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경주이씨 인물(재-제)

녹전 이이록 2009. 4. 14. 16:33

경주이씨 인물(재-제)

 

 

● 이재수(李在秀)


1912~1974. 국문학자.

 

호는 상산(常山) 충북 진천 출신. 봉섭(鳳燮)의 4남이다.

 

어려서 한문 공부를 하다가 진천보통학교를 마치고

1933년 청주고등보통학교를 나와서

1938년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과(한국고전문학 전공)를 졸업하였다.

 

1945년 광복까지 황해도 재령 명신중학교(明信中學校)와 배재중학교(培材中學校)의 교유(敎諭)로 있었고

1946년 국학대학 교수·연희대학 조교수로 취임했다가 그 해 9월에 사임하였고

숙명여자대학과 중앙대학 강사로 있다가 1948년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 교수로 2년 동안 근무하다가

1950년 대구사범대학(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취임한 이래 1974년까지 25년간 근무하였다.

 

1961년부터 10여년간 경북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장으로 근무했으며

1961년에 경북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저서로는 ≪윤고산연구(尹孤山硏究)≫(1956)·≪한국소설연구≫(1969)·≪고전문학선≫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한국소설 발달단계에 있어서의 중국소설의 영향>(1956) · <박혁거세전설논고>(1964) ·

<시조엔 유배지가 없다-윤선도->(1965) · <박연암소설논고-호질과 허생전을 중심으로->(1966) ·

<금오신화의 연구>(1966) · <혈의 누 연구>(1968) · <춘향전 이본고-상산본(常山本)을 중심으로->(1968) ·

<화전가연구>(1972) 등이 있고 유고집으로 <내방가사연구>가 있다.

 

1976년 달성군 냉천성결교회 묘지에 묘비가 세워졌는데 비명은 서수생이 짓고 썼다.

 

 

● 19세 이전(李立+專) - 국당공파


생몰년 미상. 조선 초의 문신

 

고려 말의 호부상서 달충(達衷)의 아들.

 

벼슬은 동지밀직사사 · 안동부사를 역임하였으며 태조의 개국(開國)에 협력하여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1396년(태조 5) 익안대군(益安大君) · 판한성부사 정희계(鄭熙啓) 등과 술자리에서

추중망언한 일로 해남으로 유배되어 적소에서 죽었다.

 

○ 19세 이전(李立+專)


할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전기


생몰년 미상.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고려 말의 호부상서 달충(達衷)의 아들이며, 이조판서 승적(升嫡-女없음)의 아버지이다.

 

벼슬은 동지밀직사사·안동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태조에 의하여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봉되었다.

 

1396년(태조 5) 익안대군(益安大君), 판한성부사 정희계(鄭熙啓) 등과 술좌석에서 범한

 

취중망언(妄言)으로 해남(海南)으로 유배되어 복역 중 죽었다.


 

● 25세 이정(李淀) - 국당공후 정순공파


1589(선조 22)~1668(현종 9). 조선 중기의 문신

 

초명은 조호(淙滈)· 자는 노천(老泉),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수일(守一)의 아들이다.

 

1612년(광해군 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9년 금오랑에 임명되었다.

 

당시의 세력가인 이이첨(李爾瞻)이 그의 당으로 끌어들이려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고

뒤에 직장(直長)에 올랐으나 행신(倖臣)의 서자와 같은 벼슬이라 하여 스스로 물러났다.

 

1623년 (인조 1) 인조반정 뒤 거창현감으로 내려갔고 이괄의 난 때에는 아버지를 도와 반군을 막았다.

 

뒤에 여러 고을의 수령을 거쳐 상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이를 핑계로 사양하였고 장례원판결사로 임명되었다.

 

1661년(현종 2) 노비의 일이 궁액(宮掖)에 관련되어 파직되었다가

1668년 가선대부의 품계를 받고 경림군(慶林君)에 습봉(襲封)되었다.   

 

○ 25세 이정(李淀)


자 노천(老泉)

기타 인명 이종호(李淙?)

생년 1589

연령 80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중기


1589(선조 22)∼1668(현종9). 조선 중기의 문신. 초명은 종호(淙?). 자는 노천(老泉).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수일(守日)의 아들이다.

 

1612년(광해군 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9년 금오랑(金吾郞)에 제수 되었다.

 

당시 세력가인 이이첨(李爾瞻)이 그를 그의 당(黨)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그 뒤 직장으로 승진하였는데 *행신(倖臣)의 서자와 같은 벼슬이라 하여 관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뒤 거창 현감으로 발탁되고,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아버지를 도와 반군(叛軍)을 막았다.

 

그 뒤 여러 고을의 수령을 거쳐 상주목사로 임명되었으나 나이를 핑계로 사양하였고,

이어 장례원 판결사로 임용되었다.

 

1661년(현종 2) 노비의 일이 *궁액(宮掖)으로 확대되어 왕과 마찰을 빚자 파직되고,

 

1668년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고 경림군(慶林君)에 *습봉(襲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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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신(倖臣)- 총애 받는 신하

*궁액(宮掖)- 궁례(宮隷)라고 하며 각 궁에 속한 노예이다.

*습봉(襲封)- 제후(諸侯)가 윗대의 영지(領地)를 물려받음. 봉작을 물러 받음


 

● 28세 이정(李靖) - 국당공후 문정공파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위경(衛卿). 정암(廷馣)의 손자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동부승지·김해부사 등을 역임하고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수안군수 직무대리로서 수안성을 지켜 적의 진로를 차단하고

경군(京軍)에 합류하여 안령(鞍嶺) 북쪽을 지킨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에 책록 되었다.


○ 28세 이정(李靖)


자 위경(衛卿)

활동분야 국방 / 무신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무신.

 

자는 위경(衛卿). 정암(廷암)의 손자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동부승지·김해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수안 군수 직무대리로서

강용(姜湧)과 함께 수안성을 지켜 적의 진로를 차단하고,

본군에 합류하여서는 *안령(鞍嶺)북쪽을 지키는 등의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에 책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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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李适)의 난- 조선 인조 2년인 1624년에 일어난 난.

이괄(李适)은 인조반정에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2등 공신에 봉해지고,

그 뒤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좌천되어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다 반역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아 아들이 잡혀 가자 부하인 기익헌 등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한때 서울을 점령하고, 인조는 공주로 피난했으나

서울 점령 하루 만에 정부군에 패하여 이괄은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 잔당들이 후금으로 달아나 선동함으로써 정묘호란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수안(遂安)- 황해도에 속한 군. 동쪽은 곡산군, 남쪽은 신계군 ·서흥군, 서쪽은 평남 중화군,

북쪽은 평남 강동군·성천군에 접한다.

*안령(鞍嶺)- 서울 근교 서쪽에 있는 안장고개

길마재라는 이름은 무악이 두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어서 멀리서 보면 두 봉우리 사이가 잘룩하여

마치 말안장 같이 생겼기 때문에 말안장 곧 길마재라 하고, 한자로 안현(鞍峴)이라 하였다.

*진무공신(振武功臣)- 조선 인조 2년(1624)에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로자에게 내린 훈호(勳號).

장만, 정충신 등 32명에게 주었다.


 

● 20세 이정견(李廷堅) - 국당공파


?~1409(태종 9). 조선 초기의 문신

 

고려 말의 정랑 육(毓)의 아들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한 뒤 좌상시 · 밀직사사 등을 거쳐 

태조 때에는 간관을 역임하고 태종 조에 첨서승추부사(僉書承樞府事)에 이르렀다.

 

1402년(태종 2) 예문관제학으로 우의정 성석린(成石璘)과 함께

명나라의 고명인장(誥命印章)의 하사를 사례하기 위한 대명사행(對明使行)을 수행하였다.


○ 20세 이정견(李廷堅)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전기


?∼1409(태종 9).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고려 말의 정랑 육(毓)의 아들이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한 뒤 좌상시(左常侍) · 밀직사사 등을 거쳐 

태조조에는 간관을 역임하고, 태종조에 첨서승추부사(簽書承樞府事)에 이르렀다.

 

1402년(태종 2)에는 예문관 제학으로 우의정 성석린(成石璘)과 함께

전해의 *고명인장(誥命印章)하사를 사례하기 위한 대명사행(對明使行-명나라에 사신일행으로 감)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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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인장(誥命印章)-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등극을 축하하는 등극사(登極使)로서

명나라에 가 조선 왕조를 완전히 승인하는 고명인장(誥命印章)을 받아왔다.


