과거(科擧) 시험이다.
3년에 한 번씩 돌아오며 조선 시대에는 대비과(大比科)라고도 하였다.
생원과(生員科)·진사과(進士科)·역과(譯科)·의과(醫科)·음양과(陰陽科) 등이 시행되었다
식년시가 처음 실시된 해는 고려 선종 원년(1084)이며, 조선 태조 2년(1393)에 제도적으로 정착되었다.
*직강(直講)- 성균관(成均館)에 소속된 정5품 벼슬의 이름.
박사(博士)와 더불어 강수(講授)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고려에서는 원래 승(丞)이라는 이름을 고쳐 직강이라 하였는데, 그 정원은 1인이었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는 태조 원년(1392) 7월에 있었던 관제(官制)의 신정(新定) 때에
고려 말의 제도를 계승하였는데, 세조 때에 4인으로 증원하였다.
*기자헌(奇自獻)- 조선 시대의 문신(1562~1624). 자는 사정(士靖). 호는 만전(晩全).
부제학·대사헌·영의정을 지냈고, 광해군을 즉위시키는 데 공헌하였으나,
영창 대군의 살해를 반대하다가 제주로 귀양을 갔다.
이괄(李 适)의 난 때 무고한 혐의를 받아 사사(賜死)되었다.
*안치(安置)- 조선 시대에 먼 곳에 보내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게 주거를 제한하던 일.
*호종(扈從)- 임금이 탄 수레를 모시어 따르던 일. 또는 그런 사람.
*전한(典翰)- 홍문관에 속한 종3품 벼슬.
유학(儒學)의 경전(經典)을 관리하고 글을 다루며 임금의 물음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 이인(李仁)
1896~1979. 변호사·정치인.
호는 애산(愛山). 대구출생. 할아버지는 성리학자였고
아버지는 자강회(自彊會)와 대한협회(大韓協會)의 중심인물이었다.
대구의 달동의숙과 경북실업보습학교를 하고
1912년 일본 세이소중학교(正則中學校)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과정인 고등전공과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변호사의 꿈을 안고 다시 일본으로 가서
1922년 일본변호사시험에 합격하고 돌아와 서울에서 개업을 한 다음
처음 변론을 맡은 것이 의열단사건(義烈團事件)이었다.
당시의 허헌(許憲)·김병로(金炳魯) 등과 함께 항일독립운동사에 남을만한 사건에는
빠지지 않고 관여하여 변론하였다.
수원고농사건(水原高農事件) 때에는 법정불온변론문제로 변호사정직처분을 받기도 하였고,
언론탄압반대연설회 등으로 여러 차례 유치장신세를 지기도 했다.
조선어학회사건 때에는 투옥되어 4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공이 맡았던 큰 사건 가운데서 한국사에서 꼽을 수 있는 사건은
ⓛ 의열단사건 ② 광주학생사건 ③ 안창호사건 ④ 수양동우회사건 ⑤ 각종필화 및 설화사건
⑥ 수원고농사건 ⑦ 6․10만새사건 ⑧ 경성제대학생사건 ⑨ 만보산사건 등이 있다.
광복이 되자 한국민주당 창당에 관여하여 당최고원 가운데 한 사람인 총무가 되었고
군정청이 임명하는 수석대원관(首席大院官)으로 옮겼고
이어서 군정청의 검찰총장의 자리에 있으면서 헌법과 정부조직법의 모체가 되는 자료를 제공하였다.
정부수립과 동시에 초대법무정관이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과 뜻이 맞지 않아 사임하였다.
그뒤 5·16 군사구데타까지 민의원과 참의원을 지냈고
군사정부시절에는 원로정치인으로 야당통합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말년에 경주이씨중앙화수회 2대 3대 총재를 역임하여 종친회의 육성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말년에는 살던 집과 전 재산을 한글학회에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겼고 자손들이 유언을 그대로 받들었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루었다.
● 21세 군수공(郡守公) 이인로(李仁老)- 익재공후 군수공파
익재공의 현손이다.
아버지는 사간(司諫) 휘 봉승(鳳升)이다.
자는 노경(魯卿)이며 호는 괴정(槐亭)이다.
세종조(世宗朝)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옥천군수(沃川郡守-정4품)에 이르고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이다.
문장가(文章家)로서 충효(忠孝)가 겸전(兼全-이것저것 다 온전함)하였다.
단종조(端宗朝)에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임금자리를 양위하자
서울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임실(任實) 두곡리(杜谷里)에 터를 잡아 살게되었다.
^ 배는 창원 황씨(昌原黃氏) 현감(縣監) 수일(守一)의 따님으로 수온(守溫) 수공(守恭) 수검(守儉) 세 아들을 두었다.
익재공후 군수공파(郡守公派) 파조(派祖)이시다
○ 괴정공(槐亭公) 이인로(李仁老)
고려 말의 대학자 익재(益齋) 제현(齊賢)의 현손(玄孫)이다.
자는 노경(魯卿)이고 호는 괴정(魁亭)이다.
세종조(世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벼슬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옥천 군수(沃川郡守) 이다.
문장(文章)이 뛰어나고 충효 겸전(忠孝兼全)하였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을 퇴위시키고 스스로 임금이 되자
성삼문·박팽년 등 단종 을 보필하기로 약속했던 충신들이 단종 복위 운동을 벌이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많은 충신·열사들이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가 몸을 숨겨 여생을 보내었다.
