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시조 익재 이제현

동문선(東文選)에 올라있는 익재공(益齋公)의 글(H)

녹전 이이록 2009. 2. 10. 22:40

● 동문선(東文選)에 올라있는 익재공(益齋公)의 글(H)

 

 

◆ 동문선 제118권  -   비명(碑銘)

 

 

○ 비명(碑銘) - 대도남성 흥복사 갈(大都南城興福寺碣)

 
불교의 인과법칙에 선행을 닦으면 좋은 응보를 얻는다는 것은 마치 뿌리에 물을 대면 열매를 먹을 수 있음과 같고

작용은 능히 헤매는 무리를 인도하여 공덕으로 나아가게 한다.

 

경사(京師) 남성(南城)의 남쪽에 절이 있으니, 이름을 흥복(興福)이라고 한다.

 

성시와 거리가 멀지 않으나 쓸쓸하고 빈 듯하여 산의 계곡과 같은 취미가 있다.

 

보시하는 자가 날로 와서, 중들이 몸을 보양하고 진리를 닦을 수 있다.

 

어느 날 고려의 중 원담(元湛)이 땅 5묘를 사서 그의 무리 숭안(崇安)ㆍ법운(法雲) 등과 더불어

일찍이 터를 잡아 당(堂)을 지었다.

 

장성군부인(長城郡夫人) 임씨(任氏)라는 이가 있으니, 또한 고려 사람이다.

 

세조 황제 때부터 황후궁(皇后宮)의 지우를 얻어 상을 내림이 매우 후하였으므로,

항상 축복을 올려 은혜에 보답할 길을 생각하였으나 계책이 없더니,

원담 등의 이 거사를 듣고 기뻐하여 저화(楮貨) 몇 천 민(緡)을 내주어 토목경경의 비용을 넉넉하게 하고,

좋은 밭 50묘를 주어 아침저녁의 공양의 수요로 충당하게 하였다.

 

공장을 구하고 재목을 써서 위에는 마룻대를 세우고, 아래는 처맛기슭을 만들었다.

 

황경(皇慶) 2년 가을에 경영을 시작하여 연우(延祐) 4년 봄에 낙성하였다.

 

댓마루는 높고 방과 창문은 깨끗하며, 재주(齋廚 재공(齋供)을 만드는 부엌)는 환하게 밝고 불상의 시설은 엄숙함이 있었다.

 

만약 주장하는 이만 있다면 능사(能事)가 다하는 것이다.

 

인하여 대대로 고려의 중으로써 강석(講席)을 주재하게 하기로 약속하였다.

 

대개 그들이 능히 계율에 정통하였기 때문이다.

 

원담ㆍ숭안ㆍ법운ㆍ임부인(任夫人)이 고국을 떠난 수천 리 밖에서 기약하지 않았다가 모여서

좋은 일을 작위(作爲)하여 힘을 덜고 공을 갖추게 된 것을 아름답게 여긴다.

 

숙세(宿世)의 인연이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이 때부터 위로는 조정의 복을 받들어 빌고 아래로는 생령들에게 이로움을 비처럼 적셔 줄 것이다.

 

천궁(天宮 천상의 궁전)에 이미 신자(身子 부처님의 지혜 있는 제자인 사리불(舍利佛))의 승(繩)이 나타나고,

큰바람이 가난한 여인(女人)의 등불을 끄지 아니 하였으니, 인과응보의 설은 그 또한 징험이 있는 것일까.

 

나는 본래 고려 사람으로서 원담(元湛) 등과 교유하고 있으니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그의 말을 글로 써서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소리쳐 고하노라.

 

 

○ 비명(碑銘) - 해동 조계산 수선사 제십세 별전종주중속조등묘명존자 증시혜감국사비명 병서

(海東曹溪山修禪社第十世別傳宗主重續祖燈妙明尊者贈諡慧鑑國師碑銘 幷序)

 

 

만약 대(大) 스님이라면, 나와서 벼슬하고 물러가 숨어사는 일이나, 말하고 침묵하는 것에 모두 구차하지 아니할 것이다.

 

나와서 벼슬하고 물러가 숨어사는 일은 때에 따라 할 것이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도 또한 기회에 달린 것이다.

 

그리하여 그 도를 펴서 밝히고 그것으로써 후각자를 깨우치는 것이니,

고(故) 혜감국사(慧鑑國師)는 때에 따라 행동한 자이다.

 

국사의 휘(諱)는 만항(萬恒)이요, 속성(俗姓)은 박씨(朴氏)이다.

 

 

고(考)는 진사로서 휘는 경승(景升)이니, 웅진군(熊津郡) 사람이다.

 

스님은 유학하는 집안의 자제로 중이 되었다.

 

어려서는 총명하고 영리하여 능히 스스로 학문하는 데 힘썼으며, 장성하여서는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구산선(九山選 선종(禪崇)의 구산(九山)에서 시행하는 국가고시인 중의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로 뽑히었다.

 

옷자락을 걷어올리고 결연히 풍악에 들어가더니, 여름에 지리산으로 옮겨가 머물렀다.

 

굶주려도 두 가지 음식을 겹쳐 먹지 아니하고 추워도 갖옷을 껴입지 않았으며, 자리에 눕지 아니한 것이 여러 해 되었다.

 

종적은 감추었으나 이름은 드러나니 충렬왕이 삼장사(三藏社)에 머무를 것을 명하였다.

 

그의 스승인 조계원 오화상(曹溪圓悟和尙)도 또한 그렇게 하라고 타일러서 드디어 삼장사로 갔다.

 

그 뒤 낭월(朗月)ㆍ운흥(雲興)ㆍ선원(禪源) 등의 선사(禪社)를 두루 주재(主宰)하였다.

 

모든 경문(經文)을 지도 교수하기를 마치 귀머거리가 듣는 듯 술 주정하다가 금방 깨는 것같이 하였다.

 

제자가 7백 명에 이르렀으니, 사대부로서 제자가 되어 입사(入社)한 자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중국 오(吳) 나라의 이몽산(異蒙山)이 그의 글과 게(偈)를 보고, 칭찬을 마지아니하여 열 몇 편을 화답하였다.

 

이어 편지로 고담(古潭)이라는 아호를 지어 주었다.

 

황경(皇慶) 계축년에 대위왕(大尉王)이 영안궁(永安宮)에 연거(?居)할 때 수레를 편안하게 하고,

스스로 말을 낮추어서 스님을 경성(京城)에 맞아들이었다.

 

그 때 경성에서는 바야흐로 선종ㆍ교종의 이름난 스님들을 모아서 날마다 차례로 불법을 강론하고 있었다.

 

우리 스님이 도착하여 강론을 하게 되었는데 바른 것을 받들어 찬양하고 잘못을 꾸짖는 것이 마치 바람이 이는 듯하며,

변론함이 물을 내리 쏟는 것 같았다.

 

임금은 매우 기뻐서 갈 때는 같은 수레를 타고 스님의 반찬을 손수 받들곤 하였다.

 

별전종주 중속 조등 묘명존자(別傳宗主重續祖燈妙明尊者)라는 법호를 주고, 가사ㆍ웃옷ㆍ하의ㆍ모자ㆍ버선과

은폐(銀弊) 50일(鎰)을 노자로 주었다.

