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始祖)

실전(失傳)된 세계(世系) 900년

녹전 이이록 2008. 12. 16. 23:42

■ 실전(失傳)된 세계(世系) 900년



신라 건국 전후의 시조 다음 아들 대이후 신라말경 까지 약 900년 간의 세계(世系)는 실전되어 전연 알 수 없다.


시조(휘 알평. 알천 양산촌장. 신라 좌명공신. 아찬공. 급량부-양부)의 아들부터 원대손(遠代孫) 소판공(蘇判公- 휘 거명居明)의 아버지까지 대수(代數)는 물론 선세조(先世祖)의 휘(諱)자까지도 알 길이 없으니 그러기에 실전세계(失傳世系)라 하고 있다.


고려 말 중조 17세 익재공(휘 제현)의 묘지명(목은 이색 지음)에서 신라초 부터 고려 말 익재공 까지 약 1400여년의 계대를 모르다가 익재공의 묘지명에 기록된 소판공(휘거명)이후의 윗대 조상 약 500년간의 세계가 밝혀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소판공이전부터 시조님 아랫대까지 약 900년간은 계대를 알 수 없어 안타갑다.

 

시조 이후 경주이씨에서 최초의 할아버님으로 밝혀진 분이 소판공(휘 거명)으로 우리는 중시조님으로 모신다.  

 

소판공(휘 거명)까지 즉 익재공(휘 제현) 이전 약 500년전 조상님의 휘를 알고 있었다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든 경주이씨의 계대가 전해왔을 텐데 소판공 이전의 계대는 수많은 전쟁과 재해와.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계대가 실전된 것으로 보인다.

 

1932년 분적종 합천이씨 임신대보에 처음 게재되었다는 시조 이후의 세계를 밝힌 '35대로 된 실전세계'의 자료(資料)는 선대(先代) 이래로 채택하지 않고 신라 말의 소판공(蘇判公) 휘 거명(居明)을 제1세로 하여 후손의 세수를 헤아리고 있다. 

 

* 일부 유명 성씨이거나 대성인 경우 시조 70여세 이상으로 말을 하는데 우리 경주이씨는 중조 40여세 등으로 하니 역사가 짧은 것으로 생각된다느니 하여 사실적이지 못한 35대 실전 상계를 합하여 '시조 세수'로 말하는 종친님들이 있습니다.

 

이는 1세가 잘못되어도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아버지를 할아버지로 부르는 것인데 잘못된 시조 세수를 헤아려 읽는 것은 지양해야할 일입니다. 

 

분적종  합천 이씨 세보에 기록된 '35대로 된 실전세계'의 계대가 사실적인 계대로 여겨 많은 종친들이 '시조 몇 세' . '시조 몇 세손'이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계대인 만큼 읽고 써서는 안 됩니다.


1. 35대(세) 실전세계의 시조 3세 태사령공 휘 타(它)


아래의 글은 '35대로 된 실전 세계'가 잘못된 계대라는 것을 밝히는 하나의 자료가 됩니다.


시조 3세 태사령공 휘 타(陀)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경주 이씨 상세 실전계'의 기록과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 거서간조'의 기록이 아주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먼저 '경주 이씨 상세 실전계' 의 시조 3세 (타)에 대한 기록입니다.
 

[字는 庸伯이고 號는 瓢公 先生이니 少能文章하고 事孝悌之道하며 行賢聖之禮하고 年十六에 遊學三國하니 時人이 稱之曰大賢也라하다.
開國建都初에 以佐命功臣으로 爲太輔太師大司徒하고 命遣馬韓하니 其人이 責以事大之禮어늘 先生曰 我國이 自二聖肇興으로 人事修而天時和하고 倉庫實而人民讓하다.
辰韓弁韓樂浪倭人이 莫不畏懷而吾王이 謙虛하야 使臣이 修聘하니
可謂過於禮라 하야 馬韓王左右諫止하다.
時에 三韓이 尙戰爭하되 先生이 獨行仁義하고 不務威力하며 以忠事君하니 時人이 謂賢相이러라.
官至大匡承博士農令都尉令尙書事左右內史侍中太師公하고 太宗 丙辰에 太史令하다.
贈大輔成國功臣太師鷄林侯 諡는文成公이라.

