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인물

경주 이씨 인물(호-희)

녹전 이이록 2009. 4. 16. 09:11
경주 이씨 인물(호-희)


 

 ●  이호우(李鎬雨)


1912~1970 

 

아호는 본명에서 취음(取音)하여 이호우(爾豪愚)라 하였다.

 

청도 출신이고 시조시인 영도(永道)의 오빠이다.

 

향리의 의명학당(義明學堂)을 거쳐 밀양보통하교․경성제1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신경쇠약으로 중퇴하고 낙향하였다.

 

1929년 일본 동경예술대학에 유학했으나 신경쇠약증세의 재발로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하였다.

 

광복후 ≪대구일보≫의 경영과 편집에 참여하면서 1952년 ≪대구일보≫의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지냈고

1956년 <대구매일신문>의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으로 일하면서 시작활동(詩作活動)을 하였다.

 

문학 활동으로는, 1939년 ≪동아일보≫ 투고란에 <낙엽>을 발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1940년 ≪문장≫ 6·7호 합병호에 <달밤>이 가람 이병기(李秉岐)의 추천을 받으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작품집으로는 ≪이호우시조집≫(1955. 영웅출판사)이 나왔고

영도와 함께 낸 시조집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중의 1권인 ≪휴화산≫(1968)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한 민족 한 국가에는 그 민족의 호흡인 국민 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시조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으며

국민 시는 간결한 형(型)과 서민적이고 주변적이며 평명(平明)한 내용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시에 잘 구현되고 있는데, 추천작품인 <달밤>에는 이러한 성향이 잘 드러나고 있어서

선자(選者)인 가람의 “아무 억지도, 꾸밈도, 구김도 없다.”는 선후평(選後評)에서도

그의 시작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휴화산> 이후의 작품들은 욕정의 승화와 거기에 안주(安住)하는 성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업적은 고전적인 가형(歌形)에 현대적인 감각과 정서를 접목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72년 대구 남산공원에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1955년 ≪이호우시조집≫으로 제1회 경북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 이호우공(爾豪愚公) 호우(鎬雨)


1912∼1970. 시조시인이다.

 

아호는 본명에서 취음하여 이호우(爾豪愚)라 하였다.

 

경상북도 청도 출신으로 아버지는 휘 종수(鐘洙)이시고 어머니는 구봉래(具鳳來)이며

누이동생 영도(永道)도 역시 시조시인이다.

 

향리의 의명학당(義明學堂)을 거쳐 밀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경성 제1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28년 신경쇠약증세로 낙향하였다.

 

1929년 일본 동경예술대학에 유학하였으나 신경쇠약증세 재발과 위장병으로 학업을 포기하고 다음해 귀국하였다.

 

1934년에는 김해김씨 순남(順南)과 혼인하였다.

 

광복 후《대구일보》 편집과 경영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1952년 대구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지냈고

1956년에는 대구매일신문 편집국장 및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편으로는 시작활동을 하여 지방문화 창달에 공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시작활동은 1939년《동아일보》투고란에〈낙엽 落葉〉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며

1940년《문장 文章》6·7호 합병호에 시조〈달밤〉이 이병기(李秉岐)의 추천을 받음으로써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작품집으로는 첫 시조집《이호우시조집 爾豪愚時調集》이 1955년 영웅출판사(英雄出版社)에서 간행되었다.

 

누이동생 영도와 함께 낸 시조집《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중의 1권인《휴화산 休火山》 (1968)을 발간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

 

이것은《이호우 시조집》이후의 작품들을 모아 엮은 시조집이다.

 

그의 시조관은《이호우 시조집》후기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여기서 한 민족, 한 국가에는 반드시 그 민족의 호흡인 국민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시조에서 찾아야 한다고 밝히면서, 국민 시는 간결한 형(型)과 서민적이고 주변적이며

평명(平明)한 내용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작품에 잘 반영되어 있다.

 

추천작품〈달밤〉에는 이러한 점이 잘 나타나고 있는데 “아무 억지도, 꾸밈도, 구김도 없다.”는

선자(選者)의 말과도 같이 범상적인 제재를 선택하여 평이하게 쓴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범상적 제재와 평이성이 초기시조의 세계라면, 후기시조《휴화산》의 시편들은

인간욕정의 승화와 안주적 경지를 보인 점이 특색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고전적 시조를 현대감각이나 생활정서로 전환시켜 독특한 시적 경지를 개척한 것이

시조시단에 남긴 공적이라 할 수 있다.