 

● 이정근(李正根)


호 심수(心水)

생년 1531

활동분야 예술/ 화가


1531(중종 26)∼? 조선 중기의 화가. 호는 심수(心水).

 

*화원으로 *사과를 지낸 명수(明修)의 아들이다.

 

그 역시 화원으로 사과를 지냈으며, 수형(壽亨)―홍규(泓규)―기룡(起龍)으로 이어지는 화원집안을 형성하였다.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인 윤두서(尹斗緖)는

“그가 안견(安堅)을 따라서 필법이 정교하여 *이불해(李不害)의 선구로 삼을만하다.”고 평한 바 있다.

 

유작으로 〈설경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미법산수도 米法山水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전한다.

 

〈설경산수도〉는 조선 초기 안견 화풍의 형식화된 특징을 보이고 있는 데 반해,

〈미법산수도〉는 *남종화풍(南宗畵風)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어

우리나라 남종화의 수용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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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원(畵院)- 나라에서 설치한 회화의 전문기관.

한국은 고려시대부터 도화원이 설립되어 화가를 양성하고 회화를 관장케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도 국초부터 도화원을 설치하였다가 후에 도화서(圖畵署)로 개칭하였다.

*사과(司果)- 조선시대 오위(五衛)의 정6품 군직(軍職).

정원 21명으로서, 부사직(副司職)의 다음 벼슬이다.

^원록체아직(元祿遞兒職)으로, 공신과 공신의 적장자손(嫡長子孫-적통의 장손 계대)을 후대하고,

대기문관(待機文官- 현직이 없어 대기 중인 문관)에게 봉록만을 급여하기 위하여 임명하는 직무 없는 관직이다.

현직에 있지 않은 문무관(文武官)·음관(蔭官) 중에서 임명하였다.

원록체아직(元祿遞兒職)- 현직(現職)에 있지 아니한 문관(文官)· 무관(武官)· 음관(蔭官)·

잡직(雜職)에 있었던 사람에게 계속해서 녹봉(祿俸)을 주기 위하여 만든 관직.

 

*이불해(李不害)- 1529(중종 24)∼? 조선 중기의 화가. 자는 태수(太綏).

가계와 행적 등이 알려져 있지 않다.

예장소요도(曳杖逍遙圖)- 이 그림은 한 선비가 지팡이를 끌며 산 속을 산책하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의 작품 역시 희소한 편으로 이외 개인 소장의〈기려독행도〉,〈산수도〉가 알려져 있으며,〈모춘도 暮春圖〉와〈묘작도 猫鵲圖〉등의 작품이 그의 작품으로 전칭되고 있다.

*남종화풍(南宗畵風)- 조선 중기의 전통화풍을 모태로 삼으며 임진란 이후 유입되기 시작한

중국 남종문인화를 일컫는다.

 

 

● 26세 이정암(李廷馣) -  당공후 문정공파


1541(중종 36)~1600(선조 3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중훈(仲薰), 호는 사류재(四留齋)·퇴우당(退憂堂)·월당(月塘)이고 서울 출신이다.

 

사직서령 탕(宕)의 아들이고 이조참판 정형(廷馨)의 형이다.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권지부정자를 역임하고 예문관검열로 사관을 겸하였다.

 

1567년(선조 1) 성균관전적·공조좌랑·병조좌랑을 역임하였고

전라도도사 · 형조좌랑 · 함경도도사 · 경기도도사로 옮겼다가 춘추관 기주관 · 형조좌랑 · 지제교를 거쳐

병조정랑 때에 암행어사로 강원도의 재해지역을 살피고 돌아와 정언에 이르렀다.

 

1571년 예조정랑·사헌부지평으로 춘추관을 겸하고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2년 성균관사예가 되어 춘당대친시(春塘臺親試)에 참시관(參試官)이 되었고

이듬해 연안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부민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1576년 장단부사·1578년 제용감정을 역임하였다.

 

1579년 양주목사로 나가서 도봉서원과 향교를 중수하고 전안(田案)을 개혁하였으며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치적을 크게 올렸다.

 

1580~7년까지 평산부사·장령·사성 등을 역임하고 동래부사를 지냈다.

 

1591년 첨지중추부사·승지·공조참의·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조참의로 뒤늦게 호종하였으나 이미 체직되어 소임이 없었다.

 

아우 개성유수 정형과 함께 개성을 수비하려 하였으나 임진강의 방어선이 무너져 실패하고

황해도로 들어가서 초토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연안성(延安城)을 지키려고 준비하던 중에

왜장 구로다(黑田長政)가 5,000~6,000명의 장졸을 이끌고 침입하여

주야 4일간의 피비린 격전에서 승리한 공으로 황해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1593년 병조참판·전주부윤·전라도관찰사를 거쳐

1596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으나

죄수를 임의로 처벌했다는 누명으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지중추부사·황해도관찰사 겸 도순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해서초토사로 해주의 수양산성을 지켰다.

 

난이 끝나자 풍덕에 은퇴하여 시문(詩文)으로 소일하며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1604년 연안수비의 공으로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고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서되었다.

 

성혼(成渾)·이제신(李濟臣) 등과 교유하였으며 연안 현충사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상례초(喪禮抄)≫ · ≪독역고(讀易攷)≫ · ≪왜변록(倭變錄)≫ · ≪서정일록(西征日錄)≫ ·

≪사류재집(四留齋集)≫ 등이 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 26세 이정암(李廷암)


자 중훈(仲薰)

호 사류재(四留齋)/퇴우당(退憂堂)/월당(月塘)

시호 충목(忠穆)

생년 1541

연령 60

활동분야 문신/관료 / 문신-조선중기 / 문신

과거 및 취재 [문과] 명종(明宗) 16년 (15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9위

[생원진사시] 명종(明宗) 13년 (155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二等) 5위


1541(중종 36)∼1600(선조 33).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중훈(仲薰), 호는 사류재(四留齋)·퇴우당(退憂堂)·월당(月塘).

 

서울 출신. 사직서령(社稷署令) 탕(宕)의 아들이며, 이조 참판 정형(廷馨)의 형이다.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6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처음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를 역임하고 예문관검열로 사관을 겸하였다.

 

1565년 승정원주서를 거쳐

 

1567년(선조 즉위년)에는 성균관전적·공조좌랑·예조좌랑·병조좌랑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듬해 외직인 전라도도사를 역임하면서 치적을 올렸고,

 

이어 중앙으로 돌아와 형조좌랑을 거쳐 다시 외직인 함경도도사로 나아갔다.

 

1569년 경기도도사로 옮겼다가 경직인 춘추관기주관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형조좌랑에 재임용되어 지제교를 겸하였으며,

다시 병조정랑으로 전직하여 암행어사의 임무를 띠고

강원도에 파견되어 재해지역을 살피고 돌아와 정언을 역임하였다.

 

1571년 예조정랑·사헌부지평으로 춘추관의 직책을 겸대하고《명종실록》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경기도경차관(京畿道敬差官)으로 재해지역을 살피고 돌아왔다.

 

1572년 성균관사예에 임명되어 춘당대친시(春塘臺親試)에 참시관(參試官)으로 입시하였고,

그 해 여름 연안부사가 되어 군적(軍籍)을 다시 정리하였으며, 선정을 베풀어 부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576년 장단부사를 거쳐 1578년 제용감정(濟用監正) 등을 역임하였다.

 

다음해에 양주목사로 나가 도봉서원(道峰書院)과 향교를 중수하고,

전안(田案)을 개혁, 대동법을 실시하여 번잡한 역(役)을 없애는 등 크게 치적을 쌓았다.

 

1580년 평산부사를 거쳐 1584년 장령·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587년 동래부사가 되어 내왕하는 일본인들의 폐단을 근절시켰다.

 

1591년 첨지중추부사·장례원판결사·승지·공조참의·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 이조참의로 있었는데,

선조가 평안도로 피난하자 뒤늦게 *호종(扈從)하였으나 이미 *체직되어 소임이 없었다.