괴정공(魁亭公- 郡守公)도 벼슬을 버리고 임실 두곡리(任實杜谷里) 용요산(龍腰山)에 숨어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괴정공은 용요산 기슭에 '괴정(槐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몸을 숨겨 여생을 마쳤다.
선생의 세 아들도 선생과 뜻을 같이하여 아버지를 모시고 이곳에서 여생을 마쳤는데
임실(任實)의 경주 이씨(慶州李氏) 익재공파(益齋公派)들은 거의 괴정공(魁亭公) 휘 인로(仁老)의 후손이다.
익재공파(益齋公派)의 장파(長派-대파의 장손 집안)로 군수공파(郡守公派)의 파조(派祖)이시다.
배(配)는 창원 황씨(昌原黃氏) 현감(縣監) 수일(守一)의 따님으로 수온, 수공, 수검을 두었다.
판윤공(判尹公) 휘 지대(之帶)와는 6촌간이다.
세계는 익재공 제현 → 계림군 보림 → 사간 봉승 → 군수공(괴정공) 인로이다
● 30세 이인소(李寅소) - 익재공후 창평공후 생원공파
1637(인조 15)~1698(숙종 24).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명(子明), 호는 노포(老圃). 좌의정 경억(慶億)의 아들.
1663년(현종 4) 진사가 되고 문음(門蔭)으로 외직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했다. 정승 정재승(鄭載嵩)이 “몸가짐이 맑고 신실하다.”고 천거하여 낭관에 올랐다.
1693년(숙종 19) 57세로 아우 인병(寅炳)과 함께 급제하여 수찬으로 있으면서 화폐 유통의 폐단에 대하여 논하였고 뒤에 교리에 이르렀다.
○ 이인소(李寅소)
자 자명(子明)
호 노포(老圃)
생년 1637
연령 62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중기
과거및 취재 [문과] 숙종(肅宗) 19년 (1693) 계유(癸酉)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 3위
[생원진사시]현종(顯宗) 4년 (166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24위
1637(인조15)∼1698(숙종 2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명(子明), 호는 노포(老圃).
좌의정 경억(慶億)의 아들이다.
1663년(현종 4)에 진사가 되었고, *문음(門蔭)으로 외직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하였다.
임기를 채우고 서울로 오자 정승 정재숭(鄭載嵩)이 몸가짐이 맑고 신실하다는 것으로 천거하여 *낭관에 올랐다.
1693년(숙종 19)에 57세의 나이로 *알성문과에 병과로 동생 인병(寅炳)과 함께 급제하였다.
1696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화폐유통의 폐단에 대하여 논한 바 있다.
그 뒤 *교리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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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음(門蔭)-음서(蔭敍). 고려시대에는 5품이상 관리.
조선시대에는 공신(功臣)이나 현직 당상관의 자손을 과거(科擧)에 의하지 않고 관리(官吏)로 채용(採用)하던 일
*낭관(郞官)- 각 관청에서 문서의 일을 맡아보던 관직.
정랑은 정5품, 좌랑은 정6품관으로 6조의 중견관리였다.
특히 이조와 병조의 낭관은 전랑(銓郞)이라 하고,
관리의 전형(銓衡) 때 피천자(被薦者)의 명단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개인적 감정으로 천망(薦望)명단에 기록하지 않는 권한도 있어, 문 ·무관의 인사권이 좌우되기도 하였다.
병조 ·형조에 정랑 ·좌랑 각 4명을 두고, 그 밖에 각 3명을 두었다
*알성문과(謁聖文科)- 조선 시대에 임금이 성균관의 문묘에 참배한 뒤 보이던 문과
*수찬(修撰)- 홍문관에 둔 정6품 벼슬.
*교리(校理)- 집현전, 홍문관, 교서관, 승문원 따위에 속하여 문한(文翰)의 일을 맡아보던 문관 벼슬.
정5품 또는 종5품이었다.
● 이인식(李寅植)
생몰년 미상. 조선 헌종~고종 때의 악사(樂師)
자는 성효(聖孝). 1847년(헌종 13) 5월 가전악(假典樂)·
1876년과 1892년의 진찬(進饌) 때에는 집사악사(執事樂師)로 활약하였다.
거문고의 명인 이수경(李壽卿)의 할아버지이고
가곡(歌曲)의 명인 이병성(李炳星)의 고조부이다.
이 집안은 피리의 대가들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세습궁중악’의 가문이었다.
○ 이인식(李寅植)
자 성효(聖孝)
활동분야 예술/체육 / 기악가 / 악사(樂師)
생몰년 미상. 조선 헌종·고종 때의 악사(樂師). 자는 성효(聖孝).
1847년(헌종 13) 5월 *가전악(假典樂),
1876년(고종 13) 7월 *전악(典樂)이 되었고,
1877년과 1892년의 *진찬(進饌)때에는 *집사악사(執事樂師)로 활약하였다.
거문고의 명인 *이수경(李壽卿)의 할아버지이고, 가곡(歌曲)의 명인 *이병성(李炳星)의 고조부이다.
전공은 피리인데 이수경 외에 이 집안은 한결같이 피리가 전공이었다.
세습적인 궁중악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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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전악(假典樂)- 조선 시대에, 전악원에 속한 임시 벼슬.
