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경주이씨 인물(조-집)

녹전 이이록 2009. 4. 1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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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이씨 인물(조-집)

 

 

● 17세 조(초두아래+脩) - 사인공파 대파시조


대파(大派)인 사인공파(舍人公派)의 파조(派祖)이다.

 

세계(世系)는 15세 열헌공(휘 핵)→ 16세 3남 송암공(휘 세기)→ 17세 4남 사인공 조 이다.

 

벼슬은 사인(舍人-내사문하성의 종4품 벼슬. 문종 때 중서사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이다.

 

사인공(舍人公-휘 조)은 일찍이 학덕(學德)으로 존경을 받았으나 강직고절(剛直高節)한 성품으로 인하여

화를 입고 강화(江華)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곽산(郭山-평안북도정주定州)으로 배소(配所-귀양살이하던 곳)를 옮겼다.

 

이성계가 혁명을 일으켜 신하된 도리를 저버리고 조선을 개국(開國)하자, * 두문동(杜門洞)에 우거(寓居)하며

조선왕실의 입조(入朝-조정에 들어가는 것) 권유를 끝내 뿌리쳤다.

 

이름을 훤(초두 밑에 宣)으로 고치었다.

 

* 휘가 '초두 아래에 脩'인데 옥편에는 '수' ,  '조' 두 가지로 읽고 있다.

 

대종보에는 '조'라고 읽고 판윤공파보에는 '수'라고 읽고 있다.

 

두문동(杜門洞) 청절사(淸節祠)에 배향(配享)된 절신(節臣-절개가 곧은 신하) 20인 중 한 분이다.

 

8세손 촌림, 춘우 형제분 또한 병자호란(丙子胡亂) 중에 순절(殉節)한 하늘이 내린 충절(忠節)의 가문(家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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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인공 할아버지는 두문동 72인의 명단에는 휘가 보이지 않으나 석탄공(휘 존오) 할아버지의 휘는 기록되어 있다.

 

* 두문동(杜門洞) - 황해북도 개풍군 광덕산(光德山) 서쪽 기슭에 있는 옛 지명이다.

해방 전에는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에 속하였다.

1392(태조 1)년 이성계(李成桂)가 혁명을 일으켜 조선을 건국하자 이를 반대하던 고려의 유신(遺臣) 신규(申珪) · 신혼(申琿) · 신우(申瑀) · 신순 · 조의생(曺義生) · 임선미(林先味) · 이경(李瓊) · 맹호성(孟好誠) · 고천상(高天祥) · 서중보(徐仲輔) 등 72인이 망국의 한을 달래지 못하고 고려에 대한 충성과 지조를 지켜 조선의 녹을 먹지 않으려고 개성을 떠나 동남방 부조현(不朝峴)에 고려 때 입던 조복(朝服)을 벗어놓고 산 속으로 들어가 살았다.

그들은 뒷날 정조 때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모셨으며, 후세에 이를 추모하여 위국순절(爲國殉節)의 귀감으로 칭송하게 되었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의 어원이 되었다.

 

 


● 19세 존사(存斯) - 교감공파 대파시조


부(父)는 승봉랑(承奉郞) 사재감승(司宰監承) 길상(吉祥)이고

모(母)는 온양 방씨(溫陽方氏) 판도판서 대제학겸 지춘추관사(判圖判書大提學兼知春秋館事) 서(曙)의 따님으로

공(公)은 네 형제 중 4남(四男)이다.

 

석탄공(石灘公- 휘 존오存吾)가 형으로 공은 대파 교감공파 파조이다.

 

병진(丙辰. 1376. 우왕 2년)년에 정총방(鄭摠榜)에 등제(登第)하였다.

 

벼슬은 교감(校勘- 종9품 벼슬)이다

 

배는 안동 김씨(安東金氏) 상락군(上洛君) 앙(昻)의 따님으로 두 아들인

위사공신(衛社功臣) 공조판서(工曹判書) 양(良)과 판윤(判尹) 원(垣) 그리고 1녀(李淪. 仁川人)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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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감(校勘)- 경서 및 외교 문서를 조사하고 교정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

보문각 전교시에 속한 종9품 벼슬.

*대종보 총편에는 판윤공 원(垣)의 휘가 없으나 판윤공파보에는 판윤공 원의 휘가 양(良)의 차자(次子)로 올라있다.

*판윤공파보에는 판서공(判書公) 양(良)과 판윤공(判尹公) 원(垣)에 대하여 고찰한 후

정오(正誤- 잘못된 글자나 문구를 바로잡음)하여 바르게 올린 내용을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O. 구보(舊譜)를 삼가 상고(詳考)하여 보건대 공(公)의 (파보)아래 난에

바로 환(環), 연(璉), 원(垣)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제 시랑공파(侍郞公派-10세 춘림春林)를 고찰해 본다.

순묘(純廟) 무자보(戊子譜)에 가로되 종가(宗家)의 오래된 가승보(家乘譜)를 고찰하면

공(公)에게 아들 양(良)이 있고 양(良)의 아들에 환(環-한성부 참군)과 연(璉-봉사)이 있으되 원(垣)이 없다.

*정임(丁任-정씨와 임씨) 양씨(兩氏)의 가장성보(家藏姓譜-집에 간직한 족보)에도 역시 이와 같으므로

*정오(正誤)하였다고 되어 있으니 * 구보(舊譜)에 한 대(一代)가 빠져 있음이 확실하므로

이에 파보(派譜)를 바르게 하니 따르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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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임(丁任) 양씨- 판서공(判書公) 양(良)의 아들 참군공 환과 봉사공 연의 처가 쪽 성씨인지 족보에는 기록이 없다.

* 정오(正誤)하였다- 이름이 빠진 판윤공 원(垣)은 판서공 양(良)의 아들이 아니고

동생으로 즉 교감공(校勘公-휘 존사)의 차자(次子)임으로 바르게 족보에 올린다는 내용이다.

* 구보(舊譜)에 한대(一代)가 빠져- 1대는 1세로 여기서는 형인 양(良)이 있어

계대(系代)에는 빠짐이 없으나 차자(次子-둘째 아들)인 판윤공 원(垣)이 빠져 이를 바르게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같다

 

 

● 19세 이존오(李存吾) - 석탄공파 대파시조


자 순경(順卿)

호 석탄(石灘)/고산(孤山)

생년 1341

연령 31

활동분야 문신/관료 / 문신-고려 / 문신


1341(충혜왕 복위 2)∼1371(공민왕 20). 고려 후기의 문신. 자는 순경(順卿), 호는 석탄(石灘)·고산(孤山)이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 수원서기(水原書記)를 거쳐 사관(史官)에 발탁되었다.

 

1366년 우정언이 되어 신돈(辛旽)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으나,

이색(李穡) 등의 옹호로 극형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

 

그뒤 공주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울분 속에 지내다가 죽었다.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신돈의 전횡을 풍자한 시조 1수를 비롯, 3수의 시조가 《청구영언》에 전한다.

 

성균관대사성에 추증되었으며, 여주 고산서원(孤山書院), 부여 의열사(義烈祠), 무장 충현사(忠賢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석탄집》 2권이 있다.


O 석탄공

 

1341(충혜왕 복위 2)~1371(공민왕 20)

석탄공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힘써 10여세에 12도(徒)에서 공부하고

20세에 문과에 급제, 사한(史翰)으로 있을 때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이숭인(李崇仁) 등과 학문을 토론했으며

정언에 이르렀을 때에 신돈(辛旽)이 집권하여 횡포를 일삼는데

누구도 감히 나서서 신돈의 방자와 음탕을 나무라지 못하였다.

 

때에 공이 분연히 나서서 왕에게 글을 올려 신돈을 쳐죽여야 한다고 탄핵의 글을 올렸다가

도리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매우 위급했었는데 이색(李穡) 등의 힘으로 극형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고 후에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율분으로 죽었다.

 

뒤에 왕이 공의 충성을 깨닫고 성균관대사성을 추증했다.


○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


석탄공(石灘公)은 중조 19세로 석탄공파(石灘公派)의 파조(派祖)이시다.

 

세계(世系)는 중조 9세 문하시중공(門下侍中公) 총섬(寵暹)의 차자(次子)인

문하시랑공(門下侍郞公) 춘림(春林)의 세계(世系)로 내려오고

중조 18세에 사재감승공(司宰監承公) 길상(吉祥)의 네 아들 양오, 존오, 존중, 존사 중 둘째이다.

 

어머니는 온양 방씨(溫陽方氏)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서(曙)의 따님이다.

 

고려 충혜왕(忠惠王) 2년 신사(辛巳 1341)년에 태어나고 공민왕(恭愍王) 20년 신해(辛亥 1371)년에 돌아가셨다.

 

자는 순경(順卿)이며, 호는 석탄(石灘)이라 한다.

 

선생은 용모가 단정하고 재주가 뛰어나며 성격이 곧고 지조가 강한 분으로 어려서부터 배움을 좋아하였다.

 

어려서 여주에 우거(寓居)하고 일찍이 부친(父親)을 여의고 가정은 가난하여 고학으로 학문을 닦았다.

 

나이 열 살 때에는 '강장(江 +張)' 한시(漢詩)를 지어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가장 젊은 나이로 당시 유명한 학자 정몽주. 박상충. 이숭인. 정도전. 김구용. 김제안 선생들과 친교가 두텁고

학문이 장하여 여러 차례 강론을 거듭하여 세상 사람들은 선생의 학문이 탁월함을 높이 평가하였다 한다.

 

공은 나이 20세인 1360년 공민왕 9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수원서기를 거쳐 사한(史翰)에 보직되고 승진하여 감찰규정(監察糾正)에 오르며,

서기 1366년 공민왕 15년 25세 때에는 사간원(司諫院) 우정언(右正言)에 올랐다.

 

그러나 공민왕은 옥천사에 사는 중 신돈(辛旽)을 가장 높은 벼슬에 기용하였다.

 

신돈은 왕에게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고 독재로 정치를 제멋대로 행하였다.

 

그 후 갖은 학정을 다하여 세상은 어지럽고 나라는 점차 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신돈의 횡포와 세도에 눌려서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공(公)만이 일신의 생사를 돌보지 않고 26세의 귀중한 생명을 초개와 같이 여겨 죽음을 각오하고

정추(鄭樞)와 더불어 신돈은 요물이라 나라를 망치니 그냥 두어서는 아니 됨으로 이를 당장에 파면하고

그의 일당을 모조리 엄중히 처단하라는 강경한 상소를 올렸다.

 

그 상소를 받아 본 공민왕은 대노하고 상소문(上疏文)을 다 보지도 않은 채 불사르고 공(公)을 극형에 처하려고

즉시 문책하기에 이르렀다.

 

공(公)은 왕이 불러서 대궐에 들어가 보니

신돈은 여전히 신하로서 예절을 무시하고 오만하게 왕과 같이 앉아 친구처럼 대화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선생은 의분심에 노기가 충천하여 왕 앞에서 당당하게

 

"이 늙은 중놈아! 어찌 이 같은 망령된 일을 하느냐!"하고 호통을 쳤다.

 

신돈은 그 순간 놀라서 겁을 먹고 왕과 같이 앉은자리에서 내려앉을 것도 잊은 채 정신 없이 고개를 돌렸다 한다.

 

왕은 곧 선생을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왕이 신하에게 말하기를

 

"이존오(李存吾)의 눈매가 몹시 무섭다."고 하였다 한다.

 

왕은 공을 극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한산 이씨(韓山李氏) 이목은(李牧隱)선생께서 극구 변론하기를

 

"고려 나라는 창건한지 500년이 넘어도 한 사람도 간관(諫官)을 죽인 일은 없다.

만일 죽이면 왕의 악평이 나라 안에 퍼지리라." 하였다.

 

왕은 할 수 없이 선생을 장사감무(長沙監務)라는 벼슬에 좌천시켰다.

 

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선생을 진정 나라의 정언(正言)이라 칭송하였다.

 

그 후 선생은 왕이 끝까지 신돈을 파면하지 않고,

여전히 정계에서 포악한 정치를 계속하여 나라는 날로 쇠퇴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유리방황(遊離彷徨)하니 심히 개탄한 나머지 용감하게 퇴관(退官)하고

지금의 부여읍 저석리에 내려와 은거 생활을 하였다.

 

선생은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의연한 자세로 신돈의 포악한 정치를 준엄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마침내 원통하고 울분하여 병이 났다.

 

병은 날로 더욱 심하여 위독한데, 하루는 선생이 묻기를

 

"근자에도 신돈의 세력은 여전하냐?" 하니 곁에 있던 사람들이 "과연 그렇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선생은 노기 띤 어조로

 

"신돈이가 죽어야 내가 죽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다시 자리에 편안하게 눕기도 전에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났다.

 

이 때 선생의 나이 31세이다.

 

공이 돌아가신 후 넉 달만에 신돈은 갖은 음탕과 포악한 정치를 계속하고

나중에는 왕에게 반역하려 하다가 공민왕이 이를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그 후 나라에서는 선생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여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을 추증(追贈)하였다.

 

공(公)의 아들 내(來)가 열 살이었을 때 공민왕(恭愍王)이 친필로

 "간신(諫臣-직언을 서슴지 않고 간언하는 신하)의 아들 안국"

이라 크게 써서 장차직장(掌車直長)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한다.

 

공은 천하에 드문 수재로서 국민의 두터운 신망을 한 몸에 안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은 채 당당하게 싸우며 끝까지 절개를 지켰으니 몸은 가셨으나

이름은 천추(千秋)에 빛나리니 후세의 귀감이 되기에 넉넉하다.

 

학문(學文)과 경륜(徑輪)을 펴보지 못한 아까운 나이 서른 하나!

 

고려사(高麗史)를 읽던 조선조 숙종(肅宗)대왕은 석탄사적(石灘史蹟)을 보고 감동하여

 

"공의 늠연한 충절(忠節)은 죽음에 이르러서까지 빛났으며

그 높은 명망(名望)은 반천년간(半千年間)에 뉘라서 당할손가!"

라고 찬탄하였다.

 

조선 인조조(仁祖朝)에 충신(忠臣) 정문(旌門)이 내렸고 네 곳 사원에 배향(配享)되었다.

 

선생은 여주(驪州)의 고산서원(孤山書院), 부여의 의열사(義烈祠), 무장(茂長)의 충현사(忠顯祠),

공주의 공암서원 (孔岩書院)에 모시어 고이 잠들었다.

 

선생의 시 한 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구름이 무심하단 말이 아마도 허황하다.

중천에 떠 있어 임의 다니면서

구태여 광명한 날빛을 따라가며 덮나니"


 

 ● 19세 존중(存中) - 진사공파 대파시조


부(父)는 승봉랑(承奉郞) 사재감승(司宰監承) 길상(吉祥)이고

모(母)는 온양 방씨(溫陽方氏) 판도판서 대제학겸 지춘추관사(判圖判書大提學兼知春秋館事) 서(曙)의 따님으로

공(公)은 네 형제 중 3남(三男)이다.

 

석탄공(石灘公- 휘 존오存吾)이 형이다.

 

진사공파 파조이다.

 

족보에는 [進士] 라는 기록외 아무런 기록이 없다.

 

계자(系子-양자. 生父는 존오) 채를 두었다.


 

● 30세 이종백(李宗白) - 상서공후 백사공파


1699(숙종 25)~1759(영조 35).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태소(太素), 호는 목천(牧川). 관찰사 형좌(衡佐)의 아들이다.

 

1721년(경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설서·교리·부수찬·헌납·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1737년 대사간·승지를 거쳐 이듬해 대사성에 오르고 광주부윤으로 나갔으며

1939년 대사헌이 되었다.

 

1749년 평안도관찰사가 되고 1751년 이조참판· 1752년 함경도관찰사·호조참판에 이르고

1754년 형조판서가 된 뒤에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에

내의원 제조 · 공조판서 · 호조판서 ·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756년 경기감사에 이어 다시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 30세 이종성(李宗城) - 상서공후 백사공파


1692(숙종 18)에 태어나고 1759(영조 35)에 졸(卒)하였다.