 

아우인 개성유수 정형과 함께 개성을 수비하려 하였으나 임진강의 방어선이 무너져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 황해도로 들어가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여 연안성(延安城)을 지킬 것을 결심하고

준비 작업을 서두르던 중, 도내에 주둔한 왜장 구로다(黑田長政)가 5,000∼6,000명의 장졸을 이끌고 침입하여

주야 4일간에 걸친 치열한 싸움 끝에 승리하여 그 공으로 황해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1593년 병조참판·전주부윤·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596년에는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죄수를 임의로 처벌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파직되었다가 다시 지중추부사가 되고,

황해도관찰사 겸 도순찰사가 되었다.

 

이듬해(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해서초토사(海西招討使)로 해주의 수양산성(首陽山城)을 지키기도 하였다.

 

난이 끝나자 풍덕에 은퇴하여 시문으로 소일하다가 몇 년 뒤에 죽었다.

 

1604년 연안 수비의 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2등에 책록 되었으며,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에 추봉,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성혼(成渾)·이제신(李濟臣) 등과 교유하였다.

 

 

연안 현충사(顯忠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상례초 喪禮抄》·《독역고 讀易攷》·《왜변록 倭變錄》·《서정일록 西征日錄》·《사류재집》 등이 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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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종(扈從)-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따르던 일.

*체직(遞職)- 체임(遞任)- 벼슬을 갈아 냄. ≒체관(遞官)


○ 휘 정암(廷암香+奄)


생졸년(生卒年)은 1541∼1600(中宗 36∼宣祖 33)이다.

 

조선 중기 문신(文臣)으로 자는 중훈(仲薰)이고 호는 사류재(四留齋), 퇴우당(退憂堂), 월당(月塘)이다.

 

한성부 서부 반석방 한림동(현재 합동, 중림동 지역)에서 살았고

사직서령(社稷署令) 탕(宕)의 아들이며 이조참판 정형(廷馨)의 형이다.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하고 진사가 되었으며

1561년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를 역임하고 *예문관검열 (藝文館檢閱- 정9품)로 *사관(史官)을 겸하였다.

 

1565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를 거쳐

1567년(선조 卽位年)에는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공조좌랑, 예조좌랑·병조좌랑(兵曹佐郞) 등을 두루 역임하고,

1568년(선조 1) 외직(外職)인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 종5품 벼슬)로 나가 치적을 쌓았다.

 

이어 중앙으로 돌아와 형조좌랑을 거쳐 다시 외직인 함경도도사로 나아갔다.

 

1569년 경기도도사로 옮겼다가 중앙으로 올라가 경직(京職-중앙 관직)인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형조좌랑에 재임용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으며

다시 병조정랑으로 전직하여 암행어사의 임무를 띠고 강원도에 파견되어 재해지역을 살피고 돌아와

정언(正言-사간원에 속한 정6품 벼슬)을 역임하였다.

 

1571년 예조정랑(禮曹正郞) ·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사헌부에 딸린 정5품의 벼슬)으로 춘추관의 직책을 겸대하고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한 뒤 *경기도경차관(京畿道敬差官)으로 재해지역을 살피고 돌아왔다.

 

1572년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에 임명되어 춘당대친시(春塘臺親試)에 참시관(參試官)으로

입시하였고, 정여립(鄭汝立)과 절교하고 그 해 여름 외직으로 나가

연안부사(延安府使)가 되어 군적(軍籍)을 정리하고 군민을 잘 이끌어 칭송을 받는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1576년 장단부사를 거쳐 1578년 제용감정(濟用監正) 등을 역임하였다.

 

다음해에 양주목사(楊州牧使)로 부임하여 향교(鄕校)와 도봉서원(道峰書院)을 중수하고,

전안(田案)을 개혁,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번잡한 역(役)을 없애는 등 크게 치적을 쌓았다.

 

1580년 평산부사(平山府使)를 거쳐 1584년 (선조 17년) 장령(掌令)·사성(司成)·장악원 정(掌樂院正) 등을 역임하였다.

 

1587년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어 일본인들의 잦은 침입을 근절시켰고 일본인들의 폐단을 근절시켰다.

 

1591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 장례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 · 승지(承旨) · 공조 참의(工曹參議) ·

병조 참의(兵曹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이조참의였던 사류재공은

선조가 급히 평안도로 몽진을 떠나 처음에는 미처 호종(扈從)을 못하고 뒤늦게 호종하였으나,

이미 체직(遞職-遞任- 직위 해제)되어 소임(所任)이 없었다.

 

아우인 개성유수(開城留守) 정형(廷馨)과 함께 개성을 수비하려 하였으나

임진강의 방어선이 무너져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 황해도 연안에서 황해도초토사(黃海道招討使)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이끌어

연안성(延安城) 사수를 결의하고 준비작업을 서두르던 중 왜적과 대치한다.

 

도내에 주둔한 왜장 구로다(黑田長政)가 5, 000∼6, 000명의 장졸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총포로 무장한 4천명의 왜적에 포위되자 의병 결사대를 조직하여

5일 밤낮에 걸친 사투 끝에 마침내 적을 물리치니 이것이 유명한 연안대첩이다.

 

왜장 구로다나가마사[黑田長政(흑전장정)]의 부대를 격파하여

그 공으로 황해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1593년 병조참판 · 전주부윤(全州府尹) ·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596년(선조26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죄수를 임의로 처벌하였다하여 파직되었다가 다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고

황해도관찰사 겸 도순찰사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해서초토사로 활약하였다.

 

해주의 수양산성(首陽山城)을 지키기도 하였다.

 

끝난 후 사직하고 풍덕(豊德)으로 은퇴하여 시문(詩文)으로 소일하였다.

 

몇 년 뒤에 돌아갔다.

 

1604년(선조 37년) 연안수비의 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에 2등으로 추록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성혼(成渾)·이제신(李濟臣) 등과 교유하였다.

 

연안 현충사(顯忠祠)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상례초(喪禮抄)》,《왜변록(倭變錄)》,《서정일록(西征日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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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 승문원이나 교서관에 속하여 문서의 교정을 맡아보던 벼슬

*예문관검열 (藝文館檢閱)- 사초 꾸미는 일을 맡아보던 정9품 벼슬

*사관(史官)- 역사의 편찬을 맡아 초고(草稿)를 쓰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승정원의 정7품(正七品) 벼슬 사초(史草)를 쓰는 일을 맡아보았음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 전라감영(全羅監營)의 종5품 벼슬. 감사(監司)의 다음가는 벼슬임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춘추관 사관(史官)직의 하나이다.

역사의 기록과 편찬을 담당하고 시정(時政)을 기록하는 일을 봄- 정5품. 종5품

*지제교(知製敎)- 왕에게 교서(敎書) 따위의 글을 기초하여 바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

*경기도경차관(京畿道敬差官)- 조선 시대 수시로 특수임무를 띠고 각 도에 파견된 특명관. 3-5품관

 

○ 퇴우당공(退憂堂公) 정암(廷香+奄)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한성부 서부 반석방 한림동(현재 합동, 중림동 지역)에 살았으며

사직서 영(社稷署令) 오제공(悟齊公) 휘 탕(宕)의 차자이다.

 

호는 퇴우당(退憂堂), 사류재(四留齋), 월당(月塘)이고 자는 중훈(仲薰)이다.

 

생몰년은 1541(중종 36)∼1600(선조 33)이다.

 

1558년(명종 1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고

 

1561년(명종 1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이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로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명종 20년(1565)에는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었으며,

선조(宣祖) 즉위년인 1567년에는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과 공조·예조·병조의 좌랑(佐郞)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외직(外職)인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로 나갔다가

다시 중앙에 들어와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거쳐 함경도 도사(咸鏡道都事)로 나갔다.

 

선조 2년(1569)에는 경기도 도사(京畿道都事)로 전임되었다가

중앙으로 들어가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형조 좌랑에 재임용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가

다시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 전임되었다.

 

이때 암행어사의 임무를 띠고 강원도에 나가 재해지역을 돌아보고 돌아와 정언(正言)을 지냈다.

 

선조 4년(1571)에는 예조 정랑(禮曹正郞)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춘추관의 직책을 겸하고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경기도 경차관(京畿道敬差官)으로 나가 재해지역을 돌아보았다.

 

이듬해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 제수되었으며 그해 연안 부사(延安府使)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선조 9년(1576)에는 장단 부사(長湍府使)를 거쳐 1578년에는 제용감 정(濟用監正) 등을 지냈다.

