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시조 익재 이제현

동문선(東文選)에 올라있는 익재공(益齋公)의 글(I)

녹전 이이록 2009. 2. 11. 19:32

● 동문선(東文選)에 올라있는 익재공(益齋公)의 글(I)

 

 

◆ 동문선 제124권  -  묘지(墓誌)

 

 

○ 묘지(墓誌) - 유원고려국 수성수의협찬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언양부원군

증시 정렬공 김공 묘지명 병서

(有元高麗國輸誠守義協贊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陽府院君贈諡貞烈公金公墓誌銘 幷序)
 

공의 성은 김씨이고 휘는 윤(倫)이요, 자는 무기(無己)이며, 호는 죽헌(竹軒)이다.

 

또 호를 당촌(戇村)이라 하였으며, 계림(鷄林) 언양(?陽)이 본향이다.

 

증조부는 황 태사 문하시랑 평장사(皇太師門下侍郞平章事) 증시(贈諡) 위열공(威烈公)인데, 휘는 취려(就礪)이다.

 

조부는 황 태부 문하시랑 평장사(皇太傅門下侍郞平章事) 증시 익대공(翊戴公)이니 휘는 전(佺)이다.

 

아버지는 황도첨의 참리 집현전 태학사 감수국사(皇都僉議參理集賢殿太學士監修國史) 증시 문신공(文愼公)이니 휘는 변(?)이다.

 

비(?)는 황 양천군 대부인(皇陽川郡大夫人) 허씨(許氏)이니 첨의중찬 수문전 태학사(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

증시 문경공(文敬公) 휘 공(珙)의 외딸이다.

 

지원(至元) 14년(충렬왕 3년) 6월 29일 정해에 공을 낳았다.

 

27년 경인년에 합단(哈丹)이 국경을 침범하여 우리나라에서 강화로 천도하는데, 문경공(文敬公)이 총재가 되어

국인(國人)의 맨 나중에 가야 하므로 공에게 식구를 이끌고 먼저 가도록 명하였다.

 

공은 그때 나이가 겨우 14세였으나, 지시와 계획이 어른같아 온 가족이 무사하였다.

 

음관(蔭官)으로 노부판관(노鹵溥判官)에 보직되었다가 전구승(典廐丞)으로 전직하고,

별장을 거쳐 낭장에 올라 견룡행 수 좌도지 우중금 이지유(牽龍行首左都知右中禁二指諭)가 되었다가,

신호위호군 겸 감찰시승(神虎衛護軍兼監察侍丞)에 임명되었다.

 

여러 번 승진하여 헌부의랑 전부령 중문사 겸 사헌집의 제점전부 밀직우부승지

(獻部議郞典符令中門使兼司憲執義提點典符密直右副承旨)에 올랐으며,

검교 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에, 계품(階品)은 광정대부(匡靖大夫)로 외직에 나가서

충주(忠州)ㆍ수주(水州)ㆍ익주(益州) 세고을의 자사(刺史)를 하였고,

내직으로 헌(?)ㆍ선(選) 2부(部)의 전서(典書)와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경상 전라 도순문사로서 합포(合浦) 진장에 유진하였다가

첨의평리 상의회의 도감사 삼사좌우사(僉議評理商議會議都監事三司左右使)의 벼슬을 더하였고,

언양군(彦陽君)에 봉하니, 계품은 중대광(重大匡)이며 호는 추성찬리공신(推誠贊理功臣)이다.

 

또 도첨의 찬성사 판판도사사(都僉議贊成事判版圖司事)에,

추성수의 협찬공신(推誠守義協贊功臣)의 호를 더하여 드디어 좌정승에 임명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물러나기를 청하니 부원군에 봉하였는데,

계품은 벽상삼한(壁上三韓)이요, 호는 보리(輔理) 2자를 더하니, 이것이 공이 벼슬을 지낸 출처의 대략이다.

 

공이 호군(護軍)이 되었을 적에 충정(忠正) 홍자번(洪姿藩)의 천거로 변정도감 부사(辨正都監副使)가 되었다.

 

한 세력 있는 가문의 자손이 1백 명이나 되는 여종을 두고 시골의 백성과 다투었는데, 공이 그 호적을 열람하고 말하기를,
“이는 모대(某代) 모상(某相)이 모세월(某歲月)에 여러 아들과 함께 문권을 만든 것으로 지금으로부터 몇 해 전의 일이다.

 

여종의 아들과 손자의 나이를 앞뒤로 비교하면 서로 판이한데,

여종의 이름이 한쪽이 희미하니, 이것은 어찌 어(魚) 자를 노(魯) 자로 고친 것이 아니겠는가.

 

모 정승의 여러 아들들이 모두 후손이 있으니, 마땅히 집집마다 문서 1본을 비치하고 있을 것이다.

 

어찌 가져다가 그 같고 다름을 상고해 보지 않으리오.” 하고, 그 말대로 하니 거실(巨室)이 드디어 굴복하였다.

 

시승(侍丞)이 되었을 때는 어떤 갑ㆍ을 두 사람이 한 종을 두고 서로 다투었다.