 

 

스님이 산에 돌아와서는 모두 상주승물(常住僧物)로 돌리고 사사로이 쓰지 아니하였다.

 

연우(延祐) 기미년 7월에 병이 들어 편고산(遍告山)으로 옮겨 가려고 하였는데,

하루 전날 저녁에 남쪽 봉우리에서 큰 나무가 저절로 쓰러지고, 붉은 기운이 산과 계곡에 뻗치었다.

 

8월 18일에 머리를 깨끗이 깎고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유서(遺書)를 쓰고, 스스로 장사할 땅을 잡았다.

 

밤에 모시는 자를 불러 북을 치게 하고, 가리(伽梨 선가(禪家)에서 쓰는 가사의 일종)를 헤치며 선상(禪牀)에 의지하여

소리내어 게를 읊어 작별을 고하였다.

 

그 게에 대략 이르기를,

오온을 확청하니 / 廓淸五蘊
참 비침이 무궁하도다 / 眞照無窮
죽고 살고 나오고 빠져 들어가는 것은 / 死生出沒
달이 공중에 구르는 것과 같다 / 月轉空中
내 이제 다리를 내리노니 / 吾今下脚
누가 그윽한 발자취를 분변할까 / 誰辨玄?
너 제자에게 고하노라 / 告爾弟子
헛되게 공중을 더듬지 말라 / 莫??空  하였다.

 

선자(禪者) 경호(景瑚)가 떠남과 머묾의 뜻을 물으니,
“어느 곳엔들 서로 만나지 않음이 있으리요. 큰 물을 건너는데 떼[筏]를 사용하지 않는다.” 하는 등의 말을 하였다.

 

무릎을 치고 두 손을 마주잡은 채 웃음을 머금고 화(化)하였다.

 

화장(火葬)하여 그 유골을 절의 간방(艮方 정동(正東)과 정서의 중간의 방위)에 있는 언덕에 탑을 세우고 안치하였다.

 

나이는 71세, 중의 경력은 58년이었다.

 

부고를 듣고 임금은 진실로 슬퍼하였으며 혜감국사(慧鑑國師)라는 시호를 주고,

탑은 광조지탑(廣照之塔)이라고 명명하였다.

 

처음에 어머니 정씨(鄭氏)의 꿈에 하늘에서 푸른 장막이 내려오더니 사내아이가 있는데,

피부와 살결이 얼음이나 옥같이 깨끗하였다.

 

가서 보니 애기가 드디어 합장하고 정씨의 품에 뛰어들어 왔다.

 

잠을 깨니 말[斗]만큼 큰 돌이 뱃속에 들어있는 것 같았는데, 침을 맞아도 약을 먹어도 효험이 없었다.

 

기유년 8월 6일에 스님을 낳았다. 이름을 막아(幕兒)라고 하였었다.

 

스님이 입적할 때에는 대방군(帶方郡)에 사는 백성으로서 이름을 백태(白太)라고 하는 자의 꿈에,

스님이 푸른 막에 올라 하늘로 가는 것이 보였다.

 

이상하게 여겨 다음날 절에 달려가니, 스님이 이미 세상을 떠났더라 한다.

 

명(銘)에 이르기를,

 

 

스님의 덕은 / 師之德
온화하고 곧으며 / 而溫直
깊고도 성실하도다 / 淵而塞
스님의 학문은 / 師之學
넓고도 너그러우며 / 博以約
정밀하고도 확실하도다 / 精以確
해인같은 마음이요 / 海印其心
사자같은 음성이로다 / 獅子其音
그가 조계종을 맡으니 / 曹溪其任
보조국사의 열쇠를 잡고 / 挺普照之?
원오선사의 목탁을 울렸고 / 振圓悟之鐸
몽이의 흙벽을 뚫었도다 / ?蒙異之堊
도가 있는 곳에는 / 道之所存
왕자도 그 존귀함을 굽히고 / 王者屈尊
중한 폐백과 아름다운 초헌으로 / 重幣華軒
산문에 빛나게 왔네 / 賁于山門
석자들의 오고 감이 매우 많아서 / 釋子旁午
우리에게 불법의 젖을 부어 주네 / 湊我法乳
불법의 젖이 널리 보급되니 / 法乳斯普
온갖 만물이 단비를 만난 것 같네 / 萬彙時雨
감추어 숨은 것이 아닌지라 / 匪晦而隱
어찌 찾는 것이 많으며 / 害富其?
일으켜 떨친 것이 아니니 / 匪作而奮
뉘 그 심오한 것을 연구하겠는가 / 疇究其蘊
이미 자신을 어질게 하고 / 旣善諸身
능히 남을 이롭게 하였도다 / 克利于人
길이 전할 수 있는 옥같은 돌에 새기노니 / 刻銘貞珉
천권에 환히 빛나리라 / ?燿千卷  하였도다.

 

 

○ 비명(碑銘) - 유원고려국 조계종 자씨산 영원사 보감국사비명 병서

(有元高麗國曹溪宗慈氏山瑩源寺寶鑑國師碑銘 幷序)

 

 

근세에 대비구(大比丘)로써 불조(佛祖 석가모니)의 도를 밝혀

뒤에 오는 배우는 자들에게 길을 열어 준 이는 보각국사(普覺國師)이다.

 

그의 무리가 대체로 수백 수천이나 되지만,

능히 굳은 것을 뚫고 깊은 것을 움켜서 묘계(妙契)가 줄탁(?啄 사제간(師弟間)에 의견이 서로 부합함)한 자는

오직 보감국사(寶鑑國師) 한 사람일 뿐이다.

 

국사의 휘는 혼구(混丘)요, 자는 구을(丘乙)이며, 구명(舊名)은 청분(淸?)이고, 속성은 김씨(金氏)다.

 

고(考)는 증첨의평리(贈僉議平理)로서 휘는 홍부(弘富)이니, 청풍군(淸風郡) 사람이다.

 

황려(黃驪) 민씨(閔氏)의 딸에게 장가들고 복령사(福靈寺)의 관음상에게 기도하여,

충헌왕(忠憲王) 27년 신해년 7월 27일에 국사를 낳았다.

 

국사가 어릴 때 여러 아이들과 노는데, 기와 조각들과 돌을 모아다가 탑이나 사당을 만들었으며,

쉴 때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여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얼굴과 모습이 단정하고 엄숙하며, 성질이 또 자비하고 다정하였기 때문에, 친척들이 작은 아미타불이라고 하였다.

 

10살 때에 무위사(無爲寺)의 천경선사(天鏡禪師)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구산(九山)의 승과(僧科)에서 장원 급제하여 상상과(上上科)에 올랐으나 내버리고 가서 보각국사에게 배웠다.

 

스스로 꾸짖기를,
“깊고 먼 곳을 보지 않고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처음에 보각국사가 꿈을 꾸니 어떤 중이 와서 스스로, “오조(五祖)의 아류라.” 하였다.

