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始祖)

표암. 시조유래. 본관유래. 시조탄생지

녹전 이이록 2008. 12. 9. 21:34

● '표암(瓢巖)'은 '광명암(光明巖)'이다.

 

 

문화재청 홈페이지(www.cha.go.kr)의 문화재 일반검색에 '경주 표암'을 써넣고 클릭하면 경북 시도 기념물 제54호로 등록되어 있다.


암은 경북 경주시 동천동 507-7에 소재하는 경주 국립공원 소금강지구(옛 명칭- 소금강산)의 서남쪽 산기슭 일대를 일컫는다.

 

면적은 41168㎡이고 지정일은 1985. 10. 15이며 소유자와 관리자는 경주 이씨 대종회이다.

 

표암(瓢巖)은 『박바위』, 『밝바위』, 『밝은 바위- 光明巖)』를 뜻한다.

 

 始祖(시조)께서 初降(초강-처음 하늘에서 내려오심)하시어 沐浴(목욕)하신 곳으로 傳(전)해 오기도 한다.

 

이곳은 신라6촌(新羅六村) 가운데 근본(根本)이 되는 밑돌부(-及梁部)라는 부명(部名)이 붙여진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의 시조(始祖) 알평공(閼平公)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진한(辰韓) 땅 표암봉(瓢巖峰)에 내려와 세상을 밝게 하였다'고 하기도 하여 '표암(瓢巖)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서력 기원전 69년에 6촌장이 여기에 모여 화백회의(和白會議)를 열고 신라건국(新羅建國)을 의결했으며,

그 후 서력 기원전 57년에 신라가 건국되었다. 

 

이와 같이 표암은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혈맥(血脈)의 근원지(根源地)인 동시에 신라건국의 산실로서 '광명이세(光明理世)'라는 백성을 다스리는 큰 뜻을 밝히고, 화백이라는 민주정치 제도의 발상(發祥)을 보인 성스러운 곳이다.

 

이러한 뜻을 새긴 유허비(遺墟碑)가 조선(朝鮮) 순조(純祖) 6년(1806)에 세워졌고 1925년에는 표암재(瓢巖齋)가 건립된 뒤 전사청(典祀廳), 내외삼문(內外三門), 경모대비(景慕大碑), 천강지(天降地) 등이 건립되어

더욱 그 뜻을 기리며 매년 3월 중정(中丁)에 향사(享祀)를 봉행하고 있다.

 

 

O. 표암(瓢巖)은 '박 바위'를 이른다.

 

'瓢'는 '표주박 표' . '바가지 표' . '박 표'자이고 '巖'은 '벼랑 암' . '바위 암'자이다.

그래서 박이 많은 바위 지역이라 하여 '박 바위'라고 칭한다.

 

그런데 박 바위를 '밝음'으로 표현한 것이 노산 이은상 선생이 찬한 '시조 경모비(1979. 11. 11)'에서 볼 수 있다.

 

노산 선생이 '瓢巖' 즉 '박 바위'를 두고 아래와 같이 경모비문에 쓴 글귀이다.

[처음에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곳을 '박 바위'라 부르니 우리 겨레의 옛 신앙인 '밝음'을 뜻한 것임은 물론이다.]

 

왜 '박바위'를 '밝음'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한 이유는 아래와 같다.

 

단순히 비슷한 발음상의 문제일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밝음을 뜻하는 바위로 '박 바위'를 더 크게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도 있으리라 생각하였는데 문화재청의 경북 시도 기념물 제54호 '경주 표암'에서

 

[표암(瓢巖)은『박 바위』, 『밝은 바위(光明巖)』를 뜻하며 '시조(始祖- 휘 알평閼平)께서 하늘에서 이 바위에 내려와 세상을 밝게 하였다']

 

하여 표암(瓢巖). 즉 광명암(光明巖)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시조의 유래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신라 건국의 모체인 사로(斯盧)의 6부 중 알천 양산촌을 다스렸던 표암공 휘 알평(謁平)을 시조로 받든다.

 

신라 말에 소판 벼슬을 지낸 진골(眞骨) 출신의 소판공 휘 거명(居明)을 1세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다.