전악(典樂)과 같은 일을 하였다. ≒권전악·권착 전악.
*전악(典樂)- 궁중의 고아(高雅)한 음악.
조선 시대에, 장악원에서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정6품 잡직(雜職).
임시로 봉급을 주기 위해 두었던 체아직 녹관(祿官)이다. ≒사성랑(司成郞).
아악을 울리는 데서 저, 피리, 해금 따위의 여러 악기를 다루는 악사.
*진찬(進饌)- ^진연(進宴)보다 규모가 작고 의식이 간단한 궁중의 잔치
^진연(進宴)-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 궁중에서 베풀던 잔치
*집사악사(執事樂師)- 나라의 제사나 큰 잔치 때에,
예를 진행시키는 집사 곁에 홀을 들고 서서 절차에 따라 음악의 시작과 끝냄을 지휘하던 악관.
● 이수경(李壽卿)
1882.12.19~1955.3.12
호 송사(松史). 서울 출생. 11세 때 장악원(掌樂院) 악공(樂工)이 되고
1902년에 전악(典樂),
1914년에 아악수장(雅樂手長),
1933년에 아악사(雅樂師)를 역임한 뒤
1940년 사퇴하였다.
현금(玄琴)이 전공이나 악기제작에도 능하여 많은 명기를 제작하였으며,
아악부 악사(樂師)로 있을 때에는 거문고 ·정재(呈才) ·악장(樂章) 등을 가르치는 등
아악의 보존과 전승에 힘을 썼다.
단소(短簫)와 시조창(時調唱)에도 일가를 이루었으며
거문고에서는 《영산회상(靈山會相)》의 탄주(彈奏)에 뛰어났었다.
할아버지가 이인식(李寅植)이다.
● 이병성(李炳星)
이왕직 아악부 양성소 제2기생(1922~1926)에는 몇 사람 참으로 타고난 자질과 발군의 기량으로
그 이름을 길이 드리우고 악원의 전통을 영예롭게 한 이가 있으니
유일한 생존자 심소 김천흥, 박성재가 그렇고 이번에 말하려는 이병성 선진이 그들이다.
이병성은 누대 장악원 세가의 직계인 것부터가 여느 악생의 경우와 크게 달랐다.
증조부 이인식, 조부 이원성, 부친 이수경 선생은 악원의 악사를 지냈을 뿐만 아니라
각기 전공인 피리, 거문고에 있어서 당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하나같이 대가이었던 것이 너무 우람스럽기만 하다.
이병성은 호를 두봉(斗峯)이라고 했는데 자호 같지는 않고 뒤에 누가 지었던,
그의 좋은 기량을 그렇게 상징하여 잘 어울린다고 밖에 말하지 못한다.
두봉은 동기에서 박성재, 강명복, 김선득과 더불어 피리잽이에 별러졌다.
증조부가 되는 이인식 선생이 그랬다지만 피리의 명수요 대가의 혈통에서인지
그의 피리는 참으로 그만의 특이한 음색이어서 이날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다.
그것은 득음한 이의 영글고 영롱한 피리소리와도 또 다른,
그야말로 그만의 대쪽을 쪼개는 듯한 맑고 트이고 푸르고 씩씩하니 어디 가히 비류가 없는 피리 소리였다.
전날 이인식 명인의 피리소리가 하마 저랬을까 하고 생각도 하지만 알 수가 없다.
사람따라 저마다 목소리가 다르듯이 일관 피리(혀)를 입에 물어도
그 소리는 각기 다르게 퍼지는가 싶은 궁리를 혼자 해볼 때도 있지만 모르겠다.
아무튼 독특한 신비스럽기까지 한 그의 피리소리를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두봉은 이수경 선생의 장자로 1909년 12월 1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슬하에서 외롭게 자랐다.
학교는 4년제인 장훈보통학교를 1922년 3월에 마치고, 그 해 4월 아악부원 양성소 제2기생으로 입소하였다.
1기생에는 이미 그의 종형이 되는 이병호가 있었고,
이병호의 전공 역시 피리였는데 재주가 비상하여
아악부에서 성실히 근무했으면 큰 기여를 할 재목이었는데
졸업 후 얼마안가 아악부를 떠나 애석하기 그지없다.
그보다 두봉 이병성이 전공인 피리보다 가곡으로 전문하게 된 내력이
실로 우연치가 않은 것을 들어야 하겠다.
장악원에는 가곡의 반주인 관현의 기악은 전해 오면서도 정작 노래는 이를 가르치고 배우지를 아니했던 것이다.
1926년 4월 비로소 민간의 가객 하규일 선생을 초빙하여 아악부에 가곡 뿐만 아니라
가사·시조까지를 전수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가곡은 일청이조라고 이른다.
첫째는 목청이 청해야 하고 다음에 가락을 친다는 뜻이니 천부의 자질 없이는 대성을 이루기 힘들다.
이병성씨의 목청도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고 일컬을 만큼 아름다운 소리를 타고났다.
그 자질에다 근세 정통 가악계의 오직 한 분 남았던 기숙 하규일 옹의 채찍이 가해졌으니 두각은 날로 두드러져 갔다.
목에서 피가 나는 수업 십 사년 마침내 일가를 이루어 어전에서까지 가곡을 할 영예를 입기에 이른 것이다.'
