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파 석탄공파
● 파시조 중조 19세 석탄공(石灘公) 존오(存吾)
○ 족보에 기록된 석탄공
[자는 순경(順卿) 호는 석탄(石灘) 충혜왕 신사(辛巳. 1341)에 출생.
어렸을 때에 여주(驪州) 고산(孤山)에 우거(寓居)하여 대대로 살았다.
일찍이 부모를 여이고 학문에 힘썼으며 강개(慷慨)한 지절(之節)이 있었다.
10살 적에 강물이 창일(漲溢)함을 읊은 글에 이르되 '큰 들이 다 물에 잠겼었네. 고산(孤山)은 홀로 항복하지 않았다.' 하니 식자(識者)들이 달리 여기더라.
20세인 공민왕 9년 경자(更子. 1360)에 국자 진사(國子進士)로 문과에 올라 사한(史翰)에 선보(選補- 선발되어 보임됨)되고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등 제현(諸賢)으로 더불어 도의에 벗이 되다.
25세인 병오(丙午. 1366)에 우정언(右正言)이 되어 정추(鄭樞)와 신돈(辛旽)을 소척(疏斥)하다가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니 장사(長沙)는 지금 무장현(茂長縣)이라 부여(手변+夫餘)의 석탄(石灘)에 돌아와 분함과 근심으로 병을 이르니 말하여 가로되
'신돈이 망해야 내가 이에 망하리라.' 하더니 드디어 공민왕 신해(辛亥. 1371)에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31세이라.
공(公)이 졸(卒)한 후 석 달에 신돈이 과연 해임을 당했다.
왕이 그 충절을 생각하사 판삼사 대사성(判三司大司成)을 증직(贈職)하니 이 사실이 고려사(高麗史)와 삼강 행실(三綱行實)에 실렸다.
충절이 숙묘조(肅廟朝) 어찬(御撰)에 까지 나타났고 문집이 있어 세상에 행하다.
묘는 개성 고동문(開城古東門)밖 십리 되는 곳인 장단(長湍) 땅 대덕산(大德山) 남약사원(南藥師院) 북쪽에 자좌(子坐)이며 무장(茂長)의 충현(忠賢)과 부여의 의열(義烈)과 공주(公州)의 공암(孔巖)과 여주(驪州)의 고산(孤山) 등 여러 원(院)에 배향(配享)하고 정문(旌門)을 부여로부터 과천 암산동(果川巖山洞)에 이전하였다.
배는 여흥 민씨(驪興閔氏) 판도판서(版圖判書) 선(璿)의 녀(女)요.
대제학(大提學) 상정(祥正)의 손(孫)이고 대제학(大提學) 지(漬) 증손(曾孫)이며 찬리(贊理) 양경공(良敬公) 전주(全州) 최문도(崔文度)의 외손(外孫)이다.
묘는 개성 남문(開城南門)밖 십리허의 호현(虎峴) 북쪽에 있다.]
○ 이존오
1341(충혜왕 복위 2)~1371(공민왕 20)
석탄공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힘써 10여세에 12도(徒)에서 공부하고 20세에 문과에 급제, 사한(史翰)으로 있을 때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이숭인(李崇仁) 등과 학문을 토론했으며 정언에 이르렀을 때에 신돈(辛旽)이 집권하여 횡포를 일삼는데 누구도 감히 나서서 신돈의 방자와 음탕을 나무라지 못하였다.
때에 공이 분연히 나서서 왕에게 글을 올려 신돈을 처죽여야 한다고 탄핵의 글을 올렸다가 도리어 왕의 노여움을 사서 매우 위급했었는데 이색(李穡) 등의 힘으로 극형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고 후에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율분으로 죽었다.
뒤에 왕이 공의 충성을 깨닫고 성균관대사성을 추증했다.
* 아래 글은 같은 내용의 글이나 하나는 '고려사 절요'의 제28권 역문이고 하나는 동문선 제52권 주의(奏議) 논 신돈 소(論辛旽疏)의 역문 입니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28권 공민왕 3(恭愍王三) 병오 15년(1366), 원 지정 26년
○ 좌사의 정추(鄭樞)와 우정언 이존오(李存吾)가 소를 올렸다.