 

표암공(瓢巖公)이라는 호칭은 알평(謁平)이 애초에 경주 동천동 소재 소금강산의 박바위(瓢巖)에 강림했다는 전설에서 취해진 것이다.

 

기원전 117년 한 무제 원수 6년 갑자에 하늘로부터 진한 땅의 표암봉인 박바위로 처음 내려오셨고 양산촌장으로 부족들을 다스리며 혁거세를 양육시켜 신라 초대왕으로 추대하셨다.

 

6부 촌장의 의장으로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화백회의제도를 시행하셔서 오늘날의 민주주의 제도를 구현시키신 선구자였음을 호언 할 수 있다.

 

서기 32년 신라 3대왕인 유리왕 9년에는 진한 6촌을 6부로 개칭할 때 지금의 경주시 일원에 해당되는 양산촌을 급량부라 부르고 성씨를 이씨라고 사성(賜姓)하였다.

 

뒤에 경주라는 지명을 붙여서 경주 이씨(慶州李氏)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당시에는 '경주' 라는 지명이 아니고 아마 '사로' . '계림' . '월성'이라고 했으니까 '사로 이씨' . '계림 이씨' . '월성 이씨'라고 했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시조 기록과 900년 후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년) 유리왕이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께 사성하여 양산촌을 급량부로 개칭하고 그에게 '이씨의 성'을 내려 주었다.]

 

그 후 후손들은 알평은 시조로 받들고 신라 진골 출신인 소판공 휘 거명은 중시조로 하고, 시조의 발상지인 경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소판공 휘 거명은 신라말 때의 인물로 진골(眞骨) 출신이며 시조 휘 알평으로부터 약 900여 년의 세계 실전으로 경주 이씨의 계대를 밝힐 수 없다가 고려말 익재 휘 제현의 묘비명에서 소판공부터 후대의 휘가 기록된 것을 알고 난 후부터 중시조로 하고 세수도 중시조부터 헤아리고 있다.

 

시조께서 박혁거세를 왕으로 옹립하여 신라를 건국한 해가 기원전 57년이고 지금이 2008년이니 그 이전을 감안해도 약 2100여 년 전후의 역사와 내력이 우리 경주 이씨이다.

 

 

● 본관 경주의 유래

 

경주는 경북 남동부에 위치한다.

 

기원전 57년 이곳에 6촌(村)이 연합하여 고대 국가를 형성하여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라 하고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여 국명(國名)을 동일시하였다.

 

서기 65년 시림(始林)에서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탄생하여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고쳤다가 307년에 신라로 하였다.

 

935년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 별칭으로 낙랑군이라 하다가 1030년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였다.

 

충렬왕때 계림부로 개칭하는 등 명칭의 변화가 많았다가 1413년에 와서 경주부로 개칭하였다. 

지금의 지명으로 경주이다.

 

옛날에는 신로. 사라. 서나. 서나벌. 서야. 서야벌. 서라. 서라벌. 서벌. 사로. 계림. 월성. 금성. 동경 등으로 시대에 따라 달리 불리웠다.

 

이것을 지금 불리고 있는 경주라는 지명으로 바꾼 것뿐이다.

이래서 '경주 이씨' 대신 '월성 이씨'로 읽기도 한다


 

● 시조 탄생지(始祖誕生地)

 

- 대종보  시조유허표암비(始祖遺墟瓢巖碑)에서

 

[구보(舊譜)에 이르기를 시조(始祖)의 휘(諱-이름)는 알평(謁平)이며 *진한(辰韓)의 *표암봉(瓢巖峰) 아래에 처음 내려왔다 하였으니 처음 내려 왔다함은 탄생(誕生)을 말한 것이다. ]

 

*시경(詩經)에 이르되 「산악(山嶽)이 신을 내리어 *보(甫) 및 신(申)을 탄생하였다」고 하였고

 

*소자담(蘇子膽)이 「*신(申)과 여(呂)가 산악으로부터 내려왔다」고 하였으니 고금(古今)에 전설을 믿지 않을 수 없다.

대저 산이 높고 맑은 기운이 정(精)을 모으고 영(英)을 길러 철인(哲人)을 출생함은 이치에 필연적인 것이다.

