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 시조와 진한(辰韓) 6촌
경주 이씨의 시조(始祖)는 알평(謁平)이고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이다.
『삼국유사』에는 기원전 117년에, 경주 이씨의 시조인 <알평공>이 하늘에서 신라의 4영산(靈山)의 하나인 경주 서북에 있는 금강산(金剛山)의 표암봉(瓢巖峰)에 내려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 6촌(村)은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
무산 대수촌(茂山大樹村)·
취산 진지촌(嘴山珍支村)·
금산 가리촌(金山加利村)·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 등이다.
『삼국사기』에는 유리왕(儒理王) 9년 봄에 6부(部)의 이름을 고치고 성씨(姓氏)을 사성(賜姓)하였다.
6부는
양산부(楊山部)→ 밑돌부(及梁部)- (李氏)
고허부(高墟部)→ 새돌부(沙梁部)- (崔氏)
대수부(大樹部)→ 점돌부(漸梁部)- (孫氏)
우진부(于珍部)→ 본피부(本彼部)- (鄭氏)
가리부(加利部)→ 한기부(漢祇部)- (裵氏)
명활부(明活部)→ 습비부(習比部)- (薛氏)로 했다.
*삼국 사기에 기록된 대로 기록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이와 달리 새돌부(沙梁部)를 정씨(鄭氏)의 본관으로 기록하고 본피부(本彼部)를 최씨(崔氏)의 본관으로 기록하고 있다.
*시조의 영지(領地)인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은 뒤에 밑돌부(及梁部)가 되는 뿌리의 마을로 6촌의 모체이고 밑돌부의 촌장인 알평(謁平)은 6촌의 부족사회를 영도하는 수장이었다.
● 시조 알평공의 5가지 사적(史蹟)
- 중앙화수회 홈페이지 '시조의 유래'에서
첫째는 [사로국(斯盧國)]을 탄생시킨 일을 들 수가 있다.
사로국(斯盧國)은 휘 알평께서 박혁거세를 옹립하여 세운 진한 12소국 가운데 하나로 신라의 모태가 되었다.
경주에 위치해 있었다.
3세기 중엽부터 국력이 커지면서 주변 소국들을 복속시켜 4세기에는 경상도 일대를 장악하게 되었다.
'신라'라는 국호는 503년 지증왕 때 채택되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박혁거세가 왕위에 즉위한 이후 국호를 서나벌(徐那伐), 서라벌(徐羅伐) 등으로 바꾸기도 했다고 한다.
둘째는 [화백 제도]를 창안하여 전통화 했다는 것이다.
신라 씨족 공동회의제에서 발전한 만장일치제 회의제도로서 처음에는 6촌(村) 사람들이 모여 나라의 일을 의논하다가 뒤에는 진골(眞骨) 이상의 귀족이나, 벼슬아치의 모임으로 변하여, 일종의 군신(君臣) 합동회의, 귀족회의, 또는 백관(百官)회의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화백이라는 말을 신라 고유의 이두(吏讀)식 표기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여러 사람이 '화합하여 아뢴다'(和白)는 뜻에서 취한 한자어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 기원은 연맹왕국시대의 정사당 혹은 남당이라는 제도에서 기원하고 있다.
이 제도가 비교적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의장으로서의 상대등 직이 설치된 이후부터라고 추정된다.
이 화백회의에서는 왕위의 계승과 폐위, 대외적인 선전포고, 기타 불교의 공인과 같은 국가의 중대한 일들을 만장일치에 의해서 의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결정하였고, 특히 중대한 국사를 의논할 때에는 경주 四位 즉 동쪽의 청송산, 남쪽의 오지산, 서쪽의 피전, 북쪽의 소금강산 등 이른바 영지를 택하였다고 한다.
셋째는 유두(流頭)의 풍속이 알평공의 영지(領地)인 알천(閼川)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삼국유사』에는 건국회의가 열리던 날 6촌장들이 각각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에 나왔다.
이 날은 3월 1일의‘계욕일’이므로 전 6촌민이 물가에 나와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으며 빨래도 하고 겨우내 정체(停滯)되었던 때와 불운을 몰아내고 깨끗한 심신으로 새봄을 맞는 의례(儀禮)를 치른 것이다.
그런데 고려시대로 내려오면 이 [계욕]의 민속은 없어지고 그 대신 [유두(流頭)]로 대체되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유두’의 원형으로서의‘계욕’이 기원전 69년에 이미 알천에서 행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일이다.
넷째는 박혁거세가 6촌 가운데 알평공의 영지인 양산촌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6촌은 일종의 부족국가였다.
모든 문제는 6촌장이 모여서 의논하지마는 두 가지 한계는 분명히 고수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하나는 종족의 한계이고 다른 하나는 영역의 한계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다른 촌의 영역을 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삼국사기」에는,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이 양산촌을 바라보니 양산촌의 나정(蘿井) 곁의 숲 사이에서 말 울음소리가 나므로 가서 살펴보니 알이 있으므로 알을 깨고 영아를 거두어다가 길러서 10여세가 되자 임금으로 세웠다고 하였다.