 

을이 말하기를,
“선세(先世)에는 일찍이 사헌부에 소송하였는데,

지대(知臺)의 성은 허(許)씨이며 이름은 잊었으나 명백히 판단하여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갑이 얻은 종은 죽어서 자손이 없고, 을의 집 종은 다행히 자손이 번성하였는데,

화재로 인하여 그 문서가 없어지니, 갑이 을의 화재를 다행으로 여기고 속여 모두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묵묵히 세월을 계산하고 말하기를,
“말하는 허 지대(許知臺)는 반드시 우리 집 문경공(文敬公)이다.” 하고,

아전을 시켜 그때의 인부(印簿)를 검열하게 하니, 나누어준 인원수가 다 있었다.

 

이를 증거로 갑을 힐문하니 갑 또한 굴복하였는데, 공의 정밀 자세함이 이와 같았다.

 

내신(內臣)이 원망의 뜻을 품고 5품 낭관을 전내(殿內)에서 손으로 구타하였는데,

공이 허물을 들어 논박을 매우 엄중히 하고, 증인 중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내신의 편이 되는 자들도 겸해서 탄핵하였다.

 

내신이란 자는 바야흐로 임금의 총애가 있었고,

증인들 역시 높이 벼슬하는 대족(大族)이어서 공을 배척하여 주관(州官)으로 좌천시켰다.

그때 궁실(宮室) 및 불사(佛寺)를 크게 수리하게 되어 백성들을 몰아다 일을 시키는데,

일하는 사자들이 분주하게 다녔으나 모두 공을 꺼려서 부득이한 사정이 아니면 고을 지경에 들어가지 않으니,

고을 사람들이 덕택에 편안할 수 있었다.

 

합포에 유진하였을 적에는 군장이 급한 일이 있다고 해서 사사로이 백성을 괴롭히지 못하였고,

고을에서도 감히 사적인 감정으로 아전에게 망령되이 더하지 않았다.

 

천자의 사신이 와서도 군졸과 거승(車乘)의 숙연하고 호령이 엄한 것을 보고,

송연해 하면서 공경하지 않는 이 없었으며, 함께 사냥을 하게 되어서도 이리 저리 달리면서 쏘는데,

쏘는 족족 맞히니 또 기쁘게 즐거워하였다.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칭찬하는 말이 입으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공은 일찍이 충렬왕을 따라 원 나라에 들어가 세 번 조회하였는데, 충선왕이 날마다 객사에 와서 문안하니,

따라다니는 신하들이 황공하여 돌아보며 물러서고 움츠렸지만 공은 몇 가지 임무를 겸하고 홀로 좌우에서 모시니,

충렬왕이 그 뜻을 아름답게 여기었고, 충선왕 또한 예로써 대우하였다.

 

의릉(毅陵 충숙왕)이 경사(京師 원 나라 서울)에 머무른 지 5년이었는데, 심왕(瀋王)이 천자의 귀여움을 얻자,

뜻을 펴지 못한 무리와 떼를 지어서 국인(國人)을 달래고 위협하여

심왕(瀋王)이 임금 되기를 원한다는 글을 올리게 하였는데,

공은 아우 원윤(元尹) 우(禑)와 더불어 홀로 장계에 서명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공에게 사사로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의 뜻을 어기고 스스로 달리하다가 만약 후회되면 어떻게 하려는가.” 하니,

 

공이 꾸짖어 말하기를,
“신하가 두 가지 마음이 없음은 그 직분인데, 무슨 후회가 있겠는가.” 하였다.

 

조적(曺?)이 난리를 꾸미다가 스스로 군사들에게 죽음을 당하였는데,

영릉(永陵 충혜왕)이 공을 시켜 그 일당을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에서 신문하도록 하니,

부의 사람들이 그 역적에 따른 자들을 밉게 여겨, 뽐내며 고문하여 통쾌하게 다스리고자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들은 조적이 달래고 꾀는 데에 잘못 미혹된 것인데 어찌 족히 책망하겠는가.

 

만약 살과 뼈를 헐고 상하게 하면 저들이 반드시 내가 법을 남용하여 강제로 복죄하여 조정을 속인다고 말할 것이다.” 하고

그 형벌을 늦추어주니, 죄수들이 감동하고 기뻐하며 죄를 자복하여 숨김이 없었다.

 

영릉이 천자의 부름을 받았는데, 가는 도중에 공을 불러 같이 가려 하니,

공이 나이 60이 넘었지만 명령을 듣고 달려가 수 일만에 압록강까지 이르렀는데,

거기서 원 나라 승상 백안(伯顔)이 오부관(五府官)을 시켜 여러 가지로 질문하면서 적(?)의 무리를 두둔하였으며,

적의 무리가 여러 가지로 말을 하였지만 공은 한마디 말로써 잘라 말하였는데,

사리가 간단하고도 바르니, 오부의 관원들이 낯빛을 고치며 백수재상(白鬚宰相)이라고 지목하였다.

 

영릉이 풀려 고려로 돌아와서 왕위에 앉은 지 4년만에 온갖 참소가 고슴도치 털같이 일어나니

천자가 옷과 술을 하사하였는데, 농보(籠普)가 오고 이어서 타적(朶赤)을 보내어 조서를 반포하였다.