"신등이 삼가 보옵건대, 3월 13일에 대궐 안에서 문수회(文殊會)를 베풀 때를 당하여 영도첨의 신돈이 재신의 반열에 앉지 않고 감히 전하와 나란히 앉아 그 사이가 두서너 자도 되지 않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몹시 놀라서 민심이 흉흉합니다.
대체 예(禮)는 웃사람과 아랫사람을 분별하여 백성의 뜻을 정하는 것이니, 진실로 예가 없다면 무엇으로 왕과 신하의 기준을 삼으며, 무엇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기준을 삼으며, 무엇으로 나라와 집의 기준을 삼겠습니까?
성인이 예를 마련할 때에 상하의 구분을 엄하게 한 것은 깊은 생각으로 먼 장래를 염려한 것입니다.
가만히 보옵건대, 신돈이 왕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어서 국정을 제 마음대로 하고 왕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당초에 신돈에게 영도첨의 판감찰(領都僉議判監察)을 임명하시는 날에 법으로는 마땅히 조복을 입고 나아가 사은하여야 할 것인데도 반달 동안이나 나오지 않았으며, 후에 대궐 뜰에 나아가서도 무릎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고, 항상 말을 타고 홍문(紅門)에 드나들며, 전하와 호상에 나란히 기대고 있으며, 집에 있을 때에는 재상이 뜰 아래서 절하면 모두 앉아서 이를 받았사오니 최항(崔沆)ㆍ김인준(金仁俊)ㆍ임연(林衍)이라도 이와 같은 일은 없었습니다.
전일에는 그가 사문이었으니 마땅히 예법의 밖에 두어 무례를 책할 필요도 없었지마는, 지금은 재상이 되어 명분과 지위가 정해졌는데도 감히 예를 어기고 상도를 무너뜨림이 이와 같으니, 그 이유를 따진다면 반드시 사부(師傅)란 명칭을 핑계댈 것입니다.
그러나 유승단(兪升旦)은 고왕(高王 고종)의 사(師)요, 정가신(鄭可臣)은 덕릉(德陵)의 부(傅)이지만 신 등은 저 두 사람이 감히 이와 같이 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자겸(李資謙)은 인왕(仁王 인종)의 외조부이므로 인왕이 겸손하여 조부와 손자가 대하는 예로써 하였으나,
자겸이 공론을 두려워하여 감히 받지 못하였사오니 대개 왕과 신하의 분수가 본래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예는 임금과 신하가 생긴 후로 만고에 고쳐질 수 없사오니, 신돈과 전하께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신돈은 어떤 사람이기에 제가 감히 이렇게 높은 체합니까.
홍범(洪範)에 이르기를,
'임금이라야 은상을 줄 수 있으며, 임금이라야 형벌을 줄 수 있으며, 임금이라야 옥식(玉食)을 할 수 있다.
신하이면서도 은상을 주고 형벌을 주고 옥식을 한다면 반드시 집에 해롭고 나라에 흉할 것이며, 벼슬하는 사람들이 편벽하게 되고 백성들이 참람하고 분수에 어그러지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신하이면서도 임금의 권한을 참람하게 쓴다면 벼슬에 있는 자는 모두 그의 분수에 편안하지 아니하고 소민이 이에 따라 또한 그 본분에 어긋나게 됨을 이른 것입니다.
신돈이 은상을 주고 형벌을 주며, 전하와 대등한 예를 쓰니, 이는 나라에 두 왕이 있는 격입니다.
참람함이 극도에 달하고 교만이 버릇이 되면, 벼슬에 있는 자는 모두 그 분수에서 편안하지 아니하고 소민은 그 본분에 어긋나게 되니 두렵지 않습니까.
송 나라의 사마광(司馬光)이 말하기를,
'기강이 서지 않으면 간웅이 야심을 내게 된다.' 라고 하였으니, 그런즉 예는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관습은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반드시 이 사람(신돈)을 공경함으로써 백성에게 재앙이 없어질 것이라 여기신다면, 그 머리를 깎게 하고 옷을 승복으로 바꿔 입게 하고 관직을 파면하여 사원에 두고 공경할 것이오며, 반드시 이 사람을 씀으로써 국가가 편안해질 것이라 여기신다면 그 권한을 억제하고 상하의 예를 엄하게 하여 그를 부려야만 백성이 임금을 받드는 뜻이 전해지고 나라의 위난이 풀어질 것입니다.
