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휘 알평 시조와 '화백 제도'
『삼국유사』에는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기원전 69년) 3월 1일 6촌의 촌장들이 각기 그의 자제(子弟)들을 이끌고 경주이씨의 시조인 알평공(謁平公)이 다스리는 알천(閼川)의 안상(岸上- 언덕 위)에 모여 나라를 세울 것을 의논하였다고 있다.
이것이 ‘사로국(斯盧國)’으로서 기원전 69년의 일이며 이때에 이 회의를 주재한 분이 알평시조였다.
알평시조께서 사로국의 수장(首長)으로 13년 간 다스린 연후에 13세 된 혁거세(赫居世)에게 ‘밝(朴)’의 성을 주어 기원전 57년에 왕으로 추대하니 이분이 박혁거세(朴赫居世)이다.
그런데 이 때에 6촌민들이 회의를 하면서 준수해 오던 ‘논의와 결의의 방법’이 바로 ≪화백(和白)≫이라는 것이다.
이 ≪화백≫제도는 신라 후대에 전통화 된 관례인데, 중국에까지 소문이 나서 저들의 사서(史書)에도 간략한 기록이 보인다.
『수서(隋書)』신라전(新羅傳)에는
“共有大事 則聚群官 詳議完之” (공공의 큰 일에는 많은 관리들을 모아놓고 자상하게 의논하여 완결 짓는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당서(唐書)』신라전에는
“事必與衆議 號和白 一人異則罷”(일은 반드시 많은 사람과 더불어 의논하는데 ‘화백(和白)’이라고 부른다.
(논의하다가도) 한 사람이 의견을 달리하면 그만둔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화백제도(和白制度)≫는 기원전 69년의 알천 안상(알천강 기슭의 위쪽)의 6촌회의에서 유래했는데, 어떤 이는 이 화백제도를 민주주의의 발상(發祥)이라고 하였으나 어떤이는 민주주의의 발상이라기 보다는 완성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철칙(鐵則)이 있다.
그러나 ≪화백≫은 100명이 지지하더라도 1명이 반대하면 그 안건을 아예 폐기해버리는 것이니 아무리 시간이 걸리고 비용이 들더라도 참석인원 전원의 지지 없이는 가결하지 않는다는 철칙― 이것이 ≪화백≫이다.
참석인원 전원의 지지로 결의하였으니 책임도 또한 전원이 질 것 아닌가?
신라가 992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누린 배경에는 이와 같은 ≪화백의 철칙≫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6촌이 단순한 원시부족사회가 아니라 이미 “민주주의가 완성된 사회” 이기 때문에 화백제도와 같은 고도의 도덕사회가 탄생하고 또 준용(遵用)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을 입증하는 것으로는 기원전 69년의 사로국 <건국회의>에서도 “아이들이 버릇이 없고 방자하니 덕이 있는 이를 찾아서 임금으로 삼고 나라를 세우자”는 민주적 건국논의에서도 충분히 감지되는 일이다.
● 급량공(及梁公-시조 표암공)의 은덕(恩德)
- 시조유허표암비에서
[시조 이래로 덕(德)을 쌓고 인(仁)을 쌓아서 경사(慶事)가 자손(子孫)에게 내리어 신라(新羅)와 고려(高麗)의 사이에 높은 관직(官職)이 이어왔고 명망(名望) 높은 훌륭한 분이 서로 바라볼 정도였다.
조선(朝鮮)에 미치어 나뭇가지처럼 꺾고 물줄기처럼 나뉘어 자손이 천억(千億)으로 불어났고 공(公)도 되고 경(卿)도 되어 대대로 아름다운 업적을 이루어 2천년 사이에 혁혁하여 우리 *동방(東方)에 유명한 집안이 된 것은 오직 *급량공(及梁公)의 은덕(恩德)이 감싸주고 덮어둔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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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방(東方)- 우리나라
*급량공(及梁公)- 급량부 대인(及梁部大人) 즉 표암공 휘 알평을 일컬음.
신라 건국 이전 진한(辰韓)시대에 있던 6촌을 32년(유리왕 9)에 6부로 고쳐 그 이름도 바꾸고 각 부에 성씨를 하사하였다.
