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始祖)

사성. 시호. 추봉. 가족. 시조의 수(짓기)

녹전 이이록 2008. 12. 12. 22:30

● 시조에게 사성(賜姓). 시호(諡號). 왕 추봉(王追封). 사적 건립

 

 

시조에게는 다음과 같이 사성. 시호와 왕의 칭호가 내리고 유허비, 재실, 묘우가 건립되었다.

 

○ 신라 유리왕 9년(서기 32년)에 시조에게 [이씨(李氏)]가 하사되고 
 

○ 법흥왕 23년(서기 526년)에 ‘충헌(忠憲)’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렸으며

 

○ 태종무열왕 3년(서기 739년)에 ‘은열왕(恩烈王)’에 추봉(追封)되었다. 

 

○ 조선 순조 6년(1806년)에 신라를 건국하고 박혁거세왕을 추대한 사실(史實)을 새긴 유허비를 금강산(경주 동천동 소재) 표암봉(瓢巖峰)에 세웠으며

 

○ 1925년에 표암재(瓢巖齋)를 건립하였고

 

○ 1971년에 표암공(瓢巖公) 휘 알평 시조의 묘우(廟宇)인 악강묘(嶽降廟)가 국고지원으로 건립되었다.

 

○ 표암(瓢巖)은 동천동 국립공원 소금강산 지구내에 소재하며(석탈해왕릉 옆) 경상북도 기념물 54호로 지정되어 있다. 



● 표암공과 가족

 


이알평 (李謁平, 기원전 117년. 한무제 6년) ∼ ?)은 신라의 개국좌명공신이며 신라 개국 전에는 사로국(斯盧國)의 알천 양산촌의 촌장이었다. 
 

자는 천서(天瑞), 호는 표암(瓢巖), 시호는 충헌공 또는 은열왕이다.

 

기원전 57년 다른 6부 촌장들과 함께 박혁거세를 추대하여 왕으로 받들다.
 

박혁거세 거서간 조에 신라 개국 좌명공신에 녹훈되고 아찬(阿餐- 6품)을 역임하였으며 군무를 주관하였다. 
 

이알평이 다스리던 알천 양산촌은 후대에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년) 급량부(及梁部)로 개칭되었으며, 이때 이씨 성을 하사 받았다 한다.

 

537년(신라법흥왕 23년) 충헌공(忠憲公)의 시호가 내려졌고, 657년(태종무열왕 3년) 은열왕(恩烈王)에 추봉되었다.

 

(가족)

배우자 : 태화공주(太華公主) 기씨, 마한왕 준의 딸, 기자의 42세손
아들 : 유(侑) - 좌내사좌군주. 시호 문화공
자부: 양씨(樣氏)- 사물국왕(史勿國王) 양번(樣蕃)의 딸
손자 : 이타 - 좌우내사시중 태사 시호는 문성공
증손녀 : 운제(남해왕 원비)


* 위의 시조 가족은 참고용으로 올린 '35대 실전세계'에 있는 내용을 발췌한 것으로 사실적이지 않습니다.

*  시조의 시호가 공식적으로는 문선공(文宣公)으로 되어있으나 여기서는 충헌공으로 나타내었습니다.

왜냐하면 공자님의 시호가 문선왕인데 공자님의 시호를 피휘해야 하는데 이를 시호로 하였다는 것과 일부 기록에는 시조님의 시호를 '충헌공'으로 기록한 곳도 있기 때문입니다.     


 

● 표암공(瓢巖公)의 탄강(誕降)과 수(壽)  - 이이록

 


우리 시조님의 탄생과 수(壽)는 한마디로 신화적(神話的)이다.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이 현대인으로서는 믿지 못하는 일들이니 답답하다.


어느 시조든 특별한 탄생이 없는 바는 아니다.


우리 시조님도 마찬가지이다.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탄강설(誕降設)'과 '壽 200歲'는 신화적 요소이다.

 

하늘로부터 하강한 장소가 경주 소금강산 '표암(瓢巖)' 즉 '박바위' 이고 이웃하여 강림대. 석제단. 유허비와 비각 등 시조할아버지의 탄강을 말하는 흔적이 남아 있음에는 부정만 할 수도 없다.

 

신라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의 탄생설화와 6부 촌장의 탄강설은 모두 신화적이다.