 

조선시대 영조 때의 문신으로 자는 자고(子固), 호는 오천(梧川)이다.

 

항복(恒福)의 5세손으로, 좌의정 태좌(台佐)의 아들이다.

 

1711년(숙종 37)진사가 되고,

 

1727년(영조 3)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3일 만에 예문관설서가 되었다.

 

1728년 경연(經筵)의 전경(典經)으로 시독관 박문수(朴文秀)와 함께 붕당 200년의 폐를 논하였으며,

그 해 경상도암행어사가 되어 민폐를 일소하였으며,

이인좌(李麟佐)의 출가한 자매가 문경에 갇혀 있음을 보고 그 부당함을 상소하여 석방하게 하였다.

 

그 뒤 부수찬·헌납·수찬·교리 등을 거쳐

 

1729년 불법 수령 적발의 사명을 띠고 다시 영남어사로 파견되었고,

함경남도에 이어 북도안집어사(北道按集御史)로 다녀와 응교가 되었다.

 

1731년 관서어사로 파견되어 양덕현감 남윤관(南胤寬)을 파직시키고,

개천군수 홍태평(洪泰平), 맹산현감 이희하(李喜夏), 황주목사 이성제(李誠제)에게 포상할 것을 상소하였다.

 

1733년 승지·대사간·이조참의를 거쳐 대사성이 되었고,

 

1734년 홍문관부제학이 되어 양역(良役)의 폐를 상소하였다.

 

1735년 다시 이조참의가 되어 용전(用錢)의 편리함을 논하고,

 

1736년 탕평책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경기도관찰사·동지의금부사가 되었다.

 

1738년 이조참판, 1741년 부사직, 1742년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744년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이어서 예조판서·형조판서·대사헌·개성부유수,

 

1749년 지돈녕(知敦寧)·우빈객(右賓客)을 역임하고

 

1752년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세자의 처벌에 적극적이었던 김상로(金尙魯) 등의 간계로 영의정을 사직하였다.

 

1753년 판중추부사, 1757년 내의원봉상시도제조(內醫院奉常寺都提調)가 되었다.

 

이때 인원대비(仁元大妃:숙종계비 김씨)의 상을 당하여

의례의구조(疑禮儀九條)와 종묘 혼전(魂殿)의 예의칠조를 올려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1758년 영중추부사가 되어 장헌세자(莊獻世子)를 잘 보살폈다.

 

장조(莊祖)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저서로는《오천집》이 있다.

 

시호는 효강(孝剛), 후에 문충(文忠)으로 개시(改諡)되었다.


○ 이종성(李宗城) 


생몰(生沒)년은 1692(숙종 18)∼1759(영조 35)이다.

 

조선시대 영조(英祖) 때의 문신으로 자는 자고(子固)이고 호는 오천(梧川)이며

백사공(백사공-항복恒福)의 5세손으로 좌의정(左議政) 태좌(台佐)의 아들이다.

 

1711년(숙종 37) 진사(進士)가 되고,

 

1727년(영조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3일 만에 *예문관 설서(藝文館說書)가 되었다.

 

이듬해 경연(經筵)의 전경(典經)으로 시독관 박문수(朴文秀)와 함께 붕당 200년의 폐를 논하였으며

그 해 경상도암행어사가 되어 민폐를 일소하였다.

 

이인좌(李麟佐-이인좌의 난)의 출가한 자매가 문경에 갇혀 있음을 보고 그 부당함을 상소하여 석방하게 하였다.

 

그 뒤 부수찬 · 헌납 · 수찬 · 교리 등을 거쳐

1729년 불법 수령 적발의 사명을 띠고 다시 영남 어사(嶺南御使)로 파견되었고,

함경남도에 이어 북도안집어사(北道按集御史)로 다녀와 응교가 되었다.

 

1731년 관서 어사(關西御使)로 파견되어 양덕현감 남윤관(南胤寬)을 파직시키고,

개천군수 홍태평(洪泰平), 맹산현감 이희하(李喜夏), 황주목사 이성제(李誠?)에게 포상할 것을 상소하였다.

 

1733년 승지·대사간·이조참의를 거쳐 대사성(大司成)이 되었고,

이듬해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이 되어 *양역(良役)의 폐단(弊端)를 상소하였다.

 

1735년 다시 이조참의가 되어 용전(用錢-돈을 씀)의 편리함을 논하고,

이듬해 탕평책(蕩平策)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경기도관찰사·동지의금부사가 되었다.

 

1738년 이조참판, 1741년 부사직, 1742년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744년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이어서 예조판서·형조판서·대사헌·개성부유수,

 

1749년 지돈녕(知敦寧)·우빈객(右賓客)을 역임하고 1752년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세자의 처벌에 적극적이었던 김상로(金尙魯) 등의 간계로 영의정을 사직하였다.

 

당쟁(黨爭)의 골이 깊어만 가던 영조조(英祖朝).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간신배들은 왕위를 이을 사도세자까지 모함하여 죽이려 들었는데,

때 영조의 진노를 무릅쓰고 인륜의 도리를 극간했던 이가 오천공 이었다.

 

1753년 판중추부사, 1757년 내의원봉상시도제조(內醫院奉常寺都提調)가 되었다.

 

이때 인원대비(仁元大妃:숙종계비 김씨)의 상을 당하여

의례의구조(疑禮儀九條)와 종묘 혼전(魂殿)의 예의칠조를 올려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1758년 영중추부사가 되어 장헌세자(莊獻世子)를 잘 보살폈다.

 

사도세자가 참소 후에는 후환을 없애려는 간신배들의 끈질긴 계략에 맞서

훗날 정조로 등극한 사도세자의 아들 세손을 끝까지 보호하였다.

 

나라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 충간하는 절의와 정적관계에 있는 사람에게도 도움을 아끼지 않는

공평무사한 처신으로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서도 당파를 초월하여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

 

장조(莊祖)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고 저서로는 《오천집(梧川集)》이 있다.

 

시호는 효강(孝剛)이었으나 후에 문충(文忠)으로 개시(改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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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문관 설서(藝文館說書)- 세자에게 경사(經史)와 도의(道義)를 가르친 정7품관이다.

태조 때 설치한 세자시강원의 관원으로 처음에는 좌정자(左正字) · 우정자(右正字) 각 1명씩 모두 2명이었으나

1466년. 세조 12년 설서(說書)로 이름을 고치고 정원도 1명으로 줄었다.

영조 때 겸설서(兼說書) 1명을 더 증원하였다.

*양역(良役)- 군역. 군무(軍務)에 종사하는 것은 양인만이 부담하였기 때문에 양역(良役)이라고 함.

 

○ 이종성(李宗城) 


자 자고(子固)

호 오천(梧川)

시호 효강(孝剛)

생년 1692

연령 68

활동분야 문신 / 관료 / 조선후기

과거 및 취재 [문과] 영조(英祖) 3년 (1727) 정미(丁未)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6위

[생원진사시] 숙종(肅宗) 37년 (171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1등(一等) 2위


1692(숙종 18)∼1759(영조 35). 조선시대 영조 때의 문신.

 

자는 자고(子固), 호는 오천(梧川).

 

항복(恒福)의 5세손으로, 좌의정 태좌(台佐)의 아들이다.

 

1711년(숙종 37) 진사가 되고,

 

1727년(영조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3일만에 *예문관 *설서가 되었다.

 

이듬해 *경연(經筵)의 *전경(典經)으로 *시독관 *박문수(朴文秀)와 함께 *붕당 200년의 폐를 논하였으며,

그 해 경상도 암행어사가 되어 *민폐를 일소하였으며,

 

*이인좌(李麟佐)의 *출가한 자매가 문경에 갇혀 있음을 보고 그 부당함을 상소하여 석방하게 하였다.

 

그 뒤 *부수찬·*헌납·*수찬·*교리 등을 거쳐

 

1729년 불법 수령 적발의 사명을 띠고 다시 영남 어사로 파견되었고,

함경남도에 이어 *북도안집어사(北道按集御史)로 다녀와 *응교가 되었다.

 

1731년 *관서 어사로 파견되어 양덕 현감 남윤관(南胤寬)을 파직시키고,

 

개천 군수 홍태평(洪泰平), 맹산 현감 이희하(李喜夏), 황주 목사 이성제(李誠?)에게 포상할 것을 상소하였다.

 

1733년 승지·대사간·이조참의를 거쳐 대사성이 되었고,

 

이듬해 홍문관 부제학이 되어 *양역(良役)의 폐를 상소하였다.

 

1735년 다시 이조 참의가 되어 *용전(用錢)의 편리함을 논하고,

 

이듬해 *탕평책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경기도 관찰사·동지의금 부사가 되었다.

 

1738년 이조참판, 1741년 부사직, 1742년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744년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이어서 예조판서·형조판서·대사헌·*개성부 유수,

 

1749년 *지돈령(知敦寧)·*우빈객(右賓客)을 역임하고

 

1752년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세자의 처벌에 적극적이었던 김상로(金尙魯) 등의 간계로 영의정을 사직하였다.

 

1753년 판중추부사,

 

1757년 *내의원 *봉상시 *도제조(內醫院奉常寺都提調)가 되었다.

 

이때 인원대비(仁元大妃: 숙종 계비 김씨)의 상을 당하여 의례의 9조(疑禮儀九條)와

종묘 혼전(魂殿)의 예의 7조(禮儀7條)를 올려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1758년 영중추 부사가 되어 *장헌 세자(莊獻世子)를 잘 보살폈다.

 

*장조(莊祖)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저서로는《오천집》이 있다.

 

시호는 효강(孝剛), 후에 문충(文忠)으로 개시(改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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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광문과- 즉위(卽位-왕위에 오름) 경축(慶祝)이나 왕위 등극 삼십년 경축(三十年登極慶)과 같은

큰 경사가 있거나 작은 경사가 여러 개 겹쳤을 때 연 과거 시험.

*예문관- 칙령(勅令)과 교명(敎命)을 기록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개국 초 고려의 관제에 따라 예문춘추관으로 합쳐졌던 것을 1401년(태종 1) 춘추관을 분리하여 예문관으로 개편하였다.

*설서- 조선시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관직. 세자에게 경사(經史)와 도의(道義)를 가르친 정7품관이다.

 

*경연(經筵)- 임금이 학문을 닦기 위하여 학식과 덕망이 높은 신하를 불러

경서(經書) 및 왕도(王道)에 관하여 강론하게 하던 일. 또는 그런 자리.

왕권의 행사를 규제하는 중요한 일을 수행하였다. ≒경악(經幄)·경유(經?).

*전경(典經)- 경연청에 속하여 서책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정6품 벼슬

*시독관- 경연청(經筵廳)에서 임금에게 경서(經書)를 강의한 관직으로

홍문관의 5품관인 교리(校理) · 부교리(副校理)가 겸직하였다.

 

*박문수(朴文秀)- 조선 영조 때의 문신(1691~1756).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훌륭한 어사로 알려졌으며, 후에 호조 판서로 있으면서 균역법을 만드는 데 힘썼다.

*붕당 200년의 폐를 논하였으며- 박문수와 같이 당파의 폐해를 논하여 올린 상소,

*민폐를 일소하였으며- 어사로 나가 관리들이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해를 일체 없앰.

*이인좌(李麟佐)- 생몰년은 ? ~ 1728년(영조 4)이고 본관은 광주 이씨 이다.

^전주 이씨 '임영대군파' 라는 설도 있다.


○ '이인좌의 난'.

 

영조가 즉위하자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에 위협을 느낀 과격 소론 측은

갑술환국 이후 정계에서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하여 영조와 노론의 제거를 계획했다.

이에 이인좌는 정희량(鄭希亮) · 이유익(李有翼) · 박필현(朴弼顯) · 심유현(沈維賢) 등과 공모하여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추대하고 무력으로 정권을 쟁탈하고자 하였다.

스스로를 대원수라 칭한 이인좌는 1728년 3월 15일 상여에 무기를 싣고 청주에 진입하여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 군관 홍림(洪霖) 등을 살해하고 청주를 장악하였다.

서울로 북상하여 목천 · 청안 · 진천을 거쳐 안성 · 죽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안성 · 죽산전투에서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이 이끄는 관군에게 패하자 추격을 피해

산사에 숨었다가 신길만(申吉萬) 등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 해 3월 26일 친국에서 역모 사실을 진술하고 이튿날 대역죄로 능지처참되었다.

 

 

*이인좌의 출가한 자매가 문경에 갇혀 있음을 보고 그 부당함을 상소하여 석방하게 하였다.

-이인좌의 난에 이인좌가 능지처참되자 이인좌의 출가한 두 딸이 문경 옥에 갇혀 있음을 알고

출가한 딸이 아버지의 대역죄로 벌을 받음은 옳지 못함을 상소하여 풀러나게 하였다.

*북도안집어사(北道按集御史)- 함경북도 백성들의 민심을 살피고 그들을 어루만지며 편안하게 해주기 위한 어사.

*관서- 함경남북도와 황해도

 

*^양역(良役)의 폐를 상소하였다. - 조선시대에 16~60세의 양인 장정이 지던 국역(國役)에 대하여 여러 가지 폐단이 많아 이의 폐해에 대하여 상소를 하였다.

^양역- 국가가 일정한 연령에 해당하는 양인에게서 노동력을 직접 수취하는 일종의 부세(賦稅)로서 군역의 대표적인 형태이다.

조선 초기의 군역제는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의 원칙 아래 16~60세에 이르는 모든 양인 남자를 호수(戶首: 正軍)와 보인(保人: 奉足)으로 이루어진 군호(軍戶)로 편성하여 역부담의 기초 단위로 운영했다.

여기서 정군은 현역 입역하는 자이고, 보인은 정군을 재정적으로 보조하는 자였다.

이렇게 군호가 편성되어 운영된 까닭은 군사가 의무를 수행하는 동안 필요한 경비를 국가가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 각자가 스스로 마련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 전기의 의무병종(義務兵種)으로는 정병(正兵)과 수군(水軍)이 있는데, 정병은 육군으로서 국방의 주력을 이루고 있었다.

 

*용전(用錢)의 편리함을 논하고- 공물을 쌀 같은 현물로 내는 것보다는 돈을 사용하면 편리하다는 주장을 펴고 *탕평책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고- 붕당에 의한 당파 싸움의 폐단을 없애기 위한 정책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고 *개성부 유수- 조선시대에 고려의 수도(首都)였던 개성(開城)을 관장한 관청.

개성부의 관리는 외관이 아니라 경관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향리(鄕吏)가 없었으며 서울의 4부 학당을 본떠 동몽훈도(童蒙訓導)를 두었다.

《경국대전》에는 개성부의 관원에 종2품의 유수(留守), 종4품의 경력, 종5품의 도사, 종6품의 교수(敎授), 종9품의 분교관(分敎官), 종9품의 검률(檢律) 등이 있다고 하였다.

 

*지돈령(知敦寧)-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돈령부(敦寧府) 등에 속한 종2품 관직.

*우빈객(右賓客)- 세자시강원에 속한 정2품 문관 벼슬.

*내의원(內醫院)- 궁중의 의약(醫藥)을 맡은 관청으로 내국(內局)이라고도 한다.

*봉상시(奉常寺)- 제사(祭祀)와 시호(諡號)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도제조(都提調)- 승문원, 봉상시, 사역원, 훈련도감 따위의 으뜸 벼슬.

정승이 겸임하거나 정승을 지낸 사람을 임명하였으나, 실무를 보지는 않았다. ≒도상(都相).

 

*장헌 세자(莊獻世子)- 장조(莊祖, 1735년 - 1762년)는 조선 제21대 영조의 제2자이며 호는 의재(毅齋)이고 자는 윤관(允寬)이며 휘는 선(?)이다.

