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본 분적종(分籍宗)

분적종(分籍宗) 진주 이씨(晋州李氏)

녹전 이이록 2009. 2. 20. 20:37

■ 분적종(分籍宗)  진주 이씨(晋州李氏)

 

 

○ 분관 시조(分貫始祖) 영재(永木+宰)와 군재(君木+宰)

 

*대종보에도 분관 시조를 중조 17세 사인공(舍人公. 휘 초두밑脩)의

4자 영재(永木+宰)와 5자 군재(君木+宰)로 같이 기록하였다.
 

△ 분관 시조 이영재(李永木+宰)

 

벼슬이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물러나 진주(晉州)에 거주하니 진주 이씨(晉州李氏)라고 하였다.

 

 △ 분관 시조 이군재(李君木+宰) 

  

이들은 소판공(蘇判公) 휘 거명(居明)의 16세손인 휘 이조(李초두밑脩)의 넷째 아들과 다섯째 아들이다.
 

대종보의 기록에

[자는 군실(君實)호는 벽호(碧湖)이다.

 

생졸(生卒)년과 배(配) 등은 문헌(文獻)에 남아있지를 않다.

 

조선 태조 임금때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벼슬하고 벼슬이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왕을 섬기다가

성천(成川)으로 내려가 깊은 골짜기 동네에 주거하였다.]라고 하고  

 

을축보(乙丑譜)에 보면 
 

[조선 태조(太祖)때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성품이 곧아 왕에게 직간(直諫)을 하다가 미움을 사

성천(成川-평안남도 성천군에 있는 읍)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정착하여 대대로 세거(世居)하였다.

 

그러면서 대제학(大提學)을 사임하고 고향인 진주(晋州)로 내려가 있는 형 영재(英梓)를 생각하며

본관을 [진주]로 삼았다.'고 한다.]  

 

*대종보의 기록과 을축보(乙丑譜)의 이군재(李君木+宰)의 기록을 보면 내용이 조금 틀리나

성천으로 내려가 세거한 것은 틀림없고 형 영재(英梓)를 생각하며 본관을 진주(晋州)로 삼았다.

 

가문의 대표적인 후손으로는 군자의 아들 영실이 감찰(監察)을 역임했고, 증손 의동은 통사랑(通仕郞)을 지냈다.

 

그 외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낸 승부는 군자의 5세손이며, 통사랑 의동의 아들이다.

 

치언은 영조 때 과거에 올라 도사(都事-종5품)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계 파>
강동파(江東派)
성천파(成川派)
신천파(新川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