(<인간문화재>, 예용해, 어문각, 1963)
두봉은 이왕직아악부 아악수보·아악수·아악수장·아악사를 역임하고
1940년 3월 일신상의 사정으로 아악부를 퇴직했다.
그러다가 1950년 2월 구왕궁 아악부 기술촉탁,
그 해 4월 국립국악원 개원과 더불어 동 예술사·국악사에 임명되어 복직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환도 이후 두봉은 심장병·신장병으로 괴로운 투병생활을 계속한다.
이 기간의 정황을 그림같이 묘사한 글이 있다.
'지나친 쇠약으로 귀까지 먹었다는 이씨는 드문드문 말을 이어 한다.
세습된 가통을 다음 대에도 전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그는 분연히
'그럴 생각은 없다'고 말하며
차남 동규(16세)군이 국악사양성소에서 가야금을 배우고 있으나
'이는 대를 잇게 하자는 뜻이 아니오, 요는 학교에 보낼 돈이 없는 탓이라'고 자학에 가까운 어조다.'
두봉은 끝내 약석의 보람없이 1960년 11월 2일 시외 구파발 자택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52세였다.
현재 차남 동규, 삼남 정규, 형제가 건실히 성장하여 국립국악원과 KBS국악관현악단에 각각 복무하며,
함께 선고의 유업인 가곡을 전공으로 하고 있는 것도
두봉이 원했건 아니건 하늘의 섭리로 고즈넉이 받아들여야 옳을 것이다.
● 30세 이인엽(李寅燁) - 익재공후 생원공파
1656(효종 7)~1710(숙종 36).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계장(季章), 호는 회와(晦窩). 좌의정 경억의 아들이다.
1684년(숙종 10) 사마시에 합격하고 1686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89년 숙종이 희빈 장씨(禧嬪 張氏) 소생을 원자로 정하려하자 서인들이 실권하게 되었는데,
숙종이 중전 민씨(閔氏)까지 폐하려 하자
공이 전 한림으로 전 판서 오두인(吳斗寅)·전 참판 이세화(李世華)·전 응교 박태보(朴泰輔) 등 서인들과 반대상소를 올렸다.
뒤에 양역변통(良役變通)을 주관하였고
강화유수로 부임하여 강화부 방비를 위한 진(鎭) 설치를 위한
그의 견해는 탁월했던 것으로 평가되어 종종 인용되다가 정조 때에 시행되기도 하였다.
이조판서· 홍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 중남공((中南公) 휘 인영(麟榮)
생몰(生沒)년은 1867(고종 4)년 9월 23일∼1909(융희 3)년 9월 20일이다.
조선 말기의 의병장으로 일명 준영(竣榮)이라고도 한다.
경기도 여주 출신으로 정동현(鄭東鉉)의 문하생으로 대성전재임(大成殿齋任)을 지냈다.
침략의 야욕을 드러낸 서양세력에 맞서 대원군을 중심으로 치열한 척화운동이 전개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閔氏)가 시해되고 이어서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인석(柳麟錫)·이강년(李康秊) 등의 의거에 호응하여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제천의 유인석(柳麟錫) 의병진영에 합세하여 활동하였다.
그때는 유인석의 호좌창의진(湖左倡義陣)이 충주성 전투(忠州城戰鬪)에서 패전하여
제천(堤 川)으로 후퇴하여 전열을 재정비할 즈음이었다.
그는 유인석이 만주로 망명하자 문경으로 은거하여 은둔 생활을 하면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국권 회복을 위한 의병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했으나,
때마침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있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907년 8월에 ‘광무황제(고종) 강제 퇴위’ , ‘정미7조약 체결’ , ‘군대 해산’ 등
이를 계기로 봉기가 전국에서 일어났고 이에 의병 활동을 재기, 일부 해산 당한 군인과 손을 잡았다.
뒤이어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은찬(李殷瓚)·이구재(李九載, 본명은 求采)가
해산 군인 80명을 포함한 500명의 의병을 모집한 뒤 그를 찾아와 총대장의 직책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있어 망설였으나
두 사람이 4일을 머무르며 간곡히 사사로써 공사를 미룰 수 있겠느냐는 간곡한 권유를 받아들여
원주로 출진하여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에 오른 뒤 인근의 허위(許蔿)와 협의하여
8도의 의병을 연합할 계획을 세우고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다.
의병 수가 수천 명에 이르자 식량과 자금을 조달하는 게 큰 문제였는데 반역배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이를 충당하였다.
9월에는 서울주재 각국 영사관으로 몰래 사람을 보내 일본의 불의를 성토하고,
의병은 순수한 애국 단체이니 열강은 이를 국제법상의 전쟁 단체로 인정해 적극 도와줄 것을 바란다는
관동창의대장 이름의 격문을 전달하였다.
원주는 교통이 불편해 큰일을 도모할 만한 곳이 못 된다고 판단,
횡성·지평·춘천 등지를 전전하며 의병을 모으는 데 노력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각 도에 격문을 보내 경기도 양주로 모일 것을 촉구했다.
1907년 11월 각도의 의병부대에
‘의병부대를 통일하여 연합의병부대와 통합사령부를 창설하여 서울을 향하여 진군하자’ 는 격문을 발송하고,
경기도 양주(楊州)에 모이도록 호소하였다.