 

왕이 나가서 영접하는데, 타적이 칼을 빼어 들고 왕을 붙들어 한필 말에 태워 달려가게 하였다.

 

공은 그때 집에 있다가 변이 갑자기 일어남을 듣고 미처 따라가 인사하지 못함을 애통해 하며

농보에게 가보아도 역시 의리로써 감동시킬 수 없음을 알았다.

 

물러나 재상들과 더불어 원 나라 조정에 애걸할 것을 말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소국 신하가 천자의 위엄을 범하였으니, 큰 견책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공이 분개하여 책망하기를,
“군신의 사이는 부자와 같다. 자식이 아버지를 구원하는데 누가 죄주겠는가.

만일 죄를 받을까 두려워서 구원하지 않으면 자식이라 말하겠는가.” 하였다.

 

여기서 비로소 상서하기를 의논하였지만 끝내 실행하지 못하니, 공이 종신토록 분하고 분하여 말과 얼굴빛에 항상 나타났다.

 

공주(公主)와 사왕(嗣王 충목왕)이 공에게 시호 청하는 일을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선왕이 돌아오시지 못하고, 한갓 소인들로 하여 원망을 받고 덕에 누가 되고 있으며,

지금도 그 화의 우두머리가 아직 있으니 반드시 먼저 그 죄인을 바로잡아서

선왕의 무고함을 밝힌 연후에 청할 수 있습니다.” 하고,

 

 

이에 글로써 그 사람의 죄악을 써서 올리니, 공주와 사왕이 마음에 깊이 느끼고 깨달아서 소를 조정에 보내고,

공에게 시호 개정에 관한 두 청원 표문(表文)을 주어 가지고 가서 아뢰게 하였다.

 

공이 사례하면서 말하기를,
“신은 나이가 많아 이미 72살이나 되었으니, 도로에서 엎어지고 밀려나서 어명을 욕되게 할까 두렵지만

죽기 전에야 감히 힘쓰지 않겠습니까.” 하고, 물러나서 행장을 꾸려 떠나게 되었는데,

갑자기 풍질(風疾)을 얻어 10일 동안이나 물과 장을 마시지 못하더니,

하루는 좌우를 시켜 안아 일으키게 하고, 의관을 갖춘 후 단정히 앉아서 세상을 떠나니,

그 날이 지정(至正) 8년 무자(충목왕 4년) 2월 2일이다.

 

부음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3일을 휴무하고, 관에서 장사를 지냈으며 시호를 내려 정렬공(貞烈公)이라 하였다.

 

이 달 24일에 대덕산(大德山) 감응사(感應寺) 동남쪽 언덕에 장사지내어 문신공의 조역(兆域 국내)에 부묘(?墓)하니,

이명(理命)을 따른 것이다.

 

공은 글읽기를 좋아하고 전고에 대한 지식이 많으며, 질문이 있으면 척척 응답하여 의문이 없었다.

 

종족과 인척에 인자하고 친구들에게 신의가 있었는데,

그들이 찾아오면 술을 내어 종일 즐기고, 병이 났다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약을 사 가지고 가서 문병하였다.

 

진실하고 정성스러움은 한(漢) 나라 관리와 같았으며

악을 미워하고 선을 아름답게 여기는 공정한 마음은 친척과 남을 가림이 없으며, 도량이 넓고 통달한 것은

진(晉) 나라 선비와 같고 임금을 사랑하고 백성을 근심하는 간절한 마음이 평탄하고 험한 데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때문에 어진 자는 그 덕행을 흠모하고 착하지 못한 자는 그 의리에 두려워하였으며,

거리의 아이들과 촌가의 아낙네도 죽헌(竹軒)이라는 칭호를 들으면 그가 공임을 능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부인은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휘 최서(崔瑞)의 딸인데, 공보다 1년 먼저 세상을 떠났고,

변한국 대부인(卞韓國大夫人)을 증직하였는데, 7남 2녀를 낳았다.

 

맏아들은 가기(可器)인데, 판도총랑 김해부사(版圖摠郞金海府使)로 공보다 먼저 죽었고,

둘째 아들은 경직(敬直)인대, 중대광 양성군(重大匡陽城君)이며,

셋째 아들은 종훤(宗?)인데, 출가하여 화엄사(華嚴師)가 되었으며,

넷째 아들은 달잠(達岑)인데, 역시 출가하여 선사(禪師)가 되었으며,

다섯째 아들은 숙명(淑明)인데, 개성 판관(開城判官)이며,

여섯째 아들은 희조(希祖)인데, 전리판서 예문제학(典理判書藝文提學)이며,

일곱째 아들은 승구(承矩)인데, 통례문 부사(通禮門副使)이다.

 

 

딸 하나는 여흥군(驪興君) 민사평(閔思平)에게 출가하였고,

하나는 종부령(宗簿令) 김휘남(金輝南)에게 출가하였는데, 또한 공보다 먼저 죽었다.

 

휘남(輝南)은 화평(化平) 사람이나 공과는 한 김씨가 아니다.

 

서자(庶子)는 예적(穢迹)이요, 두 딸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나는 공에게 욕 되이 친구가 되어 시우(詩友)라 불림을 받았고, 희조(希祖)가 또 나의 사위가 되었으니,

그 명문을 청구하는 데에 있어 의리상 저버릴 수 없다.