 

1972년 대구 남산공원에 시비가 세워졌다.

 

1955년 첫 작품집인 《이호우시조집》으로 제1회경북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편저로《고금시조정해 古今時調精解》가 있다.


<살구꽃 핀 마을>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 없는 밤을 꽃 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는 *초당(草堂)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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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당(草堂) : 초가집

첫째 수 아름다운 고향 마을에 대한 친근감

둘째 수 고향의 정겨운 분위기와 '봄밤'의 정취


제재 : 살구꽃 핀 마을

주제 : 시골 마을의 따뜻한 정과 분위기.


○ 현대 시조와 이호우


1920년대 시조 부흥 운동을 전개한 사람들은 이병기, 최남선, 이은상 등이다.

 

그러나 정작 현대 시조를 실험하고 창작하여 문학적으로 부흥시킨 시인은

이병기의 추천으로 <문장>을 통해 등단한 이호우와 김상옥이다.

 

이 중에서 이호우는 연시조, 양장 시조 등과 같은 새로운 시조 형식을 실험할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서정시로서의 시조를 현대시적인 정서 세계와 접맥시키고 있다.

 

아울러 다양한 주제와 이를 뒷받침할 시상과 시적 분위기, 어조를 통하여 현대 시조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이호우의 작품 세계는 현대적 심상을 활용하여 내면 세계를 취급하는 데 성공하여 현대 시조의 격을 높였다.

 

초기에는 범상한 제재를 개성 있는 느낌과 시어를 가지고 꾸밈없이 표현하였고

후기에는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을 보이면서 현대시에서처럼 모든 소재와 이미지들을

시조 형식에 담아 표현하고자 하였다.


<달밤>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 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낯익은 풍경이되 달 아래 고쳐 보니,

돌아올 기약 없는 먼 길이나 떠나온 듯,

뒤지는 들과 산들이 돌아 돌아 뵙니다.


아득히 그림 속에 정화(淨化)된 초가집들,

할머니 조웅전(趙雄傳)에 잠들던 그 날 밤도

할버진 율(律) 지으시고 달이 밝았더니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 세상 쉬는 숨결 한 갈래로 맑습니다.

차라리 외로울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


① 기 : 상황 제시 (1연)

② 승 : 달밤의 정경 (2연)

③ 전 : 달밤의 정경, 동심의 세계 (3연)

④ 결 : 간절한 염원 (4연)


제재 : 낙동강의 달밤

주제 : 이상 세계에의 소망(조국 광복에의 염원)


<깃발>


깃발! 너는 힘이었다. 일체를 밀고 앞장을 섰다.

오직 승리의 믿음에 항시 넌 높이만 날렸다.

이 날도 너 싸우는 자랑 앞에 지구는 떨고 있다.


온 몸에 햇볕을 받고 깃발은 부르짖고 있다.

보라, 얼마나 눈부신 절대의 표백(表白)인가

우러러 감은 눈에도 불꽃인 양 뜨거워라.


어느 새벽이더뇨. 밝혀 든 횃불 위에

때묻지 않은 목숨들이 비로소 받들은 깃발은

성상(星霜)도 범(犯)하지 못한 아아, 다함 없는 젊음이여.


 

●  이홍업(李弘業)


조선 중기의 문신 . 자는 시립(時立), 호는 포세(逋世).

 

1579년(선조 1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박사·병조좌랑·고창현감 등을 거쳐 지평으로 있을 때

미움을 받아 함경도 경성도호판관으로 좌천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적장 가또(加藤淸正)가 왜군을 이끌고 회령에 침입했을 때

회령부사 국경인(鞠景仁)이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비롯하여 수10인을 포박하여

왜적에게 투항했을 때 그도 함께 붙들려갔는데,

적장이 강화문서를 작성하여 왕자와 대신에게 강제로 서명하라 하고 그 문서를 그에게 주면서

의주의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왕에게 전하라 하므로 의주 행재소에 이르렀으나,

“적장의 문서를 가지고 온 것은 나라를 욕되게 한 짓이므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는 탄핵을 받아 투옥되었다.