사도세자(思悼世子)나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되었다.

*장조(莊祖)의 ^묘정에 배향- 영중추 부사가 되어 장헌 세자(莊獻世子)를 잘 보살핀 공로가 있어 장조의 묘정에 신주를 모시고 제향을 모셨다.

^묘정 배향(廟廷配享)- 공로 있는 신하가 죽은 뒤에 종묘 제사에 부제(示+付祭)하던 일.

임금이 죽으면 종묘에 신주를 모시고 선왕들과 합사(合祀)하였는데, 이때 그 임금의 생전에 공로가 특히 많은 신하가 임금보다 뒤에 죽으면 선왕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부제(示+付祭)- 함께 제사를 모심


○ 이종성(李宗城)


1692(숙종 18)~1759(영조 35). 조선 영조 때의 문신

 

자는 자고(子固), 호는 오천(梧川). 명상 항복(恒福)의 5세손으로 좌의정 태좌(台佐)의 아들이다.

 

1711년(숙종 37) 진사가 되고 1727년(영조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3일만에 예문관설서가 되었다.

 

이듬해 경연(經筵)의 전경(典經)으로 박문수(朴文秀)와 함께 붕당(朋黨) 200년의 폐단을 논의했고,

그해 경상도암행어사가 되어 민폐를 근절했으며

이인좌(李麟佐)의 출가한 자매가 문경에 갇혀있는 것을 상주(上奏)하여 풀어주었다.

 

그 뒤 부수찬·헌납·수찬·교리를 거쳐 1729년 다시 영남어사로 나갔고

함경남도와 북도안집어사(北道按集御使)로 다녀와서 응교에 올랐다.

 

1731년 관서어사로 파견되어 양덕현감 남윤관(南胤寬)을 파직하고

개천군수 홍태평(洪泰平)·맹산현감 이희하(李喜夏)·황주목사 이성제(李誠躋)에게 포상할 것을 상소하였다.

 

1733년 승지·대사간·이조참의를 거쳐 대사성이 되었고,

1734년 홍문관 부제학이 되어 양역(良役)의 폐단을 상소하였다.

 

1735년 다시 이조참의가 되어 용전(用錢)의 편리함을 논하고

이듬해 탕평책(蕩平策)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었으나

기용되어 경기도관찰사·동지의금부사,

1738년 이조참판·1741년 부사·이듬해 충청도관찰사·

1744년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이어서 예조판서·형조판서·대사헌·개성부유수·

1749년 지돈녕부사·우빈객을 역임하고

1752년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나,

얼마 뒤에 세자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는 김상로(金尙魯) 등의 간계로 사직하였다.

 

1753년 판중추부사․1757년 내의원봉상시도제조가 되었는데,

마침 인원대비(仁元大妃)의 상을 당하니 의례의(疑禮儀) 9조와 종묘 혼전(魂殿)의 예의 7조를 올려 시행토록 하였다.

 

1758년 영중추부사가 되어 장헌세자(莊獻世子)를 잘 보살폈으며

졸후(卒後)에 장조(莊祖)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오천집(梧川集)≫이 있다.

시호는 효강(孝剛)이었으나 뒤에 문충(文忠)으로 개시(改諡)되었다.

 

 

 

● 30세 이종악(李宗岳) - 상서공후 백사공파


1668년(현종 9년)에 태어나고 1732년(영조 8년)에 돌아갔다.

 

항복의 5세손이며 좌찬성 오릉군 문우(鰲陵君 文佑)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이문좌이며 좌의정 경일이 아들이다,

 

증직으로 영의정이다.

 

* 설명에 '입향공(立鄕公)'이라고 호칭했다. 

 

 

● 22세 이종윤(李從允) - 국당공후 문정공파


1431(세종 13)~1490(성종 21).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가정(可貞), 호는 송와(松窩). 현감 형(衡)의 아들이다.

 

1462년(세조 8)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468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빈시경력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직언으로 인하여 장기에 귀양 갔다가

1472년 풀려서 내자시주부·예조좌랑·정랑이 되었다.

 

1482년 헌납이 되고 장령·봉상시부정·시강원보덕을 거쳐

1489년 집의에 올랐다.

 

1490년 제주목사로 나갔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그는 강직한 성격으로 직언과 충간을 사명으로 하였고

간신의 처벌, 궁중 불사(佛事)의 저지, 환관들의 농간, 내수사의 장리행위(長利行爲)를 탄핵하였다.

 

모현사(慕賢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 ≪송와문집(松窩文集)≫ 4권이 있다.  


○ 22세 이종윤(李從允) 


자 가정(可貞)

호 송와(松窩)

생년 1431

연령 60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전기

 

1431(세종 13)∼1490(성종 21).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가정(可貞), 호는 송와(松窩).

 

아버지는 현감 형(衡)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직장 명리(明利)의 딸이다.

 

1462년(세조 8)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였고,

 

1468년 문과에 급제하여 영창전 참봉(永昌殿參奉)을 거쳐 예빈시 경력(禮賓寺經歷)이 되었다.

 

1470년(성종 1)직언으로 인하여 장기에 귀양갔다가, 2년 뒤인 1472년에 풀려나

 

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 예조 좌랑·정랑이 되었다.

 

1482년 헌납에 제수되고, 이어서 장령·제용감 첨정(濟用監僉正)·봉상시 부정(奉常寺副正)·

 

사옹원 부정(司饔院副正)·시강원 보덕을 거쳐 1489년에 다시 사헌부 장령·집의에 올랐다.

 

1490년 제주목사로 나갔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그는 직언과 충간을 사명으로 생각하여 조정간신의 처벌, 궁중불사(宮中佛事)의 저지에 힘썼으며,

환관들의 농간을 막고, 내수사의 장리행위(長利行爲) 등을 탄핵하였다.

 

모현사(慕賢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 《송와문집》 4권이 있다.


 

● 20세 찬성공(贊成公) 종인(種仁) - 익재공후 밀직공파


참판공(參判公) 휘 반(蟠)의 장자(長子)이다.

 

벼슬은 참판(參判-종2품)으로 증직은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종1품)이다.

 

^ 배는 교하 노씨(交河盧氏) 좌의정(左議政) 한(閑)의 따님으로 청(聽) 문(聞) 영(聆) 세 아들과 3녀를 두었다.


 

 ● 30세 이종적(李宗迪)  - 상서공후 백사공파


1710(숙종 36)~1748(영조 24).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순(子順), 호는 송계(松溪).

 

명상 항복(恒福)의 5대손으로 정좌(鼎佐)의 아들이다.

 

일찍이 경사(經史)에 통하고 문장이 우아하고 세련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1736년(영조 12)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다음해 예문관 검열이 되고 세자시강원설서를 겸하였고

1740년 승문원교리·홍문관수찬·세자시강원문학을 겸하였으며

1744년 상주목사·대사간·승정원승지·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대과에 급제한 다음날 영조를 배행하여 문묘에 다녀 온 뒤

임금의 언행 수만언(數萬言)을 기록하여 올리니 그의 사재(史才- 사관이 될 만한 재능)를 인정 받았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론에는 따르지 않았다. 


○ 30세 이종적(李宗迪)


자 자순(子順)

호 송계(松溪)

생년 1710

연령 39

활동분야 문신 / 관료 / 조선후기

과거 및 취재 [문과] 영조(英祖) 12년 (1736) 병진(丙辰) 정시2(庭試) 을과(乙科) 2위

[생원진사시] 영조(英祖) 9년 (1733) 계축(癸丑)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65위

[생원진사시] 영조(英祖) 9년 (1733) 계축(癸丑)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1등(一等) 1[장원(壯元)]위


1710(숙종 36)∼1748(영조 24).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순(子順), 호는 송계(松溪).

 

이항복(李恒福)의 5대손으로, 정좌(鼎佐)의 아들이다.

 

일찍이 *경사(經史)에 통하고, 문장이 세련되고 우아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1736년(영조 12)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예문관 *검열이 되어 세자 *시강원 *설서를 겸직,

 

1740년 후 *승문원 *교리·*홍문관 *수찬으로 세자 시강원 *문학을 겸직하였다.

 

1744년 상주 *목사, 이어 *대사간·*승정원 *승지·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대과 급제 다음날 영조를 따라 *문묘에 *배행하여 임금의 *언행 *수만언(數萬言)을 기록하여

그의 *사재(史才)를 인정받게 되었다.

 

영조의 탕평론에는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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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經史)- 중국 고전인 경서(經書)와 사기(史記).

*정시문과(廷試文科)- 조정에서 임금이 참석한 가운데 행하던 과거(科擧)시험 중 문과시험.

*예문관 藝文館 - 조선시대에는 칙령(勅令)과 교명(敎命)을 기록하는 일을 맡아보았으며,

개국 초 고려의 관제에 따라 예문춘추관으로 합쳐졌던 것을

1401년(태종 1) 춘추관을 분리하여 예문관으로 개편하였다.

 

*검열- 예문관의 정9품 벼슬.

봉교(奉敎:정7품) ·대교(待敎:정8품) 각 2명, 검열(정9품) 4명을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춘추관의 기사관(記事官)을 겸하고 전문적으로 춘추관의 일을 전담하여

이들을 사관(史官), 또는 한림(翰林)이라고 하였다.

봉교 이하 8명의 사관들은 번을 갈라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와 함께 궁중에서 숙직하고,

조회(朝會)·조참(朝參)·상참(常參)· 수대(輸對) 등 정례행사는 물론,

백관회의(百官會議) 기타 모든 중대회의에 참석하여 희의록을 기록,

사초(史草)를 작성하고 시정기(時政記)를 편찬하여 실록편찬(實錄編纂)의 자료로 삼았다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 왕세자의 교육을 맡아보던 관아. ≒갑관·춘방(春坊).

*설서(說書)- 조선시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관직.

세자에게 경사(經史)와 도의(道義)를 가르친 정7품관이다.

태조 때 설치한 세자시강원의 관원으로 처음에는 좌정자(左正字)·우정자(右正字) 각 1명씩 모두 2명이었으나,

1466년(세조 12) 설서로 이름을 고치고 정원도 1명으로 줄었다.

영조 때 겸설서(兼說書) 1명을 더 증원하였다.

 

*승문원(承文院)- 조선시대에 외교문서를 담당한 관청.

괴원(槐院)이라고도 하며, 성균관 ·교서원(校書院)과 합칭하여 삼관(三館)이라고 하였다.

사대(事大:중국)와 교린(交隣:일본 ·여진)문서를 관장하고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에 쓰이는 이문(吏文)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경국대전》에 이르러 이를 다시 바꾸어 정원 3명의 도제조(都提調:3議政이 겸임),

정원이 없는 제조(2품 이상이 겸임)와 부제조(당상관이 겸임),

그리고 판교(判校:정3품) ·참교(參校:종3품) ·교감(校勘:종4품) 각 1명, 교리(종5품) ·검교(檢校:정6품) ·

박사(정7품) ·저작(著作:정8품) ·정자(正字:정9품) ·부정자(종9품) 각 2명을 두었다.

또 이문을 배우는 이문습독관 20명을 두고 교육하였으며,

뒤에 제술관(製述官) 2명, 이문학관 3명, 사자관(寫字官) 40명을 두었다.

 

*교리- 승문원의 종5품 벼슬

*홍문관(弘文館)- 조선 시대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와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는 일을 관장하던 관서.

사헌부·사간원과 더불어 삼사(三司)라 하였다.

옥당(玉堂)·옥서(玉署)·영각(瀛閣)·서서원(瑞書院)·청연각(淸燕閣)이라고도 하였다.

*수찬(修撰)- 조선 시대에, 홍문관에 둔 정6품 벼슬.

*문학(文學)- 조선 시대에, 세자시강원에 속하여 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던 정5품 벼슬.

 

*목사(牧使)- 조선 시대에, 관찰사의 밑에서 지방의 목(牧)을 다스리던 정3품 외직 문관.

병권(兵權)도 함께 가졌다. ≒목관(牧官)·목백(牧伯).

*대사간(大司諫)- 조선시대 간쟁 ·논박을 맡았던 사간원(司諫院)의 으뜸벼슬.

정3품으로 정원 1명을 두었다.

1402년 문하부(門下府)가 의정부(議政府)로 흡수될 때 사간원이 독립되면서 둔 것으로,

처음에는 좌·우간의대부(左右諫議大夫) 각 1명, 좌 ·우사의(左右司議) 각 1명을 두었다가

뒤에 대사간 1명, 사간(종3품) 1명 등을 두었다.

연산군은 대사간 등 간관의 간언을 듣기 싫어하여 사간원을 폐지하고,

이 벼슬을 없애기도 하였으나 중종반정 뒤 옛 제도로 복귀하였다.

 

*승정원(承政院)- 조선시대 국왕의 비서기관

의정부·육조·사헌부·사간원과 함께 조선의 중추적인 정치기구이며 왕명의 출납(出納)을 맡아보았으며

정원(政院)· 후원(喉院)·은대(銀臺)·대언사(代言司)라고도 불리었다

1433년(세종 15) 지신사를 도승지로, 대언을 승지로 고쳐 승정원 제도를 완비하여 육조의 업무를 분담하였다.

즉 도승지는 이조, 좌승지는 호조, 우승지는 예조, 좌부승지는 병조, 우부승지는 형조,

동부승지는 공조를 맡았으며 이를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의 6방이라 하였다.

육방의 승지는 모두 정3품 당상관(堂上官)으로 임명하였고

당후관으로는 정7품 주서(注書) 1명을 두어 일기(日記) 등 기록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중기 이후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정7품) 1명을 더 두었다.

 

*승지(承旨)- 이방·호방·예방·병방·형방·공방의 육방의 승지. 정3품 당상관(堂上官)

*대사성(大司成)- 조선시대 성균관의 으뜸 벼슬인 정3품의 당상관직.

유학과 문묘의 관리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다.

법제상 전임직(專任職)이었지만 겸직하는 예가 많았는데,

정3품관이 아닌 상위(上位)의 1·2품 관원이 겸직하는 예도 있었다.

순조 때 폐지되었다.

 

*문묘(文廟)- 공자를 모신 사당.

원래 선사묘(先師廟)라고 하였다가 중국 명나라 성조 때 문묘(文廟) 또는 성묘(聖廟)라고 하였으며,

청나라 이후 공자묘(孔子廟)라 하였다.

중국 산둥성(山東省) 취푸(曲阜)에 있는 것이 가장 크고 유명하다.

우리나라에는 성균관과 향교에 있는데 곳에 따라 사성(四聖), 공자의 제자, 역대의 거유(巨儒) 및 신라 이후의 우리나라의 큰선비들을 함께 모신 곳도 있다.

≒근궁·성당(聖堂)·성묘(聖廟)

 

*사재(史才)- 사관(史官)이 될 만한

*배행(陪行)- 윗사람을 모시고 따라 감. 떠나는 사람을 일정한 곳까지 따라 감.

*언행(言行)- 말과 행동을 아울러 이르는 말

*수만언(數萬言)- 수많은 말. 주고 받은 대화.


○ 송계공(松溪公) 휘 종적(宗迪)


생몰일은 경인(庚寅-1710. 숙종 36)∼1748(영조 24)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순(子順), 호는 송계(松溪)이며 이항복(李恒福)의 5대손으로 정좌(鼎佐)의 아들이다.

 

일찍이 경사(經史)에 통하고 문장이 세련되고 우아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1736년(영조 12)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737년 예문관검열이 되어 세자시강원설서를 겸직

 

1740년 후 승문원교리·홍문관수찬으로 세자시강원문학을 겸직하였다.

 

1744년 상주목사, 이어 대사간·승정원승지·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746년(영조 22)에 백사공 이항복의 사당에 승지로 있는 이종적(李宗迪)을 보내 영당(影堂)에 제사를 올렸다

 

대과 급제 다음날 영조를 따라 문묘에 배행하여 임금의 언행 수만언(數萬言)을 기록하여

그의 사재(史才)를 인정받게 되었다.

