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개 대파시조

대파- 교감공파 파시조 중조 19세 교감공(校勘公) 존사(存斯)

녹전 이이록 2009. 2. 17. 22:41

■ 대파 교감공파

 

 

● 파시조 중조 19세 교감공(校勘公) 존사(存斯)

 

 

부(父)는 승봉랑(承奉郞) 사재감승(司宰監承) 길상(吉祥)이고 모(母)는 온양 방씨(溫陽方氏) 판도판서 대제학겸 지춘추관사(判圖判書大提學兼知春秋館事) 서(曙)의 따님으로 공(公)은 네 형제 중 4남(四男)이다.

 

석탄공(石灘公- 휘 존오存吾)이 형이다.

 

교감공파 파조이다.

 

병진(丙辰. 1376. 우왕 2년)년에 정총방(鄭摠榜)에 등제(登第)하였다.

 

벼슬은 교감(校勘-경서 및 외교 문서를 조사하고 교정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 보문각 전교시에 속한 종9품 벼슬)이다.

 

배는 안동 김씨(安東金氏) 상락군(上洛君) 앙(昻)의 따님으로 두 아들인 위사공신(衛社功臣) 공조판서(工曹判書) 양(良)과 판윤(判尹) 원(垣) 그리고 1녀(李淪-仁川人에게 출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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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종보 총편에는 교감공(휘 존사)의 차자 판윤공 원(垣)의 휘가 없으나 판공파보에는 판윤공 원의 휘가 장자 양(良)의 다음에 올라있다.

 

이에 대하여 판윤공파보에 판서공(判書公) 양(良)과 판윤공(判尹公) 원(垣)에 대하여 고찰한 후 정오(正誤- 잘못된 글자나 문구를 바로잡음)하여 바르게 올린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구보(舊譜)를 삼가 상고(詳考)하여 보건대 공(公)의 (파보)아래 난에 바로 환(環), 연(璉), 원(垣)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제 시랑공파(侍郞公派-10세 춘림春林)를 고찰해 본다.

 

순묘(純廟) 무자보(戊子譜)에 가로되 종가(宗家)의 오래된 가승보(家乘譜)를 고찰하면 공(公)에게 아들 양(良)이 있고 양(良)의 아들에 환(環-한성부 참군)과 연(璉-봉사)이 있으되 원(垣)이 없다.

 

* 정임(丁任-정씨와 임씨) 양씨(兩氏)의 가장 성보(家藏姓譜-집에 간직한 족보)에도 역시 이와 같으므로 정오(正誤)하였다고 되어 있으니 * 구보(舊譜)에 한 대(一代)가 빠져 있음이 확실하므로 이에 파보(派譜)를 바르게 하니 따르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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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임(丁任) 양씨

- 누구인지 확인이 안됨.- 판서공(判書公) 양(良)의 아들 참군공 환과 봉사공 연의 처가 쪽 성씨인지

- 족보에는 기록이 없다.

* 정오(正誤)하였다.

- 이름이 빠진 판윤공 원(垣)은 판서공 양(良)의 아들이 아니고 동생으로 즉 교감공(校勘公-휘 존사)의 차자(次子)임으로 바르게 족보에 올린다는 내용이다.


* 구보(舊譜)에 한대(一代)가 빠져 - 1대는 1세로 여기서는 형인 양(良)이 있어 계대(系代)에는 빠짐이 없으나

차자(次子-둘째 아들)인 판윤공 원(垣)이 빠져 이를 바르게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같다

 

 

○ 예문춘추관 교감 휘 존사 사단비명(藝文春秋館校勘諱存斯祠壇碑銘)

 

공(公)은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시조(始祖)이며, 신라 건국 원훈(新羅建國元勳) 알평공(謁平公)의 후예로서

고려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휘 춘림(春林)의 9대손(九代孫)이요.

 

고려 감찰사(監察司) 중승(中丞) 휘 숙진(淑眞)의 현손(玄孫)이며, 감찰사(監察司) 규정(糾正) 휘 예(芮)의 증손(曾孫)이요.

 

감찰사(監察司) 장령(掌令) 휘 손보(孫寶)의 손(孫)이며, 고려 사재시 승(司宰寺丞) 휘 길상(吉祥)과 고려 판도사 판서(版圖司判書) 겸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 방서(方曙)의 여(女- 딸)인 온양 방씨(溫陽方氏)의 사이에서 4자(四子) 가운데 계자(季子- 막내)로 탄생하였다.

 

휘는 존사(存斯)요. 호는 초려(草廬)이고, 백형(伯兄)은 직장(直長) 휘 양오(養吾)이며, 중형(仲兄)은 증 성균관 대사성(贈成均館大司成) 석탄(石灘) 휘 존오(存吾)이고, 숙형(叔兄)은 진사(進士) 휘 존중(存中)이다.

 

공(公)은 천성이 온후하고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나, 환로(宦路-벼슬 길)에 뜻이 없더니 중형(仲兄)의 권유로

우왕(禑王) 2년에 문과(文科)에 나아가 *정총(鄭摠)과 같이 등제(登第)하여 예문 춘추관 교감(藝文春秋館校勘)으로 출사(出仕)하였다.

 

때에 백형(伯兄)이 흉적(凶賊)에게 해를 입고 이어서 중형(仲兄)이 요승(妖僧) 신돈(辛旽)을 소척(疏斥)한 일로 상(上-임금)의 진노(震怒)를 사서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고 후에 부여(손수변+夫餘)의 석탄(石灘)에서 은둔(隱遁)하다가 분사(憤死)하여, 장형(長兄)과 중형(仲兄)이 연이어 비명(悲鳴)에 가시니, 공(公)은 가문(家門)의 보전(保全)을 간청하는 유족들과 가솔(家率)의 뜻에 따라 치사(致仕- 벼슬을 사직함)를 아니치 못했으리라.