 

옥중에도 세 번이나 소를 올려 왕자의 급박한 사정을 상세하게 아뢰고 잡혀있는 대신들의 전언(傳言)을 자세하게 썼다.

 

그러면서 자신이 여기에 온 것은 단지 적장의 문서를 전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두 왕자를 구출하려고 함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니

그의 충성심이 인정되어 죽음을 면하고 길주로 유배되었다가 4년 뒤에 풀려났다.

 

 

● 35세 이회영(李會榮)


1867(고종 4)~1932. 독립운동가

 

이회영(1867년~1932)은 서울 출신으로 호는 우당, 좌찬성 유승(裕承)과

정경부인 동래정씨와의 사이에 7남 중 4남으로 태어났다.

 

1906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갑(李甲) · 전덕기(全德基) · 양기탁(梁起鐸) · 이동녕(李東寧) · 신채호(申采浩)·

안창호(安昌浩)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정치·경제·교육·문화 등의 분야를 담당하고

만주에 광복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기로 협의한 다음

간도 용정(龍井)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李相卨)을 숙장(塾長)으로 선임하여 교육을 시행토록 하였으나

1907년에 이상설이 네델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정사로 파견되었으므로

여준(呂準)을 파견하여 교무행정을 맡도록 조치했다.

 

이듬해에 보재(溥齋. 상설의 호)가 열강을 역방하면서 주권회복의 활동을 하고 돌아오자

공이 만주로 찾아가서 앞으로의 진로를 숙의하였는데,

장차의 구국활동은 분담하기로 합의하고 국내활동은 공이 맡고 국외활동은 보재가 담당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공은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문제는 교육의 진흥이라” 고 단언하고

동지들을 각 학교에 파견하여 민족의식교육에 힘쓰도록 독려하고

공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학감으로 취임하여 민족의 각성을 축구하는 정신운동에 앞장섰다.

 

1909년 봄에 양기탁의 집에서 김구(金九) · 이동녕 · 주진수(朱鎭洙) · 안태국(安泰國) · 이승훈(李昇薰) 등과

비밀리에 신민회간부회의를 소집하고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로 합의하고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를 후보지로 결정하였다.

 

1910년에 나라가 망하자 6형제 전가족이 만주로 솔가 망명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에 교민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1912년에 독립군지도자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를 세웠는데 이것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전신이었다.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온 민족이 고무되었고

공도 오세창(吳世昌) · 한용운(韓龍雲) · 이상재(李商在) 등과 비밀리에 회동하고

고종의 국외망명을 계획하고 시종(侍從) 이교영(李喬永)을 통하여 고종에게 상주하여 고종의 재가를 얻었으나

얼마 후에 고종이 갑자기 승하하시니 모든 계획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

 

1919년 2월에 북경의 공의 자택에서 공과 이시영 · 이동녕 · 조성환 · 이광(李光)과 함께 회동하고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한 다음 국내외에 이 소식을 알리기로 하였다.

 

3·1운동 직후 본국에서 민족대표로 파견된 여운형(呂運亨) · 현순(玄楯)과

북경에 있던 이시영 · 이동녕 · 조성환·이광 등과 함께 상해로 내려가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참여했으나

동지들끼리 의견차이로 싸우는 것을 보고 북경으로 돌아와서 항일투쟁을 계속하고,

1924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만주와 중국에 있던 동지들이 상해로 집결하여 조직한

 <항일구국연맹(抗日救國聯盟)>의 의장에 추대된다.

 

1932년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항일구국연맹은 3대 강령

(1) 일본군기관과 수송기관을 파괴할 것.

2) 일본의 요인 및 친일파를 숙청할 것.

3) 일본의 외교기관을 폭파할 것을 발표하고, 중국국민당을 찾아가서 자금과 무기의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그해 11월 만주에 연락 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공작망의 구축과 주만일본군사령관의 암살을 결행할 목적으로

대련(大連)으로 가는 기차에서 일본경찰에게 잡혀 잔혹한 고문 끝에 여순감옥에서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27세 이흘(李忔)

      


1568(선조 1)~1630(인조 8).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상중(尙中), 호는 설정(雪汀)·오계(梧溪).