 

이른 아침에 보감국사가 가 뵈었으나 마음 속으로만 이상하게 여겼더니,

이제는 그가 민첩하고도 부지런한 것에 감탄하여 여러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꿈이 징험이 있었다.” 하였다.

 

보각국사의 자리를 이어 강당을 열게 되자, 여러 사람을 거느림은 규율있게 하고,

불경을 강의함은 하나로 그어 놓은 것같이 하였다.

 

그리하여 온화하고 한아하게 지내었다.

 

충렬왕이 가리법복(伽梨法服)을 내리고, 여러 번 하비(下批 삼망(三望)을 갖추지 않고

한 사람만 기록 상주하여 임명하는 것)하여 대선사에 이르렀다.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여서는 특히 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을 제수하고

대사자왕법보장해국일(大師子王法寶藏海國一)이라는 호를 더하였다.

 

황경(皇慶) 계축년에 충선왕이 왕위를 사퇴하고 영안궁(永安宮)에 거처할 때에는

여러 번 중사(中使)를 보내어 수레에서 담론하니, 이따금 해가 저물 때까지 있기도 하였다.

 

이에 국왕과 의논하여 조종(祖宗)의 구례(舊例)에 따라서

사(師)를 오불심종해행원만감지왕사(悟佛心宗解行圓滿鑑智王師)로 책명하였다.

 

양대의 임금이 같이 제자의 예로써 유익한 가르침을 청한 것은 예전에는 아직 없었던 일이다.

 

두어 해를 지난 뒤에 물러가기를 매우 간절히 빌므로 허가하고, 이어 영원사(瑩源寺)에 머물게 하였다.

 

이 절은 본래 선원(禪院)이었던 것을 원정(元貞) 연간에 지자종(智者宗)의 소유가 되었다가

사 때문에 비로소 복구하게 되었다.

 

지리(至理) 2년 겨울 10월에 이르러 병이 들었다.

 

송림사(松林寺)에 옮겨가서 유서(遺書)를 써서 봉인하여 시종에게 맡기고,

30일 뒤에 세수 목욕하고 설법으로 여러 제자들과 작별하였으니,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시 숲 가운데에 다리를 딛고 / 荊棘林中下脚
방패와 창 떨기 속에 몸을 감춘다 / 干戈叢裏藏身
오늘의 가는 길은 과연 어느 곳일까 / 今日路頭果在何處
흰구름 끊어진 곳이 청산인데 / 白雲斷處是靑山
청산 밖에 다시 길가는 사람이 있구나 / 行人更在靑山外  하였다.

 

 

그리고는 방장으로 돌아와 걸상에 의지하여 떠났다.

 

사는 침착 중후하고 말이 적으며 학문은 엿보지 않은 것이 없으며, 시와 문에 풍부한 실력을 가졌었다.

 

《어록(語錄)》 2권, 《가송잡저(歌頌雜著)》 2권, 《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 2권,

《중편지송사원(重編指頌事苑)》 30권의 저서가 있어서 승려사회에 사용되고 있다.

 

중국 오(吳) 나라의 이몽산선사(異蒙山禪師)가 일찍이 무극설(無極說)을 지어서 바다를 왕래하는 배편에 붙여 왔다.

 

사가 묵묵히 그 뜻을 받아들여 스스로 호를 무극노인(無極老人)이라고 하였다.

 

나이는 73세, 승려의 경력은 63년이었다.

 

왕이 부음을 듣고 슬퍼하였으며 보감국사(寶鑑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은 묘응(妙應)이라고 명명하였다.

 

인하여 신 아무개에게 명하여 그의 덕행을 비석에 쓰라고 하였다.

 

신은 들으니, 부처의 즐거운 말과 복된 지혜는 자기의 몸을 닦아서 물(物)이 응보하게 하는 것이다.

 

둘 중에서 그 하나만이라도 이지러진다면 족히 스스로 설 수 없다고 하니, 어찌 남에게 믿음을 줄 수 있겠는가.

 

사가 모두 7번 벼슬의 품질을 높혔으며, 6번 호를 받았다.

 

9번 이름 있는 절을 순례하였으며, 2번이나 내원(內院)에 머물렀다.

 

한 나라의 승려사회(僧侶社會)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두 임금에게 스승의 예(禮)를 받았으나

사람들은 이론이 없었으며 모두 당연하다고 하였다.

 

이른바 복(福)과 지(智) 두 가지가 모두 존엄하다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경우가 아니겠는가.

 

비석에 새겨 후세에 전해 보여도 신은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銘)에 이르기를,

 

 

뛰어난 저 심종이 / ?彼心宗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오니 / 逾海而東
그 종파가 아홉인데 / 厥派惟九
도의 스님이 개조였네 / 道義其首
끊어지지 않고 다들 이어가며 / 繩繩仍昆
대대로 철인이 있어 / 代有哲人
바른 것을 지키고 잘못을 고치는 것은 / 守正矯失
운문의 첫째였고 / 雲門之一
널리 배우고 독실하게 실천함은 / 博學篤行
인각(진귀하고 희소한 것)처럼 드물게 보는 현명일러라 / 麟角之明
아름다운 감지 선사에게 / 顯允鑑智
후가 그의 적사를 이었다 / 侯其嫡嗣
그의 포부는 깊고 / 淵乎其懷
그의 재주는 우뚝히 높다 / 卓乎其才
이에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그 상서(禎) 충혜왕의 휘 를 이었네 / 爰踵其 惠王諱 于?于祖
이미 선종을 주재하여 / 旣主宗盟
모든 방법을 다 기울이고 / 諸方盡傾
곁으로 경서와 역사서를 섭렵하여 / 旁涉書史
정밀한 이치를 연구하였네 / 硏精究理
붓을 떨쳐 글을 지으면 / 奮筆爲文
가을 물이 물결치는 것 같고 봄 구름이 날아 달리는 것 같네 / 秋濤春雲
임금이 예를 다하여 경의를 표하고 / 王于體貌
총애하여 좋은 호를 내리었네 / 寵以嘉號
다만 총애할 뿐 아니라 / 匪惟寵之
북면하여 스승으로 섬기었네 / 北面以師
승려 사회에서 경하하고 의뢰하였으나 / 釋林慶?
사는 스스로 큰 체하지 아니 하였네 / 師不自大
구름 깊은 산 속에 석장을 머루르나 / 掛?雲山
복은 광대한 나라 안을 덮더니 / 陰福區?
밝은 햇볕이 갑자기 숨어 버리니 / 慧晷忽匿
임금의 마음이 이를 슬퍼하여 / 王心是惻
신으로 하여금 명을 지어 / ?臣作銘
억만 년에 향기로움을 선양하라 하셨네 / 揚芬億齡
학이 아니면 이에 패란해지고 / 匪學斯悖
생각이 아니면 이에 혼란해진다 / 匪思斯?
치의를 입은 중들이여 / 有緇其衣
나의 기대함에 힘쓸지어다 / ?哉我希  하였다.

 

 

◆ 동문선 제124권  -  묘지(墓誌)

 
○ 왕 순비 허씨 묘지명(王順妃許氏墓誌銘)

 
황원(皇元) 후(後) 지원(至元) 원년(1335, 충숙왕 복위 4) 을해 월일에 고려국 왕 순비(順妃)가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65세였다.