 

1578년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부임하여 행교(鄕校)와 도봉서원(道峰書院)을 중수(重修)했으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번다한 역(役)을 없애는 등 치적을 쌓았다.

 

1580년에는 평산 부사(平山府使)로 나갔고

선조 17년(1584) 장령(掌令) · 사성(司成) · 장악원 정(掌樂院正) 등을 지냈으며,

1587년에는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되어 왜인(倭人)들의 폐단을 없앴다.

 

1591년에는 장례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승지(承旨)·공조 참의(工曹參議)·병조 참의(兵曹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1592년에는 이조 참의로 있으면서 왕을 호종(扈從)하였으나 체직되어 별 임무가 없었다.

 

아우인 당시 개성 유수(開城留守) 정형(廷馨)과 함께 개성을 수비하였는데 개성이 함락되자

황해도에서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활약하였다.

 

초토사(招討使)에 임명되어 연안(延安)을 수비하던 중 흑전장정(黑田長政)의 6,000여 명의 군을 대파하였고

그 공으로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겸 순찰사(巡察使)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병조참판 · 전주 부윤(全州府尹) 등을 지내고 곧 전라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선조 29년(1596)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으나

죄수를 임의로 처벌하였다 하여 한때 파직되었다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고, 황해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해서 초토사(海西招討使)로 수양산성(首陽山城)을 지켰다.

 

난이 끝난 후 사직하고 풍덕(豊德)으로 은퇴하여 시문(詩文)으로 소일하였다.

 

공이 돌아 가신후 선조 37년(1604)에 연안(延安) 수비의 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으로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에 추봉(追封)되고 좌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연안(延安)의 현충사(顯忠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로《상례초(喪禮抄)》·《독역초(讀易抄)》·《왜변록(倭變錄)》·《서정일록(西征日錄)》·

《사류재집(四留齋集)》·《명종실록(明宗實錄)》등이 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 연안 전쟁


전형적인 양반가문 자제답게 정암공도 과거공부에 면려하였고,

명종 13년(1558년) 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명종 16년(1561년)에는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니

임관당시 성적은 썩 좋은 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수많은 관직을 두루 거치며 충신으로서, 훌륭한 목민관으로서 많은 치적을 쌓았다.

 

특히 당시에는 조선 북부지방의 대다수 수령들이 백성을 가혹하게 다스렸으나

정암공은 선정을 베풀어 그를 믿고 따르는 백성들이 적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암공을 비롯한 뜻 있는 신하, 목민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이란 나라의 기강은 날로 문란해지고 있었고,

이 기회를 악용하여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그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과거

 '문화대은의 나라'였던 조선(한반도)를 공격하게 된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1592년초, 이정암은 이조참의로 있었다.

 

1592년 4월말, 한양이 함락될 위기에 처해서 선조가 조정대신을 이끌고 피난을 떠날 당시

그는 왕을 호종(扈從하고 싶었으나 체직(직위해제)되어 임무가 없어졌다.

 

그래서 그는 아우인 당시 개성유수(開城留守) 이정형(李廷馨)과 함께 개성을 수비하였는데

중과부적으로 개성이 함락되자 가족을 이끌고 탈출,

항해도 해주와 평산등지를 전전하다가 8월 22일엔 백천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김덕성과 박춘영 등의 추대로 의병장이 되어 도내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자,

백천과 연안일대에서 약 5백여 명의 의병을 모을 수 있었다.

 

이 때 일본군은 제3번대 구로다 군이 황해도를 점령하기 위해 평양에서 평산, 백천을 거쳐 해주로 남하하고 있었다.

 

며칠 뒤 정암공은 분조의 왕세자 광해군(光海君)으로부터 황해도 초토사라는 임시직함을 받고,

자신이 전에 수령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연안부로 들어갔다.

 

연안은 곡창지대인 연백평야가 있는 곡창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아직 진주해 오지 않은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전쟁초기엔 왜군은 개성-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한 선조임금 이하 조선의 조정대신들을 추격하는 걸

최우선적인 작전목표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허나, 한산대첩에서 왜군이 주력선단이 큰 타격을 입는 바람에

대동강 하구에 10만여 명의 증원군을 상륙시키려던 왜군 총사령부의 계획이 무산되었고,

그 여파로 인하여 의주까지 피난간 선조를 추격, 사로잡을 의욕이 떨어진 왜군 측은

추격전은 잠시 뒤로 미루고 아직 미점령 상태로 남아있는 지역부터 먼저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원래 계획대로 왜군 측이 선조를 사로잡거나 목을 베었더라도

그 다음엔 군대를 나누어 조선 8도 전체를 점령할 작정이었으니 결과가 그다지 크게 달라진 건 아닌 셈이다.

 

그러자 그 고을(연안) 사람인 송덕윤과 조광정이 1백여 명의 사람을 모으고 그를 맞이하였다.

 

"공께서는 이 곳에 전일 부사로 계실 때 많은 선정을 베풀어 그 은혜가 아직도 남아 있으니

부디 떠나지 마시고 이곳을 지켜 주십시오."

 

정암공은 예전 연안 부사를 지내면서 사심 없고 공평하게 업무를 행하여

그 곳에는 아직도 그를 기리며 추앙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자 이정암은 흔쾌히 승낙하였다.

 

"내가 드디어 죽을 곳을 찾았도다."

 

그는 부민들과 함께 해주로 진격하는 일본군을 막아내기로 결의하고

연안성의 성곽을 수리하고 군량을 모으는 등 방어준비를 서둘렀다.

 

충주 목사로 있다가 몇 달 전 신립과 함께 탄금대에서 전사한 이종장의 17세 된 아들 이희건도

연안성으로 찾아와 복수차원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기로 결의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 한가지가 있었는데...

연안성은 전쟁 한해 전인 1591년 일본과의 전쟁을 예견하고 있던

조헌이 당시 연안 부사인 신각에게 전쟁에 대비하여 성을 수리하라는 편지를 보내었고,

신각이 이에 응하여 성을 수리하고 성 안에 우물을 파고 군량과 무기를 비축하는 등

아쉬운 대로 대비책을 세워두었던 것이었다.

 

이정암은 전임 부사가 남긴 소중한 비축물자를 적절히 배분하고,

의병군을 훈련시키는 한편, 성 요소요소에 화포를 설치하고,

척후병을 보내어 왜군의 동정을 살피는 등 전투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한편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1568~1622년)와 그가 이끄는 약 5천여 명 가량의 왜군 병력이

연안성을 향해 몰려왔는데 그는 지금의 오오이다겐에 있는 나가조오의 성주였고,

일본 전국시대 당시 용맹을 떨친 무장 구로다 요시다가의 아들이었다.

 

본국에서 12만 석의 영주이기도 한 그는 히데요시를 따라

13세 때부터 전장을 누비고 다닌 아버지 못지 않은 역전의 용사였다.

 

이 때 그의 나이는 24세...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사용하여 '전국구급' 사무라이라 칭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1만 1천여 명을 이끌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같이 평양성에 입성하고,

이번에는 조선 북부지방 최대의 곡창지대인 해서(황해도 서부)지역 일대를 장악하려고 연안성으로 쳐들어온 것이었다.

 

1592년 8월 28일, 구로다 나가마사 부대의 선봉군 약 1천여 명이 연안성으로 접근해 왔다.

 

왜군의 기세를 보고 성안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정암공에게 성을 탈출하자고 하는 자도 몇몇 있었으나,

정암공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나와 백성들이 생사를 같이 하기로 약속했는데, 이제 와서 백성을 버리고 혼자 살길을 찾는다니 차마 그럴 수 없다.

만약 죽는 것이 두려운 자가 있다면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마음대로 이 성을 떠나라!"

 

그러자 모든 민, 군들이 분발하여 목숨을 받쳐 싸울 것을 굳게 맹세했다.

 

왜군은 신속하게 성을 포위한 뒤 사자를 보내

 

[작은 성에서 대군을 당할 수 없으니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 죽음뿐이다.]

라며 항복을 요구하였다.

 

정암공은 이를 즉각 거절하고

[너희는 병(兵)으로 싸우나 우리는 의(義)로써 싸운다.]

라며 오히려 응전의 결의를 써서 보냈다.