 

삼가 집의(執義) 이달충(李達衷)의 선행을 적은 행장을 가져다가 잘못을 수정하면서 서를 하고, 또 사(辭)를 붙인다.

 

 

아, 풍속 교화가 세상을 변천함이여 / 嗚呼風敎之移世也
강철로도 손가락을 휘감을 수 있고 / 剛可使繞夫指兮
모난 구멍에도 둥근 자루를 끼울 수 있도다 / 方可使內夫?也
솥으로 수레를 괼지언정 솥에 고기를 삶기는 숭상하지 않았고 / 鼎桂車不尙烹兮
갓으로 신창을 만들지언정 해짐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 冠?履不愧弊也
진실한 정렬공이여 / 允也貞烈兮
온순하면서 엄하고 엄연하면서도 화기있도다 / 溫而?儼而和也
추운 겨울의 송백과 같고 / 松栢乎歲寒兮
거센 물결의 지주(砥柱)와 같도다 / 砥柱乎?波也
영화는 따르고 괴로움 물리침이여 / 榮慕而??兮
나 홀로 신의를 돈독히 하였도다 / 我獨敦乎信也
해는 버리고 이익만 따름이여 / 害違而利從兮
나 홀로 충성을 온건히 하였도다 / 我獨全乎忠也
이 백성 교화되기를 바랐음이여 / 化斯民之?幾兮
자기 몸같이 할 뿐만 아니로다 / 有諸己之不?也
어찌 등용되어 뭇 백성에게 은혜를 주다가 / 胡登庸而惠疇兮
곧 벗고 가기 헌신짝 버리듯 하였는가 / 旋脫去若葉?也
비록 정사를 사절하고 집에 숨어 있었으나 / 雖謝事而杜門兮
한번 밥 먹는 동안이라도 우리 임금을 잊으리오 / 寧一飯而忘吾君也
나라 수치 씻으려는 간곡한 마음이여 / ??乎刷恥于國兮
만백성의 도적 제거하기에 급급하였도다 / 汲汲乎除民之賊也
아, 공과 같은 분은 / 嗚呼如公兮
옛날 사람 중에서나 구해 볼 것이로다 / 當求諸古人之中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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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理命) : 부모가 평상시 정신이 맑을 때에 자식에게 명령한 말은 이치에 맞는 명령이라 하여 이명이라 하고,

죽을 때에 한 유언은 정신 상태가 온전한 때가 아니라 하여 난명(亂命)이라 한다.

 

*솥으로 …… 않았고 : 《한창려집(韓昌黎集)》시대리평사왕군 묘지명(試大理評事王君墓誌銘)에,

“솥으로 수레를 괼 수는 없고 말로 마음을 지키게 할 수는 없다.” 하였는데,

원래는 인물을 적재 적소에 써야한다는 뜻이나, 여기서는 검소하였다는 뜻으로 말을 바꾸어 인용하였다.

 

*갓으로 …… 않았다 : 《한서(漢書)》가의전(賈誼傳)에,

“갓이 비록 해졌더라도 신창으로 깔지 않는다.” 하였는데, 역시 말을 바꾸어 검소하였다는 뜻으로 썼다.
 

○ 묘지(墓誌) - 유원고려국 성근익찬경절공신 중대광 성산군 증시문열공 이공 묘지명
(有元高麗國誠勤翊贊勁節功臣重大匡星山君贈諡文烈公李公墓誌銘)

 
묘(墓)에 지(誌)가 있는 것은 예법이다.

 

세대가 멀어지면 혹 묘지가 무너지는 일이 있는데,

그 지석을 보고 그것이 누구의 무덤인가를 알게 되고, 차마 덮어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래사 사군자(士君子)들이 그 부모 장사에서 뒤로 미루지 않는 것이다.

 

성산군(星山君) 이공(李公)이 죽어 해가 바뀌었는데, 내가 비로소 명문을 짓게 된 데에는 대개 이유가 있다.

 

조적(曺?)의 사변으로 영릉이 원 나라에 불리어 들어가 뵙게 하였는데,

승상(丞相) 백안(伯顔)이 묵은 감정을 품고

두 번이나 역적들과 왕의 친신하는 신하들과 대질시키도록 하는 데에 이르렀다.

 

공은 화가 나서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승상 앞에 나가 직접 만나서 호소하면 그 뜻을 돌릴 수 있지만,

창을 벌여 문을 지키니 그 문지기의 인도를 받을 수 없다.

 

그런데 다행히 그가 성남(城南)으로 전렵하러 나간다 하니, 내가 마땅히 길옆에서 글을 올리다가

말발굽 아래 머리가 부서지더라도 죽기로써 우리 임금의 무죄를 밝힐 것이니, 그대는 붓을 잡고 나의 글을 쓰라.” 하고,

밤에 일어나 목욕하고 닭이 울면 떠나려 하는데, 백안이 마침 이날 패하였다.

 

나는 그 의리에 감격하여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기약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공은 나보다 또 20년이나 위이니, 만약 큰 일이 있다면 감히 변변치 못한 글을 아끼지 않고

묘소에 명(銘)을 하겠소.” 하였더니, 공이 웃으면서 허락하였다.