이때 정한 육부의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을 양부, 즉 급량부(梁部, 及梁部: 南川 남쪽)로 하였다.
시조 표암공 이래로 신라 말까지 약900여 년 동안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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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판공(蘇判公. 중시조. 휘 居明)의 소판(蘇判) 벼슬이 진골(眞骨)만이 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록 세계(世系)는 알지 못하나 소판공 이전을 미루어 짐작하건데 높은 관직과 명망(名望) 높은 선조님들이 대를 이었을 것이다.
자손들은 나뭇가지와 물줄기처럼 천억(千億)으로 불어나 공경(公卿)이 되어 업적을 남기고 현족(顯族)이 됨은 온전히 급량공(瓢巖公-표암공)의 은덕 때문이다.
● 경주 이씨가 진골? 왕족? 귀족?
'경주 이씨가 왕족인가요?' 라고 한 어린 종친의 문의를 보았다.
아마 중시조의 관직이 소판(3관등) 벼슬인 줄 알고 이 소판 벼슬이 진골 이상이 가지는 관직이며 진골은 왕족이니 그런 의미에서 문의를 한 것 같은데 아래의 글이 답이 될는지는 모르지만 정리해 보았다.
신라의 6촌 중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 뒤에 及梁部로 개칭- 급량대인)의 촌장으로 전해지는 표암공(瓢巖公)의 휘는 알평(謁平)이며 표암공이라는 호칭은 시조께서 애초에 경주 표암(박바위)에 강림했다는 기록에서 뒤에 호칭된 것이다.
기원전 117년(한 무제 원수6년) 갑자에 하늘로부터 진한(辰韓- 삼한시대에 경상도 지역) 땅의 표암봉(표암봉- 경주 동천동 소재 석탈해 왕릉 뒷산. 박바위)에 처음 내려오셔서 양산 촌장(陽山村長)으로 부족들을 다스리며 혁거세를 양육시켜 신라 초대왕(初代王- 기원전 57년 신라 건국)으로 추대하고 6부 촌장(六部村長)의 합의체인 화백회의의 주재자로서 소임을 다하였다.
[삼국유사]
이후「삼국사기」에 서기 32년(신라 3대 유리왕 9년) 유리왕이 여섯 촌장들에게 사성(賜姓)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양산촌(陽山村)을 급량부(及梁部)로 바꾸고 표암공에게 이씨(李氏)의 성(姓)을 내려 주었다.
그 뒤의 계대(系代)는 분명히 전해져 왔을 텐데 전란과 재난과 화재와 분실로 *약 1000년 간의 세계(世系)가 어느 집안에서도 남아있지 않고 실전(失傳)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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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천(閼川)
- 북천(北川)으로 경주 시가지의 북쪽을 흐르는 내로써 서천(西川)과 만나 형산강이 되며 범람이 많았다.
촌장은 이알평. 후에 급량부로 바뀌고 이 양부(급량부)에는 파체(波替), 동산(東山), 피상(被上), 동촌(東村)의 부락들이 속해 있었다.
근처에 봉덕사, 호원사가 있었다.
*양산촌(陽山村)
- 알천 양산촌(閼川陽山村)으로 담암사(曇岩寺- 현 오릉. 박혁거세왕릉 부근에 있던 절)부근의 지역으로
사로 6촌의 하나이고 현재 경주시내 지역으로 추정된다.
뒤에 급량부(及梁部)로 개칭하였다.
*약 1000년 간
- 신라 건국초(서기전 57년) 시조 표암공 이후부터 (이씨 성을 사성 받은 서기32년. 유리왕9년) 신라 말 중시조 소판공 이전까지의 계대(系代)를 두고 대강 약 1000년으로 본 시기이다.
실지는 약 900년이다.
그것이 고려 말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이 찬(撰- 지음)한 익재 문충공(휘 齊賢)의 묘비명에서 신라 말 소판(蘇判) 관직의 휘 거명(居明)께서 처음으로 경주 이씨로 거론됨으로서 후손들이 소판공(蘇判公)을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시조의 발상지인 경주(慶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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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牧隱) 이색(李穡)
- 고려 말 문신· 학자.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본관은 한산(韓山).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익재(益齋) 제현(齊賢)의 문인(門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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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세전보감(慶州李氏世傳寶鑑)에 '소판공 휘 거명 사적(蘇判公諱居明事蹟)' 에 대한 글이 있고 다음과 같은 역문이 있다.