女雲悌外孫儒理王]

 

-자는 용백이고 호는 표공 선생이니 어려서 문장에 능하고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의 도리를 하고 현자와 성인의 예법을 행하고 16세에 진한 변한 마한 삼국을 유학하니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뛰어난 현인(賢人-어질고 총명하여 성인에 다음가는 사람)이라 하다.

 

개국하여 도읍을 세울 때 좌명공신으로 태보, 태사, 대사도 벼슬을 하고 명을 받아 마한에 파견되니 그 사람(마한 왕)이 대국에 대한 예를 꾸짖을 때 선생(瓢公)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는 두 성인(二聖)이 계셔서 인사(人事)를 잘 다스리고, 천시(天時)를 조화롭게 이루며,  창고에는 양식이 가득하여 백성들은 서로 사양한다.

진한. 변한. 낙랑. 왜인들을 막론하고 모두 두려워하나  우리 왕은 겸허하여 사신을 수빙(修聘-서로 불러 길을 틈. 인사를 닦음)하니 가위 예에 지나치지 않는다고 말하니 마한왕의 좌우 신하들이 간하여 중지하였다.

(표공 선생에게 마한왕이 벌을 주려고 했지만 신하들이 간하여 중지시켰다.)

    
당시에 선생이 홀로 삼한(三韓- 마한. 진한. 변한)의 전쟁을 막고 
인의(仁義)를 행하고 위력으로 누르러 하지 않으며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니 당시의 사람들이 현상(賢相-어질고 유능하여 임금을 잘 보필하는 신하)이라 일렀다. 

 

벼슬은 대광승박사 농령도위영 상서사좌우내사 시중 태사공에 이르고 *태종 병진(656)년에 태사령으로 바뀌었다. 


대보성국공신 태사 계림후로 증직되고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따님 운제(雲梯)의 외손이 유리왕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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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太宗) 병진(丙辰)- 태종 무렬왕 3년, 서기 656년. 보장왕 15년. 의자왕 16년

 

2.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 거서간조' 에 있는 기록.

 

38년 2월에 호공(瓠公)을 마한(馬韓)에 보내어 수빙(修聘빙)하니 마한왕(馬韓王)이 호공을 꾸짖어 말하기를, 진(辰)·변(卞) 이한(二韓)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직공(職貢)을 보내지 아니하니 대국을 섬기는 예가 이 같을 수가 있겠느냐고 하였다.

 

호공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는 이성(二聖)이 일어나심으로부터 인사(人事)가 바로잡히고 천시(天時)가 고르고 창름(倉?)이 충실하고 인민이 경양(敬讓양)하여 진한(辰韓) 유민(遺民)으로부터 변한(卞韓)· 낙랑(樂浪)· 왜인(倭人)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지 아니함이 없는데도, 우리 임금은 겸손하여 하신(下臣)을 보내어 인사를 닦으니, 이는 예에 지나친다고 할 수 없거늘 도리어 대왕이 진노하여 병(兵)으로써 협박하니 무슨 뜻이냐고 하였다.

 

마한왕(馬韓王)이 노하여 호공을 죽이려고 하자 좌우(마한왕의 신하)가 간하여 말리는지라, 이에 그 귀국을 허락하였다.


호공이란 자는 그 족성(族姓)이 자세치 못하나, 본시 왜인으로 처음에 박(瓠-호)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온 까닭에 호공이라고 일컬었다.

 

◆ 위와 같이 시조 3세 태사령공 휘 타(陀) 할아버님에 대한 기록이  '경주 이씨 상세 실전계'의 기록과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 거서간조'에 나오는 기록과 흡사합니다.

 

다만 실전계에는 '표공(瓢公)'이라 나오고 삼국사기에는 '호공(瓠公)'으로 나오는데 글자는 몇 곳이 틀리나  내용은 거의 비슷합니다.

 

이로 미루어 [경주 이씨 상세 실전계]와 [경주 이씨 실전계 제2의 원본]은 위와 같은 내용들로 의심스러운데다가 벼슬명도 신라 때의 벼슬 명이 아닌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벼슬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등 의심의 여지가 많아서 익재공 할아버님 비명에 기록된 소판공(중시조) 이후는 인정하나 그 이전의 세계(世系)는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됩니다.

 

 녹전 이이록(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