 

영조의 '탕평론'에는 따르지 않았다.

 

* 가족사항

 

부(父) 이정좌(李鼎佐)

조부(祖父) 이세필(李世弼)

증조부(曾祖父) 이시술(李時術)

외조부(外祖父) 박신부(朴信阜)

처부(妻父) 홍계유(洪啓裕)

숙(叔) 이태좌(李台佐)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733(계축) 생원시/진사시

전력(前歷) 진사(進士)

관직(官職) 대사성&(大司成&), 옥당&(玉堂&)


 

● 27세 이종준(李宗準) - 월성군파


?~1499(연산군 5).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중균(仲鈞), 호는 용재(慵齋)·용헌(慵軒)·부휴자(浮休子) 상우당(尙友堂)·태정일민(太庭逸民)·장육거사(藏六居士).

 

대사헌 승직(繩直)의 손자이며 홍준(弘準)의 형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에 1등 3인으로 급제하였으며

의성현령으로 나가서 경상도지도를 만들었다.

 

1493년 사헌부지평이되고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공은 풍료로도 이름이 있어 일본호송관, 북평사 등의 직책을 맡았고 의정부사인에 이르렀다.

 

1498년(연산군 4)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서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가는 도중에 단천군 마곡령을 지나다가,

옛날 송나라 이사중(李師中)이 바른 말을 하다가 귀양가는 당개(唐介)를 송별하면서

지은 시 한 수를 써놓고 갔는데,

함경도관찰사 이승건(李承健)이 이는 나라를 비방하고 왕을 기롱한 것이라고 조정에 고하니

연산군은 그가 원망하는 뜻을 가졌다 하여 서울로 압송하고 국문 도중에 죽었다.

 

홍귀달(洪貴達)이 그를 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부제학으로 추증되고 안동의 경광서원(鏡光書院)·백록리사(栢麓里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용재유고≫가 있다.

 

시·서·화에 능하였고 그림은 매(梅)·죽(竹)을 잘 했다고 하나 전하지 않고

현재 장식화풍으로 그려진 <송학도(松鶴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점이 그의 유일한 유작으로 전하고 있다.  


○ 27세 이종준(李宗準)


자 중균(仲鈞). 호 용재(용齋). 용헌(?軒). 부휴자(浮休子). 상우당(尙友堂). 태정일민(太庭逸民). 장육거사(藏六居士)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전기 / 학자

 

?∼1499(연산군 5).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안동출신. 대사헌 승직(繩直)의 손자이며, 홍준(弘準)의 형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85년(성종 16) 별시 문과에 1등 3인으로 급제하였고,

 

의성 현령으로 있으면서 〈경상도지도〉를 만들었다.

 

1493년에 사헌부 지평이 되었으며,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그는 풍류로 명성이 있어 일본 호송관 또는 북평사(北評事) 등의 직책에 임명되었고, 의정부 사인에 이르렀다.

 

1498년(연산군 4)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서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가는 도중에 단천군 마곡역을 지나다가,

송나라 이사중(李師中)이 바른말을 하다 귀양가는 당개(唐介)를 송별하면서 지은 시 한 수를 써놓고 갔는데,

함경도관찰사 이승건(李承健)이 이는 나라를 비방하고 왕을 기롱(譏弄)한 것이라고 조정에 고하였다.

 

마침내 연산군은 그가 원망하는 뜻을 가졌다 하여 서울로 압송, 국문 도중 죽었다.

 

홍귀달(洪貴達)이 그를 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부제학으로 추증되었고, 안동의 경광서원(鏡光書院)·백록리사(栢麓里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용재유고》가 있다.

 

시·서·화에 능하였고, 그림은 매(梅)·죽(竹)을 잘 그렸다고 하나 전하는 유작은 없다.

 

현재 장식화풍으로 그려진 〈송학도 松鶴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1점이 그의 전칭작품으로 전하고 있다.


○ 용재공(용齋公) 휘 종준(宗準)


생몰년은 ?∼1499(연산군 5)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자는 중균(仲鈞)이며 호는 용재(용齋), 용헌(용軒), 부휴자(浮休子), 상우당(尙友堂), 태정일민(太庭逸民)·

장육거사(藏六居士) 등.

 

안동출신으로 대사헌 승직(繩直)의 손자이며 홍준(弘準)의 형으로 아버지의 휘는 시민(時敏)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77(丁酉)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고

 

1485년(성종 16) 별시 문과에 갑과(甲科)로 장원하였고, 의성 현령(義城縣令)으로 있으면서

 

〈경상도지도(慶尙道地圖)〉를 만들었다

 

당대의 명유(名儒)인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과 함께 학문(學文)과 도덕(道德)의 교우(交友)가 되었다.

 

1493년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으며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을 지냈던 공(公)의 시와 글씨는 당대 으뜸이라 중국사람들 조차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그는 풍류(風流)로 명성이 있어 일본 호송관 또는 북평사(北評事) 등의 직책에 임명되었고

 

1492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고 곧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에 이르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몰려서 함경도 부령(富寧)으로 귀양을 갔다.

 

귀양가는 도중에 단천(端川) 마곡역(磨谷驛)에 이르러 벽에다

송나라 이사중(李師中)이 바른말을 하다 귀양가는 당개(唐介)를 송별하면서 지은 시 한 수를 써놓고 갔는데

함경도관찰사 이승건(李承健)이 이는 나라를 비방하고 왕을 기롱(譏弄)한 것이라고 조정에 고하였다.

 

연산군은 그가 원망하는 뜻을 가졌다 하여 서울로 압송하여 국문(鞠問) 도중에 죽었다.

 

*홍귀달(洪貴達)이 그를 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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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독서(賜暇讀書)- 신하에게 1년 정도 휴가를 줘서 호당에서 독서를 하게 하는 것.

인재들이 받았던 특별한 휴가였다

*홍귀달(洪貴達)- 본관은 부계(缶溪)이고 자는 겸선(兼善), 호는 허백당(虛白堂)·함허정(涵虛亭)이다.

1460년(세조 6) 강릉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공이 있고.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의 폐출(廢黜)에 반대하다가 투옥되었다.

《세조실록》편찬에 참여. 《국조오례의주 國朝五禮儀註》를 개정. 《속국조보감 續國朝寶鑑》·《역대명감 歷代名鑑》을 편찬.

1504년 손녀(彦國의 딸)를 궁중에 들이라는 왕명을 거역하여 장형(杖刑)을 받고 경원으로 유배 도중 교살(絞殺)되었다.

중종반정 후 신원(伸寃)되었고 함창의 임호서원(臨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허백정문집 虛白亭文集》이 있고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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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반정 후 사화에 연루된 선비들이 신원되었으나 복관되지 않다가

용재공의 절개를 추앙한 안동 선비들이 조정에 주청하여 숙종조에 마침내 신원되었다.

 

부제학(副提學)을 증직 받고 안동(安東)의 경광서원(鏡光書院)· 백록리사(栢麓里祠)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용재유고》가 있다.

 

시문(詩文)과 서화(書畵)에 모두 능했으며 그림은 매(梅)·죽(竹)을 잘 그렸다고 하나 전하는 유작은 없다.

 

현재 장식화풍으로 그려진〈송학도 松鶴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1점이 그의 전칭작품으로 전하고 있다.

 

경북 안동시 서호면 금계리에 위치한 경광서원,

이곳에는 높은 학덕과 절개로 안동유림의 추앙을 받는 용재공 종준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 20세 판서공(判書公) 종지(種地) - 익재공후 밀직공파


참판공(參判公) 반(蟠)의 차자(次子)이다.

 

초휘는 지(地)이며 자는 신부(信夫)이고 호는 인헌(忍軒)이다.

 

영락(永樂-太宗) 병술년(丙戌年. 1406)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禮曹判書-정2품)에 이르렀다.

 

경태(景泰-端宗) 갑술년(甲戌年. 1454)에 이성(利城-利原)에 유배되었다가

계미년(癸未年. 1463 세조)에 유배지에서 돌아가셨다.

 

이듬해인 갑신년(甲申年)에 신원(伸寃-억울하게 뒤집어 쓴 죄를 씻음)되었다.

 

증직은 좌찬성(左贊成-종1품)이고 시호는 청숙(淸肅)이다.

 

홍허(洪虛) 백귀달(白貴達)이 행장(行狀-죽은 사람의 일생)을 찬(撰-훌륭한 행적을 기리는 글)하였다.

 

^ 배는 정안 김씨(廷安金氏) 정산군(廷山君) 효성(孝城)의 따님으로 성경(晟慶)을 두었다.


 

● 이종태(李鍾泰)


1850(철종 1)~? 서예가

자는 공래(公來), 호는 소농(筱農).

조선 선조 때의 사자관이었던 이해룡(李海龍)의 10대손으로 벼슬은 부경이었다.

대대로 붓글씨를 가업으로 하였으며 덕수궁의 대한문(大漢門)의 액서(額書)가 그의 필적이다.


○ 소농공(소農公) 이종태(李鍾泰)


자 공래(公來)

호 소농(소農)

생년 1850

활동분야 예술 / 서예가

과거 및 취재 [역과] 고종(高宗) 11년 (1874) 갑술(甲戌) 증광시(增廣試) 8위


1850(철종 1)∼? 서예가. 자는 공래(公來), 호는 소농(소農).

 

조선 선조 때의 *사자관이었던 이해룡(李海龍)의 10대손으로, 벼슬은 *부경(副卿)을 지냈다.

 

집안이 대대로 글씨를 가업으로 하였으며, 덕수궁 대한문(大漢門)의 *액서(額書)가 그의 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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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관(寫字官)- 조선시대 승문원·규장각에 소속된 관원의 하나.

^사대교린문서(事大交隣文書) · ^자문(咨文) · ^어첩(御牒) · ^어제(御製) · ^어람(御覽) 등의

문서를 정서(正書)하던 관원이다.

정원은 규장각에 8명, 승문원에 40명이 있었는데, 외국사행에도 수행하였다.

이들은 해마다 1 · 4 · 7 · 10월에 승문원의 제조(提調)가 행하는 시험에 응시하여

우수한 사람은 ^녹관(祿官)에 임명되었다.

특히 사대교린문서를 관장하여 사대문서 · 부본(副本)들을 서사(書寫)하여야 하는

승문원의 서사관들에게는 수령을 거치지 않고 4품 이상계로 ^승천(陞遷)될 수 있는 특전을 주었다.

 

사대교린문서(事大交隣文書)- 조선시대의 외교정책에 대한 문서.

사대는 중국, 교린은 왜국(倭國) 및 여진(女眞)에 대한 외교정책으로,

세력이 강하고 큰 나라는 받들어 섬기고(事大) 이웃나라와는 대등한 입장에서 사귀어(交隣)

국가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외교방침 등에 대한 문서.

 

^자문(咨文)- 조선 시대에, 중국과 외교적인 교섭· 통보· 조회할 일이 있을 때에 주고받던 공식적인 외교 문서

^어첩(御牒)- 예전에, 왕실(王室) 계보(系譜)의 대강을 간추려서 적은 책을 이르던 말.

^어제(御製)- 임금이 몸소 짓거나 만듦. 또는 그런 글이나 물건

^어람(御覽)- 임금이 문서를 살펴보는 것을 높여 이르던 말.

≒상람(上覽)·신람(宸覽)·천람(天覽).

^녹관(祿官)- 현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녹봉을 받던 벼슬아치.

^승천(陞遷)- 승직(昇職. 陞職)- 직위가 오름. 직위를 올림. ≒승임(陞任)·승천(陞遷).

 

*부경(副卿)- 대한 제국 때에, 내장원·시종원·장례원·태의원의 종2품 벼슬.

*액서(額書)- 현판에 쓰는 큰 글자


 

● 35세 이주영


1837(헌종 3)~1917.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순경(舜敬), 군수 유헌(裕憲)의 아들이다.

 

1874년(고종 11) 증광시에 급제하고 부교리․부수찬을 거쳐 의정부겸문공사관이 되었다.

 

그 뒤 동부승지를 거쳐 1877년 대사성· 병조참의로 승진했으나 1884년 갑신정변 후에 은거하였다.

 

1890년 동자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894년 일본의 내정개혁 강요가 있자 고종이 대경장을 표방하면서 그를 대사헌으로 임명했다.

 

광무연간에 장례원귀족사장·시강원첨사·궁내부특진관·태의원경 등을 역임하고

한일합방 때에 남작(男爵)을 받았다.


○ 이주영(李胄榮)


자 순경(舜敬)

생년 1837

연령 81

활동분야 문신 / 관료 / 조선후기


1837(헌종 3)∼1917.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순경(舜敬).

 

군수 유헌(裕憲)의 아들로, 어머니는 풍양 조씨(豊壤趙氏)이다.

 

1874년(고종 11) 5월 증광시에 급제한 뒤 부교리·부수찬을 거쳐,

 

그 해 8월 *의정부 겸 *문공사관(議政府兼文公事官)에 이르렀다.

 

그 뒤 동부승지를 거쳐

 

1877년 대사성·병조참의로 빠르게 승진하였으나

 

1884년 갑신정변 후 은거하였다.

 

1890년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894년 동학혁명 후 일본의 내정개혁 강요가 있자

고종은 기강을 세우고 *대경장(大更張)을 하겠다면서 그를 대사헌으로 임명하였다.

 

그때 *교정청 당상도 겸임하였다.

 

광무연간에 장례원 *귀족사장(掌禮院貴族司長)·시강원 *첨사·*궁내부 *특진관·*태의원 경(太醫院卿) 등

궁내부 *아문의 장을 역임하였다.

 

1910년 *조선 귀족령으로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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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議政府)- 대한제국의 정치·행정을 담당한 최고 관청

칙임관: 의정(議政), 참정(參政), 찬정(贊政), 참찬(參贊), 총무국장(總務局長)

주임관: 비서관(秘書官), 참서관(參書官)

판임관: 주사(主事)

 

*문공사관(文公事官)- 대한제국 관직표에 나와 있지 않음.

문화 예술과 산업, 언론, 관광, 체육, 종교 분야의 정책 수립과 그 집행을 관장하는 정부 부처의 관직인 것 같다.

*대경장(大更張)- 제도를 크게 고쳐서 새롭게 함. 흔히 갑오개혁을 이른다.

*교정청(校正廳)- 조선시대 서적 편찬시 교정·보완을 위해 설치하였던 임시기구.

1470년(성종 1) 경국대전을 최종검토하기 위하여 처음 설치되었다.

1482년 다시 감교청(勘校廳)을 설치하고

1485년 완결판을 간행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현재 전하는 《경국대전》이다.

 

*귀족사장(貴族司長)- 고종 32년(1895) 4월 2일 궁내부 관제를 개정할 때

장례원(掌禮院)으로 개칭하고 경(卿) 1인(칙임)· 장례(掌禮) 3인(주임)·주사 8인을 두고,

그 밑에 봉상시(奉常寺)·제능사(諸陵司)·종정사(宗正司)·귀족사(貴族司)를 두었다.

귀족의 일을 관장하였다.

*첨사(詹事)- 조선 후기와 대한 제국 때에, 왕태자궁·왕태자 시강원·황태자 시강원에 둔 칙임관

 

*궁내부(宮內部)- 조선 후기 왕실 부속기관을 통할하던 관청.

1894년(고종 31) 7월 갑오개혁을 단행한 조정은 근세왕조 최초의 칙령 제1호로

건국 초기 이래 500년을 이어온 통치기구를 개혁,

서정(庶政)을 총괄하는 의정부와 왕실사무를 총괄하는 궁내부로 2원화 하여 궁내부 대신을

의정부 총리대신 다음의 서열로 정하였다.

궁내부에는 대신·협판(協辦:차관) 각 1명, 참의(參議)·주사(主事) 각 3명, 위원 5명을 두고,

승선원(承宣院)을 비롯한 원(院)· 각(閣)· 사(司) 등 15개 부속기관을 관장하였다.