 

성은 허씨이며 공암군(孔巖郡)이 본향이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경(京)이며, 원 나라 벼슬로 검교상서 우복야 행례빈 소경 지제고(檢校尙書右僕射行禮賓少卿知制誥)이다.

 

조부의 휘는 수(遂)인데, 원 나라 벼슬로 은청 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예부상서 한림직학사 승지

(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禮部尙書翰林直學士承旨)이다.

 

아버지의 휘는 공(珙)인데, 원 나라 벼슬로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 태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

(匡靖大夫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典理司事世子師)이며,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고,

충렬왕묘(忠烈王廟)에 배향되었다.

 

선조들은 모두 시초(視草)의 재주가 높아 이문원(?文院)에서 솜씨를 날렸고, 정사의 중책을 맡아 관복이 대대로 빛났다.

 

문경공은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인색하지 않고 교만하지도 않아서,

온화환 덕의 바탕으로 쉬지 않고 충성을 다하였는데, 자기 몸만 위해서가 아니었으니,

착한 일을 많이 하면 경사가 있는 것이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비(妃)는 영특한 정기를 지닌 여성이요, 수려한 자질을 가진 선녀로서,

달 아래 옥퉁소가 진루(秦樓) 위에서 우는 봉새를 감동시키고,

물결에 비치는 비단 버선이 낙포(洛浦)에 노는 용을 걸어오게 하듯 하였다.

 

지대(至大 충선왕 원년) 기유년에 왕 순비(順妃)에 책봉되었는데,

말이 없어도 도리화(桃李花) 아래 길이 나듯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믿음이 있어 종묘의 제사를 받들 만했던 것이다.

 

 

녹의(綠衣)의 풍자는 당시에 일지 않았고, 동관(?管)의 글은 세상에서 족히 신임을 받으리라.

 

슬하에 3남 4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순정군(順正君) 숙(璹)이니,

본조에서 봉작하여 부원대군(府院大君)이라 칭하였고, 천자가 은혜를 베풀어 한림학사에 임명하였다.

 

둘째 아들은 쌍봉장 노자각(雙峯長老慈覺)이니, 몸의 비단 옷을 벗고 연하(煙霞)에 뜻을 두었으니,

선사(禪師)로 불리면서 이름이 더욱 크게 났다.

 

셋째 아들은 회인군(懷仁君) 정(楨)이니 적제(狄? 서방 오랑캐)의 말을 익혀 석위(席衛)의 행차에 참석하였다.

 

준례대로 봉군을 이어받았으니, 어찌 삼한 공족(三韓公族)에만 그칠 것인가.

 

이름이 역사에 드날릴 것이며 양절(兩浙 절동ㆍ절서) 주관이 된 지 이미 오래이다.

 

맏딸은 영복옹주(永福翁主)이니, 양양군(襄陽君) 김대언(金臺?)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딸은 연희옹주(延禧翁主)이니 중서좌승(中書左丞) 길길반(吉吉反)에게 출가하였는데,

의(懿)의 아내가 경중(敬仲)의 어짊을 알아보고, 묘씨(苗氏)가 위랑(韋郞)의 효성을 알아보듯 하였으니,

지금으로 옛날을 비교하여도 역시 부끄러울 것이 없다.

 

셋째 딸은 곧 백안홀독황후(伯顔忽篤皇后)이니,

태진(太眞)처럼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을 타 이미 금슬의 정이 흡족하였고

금옥(金屋)에 아교(阿嬌)로 앉으니 황후의 사랑이 더욱 높았었다.

 

비는 이로 말미암아 화관(華冠)을 내리는 천자의 윤음을 받게 되어 황후의 수레를 타고 궁궐로 가 친히 조회하고,

내창고(內帑庫)의 진귀한 보물을 여러 번 받았으며, 어명을 받들고 영화롭게 고국으로 돌아왔다.

 

절에다 불당을 개설하고 불경을 펴내어 복을 빌어 천자에게 보답하였으니, 지극하다 이를 만하다.

 

넷째 딸은 경녕옹주(慶寧翁主)이니, 경양군(慶陽君) 노탈(盧?)에게 출가하였는데,

막내딸로 사랑을 독차지하였으니 어찌 화려한 의식이 없었겠으며,

어진 사람을 짝으로 얻었으니 여러 가지 덕행이 없었겠는가.

 

비가 세상을 떠난 지금, 회인군은 수륙 만리(水陸萬里)에 떠나 있으니, 부음(訃音)도 받지 못했을 것이요,

황후는 구중 궁궐에 있으니, 의리상 곡위(哭位)에 임할 수 없는 일이며,

순정ㆍ쌍봉ㆍ영복ㆍ연의는 모두 먼저 저 세상으로 가서 어버이의 뜻을 길이 저버렸기 때문에,

비의 초상에는 염(?)에서부터 장사까지 오직 경녕옹주와 경양군만이 마음을 다할 수 있었는데,

임종할 때에는 성이 무너지듯 애통해하였고, 관(棺)을 덮을 때에는 강물이 쏟아지듯 눈물을 흘렸다.

 

다음해 병자 2월 임인일에 덕수현(德水縣) 증산(甑山) 둔덕에 장사지내니, 이는 예법에 따른 것이다.

 

또 졸필(拙筆)을 청하여 묘지의 명을 새기게 하니, 어찌 촉왕(蜀王)이 쓸데없이 가인경(佳人鏡)을 만든 것과 비교할 일이겠는가.

 

다만 한객(漢客)이 일찍이 지은 유부비(幼婦碑)에 부끄러울 뿐이다.

 

 

명에 이르기를,

 

 

혁혁한 허씨 가문은 / 於革許宗
나라 초기부터 흥성했는데 / 興自國初
대대로 그 아름다움 성취하여 / 世濟其美
사책에 끊임없이 기록되었네 / 史不絶書
문경공이 겸손하고 겸손하여 / 文敬謙謙
능히 검소하며 덕을 조심하니 / 敦儉愼德
하늘에서 음공 주는 것이 / 天?陰功
심으면 수확이 있듯 하였도다 / 猶播有穡
상서로운 용꿈을 꾸어 / 儲祥夢?
영특한 딸 낳으니 / 有女之英
연꽃이 화려함을 양보하고 / 芙?讓麗
난초도 향기가 무색하네 / 蘭?羞馨
이미 은하수에 목욕하였고 / 旣沐?潢
자손도 번성하여 / 載繁玉葉
가문에 은총이 넘치고 / 寵溢門閭
족보에 영광이 더하도다 / 光增譜牒
어찌 한 종족 뿐이랴 / 不寧一宗
온 나라 사람들이 사모하네 / 邦人仰之
어찌 한 나라 뿐이랴 / 不寧一邦
천자께서 상 주었네 / 天予賞之
향년 60이 넘자 / 年踰耳順
종시의 영화에도 슬픔이 생겨 / 終始哀榮
청오(靑烏)가 자리를 잡고 / ?烏卜兆
방상이 앞을 인도하도다 / 方相啓行
울창한 저 무덤은 / 鬱彼佳城
임평(臨平)의 언덕인데 / 臨平之阜
임금님의 비이시고 / 邦君之妃
황후의 어머니시로다 / 皇后之母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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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비(順妃) : 순비 허씨는 고려조 제26대 충선왕의 비이다.