 

그러자, 곧 적병 한 명이 말 위에 올라타고 성 쪽으로 엉덩이를 까고 손으로 볼기짝을 두드리며,

모욕적인 도발을 하였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Braveheart)]에서도 집단으로 엉덩이를 노출하여 적군을 약올리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부류의 행동은 전형적인 도발 행위이다.)

 

이에 무사 이출이 활을 겨냥해 쏘니 화살은 정확히 적병의 엉덩이에 명중했다.

 

화살을 맞은 적병이 말에서 고꾸라져 떨어지니, 성안에서 폭소가 터졌다.

 

뒤이어 이날 오후엔 왜군의 장수인 듯한 자가 백마를 타고 성 주위를 돌며 접근해 왔다.

 

그러자 북문 수문장인 장응기가 가만히 활을 들어 쏘아 그 적장의 가슴팍을 정통으로 명중시켰다.

 

화살을 맞은 적장이 말에서 고꾸라지자 재빨리 성문을 열고 나가 그 적장의 목을 베어왔다.

 

이 일로 인해 의병들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으음...생각보다 조선군의 사기가 높군.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가?"

 

"화공법을 사용하면 어떻겠습니까?

저 성안의 가옥들은 대부분 초가지붕에 나무로 된 집들이니 크게 불 한번 질러 준다면야...와하핫..."

 

"음...좋은 생각이군. 나 같은 전국구급 사무라이한테 화공법은 기본이지.

헌데 혹시라도 바람의 방향이 갑자기 바뀐다면 대략 낭패..."

 

그 날 밤에 왜군이 비충(일종의 사다리차)을 타고 성 안을 내려다보며 불화살로 공격을 하여 성안에 불이 났다.

 

성안 곳곳에 화재가 발생하여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했고

왜군의 의도는 성공한 듯 보였는데...때마침 역풍이 불었다.

 

바람에 방향이 바뀐 덕분에 성안의 화재는 비교적 쉽게 진화되었고,

오히려 왜군이 있던 방향으로 불이 번져가는 바람에 한바탕 생난리를 피워야만 했다.

 

"으음...결국 돌격만이 살길이란 말인가?"

 

다음날인 29일, 왜군은 조총을 난사하며 돌격해 왔다.

 

이정암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군에게만 화살을 쏘도록 하여 화살의 낭비를 막아 장기항전에 대비하는 한편,

성밑에 접근하는 왜군들에게는 가마솥에 물을 끓여서 부었으며, 불붙은 건초를 한 다발씩 적진에 던졌다.

 

이렇게 의병 5백여 명과 주민 등 도합 1천 4백여 명이 지키던 연안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9월 1일, 왜군 대장인 구로다 나가마사가 북산(北山)에 대장기를 꽂은 채 직접 진두지휘에 나섰다.

 

5천여 명으로 늘어난 왜군은 성 밖의 민가를 부수고 산에서 나무를 베어 사다리를 만드는 등,

공성(攻城) 준비를 마친 뒤 일제히 공격해 왔다.

 

왜군이 총력을 다하여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안성을 수비하고 있던 의병이 주축인 조선민,

군도 총력을 다하여 수비에 임하고 있었다.

 

기와조각, 돌 등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은 무엇이든지 왜군들에게 집어던지기도 하고

부녀자들은 끓는 물을 부어 왜군들이 성벽에 오르는 걸 저지했다.

 

허나, 숫적으로 열세였던 조선군, 민은 점차 수세에 몰리는 듯 했다.

 

왜군은 헐어낸 성 밖 민가의 잔해를 이용해 성 주변에 파놓은 참호(해자)를 메꾸는 데 성공했다.

 

성문은 부서질 듯 말듯 했고, 사다리들도 수십여 개가 성벽에 걸쳐졌다.

 

이런 식으로 왜군이 필사적으로 공격해와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정암공 죽기를 각오하고

마른 나뭇가지를 쌓은 다음 그 위에 올라앉아서 그의 아들인 이준을 불러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이 성이 함락된다면 곧 여기에 불을 질러라. 내가 적의 손에 모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여기서 불에 타죽겠다."

 

정암공의 이러한 굳은 결의를 들은 군사들은 더욱 힘을 내어 분전하였고,

남녀노소를 불문한 백성들 또한 군사들과 협심하여 왜군과 혈투를 벌였다.

 

치열한 격전은 그 날 밤까지 계속되었다.

 

다음날인 9월 2일, 아침이 밝으면서 왜군이 퇴각한 성 아래에는 그들이 남긴 시신들이 즐비했다.

 

"도망치는 저 왜놈들을 단단히 혼내주어라...추격하라!"

 

명령을 받은 이대춘 등이 추격에 나서 허겁지겁 도망치던 왜군의 대열 후미에 있던 수레를 여러 대 빼앗고

소와 말 90여 필, 군량미 130여 석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미처 도망가지 못한 왜군병사 수십여 명은

격분한 의병들이 휘두른 창칼에 얻어맞고 '뼈와 살이 분리되어' 죽어갔다.

 

"으아아...분하다...뼛속까지 아파 오는구나. 내가 글줄이나 읽는 문관 나부랭이한테 패하다

니...분하다. 이정암인지 뭔지 하는 녀석...어디 두고 보자!"

 

그러나...자고로 '두고보자!'라고 큰소리치는 인간들이 실제로는 하나도 무섭지 않은 법이었던가?


[이정암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패한 왜군은 그 후 임진왜란-정유 재란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연안성을 포함한 해서지방의 곡창지대에 쳐들어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 연안대첩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측이 성곽 방어전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이 승리덕분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용기와 자극을 얻은 조선의 민-관-군이 그 해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와 이듬해인 1593년 2월 행주성 전투에서

역시 압도적인 숫자의 왜군 지상 병력을 패퇴시키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해도 그다지 과장된 표현은 아닐 것이다.

 

또한 해서(황해도 서부)지방을 지켜낸 덕분에 선조 임금이 머무르던

의주의 행재소와 충청도, 전라도간의 교통로가 확보될 수 있었다.

 

이 서해안 연락로를 통해 이순신 장군의 각종 승전장계,

기타 보고서 등이 선조 임금과 조정 대신들에 게 무사히 전해졌고 그 기록들은 오늘날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다.

 

또 한 가지, 전라도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한반도 북부지방의 곡창지대인 해서지방을 지켜낸 덕분에

7년 전쟁 내내 심각했던 식량난도 다소나마 완화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적지 않은 군사, 백성들을 굶어죽을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었으니

정암공과 그가 이끌던 의병, 백성들의 공이 결코 적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나흘간의 치열한 격전이 끝나고 상황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정암공은 조정에 장계(보고서)를 올렸다.

 

그런데, 이 장계의 내용때 문에 그의 이름이 또 한 번 오래도록 빛나게 된다.

 

"아...아니...이건...?"

 

정암공이 보낸 장계내용을 본 선조 임금과 중신들은 대략 정신이 멍해졌다.

 

그 장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以二十八日 圍城 以二日 解去 ]

(해석: 적이 28일 성을 포위하였다가 2일에 포위를 풀고 돌아갔습니다.)


단 한 줄짜리 장계...이는 유래를 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

 

당시엔 일반 신하들이나 전투에 참여한 장수들,

기타 선비들이 왕에게 보내는 각종 장계, 상소문의 분량은 대체로 만만치 않은 수준이었다.

 

이순신 장군만 하더라도 지위가 낮은 부하들까지도 세심하게 챙겨주는 성품이었기에

승전장계 내용에다가 이름 없고 평범한 군졸이 전투에서 경미한 부상을 입은 것까지

매번 세세하게 기술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여타 무관들도 전투내역에 대해 자세하게 보고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TV 사극엔 왕이 상소문, 장계를 한 무더기씩 쌓아놓고 촛불 켜고 읽는 장면이 간혹 등장하는데

이는 별로 과장된 묘사가 아니다.)

 

그런데, 난생처음으로 단 한 줄짜리 장계를 접하게 된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너무 내용이 간결하다보니

당혹스럽고 조금은 난감한 생각마저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경로를 통해 연안성 전투의 자세한 내막이 알려졌다.