그러나 궁내부는 이듬해의 을미개혁(乙未改革)에 따라 다시 기구를 개편,

내사과(內事課)· 외사과(外事課)· 대신관방(大臣官房)과 특진관(特進官:勅任官) 16명 등을 두고,

왕태후궁(王太后宮)을 비롯한 각 궁(宮)· 서(署) 및 시종원(侍從院)· 비서감(秘書監)·

규장원(奎章院)· 회계원(會計院)· 내장원(內藏院)· 제용원(濟用院)과 18개 사(司)를 관장하였다.

 

*특진관(特進官)- 대한 제국 때에, 궁내부에 속하여 왕실에 관한 일을 보좌하던 칙임(勅任) 벼슬.

고종 32년(1895)에 설치하였다.

*태의원(太醫院)- 1902년(광무 6) 설치하였으며, 관원으로는 도제조(都提調:勅任官) 1명, 경(卿:勅任官) 1명,

소경(少卿:奏任官) 1명, 전의(典醫:奏任官) 4명, 전의보(典醫補:判任官) 4명, 주사(主事:判任官) 3명을 두었다.

*아문(衙門)의 장- 관원들이 정무를 보는 곳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그의 우두머리이다.

 

*조선 귀족령(朝鮮貴族令)- 1910년 황실령 제14호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대한제국 병합)를 당하여 일본의 화족(華族-

지체가 높은 사람이나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집안이나 자손들)에 해당하는 조선귀족을 만들었다.

조선 귀족은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순응하거나 동조한 자들로 구성되었다.

조선귀족은 1910년 10월 7일 조선총독부 관저에서 후작 6인, 백작 3인, 자작 22인, 남작 45인 총 76명으로 구성되었다.

초기에 구성된 조선귀족은 황족이나 의친(懿親)을 후작으로, 이완용 등 사람은 후작,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자작, 이전에 대신을 지낸 자는 남작을 받았다.

조선 귀족령은 자격 요건으로서 왕공가의 근친 및 그 외척, 그 밖의 친임관, 고등관 1등 이상

정3품 이상으로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구한국의 명문대가라 하더라도 이 조건에 해당되지 않으면 수작하지 않았다.

1910년 당시의 조선귀족은 후작은 이재완(李載完), 이재각(李載覺), 이해창(李海昌), 이해승(李海昇),

윤택영(尹澤榮), 박영호(朴泳孝) 등이며, 백작은 이지용(李址鎔), 민영린(閔泳璘), 이용완(李完用),

자작은 이완용(李完鎔), 이기용(李埼鎔), 박제순(朴齊純), 고영희(高永喜), 조중웅(趙重應), 민병석(閔丙奭),

이용직(李容稙), 김윤식(金允植), 조중현(權重顯), 이하영(李夏榮), 이근택(李根澤), 송병준(宋秉畯),

임선준(任善準), 이재곤(李載崑), 윤덕영(尹德榮), 조민희(趙民熙), 이병무(李秉武), 이근명(李根命),

민영규(閔泳奎), 민영소(閔泳韶), 민영휘(閔泳徽), 김성근(金聲根)이며,

남작은 윤용구(尹用求), 김석진(金奭鎭), 한창수(韓昌洙), 이근상(李根湘), 조희연(趙羲淵), 박제빈(朴齊斌),

성기운(成岐運), 김춘희(金春熙), 조동희(趙同熙), 박기양(朴箕陽), 김사준(金思濬), 장석주(張錫周),

민상호(閔商鎬), 조동윤(趙東潤), 최석민(崔錫敏), 한규설(韓圭?), 남정철(南廷哲), 이건하(李乾夏),

이용태(李容泰), 민영기(閔泳綺), 이종건(李鍾健), 이봉의(李鳳儀), 윤웅렬(尹雄烈), 이근호(李根澔),

김가진(金嘉鎭), 정낙용(鄭洛鎔), 민종묵(閔種默), 이재극(李載克), 이윤용(李允用), 이정로(李正魯),

김영철(金永哲), 이용원(李容元), 김종한(金宗漢), 조정구(趙鼎九), 김학진(金鶴鎭), 박용대(朴容大),

김사철(金思轍), 김병익(金炳翊), 이주영(李胄榮), 정한조(鄭漢朝), 민형식(閔炯植), 홍순형(洪淳馨),

유길준(兪吉濬), 민영달(閔泳達), 조경호(趙慶鎬) 등이다.

이들 조선귀족 중에는 한일 의정서와 을사 보호조약 체결의 책임자로 이지용과 각료 가운데

‘을사오적’(이지용, 이근택, 이재극, 이완용, 권중현)의 5인과

한일신협약 및 합방조약 체결의 책임자 이완용과 각료(박제순, 임선준, 고영희, 이병무, 조중응, 이재곤, 송병준),

그리고 합방 당시 궁중에서 마무리 작업을 한 민병석, 윤덕영 등이 제1급 친일파이다.

그 중에서도 양 조약의 책임자인 이지용과 이완용은 특히 백작을 수여 받았다.

그러나 을사조약에 반대해서 쫓겨난 한규설, 조정구, 김석진, 민영달, 조경호, 홍순형, 유길준 등도

귀족명단에 포함되었지만 수작을 거부했다.

 

*남작(男爵. baron)- 귀족(貴族)의 작위(爵位)인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 등 5위계(位階) 중에서

제일 하급인 작호(爵號).

작위의 근원은 프랑스라고 하지만,

작위가 확실히 결정된 것은 11세기 영국에서 듀크(duke;公) · 마키스(marquis;侯) · 얼(earl;伯) ·

바이카운트(viscount;子)·배런(baron;男) 등의 작위를 정식으로 수여하게 되었을 때이다.

그런데 영국의 귀족 중 50% 이상이 남작의 작위를 가졌다고 하며 프랑스에서는 남작을 바롱(baron)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주(周)나라 때에 이미 5등작제(五等爵制)가 제정되었고 작위에 따라 영지(領地)가 주어졌다고 한다.

한국은 고려 초기부터 중국의 5작제도(五爵制度)를 받아들였으며 남작을 현남(縣男)이라고 불렀다.


○ 이주영(李胄榮)


생몰(生沒-태어나고 죽음)년은 정유(丁酉-1837. 헌종 3)∼정사(丁巳-1917)이다.

 

조선 말기의 문신이다.

 

자는 순경(舜敬)이고 군수 유헌(裕憲)의 아들로 어머니는 풍양 조씨(豊壤趙氏)이다.

 

1874년(고종 11)5월 증광시(增廣試) 갑과1(甲科1)에 급제한 뒤 부교리·부수찬을 거쳐

그 해 8월 의정부 겸 문공사관(議政府兼文公事官)에 이르고 그 뒤 동부승지를 거쳐

1877년 대사성·병조참의로 빠르게 승진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 후 은거하였다.

 

1890년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894년 동학혁명 후 일본의 내정개혁 강요가 있자 고종은 기강을 세우고

대경장(大更張)을 하겠다면서 그를 대사헌으로 임명하였다.

 

그때 교정청당상도 겸임하였다.

 

광무 연간에 장례원 귀족사장(掌禮院貴族司長) · 시강원첨사 · 궁내부특진관 · 태의원경(太醫院卿)

궁내부 아문의 장을 역임하였다.

 

1910년 조선 귀족령으로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협조한 고관으로서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 인명 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파 목록에 선정되었다.

두 명단에는 이주영의 남작 작위를 습작 받은 이규환도 함께 포함되었다.

 

2006년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위원회가 발표한

일제 강점기 초기의 친일 반민족 행위 106인 명단에도 포함되어 있다.


 

● 6세 이주좌(李周佐)


?~1040(정종 6). 고려의 문신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좌복야 이성공(李成功)의 천거로 국학에 입학하고

목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상주목 기실 참군사로 나갔고 이어 감찰어사에 올랐다.

 

현종 때 기거사인 ․ 동북면병마사가 되었는데,

삭방도내의 19현이 번적(蕃賊)의 피해를 입은 지역이므로

조세의 감면을 요청하여 실현하는 등 백성의 안주(安住)에 힘썼다.

 

덕종초에 우간의대부에 이르고

1036년(정종 2) 우산기상시를 거쳐

1040년 형부상서판어사대사에 이르렀다.

 

사후에 사공상서우복야(司空尙書右僕射)에 추증되었다.


*고려사절요에 ‘경주이씨’ 로는 맨 처음 기록된 조상님으로 ‘6세 이주좌‘가 나오고

다음이 ’11세 이녹천‘ 조상이 언급되고 있다.


○ 이주좌(李周佐) - 중조 6세


생몰년은 ?∼1040(정종 6)이고 고려의 문신이다.


경주 이씨(慶州李氏) 중시조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의 현손인

중조 5세 승훈(承訓)의 차자(次子)로 형이 중조 6세 주복(周復)이다.

 

가세가 한미(寒微-가난하고 문벌이 변변하지 못함)하였으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

 

동경유수(東京留守-고려 시대에 경주(동경)을 다스리던 벼슬. 3품이상의 벼슬아치를 임명)로

있던 좌복야(左僕射) 이성공(李成功)의 천거로 국학에 입학하였다.

 

1008년(목종 11) 문과에 급제하여 상주목 기실 참군사(尙州牧記室參軍事)로 나아갔고

이어 감찰어사에 올랐으며 현종 때 기거사인(起居舍人)을 거쳐 동북면병마사가 되었다.

 

이때에 그는 삭방도내의 19현이 번적(蕃賊)의 피해를 크게 입는 지역임을 들어

조세의 감면을 요청하여 주민의 안주(安住)에 힘썼다.

 

덕종초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고,

 

1036년(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거쳐

 

1040년에는 형부상서 판어사대사(刑部尙書判御史臺事)에 이르렀다.

 

형부상서로 죽으니 왕이 차와 의복을 내렸다

 

사공 상서우복야(司空尙書右僕射)에 추증되었다

 

* 아산 이씨(牙山李氏) 시조이다.

 

후손 이서(李舒)가 고려 고종∼원종조에 벼슬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 · 판위위사(判衛尉事)

등을 지내면서 공을 세워 아주백(牙州伯)에 봉해졌다.

 

그런 까닭으로 후손들이 경주 이씨에서 분적하여

주좌를 시조로 하고 본관은 서(舒)의 봉지(封地)인 아주(牙州)가 뒤에

아산(牙山)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아산으로 하였다


○ 이주좌(李周佐) 


생몰(生沒-生卒)년은 ?∼1040(정종 6)이다.

 

이주좌(李周佐)는 신라 대아찬 경주이씨 시조 표암공 알평(謁平)의 후손이다.

 

중시조 소판공(蘇判公) 휘 거명(居明)의 4세손으로 고려 때 평장사를 역임한 승훈의 둘째 아들로 전하고 있다.

 

고려의 문신으로 가세가 한미하였으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동경유수로 있던 좌복야(左僕射) 이성공(李成功)의 천거로 국학에 입학하였다.

 

목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상주목 기실 참군사(尙州牧記室參軍事)로 나아갔고, 이어 감찰어사에 올랐다.

 

현종 때 기거사인(起居舍人)을 거쳐 동북면 병마사가 되었다.

 

이때에 그는 삭방도내(朔方道內-고려 때 10도의 하나)의 19현(縣)이

번적(蕃賊-고려 민족이 아닌 타민족 도적 떼)의 피해를 크게 입는 지역임을 들어

조세의 감면을 요청하여 주민의 안주(安住)에 힘썼다.

 

덕종초(德宗初-1032∼34)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중서문하성에 속한 정4품)가 되고,

 

1036년(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내사문하성에 속한 정3품)를 거쳐

 

1040년에는 형부상서 판어사 대사(刑部尙書判御史臺事-육부(六部)의 으뜸 벼슬. 어사대의 으뜸 벼슬. 정3품)에 이르렀다.

 

사공 상서 우복야(司空尙書右僕射-삼사에 속한 정2품의 벼슬)에 추증되었다.

 

공의 아들 이서(李舒)는 고려 고종 때 밀성부사로 공이 있어 군기감(軍器監)이 되었고,

 

1268년 판위위사사(判衛尉寺事), 벽상공신삼중대광(壁上功臣三重大匡)으로 아주백(아산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그래서 본관을 아산으로 하게 되었으나 그 후의 세계가 확실하지 않아 그의 후손 이옹을 아산 이씨 1세조로 하고 있다.


 

● 이중명(李重明)


1615(광해군 7)~1872(현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문(子文), 호는 안곡(安谷).

 

1651년(효종 2)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67년(현종 8) 임진왜란 때에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의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의 사우건립과

양호(楊鎬)와 이여송(李如松)의 배향을 상소하였는데,

그후 7년후 숙종 30년에 창덕궁 금원(禁苑)에 설치된 대보단(大報壇) 창설의 단초(端初)가 되었다.

 

이후 서리(胥吏)의 폐단과 시폐(時弊)에 대한 상소를 하기도 했다.

 

1671년(현종 12) 광흥창봉사에 제수되었다.

 

1806년(순조 6) 천안의 육현사(六賢祠)에 배향되었다.  


○ 이중명(李重明)


자 자문(子文)

호 안곡(安谷)

생년 1615

연령 58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중기


1615(광해군 7)∼1672(현종 1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문(子文), 호는 안곡(安谷).

 

1651년(효종 2)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1667년(현종 8)5월 진사로 상소하여 임진왜란 당시 도움을 준

명나라 신종(神宗)· 의종(毅宗)의 *사우건립과 양호(楊鎬)와 이여송(李如松)의 *배향을 주장하였다.

 

그의 신종사우의 설치주장은 후일 1704년(숙종 30) 창덕궁 금원(禁苑)에 설치된

*대보단(大報壇) 창설의 단초(端初)가 되었다.

 

이후 *서리(胥吏)의 폐단과 시폐에 대한 상소를 하기도 하였으며,

 

1671년(현종 12) 광흥창 봉사에 제수 되었다.

 

1806년(순조 6) 천안의 육현사(六賢祠)에 배향되었다.

 

(의견)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의 사우 건립과 이여송을 배향하자는 주장에서 보면

상당한 사대주의적 조상님인 것 같고

서리(胥吏)의 폐단과 시폐에 대한 상소를 하기도 한 것으로 보아 곧고 정의로운 조상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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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祠宇)- 사당(祠堂)- 신주(神主)를 두기 위해 따로 지은 집

*배향(配享)- 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문묘나 사당, 서원 등에 모시는 일.

≒배식(配食)·종사(從祀)·종향·철향(醊享).

*대보단(大報壇)- 조선 시대에, 중국 명나라의 태조·신종·의종을 제사 지내던 사당.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병을 보내 주었다고 하여 숙종 30년(1704)에 창덕궁 금원(禁苑) 옆에 설치하였다.

 

*서리(胥吏)- 관아에 속하여 말단 행정 실무에 종사하던 구실아치

*광흥창(廣興倉)- 고려 ·조선시대에 관리들의 녹봉(祿俸)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조선시대에는 1392년(태조 1) 호조(戶曹)의 예속기관으로 서울 서교(西郊) 와우산(臥牛山) 아래에 설치하였다.

관원으로는 수(守:정4품) 1명, 주부(主簿:종6품) 1명, 봉사(奉事:종8품) 1명, 부봉사(副奉事:종9품) 1명을 두었다가, 후에 영(令:종5품) 1명, 직장(直長:종7품) 1명을 각각 증원하고 부봉사를 없앴다.

1896년(고종 33)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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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奉事)- 종8품

*육현사(六賢祠)- 임란시에 공훈이 있는 여섯분의 위패를 모신 사우. 천안 소재


○ 안곡공(安谷公) 중명(重明)

 

생몰년은 1615(광해군 7)∼1672(현종 13)이고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자문(子文)이고 호는 안곡(安谷)이다.