 

158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91년(선조 2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학유가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주서로 왕비를 해주로 호송하였다.

 

1595년(선조 28) 승문원정자·박사 등을 거쳐 전적에 올랐다.

 

1597년(선조 30)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지평 ․ 문학을 거쳐 공조정랑이 되었다.

 

이해에 왜적이 재침하자 중국어에 능통한 관계로 명장(明將) 진우층(陳愚衷)과 함께

울산에서 왜적을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뒤에 전라도도사 겸 춘추관기주관을 거쳐 형조정랑이 되었다.

 

1606년(선조 39) 황해도도사를 거쳐 배천군수가 되었는데,

봄에 관곡(官穀)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10배로 받는 조적(糶糴)을 폐지하였다.

 

1614년(광해군 6) 장단부사가 되고 1621년(광해 13) 종부시정 · 1623년(인조 1) 지제교 ·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왕을 강화도에 호종하였다.

 

1629년 사은사가 되어 동지사 윤안국(尹安國)과 함께 배로 명나라에 가다가 풍랑을 만나

윤안국은 익사하고 공은 살아서 하표(賀表)와 변무주문(辨誣奏文)은 전달한 다음

그곳 옥하관(玉河館)에서 죽었다.

 

좌찬성에 추서되고 시호는 충장(忠章)이다. 저서로 ≪관주일록(觀周日錄)≫·≪오계문집(梧溪文集)≫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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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적(糶糴)- 풍년에 쌀을 사들였다가 흉년에 싸게 파는 제도에서 유래한 것인데,

가을에 싸게 사두었다가 봄에 비싸게 팔아 폭리(暴利)를 취하여 백성을 착취하는 폐습으로 전락하였음.

 

○ 충장공(忠章公) 휘 홀 - 국당공후 문정공파 

 

생몰(生沒)년은 1568년(선조 1년. 무진) ~ 1630년(인조 8년. 경오)이다.

 

자는 상중(尙中)이며 호는 설정(雪汀), 오계(梧溪)이고 시호는 충장(忠章)이다.

 

부사과(副司果) 천일(天一)의 아들이다.

 

158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91년(선조 2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하여 학유(學諭)가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 때는 가주서(假注書)로 왕비(王妃)를 해주(海州)에 호종(扈從)하였다.

 

1594년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었다.

 

1595년(선조 28) 승문원정자·박사 등을 거쳐 전적에 올랐다.

 

1597년(선조 30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그 뒤 지평(指平)·문학(文學)을 거치고

 

이해에 왜적이 재침하자 중국어에 능통한 관계로 명장(明將) 진우층(陳愚衷)과 함께

울산에서 왜적을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1606년(선조 39) 황해도도사를 거쳐 백천군수(白川郡守)가 되었는데,

봄에 관곡(官穀)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10배로 받는 조적(糶糴)을 폐지하였다.

 

공조·예조의 정랑(正郞)을 지냈고 이 뒤에 전라도도사 겸 춘추관기주관을 거쳐 형조정랑이 되었다.

 

1614년(광해군 6) 장단부사가 되고

 

1621년(광해 13) 종부시정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1623)후 지제교(知製敎)가 되고,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丁卯胡亂)때 강화(江華)로 왕을 호종했다.

 

1629년 사은사(謝恩使)로 동지사(冬至使) 윤안국(尹安國)과 함께

선편(船便)으로 명나라에 가다가 풍랑을 만나 윤안국은 익사하고

공은 홀로 살아 하표(賀表)와 변무주문(辯誣奏文)을 명나라에 전달한 다음

그곳 옥하관(玉河館)에서 병사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고 시호는 충장(忠章)이다.

 

저서로 ≪관주일록(觀周日錄)≫·≪오계문집(梧溪文集)≫이 전한다.


 

● 20세 이흥적(李興嫡-女없음) - 국당공후 제정공파


?~1465(세조 11).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자연(子衍). 음직(蔭職)으로 나가서 여러 관직을 거쳐 판선공 감사에 이르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란 당시에 의금부진무로 있을 때 수양대군의 지시로

김종서의 집으로 가서 김종서와 그의 아들을 죽였다.