더구나 전하께서는 신돈을 현인으로 여기시지만, 신돈이 권세를 잡은 후로는 음양이 제때를 어기어 겨울철인데도 뇌성이 울리고, 누런 안개가 사방에 자욱이 끼며 10일 동안이나 태양이 검고, 밤중에 붉은 요기(妖氣)가 끼며, 천구성(天狗星)이 땅에 떨어지고 나무에 상고대가 너무 심하게 끼며, 청명(淸明) 후에 우박이 내리고 차가운 바람이 불며, 천문(天文)이 자주 변괴가 있고, 산새와 들짐승이 대낮에 도성 안에서 날아가며 달아나고 있으니, 신돈에게 내리신 '도(道)를 논하고 음양을 고르게 다스린다'는 공신의 칭호가 과연 천지(天地)와 조종의 뜻에 부합하겠습니까.
신등은 직책이 간원에 있사온데, 애석하게도 전하께서 재상을 잘못 써서 장차 주위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세의 비난을 받을 것이기에 책임을 면하고자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말씀을 올렸으니, 삼가 재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 소가 올라가니, 왕이 크게 노하여 반도 보지 않고 갑자기 이를 불살라 버리라고 명하고, 정추 등을 불러서 면대하여 꾸짖었다.
이때 신돈이 왕과 호상에 마주 대하여 앉아 있으므로, 존오가 신돈을 쏘아보고 꾸짖기를,
“늙은 중이 어찌 이처럼 무례할 수 있느냐." 하니, 신돈이 저도 모르게 두려워하고 놀라 호상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왕이 더욱 노하여 정추 등을 순군옥에 가두고, 찬성사 이춘부(李春富), 밀직부사 김란(金蘭), 첨서밀직 이색(李檣), 동지밀직 김달상(金達祥)에게 이를 명하여 국문하게 하고, 측근의 신하에게 말하기를, “나는 존오의 성난 눈이 두렵다." 하였다.
처음에 존오가 소를 초하여 문하성에 나가서 소매 속에서 초고를 꺼내어 보이니, 여러 낭관들이 연명하기를 어렵게 여겼다.
존오는 정추와 인친(姻親)이 되므로, 정추에게 말하기를, “형은 마땅히 이와 같지 않을 것이오." 하니,
정추가 그 말을 따르므로 드디어 함께 소를 올렸다.
춘부 등이 정추에게 묻기를, “너를 꾀어 소를 올린 자가 누구냐." 하니, 답하기를, “우리 부자가 서로 이어 간대부(諫大夫)가 되어 나라의 은혜를 받았다.
이제 왕께서 정사를 위임하는 데 사람을 잘못 써서 사직을 위태롭게 하니 사람마다 분개하는 것을 보고,
언관의 직책에 있으면서 잠자코 있을 수 없다.
어찌 남이 꾀기를 기다려서 말하겠느냐.
더구나 신돈이 권력을 제 마음대로 부리니 길가는 사람들까지 두려워하여 눈짓으로 말하는데, 누가 시킬 것인가." 하였다.
존오에게 묻기를, “너는 아직 입에서 젖내가 나는 동자인데 어찌 능히 스스로 알겠느냐. 반드시 몰래 사주한 늙은 여우가 있을 것이니, 숨기지 말고 말하라." 하니,
답하기를, “국가에서 동자가 아는 것이 없다고 여기지 않고 언관에 두었으니, 감히 말을 하지 않아서 국가를 저버리겠느냐." 하였다.
이때 존오의 나이 25세였다.