이에 전국에서 약 10,000여 명의 의병이 양주에 모였는데 주력부대는 경기도의 허위(許蔿),
황해도의 권중희(權重熙, 일명 義熙), 충청도의 이강년, 강원도의 민긍호(閔肯鎬), 경상도의 신돌석(申乭石),
전라도의 문태수(文泰洙, 일명 泰鉉), 평안도의 방인관(方仁寬), 함경도의 정봉준(鄭鳳俊) 등이었다.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격문을 보내지 않았는데도 방인관이 평안도에서 80여 명,
정봉준이 함경도에서 70여 명을 거느리고 자진하여 참여하였다.
이 때 양주에 모인 의병 수는 약 1만여 명(또는 8,000명)으로,
그 중에 근대식 무기를 가진 진위대 출신 병사와 기타 훈련받은 군인이 약 3,000명이었다.
이때 의병장들의 연합전략회의 결과 원수부 13도 창의대진소가 조직되었고 이인영이 총대장에 추대되었다.
의병부대는 서로 기일을 정하고 서울 동대문 밖에 모여서 대오를 정비한 뒤
일거에 서울을 공략할 작전계획을 세우고 진격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1908년 1월 28일 뜻밖에도 이인영의 부친이 별세하였다는 부음(訃音)이 전달되었다.
이 중대한 시기에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전해져 문경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장례를 마쳤다.
당시는 부모의 상례(喪禮)가 무엇보다도 중시되던 유교사회였다.
결국 그는 총대장의 직책을 허위에게 맡기고 그 날로 귀향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의병들이 찾아가 재기할 것을 권유했으나
아버지의 3년 상을 마친 뒤 다시 13도의 창의군을 일으켜 권토중래(捲土重來)의 세력으로
일본인을 소탕하겠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3도 창의대진소는 홍범도(함경도)와 김수민(중부 지역), 신돌석(경상도) 등
평민 출신의 의병장이 이끄는 부대들을 연합군 조직에서 제외하였으며,
유교적인 사고에 매몰되어 부친상을 지킨다는 이유로 총대장이 작전 중 부대에서 이탈해 도피하는 등
현대적인 기준으로 볼 때 이인영의 의병 운동에는 봉건적 한계가 뚜렷하다.
그 뒤 노모와 두 아들을 데리고 상주군에 숨어살다가
다시 충청북도 황간(黃澗) 금계동(金溪洞)에서 의병 재기를 모색하던 중
1909년 6월 7일 일본군에게 피체 되었다.
그는 옥중에서도 일본 천황과의 면담을 요구했으나
곧 사형 선고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동년 9월 20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고 독립유공자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또한 천안 독립기념관에 이인영 장군 충혼어록비를 건립하여
장군이 남긴 숭고한 애국정신과 희생정신을 만세에 전하고 있다.
동생 이은영도 건국훈장을 추서 받은 독립 운동가이다.
● 16세 이인정(李仁挺) - 평리 성암공파
1241(고종 29)~?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
문하평리 핵(翮)의 장남이고 검교정승 진(瑱), 대제학 세기(世基)의 장형이며 정승 제현(齊賢)의 큰아버지이다.
호는 성암(誠菴). 일찍이 문과에 등제하여 광주판관(廣州判官)으로 나갔다가
1276년(충렬왕 2) 2월에 전중시어사로 승진했는데,
3월에 왕이 본궐(本闕)에 설치한 장경도장(藏經道場)에 가다가
전후(殿後)에 두견화(杜鵑花)가 만발한 것을 보고 4운(四韻)을 내리어 시를 지으라 하니
공이 민지(閔漬)·백문절(白文節) 등 18 사신(詞臣)과 함께 시를 지어올렸다.
뒤에 정언에 이르렀는데, 여러 낭사(郎舍)와 더불어 말하기를
“근래 내수(內豎)로 있는 미천한 자들이 임금을 수종(隨從)한 공로로 사도(仕途. 벼슬길)가 허용되었는데,
이는 조정의 반열(班列. 위계질서)을 어지럽히는 일이요
역대숭조(歷代崇祖)의 법도를 무너뜨리는 일이니 성명(成命)을 거두시라고 주청해야겠다.”고 하니
왕이 듣고 진노하여 이미 낸 서장(書狀)을 보고자 하여 거두어오라 하였으나
낭사들이 따르지 않으므로 조문주사(詔文主事) 유흥(柳興)을 가두고 공에게는 일을 보지 말라 하였다.
뒤에 어떤 자가 다루가치(達魯花赤)에게 투서하였는데,
공을 비롯한 100여인이 다루가치를 모살하려 한다고 하므로 공 등을 잡아 가두고 목에 칼을 씌웠는데
조사해보니 무고(誣告)이므로 풀어주었다.
공은 성정(性情)이 굴강(倔强)하여 벼슬을 받는 관원(官員)들을 그 공과(功過)를 반드시 따져서
옳지 않으면 비록 왕명이라도 구차하게 고신(告身. 발령장)에 서명하지 않으므로 원망하는 자들이 많았다.