이와 같은 난생설. 탄강설은 이들을 보통 사람들과 구별시키고
특별한 존재로 부각시켜 무리들을 이끄는데 도움이 되게 하고, 또 신성하고 신령스러움과 위대함을 나타내어 위엄을 보이고자 함에서 만들어진 특별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조 조상님은 신라건국 후 2065년이 지난 현재도 그 자취가 다른 여느 6부 촌장들의 유허지와는 다르게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온 것은 참으로 매우 놀라운 일이고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다.      

 

왕이 아닌 일반인의 유허지로 2000년이 넘게 그 유허지가 보존되고 지켜지고 있는 곳은 아마 시조 할아버님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신화적이던 말던 우리 시조 할아버님은 역사의 기록에 경주 금강산(현 동천동 뒷산) 부근에서 강생하시고 현 경주 남산 지역에 6촌 중 하나인 양산촌장으로 무리들을 다스리는 부족장으로의 역할과 6촌장의 우두머리인 부족 연맹체의 우두머리로 화백회의를 주관하였고 서기전 57년에 13살의 박혁거세를 왕으로 옹립하여 건국공신인 신라 좌명공신이 되었으며 서기 32년 유리왕 9년에 6촌이 6부로 조직이 개편되면서 급량부로 바뀜과 동시에 '대인(大人)' 칭호를 갖고  이씨(李氏) 성(姓)을 사성(賜姓)받게 된다.      

 

'촌장(村長)"이나 "대인(大人)' 칭호는 한 무리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호칭이고 이씨 성을 갖게됨은 왕(王)이나 특별히 중국에 나가는 사신(使臣)이 필요에 따라 성을 갖는 일 외에는 성(姓)이 없던 시대에 성을 갖게됨은 이 또한 삼한족(三韓族) 중에 뛰어난 현족(顯族)으로 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그 뒤 약 500년이 지난 법흥왕 23년(서기 526년)에 ‘충헌(忠憲)’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렸으며 약 700년이 지난 태종무열왕 3년(서기 739년)에는‘은열왕(恩烈王)’에 추봉(追封)되었다.
 
지금까지는 시조의 탄강설과 유허지에 대한 소고(小考)이고 시조의 수(壽)는 어떨까?


서두에 신화적(신화적)이라고 하였다.


'수 200세'를 누가 믿겠는가?

 

그래서 신화로 받아들이는 것이 온당할 것이기에 신화적 요소라고 한 것이다.

 

'수 200세'는 대종보 '비각중수기(碑閣重修記)'에 나온다.


시조의 출생 년도를 한 무제 6년 BC 117년이라고 되어 있는 곳이 있다.

 

먼저 이를 토대로 시조의 수를 알아보자.

 

BC 57년 혁거세 13세 나이로 왕위에 오름.

 

AD(서기) 4년 혁거세 죽고 남해왕 즉위.

 

AD 24년 남해왕 죽고 유리왕 즉위.

 

AD 32년 유리왕 9년. 6부 개칭과 이씨(李氏) 성(姓) 사성(賜姓).

 

이러한 사실을 두고 혁거세를 왕위에 옹립할 때 시조의 나이는 117 - 57 + 1 = 61(세)이다.

 

남해왕 즉위년인 AD 4년에는 122세이고 유리왕 즉위 때는 144세이다.
 

그리고 유리왕 9년 이씨 성을 하사 받을 때는 서기 32년이니 172세이다.

 

지금의 통상연령으로 믿을 수 있는 나이는 혁거세를 왕위에 옹립할 때의 나이 61세 뿐이다.

 

남해왕 즉위년도 즉 혁거세 사망년도에 시조님의 나이는 122세이다.

 

유리왕으로부터 이씨 성을 하사 받은 사람이 시조님인지 그 후손인지는 모른다.
 

만약 시조 할아버지께서 이씨성을 하사받았다면 그 때가 172세이다.

 

이렇게 보면 200세의 수를 누리셨다고 해도 이는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유리왕 9년 행정조직을 개편하면서 6촌을 6부로. 촌장을 대인으로.6부의 대인들에게 성을 사성했다는 것은 역사서(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기록으로 전해온다.


여하간 시조님의 수가 200세라고 하니 놀라울 뿐이고 신선같이 이 세상을 살았을 것 같다.   
 

그러나 위의 나이에서 가장 신빙성 있는 사실로는 '혁거세를 왕위에 옹립할 때 시조의 나이는 61세'라는 내용뿐인 것 같다.

 

혁거세가 죽은 AD 4년만 해도 시조의 나이 122세가 되니까 지금의 인간 생존 연령으로는 믿기 힘든 일이라 마음에 의혹이 가득해도

하늘로 부터 내려온 신인(神人)임을 강조하면 수 200세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