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조유허표암비(始祖遺墟瓢巖碑) 역문(譯文)
삼가 살피건데 경주 이씨의 구보(舊譜)에 이르기를 「시조(始祖)의 휘(諱-이름)는 알평(謁平)이며 진한(辰韓)의 표암봉(瓢巖峰) 아래에 처음 내려왔다.」 하였으니 처음 내려 왔다함은 탄생(誕生)을 말한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되
「산악(山嶽)이 신을 내리어 *보(甫) 및 신(申)을 탄생하였다」고 하였고 *소자담(蘇子膽)이 「신(申)과 여(呂)가 산악으로부터 내려왔다」고 하였으니 고금(古今)에 전설을 믿지 않을 수 없다.
대저 산이 높고 맑은 기운이 정(精)을 모으고 영(英)을 길러 철인(哲人)을 출생함은 이치에 필연적인 것으로서 동경지(東京誌)에만 기재하기를
「6부대인이 다 하늘로 쫓아 강생(降生)하였다.」고 한 것과는 다르다.
신인(神人)이 태백산(太白山) 박달나무 아래에 내리어 단군(檀君)이 되었다느니 또 나정부(羅井部)의 아래서 나와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다느니 등등의 말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로써 떠도는 말과 같아서
의심해야 할지 믿어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우나 오직 표암(瓢巖) 1구(一區)만은 급량대인(及梁大人)의 유허(遺墟)로 우리 이씨의 근본지가 되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시조 이래로 덕(德)을 쌓고 인(仁)을 쌓아서 경사가 자손에게 내리어 신라와 고려의 사이에 높은 관직이 이어왔고 명망이 훌륭한 분이 서로 바라볼 정도였다.
아조(我朝- 조선)에 미치어 나뭇가지처럼 뻗고 물줄기처럼 나뉘어 자손이 천(千)·억(億)이 불어났고 공(公)도 되고 경(卿)도 되어 대대로 아름다운 업적을 이루어 2천년(二千年)사이에 혁혁하여 우리동방에 유명한 집안이 된 것은 오직 급량공(及梁公)의 음덕(陰德)이 감싸주고 덮어준 것이다.
금오산(金鰲山) 어느 기슭이 우리 시조의 묘소인가?
연대가 아득하고 문헌(文獻)이 고징(考澄)할 수 없으므로 드디어 실전(失傳)되고 말았으니 지금에 있어서
후손이 추원(追遠)하여 사모(思慕)할 데는 유독 표암(瓢巖)이 있을 뿐이다.
정조(正祖) 11년 정미(丁未. 1787)에 후손 집성(集星)이 영양군수(永陽郡守)로 있을 때에 표암(瓢巖)위에다 깊이 새기어 기록했는데 경주의 모든 후손들이 이르기를
「이것으로는 유적(遺跡)을 표양(表揚)할 수가 없다.」하여 이에 돌을 다듬어 큰 비석을 표암 아래에 세우려하자 일가 사람 요신(堯臣)이 찾아와서 경일(敬一)에게 기문(記文)을 지으라 하니
내가 말하기를
「이 일은 많은 사람에게 상의하지 않았으니 갑·을의 의논이 있을 것이나 그 근본을 잊지 않음이 되는 것에는 또한 한 가지 의의가 있다 하겠다.
이미 세운 후에도 긴 세상에 보호하여 아희들이 두드리고 짐승이 떠받지 않게 함은 경주에 사는 모든 족인(族人)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드디어 기문(記文)을 쓰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원임좌의정 오은군 경일(大匡輔國崇祿大夫原任左議政鰲恩君敬一撰)은 글을 지었고
정헌대부형조판서경연 춘추관 오위도총부도총관 집두(正憲大夫刑曹判書經筵春秋館五衛都摠府都摠管集斗書)는 삼가 쓰다.
성상이 즉위한 지 6년째 되는 병인년(순조 6, 1806년) 9월 일 세움.
도검(都檢) : 후손 전 장령(前掌令) 이진택(李鎭宅), 유학(幼學) 이증규(李增奎).
감역유사(監役有司) : 이형묵(李亨默), 이규태(李奎泰).
각자유사(刻字有司) : 이경춘(李景春).