율학조교(律學助敎) 전자공(全子公)이 일찍이 동안(東安) 법조(法曹)로 있을 때 수뢰죄로 파직되었는데
폐신(嬖臣) 염승익(廉承益)에게 뇌물을 바치고 복직(復職)하므로
읍인(邑人) 권문탁(權文卓)이 자공의 죄를 소장(疏狀)에 써서 비서(婢婿. 첩의 사위)인 만상(蠻商)을 시켜서
첨의부기거사인(僉議府起居舍人)인 공에게 고하니 공이 염승익을 만나서 그 잘못을 나무랐다.
그러자 승익이 왕명을 조작하여 문탁을 가두고 입을 막기 위하여 만상을 죽였다.
승익의 권세는 한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 드세었으므로
공이 아니고는 비록 대간(臺諫)이라 하여도 감히 그 죄를 묻지 못하였다.
백문절이 사의대부를 맡았을 무렵에는 무공세루자(無功世累者- 공(功)이 없이 세상에 걱정이나 끼치는 자)들이
많이 보관(補官-관직에 보임됨)되니 낭사들이 고신에 서명하지 않았다.
왕이 누차 독촉했으나 따르지 않으므로 이에 원한을 품은 자가 좌우를 시켜 왕을 격노케 하였다.
왕이 승지 이존비(李尊庇)를 불러 사장(司狀)을 올리라 하니
첨의부장(僉議府狀)이 아닌 감찰사장(監察司狀)을 바치므로 크게 노하여 물리치고
홀치(忽赤. 궁중을 지키는 순위군) 최숭(崔崇)에게 백문절·사의(司議) 김서(金壻)·급사중(給事中)
김지서(金之瑞)·전서(典書) 최수황(崔守璜)·중사랑(中舍郞) 이익배(李益培)·사간(司諫) 이행검(李行儉)·
사간 이인정·정언 정문(鄭文)·장석(張碩) 등을 결박하라 명하였다.
그러자 존비가 변명하려고 왕 앞에 나서므로 왕이 낭사들을 구하려는 줄로 의심하고 꾸짖으며 제지하니
이지저(李之氐)가 나서서 아뢰기를,
“존비가 아뢰고자 한 것은 감찰사장이지 첨의부장은 아닙니다.
상감께서는 낭사들의 죄는 살피지도 않으시고 존비만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첨의부는 백관(百官)의 어른인데 일개 홀치(忽赤)를 시켜서 한 밤중에 모든 낭사(郎舍)들을 결박하였으니
나라의 체통이 어찌되는 것입니까?”
라고 하니 왕이 감찰사장을 가져오라 하여 읽어보고 뉘우쳐 모두 풀어주었다.
이상비(표암학술원정)는 <誠菴·評理의 派名에 관한 고찰>(2004. 9)에서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온 조정의 만조백관이 감히 입을 열지 못하는데 일개 정언(正言)이 분연히 나서서
임금의 잘못을 일깨워주고 또는 불의에 항거하는 대관(臺官)들의 대표가 되어 목숨을 걸고 주청하였으니
비록 직위는 정언(正言)-기거사인(起居舍人)-사간(司諫)에 머물었으나
고려의 공도(公道)를 지킨 오직 하나의 충신이었다.
문하시중을 열 번 한들 무엇에 쓰겠는가.
비정(秕政)에 빌붙어 나라를 그르치고 축재(蓄財)에 혈안이 되어
당대는 무론 후세에까지 추명(醜名)을 남긴 자들이 하나 둘인가.
그러나 공은 영달(榮達)을 마다하고 홀로
‘언관(言官)에 머물러 흔들리는 사직(社稷)을 붙들고 직신(直臣)으로 남고자 하였으니
그 맑고 매운 단충(丹忠)을 뒷사람들이 어찌 본받지 아니할 것인가.”
라고 쓰고 있다.
O. 이인정(李仁挺)
생몰년 미상.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
충숙왕 때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오른 동암공 진(王+眞)의 형이며,
익재 이제현(李齊賢)의 큰아버지이다.
아들은 부(부賻에서 패貝대신 木)와 규(木+취翠에서 졸卒대신 王없는 진珍)로
각각 사인(舍人)·헌납(獻納)에 이르렀다.
1276년(충렬왕 2)에 우정언으로 있으면서
당시 *내수(內竪: 內僚)들이 *친종행리(親從行李)의 공으로
허통(許通- 신분에 따라 일정 이상의 벼슬 승진을 막은 것을 허용함)되어
조정의 반열을 어지럽히는 것을 첨의부(僉議府)의 낭사(郞舍)들과 더불어 간쟁하였는데,
충렬왕이 노하여 듣지 않고 오히려 일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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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內竪) = 內僚, 內侍. 근시近侍 및 숙위宿衛의 일을 맡아보는 벼슬아치.
궁중에서 명령 전달, 심부름 따위의 잡무에 종사하던 벼슬아치를 통틀어 이르던 말. 환관이 대표적이다.
*친종행리(親從行李)
고려 후기 국왕이 원나라에 갈 때 수종한 관료와 졸개 등, 수종했던 사람들에 대한 공신 책봉이 이루어지고
토지와 노비가 지급되고, 특히 내료 등 남반(南班) 7품을 넘지 못하도록 되어 있던 사람들을
그 이상의 벼슬로 승진 시키는 등 허통시키는 특전을 베풀었다.
그래서 국왕이 원나라에 갈 때면 다투어 수종하려는 풍조가 생기기도 하였다
또한, 이때 100여인과 공모하여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죽이려 하였다는 익명의 투서 때문에
다루가치에 의하여 구금되었다가, 무고임이 밝혀져 곧 풀려났다.