[공(公- 소판공. 휘 거명)은 신라(新羅)에서 벼슬이 소판(蘇判)에 이르셨는바 신라관제를 살펴보면 소판(蘇判)은 영판(迎判)이라는 관명(官名)으로도 나타나 있는데 소판(蘇判)은 반드시 진골(眞骨)이라야 받을 수 있다고 하였으며 진골(眞骨)은 왕족(王族)이라고 하였다.]
1) 귀족임을 나타내는 제일 정확한 증거가 '소판(3관등)'관직이다.
신라 말경에 활동하신 중시조님이신 소판공(휘 거명)은 '소판' 관직에 있었다.
'소판' 벼슬은 진골(眞骨)만이 가지는 관직이었다.
진골은 골품제도(骨品制度)에 의하여 왕족(王族)이라는 것이다.
소판 관직은 태대각간. 대각간. 1등 이벌찬(각간). 2등 이척찬(이찬). 3등 잡찬(소판). 4등 파진찬. 5등 대아찬으로 소판은 17관등 중의 3관위 관등이다.
법흥왕(514~540)이 율령(律令. 법령)을 반포하면서 편성한 신분제도(身分制度)로 가락국의 마지막 임금인 김구해와 그 가족(김유신 포함), 고구려의 *안승과 그 가족 등도 외부인사로 '진골'에 편입된 사례로 귀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나중에 태종무렬왕이 된 김춘추도 진골 출신으로 왕이 되었다.
망한 나라의 왕족들도 진골이 되는데 신라 건국 공신(建國功臣)과 그 후예들이 진골이었음은 두 말 할 필요조차 없고 신라말경의 중시조 휘 거명의 소판 벼슬은 왕족이었음를 확실히 뒷받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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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安勝)
- 고구려 부흥운동 때 추대된 왕. 안순(安舜)이라고도 한다.
670년(문무왕 10)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여 부흥운동을 일으킨 검모잠(劒牟岑)에 의하여 왕으로 추대되어, 한성(漢城;황해남도 載寧)을 근거지로 당(唐)나라에 항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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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두 번째가 표암공의 촌장. 대인 호칭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양산 촌장(陽山村長). 급량부 대인(及梁部大人)으로 불리는 것은 6촌에서는 촌장으로, 6부에서는 '대인'으로 호칭이 바뀐 것이다.
'촌장'이니 '대인'이니 하는 호칭은 집단의 우두머리만이 가지는 호칭이다.
화백회의를 주재하고 박혁거세를 6부 촌장들과 합의하여 신라 첫 번째 왕으로 추대하였으니 그 대우가 최우위에 있었을 것이고 진골로 대우를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건국 원훈으로서의 지위와 사성(賜姓)은 진골 신분을 유지하기에 충분하다.
그 때부터 신라 1000년을 대대로 왕족인 진골 신분을 유지하여 왔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소판공 할아버지는 신라 17관등 중 진골만이 가졌던 3관등인 잡찬과 같은 소판 벼슬에 있었다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선생이 익재공의 묘지(墓誌)를 찬(撰)할 때 기록하고 있다.
3. 중조 3세인 휘 금서(金書) 때에 고려 태조의 외손녀인 신란궁부인가 결혼.
고려왕조가 세워져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였다.
휘 금서께서는 벼슬은 중원태수(中原太守) 호부랑중(戶部郞中- 문종 때 정 5품)이었다.
그런데 휘 금서의 배(配)는 경주 김씨로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 부(溥)의 3녀이며 고려 태조인 왕건(王建)의 외손녀인 신란궁부인이다.
몰락한 신라 경순왕이지만 고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정략적인 결혼이지만 경순왕에 대하여 상당한 대우를 한 것이고 그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의 딸. 즉 왕가의 피를 가진 경순왕의 딸이자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녀인 신란궁부인과 혼인한다는 것은 왕족이 아니면 엄두를 못 낼 위치임을 감안한다면 고려 초기 신라의 진골 신분으로만 가능한 일로서 왕족 계열임을 여실히 말해 주고 있다.