감관(監官) : 절충(折衝) 이중인(李重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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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남쪽의 남산(南山-고위산) 어느 기슭에 시조 표암공(瓢巖公)의 묘소(墓所)가 있을 텐데 세월이 너무 흘러 찾을 수 없고 문헌(文獻)으로도 증명할 수가 없어 찾지를 못한다.
지금으로서는 6부중에 오직 급량대인의 유허지(遺墟地)로 남은 표암(瓢巖)만이 시조(始祖)의 흔적을 가리킬 뿐이다.
각자한 바위면은 자연암비(自然岩碑)이다.
암벽에 글자를 새겨 넣은 암벽각자(巖壁刻字)이다.
1785년 7월에 후손 영양군수(永陽郡守-영천) 집성(集星)께서 표암봉 뒤쪽의 자연암에 가로로 '瓢巖(표암)'이라 각자하고, 세로로 '月城李氏始祖諱閼平公降處(월성 이씨 시조 휘 알평공 강처)'라고 글씨를 각자한 것이다.
표암 언덕의 바위면에 각자한 것으로는 널리 알릴 수 없어 그 아래에다가 큰 비석을 세우니 시조 유허 표암비(始祖遺墟瓢巖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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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甫) 및 신(申)
- 조선국(고조선ㅡ단군 조선과 구별)의 염제 때 주(州), 제(濟), 보(甫), 신(申), 여(呂), 기(紀), 허(許), 향(向), 예(芮), 희(戱), 노(露), 제(齊) 열두 아들이 산악으로부터 내려온 탄생 설화.
*소자첨(蘇子瞻)
- 송(宋)나라의 문장가. 이름은 식(軾) 호는 동파(東坡), 사천성(四川省) 미산(眉山) 출신.
소자담(蘇子膽)과 구별- 唐代의 시인
* 아래의 글은 같은 역문으로 내용은 같으나 단어. 토씨 등의 쓰임이 조금씩 다른 역문이다.
● 시조 유허표암비(始祖遺墟瓢巖碑)
- 같은 역문이나 내용이 조금 다른 역문임.- 예) 시전((詩傳)을 시경(詩經)으로 해석 하는 등
삼가 살펴보건데 경주 이씨 옛 족보에 시조의 휘는 알평(謁平)인데 진한(辰韓)의 표암봉(瓢巖峯) 아래에서 처음 내려왔다 하였으니 처음 내려왔다 함은 탄생(誕生)을 말한 것이다.
시전(詩傳)에 이르데
‘산악(山嶽)이 신을 내리어 보(甫)와 신(申)을 탄생하였다’ 하였고 소자첨(蘇子瞻)이
‘신(申)과 여(呂-甫와 같다)가 산악(山嶽)으로부터 내려왔다’고 하였으니 고금에 전설을 믿지 않을 수 없다.
대저 산이 높고 기운이 정(精)을 모으고 영(英)을 길러 철인(哲人)을 출생함은 이치에 필연적인 것으로서
동경지(東京誌)에만 기재하기를 ‘6부대인(六部大人)이 다 하늘로 쫓아 강생(降生)하였다’고 한 것과는 다르다.
신인(神人)이 태백산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와 단군(檀君)이 되었다느니 또 나정부(蘿井部)의 알에서 나와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다느니 등등의 말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로서 떠도는 말과 같아서 의심해야 할지 믿어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우나 오직 표암(瓢巖) 일구(一區)만은 급량대인(及梁大人)의 유허(遺墟)로
우리 이씨(李氏)의 근본지가 되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시조(始祖) 이래로 덕(德)을 쌓고 인(仁)을 쌓아서 경사(慶事)가 자손(子孫)에게 내리어 신라(新羅)와 고려(高麗)의 사이에 높은 관직(官職)이 이어왔고 명망(名望)이 훌륭한 분이 바라볼 정도였다.
이조(李朝)에 미치어 나뭇가지처럼 뻗고 물줄기처럼 나뉘어 자손이 천억(千億)으로 불어났고 공(公)도 되고 경(卿)도 되어 대대로 아름다운 업적을 이루어 2천년(二千年) 사이에 혁혁하여 우리 동방(東方)에 유명한 집안이 된 것은 오직 급량공(及梁公)의 은덕이 감싸주고 덮어준 것이다.