*다루가치(達魯花赤)
홍다구 일파로부터 국왕과 원의 공주 및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제거하고
강도(江都)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모함을 받았다.
이에 다루가치는 석말천구(石抹天衢)에게 구금되어 홍다구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뒤 대청도(大靑島)로 귀양갔다가 다시 원에 이송되었다.
그러나 홍다구의 소환을 계기로 충렬왕이 원의 세조에게 다루가치의 무죄를 호소하여 석방되었다.
그뒤 수상인 중찬(中贊)이 되었다
*1278년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에도 능력이나 공로가 없고
오히려 흠이 있는 사람들이 관직에 제수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낭사(郎舍- 중서문하성에 속한 정3품 이하의 벼슬아치를 통틀어 이르던 말)로서
고신(告身-직첩職牒 -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에 서명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의대부(司議大夫) 백문절(白文節)·김서(金서),
전서(典書) 최수황(崔守璜) 등과 함께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광주판관(廣州判官-정7품)을 거쳐 1280년(충렬왕6) 전중시사(殿中侍史-정6품)가 되었으며,
기거사인(起居舍人-종5품)에까지 올랐다.
성품이 강직하여 첨의부의 낭사로서 고신에 서명할 때에는 반드시 공적과 허물을 따졌으므로
원망하는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 호는 성암(誠菴)이고 벼슬은 문하평리(門下評理-문하부에 둔 종2품 벼슬)이다.(족보 기록)
^ *표시는 본문에 없는 사항을 이해를 돕기위하여 설명한 글임.
● 27세 이인하(李仁夏) - 국당공후 정순공파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무신
우의정 완(浣)의 조카. 자는 하숙(夏叔).
효종 초에 현감·도총부경력 등을 거쳐 1654년(효종 5) 어영대장·
1656년 충청도수군절도사·
1660년 황해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과오로 파직되었다.
다시 복직되어 경기도수군절도사를 거쳐
1679년(숙종 5) 삼도수군절도사로 있을 때
덕원에서 거제도로 이배(移配)되던 송시열(宋時烈)을 중도에서 대접한 일로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다.
1680년 송시열이 풀려나자 복직되어
1682년 병조참판·총융사에 이어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삼수에 유배되었다가
1694년 갑술옥사로 풀려나 복직되었다.
● 30세 이인환(李寅煥) - 익재공후 창평공후 생원공파
1633(인조 11)~1699(숙종 25).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문백(文伯), 호는 생곡(生谷). 판서 시발(時發)의 손자이며 경연(慶衍)의 아들이다.
166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검열·정언·수찬 등을 지냈고
1675년(숙종 1) 암행어사가 되었으며
1680년 사간·집의에 이르고
1681년 응교·승지를 거쳐 1684년 대사간이 되었다.
1685년 이이(李珥)의 신원(伸寃)을 상소하기도 했다.
대사성·경기도관찰사·개성부유수를 거쳐
1697년 도승지에 오르고 이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O 30세 이인환(李寅煥)
자 문백(文伯)
호 생곡(生谷)
생년 1633
연령 67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후기
과거 및 취재 [문과] 현종(顯宗) 6년 (1665) 을사(乙巳) 정시(庭試) 병과(丙科) 5위
[생원진사시] 현종(顯宗) 1년 (1660) 경자(庚子)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三等) 8위
1633(인조 11)∼1699(숙종 25).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문백(文伯), 호는 생곡(生谷).
판서 시발(時發)의 손자이며, 경연(慶衍)의 아들이다.
1660년(현종 1) 진사시에 합격하고,
166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합격한 뒤 검열·정언·수찬 등을 지냈다.
지평·부수찬을 거쳐 1675년(숙종 1) 암행어사가 되었으며,
1680년 사간·집의,
1681년 응교·승지, 1684년 대사간이 되었다.
1685년 이이(李珥)의 *신원(伸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대사성·경기도관찰사·개성부유수를 거쳐
1697년 도승지를 역임하고 이조판서에까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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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伸寃)-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림. 억울한 일을 당하여 모든 것을 빼앗겼다가 본디대로 명예를 회복시켜 줌
● 이일로(李逸老) - 합천 이씨
?~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회수(晦叟), 호는 송포(松圃). 일영(逸英)의 아우이다.
1613년(광해군 5)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을 역모로 몰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위리안치한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항소하여 흉당을 공박한 일로 투옥되었고 역모로 몰아 가혹한 국문(鞠問)을 하는데도
자기의 소행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일일이 직고(直告)하여 온갖 고초를 겪고 절도(絶島)에 안치되었다.
15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서 종묘봉사에 배치되었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 강화에 들어갔다가 강화성이 함락되므로 형 일영과 함께 순절하였다.
이때에 형수 이씨(李氏)와 부인 이씨(李氏)도 함께 순절하여 한 집안에서 네 사람이 순국하였다.
1834년(순조 34) 그의 형제에게 지평(持平)이 추서되고
그들의 집이 있던 경상도 칠곡에 정문을 세워서 표창하였다.
O 이일로(李逸老)
자 회수(晦?)
호 송포(松圃)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중기
?∼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회수(晦?), 호는 송포(松圃).