 

세 배가 넘는 정예 왜군과 맞서 싸워서 나흘 간 버텨내었고

 결국 그들을 격퇴하는 빛나는 전과를 세웠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의 많은 대신들은 그제야 정암공의 겸손함을 깨닫고 이구동성으로 칭찬하였다.


[却賊易, 不伐功尤難]

(해석: 적을 물리치는 것은 쉬우나 공을 자랑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어려운 일이다.)


선조는 주저하지 않고 정암공에게 종2품 '가선대부' 관계를 내리고 황해도 순찰사로 정식 임명하였다.

 

선조: 경이 전일에 국가를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연안성을 지킨 공이 매우 큰데도 내가 오랫동안 보답하지 못하였다.

 

내가 부덕한 탓으로 이런 위급한 사태를 초래했는데도 경이 홀로 외로운 성을 지켰으니 나는 매우 가상하게 여기고 있다.

 

이정암: 신은 요행히 성을 보전한 것뿐이며, 신이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중략) 신은 성에 들어온 다음 날에 사민을 효유하여 장응기의 군졸 500명을 모집하여 성안으로 들어갔더니

부사 김대정도 처음에는 섬으로 난리를 피해 갔다가 신이 왔음을 듣고는 따라 들어왔습니다.

 

신이 성에 들어온 이틀째에는 군사와 백성의 수가 500여 명, 사흘째에는 1,000여 명,

나흘째에는 1,400여 명으로 늘어나 군대의 세력은 날로 강성해졌으나 모자라는 것은 군기와 군량이었습니다. (후략)

 

선조: 만일 경의 충성이 아니었으면 외로운 성을 어찌 보전하였겠는가?

 

이정암: 기울어진 성곽이라도 있었기에 다행히 보전할 수 있었지만 적이

만약 다시 쳐들어온다면 늘 이기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선조실록 선조29년 12.19 자]


정암공의 겸손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소중한 기록이다.

 

정암공은 황해도 순찰사에 이어, 경기도관찰사 겸 순찰사(巡察使)가 되고

병조참판에 승진하였고, 이듬해엔 전라도 관찰사, 순찰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덕분에 그도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에 특별출연(?) 했다.


[순찰사(이정암)에게 폐단을 진술하는 공문과 군대를 개편하는 일에 대한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1593년 9월 7일 자 난중일기 ]


1596년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나,

생포한 반란군들을 임의로 처벌했다는 죄목으로 일시적으로 파직되었으나,

얼마 뒤 다시 복직되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고, 황해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당시엔 해서초토사(海西招討使)로 수양산성(首陽山城)을 수비하였는데,

왜군의 북상계획이 충청도 직산에서 격퇴, 좌절된 덕분에 그가 직접 교전할 기회는 없었다.

 

7년간의 전쟁이 끝난 후 사직하고 풍덕(豊德)으로 낙향하여 시문(詩文)으로 소일하였고 1600년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7년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완전히 끝나고,

[공신도감]에서는 전쟁당시 공적을 세운 많은 장수, 의병장들을 어떻게 포상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를 하게 된다.


[우리나라 장수 중에서 난을 당하였을 때에 왜군을 평정한 자중에서도

가장 공이 두드러진 자를 가려내서 녹훈치 아니하면 아니 되옵니다.

그와 같은 자로 는 권율, 이정암, 이순신, 원균을 현저한 유공자라 할 것입니다. 선조실록 선조35년.4.20 자 ]


[왜적을 친 유공자로서는 이원익, 이순신, 권율, 원균, 권응수, 김시민, 이정암, 곽재우, 이억기 등...

총26인을 선발하였습니다. 선조실록 선조36년.4.28 자 ]


결국 정암공은 선조 37년(1604)에 연안(延安) 수비의 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으로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에 추봉(追封)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 이정원(李挺元)


1567(명종 22)~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중인(仲仁), 호는 후포(後浦). 충량(忠良)의 아들이다.

 

1603년(선조 36) 진사가 되고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서·사간원정언·사헌부장령·사간 등을 거쳐 1614년 군기시정·필선이 되었다.

 

1620년 대사간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다.

 

충주에 살 때에 진사로서 정인홍(鄭仁弘)을 부추기는 상소를 올린 일이 있고

뒤에 대북파에 호응하여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이 되었다.

 

궁중과 결탁하여 뇌물을 받고 벼슬을 처거하고 문관의 인사에 관여하는 등 부정을 일삼다가

인조반정 후 정인홍 · 민심 · 유세증 · 서국정 · 한정국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 이정원(李挺元)


자 중인(仲仁)

호 후포(後浦)

생년 1567

연령 57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중기

과거 및 취재 [문과] 광해군(光海君) 2년 (1610) 경술(庚戌)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9위

[생원진사시] 선조(宣祖) 24년 (159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68위


1567(명종 22)∼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중인(仲仁), 호는 후포(後浦). 충량(忠良)의 아들이다.

 

1603년(선조 36) 진사가 되고, 1610년(광해군 2) 참봉으로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사서·사간원 정언·사헌부 장령·사간을 거쳐 1614년 군기시정(軍器寺正)·필선이 되었다.

 

1616년에 검상, 1619년 응교·전한을 지내고 이듬해에 대사간을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다.

 

충주에 살 때 진사로서 정인홍(鄭仁弘)을 부추기고 유영경(柳永慶)을 모함하는 상소를 올린 바 있고,

이후로 대북파에 호응하여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으로 일하였다.

 

궁중과 결탁하여 뇌물을 받고 벼슬을 천거하거나,

함부로 문관의 인사정책을 어지럽히다가 인조반정이 일어난 지 한달 만에

정인홍· 민심(閔深)· 유세증(兪世曾)· 서국정(徐國楨)· 한정국(韓正國) 등과 같은 날 처형되었다.


○ 후포공(後浦公) 휘 정원(挺元)


생몰(生沒)년은 1567년(명종 22년)~1623년(인조 1년)이다.

 

자는 중인(仲仁)이고 호는 후포(後浦)이며 충량(忠良)의 아들이다.

 

1603년(선조 36년)진사(進士)가 되고,

 

1610년(광해군 2년) 참봉(參奉)으로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하여,

 

그 뒤 사서(司書), 사간원 정언(正言), 사헌부 장령(掌令), 사간(司諫)을 거쳐

 

1614년 군기시정(軍器侍正) 필선(弼善)이 되었다.

 

1616년에 검상(檢詳), 1619년 응교(應敎) 전한(典翰),

이듬해인 1620년에 대사간을 역임하고,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다.

 

충주에 살 때 진사로서 정인홍(鄭仁弘)을 부추기고 유영경(柳永慶)을 모함하는 상소를 올린 바 있고,

이후로 대북파에 호응하여 광해군 때의 권신 이이첨(李爾瞻)의 심복(心腹)으로 정치를 어지럽히고

궁중과 결탁하여 뇌물을 받고 벼슬을 천거하거나, 함부로 문관의 인사정책을 어지럽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 지 한 달 만에 정인홍· 민심(閔深)· 유세증(兪世曾) · 서국정(徐國楨) ·

한정국(韓正國) 등과 같은 날 처형되었다.

 

○ 조선왕조실록

 

선조 221권 41년 2월 01 일 (무오) /

지평 신광립이 이정원· 이성· 정조 등의 귀양을 요청하다

지평 신광립(申光立)이 와서 아뢰었다.


“이정원(李挺元) 등은 모두 흉악하고 요사(妖邪)한 무리로서

감히 교란시키고 모함하려는 꾀를 내어 정인홍에게 부회하여 무망하고

음흉한 말로 몰래 남을 해치려는 계책을 시험하였으니,

남의 사주를 받아 화(禍)를 사림에 전가시킨 죄를 엄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정원을 멀리 귀양 보내어 호오(好惡)를 밝히소서.

 

평안 도사(平安都事) 이성(李惺)과 전 좌랑 정조(鄭造)는 모두 음흉하고 간사한 자로서

이이첨(李爾瞻) · 이경전(李慶全)과 결탁하여 심복(心腹)이 되었습니다.

 

속이고 날조한 정인홍의 상소를 틈타 남몰래 그 아우, 사위, 친족을 사주하여 안팎에서 상응(相應)하게 하고

이정원의 무리로 하여금 음흉한 말을 잇달아 올리게 하여 남을 해치려는 계책을 시험하였으니,

임금을 동요시키고 사림에 화(禍)를 전가시킨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 멀리 귀양 보내소서.”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 26세 이정함(李廷香+含) - 국당공후 문정공파


사직서 영(社稷署令) 오제공(悟齊公) 휘 탕(宕)의 장자(長子-장남)이다.