 

영릉(永陵)이 본국으로 돌아온 다음 해 겨울에,

일찍이 북궁(北宮)에서부터 걸어서 송강에 가서 참새를 잡는데,

공이 앞질러 나아가서 꿇어앉아 말하기를,
“전하는 어찌 명이(明夷 밝음이 땅속에 들어감을 말하는데, 경사〈京師〉에 붙잡혀 있을 때)한 때의 일을 잊으십니까.

 

지금 포악한 소년들이 위엄을 빌려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재물을 빼앗아 가서 백성들이 그 삶을 즐기지 못하니,

조석으로 화가 이르면 지난번의 두려움뿐이 아닌데, 이를 구휼하지 않고 도리어 작은 오락을 즐기고 계십니까.” 하였다.

 

영릉이 처음에는 심히 노하였으나 조금 후에 사과하며 보내었다.

 

밖에 나오자 공의 종자(從者)들이 포악한 소년들에게 구타를 당하였으니, 이는 자기들의 일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공이 그 길로 고향으로 돌아와 누워 있으면서 세상일을 관계하지 않았다.

 

슬프다, 경서에 이르기를,
“제후(諸侯)에게 간쟁하는 신하 5명이 있으면 비록 도가 없어도 그 나라를 잃지 않는다.” 하였는데,

공이 갈 적에 만약 강직한 신하가 계속해서 말하는 자 4ㆍ5명만 있었더라도 악양(岳陽)의 욕은 또한 거의 면하였을 것이다.

 

공이 죽으니 공의 손자 인복(仁復)이 복제를 마치고 서울에 와서 행장을 주고,

또 말하기를,

“조부 유명에 앞서 언약한 대로 명(銘)을 빌려 오도록 하였는데

장사 날짜는 가깝고 길은 멀어서 알리지 못하고 이제야 감히 고합니다.” 하므로,

여기에서는 도저히 사양할 수 없어 삼가 그 행장을 받아서 적는다.

 

 

공의 성은 이씨(李氏)요, 휘는 조년(兆年)이며 자는 원로(元老)이니, 경산부(京山府) 용산리(龍山里)가 본향이다.

 

증조의 휘는 돈문(敦文)이요, 조부의 휘는 득희(得禧)이며 부친의 휘는 장경(長庚)이니, 모두 부(府)의 아전이다.

 

부친은 후에 증직(贈職)으로 모관(某官)이며, 모친은 모씨(某氏)인데 증 모군부인(贈某郡夫人)이다.

 

공은 나이 17세에 향공(鄕貢)의 진사로 병과에 급제하였고,

안남부 서기(安南府書記)에 보직되었다가 진주목의 사록(司錄) 통문서(通文署) 녹사.

강릉부(江陵府)의 전첨(典籤)으로 이직(移職)하고,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로 전직했다가

예빈 내급사(禮賓內給事)로 영전하였다.

 

 

협주(陜州) 지사로 나갔다가 들어와서 낭비서(郞?書)가 되었다.

 

전에 비서승(?書丞)으로 봉선대부 사헌장령(奉善大夫司憲掌令)에 기용되었는데,

여기서부터 계품은 중대광(重大匡)에 이르고, 관직은 정당문학 상호군에 이르렀다.

 

관직은 진현대제학(進賢大提學)에 이르니, 성근익찬 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이라 호를 주었다.

 

성산군(星山君)은 봉작이요, 문열공(文烈公)은 시호이다.

 

공은 사람됨이 몸은 작으나 정밀하고 강하며 지조는 굳고 말에 과감하여 역임한 관직에 드러난 공적이 많지만,

큰 절개로 더욱 칭찬할 만한 일이 다섯 가지가 있다.

 

대덕(大德) 말년에 공이 충렬왕(忠烈王)을 따라 경사(京師)에 조회하였는데,

충선왕이 와서 문안하고, 여러 동료들이 본래 왕송(王宋)의 당이므로 모두 의심을 품고,

불안하여 달아나고 숨었으나, 공은 믿고 평일과 다름없이 진퇴를 삼갈 뿐이었다.

 

멀리 귀양갔다가 돌아와서 시골에 거한 지 13년이지만,

일찍이 한번도 자기의 무죄함을 송사 하는 말을 내지 않은 것이 한 가지요,

 

 

여러 나쁜 무리들이 충숙왕을 원 나라 조정에 소송하여 경사에 5년을 머무르게 되었는데,

공은 16명의 선비들과 더불어 한 장의 종이에 서명하고 대궐에 나아가 청하고자 하다가

공이 마침내 홀로 4천 리를 달려가서 그 글을 바친 것이 두 가지요,

 

 

처음에 영릉이 조서를 받들어 숙위(宿衛)하는데 나이가 장성하여 자못 삼가지 않는다는 소문이 들렸다.