 

1651년(효종 2)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1667년(현종 8)5월 진사로 상소하였다.

 

내용은 임진왜란 당시 도움을 준 명나라 신종(神宗)·의종(毅宗)의 사우건립과

양호(楊鎬)와 이여송(李如松)의 배향을 주장하였다.

 

그의 신종사우의 설치주장은 후일 1704년(숙종 30)창덕궁 금원(禁苑)에 설치된 대보단

(大報壇)창설의 단초(端初)가 되었다.

 

이후 서리(胥吏)의 폐단과 시폐에 대한 상소를 하기도 하였으며,

 

1671년(현종 12) 광흥창 봉사에 제수되었다.

 

1806년(순조 6) 천안의 육현사(六賢祠)에 배향되었다.


 

● 이중약(李仲若)


?~1122(인종 1). 고려 중기의 문신

 

자는 자진(子眞), 호는 청하자(靑霞子).

7대를 이은 명문 출신으로 어머니 이씨가 도사(道士)를 의미하는 노란색 관을 꿈에 보고 잉태하였다고 한다.

 

어려서 부터 도장(道藏)을 탐독하고 도풍(道風)을 섬겼다.

 

출가하여 가야산에 은거하여 스스로 청하자라 칭하며 수련을 쌓다가,

처사(處士) 은원충(殷元忠)과 선사(禪師) 익종(翼宗)의 주선으로 월출산으로 옮겨

일재(逸齋)를 짓고≪황정경(黃庭經≫에 의지하여

부상공(夫桑公-少明) · 도은거(陶隱居-弘景) · 장천사(張天師-道陵) 등을 받들고 연단(鍊丹) 수련을 하였다.

 

도교 의술(醫術)에 정통하여 조야에 명성을 떨쳤으며

숙종의 치료를 위하여 상경한 뒤 궁주에서 태자를 시봉했는데,

그 태자가 즉위하여 예종이 되니 발탁되어

1108년(예종 3) 입송사절(入宋 使節) 한교여를 따라 송나라에 들어가서

법사 황대충(黃大忠)·주여령(周與齡)에게 도교의 요제(要諦)를 전수하고,

송나라 휘종(徽宗)에게 청원하여 도사 2명을 고려에 파견하였다.

 

귀국 후 국가 재초소(齋醮所)이며 도관(道觀)으로서 복원궁(福源宮)을 건립하게 하였다.

 

고려 도교의 총본산인 이 복원궁을 중심으로 예종을 통하여 도교정책을 펴다가

권신 이자겸(李資謙)의 세력에 의하여 한안인(韓安仁) 일파에 몰리어 유배지에서 죽었다.

 

뒤에 신원되어 신원(伸寃)되어 생전의 합문지후(閤門祗侯)의 좌사(左司)로 추증되었다.


○ 이중약(李仲若)


생몰년은 ?∼1122(인종 즉위년)이고 고려 중기의 도사이다.

 

자는 자진(子眞)이고 호는 청하자(靑霞子)이다.

 

7대를 이은 명문출신으로 어머니 이씨(李氏)가 꿈에 도사를 나타내는 노란색의 관을 보고 임신하였다.

 

어려서부터 유학을 닦는 한편 도장(道藏)을 탐독하고 도풍(道風)을 섬겼다.

 

출가하여 가야산에 은거하며 스스로 '청하자'라 칭하고 수련을 쌓았다.

 

나중에 처사(處士) 은원충(殷元忠)과 선사(禪師) 익종(翼宗)의 주선으로 월출산으로 옮겨

일재(逸齋)를 짓고《황정경(黃庭經)》에 의지하며 부상공(夫桑公, 少明)·도은거(陶隱居,

弘景)·장천사(張天師, 道陵) 등을 받들어 연단수련(鍊丹修鍊)을 하였다.

 

도교의술(道敎醫術)에 정통하여 조야에 명성을 얻었으며 숙종의 치료를 위하여 상경한 뒤

궁중에서 태자를 시봉하다가 예종이 즉위함에 따라 조정에 등용되었다.

 

1108년(예종 3) 입송사절(入宋使節)인 예부시랑 한교여(韓교如)를 따라 송나라에 건너가

법사 황대충(黃大忠)·주여령(周與齡)에게 도교 요체를 전수하는

한편 송나라 휘종(徽宗)에게 청원하여 도사 2명을 고려에 파견시켰다.

 

귀국 후 상소하여 국가 재초소(齋醮所)로 도관 복원궁(福源宮)을 건립하였다.

 

고려 도교의 총본산인 이 복원궁을 중심으로 예종을 통하여 도교정책을 펴다가

1122년 권신 이자겸(李資謙)의 세력에 의한 한안인(韓安仁)일파 축출시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신원(伸寃)되어 생전의 합문지후(閤門祗候)에서 좌사(左司)로 추증되었다.


○ 이중약(李仲若) 


자 자진(子眞)

호 청하자(靑霞子)

활동분야 기인 / 도사


생몰년은 ?∼1122(인종 즉위년)이다.

 

고려 중기의 도사(道士)로 자는 자진(子眞)이고 호는 청하자(靑霞子)이다.

 

7대를 이은 명문출신으로 어머니 이씨(李氏)가 꿈에 도사를 나타내는 노란색의 관을 보고 임신하였다.

 

어려서부터 유학을 닦는 한편 도장(道藏-도교의 경전을 모아 엮은 책)을 탐독하고

도풍(道風-정서, 전통, 문화와 역사 등의 도의 세계)을 섬겼다.

 

출가하여 가야산에 은거하며 스스로 '청하자'라 칭하고 수련을 쌓다가,

나중에 처사(處士) 은원충(殷元忠)과 선사(禪師) 익종(翼宗)의 주선으로 월출산으로 옮겨

일재(逸齋-서실, 서고)를 짓고, 《황정경(黃庭經)》에 의지하며

부상공(夫桑公, 少明)·도은거(陶隱居, 弘景)·장천사(張天師, 道陵) 등을 받들어

연단수련(鍊丹修鍊-호흡으로 단련하는 수련)을 하였다.

 

도교의술(道敎醫術-도교에서 발전한 의술)에 정통하여 조야(朝野-조정과 민간)에 명성을 얻었으며,

숙종의 치료를 위하여 상경한 뒤, 궁중에서 태자를 시봉(侍奉-모시어 받듦)하다가

예종이 즉위함에 따라 조정에 등용되었다.

 

1108년(예종3) 입송사절(入宋使節-송나라에 들어가는 사신)인 예부시랑 한교여(韓교如)를 따라

송나라에 건너가 법사 황대충(黃大忠) · 주여령(周與齡)에게 도교 요체(要諦-중요한 점. 핵심)를 전수하는 한편,

송나라 휘종(徽宗)에게 청원하여 도사 2명을 고려에 파견시켰다.

 

귀국 후 상소하여 국가 재초소(齋醮所-도교의 제사를 지내는 집)로 도관 복원궁(福源宮)을 건립하였다.

 

고려 도교의 총본산인 이 복원궁을 중심으로 예종을 통하여 도교정책을 펴다가

1122년 권신 이자겸(李資謙)의 세력에 의한 한안인(韓安仁)일파 축출(逐出)시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신원(伸寃-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풀어 버림. 전과 같은 신분으로 돌아옴)되어

생전의 합문지후(閤門祗候-조회朝會 의례儀禮 등 국가 의식을 맡아보던 합문 소속의 관직. 정7품)에서

*좌사(左司-정6품)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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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사(左司)- 상서도성(尙書都省)은 좌사(左司)와 우사(右司)로 나누어져 있는데,

좌사가 이부·호부·예부를 관할하고 우사가 병부·형부·공부를 담당했다.

좌문학(左文學) 1명, 우문학(右文學) 1명 정5품이고, 좌사경(左司經) 1명, 우사경(右司經) 1명 정6품이고,...

중궁(中宮)의 요속(僚屬)을 관장하는데, 좌사윤(左司尹) 1명, 우사윤(右司尹) 1명 정3품이고, 승(丞) 2명 정7품이고,...

*신교(神交) - 학사(學士) 김황원(金黃元)과 좌사(左司) 이중약(李仲若)과

처사(處士) 곽여(郭輿)는 모두 기이한 선비였다.

젊어서부터 문장으로 서로 사귀어 신교 (神交-정신적인 사귐)로 일컬어졌다.

(破木+閑集. '파한집'에 기록)


 

● 28세 이중협(李重協) - 국당공후 정순공파


1681(숙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화중(和仲), 정언 익(瀷)의 증손이다.

 

1713년(숙종 39)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1715년 사간원 정언을 거쳐

1717년 사헌부지평에 이르고 동지사 유명웅(兪命雄)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18년 경종의 비 단의빈심씨(端懿嬪沈氏)가 죽으므로

대전(大殿)인 숙종의 며느리의 복상이 부장기(不杖朞)로 결정되자

대공복(大功服)으로 해야한다는 소를 올렸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1719년 흉년을 당하여 기민구제를 하기한 공명첩(空名帖)의 발행을 중지하라고 상소하였다.

 

1722년(경종 2) 사간원사간·홍문관수찬 · 승문원교리 등을 역임하였는데,

대간의 도리를 다하지 않는다 하여 의금부에 갇히고 해남으로 귀양갔으며 다시 경원(慶源)으로 이배되었다.

 

 1728(영조 4) 승지를 거쳐 1736년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역임하고

1745년 대사간·공조참판을 거쳐 도승지에 이르렀다.

 

○ 이중협(李重協)


자 화중(和仲)

생년 1681

활동분야 문신/ 관료 / 조선중기

과거 및 취재 [문과] 숙종(肅宗) 39년 (1713) 계사(癸巳) 증광시(增廣試) 갑과(甲科) 2위


1681(숙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화중(和仲). 호는 삼호당. 정언 익(瀷)의 증손으로, 병(炳)의 아들이다.

 

1713년(숙종 39) 증광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715년 사간원 정언을 거쳐,

 

1717년 사헌부지평에 오르고, 동지사 유명웅(兪命雄)을 따라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18년 경종의 비 단의빈 심씨(端懿嬪沈氏)가 죽자 대전(大殿)인 숙종의 며느리에 대한 복상이

*부장기(不杖朞)로 결정되자, *대공복(大功服)으로 해야 한다는 소를 올렸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1719년 흉년을 당하여 *기민을 구제하기 위해 정부에서 *공명첩(空名帖)을 발행하는 것을 중지하라고 상소하였다.

 

1722년(경종 2)이후 사간원 사간·홍문관 수찬·승문원 교리 등을 역임하였는데,

대간의 도리를 지키지 않는다 하여 의금부에 갇혔다가 석방되더니

해남으로 귀양가고 다시 경원(慶源)으로 *이배 되었다.

 

1728년(영조 4)승지를 거쳐 1736년 *강춘도 관찰사(江春道觀察使)를 역임하였으며,

1745년 대사간·공조참판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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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기(不杖朞)- 상례(喪禮)에서 한 해 동안 지팡이는 짚지 아니하고 상복만 입던 일.

1년. 5개월. 3개월 동안 복을 입는데 5개월은 증조부 3개월은 고조부를 위한 복이다.

조부모. 백숙모. 형제. 중자(衆子- 맏아들이 아닌 모든 아들. 서자)와 아내. 형제의 아들과 고모. 시집가지 않은 누이와 시집을 갔어도 자식이 없을 경우에 부장기를 입는다.

여자로서 남편 형제의 아들. 첩이 큰 부인을 위해서. 첩이 남편의 중자를 위해서. 시부모가 큰며느리를 위해서도 같다.

 

*대공복(大功服)- 9개월 동안 입는 복으로 베의 결이 조금 거칠다.

대공복은 종형제나 종자매가 죽었을 때 입는 복이다.

대공(大功). 소공(小功- 5개월 동안 입는 복을 소공복이라 한다)이라는 공(功)은 삼베를 짠다는 뜻으로

소공이 대공보다 더 결이 곱고 가는 베이다.

*기민(饑民)- 飢民. 굶주린 백성.

 

*공명첩(空名帖)- 성명을 적지 않은 백지 임명장.

국가의 재정이 궁핍할 때 국고(國庫)를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으로,

중앙의 관원이 이것을 가지고 전국을 돌면서 돈이나 곡식을 바치는 사람에게

즉석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적어 넣어 명목상의 관직을 주었다.

≒공명고신·공명고신첩·공명장.

*이배(移配)- 귀양살이하는 곳을 다른 곳으로 옮김.

*강춘도(江春道)- 강원도는 강릉과 원주에서 따왔으며 춘천은 양양과 더불어 그 다음의 대읍으로 꼽혔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종(顯宗) 때에 강릉지방에서 열병이 유행하여 박귀남(朴貴男)이란 사람이 병석에 누웠는데

그의 처 난계(難介)와 딸 옥지(玉只)ㆍ연화(蓮花) 등이 나쁜 마음을 먹고 박귀남을 독에 넣어 뒷산에 묻은 적이 있었다.

이 일이 발각되어 강릉은 대도호부(大都護府)에서 현(縣)으로 강등되고

강원도라는 이름에서 강릉의 강자를 빼고 양양을 대신 넣어 양(襄)자를 써서 강원도 대신 원양도(原襄道)라고 불렀다.

또한 숙종(肅宗) 때에는 원주에 남편을 죽인 부인이 있어서 원자를 뺌으로써 강양도(江襄道)라고 했는데,

이 때는 숙종 9년(1683년)~28년(1702)까지 무려 20년간 계속되었다.

또 영조(英祖) 때에는 원주에서 반역을 도모한 사건이 있어서

춘천의 이름을 따서 강춘도(江春道)라 불렀고, 원주는 목(牧)에서 원성현(原城懸)으로 낮추어 불렀다.

다시 정조(正祖)때에는 강릉이 역적으로 몰린 이택징(李澤徵)의 고향이란 이유로 현이 되었고

동시에 정조 6년(1782년)~15년(1791)년까지 10년동안 원천도(原川道)라 불리기도 하였다.


 

● 21세 이지대(李之帶) - 익재공후 판윤공파 중파시조


공(公)의 호는 죽은(竹隱)이며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정2품)이다.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던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익재공(益齋公) 휘 제현(齊賢)의 4세손이다.

 

증조부 휘 서종(瑞種)은 종부령(宗簿令-정4품), 조부 휘 원익(元益)은 대사성(大司成-3품),

아버지 휘 선(瑄)은 병조판서(兵曹判書-2품)이다.

 

가세(家勢)가 귀하고 혁혁하고 공의 천성이 강명청직(剛明淸直)할 뿐 아니라

바른말을 잘하는 악악지풍(악악之風)을 가졌고

사치(奢侈) 습관이 없고 안색을 바르게 하여 조정에는 청백(淸白)과 강직(剛直)으로 칭찬을 받았다.

 

일찍 무과를 지망하여 갑과(甲科)에 등과하여 수군(水軍)으로 나아간

공(公)은 경상도 수군만호(慶尙道水軍萬戶-정4품)가 되어 바다로부터 오는 왜구를 지켰으며

이조 태조 3년(1394)에 왜선 한 척을 나포하여 공을 세웠다.

 

이로 말미암아 태조는 그 해 3월에 판교서감사 이문화를 보내어 술과 비단을 하사하여 위로 하였다고 한다.

 

단종 때 수양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등을 죽이고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일찍이 벼슬을 버리고 궁벽한 곳을 찾아 은거했으니 경주읍 남쪽 60리에 있는 중리(中里)이며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구량리(蔚山廣域市蔚州郡斗西面九良里)이다.

 

평상시 산인(山人)같이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야인(野人) 같은 복장으로 한가히 노닐었으며

점필제 김종직( 畢齋 金宗直-예조판서이며 학자)과 교분이 두터웠다고 전해진다.

 

공(公)의 유허지(遺墟地)인 울주군 두서면 구량리에는

공이 한성(漢城-서울)에서 가져와 연못 옆에 손수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550년이 넘은 지금도

청청(靑靑)하여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 64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높이 22m, 허리 둘레가 12m로 매우 장엄하다.