 

생몰(生沒)년은 중묘(中廟) 29년 갑오(甲午. 1534)년에 출생하고

선묘(宣廟) 32년 기해(己亥. 1599)년에 졸(卒)하였다.

 

자는 백훈(伯薰)이며 호는 퇴재(退齋)이다.

 

명종13년 (1558)에 진사에 합격하여 삼예찰방(參禮察訪-종6품)에 올랐다.

 

후일 *형제들의 귀(貴)로서 이조참판(l조 참판-종 2품)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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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들의 귀(貴) - 형제들이 현달하여 귀히 됨

동생인 퇴우당공(退憂堂公) 정암(廷香+奄)과 지퇴당공(知退堂公) 정형(廷馨)과 석천공(石泉

公) 정혐(廷香+慊-물 수 변 없음)이 특히 뛰어났다.

퇴우당공은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으로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에 추봉(追封)되고 좌의정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지퇴당공(知退堂公)은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이며

석천공(石泉公) 정혐(廷香+慊-물 수 변 없음)도 이조 참판이다.


 

● 26세 이정형(李廷馨) - 국당공후 문정공파


1549(명종 4)~1607(선조 4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덕훈(德薰), 호는 지퇴당(知退堂) 또는 동각(東閣).

사직서령 탕(宕)의 아들이고 지중추부사 정암(廷馣)의 아우이다.

 

정윤희(丁胤禧)의 문인으로 1567년(명종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갑과로 합격하여 평시서직장이 되고

1570년(선조 3) 형조좌랑·전적·호조좌랑·사관·형조정랑을 거쳐

1574년 사간원정언·경성판관이 되고

1576년 개성부경력이 되었는데,

전곡(錢穀)·사송(詞訟)을 잘 처리하여 부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1578년 하지사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사헌부장령 · 성균관사성 · 함경도순무어사 · 광주목사 · 홍문관부수찬 · 의정부검상·승정원좌부승지·대사성을 거쳐

1589년 형조참의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승지로 왕을 호종하고 개성유수가 되었으나

임진강 방어진이 무너지자 의병을 규합하여 성거산(聖居山)을 거점으로 왜적과 싸웠으며

장단·삭녕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물리친 공으로 경기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593년 장례원판결사·1594년 고급사(告急使)로 요동에 다녀와서

홍문관부제학 · 이조참판 · 비변사 당상을 지내고 1595년 대사성 · 사도체찰부사가 되었다.

 

1600년 강원도관찰사·1602년 예조참판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북인들의 집권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송산 두천리(松山 杜川里)로 은퇴하였고

대사성·호조참판 등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1606년 삼척부사로 나갔다가 다음해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제자백가서·성력(星曆)·복서(卜筮)·술수(術數)에도 통달했다.

 

이원익(李元翼)·이호민(李好民)·李睟光) 등과 사귀었다.

 

저서로 ≪동각잡기(東閣雜記)≫·≪황토기사≫·≪용사기사(龍蛇記事)≫·

≪수춘잡기(壽春雜記)≫·≪지퇴당집≫ 등이 있다.

 

○ 26세 이정형(李廷馨)


자 덕훈(德薰)

호 지퇴당(知退堂)/동각(東閣)

생년 1549

연령 59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중기

과거 및 취재 [문과] 선조(宣祖) 1년 (1568) 무진(戊辰) 증광시(增廣試) 갑과(甲科) 2위


1549(명종 4)∼1607(선조 4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덕훈(德薰), 호는 지퇴당(知退堂) 또는 동각(東閣).

 

사직서령(社稷署令) 탕(宕)의 아들이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암(廷?)의 아우이다.

 

정윤희(丁胤禧)의 문인이다.

 

1567년(명종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평시서직장(平市署直長)이 되었다.

 

1570년(선조 3) 형조 좌랑·전적에 이어 이듬해 호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형조 정랑을 거쳐,

1574년 사간원 정언과 경성 판관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사간원 헌납과 예조 정랑이 되고,

 

1576년 개성부 경력이 되었는데, 전곡(錢穀)·사송(詞訟)의 처리를 잘하여 부민(府民)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578년 하지사 서장관(賀至使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사헌부 장령·성균관 사성·함경도 순무어사· 광주 목사(廣州牧使)·홍문관 부수찬·의정부 검상·승정원

좌부승지·대사성을 거쳐 1589년에는 형조참의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승지로 왕을 호종하였다.

 

개성 유수가 되었으나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의병을 규합하여 성거산(聖居山)을 거점으로 왜적과 항전하였으며,

장단·삭녕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물리쳐 그 공으로 경기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 절도사가 되었다.

 

1593년 장례원 판결사가 되고

 

다음해 고급사(告急使)로 요동(遼東)에 다녀와 홍문관 부제학· 이조 참판· 승문원 부제조· 비변사 당상을 역임하고,

 

1595년 대사헌에 이어 4도도체찰 부사(四道都體察副使)가 되었다.

 

1600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고,

 

1602년 예조 참판이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북인이 정권을 잡고 정계가 어지러워지자

양주 송산 두천리(松山杜川里)로 퇴거하여

대사성· 호조 참판 등의 직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06년 삼척 부사로 나갔다가 다음해 임지에서 죽었다.

 

성리학에 밝았고,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성력(星曆)·복서(卜筮)·술수(術數)에도 통달하였다.

 

이원익(李元翼)·이호민(李好民)·이수광(李?光) 등과 가깝게 지냈다.

 

1617년(광해군 9)에 춘천의 문암 서원(文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동각잡기》·《황토기사》· 《용사기사 龍蛇記事》·《수춘잡기 壽春雜記》·《지퇴당집》 등이 있다.


● 17세 이제현(李齊賢) - 익재공파 대파시조


1287(충렬왕 13)~1367(공민왕 16)

 

이제현(李齊賢. 충렬왕 13(서기1287)~공민왕 16(서기1367))은 고려 말의 정치가이며

성리 학자였고 원(元)의 위협 속에서 기울어가는 고려의 사직(社稷)을 혼자서 버텨낸 위인이었다.

 

자는 중사(仲思), 초명(初名)은 지공(之公), 호는 익재(益齋),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검교정승 진(瑱)의 아들이다.

 

충렬왕 27년(서기1301) 나이 15세로 성균시에 장원하고 이어서 문과의 병과(丙科)에 합격하여 예문춘추관에 들어갔다.

 

성균악정에 이르렀을 때에 충선왕이 만권당(萬卷堂)을 설립하고 부르므로

연경(燕京)에 가서 원(元)의 명사들인 요수(姚燧)·염복(閻復)·조맹부(趙孟頫) 등과 교우하며 학문이 심오해졌으며

이때에 진감여(陳鑑如)가 공의 초상화를 그렸고 원(元)의 석학 탕병룡(湯炳龍)이 찬(贊)을 썼는데,

이 그림과 글씨가 국보로 지정되어 현재 덕수궁 미술관에 보관되어있다.

 

충숙왕 10년(서기1323)에 유청신(柳淸臣)과 오잠(吳潛) 등이

 

“고려를 없애고 원나라의 성(省)으로 만들어 달라”고 원나라에 간청하니

원나라에서는 전쟁을 하지 않고서도 고려를 얻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온 조정이 들떠서 후속조치에 여념이 없는데

공은 분연히 일어나 도당(都堂. 원나라의 의정부)에 글을 보내서

고려 400년의 사직(社稷)이 이로써 무너진다고 개탄하고 유청신 등의 청원이 부당함을

이론정연하게 설명하여 고려가 역사에서 사라지는 위급을 구하였으니 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

 

이 뒤에 충선왕이 서번(西蕃)에 귀양 가게 되자 함께 따라갔으며 가고 오는 과정에서

밀직사사·첨의평리·정당문학·삼사사 등의  벼슬이 내려졌다.

 

충숙왕 복위 8년(1339)에 정승 조적 등이 심왕(瀋王) 고(暠)와 공모하여 모반하다가 잡혀죽자

그의 무리들이 연경(燕京)에 남아서 충혜왕을 음해하므로

왕을 따라 연경에 가서 잘 무마하였으며 충목왕이 즉위하자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우정승을 맡고 정동성사를 겸하였다.