 

공이 생각해 보니 경계할 것이 있으므로 그리하여 돌아가기를 고하고 나아가서 말하기를,

“전하께서 대신 귀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천자를 섬기니,

날마다 하루같이 삼가야 하는데 어찌 예를 버리고 정을 따라 누를 불러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전하의 허물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아보(阿保)의 집에서 자랐으므로 함께 노는 자들이 무뢰자가 많았고,

그 후 박중인(朴仲仁)ㆍ이인길(李仁吉) 등이 실로 좌우에서 모셨으니,

전하는 누구에게 바른 말을 듣고 바른 일을 보셨겠습니까.

 

대개 선비는 비록 순박하고 옹졸하나 모두 경서를 익혀 염치를 알고 있는데

전하는 사개리(沙箇里)로 지목하니 이 무슨 말씀입니까.

 

전하께서 아첨하는 무리를 멀리 하시고 유아(儒雅)한 선비와 친하시어 행동을 고치시고

스스로 경계하시면 좋지만, 그렇지 못하면 천위(天威)가 지척에서 엄할 것입니다.” 하니,

영릉이 그 말을 감당하지 못하여 바라지를 넘어 도망쳤으나 후에 자못 생각했으니 이것이 세 가지이며,

아울러 영릉을 위해 백안에게 죽음을 각오한 것과, 간절히 간하고 용감히 가버린 것이 두 가지이니,

모두 다섯 가지이다.

 

아, 어질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공은 지원(至元) 6년 기사(원종 10년) 모월 모 갑자에 태어나,

지정(至正) 3년 계미(충혜왕 4년) 5월 기사일에 죽고 그달 신묘일에 장사를 치렀는데,

묘는 그 고을 부동(釜洞)에 있다.

 

 

부인은 초계 정씨(草溪鄭氏)이니 감찰대부(監察大夫) 윤의(允宜)의 딸이며,

외아들은 포(褒)이니 밀직부사 상호군(密直副使上護君)이다.

 

손자는 7명이니 맏이는 인복(仁復)인데 우부대언 좌간의대부(右副代言左諫議大夫)이며,

일찍이 사책(射策)으로 황조(皇朝)의 제과(制科)에 합격하였다.

 

명에 이르기를,

 

 

담은 몸보다 크고 / 瞻偉於身
질은 문보다 승하도다 / 質愈於文
근면으로 정사에 임하였고 / 勤以從政
정성으로 임금을 섬겼도다 / 誠以事君
봉작되고 수를 누렸으며 / 旣爵而壽
아들 손자를 두었으니 / 有子與孫
하늘이 복주지 않았다고 이를진댄 / 謂天不賚
마을의 문에 와서 볼지어다 / 來視里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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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양(岳陽)의 욕 : 고려조의 제28대 충혜왕은 처음부터 주색(酒色)과 유흥을 일삼으며

정사를 보살피지 않아 국사가 날로 어지러웠는데,

복위(復位) 4년에는 원 나라 사신 내왕(乃往) 등이 와서 왕을 원 나라로 강제 압송하였으며,

다시 멀리 게양현(揭揚縣)으로 귀양 보냈는데,

왕은 도중에서 온갖 고초를 겪던 중 이듬해 정월에는 악양현(岳陽縣)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왕송(王宋) : 간신 왕유소(王惟紹)ㆍ송방영(宋邦英)을 말함이다.

 

 

이들은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여러 가지 부정ㆍ악행을 하였지만,

그중에도 충렬왕 3년 원 나라 성종(成宗)의 대덕 9년에 충렬왕을 모시고 원 나라 서울에 들어가서

왕과 함께 머물러 있는 중에 왕과 충선왕의 부자간을 이간하여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그 중에도 이듬해인 충렬왕 32년에는 원 나라 조정 및 황실에 참소하여 충선왕을 중이 되어 나가게 하고,

서흥후(瑞興侯) 전(琠)으로 충선왕비인 원 나라 공주에게 장가들어 왕위를 계승하게 하려고까지 하며,

반대하는 사람을 모두 잡아 옥에 가두게 하였는데,

형세가 이렇가 되니 모두들 무서워서 감히 충선왕을 따를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사개리(沙箇里) : 당시 몽고어로 유생이라는 말인데, 여기에서는 물정에 어두운 서생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 묘지(墓誌) - 유원고려국 광정대부 도첨의참리 상호군 춘헌선생 최양경공 묘지명
(有元高麗國匡靖大夫都僉議參理上護君春軒先生崔良敬公墓誌銘)

 
춘헌(春軒) 최양경공(崔良敬公)의 휘는 문도(文度)이며 자는 희민(羲民)이다.

 

나이 54세로 지정(至正) 5년(충무왕 원년) 6월 계축일에 죽었다.

 

8월 임신일에 날을 받아 옥금산록(玉金山麓)에 장례를 치르고 선영(先塋)에 부장(?葬)하니 예이다.

 

아들은 사검(思儉)이니 공보다 먼저 죽었고, 손자는 모두 어리다.

 

맏사위는 좌간의 대부 정포(鄭?)이니 경사(京師)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둘째 사위는 판도정랑(版圖正郞) 민선(閔璿)이니,

나부인(羅夫人)의 명으로 나에게 글을 빌어다가 장차 돌에 새겨 광중에 넣으려고 하였다.