 

이 공으로 정란공신 3등에 책정되고 첨지중추원사에 올랐다.

 

1454년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고 이듬해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양희(襄僖)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기타 인터넷에 ‘이흥상(李興商)’으로 올라있는데 이는 오류이다.

비문에는 ‘흥적(興嫡-女없음)’으로 되어 있어 ‘흥적’이 정확하다.


○ 20세 이흥적(李興嫡-女없음)


자 자연(子衍)

시호 양희(襄僖)

활동분야 문신/관료 / 조선전기


?∼1465(세조 11). 조선 초기의 문신.

 

*음직으로 행수(行首)에 보직, 여러 벼슬을 거쳐 판선공 감사(判繕工監事)에 이르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당시에 의금부 진무(義禁府鎭撫)로서 수양대군의 지시를 받고

김종서(金宗瑞)의 집에 가서, 김종서와 그 아들 승벽(承璧)을 찾아내어 목을 베었다.

 

이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에 책정되고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1454년에 계림군(鷄林君)에 봉하여졌고, 1455년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양희(襄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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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직(蔭職)- 음서(蔭敍)·문음(文蔭)·남행(南行)·백골남행(白骨南行)·음사(蔭仕)라고도 한다.

고려·조선 시대 부(父)나 조부(祖父)가 관직생활을 했거나 국가에 공훈을 세웠을 경우에

그 자손을 과거에 의하지 않고 특별히 서용하는 제도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관리들을 선발하는 제도로 과거제도가 있었으나,

일단 관인층을 형성한 자들은 그들의 지위를 자손대대로 계승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부분적으로나마 관직을 세습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였다.

《경국대전》의 이전(吏典) 〈음자제조(蔭子弟條)〉에 의하면 음직제수의 범위를 공신이나

2품 이상관의 자(子)·손(孫)·서(壻)·제(弟)·질(姪), 실직(實職) 3품관의 자손으로 제한하여,

실력에 의한 선발 시험인 과거의 비중을 높였다.

그러나 음서는 혈통을 중시하는 신분제사회의 속성을 띠면서,

실력을 중시하는 관료제사회의 속성을 대표하는 과거와 함께

조선 양반관료사회를 형성하는 하나의 축으로 기능하였다.

음서에 의해 선발된 관리들을 음관이라고 하는데,

원칙적으로 장자(長子)만이 받을 수 있었으나, 장자가 유고인 경우에는 장손이나 차자가 감등하여 음직을 받을 수 있었다.

음관을 제수 받는 연령은 만 18세 이상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15세를 전후하여 관직에 등용되었으며,

부와 조부의 정치적 배경에 따라 승진 속도에 차이를 보이기도 하였다.

음서제도는 혈통을 중시하는 문벌주의(門閥主義)가 여전히 명맥을 유지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음서제의 범위와 역할은 고려와 조선사회의 성격을 비교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 양희공(襄僖公) 흥적(興적)


생졸년은 ?∼1465(세조 11)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연(子衍)이다.

 

음직(蔭職-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혜택으로 얻는 벼슬. 음서蔭敍. 남행. 문공. 음관. 음사)으로

행수(行首-통솔자)에 보직되어 여러 벼슬을 거쳐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에 이르렀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당시에 의금부진무(義禁府鎭撫-사법기관으로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신문하는 관아-종2품)로서

수양대군의 지시를 받고 김종서(金宗瑞)의 집에 가서 김종서와 그 아들 승벽(承璧)을 찾아내어 목을 베었다.

 

이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에 책정되고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왕명의 출납·군정軍政·숙위 따위의 일을 맡아보던 관아. 정1품)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1454년에 계림군(鷄林君)에 봉하여졌고

 

1455년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양희(襄僖)이다.


○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수양대군은 모든 대신들을 소집하게 된다.

 

미리 한명회가 작성해놓은 "살생부"에 의해서 입궐하는 대신들을 제일문과 제2문에서 차례대로 죽였다.

 

그때 죽은 줄 알았던 북방의 호랑이 김종서가 의식을 잃었다가 다시 깨어났다는 소리를 듣고

이흥적(李興적)을 시켜 집에 가서 죽이고 오도록 하니 나서서 김종서를 죽이고 왔다.