신돈의 당이 이것을 기회로 자기들과 의견을 달리한 자를 다 제거하고자 하여, 명망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정추 등과 공모한 사람으로 끌어넣으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정추 등에게 말하기를, “만약 전 정당 원송수(元松壽)와 전 시중 경천흥(慶千興)이 사주했다고 하면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답하기를, “몸이 간관이 되어 국적(國賊)을 논핵하였을 뿐이니, 어찌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은 일이 있겠는가. 또 죽고 사는 것은 명이니, 어찌 남을 무함하여 화를 면하기를 구하겠느냐." 하였다.
우헌납 박진록(朴晋祿), 우사의(右司議) 임현(林顯)이 정추 등을 순군옥에 가서 보고, 진록이 장차 나오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사람 구실을 못하니 사람이 아니다." 하니, 임현이 몹시 놀라며 빨리 나오면서 말하기를,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였다.
마침내 정추를 폄출하여 동래 현령(東萊縣令)으로 삼고 존오를 폄출하여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삼았다.
정추 등이 옥에 갇혔을 적에 신돈의 당이 꼭 죽이고자 하니, 이색(李穡)이 춘부(春富)에게 말하기를,
“두 사람이 미치고 망녕되었으니 진실로 죄를 줄 만하다.
그러나 태조 이후로 5백 년 동안에 한 사람의 간관도 죽이지 않았는데, 이제 영공(令公 신돈)의 일로 인하여 간관을 죽인다면 나쁜 평판이 멀리 전파될 것이다.
더구나 소유(小儒)의 말이 대인(大人)에게 무엇이 손상되겠는가.
영공에게 아뢰어 그들을 죽이지 않느니만 못하다고 하라." 하였다.
춘부 등이 그렇게 여겨 정추 등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존오는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어려서 어버이를 여의고 학문에 힘썼으며, 강개하여 뜻과 절개가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울분이 쌓여 병이 되었다.
그 후 6년 만에 병이 위독하여 좌우 사람에게 부축하여 일으키게 하고 말하기를, “신돈의 세력이 아직도 치성한가." 하니 좌우 사람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도로 누우며 말하기를, “신돈이 죽어야만 내가 비로소 죽을 것이다." 하더니, 자리에 도로 누워 편안히 눕히기도 전에 죽었다.
존오가 죽은 지 4개월만에 신돈이 죽임을 당하였다.
왕이 그 충성을 생각하여 성균 대사성을 증직하였다.
아들 래(來)는 나이 10세였는데 왕이 손수, '간신(諫臣) 존오의 아들 안국(安國)'이라 써서 정방(政房)에 내려 장거직장(掌車直長)을 제수하였다.
안국(安國)은 래(來)의 어릴 때의 이름이다.
◆ 동문선 제52권 주의(奏議)
논 신돈 소(論辛旽疏) - 이존오(李存吾)
신 등이 삼가 보오니, 3월 18일 궁전 안에서 문수회(文殊會)가 열렸을 때에, 영 도첨의(領都僉議) 신돈(辛旽)이 재상의 반열에 앉아 있지 않고 감히 전하와 더불어 나란히 앉아 그 거리가 몇 자에 지나지 않으므로, 온 나라 사람이 놀라 뛰어 흉흉하지 않는 이가 없사오니, 대체 예(禮)란 상하의 계급을 구별하여 백성의 뜻을 안정시키는 것이온데, 진실로 예법이 없다면 무엇으로 군신이 되며, 무엇으로 부자가 되며, 무엇으로 국가를 다스리겠습니까.
성인이 예법을 마련하였음은 상하의 명분을 엄격하게 하여 그 꾀가 깊고 그 생각이 먼 것이었습니다.
적이 보옵건대 신돈은 임금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어 나라의 정사를 제멋대로 하여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으니, 애당초에 영 도첨의로서 감찰(監察)을 맡았을 제, 명령이 내리던 날에 예법으로서는 의당히 조복을 차리고 나아가 은혜를 사례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반월이 되어도 나오지 않더니, 급기야 궐정에 들어와서는 그 무릎을 조금도 굽이지 않은 채 늘 말을 타고 홍문(紅門)을 출입하여 전하와 함께 호상(胡床)을 웅거하였고, 그 집에 있을 때는 재상들은 그 뜨락 밑에서 절을 하였으나 모두 앉아서 접대하였으니, 이것은 비록 최항(崔沆)ㆍ김인준(金仁俊)ㆍ임연(林衍)의 소위로도 역시 이러한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앞서는 중인만큼 의당히 도외(度外)에 두어서 그 무례함을 책망할 것은 없었지마는, 이젠 재상이 되어 명분과 지위가 이미 정해졌으니, 감히 예법을 잃고 윤리를 허물기를 이와 같이 하겠습니까.