 

공(公)이 일찍이 상락군(上洛君) 김앙(金昻)의 녀(女)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를 맞아, 낳은 휘 량(良)이 태종조(太宗朝) 술사 공신(術社功臣) 자헌 대부(資憲大夫)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이르면서 잊혔던 길이 열렸음이니 어찌 가문(家門)의 경사(慶事)가 아니랴.

 

판서공(判書公)은 3증손(三曾孫)을 두었는데 장증손(長曾孫) 첨정(僉正) 휘 철동(哲仝)의 손 (孫) 휘 승증(承曾) 호 관란(觀欄木대신물수변)은 성리학자(性理學者)로 명선양조(明宣兩朝- 명종과 선조두 임금)에 6차(六次)의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였고, 임진왜란(壬辰倭亂)에는 78세의 노구(老軀)로 분연히 창의(倡義- 의병을 일으킴)하여, 1000여명의 군사를 이끈 의병장(義兵將)으로 왜적이 자인(慈仁- 경북 경산시)에 침입함으로 군사 박응성(朴應誠)에게 퇴로를 막게 하고 들이치니, 적의 시체가 십리에 깔렸었다.

 

공(公)이 85세로 세상을 떠나니, 조정에서는 정려(旌閭)를 내렸고, 사림(士林)은 지곡도연문호(智谷道淵汶湖)의 삼서원(三書院)에 배향(配享)하였다.

 

관란(觀瀾)의 5대손 휘 의립(義立) 호 구충당(求忠堂)은 효행으로 칭송되었는데 문득 임란(壬亂)의 패인(敗因)이 화포(火砲)에 있다고 깨닫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묘책은 유황(硫黃) 수철(水鐵) 비상(砒霜)의 삼보(三寶)를 비치함에 있다고 간파(看破)하고 26세부터 탐사에 나서, 채취(採取) 제조(製造) 납품(納品)까지의 무려 25년의 혈성(血性)을 여기에 바치니, 현종(玄宗)께서 그 공을 칭찬하고 숙천 도호부사(肅川都護府使)를 내렸으나, 제조에 전념하겠다고 하니 이를 윤허(允許)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가자(加資)하였는바 그 주손(胄孫)이 동형(東炯)이다.

 

중증손(仲曾孫) 참봉(參奉) 휘 석동(碩仝) 호 동오(東塢)의 6대손 휘 홍발(弘發)은 통훈대부(通訓大夫)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이르렀고, 그의 자(子) 휘 정달(廷達)은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었으며, 그 주손(胄孫)은 춘우(春雨)이다.

 

계증손(季曾孫) 진사(進士) 휘 말동(末仝). 호 도원(桃源)의 손 휘 습(火+習) 호 두곡(杜谷)은 학덕(學德)이 있어, 다섯 번을 불렀으나 사양했던 고매(高邁)한 징사(徵士)이다.

 

도원(桃源)의 9대손 휘 시일(時逸) 호 한와(閑窩)는 황해 도사(黃海都事)및 경상아사(慶尙亞使)였고

그 주손(胄孫)이 재활(在活)이다.

 

려말(麗末)은 난신적자(亂臣賊子)가 국정(國政)을 천단(擅斷)하던 말세(末世)라 1품계의 승진에 백미 7석을 늑징(勒徵)했으니, 공(公)처럼 청고(淸高)한 절사(節士)가 어찌 그러한 분류에 몸을 더럽히겠는가.

 

역경을 간괘(艮卦)에 머물고 때가 되면 머물고, 나갈 때가 되면 나간다.

 

움직이고 머물음에 그 때를 잃지 않으니 그 도의 빛나고 밝음 인저라 하지 않았던가.

 

부질없이 관작(官爵)만 높이어 비정(秘政)을 돕고 불의에 부종(附從)하여 나라를 망치고, 후손을 욕되게 한 자들이 하나둘인가.

 

공(公)같이 명리를 여의고 군자의 길을 간 표일(飄逸)한 선비가 있다는 것이 어찌 우리 경주 이문(慶州李門)만의 자랑이랴.

 

그러나 어찌할거나 오랜 창상지변(滄桑之變)에 공(公)의 묘소(墓所)가 망실(亡失)되어 후손들이 망극지통(罔極之痛)을 이기지 못하더니,

 

덕우(德雨) 명예회장과 종부(鍾溥) 회장의 발의에 따른 후손의 헌성(獻誠)으로, 경주 선도산(慶州仙桃山) 자락 뚜렷한 명당에 사단(祠壇)을 모시고 사단비(祠壇碑)를 세우기로 의합(議合)하였으니 비명(碑銘)을 구해 달라는 종순 회장의 청에 쫓아, 숭조 보본(崇祖報本)의 단성(丹誠)으로 엮은 상윤(相潤) 종친의 교감공 유사(校勘公遺事)를 상고(詳考)하여, 천학비재(淺學菲才)를 무릅쓰고 감히 이 글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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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총(鄭摠)과 같이 등제(登第)

- 대종보에는 [偶(人변대신示丙辰鄭摠榜登第校勘(우병진정총방등제교감)- 우왕 병진년 정총방에 급제하여 교감 벼슬]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교감공(휘 존사)이 정총(鄭摠)이 시험 감독관으로 급제자를 뽑을 때 급제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선 정총과 같이 급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우왕(禑王) 병진년(丙辰年)- 1376년. 우왕 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