○ 세조 2년 갑술(甲戌) 9월7일 의금부에 사육신 사건에 연좌된 가족을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심신(沈愼)의 아내 석정(石貞) · 딸 금정(金正) · 은정(銀正), 성승(成勝)의 아내 미치(未致)

계림군(계林君) 이흥적(李興적)에게 주고]


○ 추충 정난공신(推忠靖難功臣) 가선 대부(嘉善大夫)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계림군(계林君) 이흥적(李興적)에게 하교하기를,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고 임금으로서 공로를 갚는 것은 이것은 고금의 통한 의리요 국가의 정상한 법전이다.

 

네 할아비 이달충(李達衷)이 일찍이 우리 태조(太祖)를 비천(卑賤)한 가운데 알아서 자손을 부탁하였는데,

태조가 그 말을 생각하여 특별히 그 아들의 죄를 용서하였고,

네 아비 이유(李유)가 또한 태조(太祖)의 원종(原從)이 되어 공이 *철권(鐵券)에 있으니,

네 할아비와 아비의 아름다운 공적이 실로 선왕(先王)에게 많았다.

 

네게 이르러서는 세종대왕(世宗大王)을 잠저(潛邸)에서 섬기어 이때로부터 넉넉히 은권(恩眷)을 입어

두루 내외(內外)의 관직을 거쳐 가는 곳마다 성적이 좋아 지금에 이르렀다.

 

지난번에 간흉한 무리가 나를 어리다 하여 가만히 불궤를 도모하여 악역(惡逆)한 마음을 품어

종사가 위태로울 지경으로 화(禍)가 불측 하였다.

 

그러나 숙부의 다시없는 공에 힘입어 기미를 알아 전제(剪除)하고 화란을 감정(戡定) 하였는데,

네가 몸을 바쳐서 급난에 다달아, 분주하게 힘을 다하여 잠깐 사이에 왕실을 재조하게 하여 오늘의 아름다움이 있게 하였다.

 

너는 가위 대대로 충정(忠貞)을 두텁게 하고, 왕가(王家)에 복사 근로한 자라고 하겠다.

 

훈공이 이와 같으니, 포상을 늦출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훈을 책정하여 3등을 삼고 그 부모와 아내에게 벼슬을 주고, 사유(赦宥)가 영원히 후대에 미치게 한다.

 

인하여 전지 1백 결·노비 7구·말 1필·백은 10냥·표리 1단을 준다.

 

이르거든 영수하라.

 

아아! 너는 나의 지극한 회포를 생각하여 평소의 절개를 더욱 굳게 하고,

네 선인의 뜻을 떨어뜨리지 말아서 길이 영예를 누리라.]

 

 

● 21세 이희(李日+喜) - 익재공후 청호공파 파시조


청호공의 諱(휘-죽은 어른의 이름)는 희(日+喜, 자(字-장가든 뒤 본이름 대신 부르던 이름)이고

자는 명중(明仲)이며 호(號)는 청호(淸湖)이다.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 시호가 문충(文忠)이신 익재공(휘 제현齊賢)은 청호공의 4대조

곧 고조부(高祖父)이다.

 

증조부의 휘는 달존(達尊)이시고 호는 운와(雲窩)이시며 임해군(臨海君)에 추봉(追封) 되신 분이시다.

 

조부의 휘는 학림(學林)이시고 벼슬은 소부윤(小府尹-정4품)이시다.

 

아버지의 휘는 담(擔)이니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정3품)의 벼슬을 하셨고

어머니는 영양 남씨(英陽南氏)로 전서(典書) 약생(若生)의 따님이시다.

 

청호공은 태종(太宗) 갑신년(甲申年 1404년)에 출생(出生)하셨다.

 

할아버님은 본래 학문을 좋아하고 예문을 익히며 성효(誠孝-정성스러운 효도)에 극진했다.

 

일찍이 계묘년(癸卯年)에 생원(生員), 진사(進士) 두 시험에 합격하였고

정미년(丁未年)에 남대(南臺-사헌부)에 추천되어 지평(持平-사헌부에 소속된 정5품관)을 제수 받고

장령(掌令-사헌부에 속한 종4품)과 집의(執義-사헌부에 속함 종3품)를 지냈다.

