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본 분적종(分籍宗)

분적종(分籍宗) 우계 이씨(羽溪李氏)

녹전 이이록 2009. 2. 20. 20:33

■ 분적종(分籍宗) 우계 이씨(羽溪李氏)

 

 

○ 분적 시조(分籍始祖) 이양식(李陽植)

 

 

우계 이씨(羽溪李氏)의 시조(始祖) 이양식(李陽植)은 경주 이씨 시조 표암공 휘 알평(謁平)의 후손이다.

 

이선용의 둘째 아들로 고려 인종 17년 기미(己未. 1163)때 벼슬을 시작하여 문하성(門下省)의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좌복야를 지낸 분으로 고려 명신록에 기록되어 있다.

 

뒤에 낙향하여 강릉(江陵)에 터를 잡았다

 

그의 아들 순우(純祐)는 의종(毅宗)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으며, 경주(慶州)에서 우계(羽溪)로 이거(移居)하였다.

 

그 후 양식(陽植)의 5세손으로 예빈경(禮賓卿)을 지낸 구(球)에 이르러 경주 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本貫)을 우계(羽溪)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 우계 이씨(羽溪李氏) 홈페이지에서

 

우리 종족(宗族)은 뿌리깊은 나무와 깊은 샘물과 같이 그 연원(淵源)이 2000여 년을 넘어 신라 초기(新羅初期) 6촌의 촌장회의를 주재(主宰)하신 양산촌장(楊山村長)으로 경주 이씨 시조(慶州李氏示祖)이신 표암공(瓢岩公) 휘(諱) 알평(謁平)이 우리 종족의 비조(鼻祖)이다. 

 

그 후 일천여 년이 지난 고려 인종(高麗仁宗)때 경주 이씨 소판공 거명(蘇判公 居明)으로부터 12세손인 승고(升高), 양식(陽植) 형제분에서 우계 이씨 시조(始祖)로 분적(分籍)되었다.

 

시조께서는 지금의 경주(慶州)에서 우계현(羽溪縣, 지금의 강릉시 옥계면)으로 거처를 옮겨 경주 이씨에서 관향(貫鄕-본관)을 우계 이씨(羽溪李氏)로 사성(賜姓)을 받았고, 우계 이씨(羽溪李氏)로 나라에서 성을 받은 이래 850여 년의 세월이 흘러 그 동안 선조들의 음덕(蔭德)으로 자손이 번성하여 2만(萬)여 종친들이 전국 각지에 산재하고 있다.

 

시조께서는 고려(高麗) 상서성(尙書省)의 좌복야(座僕射) 및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중서사인(中書舍人) 직(職)을 역임하시면서 휘(諱) 양식(陽植) 이하 7세간(七世間) 이백여 년을 고려의 저성(著姓-이름난 성(姓)이나 가문家門)으로 활약했지만 당시 고려(高麗)의 극심한 상극기[(相剋期, 1170년~1258년, 고려 무신(武臣) 정중부(鄭中夫) 및 최충헌(崔忠獻)의 난(亂) 등]이후 상계 선조(上係先祖)의 영역(領域)이 실전(失傳)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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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계(羽溪)- 강원도 강릉의 옛 지명(地名)으로 일명(一名) 옥당(玉堂)이라고도 했다.

 

고구려 때는 우곡현(羽谷縣)이라고 불리어 졌는데 신라 경덕왕 때 우계현(羽溪懸)으로 변경되고 근년에 명주군(溟州郡) 옥계면(玉溪面)이 되었다가 1995년 3월 1일 부로 강릉시 옥계면으로 변경되었다.

 

시조공과 2세(世) 순우(純祐) 2대(代)의 거주지 기록은 알 길이 없으나 당시 도읍지가 개성(開城)이었으므로 관직의 수행에 따라 개성과 우계를 오가며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며 3세(世) 휘(諱) 적(迪)께서는 우계현 북쪽 이십리에 있는 해령산(海靈山)에서 10년간 은거하셨다는 기록과 6세(世) 휘(諱) 녹후(祿厚) 옥천부원군의 묘소가 우계 송악산(松岳山) 동록(東麓)에 연봉(連封)으로 있음이 대동보에 실려 있으나 분명하지 않고 7세(世) 휘(諱) 흥원(興元)의 묘소도 송악산(松岳山)에 있다 하였으므로 7세(世) 이상의 선조께서는 우계(羽溪)에서 세거(世居)하셨으나 안타깝게도 실전(失傳)되었다.

 

그 후 8世 원수공(元帥公) 휘(諱) 억께서 고려 말에 소백산(小白山) 아래 순흥(順興)에 은거하신 뒤 원수공 종파(宗派)는 영남지역에, 옥천부원군파는 영동지역에 거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