 

신인(神人)이 태백산(太白山) 박달나무 아래에 내리어 단군(檀君)이 되었다느니 또 *나정부(羅井部)의 아래서 나와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다느니 등등의 말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로써 의심해야 할지 믿어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우나 오직 *표암(瓢巖) 한 곳만은 급량대인(及梁大人)의 유허(遺墟)로 우리 이씨의 근본지가 되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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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辰韓)- 삼한 가운데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부 지역에 있던 12국. 일본에 진출하여 그곳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으나
4세기 중엽에 진한 12국 가운데 하나인 사로 (斯盧)에게 망하여 신라에 병합되었다.

 

호로국[戶路國], 주선국[州鮮國], 근기국[勤耆國]- 포항시,

우유국[優由國]- 청도군(淸道郡), 실직국 [悉直國]- 삼척시

- 파사왕 23년(102)에 신라에 합병.

 

*표암봉(瓢巖峰)

- 경주시 동천동 소재 소금강 지구 남서쪽 석탈해 왕릉 옆 암반지역. 표암재 뒷편 산. 

*시경(詩經)

- 유학(儒學)에서, 오경(五經)의 하나. 중국 최고(最古)의 시집으로 공자가 편찬하였다고 전하여지나 미상이다.

 

주나라 초부터 춘추 시대까지의 시 311편을 풍(風)·아(雅)·송(頌)의 세 부문으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오늘날 전하는 것은 305편이며 한나라 모형(毛亨)이 전하였다고 하여 ‘모시(毛詩)’라고도 한다.

 

*보(甫) 및 신(申)

- 조선국(고조선ㅡ단군 조선과 구별)의 염제 때 주(州), 제(濟), 보(甫), 신(申), 여(呂), 기(紀), 허(許), 향(向), 예(芮), 희(戱), 노(露), 제(齊) 열두 아들이 산악으로부터 내려온 탄생 설화.

 

*소자첨(蘇子瞻)

- 송나라의 문장가. 이름은 식(軾) 호는 東坡, 宋의 四川省 眉山 출신.
^소자담(蘇子膽)과 구별- 唐代의 시인

 

*나정부(羅井部)의 아래서 나와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다.

- 양산(楊山-현 남산)밑 나정(蘿井)곁에서 말이 알려준 큰 알을 얻었는데 깨트려 보니 그 속에 어린아이가 있었다.

 

알이 매우 커서 박과 같다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는 박혁거세의 나정의 탄생설화이고 박혁거세를 임금으로 추대하고 서라벌을 건국하여 좌명공신이 된 표암공을 말한다. 


*급량대인(及梁大人)의 유허(遺墟) 표암(瓢巖) 한 곳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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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니사금(왕) 9년 봄 6촌의 이름을 고치고 성을 하사하였다.

알천 양산촌은 급량부로 고치고 촌장 알평은 이씨
돌산 고허촌은 사량부로 고치고 촌장 소벌돌이는 최씨
무산 대수촌은 점량부(모량)로 고치고 구례마 촌장은 손씨
취산 진지촌(간진촌)은 본피부로 고치고 촌장 지백호는 정씨
금산 가리촌은 한기부로 고치고 촌장 지타는 배씨
명활산 고야촌 습비부로 고치고 촌장 호진은 설씨로 정한 것이 6부이다.

이 중 급량부 급량대인의 유허지인 표암 한곳만 현재 유적지로 남아 경주 이씨의 근본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니까 표암공의 탄강 설화를 시경의 보(甫) 및 신(申)의 탄생 설화와 소자담(蘇子膽)의「신(申)과 여(呂)가 산악으로부터 내려왔다」고 한 전설과 신인(神人)이 태백산(太白山) 박달나무 아래에 내리어 단군(檀君)이 되었다느니 나정부(羅井部)의 말과 큰 알의 박혁거세 탄생 설화와 표암공의 신라건국에 따른 좌명공신(佐命功臣)의 이야기 등등과 비교하여 옛글에도 이와 같은 탄생설화가 있는데 우리의 시조이신 표암공의 탄강 설화도 옛 이야기에 견주어 거짓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전설로 믿던 말던 표암공의 탄강 설화를 뒷받침해 주는 것은 오직 표암뿐으로 표암이 표암공의 탄생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