평양공(平壤公) 현(眩)에게 출가하여 낳은 딸이 원 나라 황태자비가 되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궁중에서 세력이 있었으며 왕비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원 나라 조정에서는

특별히 사신 완자(完者)를 보내어 와서 함께 장사 지내게 하였다.
명문 중에 특별히 고심 역작의 흔적이 보이는 것도 이러한 비의 대외적 위치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옥퉁소가 …… 감동시키고 : 여인의 아름다움을 상징한 말이다.

진 목공(秦穆公)의 딸 농옥(弄玉)이 음악을 매우 좋아했는데, 소사(蕭史)가 퉁소를 잘 불므로,

진 목공이 소사에게 자기 딸 농옥을 시집보내고 봉루(鳳樓)를 지어주었더니,

두 사람이 퉁소를 불자 봉황이 내려와, 드디어 두 사람이 봉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고사이다.
진루(秦樓)는 곧 진 목공이 지어준 봉루를 뜻한다.

 

*비단 버선이 …… 오게 하듯 : 미인의 아름다운 자태를 비유한 말이다.

삼국 시대 조식(曹植)이 낙천(洛川)의 수신(水神) 복비(宓妃)의 일을 읊은 〈낙신부(洛神賦)〉에

“아름다운 모습이 노니는 용과 같고 …… 비단 버선에 먼지가 인다[婉若游龍 …… 羅襪生塵]”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녹의(綠衣)의 풍자 : 《시경》 녹의에, “녹색 옷이여, 녹색이 윗옷이요 황색이 속옷이로다[綠兮衣兮 綠衣黃裏].” 하였는데,

그 주에, “녹색은 간색(間色)이고 황색은 정색(正色)인데, 천박한 간색으로 윗옷을 만들고

귀중한 정색으로 속옷을 만들었으니, 둘 다 제 자리를 잃었음을 말한다.” 하였고,

또, “장공(莊公)이 총애하는 궁첩(宮妾)에게 빠져, 현명한 부인 장강(莊姜)이 지위를 잃었으므로

이 시를 지어 풍자한 것이다.” 하였다.

 

*동관(?管)의 글 : 동관은 자루가 빨간 붓.

옛날 여사(女史)가 이 붓을 갖고서 궁중의 정령(政令) 및 후비(后妃)의 일을 기록하였다.

 

*의(懿)의 …… 알아보고 : 사위를 잘 골라서 얻었다는 뜻이다.

의는 춘추 시대 제(齊) 나라 의중(懿仲)을 가리키는데,

의중이 자기 딸을 전경중 완(田敬仲完)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그의 아내가 점(占)을 쳐보고 길(吉)하다 하여,

전경중을 사위로 삼았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묘씨(苗氏)가 …… 알아보듯 : 당(唐) 나라 장연상(張延賞)이 사위를 고를 때 뜻에 맞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아내 묘씨가 현명하여 사람을 알아보아, 특별히 위고(韋皐)를 선택하며,

이 사람의 귀(貴)를 당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여 사위로 삼았는데, 뒤에 과연 현달했다는 고사이다.

위랑은 곧 위고를 가리키는 말이다.

 

*태진(太眞)처럼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을 타 : 금슬이 좋았다는 뜻이다.

태진은 당 현종(唐玄宗)의 비 양귀비(楊貴妃)이고, 예상우의곡은 현종이 윤색(潤色)한 당 나라 악곡 이름이다.

《태진외전(太眞外傳)》에, “상(上)이 제왕(諸王)과 목란전(木蘭殿)에서 주연을 베풀 적에 기쁘지 않은 기색이 있었는데,

양귀비가 예상우의곡 한 곡조를 춤추자 상이 크게 기뻐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금옥(金屋)에 아교(阿嬌) : 왕에게 총애를 받았다는 뜻이다.

아교는 진 황후(陳皇后)의 이름으로, 한 무제(漢武帝)가 어렸을 때 아교를 보고서

“아교에게 장가들면 황금으로 집을 짓고 그 속에 넣어 두겠다.” 하였는데,

즉위하자 황후로 세우고 총애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촉왕(蜀王)이 …… 일이겠는가 : 꼭 지어서 후세에 남겨야 할 묘지명이라는 뜻이다.
가인경(佳人鏡)은 곧 가인의 무덤 앞에 세운 거울이라는 뜻으로, 《촉왕본기(蜀王本記)》에

“무도(武都)에 사는 남자가 여자로 변화하여 얼굴이 절색이어서 촉왕이 왕비로 맞았는데,

얼마 안 되어 죽으므로, 군사를 동원하여 흙을 날라다 성도(成都)의 성안에 장사하여 명칭을 무담(武擔)이라 하고

돌로 거울 하나를 만들어 그 무덤을 표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한객(漢客)이 …… 부끄러울 : 자신이 지은 비문(碑文)이 훌륭하지 못하다는 겸사이다.
유부비(幼婦碑)는 후한(後漢) 때 효녀(孝女)인 조아(曹娥)의 비(碑)를 말하고,

한객은 곧 조아의 비문을 지은 한단순(邯鄲淳)을 가리키는데, 이 비문이 아주 명문으로 이름났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에, “위 무제(魏武帝)가 조아비(曹娥碑) 밑을 지나다가,

비 후면에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臼)’라는 여덟 글자가 씌어 있는 것을 보고,

수행한 양수(楊修)에게 ‘이것을 알겠느냐?’고 묻자, ‘안다’고 하니,

무제가 ‘말하지 말고 내가 생각해 내기를 기다리라.’ 하고서,

30리를 가는 동안 해득하게 되자 ‘말해보라.’ 하니,

양수가 ‘황견(黃絹)은 색사(色絲)이니, 색사는 절(絶) 자이고,

유부(幼婦)는 소녀(小女)이니 소녀는 묘(妙) 자이고,

외손(外孫)은 딸의 아들[女子]이니 딸의 아들은 호(好) 자이고,

제구(?臼)는 수신(受辛)이니 수신은 사(辭) 자이다.’ 하였는데,

이것이 소위 절묘호사(絶妙好辭)라는 것이다.” 한 데서 온 말로, 곧 비문의 훌륭함을 찬평한 말이다.
이 여덟 글자는 채옹(蔡邕)이 써놓았다고 한다.

 

*청오(靑烏) : 《청오경(靑烏經)》의 약칭. 곧 지리풍수설(地理風水說)이 담긴 책. 지리를 잘 아는 지관(地官)을 뜻한다.
*방상(方相) : 주대(周代)의 관명. 역귀(疫鬼)를 쫓는 귀신 형상으로 분장하여 창을 들고 앞서는 사람.

장례나 연말ㆍ연시의 궁중 행사 또는 행행(幸行)할 때에 역귀를 쫓는 의식을 행한다.