금오산(金鰲山- 경주 남산)) 어느 기슭이 우리 시조(始祖)의 묘소(墓所)인가?
연대(年代)가 아득하고 문헌(文獻)이 고증(考證)할 수가 없으므로 드디어 실전(失傳)되고 말았으니 지금에 와서 후손(後孫)이 추원(追遠)하여 사모(思慕)할 데는 유독 표암(瓢巖)이 있을 뿐이다.
정조(正祖) 11년 丁未(1787)에 후손 집성(集星)이 영양 군수(英陽郡守)로 있을 때에 표암위에다 깊이 새기어 기록했는데 경주 모든 후손들이 이르기를
‘이것으로는 유적(遺蹟)을 표양(表揚)할 수 없다’ 라 하니 내가 말하기를
‘이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의하지 않았으니 甲 . 乙의 의논이 있을 것이나 그 근본을 잊지 않음이 되는 것에는 또한 한 가지 의의가 있다 하겠다.
이미 세운 후에도 긴 세상에 보호하여 아이들이 두드리고 짐승이 떠받지 않게 함은 경주에 사는 모든 일가(一家)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드디어 이러한 사실을 기록한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원임(原任) 좌의정 오은군 경일*찬
(大匡輔國崇祿大夫原任左議政鰲恩君敬一撰)
정헌대부 형조판서 경연관 춘추관 오위도총부 도총관 집두*근서
(正憲大夫 刑曹判書 經筵 春秋館五衛都摠府 都摠管集斗謹書)
성상이 즉위한 지 6년째 되는 병인년(순조 6, 1806년) 9월 일 세움.
도검(都檢) : 후손 전 장령(前掌令) 이진택(李鎭宅), 유학(幼學) 이증규(李增奎).
감역유사(監役有司) : 이형묵(李亨默), 이규태(李奎泰).
각자유사(刻字有司) : 이경춘(李景春).
감관(監官) : 절충(折衝) 이중인(李重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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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임(原任) - 전직(前職)
*찬(撰) - 글을 지음
● 비각중수기(碑閣重修記) 역문(譯文)
경주읍 동쪽으로 월성(月城)에서 오리(五里)가 못되는 지점에 산이 높고 높아 돌을 등지고 우뚝하게 서 있는 것이 바로 표암(瓢巖)이니 우리 이씨(李氏)의 시조(始祖)이신 알평(謁平)이 처음 *강생(降生)한 곳이다.
*삼한사승(三韓史乘-삼한 때의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신인(神人- 표암공)이 표암 아래에 내려와 혁거세(赫居世)를 도와 왕(王)을 삼고 이(李)로 사성(賜姓)되어 200세(二百歲)의 수(壽)를 누리고 후손이 번창하여 신라와 고려를 지내오면서 벼슬이 이어지어 드디어 대가(大家)가 되었으니 산은 높지 않으나 감히 우러러보지 않을 수가 없으며 바위는 비록 오래되었으나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순조(純祖) 병인(丙寅. 1806)년에 *족조(族組) 정승(政丞)인 경일(敬一)과 *종장(宗丈) 판서(判書)인 집두(集斗) 우공(雨公)이 비석을 세워 사적(事跡)을 기록하고 비각(碑閣)을 지어 풍우(風雨)를 방비하였다.
병오(丙午. 18460년에 우리 선친(先親) 문정공(文貞公)께서 이 고을에 순행(巡幸)하시었다가 옛터를 찾아 첨배(瞻拜)하고 비각을 중수하고 종족(宗族)들과 연회를 베풀자 소문을 듣고 모인 자가 심히 많았으니 이것이 바로 *보본추원(報本追遠)하는 뜻이라 하겠다.
아! 영남은 지금의 *추로(鄒魯)의 고을이다.
산은 정기(正氣)를 얻어 *방박(磅石+薄- 가득 참)하고 *현송(絃誦-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음)의 소리가 집집마다 들리는데 월성(月城)이 우리 집의 고향이 되었으니 어찌 바다의 남쪽 천리(千里)라고 이르겠는가.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자손이 많아서 비록 천만명에 이르러도 한 근본이 아님이 없으니 그 처음을 생각하여 근본으로 돌아간다면 천만년이라도 1일(一日)과 같고 천만 명이라도 또한 1신(一身)과 같으니 그러한즉 비각을 받드는 것이
*현원입묘(玄元入廟)에 비할 것이 아니다.'