4. 태종무열왕 3년(서기 739년)에 ‘은열왕(恩烈王)’에 추봉(追封)되었다.
표암공께서 유리왕 때 사성(賜姓-이씨 성을 임금으로부터 받음)이후 700여 년이 지난 태종 무렬왕 때에 은열왕(恩烈王)에 추봉(追封)되었음은 왕족 계열이 아니면 봉작될 수 없는 것이다.
명예직인 은열왕으로 추봉받았지만 왕으로 추봉받은 이상 왕족이 되는 것이다.
경주 인근의 부족집단인 양산촌장으로 인근 다섯 촌장들과 합의체인 화백회의를 주재하고 박혁거세를 신라의 첫 왕으로 추대하여 왕국을 공고히 하였으니 건국을 주도한 원훈으로 무열왕의 표암공에 대한 은열왕의 추봉은 의당한 것이다.
5. '35대로 된 실전세계'에서 많은 조상이 5품 이상의 관직을 가졌다.
비록 '35대로 된 실전세계'에 오류가 많고 확실하지 않은 계대이나 일부가 잘못된 것이지 전부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여하간 대종보에는 이 계대가 정확한 계대가 아닌만큼 참고용으로만 참고해야 될 것이다.
이 '35대로 된 실전세계' 계대의 조상들 중에서 진골이라야만 관직을 할 수 있는 5품 이상의 벼슬을 한 조상만을 알아본다.
1세 알평- 좌명공신. 태보. 총재. 태재. 섭정왕사. 태사공. 은열왕(태종무열왕 추봉)
2세 유- 좌내사. 군주
3세 타- 좌명공신. 태보 태사 대사도.
4세 중가- 시중. 태사령.5세 석- 각간. 좌령. 대아찬.
6세 문상- 진골 대아찬. 증좌내사 시중. 태위령 상서사.
7세 방- 태사령.
8세 방- 시중 태사대부.
10세 기정- 대아찬.
12세 성립- 대각간. 상등 대아찬.
13세 서- 대아찬.
15 걸- 태사령.
16세 선장- 태사령.
17세 기첨- 대아찬.
18세 인흥- 태사 태보 태사령.
19세 황- 시중. 박사령. 어사대부. 대농령.
20세 선정- 태사.태보. 태중대부.
21세 체- 상서령.
22세 태휘- 중서령.
24세 준- 내사시중.
25세 소- 대아찬.
26세 경지- 시중.
27세 욱- 시중. 판어사대.
29세 한로- 내사시중.
30세 계탕- 문하시중.
31세 도- 도위령. 시통정상서사.
32세 사언- 문하시중. 태사령.
34세 희두- 문하시중.
35세 계- 시중령.
36세 거명- 소판(3관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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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부. 조부. 창부. 예부. 승부. 사정부. 선부. 영객부의 우두머리를 령(令)이라 하며 1-5품이 관직을 맡고. 집사성의 시중(侍中)은 2-5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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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대 실전 세계에 기록된 조상님의 행적난 기록의 관직은 거의 대부분이 5품 이상의 관직을 가졌음을 볼 수 있다.
이로보면 진골 계통임이 분명하다.
시조님의 양산촌장. 화백회의 주재. 급량부 대인. 건국 원훈. 이씨 성 사성. 은열왕 추봉 등으로 미루어 비록 왕은 아니었으나 왕족 대우를 받았음에는 틀림없을 듯하다.
덧붙여 '35대로 된 실전 세계'의 계대에 아래와 같은 기록도 있다.
3세 태사령공(휘 타)의 따님 운제(雲梯)가 남해왕의 원비이고 그 사이에 유리왕이 태어났다.
4세 태사령공(휘 중가)의 배(配)가 박씨인데 박혁거세의 따님으로 기록되어 있다.(시기적 차이)
6세 송헌 선생(휘 문상)은 진골 대아찬으로 시호가 문장(법흥왕)이고 계림후에 봉해졌다.
18세 문열공(휘 인흥)은 평림후로 태종 무열왕 때 장혜(왕)으로 추봉하였다
* '35대로 된 실전세계'는 사실적이 아닌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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