 

 

○ 묘지(墓誌) - 추성양절공신 중대광 광양군 최공묘지명 병서

(推誠亮節功臣重大匡光陽君崔公墓誌銘幷序)

 

 

완산 최씨(完山崔氏)는 예부 낭중(禮部郞中) 균(鈞)이 서 동(東)으로 된 판본도 있다.

 

적(西賊)의 난리 때 순절한 후부터 이름난 집안이 되었다.

 

그의 아들 보순(甫淳)은 고왕(高王)의 정승이며,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문정은 봉어(奉御) 윤칭(允?)을 낳았고, 봉어는 학사(學士) 소(?)를 낳았으며, 학사는 찬성사(贊成事) 비일(毗一)을 낳았다.

 

비일이 사재경(司宰卿) 신 홍성(辛洪成)의 딸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공은 이름을 다섯 번 바꾸었는데, 부(阜)ㆍ당(?)ㆍ수(琇)ㆍ실(實)이요, 맨 나중 이름이 성지(誠之)이다,

 

자는 순부(純夫)이며 호는 송파(松坡)이다.

 

20세 전에 진사로서 지원(至元) 갑신년(충렬왕 원년) 과거에 급제하여 계림(鷄林)의 관기(管記)가 되었다가

사한(史翰)에 보직받았다.

 

춘관속(春官屬)으로 뽑혀 덕릉(德陵 충선왕)을 따라 원 나라에 조회하러 갔는데,

집정관들이 덕릉을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백가지 꾀로 달래어 가도록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궁하고 영달함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이해에 동요됨은 선비가 아니다.” 하였다.

 

대덕(大德) 말년에 황태제(皇太弟)를 부호하여 내란을 평정하고 무종황제(武宗皇帝)를 옹립하였는데,

공이 항상 좌우에 기거하면서 일을 도왔으나 사람들은 아는 자가 없었다.

 

조현총랑(朝顯摠郞)에서 여섯 번 전직하여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니, 관품은 봉익(奉翊)이다.

 

얼마 후에 첨의평리 삼사사 첨의찬성사(僉議評理三司使僉議贊成事)로 영전되니,

관품은 중대광(重大匡)이요,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의 호를 받고 광양군(光陽君)에 봉해졌다.

 

덕릉이 토번(吐藩)으로 가는데,

공의 아들 문도(文度)가 이 소문을 듣고 달려가 도중에서 만나 공과 함께 관서(關西)까지 따라가는 도중,

때마침 중 원명(圓明)이 배반하여 중남(中南)에서 군사(軍事)가 막아서 앞으로 더 갈 수 없었다.

 

일이 평정되어 농서(?西)를 넘어 임조(臨?)에 닿았는데,

험악한 지경은 단기(單騎)로 갈 수 없으므로 임조에서 반년을 머무르다가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 본국 사람들이 패당을 지어 서로 소송하므로 조정에서 성(省)을 세워내지(內地)와 같이 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공과 전 재상(宰相) 김정미(金廷美)ㆍ이제현(李齊賢) 등이 글을 올려 이해(利害)를 진술하여

마침내 그 의논을 중지하게 하였다.

 

심부(瀋府)의 관원들이 또 국가의 잘잘못을 지목하여 장차 묘당(廟堂)에 말하려고 하는데,

공이 홀로 서명하지 않으니 나중에는 주모자들이 부중(府中)에서 함께 앉아 녹사(錄事)를 시켜

지필(紙筆)을 가져다가 서명하기를 청하였다.

 

 

공이 목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재상을 지냈는데, 여러 녹사들이 나를 협박하려고 하는가.” 하니,

여러 사람들은 기가 꺾여 그만 그치었다.

 

태정(泰定) 갑자년(충숙왕 17년)에 상서(上書)로 물러나기를 청하여 임금의 윤허를 얻었다.

 

 

광양군(光陽君)으로서 집에 있는데, 소리하는 기생을 두고 손님들을 청해다가

청담아소(淸談雅笑)로 세월을 보내고 세상일을 묻지 않았다.

 

지순(至順) 경오(충숙왕 17년)에 병이 들어 7일만인 계해일에 집에서 세상을 마쳤으니 나이 65세였다.

 

 

나라 관원이 상사(喪事)를 다스리고, 시호를 문간공(文簡公)이라 하였다.

 

공은 성품이 굳세고 곧아서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자획(字?)이 해정(楷正)하고,

시는 순후하고 여유로워 즐길 만하였으며, 더욱 음양추보법(陰陽推步法)에 조예가 깊었다.

 

 

법관ㆍ선거(選擧)ㆍ천문ㆍ사원(詞苑)에 임명되기 또한 20년이었는데,

덕릉의 후한 대우는 종시 공보다 앞선 이가 없었다.

 

일찍이 과거를 보일 때 안진(安震) 등 33명을 뽑았는데, 그중에는 명사(名士)들이 많았다.

 

 

부인(夫人) 김씨는 찬성사 둔촌거사(贊成事鈍村居士) 훤(?)의 딸로서 행실이 어질었는데, 공보다 3년 먼저 죽었다.

 

아들은 하나인데 전 상호군(上護軍) 문도(文度)이다. 글을 읽되 정주학(程朱學)을 좋아하였고, 선진(先進)들과 교제하였다.

 

딸은 하나인데 만호 밀직부사(萬戶密直副使) 권겸(權謙)에게 출가하였다.

 

 

명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 爲名家之嗣
그 임금을 얻어 그 뜻을 펴고 / 得其君而伸其志
예로써 벼슬에 나아가고 / 進以禮
의리로써 물러났도다 / 退以義
어진 아내가 공의 평생을 봉향하였고 / 有賢妻以養其生
착한 아들이 공의 죽음을 보내도다 / 有良子以送其死
지금 시대에서 구하면 /L 둘이 못 되네 / 十無一二
아, 광양군이여 / 嗚呼光陽
유감이 없으리로다 / 可無憾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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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省)을 세워 : 우리 나라를 완전히 원(元) 나라 영토로 하고,

지방청인 성(省)을 두어 중국 본토와 같이 행정하게 하자는 의논이 그때에 있었다.

 

*심부(瀋府)의 관원들 : 충선왕은 고려왕과 심양왕을 겸하였는데,

고려왕의 왕위는 충숙왕(忠肅王)에게 넘겨주고 심양왕의 왕위는 작은 아들 고(暠)에게 전해 주었으나,

심양왕이란 말뿐이요, 실제로 국토가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항상 그것 때문에 여러 가지 말썽을 일으켰다.

 

*음양추보법(陰陽推步法) : 일월(日月)과 오성(五星)의 도수(度數)를 추산하여 책력을 만듬.

 

 

○ 묘지(墓誌) - 광정대부 첨의참리 상호군 나공묘지명(匡靖大夫僉議參理上護軍羅公墓誌銘)

 

 

지정(至正) 4년 갑신(1344, 충혜왕 복위 5년) 8월 기축일에 광정대부 첨의 참리(匡靖大夫僉議參理)

나공(羅公)이 죽으니,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조상하고, 양절(良節)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그 해 11월 경인일에 예로써 송림현(松林縣) 약사원(藥師院) 북쪽 둔덕에 장사지냈다.