 

이 나무를 훼손하면 해를 입는다고 전해오며 아들을 기원하면 아들을 얻는다는 속설도 전해와서

상당히 소중히 여기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또 공(公)은 생전에 구량천(九良川)의 흐름이 마을 뒤편으로 바꾸어 흐를 때는 구량에서 떠나라는 말에 따라

어느 해 심한 홍수로 강심(江心)이 마을 뒤로 변하자 자손들이 터를 비우고 흩어졌다는 일화가 있다.

 

판윤공(公)의 묘(墓)는 경주부 동 명활산 아배동(慶州府東明活山阿陪洞) 신좌(辛坐)이고

갈(表碣-머리부분을 둥글게 한 작은 비석)이 있다.

^ 배는 평해 황씨이며 교리불권 헌정의 따님(配平海黃氏校理不倦軒玎女)이시다.

세 아들 점(點)과 묵(默)과 연(然)을 두었다.

 

O 찾아가는 길

현 경주시 천군동 보문호 입구 오른쪽 명활산(明活山城)기슭을 따라

경주 월드(전 도투락 월드)가 위치한 쌍탑에서 불국사 호텔과 연결된 '천군로' 도로를 따라간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도로이나 차가 띄엄띄엄 다녀서 그나마 다행이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불국사 호텔 쪽에 가깝게 도로변 왼쪽에 ;아동재사' 재실이 있다.

이곳을 '아배동' 또는 '아동'이라 하는데 동네 사람들에게 물으면 된다.


○ 중조 17세인 익재공 휘 제현 할아버지 때에 '익재공파' 인 대파로 분파되고

그로부터 4세손인 중조 21세인 판윤공 휘 지대 할아버지 때에 와서 '익재공후 판윤공파'인 중파로 분파된다.

 

● 조선왕조실록의 판윤공(휘 지대) 기록 

이지대(李之帶)

태조 5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3월 9일(무신) 2번 째 기사
왜적을 격퇴시킨 창평 현령 신원절과 수군 만호 이지대 등에게 물품을 하사하다

[全羅道昌平縣令愼原節率軍官, 斬倭七級, 擒一名, 收兵器衣服以獻:
慶尙道水軍萬戶李之帶獲倭一船。 命判校書監事李文和, 齎宮(온)綺絹, 往賜之帶原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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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溫삼수변 대신 酉)- 술빚을 온
*궁온(宮온)- 궁에서 빚은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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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창평 현령(昌平縣令) 신원절(愼原節)이 군관(軍官)을 거느리고 왜적(倭賊) 7명을 목베고,

1명을 사로잡고, 병기(兵器)와 의복을 거두어 바쳤으며,

경상도 수군 만호(水軍萬戶) 이지대(李之帶)는 왜적의 배 1척을 잡으니,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 이문화(李文和)에게 명하여

궁온(宮온)과 무늬 있는 비단과 명주를 가지고 가서 지대와 원절에게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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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齎宮온綺絹(재궁온기견)'의 한글 풀이

齎- 가져올 재

宮- 궁궐 궁

온(溫삼수변 대신 酉)- 술 빚을 온

綺- 비단 기. 아름다울 기

絹- 명주 견

- 실록에는 → '궁온(宮온)과 무늬있는 비단과 명주를 가지고 가서'로 역문

- 검색에서는 → 주로 '술과 비단과 명주를 가지고 가서' 와
'술과 무늬 있는 비단과 명주를 가지고 가서'로 역문 하였다.

* 실록의 역문에 '궁온(宮온)'이 무슨 뜻인지에 대한 해설이 없다.
- 궁에서 빚은 술(?)

 

O. 판윤공 王旨(왕지)의 내용

[李之帶爲嘉善大夫檢校漢城尹者 (이지대 위가선대부 검교한성윤자)

永樂十四年(영락14년) 六月(6월) 初二日(초2일)]

태종의 御寶(어보)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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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락 14년 - 1416년.
'영락' 연호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연호(391~412)이기도 하고

중국 명나라 성조의 연호(1403~1424)이나
여기서는 명나라 성조 연호이다.

# 조선 태종16년. 병신년 6월 2일 판윤공에게 내린 왕지이다.

# 이조 초기에는 '왕지'라고 하다가 뒤에는 '교지'라고 하였다.

* 검교(檢校)- 고려· 조선 시대에, 해당하는 벼슬의 정원 외에 임시로 증원할 때나
실제 사무를 보지 않고 이름만 가지고 있게 할 때, 그 벼슬 이름 앞에 붙여 이르던 말.

그래서 판윤공은 한성판윤 벼슬을 실제로 한 것이 아니고 명예직으로 받은 것이다.

특별히 조선 영조·정조 때에, 임시로 규장각 제학(提學)이나 직각(直閣)의
사무를 맡아보던 사람의 벼슬 이름 앞에 붙여 이르기도 하였다. ≒검직(檢職).

* 御寶(어보)- 국쇄(國璽) - 국권의 상징으로 국가적 문서에 사용하던 임금의 도장.
≒곤보(袞寶)· 국보(國寶) · 대보(大寶) · 보(寶) · 부새(符璽) · 새(璽) · 신새(神璽) ·
영새(靈 璽) · 옥보(玉寶) · 옥쇄(玉璽) · 인새(印璽).

O. 왕지는 보물 제1474-2호.

경주 이씨 양월 문중 소장 고문서

- 이지대 왕지(慶州李氏楊月門中所藏古文書-李之帶王旨)

종 목 : 보물 제1474-2호

명 칭 : 경주이씨양월문중소장고문서-이지대왕지

(慶州李氏楊月門中所藏古文書-李之帶王旨)

시 대 : 조선 태종 13년(1413)

수 량 : 1점

분 류 : 국왕문서/교령류

지 정 일 : 2006.07.18

소 유 자 : 서울역사박물관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문화재형태 : 낱장

대표문화재 : 보물 제1474-2호 경주이씨양월문중소장고문서-

이지대왕지(慶州李氏楊月門中所藏古文書-李之帶王旨)

형 태 서 지 : 이지대 왕지(李之帶王旨)

- 행자수부정(行字數不定) ; 65.2cmⅹ38.0cm


● 21세 지수(之秀) - 월성군파 대파시조


월성공(月城君)은 월성공파(月城公派) 파조(派祖)이다.

 

세계(世系)는 11세 현복→ 12세 차자 병부시랑 신우→ 13세 천호장 작랑→ 14세 사간 선경→

15세 차자 검교대장 방렬→ 16세 진사 황승→ 17세 극랑→ 18세 차자 진사 창규→ 19세 진사 분→

20세 차자 병부상서 충요→ 21세 월성군 지수

 

행장(行狀)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내력을 살필 수 없다.

 

1987년도 발간 대종보 총편에

 

[벼슬은 금자 광록 대부(金紫光祿大夫), 또 말하기를 삼중대광 광록 월성군(三重大匡 光祿月

城君), 또 이르기를 광정대부 상서좌복야(光正大夫 尙書左僕射)라고 한다.]

 

그러니까 고려조(高麗朝)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와 월성군(月城君)의 봉호(封號)를 제수 받았다.

 

아우인 지연(之衍)의 후손은 원주 이씨(原州李氏)로 분적(分籍)하였다.

 

월성군의 장남인 정렬공 규(揆)와 원나라에 억류된 충숙왕의 화를 면케 한 공로로

2등공신의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오른 차남 진(縉)의 후손들이 월성군파(月城君派)의 맥을 이었다.

 

정묘(丁卯. 1987)년에 안동 금계 사망동(安東琴溪仕望洞-현재 지명이 나오지 않음)에 제단을 설치하고

같은 해 봄에 부안 동진면 당하리(扶安東津面堂下里)에 진양서원(津陽書院)을 세우고 배향(配享)하여 제사를 지낸다.


 

● 17세 지정(之正) - 호군공파 대파시조


호군공파(護軍公派) 파조(派祖)이다.

 

부(父)는 동암공(東菴公 휘 진)이고 모(母)는 진한국부인 박씨(辰韓國夫人朴氏) 대능직(戴陵直) 인육(仁育)의 따님으로

이암공(怡庵公. 휘 琯)과 익재공(益齋公 휘 齊賢)을 형으로 둔다.

 

족보에는 다만 [大護軍]이란 기록뿐이다.

 

배(配)의 기록도 없고 벼슬이 판윤(判尹)인 아들 봉생(鳳生)이 있는데 갑보(甲譜)에는 들어있지 않다고 되어 있다.

 

19세 손자 주부(主簿) 술(述)과 20세 증손자 현감(縣監) 포(布)로 세계(世系)가 이어진다.


 

● 21세 이지회(李之會) - 익재공후 소경공파 중파시조


경주이씨 시조 은열왕 휘 알평(始祖 李謁平)의 후손으로

중시조(遠代孫 中始祖)인 소판공 휘 거명(蘇判公居明)에서

17세인 문충공(文忠公) 익재(益齋) 휘 제현(齊賢)의 4세손으로 세계(世系)가 이어진다.

 

 

고조(高祖)는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문충공(文忠公) 익재(益齋) 휘 제현(諱齊賢)이고

증조(曾祖)의 휘는 서종(瑞種)이니 종부시 부정(宗簿寺副正)으로 증직(贈職)이 문하시랑(門下侍郞)이요.

할아버지의 휘는 원익(元益)이니 대사성(大司成)이오,

 

아버지의 휘는 선(瑄)이고 호는 정헌(正軒)이며 벼슬은

고려조에서 이조(李朝)로 왕조가 바뀜에 따라 비로소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올랐다.

 

아버지 정헌공(正軒公)은 효행(孝行)이 있어 동경지(東京誌- 慶州邑誌. 동경은 경주를 일컬음)에 기재되어 있다.

 

소경공(少卿公- 휘 지회之會)은 중조 21세로서 소경공파(少卿公派) 파조(派祖)이시다.

 

즉 익재공파에서 중파(中派)로 분파 되어 장자(長子)인 소경공(휘 지회之會)은 소경공파를,

차자(次子)인 동생 판윤공 휘 지대(之帶)는 판윤공파로 분파 된다.

 

호는 가은(佳隱)으로 익재공(益齋公-휘 제현齊賢)의 현손(玄孫-손자의 손자. 증손 다음)이고

병조판서 선(瑄)의 아들이다.

 

젊었을 때부터 아름다운 자질로 마음을 닦고 효우(孝友)를 행하여 소문이 자자하고

학업을 갈고 닦아 경전(經典)에 통했으며 학행(學行)으로 발탁되어 일찍이 발탁되엇다.

 

여러번 좋은 벼슬을 지내고 자리에 있을 때마다 직분을 다하여 벼슬이 태상소경(太常少卿)에 이르렀다.

 

더욱 조심하고 겸손하니 당시에 어진 대부(大夫)의 풍도(風道)가 있다고 했다.

 

임금의 신임을 얻어 방촌(尨村) 황희(黃喜)정승과 경암(敬菴) 허조(許稠) 등

제공(諸公)이 조정에 천거하여 상경(上卿-判書)의 물망에 있었는데 공이 듣고서 말하기를

 

"곤궁(困窮)함을 참고 글을 읽으며 초야(草野)에 늙음이 나의 본분인데

다행이 밝은 시대의 임금을 만나 그릇 되이 깊은 은혜를 입어 지위가 아경(亞卿-參判)에 이르렀으니

나에게 만족한다"

하고 스스로 글을 올려 상소하고 물러나기를 구하여 경주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인하여 *가사(佳沙)의 이천리(利川里)에 살면서 스스로 호를 가은(佳隱)이라 부르며

조그마한 정원에 소나무와 국화를 심고 좌우에 도서를 비치하고 쾌적하게 즐기면서 이르기를

 

"누가 이 속에 복의 천황씨(伏義天皇氏)적 사람이 있는 줄을 알겠는가?

 

*방덕공(龐德公)의 훌륭한 곳도 자손에게 편안함을 물러 주는데 있었으나 이것도 또한 한가지 도리라" 하였다.

 

세상을 멀리하여 살다가 천명(天命)을 다했다.

 

장지는 경산 자인(慈仁)의 금박산 아래 염불암(念佛岩) 묘좌(卯坐) 양지 바른 곳에

정부인 안동 권씨 사간 정의 녀(安東權氏司諫定女)와 함께 묻혔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에 알려져 명망이 이어졌고

후손들은 도천서원(道天書院)에서 제사를 지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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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손(玄孫) - 손자의 손자. 즉 증손(曾孫) 다음 고손자(高孫子)를 말하나

손자에게 높을 고(高)자를 붙일 수 없어 고손(高孫) 대신에 현손(玄孫)이라고 말한다.

* 가사(佳沙)- 아름다운 풍경과 모래가 있는 곳.

* 복의 천황씨(伏義天皇氏)- 중국 태고 시대의 전설적인 인물. 삼황(三皇)의 으뜸.

*방덕공(龐德公)- 후한 말(後漢末)의 은자(隱者). 유표(劉表)가 여러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처자들과 평생 녹문산(鹿文山)에서 살았다.


○ 도천서원(道天書院)

 

* 소재지 : 경북 경산시 진량면 당곡(慶北慶山市珍良面堂谷)

* 향사일(享祀日) : 춘3월(春三月) 상정일(上丁日) . 추9월(秋九月) 상정일(上丁日)

^ 상정일(上丁日)- 그 달의 초순에 '丁'이 들어가는 날

 

○ 소경공(少卿公)의 묘소(설단)

 

* 장소 : 경북 경산시 자인면 신관리 후산(慶北慶山市慈仁面新冠里後山)

* 묘제일(墓祭日) : 음 10월2일(陰十月初二日)


 

● 16세 이진(李瑱)


1244(고종 31)~1321(충숙 8). 고려의 문신

 

초명은 방연(芳衍), 자는 온고(溫古), 호는 동암(東庵).

 

문하평리 핵(翮)의 둘째 아들이고 명상 제현(齊賢)의 아버지이다.

 

어려서부터 체구(體軀)가 컸고 관홍(寬弘- 마음이 너그럽고 큼)하였으며

백가(百家- 다방면에 걸쳐 스스로 일가를 이룸)에 널리 통하고 운(韻)을 부르는 즉시 시를 지으므로

상서(尙書) 이송진(李松縉)이 한 번 보고 “큰 그릇이라”고 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다음 1298년(충렬왕 24) 사림원(詞林院)에 들어갔는데

학사 박전지(朴全之)· 오한경(吳漢卿) · 권영(權永) 등과 함께 왕이 홍정(紅鞓-붉은 가죽 띠)을 내렸다.

 

충렬왕이 친시(親試)로 문신들의 재능을 시험하여 9명을 뽑았는데,

아우 세기(世基)와 함께 자신은 2등. 아우 세기는 3등에 뽑히어 그때 사람들이 ‘천장급제(天場及第)’라고 칭송하였다.

 

뒤에 기거중서사인을 거쳐 안동부사로 나가 민폐를 일소하고 학교를 일으켰다.

 

다시 군부총랑이 되고 1297년(충렬왕 23) 우사의대부 사림원학사

시우산기상시(右司議大夫詞林院學士試右散騎常侍)를 거쳐 밀직승지가 되었고

1303년 전법판사에 이르렀으며

1307년(충렬왕 33) 적폐(積弊)의 일소를 상소하여 실행하였고

정당문학을 거쳐 상의도첨의사사찬성사가 되었다.

 

1313년 충숙왕이 즉위하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에 이르고 임해군(臨海君)에 봉해졌다.

 

1320년 회갑에는 아들 제현이 과거의 고시관이 되어 문생(門生)을 거느리고 와서 헌수(獻壽)를 하고

전왕(前王) 충선왕이 은병(銀甁) 200개와 쌀 200석을 하사하니 모두 광영스럽게 여겼다.