6촌의 영도자는 알평공인데 제2촌의 촌장이 제1촌의 촌장이요, 6촌의 영도자인 알평공의 허락없이 양산촌에 몰래 숨어 들어올 수가 있겠는가?
또 나중에 임금이 될 영아를 양산촌장의 허락 없이 거두어다가 몰래 길러서 임금으로 추대할 수가 있을까?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다.
「삼국유사」에는 이 대목을 이렇게 고쳐 쓰고 있다.
“(건국회의를 마치고 모든 촌민이) 알천(閼川) 언덕에 올라서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촌의 나정 곁에 전광(電光)이 드리웠으므로 모두 내려가서 살펴보니 큰 알이 있었다.
알을 깨니 옥동자가 나오므로 북천(北川)에 씻었더니 몸에서 광채가 났다.
때 마침 알영(閼英) 우물가에 나타난 계룡에게서 여아(女兒)를 얻었으므로 6촌민들이 궁실(宮室)을 지어서 두 성아(聖兒)를 기르고 13년 뒤에 혁거세는 임금으로 추대하고 알영은 왕비로 모셨다”고 있다.
「삼국유사』는「삼국사기」보다 136년 뒤에 나온 책이기 때문에 「삼국사기」에서 빠진 것을 보태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은 역사서다.
“박혁거세를 소벌공이 데려다가 길렀다”는「삼국사기」의 잘못된 기록이『삼국유사』에 의해서 이미 이와 같이 분명히 고쳐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섯째는 알평공이 내려온 박바위(瓢巖)가 [밝사상] (단군신앙)의 “남부연원(南部淵源)의 구실” 을 했다는 점이다.
‘밝사상’은 신라만의 독점물은 아니지만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발해까지 모조리 멸망했으므로 단절의 위기를 만났었는데 신라가 계승, 발전시켜서 고려에 전수하고 고려가 다시 조선에 전해주어서 오늘에 이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최초의 구실을 한 것이 양산촌이고 그 상징적인 표상이 바로 [박바위(瓢巖)]인 것이다.
박혁거세의 ‘박’을 비롯하여 ‘빛’과 ‘밝’을 의미하는 용어를 신라의 왕명(王名)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례는 도처에서 산견(散見)된다.
이상과 같이 알평공이 다스리던 알천 양산촌은 대저 5가지의 대단한 사적(史蹟)을 지닌 역사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 알평(謁平)은 [거륵한 평천하자(平天下者)]의 뜻
이청원(李靑原) 전 표암학술원장은 알평(謁平)을 이름으로 보지 않고 존호(尊號)로 보았다.
그는≪표암(瓢巖. 밝바위)에 관한 고찰≫이라는 연구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석명(釋明)하고 있다.
[알평께서 북만주의 신조선(朝鮮)의 왕족으로서 아직도 백성의 존경을 받는 처지에서 일단 (一團)의 무리를 이끌고 반도 남부로 내려와 6촌을 이루었고 그들을 선도하여 옛날의 신조선 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사로국(斯盧國)을 창업하고 그 영주(英主)로서 13년을 다스려서 도덕사회로 성숙시킨 뒤에 임금을 추대하여 왕국을 출범시켰으나 왕이 어리므로 6촌장을 거느리고 섭정하면서 1,000년 왕국의 기틀을 다진 분]
이만하면 사로국 백성은 말할 것도 없고 후세의 신라에서도 <거룩한 구세주>로 모실만 하지 않은가?”
‘알평(謁平)’ 의 ‘알(謁)’ 은 ‘거룩한’ , ‘신성한’의 뜻이며 ‘평(平)’ 은 “잘 다스린다”는 뜻이다.
『대학(大學)』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에는 “평천하(平天下)"를 ‘혈구지도’라고 하고, 노인을 정성껏 모시는 것을 ‘효(孝)’ 라 하고 어른을 받드는 것을 ‘제(悌)’ 라 하며 외로운 이를 불쌍히 여기는 것을 ‘자(慈)’ 라 하니 이 삼덕(三德)을 향상하는 것이 곧 ‘혈구지도’ 이며 이것이 ‘평천하’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알평공의 치적(治績)이 어찌 효 · 제 · 자의 '삼덕(三德)' 에만 머물었겠는가?
인문(人文)의 극치(極致)라고 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완성”을 실현하고 그 꽃으로 상징되는 ‘화백’ 을 제도화하였다.
부족국가를 다시 왕국으로 승화시켜서 옛날의 <신조선>을 부활시켰으니― 야만을 ‘개명(開明)’으로 순화한 것도 그의 가르침에 의함이요,
‘화백’도 그의 지도력에서 나왔으며 ‘사로국이나 신라의 건국’도 그의 탁월한 지도력의 소산(所産)이었으니 이 어찌 "겨례의 아버지"이요, "거룩한 평천하 자"가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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