 

공의 휘는 익희(益禧)요, 본관은 나주(羅州)인데 삼한공신 대광(三韓功臣大匡) 휘 총례(聰禮)의 11대 손이다.

 

증조의 휘는 효전(孝全)인데 원 나라에서 증직(贈職)한 태중대부 예부상서 지도성사(太中大夫禮部尙書知都省事)이며,

조부의 휘는 득황(得璜)이며, 원 나라 벼슬로 금자 광록대부 수사공상서 좌복야 판호부사

(金紫光祿大夫守司空尙書左僕射判戶部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원 나라 벼슬로 회원대장군 관군상만호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군부판서 상장군 세자원빈

(懷遠大將軍管軍上萬戶奉翊大夫知密直司事軍簿判書上將軍世子元賓) 휘 유(裕)는 공의 아버지가 되고,

원 나라 벼슬로 은청광록대부 동지추밀원사 병부상서 상장군(銀靑光祿大夫同知樞密院事兵部尙書上將軍)을 지낸

조씨(趙氏) 휘 문주(文柱)의 딸 □□군부인(郡夫人)은 공의 어머니가 된다.

 

한림직학사 조열대부 삼중대광 판도첨의사사(翰林直學士朝列大夫三重大匡判都僉議司事)를 지낸

묵헌 선생(?軒先生) 민지(閔漬)의 딸에게 장가들어 남녀 2명을 낳았다.

 

딸은 봉익대부 동지 밀직사사 상호군(奉翊大夫同知密直司事上護軍) 최문도(崔文度)에게 출가하였고,

아들은 영걸하여 지금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奉翊大夫密直副使上護軍)이다.

 

 

공은 본래 장수집 아들로서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혔고 독서는 하지 않았으나,

천성이 개결하고 절의를 사모하며 남들과 다투는 일을 부끄러워하였다.

 

모부인(母夫人)이 가산을 나눌 적에 40명이나 되는 노비를 특별히 물려주니, 공이 사양한다면서 말하기를,
“외아들로서 다섯 딸 가운데 거하여 어찌 차마 구차스럽게 많이 얻어 자식 많이 두신 부모님이

어지신 데에 누가 되게 하겠습니까.” 하니, 부인이 옳게 여겨 허락하였다.

 

나이 17세에 황조(皇朝)의 선명(宣命)을 받아 금부(金符)를 차고 상천호 회원(上千戶懷遠)이 되었다.

 

나중에 작위를 이어받아 관군 상만호(管軍上萬戶)가 되었는데, 계품은 호덕장군(虎德將軍)으로 삼주호부(三珠虎符)를 찼다.

 

충렬왕(忠烈王) 말년에 신호위 호군(神虎衛護軍)으로 삼아 금자어 첨의중사(金紫魚僉議中事)를 내려주었다.

 

덕릉이 구폐(舊弊)를 혁신하면서

조정의 신하들을 모두 파직시켜 쫓아내면서도 홀로 낭관 지위에 있는 공만은 머물러 있도록 하였다.

 

그때는 임금의 명이 한번 내리면 백관이 시키는 대로 거행하고 혹시라도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공은 법을 지켜 위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봉박(封?)하는 일이 많으니,

높은 지위에서 권세 있는 자들이 곁눈질로 밉게 여기고 혹 위태로운 말로 흔들었으나 요동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낙직된 지 10년만에 바야흐로 검교 상호군(檢校上護軍)이 되고,

7년만에 감문위 상호군(監門衛上護軍)으로 옮겼다가 천우위 겸중문사(千牛衛兼中門使)로 전직하고,

또 좌상시(左常侍)로 바뀌었으며, 세 번 전직하여 광정대부 상의평리(匡靖大夫商議評理)가 되었고,

금성군(錦城君)에 봉하였다.

 

나이 57세에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주고, 한가히 집에 있은 지 또한 17년이 되었다.

 

항상 민생의 고락과 인재를 쓰고 버리는 일을 생각하면서,

뒷짐을 지고 찡그린 얼굴로 혼자서 정원을 다니었는데 남모르는 근심이 있는 듯하였다.

 

일찍이 계림(鷄林) 부윤을 한 번 지냈고, 합포진장(合浦鎭將)을 세 번 하였는데,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사랑하고 은혜로워 남쪽 지방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공의 공덕을 칭찬하고 있다.

 

 

지금 임금이 이어 정사하자 다시 기용하여 첨의참리(僉議參理)로 삼으니 세상에서 말하는 5재상이다.

 

□얼굴이 매우 야위고 귀가 자못 어두웠으나, 일에 임하면 강개하여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루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제현(李齊賢)에게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어려서 정사를 재상에게 맡겼는데, 저 자격 없는 자들이 지난 날 잘못을 경계하지 못하니,

나는 책임을 지고 물러나서 함께 여러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자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데,

공은 어떻게 생각하오?” 하니, 제현은 말하기를,

 

“내가 전에 두세 가지 계책으로 집정하는 자를 효유하였으나,

시행을 보지 못하여 항상 부끄러워하면서도 용단성 있게 물러나지 못하였으니,

감히 공의 말에 좇지 않겠소.”하였다.

 

 

그 후 10일이 되어 공이 병으로 물러나겠다고 한다는 말을 듣고,

혼자 생각으로는 전일의 계획을 수행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아, 어찌 마침내 일어나지 못할 줄 알았는가.

 

급히 가서 조곡(弔哭)하고 물러 나왔는데, 아들과 사위들이 잇달아 나의 집에 와서 변변치 못한 글을 청하니,

장차 돌에 새겨 광중에 넣으려 하는 것이다.

 

의리에 사양할 수가 없어서 부탁을 받아들여 명문을 짓고, 명일에 상서하여 관직을 사면하니,

죽고 사는 데에서 공의 말을 저버리지 않으려 함이다.

 

명문에,

 

 

관장되어 은혜롭고 / 爲官惠慈
장수되어 청렴이라 / 爲將廉恥
다만 의리를 구했을 뿐 / 惟義之求
권리에 겁내지 않았도다 / 不?勢利
타고난 자질 능하여서 / 由稟受能
배우지 않고도 잘 이루었으니 / 匪學以致
활촉 끼고 깃 달았다면 / 鏃而羽之
그 행적 여기에만 그쳤으리 / 入不此止
보잘것 없는 내가 / 顧子何人
늦게 욕되이 지기가 되었으니 / ?辱知己
감히 언약 저버리고 / 敢負一言
공이 죽었다고 말할 것인가 / 而謂公死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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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박(封駁) : 고려 시대의 내사(內史)ㆍ문하(門下) 성(省)은 왕의 조서 칙명을 심의 공포하는 일도 맡았다.

따라서 임금의 조서 칙명이라도 그 내용이 적당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그대로 공포하지 않고

다시 봉하여 임금에게로 올리는데, 이것을 봉박(封駁)이라고 하였다.

 

 

○ 묘지(墓誌) - 추성익조동덕보리공신 삼중대광 수문전대제학 영도첨의사사사 영가부원군

증시 문정 권공 묘지명

(推誠翊祚同德輔理功臣三重大匡修文殿大提學領都僉議使司事永嘉府院君贈諡文正權公墓誌銘)

 

 

대덕(大德) 신축년(충렬왕 27년)에 국재(國齋) 권 문정(權文正) 공이 예부(禮部)를 맡았을 적에,

내가 다행하게 병과에 합격하였는데, 공이 나를 사위로 삼았으므로 스승으로 섬긴 것이 47년이나 되었다.