 

벼슬에서 물러난 다음에는 시와 술로 소요하였다.

 

충주 도선사(道統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는 ≪동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 이진(李王+眞)


자 온고(溫古)

호 동암(東菴)

시호 문정(文定)

기타 인명 이방연(李芳衍)

생년 1244

연령 78

활동분야 문신/관료 / 문신-고려 / 문신


1244(고종 31)∼1321(충숙왕 8). 고려의 문신.

 

초명은 방연(芳衍). 자는 온고(溫古), 호는 동암(東菴)이다.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의 후손으로, 익재(益齋) 제현(齊賢)의 아버지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백가(百家-여러 가지 학설이나 주장을 내세우는

많은 학자 또는 작자作者)에 박통(博通-온갖 사물에 널리 통하여 앎)하고 시(詩)에 능하다는 명성(名聲)이 있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광주*사록(廣州司錄)을 거쳐

직한림원(直翰林院-임금의 명령을 받아 문서를 꾸미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 되었다.

 

충렬왕이 시부(詩賦-운문韻文 형식의 시와 부賦-줄글)로써 친히 문신들을 시험하여 9명을 뽑았는데 제2등으로 뽑혔다.

 

기거중서사인(起居中書舍人-왕의 좌우에 시종하는 자리. 중서문하성에서 간쟁諫諍을 맡아보던 종4품 벼슬)이 되었다가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나가 민폐를 없애고 학교를 일으키는 데 공헌하였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군부총랑(軍部憁郞-1275년. 충렬왕 1년에 시랑侍郎을 고쳐 부른 이름.

1298년(충렬왕 24년)에 다시 시랑으로 바뀜)이 되고,

 

1297년(충렬왕 23)에 *우사의대부 *사림원학사 *시우산기상시(右司議大夫詞林院學士試右散騎常侍)를 거쳐

 *대사성 밀직승지(大司成密直承旨)가 되었으며,

 

1303년에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1307년 적폐(積弊)의 일소를 상소한 것이 채택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중서문하성에 속한 종2품 벼슬)이 된 뒤

*상의 도첨의사사 찬성사(商議都僉議司事贊成事-종1품)가 되었다.

 

1313년에 충숙왕이 즉위하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이 되고 임해군(臨海君)에 봉하여졌으며,

 

1315년에는 과거의 고시관(考試官)이 되어 진사(進士)를 뽑았다.

 

1320년에는 아들 제현(齊賢)이 과거의 고시관 되어 새 문생(門生)을 거느리고 수(壽)를 칭송하자

전왕인 충선왕이 은병(銀甁) 200개와 쌀 200석을 하사하였다.

 

체구가 크고 마음이 너그러웠으나 아들 제현(齊賢)의 세력에 의지하여

남의 노비(奴婢)를 탈취(奪取)한 것이 많아 호소하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학문(學文)과 시(詩)와 술(酒)로 소요(逍遙)하였다.

 

충주 도통사(道統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 《동암집》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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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 중조 3세로 고려 건국시 태조 왕건을 도왔다.

중원태수 호부랑중의 관직에 있었고 신라 경순왕의 셋째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으니

즉 태조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가 경순왕에게 시집을 갔는데 이들의 3녀가 태수공(휘 금서)의 배(配)이다.

*사록(司錄)- 경(京), 도호부(都護府), 목(牧)에 설치되어 수령을 보좌하던 관원.

제술과 급제자가 초직(初職)으로 받는 정7품의 외직(外職)이었음.

속읍을 순찰하고 속읍의 행정을 감독하였으며, 주읍과 속읍의 향리들이 결탁하는 폐단을 방지하였음.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중서문하성에 속한 정4품 낭사 벼슬. 우간의대부를 고친 것이다

*사림원 학사(詞林院學士)- 임금의 명령을 받아 문서를 꾸미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학사는 사림원에 속한 종3품 벼슬. 학사승지가 종2품이다.

*시우산기상시(試右散騎常侍)- 사림원 문하부의 정3품관

*대사성 밀직 승지(大司成密直承旨) - 유학과 문묘의 관리, 의례(儀禮)·접대(接待) 등의 일을 맡아 본 정3품.

 

*전법판서(典法判書) - 고려 시대 법률(法律) 사송(詞訟) 형옥(刑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전법사(典法司)의 벼슬 이름.

정3품의 품계로서 판사(判事) 다음에 해당함.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고친 이름임.

*상의 도첨의사사(商議都僉議司事) - 서무, 간쟁과 봉박을 관장. 내의성. 내사문하성. 중서문하성. 첨의부. 도첨의사사. 문하부.

*검교(檢校) - 고려 말기에 높은 벼슬자리를 정원 외에 임시로 늘리거나,

실지로 사무는 맡기지 않고 이름만 가지게 할 때 그 관직명 앞에 붙인 말.

*첨의정승(僉議政丞)- 문하시중(門下侍中), 첨의좌정승(僉議左政丞), 첨의우정승,

수시중(守侍中) 등 고려 시대 최고 중앙행정관청에서 일하는 부총리급의 관직.


 

 ● 32세 이진택(李鎭宅) - 익재공후 판윤공파


1738(영조 14)~1805(순조 5).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양중(養重), 호는 덕봉(德峯)이다.

 

경주 출신으로 이진원(李晉遠)의 문인으로 8세 때에 닭싸움을 보고

“상앙(商鞅)의 법으로 논죄할 것 같으면 이 닭은 당장 삶아 먹을 것을.....(若論商鞅法 此鷄當烹食.....)”

이라는 글을 지어 스승을 놀라게 하였다.

 

1780년(정조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성균전적 · 예조정랑 · 사헌부 감찰 · 병조좌랑 · 사헌부 지평 · 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가 사도세자의 사건에 책임이 있으므로

부관참시(剖棺斬屍)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1793년 대간으로 있을 때 사노비혁파(寺奴婢革罷)를 상소하여 결정적인 계기를 조성하였으며

1801년(순조 1) 공노비해방(公奴婢解放)을 보게 되는 등 왕의 신임이 컸었으나

1802년 서유방(徐有防) 등을 옹호한 일로 삼수로 귀양 갔다가

2년 만에 풀려나 그 이듬 해에 죽었다.

 

저서로 ≪덕봉문집≫이 있다.


○ 이진택(李鎭宅)


자 양중(養重)

호 덕봉(德峯)

생년 1738

연령 68

활동분야 문신 / 관료 / 조선후기 / 학자

과거 및 취재 [문과] 정조(正祖) 4년 (178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1위


1738(영조 14)∼1805(순조 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자는 양중(養重), 호는 덕봉(德峯). 경주출신.

 

아버지는 운배(雲培)이며, 어머니는 영양 남씨(英陽南氏)로 국망(國望)의 딸이다.

 

*이진원(李晉遠)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8세 때 닭싸움을 보고

 

“*상앙의 법률로 논죄할 것 같으면, 이 닭은 당장 삶아 먹을 것을(若論商앙法 此鷄當烹食)……”

이라는 글을 지어 선생을 놀라게 하였다.

 

1780년(정조 4)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 부정자를 거쳐

성균 전적·예조 정랑·사헌부 감찰·병조 좌랑·사헌부 지평·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가 사도세자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그의 *부관참시(剖棺斬屍)를 주장한 사람이다.

 

또, 1793년 그가 대간으로 있을 때 *사노비혁파(寺奴婢革罷)를 주장한 상소를 올려

사노혁파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러한 개혁론의 여파로 1801년(순조 1)에는 공노비해방을 보게 되었다.

 

한때, 정조의 신임을 크게 받았으나 관운이 좋지 않았다.

 

1802년 *서유방(徐有防) 등을 옹호하였다는 이유로 *삼수로 귀양갔다가

2년 뒤에 풀려났고, 그 다음해에 죽었다.

 

저서로는 《덕봉문집》이 있다.

 

○ 배는 울산 이씨(蔚山李氏) 선전관(宣傳官) 박(璞)의 따님과

또 한 분 안동 권씨(安東權氏) 달규(達規)의 따님으로 통덕랑(通德郞) 복한(復漢)과 2녀를 두었다.

 

세계는 판윤공 지대→ 부사공 점→ 차자 군수공 원림→ 찰방공 광증→ 병사공 승형→ 3자 참의공 몽성→

훈도공 후근→ 통덕랑 지훈→ 호군공 진→ 윤석→ 계자 운배→ 5자 진택

-------------

* 이진원(李晉遠)- 호는 남애(南厓). 덕봉공이 8살 때 글을 배운 스승.

* 상앙의 법으로 따진다면 싸움하는 닭도 법에 의거하여 당장 삶아 먹어도 된다는 뜻이다.

* 상앙(?∼BC 338)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진(秦)나라 정치가·법가사상가(法家思想家).

위(衛)나라 공족(公族)의 자손이었기 때문에 위앙 또는 공손앙이라고도 한다.

두 번에 걸쳐 진나라 정치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목적은 종래의 귀족층의 특권을 폐지하고 중앙집권정치체제를 만들어 부국강병을 실현하여

후진국이었던 진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었고 그 공적에 의하여 그는 상(商)에 봉해져 상군(商君)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강제적 개혁은 귀족층의 원망을 사서 효공이 죽은 뒤 극형에 처해졌다.

 

*김상로(金尙魯)- 1702(숙종 28)∼?.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경일(景一), 호는 하계(霞溪)  만하(晩霞)로서

대제학 김유의 아들이며, 좌의정 김약로(金若魯)의 아우이다.

경종 1년(1721) 진사가 되었고, 영조 10년(1734)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가

곧 지평이 되고 한림(翰林) 출신이라 하여 6품직에 승진하였다.

승지로 무과의 폐단을 지적하고 엄격히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다.

영조 28년(1752)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파직되었다.

1754년 다시 좌의정이 되었고, 1759년 영의정이 되었다.

1762년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참여하여 영조의 동조를 얻었으나

왕이 이를 후회하자 청주로 귀양 가게 되었으며 특명으로 풀려난 뒤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죽은 뒤에 정조가 즉위하자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고종 때 신원되었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홍계희(洪啓禧)-(洪啓禧, 1703년 ~ 1771년)는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

본관은 남양. 자는 순보. 호는 담와. 참판 우전의 아들이다.

1762년에는 그가 속한 노론의 주도하에 장헌 세자의 난행을 과장하여 영조에게 보고한 결과

세자(사도세자)를 쌀뒤주 속에서 죽음으로 몰고 갔다.

1777년 그의 아들들이 역모 사건으로 처형됨으로써 그도 관작이 추탈되었다.

 

*부관참시(剖棺斬屍)-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난 사람을 극형에 처하던 일.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걸었다.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가 사도세자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그의 부관참시(剖棺斬屍)를 주장한 것이다.

 

*사노비혁파(寺奴婢革罷)- 사노비(私奴婢)와 다르다.

절에 딸린 노비로 큰절에서는 280명이나 사노비를 거느린 절도 있었다.

사노비(寺奴婢)의 폐해가 많아 사노비를 해방시키려 한 상소이다.

 

*서유방(徐有防)- 1741(영조 17)∼1798(정조 2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원례(元禮), 호는 봉헌(奉軒).

1772년 별시 탕평과(蕩平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부응교로 벼슬을 시작하여

1797년에는 강원도 관찰사로서 간성의 인구동태를 조사하여

《간성유민환접타민이접성책杆城流民還接他民移接成冊》을 지어 올렸고

정조 때에 권력의 중추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서도에 능하였는데 1785년에 쓴 규장각 상량문 등의 글씨가 있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삼수(三水)- 함경남도 북서쪽에 있는 고장. 삼수갑산(三水甲山)의 삼수로 아주 깊은 오지의 땅이다.


 

● 34대 이집두(李集斗) - 익재공후 생원공파


1744(영조 20)~1820(순조 20). 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중휘(重輝), 호는 파서(琶西) 또는 구학(臞鶴). 좌의정 경억(慶億)의 5대손으로

감역 진원(進源)의 아들이다.

 

1774년(영조 50) 진사가 되고, 이듬해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한림에 들어갔다.

 

뒤에 이조좌랑·장령·이조참의·대사성·승지를 거쳐 강릉현감으로 나갔을 때 상소하여

해폐(海弊)·군폐(軍弊)·세폐(稅弊)·삼폐(參弊) 등의 읍폐(邑弊)를 일소하도록 건의하였다.

 

이어서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안동부사와 1798년(정조 22)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변방의 야인을 잘 다스렸으며

1800년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801년(순조 1) 한성부판윤·공조판서·예조판서가 되었고

1810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판돈녕부사로 치사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 34대 이집두(李集斗)


*생원공(生員公): 휘 타- 8별 중 4남(자라 타- 쌍日밑田밑一힘쓸민. 맹꽁이맹)


자 중휘(仲輝)

호 파서(琶西)/구학(구鶴)

생년 1744

연령 77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후기

과거 및 취재 [문과] 영조(英祖) 51년 (1775) 을미(乙未) 별시2(別試) 병과(丙科) 5위

[생원진사시] 영조(英祖) 50년 (177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32위


1744(영조 20)∼1820(순조 20). 조선 후기의 문관.

 

자는 중휘(仲輝), 호는 파서(琶西) 또는 구학(구鶴).

 

좌의정 경억(慶億)의 5대손으로, 감역 진원(進源)의 아들이다.

 

1774년(영조 50)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한림에 들어갔다.

 

그 뒤 이조좌랑·장령·이조참의·대사성·승지를 거쳐, 강릉 현감이 되었을 때는 상소하여

*해폐(海弊)·*군폐(軍弊)· *세폐(稅弊)·*삼폐(蔘弊) 등 네 가지 *읍폐(邑弊)를 들고 그 시정을 건의하였다.

 

이어 대사간·대사헌과 외직으로 안동부사,

 

1798년(정조 22)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변방의 야인을 잘 다스렸고,

 

1800년 *주청부사(奏請副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순조가 즉위하자 한성 판윤, 공조·예조판서가 되고,

 

1810년 *동지사(冬至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판돈령부사로 치사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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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폐(海弊)- 어민들의 고기잡이와 해산물에 대한 세금 부과 등에 대한 폐해가 심각하여

어민의 생업에 커다란 문제가 대두된 폐단이다.

*군폐(軍弊)- 군포로 인한 폐단. 대개 군역의 폐단이라고 한다.

*세폐(稅弊)- 공물 즉 세금에 대한 폐단

 

*삼폐(蔘弊)- 자연삼의 수요가 폭증하고 왕실은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백성에게 부담을 지워

인삼 공납(貢納)을 강화함으로 관리들의 악정에 의한 폐단.

*읍폐(邑弊)- 고을의 폐습이나 폐해.

*주청부사(奏請副使)- 조선 시대에, 동지사(冬至使) 이외에

중국에 주청할 일이 있을 때 보내던 사절 중 정사 다음의 자리.

*동지사(冬至使)- 조선 시대에, 해마다 동짓달에 중국으로 보내던 사신. ≒하동지사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조선 시대에 둔, 돈령부의 으뜸 벼슬. 품계는 종1품이다.

돈령부는 조선시대 왕실의 친척을 위한 사무를 관장한 관청이다.

실제의 직사(職事)는 없었으며 관원으로 영사(領事: 정1품)·판사(判事: 종1품)·지사(知事: 정2품)·

동지사(同知事: 종2품)·도정(都正: 정3품)· 정(正: 정3품)·부정(副正: 종3품) 각 1명,

첨정(僉正: 정4품)·판관(判官: 종5품)·주부(主簿: 종6품)·직장(直長: 종7품)· 봉사(奉事: 종8품)·

참봉(參奉: 종9품) 각 2명을 두었다.

*기로소(耆老所)- 조선 시대에, 70세가 넘는 정이품 이상의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

태조 3년(1394)에 설치하여 영조 41년(1765)에 독립 관서가 되었고, 이때부터 임금도 참여하였다.

≒기사(耆社)·기소(耆所)·치사기로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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