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始祖)

경주이씨 시조 휘 알평 경모비

녹전 이이록 2008. 12. 9. 19:52

● 경주 이씨 시조 휘 알평 경모비(慶州李氏始祖諱謁平景募碑)

 

 

 

신라(新羅)의 이천년 역사는 꿈같이 지나갔건만 월성(月城) 옛터에는 돌 한 덩이 풀 한 포기마다 조상의 숨결이 배여 있고 축복 받은 자손(子孫)들이 대대(代代)로 그 전통(傳統), 그 문화(文化) 이어내려 오늘을 누리는 것을 생각해보면 어찌 느껍지 아니하냐.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비롯하여 동경지(東京誌)와 가승(家乘) 등 옛 문헌을 상고(詳考)하건데 신라(新羅)는 본시 진한(辰韓)의 땅으로써 거기 여섯 마을이 있었고 그 중에서 가장 으뜸 가는 마을은 알천 양산촌(閼川楊山寸)이며 그 마을의 어른은 알평(謁平)이신데 처음에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곳을 박바위라 부르니 우리 겨레의 옛 신앙인 밝음을 뜻한 것임은 물론이다. 

 

한나라 *지절(地節) 첫해 임자(壬子-기원전 69년) 3월 초하룻날에 알평을 비롯한 여섯 마을 의 어른들은 자제들과 더불어 알천 언덕 위에 자리를 같이 하고 앉아 여섯 마을 전체를 다스릴 거룩한 이를 받들어 모실 것을 의논했다.

 

그리고 모두 함께 높은 곳으로 올라가 멀리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가에 상서(祥瑞)로운 빛이 땅에 드리우고 거기 흰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형상을 짓고 있으므로 달려가 보았더니 자주 빛나는 큰 알이 있었고 그 알에서 용모 단정한 동자(童子) 가 나와 뒷날 13세 되던 *오봉(五鳳) 첫해 갑자(甲子)에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하니 그가 바로 신라의 첫 임금 박혁거세왕(朴赫居世王)이라.

 

알평(謁平) 어른이야말로 신라 건국(新羅建國)의 첫 장을 꾸미신 원훈(元勳)이거니와 다만 하늘에서 내려오시고 알에서 나오셨다는 것들은 우리 옛 조상들의 신성함을 말한 귀중한 기록이다. 

 

그로부터 백년(百年)이 지나 제3대 유리왕(儒理王) 9년 서기 32년에 여섯 마을의 이름을 고 치고 성씨를 내릴 적에 양산촌(楊山寸)은 급량부(及梁部)라 일컫고 이씨(李氏)로 써 성(姓)을 삼아 비로소 경주(慶州)를 본관(本貫)으로 한 큰 집안이 열리게 되었고 무릇 이천여 년을 거쳐오는 동안에 진주(晉州) 차성(車城) 우계(羽溪) 합천(陜川)  아산(牙山) 재령(載寧) 원주(原州). 장수(長水) 등 많은 지종(枝種)으로 나뉘어 가지 와 줄기마다 꽃 피고 열매 맺듯 역대를 통하여 뛰어난 문무장상(文武將相)들이 헬 수 없이 배출되었음을 보거니 이 어찌 깊은 뿌리에서 솟아오르는 진액(津液)의 덕택이 아니며 또한 이 어찌 시조(始祖)의 끼치신 은혜가 아닐까 보냐. 

 

그의 혈통(血統)을 받은 자손들이 거룩한 유적지(遺跡地)를 그냥 보지 못하여 순조(純祖) 때 표암(瓢巖) 위에 시조(始祖)의 자취임을 새겼고 순종(純宗) 때에는 바위 아래 표암재(瓢 巖齋)를 세웠으며 또 근래에 국가에서 거룩한 유적임을 찬양하여 *묘우(廟宇)를 세웠고 터전을 확장하며 장원(莊園)과 송죽(松竹)으로 경내(境內)를 미화(美化)하여 조상(祖上)을 사모 (思慕)하는 자손(子孫)들의 마음은 기쁘기 여지없다.

 

그러나 공(公)의 사적(事績)은 결코 한 씨족(氏族)의 역사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사의 근원 (根源)이므로 굳이 그 유적을 찾아 알천(閼川) 동북쪽 금강산(金剛山) 내린 맥이 마지막 맺힌 표암(瓢巖)위에 올라 눈을 감고 2천년 전 민족의 옛 조상을 사모하며 다시 그 혈통 의 큰 인물들이 대대로 겨레 위해 큰 업적 끼친 것들을 헤아려 볼 때 감격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명활산(明活山), 금오산(金烏山), 선도산(仙桃山)이 에워 둘렸고 문천(文川)이 알천(閼川)이 형산강(兄山江)으로 흘러드는 곳. 신라의 옛 서울. 알평(閼平) 어른 내리신 자취 이천년 묵은 역사 흐린 듯 또렷도 하다. 

 

옛 조상 축복을 받아 자손과 겨레 영광 있으리!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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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절(地節)- 중국전한(前漢) 선제(宣帝)의 두 번째 연호이다
*오봉(五鳳)- 한나라 선제의 연호
*묘우(廟宇)- 신위를 모신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