 

풍모와 기품이 의연하고 바르게 글을 써서 올리고 곧게 말하여 휘지 않으니 권세를 누리고 지위가 높았다.

 

남원(南原)과 광주(廣州)로 죄인을 잡으러 갔으며 후에 추조(秋曹-형조)에서 두 번이나 일을 하였고

좌우승지(左右承旨-정3품 당상관)와 이조참의(吏曹 議-정3품)의 *은대(銀臺)로 옮겨 당상(堂上)에 올랐다.

 

세상 사람들이 성품이 강직하니까 대각지풍(壹閣之風: 壹閣- 司憲府사헌부 사간원을 가리킴)이 있다고 일컬었다.

 

이조참의 홍문관 부제학(吏曹慘議 弘文館 副提學-정3품)을 지내고

특별히 외직(外職)으로 경상도 관찰사 겸 출척사(慶尙道觀察使兼黜陟使-종2품)를 제수 받아 순시하였다.

 

순시중 일의 처리가 탁월하다는 소문이 이어졌다.

 

안동(安東)에 다다라 순시 중 객관(客館)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45세이셨다.

 

뒤에 정헌대부(正憲大夫-정2품) 이조판서 지경연의금부사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5위 도총부 도총관 (吏曹判書知經筵義禁府事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정2품)에 증직 되었다.

 

공(公)이 일찍이 지은 한시(漢詩-唐詩) 구절(句節)이다.

 

花山芳草路 騎牛踏月中(화산방초로 기우답월중)

- 화산 향기로운 풀섶 길에 소를 타고 달밤을 거닌다.

可憐男子興 頭戴一枝紅(가련남자흥 두대일지홍)

- 가련한 남자의 흥취여! 먼저 일지홍이 떠오르는구나.

 

이 시의 '일지홍(一枝紅)'이 무엇인가를 두고 아무도 뜻을 깨닫지 못하였는데

임종(臨終)시에야 기생 이름이 일지홍이라 하였다고 한다.


* 일지홍 : 성천(成川- 평양근처)기생으로 한시(漢詩)를 잘 지었다.

전해오는 일지홍의 '이별' 시는 유명하다

당시 석북 신광수, 어사 심염조가 일지홍을 두고 지은 시도 전해온다.

 

후손이 공의 묘 아래에 재실을 지어 그 이름을 '노림(魯林)'이라 하였다.

유명(遺命)으로 안동부 남쪽 타락산 노림촌후(安東府南駝駱山魯林村後)에 장사를 지냈으니

지금의 안동군 남선면 현내동(安東郡南先面現內洞)이다.

 

^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죽산 안씨(竹山安氏)이니 판서(判書) 정경공(貞景公) 등(騰)의 따님으로

문형(文炯), 계반(繼潘), 문환(文煥), 문병(文炳) 네 아들과 10녀를 두었는데

그 중 장녀는 서원군(瑞原君-효녕대군의 子. 시호 이안夷安) 재(宰)에게 출가하였다.

 

정부인의 묘소는 아버지 정경공 묘하인 고양 원당리(高陽 元堂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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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대(銀臺)- 정3품에서 종6품의 벼슬아치들이 띠던 띠.

 


●  이희수(李喜秀)


1836(헌종 2)~1909(순종 3). 조선 말기의 서화가

 

자는 지삼(芝三), 호는 소남(少南) · 경지당(景止堂).

 

산수화·난초·대나무의 그림에 모두 능하였고 7세에 전(篆)·예(隸)·해(楷)·행(行)을 잘 썼으며

한 밤중에 어둠 속에서 글씨를 써도 자획이 어긋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이 알려지자 문하생들이 모여들었고 서화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찾아왔다고 한다.

 

성격이 단정하였으며 강하고 기이한 화풍을 즐겼다.

 

유작 가운데 남종화풍에 바탕한 것으로는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개인 소장)가 있는데,

제시(題詩)와 함께 독특한 인상을 주며 눈 덮인 강 언덕과 침엽수의 묘사가 거칠고 선명하여

그만이 가지고 있는 독보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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