오직 우리 제종(諸宗)들은 삼가 수호하고 깨끗이 간직하여 *쇠체(衰替)하지 말을 지어다.
후손 유원 찬(後孫裕元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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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현이 잘못된 곳
앞부분에는 [산이 높고 높아 돌을 등지고...]라 하여 산이 매우 높은 것처럼 표현해 놓고 뒤쪽에는 [산은 높지 않으나...]로 표현하였으니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이는 [얕은 산에 돌을 등지고...]등으로 바꾸어야 한다.
*강생(降生) - 항생으로 읽으면 안된다. 표암공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곳이다.
*삼한사승(三韓史乘) - 진한. 변한. 마한 등 삼한 때의 역사 기록
*족조(族組) - 먼 일가 중에 나보다 항렬이 높은 사람
*종장(宗丈) - 일족의 어른. 우두머리
*보본추원(報本追遠) - 근본에 보답하려 먼 조상을 추모한다
*추로(鄒魯) - 공자와 맹자를 말한다.
즉 학문을 좋아하고 순후한 풍속이 있는 곳을 말함.
추(鄒)는 공자가 태어난 곳이고 로(魯)는 맹자가 태어난 곳이다.
*방박(磅石+薄) - 혼합하여 하나로 함. 가득 참. 혼동함
*현송(絃誦) - 거문고를 타면서 시를 읊음.
선비들이 부지런히 학문을 닦고 교양을 쌓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현원입묘(玄元入廟) - 당나라대 노자를 시조로 추존하여 사당을 지어 받들어 옴.
*쇠체(衰替) - 쇠하여 다른 것으로 바뀜.
● 시조 사적(始祖事蹟)
삼한유사(三韓遺事)에 말하기를 진한(辰韓) 땅에 예전에 6촌이 있으니
첫째는 알천 양산촌장(閼川楊山村長) 알평(謁平)이니 표암봉(瓢巖峯)에 초강(初降)하니 이가 급량부 이씨(及梁部李氏)의 시조(始祖)요.
둘째는 돌산 고허촌장(突山高墟村長) 소벌도리(蘇伐都利)니 형산(兄山)에 초강하니 이가 사량부 최씨(沙梁部崔氏)의 시조요.
셋째는 무산 대수촌장(茂山大樹村長) 구리마(俱利馬)니 이산(伊山)에 초강하니 이가 점량부 손씨(漸梁部孫氏)의 시조요.
넷째는 자산 진지촌장(比밑角山珍支村長) 지백호(智白虎)니 화산(花山)에 초강하니 이가 본피부 정씨(本彼部鄭氏)의 시조요.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장(金山加利村長) 지타(祗陀)니 명활산(明活山)에 초강하니 이가 한기부 배씨(漢岐部裵氏)의 시조요.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장(明活山高耶村長) 호진(虎珍)이니 금강산(金剛山)에 초강하니 이가 습비부 섭씨(習比部薛氏)의 시조이다.
한(漢)나라 지절원년(地節元年) 임자(壬子) 3월(三月) 초하룻날에 육부(六部)가 각각 아들 동생을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에 모여서 의논해 말하되 우리 무리가 위로 군왕(君王)이 없으니 백성이 모두 방탕하고 안일하여 스스로 욕심을 따르니 어찌 덕(德)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인군(人君)을 삼고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만들지 않으리오.
이에 높은데 올라가서 남방(南方)을 바라보니 양산(梁山) 밑 나정(蘿井)가에 이상한 기운이 전광(電光)같이 땅에 드리우고 흰말이 끊고 있는 형상이 있거늘 찾아서 검사하니 붉은 알이 있고 말이 사람을 보고 슬피 울고 하늘로 올라가거늘 그 알을 쪼개어 어린 사내아이를 얻으니 얼굴이 단정하고 아름답거늘 놀라고 별달리 여겨서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했다.
나이 13세(十三歲)에 오봉원년(五鳳元年) 갑자(甲子)년에 세워서 왕을 삼고 진한국(辰韓國)에 도읍하여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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