일영(逸英)의 아우이다.
1613년(광해군 5)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을 역모로 몰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한 *계축 옥사가 일어나자 항소하여 흉당을 공격하여 투옥되었다.
역적을 심문하는 *국청(鞠廳)이 개설되자 자기의 소행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일일이 *직고(直告)하여 *절도(絶島)에 안치되어 10년 동안 고초를 겪었다.
15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종묘봉사(宗廟奉事)에 배수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에 들어갔는데, 강화성이 함락되자 형 일영과 함께 순국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형수 이씨(李氏), 부인 조씨(趙氏)도 순절하여 한집에서 네 사람이 순국하였다.
1834년(순조 34) 그의 형제에게 *지평이 증직되고, 그들이 살고 있던 경상도 칠곡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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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
*계축 옥사(癸丑獄事)- 계축화옥(癸丑禍獄)이라고도 한다.
1613년(광해군 5) 사색당파(四色黨派) 중의 하나인 대북파(大北派)가 일으킨 옥사(獄事).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는 선조의
적자(嫡子)이며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구실로 소북파(小北派)의 우두머리이며
당시의 영의정인 유영경(柳永慶)을 사사(賜死)하는 등 소북파를 모조리 몰아내었다.
*흉당(凶黨)- 흉악한 역적(逆賊)의 무리
*국청(鞠廳)- 역적 등의 중죄인을 신문하기 위하여 설치하던 임시 관아.
*직고(直告)- 바른대로 고하여 알림
*절도(絶島)- 절해고도(絶海孤島). 내왕이 별로 없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
*종묘봉사(宗廟奉事)-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왕실의 사당의 종8품 벼슬.
*지평(持平)- 고려 후기 사헌부의 정5품 관직.
지평의 직무는 정치 시비에 대한 언론활동, 백관에 대한 규찰과 탄핵, 풍속 교정, 억울한 일을 풀어주는 일 등을 하였다
*정문(旌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집 문 앞이나 마을 입구에 세우는 문.
작설(綽楔) ·홍문(紅門) ·생정문(生旌門)이라고도 한다. 붉은 색으로 단장하며 편액에는 충 ·효 ·열 ·직함 ·성명 등을 새긴다.
조정에서는 매년 연초에 이와 같은 사람들을 조사하여 왕에게 알리고 정문을 세워주는 한편
복호(復戶:戶役 ·軍役 등을 면제하는 일)의 혜택을 주고 쌀과 의복을 주는 등 특전을 베풀었다.
● 이일범(李一凡)
1917~1973. 광복군. 일명 경태(敬泰)
1935년 6월 신사참배반대시위사건으로 잡혀 병보석 중에 북경으로 탈출하여
회잉전수학교(華英專修學校)를 거쳐 1939년 난징(南京) 국립중앙대학에 들어갔다.
여기서 송지영(宋志英)·조일문(趙一文)·이정선(李正善) 등 10여명의 학우(學友)를 만나
항일비밀결사인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와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결성하고
그 회장과 대장을 맡아 임무를 수행했다.
1940년 2월 난징 거주 교포인 정윤관(鄭允官)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아 각지의 대원에게 분배하고
그해 7월 7일 난징에서 일본인이 출입하는 음식점에 시한폭탄을 장치하여 일본인 5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1943년 6월 난징에서 지하공작을 전개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6개월여를 감옥에서 옥고를 치루었고
그해 10월 충칭(重慶)에 가 있는 이정선으로부터 제2지대 3구대 3분대 난징지하공작특파원의 소속증명과
상위(上尉) 임명장을 받았으며
1945년 3월 이후 대일 광파(廣播) 선전대에서 선전공작을 담당하고 있다가 조국광복을 맞았다.
해방 후 교포의 재산관리와 안전귀환에 주력하다가 1946년 3월 귀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포장․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O 이일범(李一凡)
기타 인명 이경태(李敬泰)
생년 1917
연령 57
활동분야 항일 / 국방 / 광복군
1917∼1973. 광복군. 일명 경태(敬泰).
1935년 6월 신사 참배 반대 시위사건으로 잡혀 병보석 중 국내를 탈출하여
북경의 화잉 전수학교(華英專修學校)를 거쳐
1939년 9월 난징(南京) 국립 중앙대학에 진학하였다.
학우인 송지영(宋志英)·조일문(趙一文)·이정선(李正善) 등 10여명과 함께
항일비밀결사인 한족 동맹회(韓族同盟會) 및 한국 청년 전지 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조직하고
회장과 공작대장을 맡아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0년 2월 난징 거주 교포인 정윤관(鄭允官)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아 각지의 공작대원에게 분배, 전달하였고,
그 해 7월 7일 난징에서 일본인 출입 음식점에 시한폭탄을 장치하여 일본인 5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1943년 6월 난징에서 지하공작을 전개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6개월 여를 감옥에서 고생하였다.
그 해 10월 충칭(重慶)에 가 있는 이정선으로부터 제2지대 3구대 3분대 난징지하공작 특파원의 소속증명과
상위(上尉)임명장을 받았다.
1945년 3월 이후 대일 광파(廣播) 선전대에서 대일 선전 공작을 담당하고 있다가 조국광복을 맞았다.
교포 재산관리 및 안전 귀환에 주력하다가 1946년 3월 귀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주어지고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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