그 원유를 따진다면 반드시 사부(師傅)라는 이름을 의탁하겠지마는 유승단(兪升旦)은 고왕(高王)의 스승이요, 정가신(鄭可臣)은 덕릉(德陵)의 스승이었으나, 신 등은 그 두 사람이 감히 이런 일을 하였다는 말을 못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자겸(李資謙)은 인왕(仁王)의 외조부였으므로 인왕께서 겸양하여 조손의 예로써 서로 만나려 하였으나 공론이 두려워서 감히 하지 못하였으니, 대개 군신의 명분이란 본디부터 정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예법이란 군신이 생긴 이래로 만고를 지나도 바꾸어지지 못하는 것이니, 신돈과 전하께서 사사로이 고칠 바는 아니라 생각되옵니다.
신돈이 어떠한 사람이건대, 감히 스스로 높이기를 이와 같이 하겠습니까.
《홍범(洪範)》에 이르기를,
“오직 임금이라야 복을 짓고, 오직 임금이라야 위엄을 지으며, 오직 임금이라야 옥식(玉食)을 할 수 있는 것인데, 신하로서 복을 짓거나, 위엄을 짓거나, 옥식을 하는 자 있다면 반드시 그 집을 해치고 나라를 해쳐서 백성은 참람해질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신하로서 임금의 권력을 참람하여 쓴다면 모든 관원이 그 분수에 편안하지 않을뿐 아니라, 세민들 역시 이에 따라 분수에 넘는 일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돈은 능히 복을 지으며 위세를 짓고 또 전하와 더불어 한 자리에 앉았으니, 이는 나라에 두 임금이 있는 것입니다.
그 참람함이 극도에 달하여 교만이 습관으로 되었으므로, 백관들이 그 분수를 지키지 않고 세민이 분수에 넘는 일을 하게 되었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은 말하기를,
“기강이 서지 않아 간웅(奸雄)이 망칙한 마음을 품는다면 예법은 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습관은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으니, 만일 전하께서 반드시 이 사람을 공경하여서 만 백성에게 재해가 사라진다면 그의 머리를 깎고 그의 옷을 물들이고 그의 벼슬을 삭탈하여 사원(寺院)에다 두고서 공경할 것이요, 반드시 이 사람을 써야만 국가가 평안하겠다면 그 권력을 제재하여 상하의 예법을 엄하게 한 뒤에 부리게 되어야만 백성의 마음이 정해질 것이요, 나라의 어려움도 펴질 것입니다.
또 전하께서 신돈을 어진 이라 한다면 신돈이 일을 맡은 이래로 음양이 절후를 잃어서 겨울철에 우뢰가 일고 누른 안개가 사방을 메이는 듯 하여, 열흘이 넘도록 해가 검고 밤중에 붉은 기운이 돌고 천구성(天狗星)이 땅에 떨어졌으며, 나무의 고드름이 지나치게 심하고, 청명(淸明)이 지난 뒤에도 우박과 찬바람이 일어 하늘의 기후가 여러 차례 변하고, 산새와 들짐승이 백주에 성중으로 날아들어 달리니, 신돈에게 내린 논도섭리공신(論道燮理功臣)의 호가 과연 천지와 조종의 뜻에 합하는 것입니까.
신 등은 직책이 사간원(司諫院)에 있으므로, 전하를 돕는 이로 그 자격이 못되어 장차 사방에 웃음거리가 되며, 만세에 기롱의 대상이 될까 보아서 침묵을 지키고 말을 하지 않는다는 책망을 면하려 하옵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는지라, 대답하심이 있기를 삼가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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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奏議)
- 신하가 임금에게 바치는 하나의 문체(文體) 이름이다.
그 내용은 대체로 시사(時事)를 논하여 경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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