 

내가 늙은지라 기록하고 적는 데에 게으르지만 스스로 생각건대 평생을 서로가 되었으니,

의리상 사양할 수 없어 붓을 잡고 그 끝에 제목하기를,
“춘헌 선생 묘명(春軒先生墓銘)이라.” 하였다.

 

어떤 이가 힐책하여 말하기를,
“춘헌 선생은 장관(將官)에서부터 기용되었고, 또 그 나이가 자네보다 6년 아래인데

자네가 선생이라 하니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춘헌은 광양군(光陽君) 휘 성지(誠之)의 아들이요,

찬성사 대제학(贊成事大提學)으로 치사한 휘 비일(毗一)은 그 조부이며,

호부상서 한림학사(戶部尙書翰林學士)로 치사한 휘 우(佑)는 그의 증조부이며,

찬성사 대사학(贊成事大司學)으로 치사한 김씨 휘 훤(?)은 그의 외조부이니, 진실로 덕망이 있고 벼슬하는 자손이다.

 

그런데 광양군은 덕릉(德陵)에게 신임을 받아 기밀(機密)과 선거(選擧)를 전담한 지 20여 년에 명성과 세력이 대단하였다.

 

춘헌은 원 나라 조정[中朝]에서 숙위(宿衛)하는데 몽고(蒙古)의 글과 말을 익혀

부귀한 집  사람들과 같이 처하였고, 무장한 장수들과 같이 놀았으니,

이만하면 부귀하고 교만할만 하거늘 격물치지와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도에 대해,

그 문을 찾아 들어가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데 나가면 활과 칼을 손에 잡고,

들어오면 눈을 책서에 붙여 주렴계ㆍ정명도ㆍ정이천ㆍ주회암의 서적을 모두 모아서 보았다.

 

밤이 깊어서야 잠자고 닭이 울면 일어나며,

반드시 절목(節目)에 자세하고 깊이 연구하여 마음에 체득하고 몸소 행한 연후에 그쳤다.

 

온화하기는 봄볕과 같고 맑기는 가을 물결과 같아,

비록 종과 첩들이라도 일찍이 그가 갑자기 성내고 크게 기뻐하는 것을 한번도 보지 못하였다.

 

덕릉이 서번(西藩)으로 피하여 갈 적에 춘헌이 광양군을 모시고 조(?)와 농(?)으로 가서 문안하였는데,

왕복 만리 길에 화열한 얼굴빛으로 게을리 하지 않고 더욱 공경히 하니, 광양군은 편안하기가 마치 집에 있는 듯하였다.

 

충숙왕이 심부(瀋部)에 들어가서 조회할 때 세력을 잡은 자들이 형제간의 싸움을 선동하여 일으키니,

참소하는 말이 비등하여 모두 온전한 사람이 없었으나,

춘헌의 몸은 그 거처하는 데 있고 뜻은 그 의리를 따라 정직하면서도 능히 공경하여 피차간에 유감이 없게 하였다.

 

 

양친을 여의고 3년만에 가묘(家廟)를 세우되, 죽은 부모 섬기기를 생존시와 같이 하였다.

 

아들 여러 남매가 모두 선부인(先夫人) 김씨 소생이었지만 나부인(羅夫人)을 잘 섬겨 계모 되는 줄을 또한 알 수 없었다.

 

그가 판서 전법사(判書典法司)로 있을 적에는 측근에 있는 자들이 그 간사한 짓을 하지 못하였고,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평양(平壤)과 쌍성(雙城)에 있을 적에는

완악하고 사나운 무리들이 마음대로 속여넘기지 못하였다.

 

밀직(密直)에 들어와 첨의(僉議)에 오르게 되니 온 나라의 선비들이 중직에 등용됨을 기뻐하였고

백성들은 그 은혜를 입었는데, 하늘이 수를 주지 않아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모두 세월이 빠름을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고 혹은 눈물까지 흘렸다.

 

아, 춘헌의 도는 자기에게 극진하고 남에게 미더웠으며, 집에서 행하여 나라에 미쳤도다.

 

살아서는 만백성의 기대에 관계되었고, 죽어서는 진췌(疹?)의 슬픔을 일으켰으니

지금 세상에 구한다면 절대로 없을 것이며, 세상에 어쩌다 있는 사람이라 하겠다.

 

그런데 내가 늙은이로 자처하고 선비로 자부하면서 춘헌을 선생이라 하지 않으면

그것이 옳을 것인가 옳지 않을 것인가.” 하였다.

 

그 명문에 이르기를,

 

 

선비로서 선비답지 못한 자는 / 儒而匪儒
세상에 흔한 일일데 / 世則是繁
선비 아니면서 선비인 사람은 / 匪儒而儒
홀로 우리 춘헌뿐이로다 / 獨吾春軒  하였다.

 

 

○ 묘지(墓誌) - 김문영공 부인 허씨 묘지명(金文英公夫人許氏墓誌銘) 병서(幷序)

 

 

부인의 성은 허(許)씨이니, 중찬 문경공(中贊文敬公) 휘(諱) 공(珙)의 둘째 딸이다.

 

조부는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이니 휘는 수(遂)이며, 증조부는 예빈소경(禮賓少卿)이니 휘는 경(京)이다.