 

그 후 원종공신 조일신(趙日新)이 시기할 것을 알고 벼슬을 내놓았으므로

뒤의 ‘조일신의 난리’에 화를 모면할 수가 있었다.

 

그 후 우정승을 두 번 지내고 문하시중에 이르렀으며 공민왕 6년( 서기1357)에 벼슬을 떠났고

왕명으로 고려의 실록을 수찬(修撰)하고

종묘와 위패의 서차(序次)를 정했으며

사후에 공민왕의 사당에 함께 모셔졌다.

 

저서로는『익재난고(益齋亂藁)』·『낙옹비설』·『익재집(益齋集)』등이 있다.

 

공은 당대의 문호(文豪)였으며

『익재난고』 소악부(小樂府)에는 당시의 민요 17수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수록되어 있는데

국문학계에서 고려시대의 가요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천여 년 뒤 한말(韓末)의 한문학 대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은 익재(益齋)의 시를

⌜공묘청준(工妙淸俊)하고 만상(萬象)이 구비하여 조선 3천년의 제일 대가⌟라고 평가했다.

 

○ 이제현(李齊賢)


자 중사(仲思)

호 익재(益齋)/역옹(역翁)

시호 문충(文忠)

기타 인명 초명 이지공(李之公)

생년 1287 - 1367

연령 81

활동분야 교육/사상 / 학자 / 학자, 정치가


1. 가계

 

고려 건국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의 후예이지만,

아버지 진(王+眞)이 신흥관료로서 과거를 통해 크게 출세함으로써

가문이 비로소 떨치기 시작하였는데, 진은 검교시중(檢校侍中)에까지 올랐다.

 

익재공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숙성하여, 글을 짓는 데 이미 작자기(作者氣-작자 소질)를 지니고 있었다 한다.

 

1301년 성균시(成均試)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어서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해에 당시 대학자이자 권세가였던 권보(權溥)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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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溥 - ‘보’와 ‘부’로 읽는데 주로 '보'로 읽고 있다.


2. 관직

 

1303년 권무 봉선고 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 녹사(延慶宮錄事-9품)를 거쳐

1308년 예문춘추관에 선발되고 다음해에 사헌 규정(司憲糾正-종6품)에 발탁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권무(權務)- 임시로 맡아보는 사무. 임시직에서 최하위 급인 9품부터 관직을 시작함

 

1311년에는 전교시승(典校寺丞- 경적經籍과 축소를 관장하던 관청)과 삼사판관(三司判官)에 나아가고,

다음해에 서해도 안렴사(西海道按廉使)에 선발되었다.

 

1314년 상왕인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에 머물게 됨으로써

그의 재원(在元-원나라에 있음)생애가 시작되었다.

 

충선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 자신에게 익숙한 원나라에 있으면서

새로이 만권당을 짓고 서사(書史)를 즐기며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문인들을 드나들게 하였는데,

그들과 상대할 고려측의 인물로서 이제현을 지명하였던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만권당에 출입한 요수(姚燧)·염복(閻復)·원명선(元明善)·조맹부(趙孟?) 등

한족(漢族)출신 일류 문인들과 잦은 접촉을 가지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그의 재원 생애와 관련하여 특기할 것은 세 번에 걸쳐 중국대륙 깊숙이 까지 먼 여행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하여 서촉(西蜀)의 명산 아미산(峨眉山)에 치제(致祭)하기 위하여 3개월 동안 그곳을 다녀왔다.

 

1319년에는 충선왕이 절강(浙江)의 보타사(寶陀寺)에 강향(降香)하기 위하여 행차하는 데 시종하였다.

 

마지막으로 1323년에는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 위로하기 위하여 감숙성(甘肅省)의 타사마(朶思麻)에 다녀왔다.

 

이 세 번에 걸친 중국에서의 먼 여행은 일찍이 우리나라 사람이 경험해 보지 못하였던 것으로

그의 견문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3. 원과의 관계

 

1320년은 그의 생애를 통하여 또 하나의 분기점을 이룬다.

 

주로 만권당에 머물며 활동하는 동안에도 그는 때때로 고려에 와서 관리로 복무하면서,

성균좨주(成均祭酒) ·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 선부전서(選部典書)를 역임하였고,

이해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면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재하였다.

 

그런데 같은 해 겨울에 충선왕이 참소를 받아 유배됨으로써

자연히 그의 재원 생애도 6년 만에 끝나게 되었다.

 

충선왕의 유배로 인한 정세변화는 고려의 정치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뒤이어 고려의 국가적 독립성을 말살시키고 원나라의 내지와 같은 성(省)을 세울 것을 주장하는

입성책동(立省策動)이 강력하게 일어났고,

충숙왕을 내몰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심왕(瀋王) 고(暠)와 그 일파의 준동이 격화되었다.

 

이제현은 1321년 아버지의 상을 치른 다음 1323년 원에 들어가 입성반대상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그 대로 전하여지고 있다.

 

그는 이어서 멀리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어 있는 충선왕의 방환운동도 벌였다.

 

오래지 않아 입성책동이 저지되고 충선왕이 타사마로 이배된 데에는

그가 벌인 활동의 영향이 적지 않았으리라 여겨지고 있다.

 

1324년 밀직사를 거쳐 1325년 첨의평리(僉議評理) ·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전임됨으로써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 뒤 충숙왕과 충혜왕 부자가 중조(重祚)하는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그의 활동은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1339년 조적(曹?)의 난이 일어난 끝에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혀가자

그를 좇아 원나라에 가서 사태를 수습하여 왕이 복위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년간 조적의 여당(餘黨)에 눌려 두문불출하였는데,

그동안 《역옹패설 ?翁稗說》을 저술하였다.


4. 공민왕의 보좌

 

그가 다시 정치의 표면에 나타나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은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한 직후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면서부터이다.

 

이때 문란하여진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새로운 시책을 펴는 데 참여하여 여러 항목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1348년 충목왕이 죽자 원에 가서 왕기(王祺: 뒷날의 공민왕)를 왕에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여 새로운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네 번에 걸쳐 수상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1353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서 두 번 째로 지공거가 되어 이색(李穡) 등 35인을 등과자(登科者)로 선발하였다.

 

1356년 기철(奇轍) 등을 죽이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이 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가 다음해에 치사하고 관직에서 아주 물러났다.

 

그 뒤에도 국가의 중대사에 대하여서는 자문에 응하였으며,

홍건적이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에는 남쪽으로 달려가 상주에서 왕을 배알하고 호종(扈從)하였다.

 

정치가로서의 이제현은 당시 고려가 원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시인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존립과 사회모순의 광정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하였다.

 

당시 복잡한 정치상황 아래에서 원과 고려를 넘나들면서 활약하여 최고의 지위에 오르지만,

화를 당하거 나 유배된 적이 없었다.


5. 학문과 저술

 

학자로서의 이제현은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발전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는 점이 주목을 요한다.

 

우선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白?正)의 제자였고

《사서집주 四書集註》를 간행하여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보의 문생이요 사위였으며,

그의 제자가 이곡(李穀)과 이색의 부자였다는 학통(學統)으로 보아 그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만권당에서 교유한 중국의 문인·학자가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중국의 성리학에 직접 접하면서 그것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충목왕 때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한 것은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에만 경도되지는 않았고, 그 때문에 뒷날 성리학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문학부문에서 그는 대가를 이루었다.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시는 전아하고 웅혼하다는 평을 받았고, 많은 영사시(詠史詩)가 특징을 이룬다.

 

또한, 사(詞)의 장르에서 독보적 존재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의 한문학을 세련시키면서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를 통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편, 빼어난 유학지식과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사학(史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 本朝編年綱目》을 중수(重修)하는 일을 맡았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만년에 《국사 國史》를 편찬하였는데, 기년전지(紀年傳志)의 기전체를 계획하여

백문보(白文寶)· 이달충(李達衷)과 함께 일을 진행시켰으나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 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다.

 

흔히 이것을 합하여 《익재집》이라 한다.

 

그는 이색이 그 묘지명에서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다(道德之首 文章之宗)“라고 말한 바와 같이 후세에 커다란 추앙을 받았고,

경주의 구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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