 

지정(至正) 병술년(충목왕 2년)에 공의 나이 85세인데,

그 해 가을에 병에 걸려 겨울 10월 기사일에 좌우에 명하여 안아 일으키게 하고,

단정히 앉아서 세상을 떠났으니 내가 달려가 조상하며 통곡하였다.

 

그 후 수일이 되어 여러 상제들이 울면서 고하기를,
“전일 그대가 우리 대부인(大夫人)의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지금 대인(大人)이 또 세상을 떠나시어 장차 10월 정유일에 덕수현(德水縣) 발송원(鉢松原)에 합장(合葬)하려 하는데,

유택을 빛내는 일을 그대가 아니고 또 누구에게 부탁하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물러나 이렇게 서술한다.

 

 

공은 길창 권씨(吉昌權氏)이니, 휘는 영(永)이요, 자는 기경(耆卿)이다.

 

후에 휘는 보(溥), 자는 제만(齊萬)으로 고쳤다.

 

증조부의 휘는 수평(守平)이니,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이며, 조부의 휘는 위(?)이니 한림학사(翰林學士)이다.

 

아버지의 휘는 단(?)인데, 찬성사 판전리(贊成事判典理)로 치사(致仕)했고,

시호는 문청공(文淸公)이며 비(?)는 노씨(盧氏)이니, 좌간의 대부(左諫議大夫) 휘 연(演)의 딸이다.

 

공은 나이 15세에 진사에 뽑혀 기묘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염전시(簾前試)에 합격하여

첨사부 녹사(詹事府錄事)로 있다가 국학학유(國學學諭)로 옮기고, 박사(博士)에 영전하여 우정언(右正言)에 임명되었다.

 

여러 번 옮겨 첨의사인(僉議舍人)에 이르렀고, 또 여러 번 옮겨 사림학사 비서감(詞林學士?書監)에 이르렀다.

 

우부승지 판예빈시사로 되고, 밀직으로 들어와서 학사(學士)가 되었다가 판사사(判司事)에 이르렀다.

 

도첨의로 전직하여 찬성사에 이르렀다가 드디어 정승 판선부사에 임명되고,

수문전 대제학 영도첨의사사사(修文殿大提學領都僉議使司事) 직함을 더하였다.

 

계품은 승사랑(升仕郞)에서부터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고,

관직(館職)은 지제고(知制誥)에서부터 대우문감 춘추(大右文監春秋)에까지 이르렀으며,

작(爵)은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이요, 호는 추성익조 동덕보리공신(推誠翊祚同德輔理功臣)이다.

 

또 일찍이 정동행성 원외랑낭중 왕부단사관(征東行省員外郞郞中府斷事官)이 되었고,

외직에 보직되거나, 탄핵을 당한 일이 한번도 없으니, 이것은 대개 공의 경력이다.

 

부인은 유 정신공(柳貞愼公) 폐일(陛一)의 딸인데 변국(卞國)에 봉하였으며,

다섯 아들을 낳으니 준(準)ㆍ종정(宗頂)ㆍ고(皐)ㆍ후(煦)ㆍ겸(謙)이다.

 

준은 길창(吉昌)에 봉하였고, 후는 계림(鷄林), 겸은 복안(福安)에 봉하였으니, 모두 부원군(府院君)이다.

 

고는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에 문화군(文化君)이며 출가(出家)하여 양가도총섭(兩家都摠攝)이 되었는데,

역시 광복군(廣福君)에 봉하였다.

 

맏딸은 대언(代言) 안유충(安惟忠)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딸은 부원군(府院君) 이제현(李齊賢)에게 출가하였으며,

셋째 딸은 순정대군(順正大君) 숙(璹)에게, 넷째 딸은 회안대군(淮安大君) 순(珣)에게 출가하였는데, 모두 왕씨(王氏)이다.

 

한 집안에 9봉군(封君)이니, 옛날에도 일찍이 없었던 일이며 문청공(文淸公)이 나이 많으면서도 무탈할 때,

공이 지공거로 있었고, 공이 정승으로 나이 많아 물러날 때는 길창(吉昌)이 문생을 데리고 와서 장수를 빌었다.

 

공의 문생 두 사람과 문생의 문생 세 사람이 서로 잇달아 시관이 되었으니, 또한 성사(盛事)라고 이를 만한 일이다.

 

먼 조상 태사(太師) 김행(金幸)이 태조(太祖)를 도운 공이 있어서 성(姓)을 권(權)으로 정해주었는데,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전하여 문청공까지 이르렀으며,

문청공은 복령시 수월보살상(福靈寺水月菩薩像)에 기도 드려

중통(中統) 3년(원종 3년) 11월 11일 신시가 될 무렵에 공을 낳았는데,

무자 기미는 임기(壬己)의 천록을 이면에서 밀어주며 서로 충돌하여 일어난 것이니, 천기(天機)의 묘함이 이와 같았다.

 

공의 자질은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갠 하늘처럼 맑아 공경으로써 임금을 섬겼고,

정성으로써 부모를 봉양하였으며, 친구에게 화목하며 친척에게 은혜롭되 눈으로는 여색을 거들떠보지 않았으며,

입으로는 재물을 의논하지 않았다.

 

나이 많았지만 비록 자질(子姪)들이라도 손님처럼 대하였고,

벼슬이 높았지만 비록 하인들이라도 높은 사람처럼 대우하였다.

 

항상 글읽기를 좋아하여 늙도록 쉬지 않았으며, 《은대시(銀臺詩)》 20권 에 주를 다니,

보는 자들은 그 학문의 넓음에 탄복하였다.

 

시문을 저술하되 간결하면서도 의미는 심장하니,

묵헌(默軒) 민지(閔漬)와 신재(信齋) 홍혁(洪革)이 항상 무릎을 치며 탄복하여 칭찬하였으나,

공은 이것으로써 자긍하지 않았으며,

정방(政房)의 임무에 종사하기를 13년, 재상의 자리에 앉기를 22년이나 하였지만

이것으로써 스스로 만족하지 않았으니, 오복을 누리는 것이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명문에,

 

 

권씨의 계보는 김씨에서 나왔는데 / 權系于金
실은 계림에서 연유되었고 / 實繇?林
대대로 덕음(德音)을 이었도다 / 世?德竟
그 첫째 / 其一
장인이 이어 받아 / 丈人其承
도의가 넉넉하니 / 道義孔富
하늘이 귀와 수를 주었도다 / 天?貴壽
그 둘째 / 其二
공정한 마음을 생각하고 / 克念公心
공정한 행동을 실천하니 / 克踐公行
남은 경사가 더욱 많았도다 / 益篤餘慶
그 셋째 / 其三
구름처럼 많은 자손 / 繩繩雲來
하나같이 착한데 / ?爾?穀
무엇이 의심나서 점치리 / 不疑何卜
그 넷째 / 其四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