 

어머니는 윤(尹)씨이니 정당문학 문평공(政堂文學文平公) 휘 극민(克敏)의 딸이다.

 

부인은 나면서부터 근실하였으므로 문경공의 사랑을 받았다.

 

 

윤씨(尹氏 모친)의 장삿날이 곧 을축일 인데 어떤 사람이 부인이 난 해라 하여 다시 정하기를 청하였다.

 

문경공이 말하기를,
“우리 이 여아는 뒤에 반드시 복을 누릴 것이니, 혐의할 것이 없다.” 하였다.

 

자라서 좋은 사위를 골라 착한 정승 상락군 문영 김공(上洛君文英金公) 휘 순(恂)의 아내가 되었다.

 

김씨와 허씨는 모두 큰 가문이어서 부호함이 서로 높았으나 부인이 예법으로 처신하니, 사람들의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문영이 늦게 노래와 기생을 좋아하였으나 일찍이 질투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문영공보다 12년 후인 지순(至順) 임신년(충숙왕 복위 원년) 7월 신묘일에 병으로 세상을 마쳤는데, 모두 4남 3녀를 낳았다.

 

맏아들은 영돈(永暾)이니 봉상대부 전법총랑(奉常大夫典法摠郞)이요,

둘째는 영휘(永暉)이니 흥위위 낭장(興威衛郞將)이며,

셋째는 출가한 이름이 사순자은종대덕(思順慈恩大德)이며,

넷째는 영후(永煦)이니 봉선대부 자섬사사(奉善大夫資贍司使)이다.

 

 

맏딸은 대광 청하군(大匡淸河君) 정책(鄭?)에게 출가하였는데 부인보다 먼저 죽었고,

둘째 딸은 대광 상당군(大匡上黨君) 백이정(白?正)에게 출가하였으며,

막내딸은 원 나라 사람 별리가불화(別里哥不花)에게 출가하니

강절성 참지 정사(江浙省參知政事)이다.

 

 

명문에 이르기를,

 

 

유순하고 바르니 / 柔婉中正
부인의 덕이 갖추었고 / 婦德之備
너그럽고 은혜로우니 / 寬淑惠和
어머니의 예절이 아름답도다 / 母則之懿
훌륭한 문경공은 / 於惟文敬
분명하게 알아보았으니 / 鑑裁孔明
하물며 그 아들에 대해서 / ?于厥子
오죽이나 정상하랴 / 賞宜益精
군자의 배필이 되어 / 作配君子
착하고 천수를 누렸으니 / 克臧克壽
내가 유허에 명문지어 / 我銘幽墟
유구한 내세에 전하노라 / 用?攸久  하였다.

 

 

○ 묘지(墓誌) - 대원제봉 요양현군 고려삼한국대부인 이씨 묘지명 병서
(大元制封遼陽縣君高麗三韓國大夫人李氏墓誌銘 幷序)
 

대부인(大夫人)의 성은 이(李)씨이니 흥례부(興禮府)가 본향이다.

 

증조부의 휘는 순광(淳匡)이니 사재주부(司宰注簿)이며,

조부의 휘는 우(祐)이며 부친의 휘는 춘년(椿年)이니 모두 벼슬을 하지 않았다.

 

15세가 지나 한산 이씨 정읍 감무(韓山李氏井邑監務) 휘 자성(自成)에게 시집가니

두 집이 원래부터 다른 성씨이요, 같은 이씨(李氏)는 아니다.

 

3남 1녀를 낳았다.

 

맏아들은 배(培)요, 둘째 아들은 일찍 죽었으며, 셋째 아들은 곡(穀)이다.

 

딸은 장씨(張氏)에게 출가했는데 부인보다 먼저 죽었다.

 

정읍부군(井邑府君)이 죽은 다음 40년간 과부로 절개를 지켰다.

 

자질이 영리 민첩하고 자상하면서도 엄하여, 두 아들의 과거 공부를 힘써서 모두 출세하도록 하였다.

 

배(培)는 벼슬이 사복서 승(司僕署丞)이요,

곡은 국가시험 수재과(秀才科)에 오르고 또 황조 제과(皇朝制科)에 올랐으며,

지금 봉의대부(奉議大夫)로 정동행성(征東行省)의 낭중(郞中)이 되었고,

또 국상(國相)이 되었으며 한산군(韓山君)에 봉작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조정에서 정읍부군을 비서감 승(?書監丞)으로 증직하고,

대부인은 현군(縣君)에 봉작 하였으며,

나라에서는 명하여 삼한국 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하니 당세에서 영광으로 여겼다.

 

나이 83세로 지정(至正) 10년(충정왕 2년) 10월 임인일에 세상을 마쳤는데,

그 해 12월 병신일에 한산(韓山) 둔덕에 장사지내었다.

 

명문에 이르기를,

 

 

몸가짐 절개 있고 / 持身有節
자식 교육 법도 있으니 / 訓子有則
선비로도 어려운 일 / 士也其難
어머니로서 능히 했네 / 惟母時克
몸이 높은 영화 누렸으니 / 身享尊榮
□이름을 이루었기 때문이네 / 由口名遂
유허(幽墟)에 글을 새겨 / 刻文幽墟
길이 후세에 보이노라 / 于求厥?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